특집 / 아동학대법, 교사는 왜 불안한가
‘아동학대’라는 언어가 교육에 대한 성찰이 되려면
-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의 한계와 가능성
글
하영
초등 교사
어느샌가부터 주변에서 보호자가 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하여 학생이 반을 교체하게 되었다거나, 아동학대 신고로 인해 교사가 병 휴직을 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소식을 함께 들은 이들은 대체 무슨 일로 아동학대 신고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하기도 했고, 신고가 무서워서 뭘 하겠냐며 탄식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씁쓸해하면서도 놀란 마음을 쓸어내렸다. 전에 학생에게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때가 있었음에도 신고나 민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성찰했다. 누군가는 학생인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학교가 변화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교권이 침해된다며 왜 ‘교육적 행위’조차도 아동학대가 되는지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요새는 학생도, 보호자도 ‘예민’해져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학교를 탓한다는 이야기와 이제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평가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상반되기도, 겹쳐 보이기도 하는 주변의 이야기들 속에서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현재 아동학대 신고는 사법적인 시스템과 아동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아동학대로 신고되는 일들은 모두 아동학대로 불릴 수 있을까? 아동학대 신고 절차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반대로 아동학대 신고가 가져온 변화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동학대 신고는 왜 학교 현장에서 교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다루어질까? 전교조에서 2022년 실시했던 〈아동학대 사안 처리과정 실태조사 결과〉(〈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질문들을 하나씩 짚어 보고자 한다.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이 포괄할 수 있는 것
〈실태조사〉에 나오는 아동학대 신고의 내용은 성 학대(17.6%), 수업 배제(16%)에서부터 정서 학대(61%)까지 다양하다. 신고당한 이유 중에는 ‘받아쓰기 진행으로 초등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졌다’, ‘급식 지도 시 먹기 싫어하는 것도 먹도록 초등 아이를 지도했다’, ‘손들지 않은 아이에게 발표를 시켰다’와 같은 사안이 있다. 〈실태조사〉에서는 이러한 민원 사례들이 “학부모와 학생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며, “‘교사 협박’ 수단”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교사의 수업 및 생활 지도 전반”이 모두 아동학대가 될 수 있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거된 사례들은 모두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악의적인 신고라고 할 수 있나? 반대로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아동학대’라는 용어 안에 묶여 설명될 수 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문장만으로 아동학대의 유무를 판가름할 수는 없다. 그것만으로 학급의 실정을 제대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육적 의도’였다고 한들 교사의 행동이 모든 학생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발표하기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발표하지 않는 이유가 답이 틀릴까 봐 무서워서인 경우도 있지만, 발표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거부의 의미로 침묵을 선택하는 때도 있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발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자신감을 주는 것이 좋겠지만, 또 다른 학생들에게는 학급 환경에 편안함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기억도 그렇다. 담임 선생님은 개학식 날 돌아가며 방학 때 했던 일을 짧게 발표하게 했다. 학급 친구 중 한 명이 나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선생님은 그 학생이 말을 할 때까지 교실 앞에 서 있게 했다. 나는 그날 내 친구가 몇 분이고 당황한 눈으로 서 있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친구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앉아 있던 다른 학생들은 무서운 그 몇 분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때의 조치가 교육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폭력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받아쓰기도 마찬가지다. 〈실태조사〉를 보도한 언론 기사들은 “받아쓰기가 아동학대?”, “발표시키기가 왜? 억울하게 아동학대 신고”와 같은 제목으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 받아쓰기가 아동학대가 될 가능성은 없을까? 나도 종종 학생들과 받아쓰기를 한다. 받아쓰기를 하다 보면 학생들은 ‘와, 이거 내가 그동안 잘못 쓰고 있었던 거야?’ 하면서 자신의 습관을 점검하기도 하고 서로 퀴즈를 내면서 어휘력의 성장을 스스로 발견하며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긍정적인 측면의 반대편에는 시험 스트레스가 있다. 학생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요소들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들의 느낌이 어린이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일방적인 “감정”에서만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에서도 평가에 대한 압박은 강하다. 결과와 성적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어린이들은 받아쓰기 결과를 성공과 실패의 또 다른 지표로 받아들인다. 어떤 어린이들은 가정에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또 어떤 어린이들은 틀렸음을 확인하는 것에 좌절한다. 어린이들에게 받아쓰기 상황은 다양한 이유로 폭력적일 수 있다. 만약 받아쓰기 결과로 방과 후 보충 학습을 강제하거나 학생 간 비교를 한다면, 받아쓰기는 분명히 아동학대일 것이다.
‘받아쓰기를 해서’, ‘발표를 강제로 시켜서’와 같은 한 문장의 문구로는 교실에서의 상황, 아동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알 수 없다. 또, 맥락이 소거된 상태에서 아동학대를 판명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학교의 일상적인 ‘교육적 활동’들에 내재한 폭력의 경계를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권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되는 학교 공간에는 아동학대가 발생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교사-학생 위계에서 교사는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방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가령 교사가 학생인권 증진을 위한 학내 캠페인을 기획하더라도, 학생들이 강제로 참여해야 한다면 이는 학생인권에 오히려 반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교사가 선택하는 교육적인 활동들은 늘 교육과 폭력의 애매한 경계선에서 줄타기한다.
신고를 둘러싼 갈등과 고민
정해진 상담 기간 이외에 보호자에게 전화가 걸려 오는 건 대부분 학생 간 갈등 때문이다. 학기 초에는 대부분 아동이 누군가와 싸우거나 다른 아이와의 관계로 인해 힘들어할 때 전화가 온다. 몇몇 보호자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애 아빠가 화났어요” 혹은 “이건 학교폭력으로 신고할 수도 있는 내용이에요”와 같은 말로 상황 설명을 시작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상위 기관이나 여전히 가부장으로 여겨지는 ‘아빠’라는 권력의 힘을 빌리겠다는 발언에 나는 막연히 두려워하곤 했다.
권위에 기댄 대화 방식은 교사들에게 혼란과 두려움을 안긴다. 이런 전화나 메시지를 받는 순간, 긴장감이 빠르게 차오른다. 특히 나는 말을 더듬거나 실수를 해서, 그것이 나의 어린 나이와 적은 경력을 배경으로 신규 교사의 비전문성으로 여겨질까 걱정하기도 했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들이 〈실태조사〉 응답자 92.9%로 하여금 ‘자신도 아동학대로 의심받아 신고를 당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게 했다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아동학대 신고 또한 그동안 여러 번 겪어 왔던 제도와 권위에 기댄 발화와 다를 바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자들이 날카롭게 권위에 기반한 발언을 시작하는 이유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겠다던 날카로운 태도도 갈등이 해결되고 나면 누그러지고는 한다. 한 학생의 보호자는 그동안 아이의 갈등이 잘 조정되거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예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칫 학생이 낙인찍히거나, 문제 해결에 실패하리라 짐작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보호자의 대부분이 학생의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위에 기대어 발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혐의 비율이 높은데도 보호자와 학생이 아동학대 신고라는 사법적인 제도를 선택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스쿨 미투 운동은 학내 성폭력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학생들의 성폭력 신고에 대해 교육청은 해당 학교들을 전수 조사했고, 그 결과 많은 교사가 교육청과 사법 기관의 기준에선 무혐의로 판단받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직접 소통하기보단 언론이나 SNS를 통해 교사들의 가해를 공론화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문제들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리라는 걱정과 불신 때문이었다. 학생의 문제 제기가 교사의 권위를 깎아내린다고 여겨져 왔으며, 학내 성폭력이 지속적으로 은폐되어 왔기에 그렇다. 학생들이 학교 문화 전반의 변화를 촉구했던 것과 달리 사법적인 시스템은 개별 교사의 처벌 여부에 중점을 두는 한계가 뚜렷했음에도 신고하는 절차를 선택한 이유다.
학생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을 통해 고발하는 것에는 스쿨 미투 고발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학교에서 교사에게 직접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정리된 언어로 문제를 설명하기보다는 울거나 화를 내거나 입을 닫아 버리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표출하는 경우가 잦다. 학생이 직접 공식적인 언어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대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담임 교사가 하루 중 대부분을 학생과 함께하기에, 한번 ‘대드는 학생’으로 낙인이 찍히면 학교생활이 더욱 곤란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호자가 아동을 대신하여 아동학대를 신고하는 것은 재발 방지를 요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일 수 있다. 한편, 그동안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학교가 폭력을 은폐해 왔던 관습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동학대 신고는 폭력을 묵인해 왔던 학교에서 공동체적 해결이 요원하리라는 불신에서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법화된 제도의 한계
학교폭력 사안 처리 시스템이 학교 안에서 사법화된 제도로 기능하듯이❶ 아동학대 사안 처리 시스템도 사법화되어 있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과 「아동복지법」 모두 학교폭력과 아동학대의 예방과 사안 처리를 위한 시스템이지만, 형사 처분의 여부만으로 결과가 결정되며, 교사가 행정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징계의 소지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법화된 문제 처리 방식은 형사적 접근을 강화할 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 사법화된 해결 방안은 학교 내에서 발생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해 학교 내에서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 학교의 공동체적 해결이 아닌 교육청이나 수사 기관을 중심으로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적 맥락을 고려하기 어렵고, 그 과정에서 관리자, 보호자, 학생, 교사 사이에서 또 다른 긴장을 조성한다.
아동학대 신고 및 사건 해결 과정의 또 다른 문제는 교사가 개인으로 고립된다는 점이다. 사건이 바로 수사 기관으로 넘어가며, 담임 교체나 출근 정지와 같은 분리 조치가 시행되는 등 매뉴얼에 따라 처리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실태조사〉에 언급된 것처럼, “학교 관리자나 시·도교육청이 제대로 된 아동학대 사안 처리가 아닌 종결만을 바라”거나 “책임 회피에 급급”하게 되는 결과에 이른다. 학교와 관리자는 사건을 수사 기관에 넘겼으니 소임을 다했다고 여기고, 넘어간 사건은 학교에서 더는 논의되지 않는다. 또 무죄로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아동학대 사건 처리의 책임이 교사 개인에게 있기에 학교 차원에서의 공론장 형성이나 문화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 교사가 겪을 수 있는 문제가 ‘교권 침해’라는 개념으로만 다루어진다는 문제점도 짚어야 한다. 사건의 기소 및 수사 과정에서 신고한 당사자에 의해 교사가 권위를 잃는다는 주장이 여전히 다수를 이룬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교사가 겪는 문제 해결의 어려움과 교사의 아동 인권 침해 여지는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법적인 시스템 속에 교사가 고립될 수는 있지만, 아동학대 사실을 고발한 당사자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신고를 교권 침해와 동일시하는 것은 오히려 사법적 해결 자체의 한계점을 간과하게 하고, 아동학대의 소지가 있는 행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불어 현재의 신고 및 수사 체계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폭력과 교육의 경계를 톺아보게 하기보다는, ‘무죄 입증’ 여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아동학대 신고 사안들은 일상적이고 세세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일어나기에, 명백히 법적으로 ‘폭력’으로 정의되지 않는 한 무죄 판결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학교의 위계적인 구조와 문화는 완전히 비폭력적이거나 무해할 수 없다. 학교는 인간과 인간이 끊임없이 소통하고 협상하며 관계 맺는 공간이기에, 권력 구조는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여 있다. 교사의 일상적인 실천이 어떻게 서로에게 가닿는지, 폭력과 교육의 경계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이 필요할지 성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에도, 현재의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은 이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전과는 다른 학교를 위하여
원론적으로 돌아가, 아동학대를 적극적으로 예방하는 학교의 모습이란, 상호 신뢰와 인권 존중을 바탕으로 한 아동 친화적인 공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 현장은 개별 교사의 노력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학교 내에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아동학대 사안 신고 이후 수사가 이루어지더라도, 학교의 문화를 모두가 같이 돌아보며, 아동 인권 침해적인 상황이 있었는지 함께 성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동안 관습적으로 해 왔던 교육적 활동들이나 ‘조치’로 여겨졌던 일들에 관해 학내에서 함께 대화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어떠한 사건이 접수되었을 때만 그에 대해 ‘예/아니오’로 판단하는 대신, 다양한 일상의 상황들을 터놓고 나눌 자리가 있다면 어떨까? 그동안 ‘교육’과 ‘훈육’의 이름으로 은폐됐던 일상적인 폭력이 ‘아동학대’로 명명될 때, 이전의 학교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❶ 이화여자대학교 산학협력단(젠더법학연구소)(2019), 〈학교폭력사건 처리절차 및 과정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특집 / 아동학대법, 교사는 왜 불안한가
‘아동학대’라는 언어가 교육에 대한 성찰이 되려면
-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의 한계와 가능성
글
하영
초등 교사
어느샌가부터 주변에서 보호자가 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하여 학생이 반을 교체하게 되었다거나, 아동학대 신고로 인해 교사가 병 휴직을 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소식을 함께 들은 이들은 대체 무슨 일로 아동학대 신고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하기도 했고, 신고가 무서워서 뭘 하겠냐며 탄식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씁쓸해하면서도 놀란 마음을 쓸어내렸다. 전에 학생에게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때가 있었음에도 신고나 민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성찰했다. 누군가는 학생인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학교가 변화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교권이 침해된다며 왜 ‘교육적 행위’조차도 아동학대가 되는지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요새는 학생도, 보호자도 ‘예민’해져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학교를 탓한다는 이야기와 이제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평가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상반되기도, 겹쳐 보이기도 하는 주변의 이야기들 속에서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현재 아동학대 신고는 사법적인 시스템과 아동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아동학대로 신고되는 일들은 모두 아동학대로 불릴 수 있을까? 아동학대 신고 절차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반대로 아동학대 신고가 가져온 변화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동학대 신고는 왜 학교 현장에서 교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다루어질까? 전교조에서 2022년 실시했던 〈아동학대 사안 처리과정 실태조사 결과〉(〈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질문들을 하나씩 짚어 보고자 한다.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이 포괄할 수 있는 것
〈실태조사〉에 나오는 아동학대 신고의 내용은 성 학대(17.6%), 수업 배제(16%)에서부터 정서 학대(61%)까지 다양하다. 신고당한 이유 중에는 ‘받아쓰기 진행으로 초등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졌다’, ‘급식 지도 시 먹기 싫어하는 것도 먹도록 초등 아이를 지도했다’, ‘손들지 않은 아이에게 발표를 시켰다’와 같은 사안이 있다. 〈실태조사〉에서는 이러한 민원 사례들이 “학부모와 학생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며, “‘교사 협박’ 수단”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교사의 수업 및 생활 지도 전반”이 모두 아동학대가 될 수 있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거된 사례들은 모두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악의적인 신고라고 할 수 있나? 반대로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아동학대’라는 용어 안에 묶여 설명될 수 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문장만으로 아동학대의 유무를 판가름할 수는 없다. 그것만으로 학급의 실정을 제대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육적 의도’였다고 한들 교사의 행동이 모든 학생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발표하기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발표하지 않는 이유가 답이 틀릴까 봐 무서워서인 경우도 있지만, 발표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거부의 의미로 침묵을 선택하는 때도 있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발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자신감을 주는 것이 좋겠지만, 또 다른 학생들에게는 학급 환경에 편안함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기억도 그렇다. 담임 선생님은 개학식 날 돌아가며 방학 때 했던 일을 짧게 발표하게 했다. 학급 친구 중 한 명이 나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선생님은 그 학생이 말을 할 때까지 교실 앞에 서 있게 했다. 나는 그날 내 친구가 몇 분이고 당황한 눈으로 서 있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친구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앉아 있던 다른 학생들은 무서운 그 몇 분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때의 조치가 교육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폭력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받아쓰기도 마찬가지다. 〈실태조사〉를 보도한 언론 기사들은 “받아쓰기가 아동학대?”, “발표시키기가 왜? 억울하게 아동학대 신고”와 같은 제목으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 받아쓰기가 아동학대가 될 가능성은 없을까? 나도 종종 학생들과 받아쓰기를 한다. 받아쓰기를 하다 보면 학생들은 ‘와, 이거 내가 그동안 잘못 쓰고 있었던 거야?’ 하면서 자신의 습관을 점검하기도 하고 서로 퀴즈를 내면서 어휘력의 성장을 스스로 발견하며 뿌듯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긍정적인 측면의 반대편에는 시험 스트레스가 있다. 학생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요소들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들의 느낌이 어린이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일방적인 “감정”에서만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에서도 평가에 대한 압박은 강하다. 결과와 성적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어린이들은 받아쓰기 결과를 성공과 실패의 또 다른 지표로 받아들인다. 어떤 어린이들은 가정에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또 어떤 어린이들은 틀렸음을 확인하는 것에 좌절한다. 어린이들에게 받아쓰기 상황은 다양한 이유로 폭력적일 수 있다. 만약 받아쓰기 결과로 방과 후 보충 학습을 강제하거나 학생 간 비교를 한다면, 받아쓰기는 분명히 아동학대일 것이다.
‘받아쓰기를 해서’, ‘발표를 강제로 시켜서’와 같은 한 문장의 문구로는 교실에서의 상황, 아동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알 수 없다. 또, 맥락이 소거된 상태에서 아동학대를 판명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학교의 일상적인 ‘교육적 활동’들에 내재한 폭력의 경계를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권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되는 학교 공간에는 아동학대가 발생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교사-학생 위계에서 교사는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방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가령 교사가 학생인권 증진을 위한 학내 캠페인을 기획하더라도, 학생들이 강제로 참여해야 한다면 이는 학생인권에 오히려 반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교사가 선택하는 교육적인 활동들은 늘 교육과 폭력의 애매한 경계선에서 줄타기한다.
신고를 둘러싼 갈등과 고민
정해진 상담 기간 이외에 보호자에게 전화가 걸려 오는 건 대부분 학생 간 갈등 때문이다. 학기 초에는 대부분 아동이 누군가와 싸우거나 다른 아이와의 관계로 인해 힘들어할 때 전화가 온다. 몇몇 보호자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애 아빠가 화났어요” 혹은 “이건 학교폭력으로 신고할 수도 있는 내용이에요”와 같은 말로 상황 설명을 시작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상위 기관이나 여전히 가부장으로 여겨지는 ‘아빠’라는 권력의 힘을 빌리겠다는 발언에 나는 막연히 두려워하곤 했다.
권위에 기댄 대화 방식은 교사들에게 혼란과 두려움을 안긴다. 이런 전화나 메시지를 받는 순간, 긴장감이 빠르게 차오른다. 특히 나는 말을 더듬거나 실수를 해서, 그것이 나의 어린 나이와 적은 경력을 배경으로 신규 교사의 비전문성으로 여겨질까 걱정하기도 했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들이 〈실태조사〉 응답자 92.9%로 하여금 ‘자신도 아동학대로 의심받아 신고를 당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게 했다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아동학대 신고 또한 그동안 여러 번 겪어 왔던 제도와 권위에 기댄 발화와 다를 바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자들이 날카롭게 권위에 기반한 발언을 시작하는 이유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겠다던 날카로운 태도도 갈등이 해결되고 나면 누그러지고는 한다. 한 학생의 보호자는 그동안 아이의 갈등이 잘 조정되거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예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칫 학생이 낙인찍히거나, 문제 해결에 실패하리라 짐작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보호자의 대부분이 학생의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위에 기대어 발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혐의 비율이 높은데도 보호자와 학생이 아동학대 신고라는 사법적인 제도를 선택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스쿨 미투 운동은 학내 성폭력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학생들의 성폭력 신고에 대해 교육청은 해당 학교들을 전수 조사했고, 그 결과 많은 교사가 교육청과 사법 기관의 기준에선 무혐의로 판단받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직접 소통하기보단 언론이나 SNS를 통해 교사들의 가해를 공론화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문제들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리라는 걱정과 불신 때문이었다. 학생의 문제 제기가 교사의 권위를 깎아내린다고 여겨져 왔으며, 학내 성폭력이 지속적으로 은폐되어 왔기에 그렇다. 학생들이 학교 문화 전반의 변화를 촉구했던 것과 달리 사법적인 시스템은 개별 교사의 처벌 여부에 중점을 두는 한계가 뚜렷했음에도 신고하는 절차를 선택한 이유다.
학생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을 통해 고발하는 것에는 스쿨 미투 고발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학교에서 교사에게 직접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정리된 언어로 문제를 설명하기보다는 울거나 화를 내거나 입을 닫아 버리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표출하는 경우가 잦다. 학생이 직접 공식적인 언어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대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담임 교사가 하루 중 대부분을 학생과 함께하기에, 한번 ‘대드는 학생’으로 낙인이 찍히면 학교생활이 더욱 곤란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호자가 아동을 대신하여 아동학대를 신고하는 것은 재발 방지를 요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일 수 있다. 한편, 그동안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학교가 폭력을 은폐해 왔던 관습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동학대 신고는 폭력을 묵인해 왔던 학교에서 공동체적 해결이 요원하리라는 불신에서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법화된 제도의 한계
학교폭력 사안 처리 시스템이 학교 안에서 사법화된 제도로 기능하듯이❶ 아동학대 사안 처리 시스템도 사법화되어 있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과 「아동복지법」 모두 학교폭력과 아동학대의 예방과 사안 처리를 위한 시스템이지만, 형사 처분의 여부만으로 결과가 결정되며, 교사가 행정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징계의 소지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법화된 문제 처리 방식은 형사적 접근을 강화할 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 사법화된 해결 방안은 학교 내에서 발생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해 학교 내에서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 학교의 공동체적 해결이 아닌 교육청이나 수사 기관을 중심으로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적 맥락을 고려하기 어렵고, 그 과정에서 관리자, 보호자, 학생, 교사 사이에서 또 다른 긴장을 조성한다.
아동학대 신고 및 사건 해결 과정의 또 다른 문제는 교사가 개인으로 고립된다는 점이다. 사건이 바로 수사 기관으로 넘어가며, 담임 교체나 출근 정지와 같은 분리 조치가 시행되는 등 매뉴얼에 따라 처리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실태조사〉에 언급된 것처럼, “학교 관리자나 시·도교육청이 제대로 된 아동학대 사안 처리가 아닌 종결만을 바라”거나 “책임 회피에 급급”하게 되는 결과에 이른다. 학교와 관리자는 사건을 수사 기관에 넘겼으니 소임을 다했다고 여기고, 넘어간 사건은 학교에서 더는 논의되지 않는다. 또 무죄로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아동학대 사건 처리의 책임이 교사 개인에게 있기에 학교 차원에서의 공론장 형성이나 문화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 교사가 겪을 수 있는 문제가 ‘교권 침해’라는 개념으로만 다루어진다는 문제점도 짚어야 한다. 사건의 기소 및 수사 과정에서 신고한 당사자에 의해 교사가 권위를 잃는다는 주장이 여전히 다수를 이룬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교사가 겪는 문제 해결의 어려움과 교사의 아동 인권 침해 여지는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법적인 시스템 속에 교사가 고립될 수는 있지만, 아동학대 사실을 고발한 당사자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신고를 교권 침해와 동일시하는 것은 오히려 사법적 해결 자체의 한계점을 간과하게 하고, 아동학대의 소지가 있는 행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불어 현재의 신고 및 수사 체계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폭력과 교육의 경계를 톺아보게 하기보다는, ‘무죄 입증’ 여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아동학대 신고 사안들은 일상적이고 세세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일어나기에, 명백히 법적으로 ‘폭력’으로 정의되지 않는 한 무죄 판결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학교의 위계적인 구조와 문화는 완전히 비폭력적이거나 무해할 수 없다. 학교는 인간과 인간이 끊임없이 소통하고 협상하며 관계 맺는 공간이기에, 권력 구조는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여 있다. 교사의 일상적인 실천이 어떻게 서로에게 가닿는지, 폭력과 교육의 경계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이 필요할지 성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에도, 현재의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은 이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전과는 다른 학교를 위하여
원론적으로 돌아가, 아동학대를 적극적으로 예방하는 학교의 모습이란, 상호 신뢰와 인권 존중을 바탕으로 한 아동 친화적인 공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 현장은 개별 교사의 노력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학교 내에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아동학대 사안 신고 이후 수사가 이루어지더라도, 학교의 문화를 모두가 같이 돌아보며, 아동 인권 침해적인 상황이 있었는지 함께 성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동안 관습적으로 해 왔던 교육적 활동들이나 ‘조치’로 여겨졌던 일들에 관해 학내에서 함께 대화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어떠한 사건이 접수되었을 때만 그에 대해 ‘예/아니오’로 판단하는 대신, 다양한 일상의 상황들을 터놓고 나눌 자리가 있다면 어떨까? 그동안 ‘교육’과 ‘훈육’의 이름으로 은폐됐던 일상적인 폭력이 ‘아동학대’로 명명될 때, 이전의 학교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❶ 이화여자대학교 산학협력단(젠더법학연구소)(2019), 〈학교폭력사건 처리절차 및 과정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