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호[기획] 우리는 왜 고장을 떠나가는가 - 시골 학교 교사 생존기 (장세린)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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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기획 / 변방에서 온 편지 - 전북 김제

 

우리는 왜 고장을 떠나가는가

- 시골 학교 교사 생존기

 


장세린

proud012@naver.com

전북 김제학력지원센터 파견 교사




도시 학교에서의 교육 경험

 

하나,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둘,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셋,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 ‘피리 부는 사나이’ 중에서


내가 처음 일했던 학교는 인천광역시, 그중에서도 학군지로 꼽히는 연수구의 ○○학교와 △△학교였다. 학군지의 (사)교육열이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나는 때때로 내가 초등학교 교사라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의 정석’을 풀고, 1년에도 몇 번씩 어학연수를 나가는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입시 레이스에 돌입한다면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시험 문제 한번 잘못 냈다가 학부모는 물론이고 근처 학원에서까지 민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정도였으니까.

그 당시 만났던 아이들은 딱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방구뽕’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방과 후에는 각종 학원 버스와 픽업하려는 부모 차로 학교 앞이 인산인해였다. 수업 시간마다 교과서 밑에 학원 숙제를 숨겨 놓고 푸는 학생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못 본 척 혼내지 않았는데, 안쓰러워서였다. ‘공부 그거 좀 못해도 된단다, 학교에서라도 좀 숨 쉬거라, 얘들아-’라는 것이 그때 나의 마음가짐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그게 공교육 현장 교사의 올바른 태도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근무 일수가 많아짐에 따라 조금씩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있었다. 학생들이 학원 숙제와 성적에 대한 압박에 짓눌리고, 부모들이 어마어마한 자본을 들이는 것치고는 영 내실이 없었던 것이다. 학기 초만 해도 각종 평가지를 채점할 때마다 행복해 죽던 담임 교사들이, 학기 중반에 접어들며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문제만 잘 풀어 낼 뿐 막상 수업에 들어가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아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각종 선행 학습을 통해 자신이 ‘이해’했다고 생각해 수업 진행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학생들의 자기 관리 능력이었다.

 

“자, 오늘의 숙제는 ○○에 대해 조사해 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바탕으로……”

“선생님! 그거 알림장에 써 주실 거죠? 그래야 울 엄마가 보고 챙겨요!”

 

내가 아는 알림장은 학생들이 직접 쓰고 집에 가서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 학교에서 알림장이란 선생님이 엄마한테 문자로 보내 주는 것이었다. 부모가 각종 스케줄이나 준비물, 과제를 다 관리하다 보니 부모(특히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쯤 되니 애들이 진짜로 똑똑한 건지도 영 헷갈릴 지경이었다.

수도권 학군지의 허와 실을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은, 학군지 그것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개중에서도 정말 천재 같은 아이들이 있었고, 상당수가 영재원-국제중이나 특목고를 거쳐 명문대라 불리는 것들에 진학하겠지마는, 그것과 삶을 잘 살아 내는 것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입시, 성적, 학벌 같은 것은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생각보다 그리 큰 것이 아니며, 행복한 나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전북으로 내려가 정식 발령을 받으면 어떤 교육을 할지에 대해서도 대강의 철학이 세워졌다. 어차피 전북은 대다수가 소규모 시골 학교라 대면하는 학생 수도 적을 테니, 과외 한다 생각하고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서 올려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충분히 해 볼 만하겠다는 요상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우리 애들이 좀 느리고 지금 당장 성적은 다소 뒤지더라도, 스스로 알림장을 보고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설계해 나가는 똘똘이로 키울 것이다. 그러면 수도권 애들 부러울 것 하나 없다.’ 나름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부푼 꿈을 안은 채 전라북도 김제시의 한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첫 발령 - 살아남아라, 작은 학교!

 

내가 발령을 받은 김제시는 특히나 작은 학교가 많은 곳이다. 예컨대 용지면에는 용지초, 용동초, 비룡초 3개의 학교가, 그 옆 백구면에는 부용초, 난산초, 치문초, 백구초 4개의 학교가 있다. 전라북도에서 학교 통폐합이 가장 적게 시행된 곳이 김제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이유로는 옛날부터 평야가 많고 풍요로워 지역 주민들의 애향심이 강해 학교 통폐합을 가장 거세게 반대했다는 분석부터, 예전 교육감의 고향이라 통폐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별 이야기가 다 떠돌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김제시는 유독 작은 학교가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는 그중 한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전교생이 채 4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였다. 한 반에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8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 당시 전라북도는 ‘어울림학교’라는 정책을 통해 작은 학교를 지켜 내고 있었다(이 제도는 현재도 시행 중이다). 어울림학교에 선정되면 전교생 숫자가 15명 이상만 되어도 폐교가 되지 않으며, 연간 1500만 원의 예산이 추가로 지원된다. 이 예산은 물품 구입을 제외하고(물품을 구입해 학교에 쌓아 두기만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작은 학교의 실정에 맞는 교육 활동에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공동 통학구’ 제도를 이용해 타 학구 학생들도 작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이 어울림학교 정책이 마치 ‘작은 학교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만 해도 전교생 중 반수 이상이 우리 학구 학생이 아니었으며, 특히 1학년 신입생의 경우 절대다수가 타 학구 학생들이었다. 내 눈에는 우리 학교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지만 선배 교사들은 딱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출생 문제가 너무 심각해요. 특히 전라북도는 학령 인구 감소가 훨씬 가파를 거예요.”

“그러게. 세린 쌤이 걱정이다. 우리까지야 어찌어찌 괜찮을 텐데.”

“한 5년 안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 같은데요? 우리 학교도 솔직히 다른 학구에서 애들 ‘영끌’해 오는 거잖아요. 선생님도 아직 40대밖에 안 되시니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에요.”

 

타 학구 학생들로 연명(?)하는 학교의 가장 큰 취약점은 바로 ‘전학’이다. 학생의 개인 정보가 노출될까 싶어 자세한 이야기는 쓸 수 없지만, 타 학구에서 학교를 보내는 학부모들의 경우 ‘전학 보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학교와 오해가 빚어지거나 갈등이 생기는 경우 해결하고 화해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학생을 본래 학구로 전학시켜 버리는 안타까운 상황도 몇 번 겪었다.

학교가 있어야 마을이 산다는 기치 아래 작은 학교를 유지하고 있는데, 정작 그 학교의 학생들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제시에서는 당장 올해부터 1학년 학급을 개설 못 하는 학교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울림학교 정책으로도 작은 학교들을 지켜 낼 수 없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학력 격차를 비롯한 각종 도농 격차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구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 주고파

-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중에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내가 생각했던 시골 학교의 이미지는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가사 같은 것이었다. 순수하고 착한 학생들이 등하굣길에 들꽃을 따다 주고, 나는 그런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쳐 성장시키는 그런 그림을 상상했다.

이상에 부풀어 있는 나에게 선배 교사들은 담임이 아닌 과학·미술 전담 교사 자리를 맡겼다. 우리 학교에서 신규는 담임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 끝에 내린 일종의 배려였다. 나는 수업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선배 교사들의 배려를 이해했다.

6학년 학생들과 함께 지구와 달의 운동 모형을 만들어야 하는데, 5.5cm를 이해하지 못해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소수의 개념과 길이감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5학년 학생이 수업 중 시도 때도 없이 시간을 물어보기에 일부러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시계를 보지 못하는 거였다(시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구구단 5단을 못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학년은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예컨대 ‘변방에서 온 편지’라는 문장이 있다면 ‘벼바에서 온 펴지’ 하는 식으로, 받침이 들어간 글자들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했다. 3학년은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든 학생들이 많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화적·환경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주파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초임 1년간 개별적으로 난해한 주파수들을 맞춰 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교대에서 배웠던 대로 학습자 수준에 맞춰 교과 내용을 최대한 재구성했다. 그리고 대부분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망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동물을 조사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각자 컴퓨터를 이용해 검색을 해 봅시다.”

“선생님~ 이거를 제 PPT에 입력할 수가 없어요!(기린 몸무게 뒤에 표시된 kg을 가리킨다.)”

“kg? 한영 전환 키 눌러서 영어로 바꿔 입력하면 되잖아. 일단 k부터 찾아보자.”

“그건 여기 있는데, 이걸 못 찾겠는데요?(g를 가리킨다.)”

“엉?(자판을 본다. 자판에는 대문자 G밖에 없다. 비로소 아이의 질문을 이해한다.)”

 

격차라는 게 참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어느 한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직면했던 문제는 단순히 학습 더딤뿐만이 아니었다. 발령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한 N학년 남학생과 나눴던 대화는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선생님, 선생님은 애기 몇 명 낳고 싶어요?”

“아기? 그건 선생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너는 몇 명 낳고 싶은데?”

“10명이요.”

“10명이나? 이야~ 너 되게 애국자다! 왜 10명 낳고 싶은데?”

“여자들이 아파야 하니까요.”

“뭐? 왜? 왜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들은 군대를 가잖아요.”

 

한창 페미니즘 리부트의 백래시로 안티 페미니즘이 급부상할 때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반올림 하면 열 살인 아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나는 그때 무언가가 아주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냐고 묻자, 아이는 유튜브에서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곧바로 성평등교육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사실 문제는 성평등교육도 아니고 우리 애들 인성이 나빠서도 아니다.

사실 아이의 여혐 자체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우리 애보다도 더 못난 생각을 가지고,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더 못된 소리를 하는 어른들도 정말 많았으니까. 내가 무서웠던 것은 여혐에서조차 어떤 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은 더 진흙탕일지언정 수도권 학군지의 아이들은 저 정도로 거친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윤리적인 의식 수준이 더 높아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표현하면 나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여성 혐오를 해도 어떤 이는 고급스럽게 잘 돌려 말해서 인기를 얻고 정치적인 세력까지 규합하는데, 우리 애의 여성 혐오는 뭐랄까, 똑같은 혐오자들 사이에서도 무시당할 것 같은 수준의 날것이었다. 이건 불공평해.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겨 먹어야 하는 것은, 사교육 수준은 높지만 알림장은 못 챙기는 학군지의 아이들이 아니라, 불평등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불평등과 맞서는 일종의 전투였다.

 


시골 학교 신규 교사의 ‘학업 집착기’

 

언젠가 만났던 사주쟁이가 내 사주를 보고 했던 말이 있다. 일복 하나는 타고나셨네요! 사주가 아깝지 않게, 내가 정보 업무를 처음으로 맡았던 그해에 코로나가 터졌다. 작은 시골 학교에 몇 안 되는, 그나마 신문물을 좀 다룰 줄 아는 젊은 교사라니. 온라인 등교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나는 매일매일 코피를 흘려 가며 일해야 했다.

코로나 시국에서 교육부의 일 처리나 각종 행정 업무, 원격 수업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다. 그 시절 안 힘들었던 교사가 어디 있었겠냐만은, 나는 컴퓨터 자판에는 G밖에 없어서 kg을 입력 못 하는 아이들과 함께 원격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알파벳부터 가물가물한 학생들에게 EBS 접속이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자, 우리 학교는 EBS 온라인 클래스를 쓸 거야. 패드를 켜고 바탕화면에 이것을 누른 다음에…… 이 부분을 검색창이라고 하거든? 거기에다가 EBS 한번 써 보자.”

“알파벳이 기억이 안 나요.”

“(정신이 혼미해짐) 아니야, 할 수 있어. 작년에 영어 배웠잖아. ABCDEFG~(〈알파벳송〉을 불러 준다.)”

“아!(E는 금방 찾는다. A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으니까.)”

“다음 B다 B. 더 쉬워.”

“(B는 한 번에 찾는다.)”

“다음 S만 찾으면……”

“(S를 모름)”

 

나쁜 사람들. 교육방송이라면서 방송국 이름을 영어로 지어 놓다니. 아이디, 비밀번호는 왜 또 영어로 해야 한단 말인가. 애꿎은 EBS를 욕하며 나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전면 등교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현장 등교가 시행되자마자 내가 시작했던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3~6학년을 모아 놓고 쪽지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알파벳과 기초 파닉스부터 시작해 각종 영단어들을 가르치고 시험을 보았다. 타 학년 담임 선생님들도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참해 주셨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를 다 맞힌 학생들에게는 작은 사탕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학생들에게 학습 부담을 주고, 못하는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고 비판하면 할 말은 없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에게 했던 것은 첨단 수업이 아니었다. 최대한 멀티미디어를 멀리하고 칠판을 이용한 판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는 지겹고 손이 아픈 노트 정리, 학습지 풀기, 글쓰기, 책 읽기를 시켰다. 틈나는 대로 쪽지 시험을 보았다. 시험 결과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나 경쟁 사회를 거부하고 학생의 특기 적성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는 여러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 중임을 안다. 나 역시 그 가치에는 매우 공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고, 명문대에 갈 필요도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부를(하고 싶은 공부뿐만 아니라, 국어·영어·수학 같은 전통적인 학과 공부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유튜브도, 인공 지능도, 코딩도, 요리도, 농사도, 결국 글을 읽고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과 수학적인 사고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 유배 왔죠?” 

 

전라북도는 현재 초등 사회 교과에서 ‘지역화 교재’를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김제시의 경우 3학년은 《우리 고장 김제》 교과서를 통해 김제시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4학년 때 《함께 사는 전라북도》 교과서로 전라북도의 역사와 지리를 배운다. 3학년 담임을 맡았던 나는 ‘우리 고장 김제’ 지역화 교육에 발맞춰 김제 지역 설화 ‘청상과부와 홀어미다리’를 주제로 연극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한 학기 동안 우리 고장 김제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전교생 앞에서 연극까지 실연했으니 애향심까진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무언가가 생겼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나눈 우리 반 학생과의 대화에 나는 그만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아마 큰 죄를 지었을 거예요!”

“엉? 왜?”

“죄를 짓지 않고서야 선생님같이 좋은 선생님이 이런 시골 깡촌에 처박혀 있을 리가 없어요! 아마 선생님은 전주 같은 데에서 큰 죄를 짓고 쫓겨나서 우리 학교로 왔을 거예요!”

 

아이는 분명 칭찬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은연중에 드러난 학생들의 생각에 매우 놀랐다.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을 이렇게 생각한다고? 죄 짓고 쫓겨난 사람이 오는 곳으로? 좋은 사람이 있을 리 없는 곳으로? 내가 한 학기 동안 ‘우리 고장 김제’를 이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직설적으로 말했을 뿐, 학부모들의 머릿속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중학교 때부터는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니까 전주로 보낸다는 말을 들을 때다. 어떤 학부모에게 시골 초등학교는 방과 후를 4시 반까지 무료로 해 주고 승마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을 시켜 주는 곳이고, 공부는 도시로 나가 하는 것인 것 같다. 이게 과연 건강한 구조라 할 수 있을까? 농촌 유학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 아이들이 잠깐 내려와 농촌의 삶을 체험하고 가는 것인데 이게 지방 소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찌 되었건 간에, 김제시는 이미 본격적인 생존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아마 1학년 학생들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학교가 살아남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생존 경쟁에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은 각 학교의 교장 선생님들일 것이다.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칠지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는, 학교 마케팅에 급급한 교장 선생님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수학여행이라던가 스키 캠프, 방과 후 승마 프로그램 등으로 학교를 홍보하고 학생과 학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연말에 교육과정 운영 만족도를 조사하면 방과 후 프로그램에 제2외국어나 승마를 넣어 달라는 응답이 꼭 나온다.) 마냥 비판하기도 어려운 것이 교장 선생님들에게는 지금 당장 학교를 살리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학급 수에 따라 교감, 보건 교사, 전담 교사 등의 교사 정원이 감소하고, 그러면 남아 있는 교사들의 업무가 과중해져 학교 운영은 더 힘들어진다.

한 어울림학교 정책, 마을학교공동체 등의 효과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그러한 움직임이라도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학년 학급을 개설 못 하는 학교가 속속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여태까지의 정책이 더 이상 큰 효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있는 학생들이라도 잘 가르치는 법을 연구해 보자는 생각으로 올해 개관한 김제교육지원청 산하의 학력지원센터에 파견을 지원했다. 교사로서 나 개인의 노력은 계속되겠지만,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대응을 논해야만 하는 시기이다. 그래야 변방이 중앙보다 후진 곳이 아니라 다른 빛으로 찬란한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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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