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이런 교사이지만 학교에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살다
- 시각장애와 함께한 교직의 빛과 그늘
글
김헌용
engccer@gmail.com
서울 신명중학교 교사,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안녕하세요! 저 재환이예요. 저번에 사 주신 음료수는 잘 마셨습니다. 저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어려움을 이겨 내는 선생님이 처음엔 신기했어요. 진짜로 너무 잘 걸으셔서 눈이 잘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선생님이 많은 노력을 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이 본받고 싶어졌어요. 그 이유는 선생님의 많은 노력이에요. 노력해서 안 될 게 없는데 노력 하나 안 해서 시험도 못 봤어요. 그래서 전 선생님의 노력을 본받고 싶은 거예요. 그럼 수고요~
-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재환 올림
교육 실습 중 학생으로부터 받은 쪽지다. 이 쪽지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걷는 모습을 보고 본받고 싶어졌다니. 영어를 잘 가르쳐 줘서도, 자상하게 대해 줘서도 아닌, 그저 걷는 모습만으로도 자신의 학업까지 돌아보게 되었다니. 명백히 희망적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지 않던가? 교사로서 이처럼 남는 장사도 없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교직을 준비하며 내 가슴을 짓누르던 부담감이 일순간 걷히는 기분이었다.
이방인이 되다
나는 여섯 살에 실명했다. 부모님은 내 눈을 고치기 위해 나를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다시 저 병원에서 이 병원으로 데리고 다녔지만, 결국 눈앞은 흐릿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부모님의 손을 붙잡고 병원에 다녔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라디오 종교 방송에 사연을 보내 치료비를 마련하셨고, 그 돈으로 나는 독일 쾰른대학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았다. 종국에는 안 보이게 될 눈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인지 10대까지 나는 돋보기 너머로 책이며, 휴대전화 문자 내용이며, 화면 속 축구 선수들의 사진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비록 일반학교 근처는 얼씬도 못 했지만, 내가 다녔던 맹학교에서는 나 정도의 잔존 시력이 있으면 ‘약시(당시 저시력을 가리키던 용어)’로 불렀다.
맹학교에서 보낸 12년 동안 크게 두 가지를 얻었다. 먼저, 대한민국에서 오로지 시각장애인만 발급받을 수 있는 국가 공인 안마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해부 생리, 한방, 실습 같은 과목으로 이루어진 2년에 걸친 의료 교육과정을 이수한 시각장애인에게만 주어지는 빛나는 자격증이었다. 또 얻은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사실 이것이 이 글의 주제와는 더 부합할 텐데, 바로 남들과 철저히 분리됐던 경험이 그것이다.
맹학교는 특수학교로 분류된다. 특수학교는 일정 부분 일반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통합교육 같은 개념을 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특수학교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특수할 수 있는 것이다. 생애 최초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던 때, 특수학교에서 보낸 12년은 나를 뼛속까지 이 사회의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나 임용 시험을 통과하고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첫날 나는 그것을 바로 깨달았다. 2010년 3월이었다. 그 후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오래도록 내 삶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첫 출근
재환이의 쪽지는 가히 신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교단에 선 후 나는 매우 열심히 걸었고,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사와 학부모들도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보면 볼수록 나는 더 우아하게 걸으려고 노력했고, 나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언론사 기자들도 수없이 다녀갔다. 실은 근무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카메라가 따라붙었는데 오죽하면 내가 처음 출근하는 모습을 찍겠다며 유명 방송사 PD가 올 정도였다. 그들이 찍어 간 것은 실상 내가 흰 지팡이를 손에 들고 걷는 모습이 거의 전부였는데도.
처음엔 모든 것이 생경했다. 매일 비슷한 정장을 입는 것도(맹학교에는 교복이 없다), 매일 같은 시간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것도(그 전까지는 늘 학교 근처에 살거나 기숙사에 살았다), 30명이 넘는 학생이 모인 교실에 서는 것도(맹학교는 한 반에 아무리 많아도 15명을 넘지 않았다). 학생들이 책장 넘기는 소리, 연필로 뭔가를 쓰는 소리마저 신기하게 들렸다. 그 이질감에 압도될 정도였다.
새로운 곳에 가면 지형지물도 낯설지만 소리에도 적응해야 한다. 첫 한 달간은 학교 소음에 익숙해져야 했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방과 후가 되어서야 몸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면 텅 빈 교실에 남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할머니 전화를 받고 울컥 눈물이 났던 기억도 생생하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익숙한 음성. 그것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새로운 세계로 시간을 뛰어넘어 걸려 온 전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불편함에도 곧 익숙해졌다.
동기들은 교사가 되어 가고, 나는 장애인이 되어 가다
모든 것이 평범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학생들은 나를 오로지 교사로서만 바라보았던 것 같다. 2년 차부터는 교원능력개발평가의 서술형 답변에서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표현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도 아이들을 학생으로 대했고, 아이들도 나를 선생님으로 대했다. 그뿐이었다. 나는 최고까지는 아니어도 ‘괜찮은’ 선생님이었다. 학생들과 록 밴드를 구성해 축제 무대에 올랐고, 점자반, 영어노래패러디반, 영자신문반 같은 동아리를 잇달아 개설하며 수업만으로는 쌓을 수 없는 사제 간의 정을 쌓아 갔다. 그때의 경험으로 학생들은 학교 생활을 즐기는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우쳤다. 학생들은 놀기 좋아하는 선생님과 놀고 싶어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선생님과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하고, 영어를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하는가? 어떤 자격증이 있는가? 혹은 그 선생님에게 장애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치 않다. 그런 것들은 아이들에겐 배경 정보일 뿐이다.
그런데 동료 교사와 학교 관리자들은 굳이 배경 정보를 더욱 부각해서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함께 첫 발령을 받은 동기들이 모두 담임을 맡는 동안 나는 비담임 교사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풋풋하던 동기들은 조금씩 완연한 교사의 모습이 되어 갔다. 학급 업무를 처리하고 결코 쉽지 않은 학생 생활 지도에 헉헉대면서도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교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배경 정보에는 달리 ‘결격 사유’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적절한 때 적절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같은 시기 나는 완연한 장애인의 모습이 되어 갔다. 잔존 시력을 거의 잃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횡단보도의 얼룩무늬가 보이지 않게 됐고 학생들의 실루엣이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원래도 중증 시각장애가 있었지만, 진정한 어둠이 내린 것은 이 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삶까지 덩달아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교직 사회에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게 한 그 문제의 회식 후 아주 오래간만에 동기들끼리 식사했던 날이 생각난다. 대화 주제는 동기들이 담임을 맡은 아이들 간의 소소한 다툼과 아이들의 세세한 특성으로 모였다. 내가 보탤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수업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일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그즈음 기타를 배우던 일? 퇴근하고 영어 번역 학원에 다니던 일? 한 가지는 기억난다. 동기들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았다는 것. 그 정서적 반응은 어쩌면 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담임 교사들만이 겪는 지난한 교사의 일상은 비담임 교사인 내겐 신 포도처럼 보였다.
진정한 부적응자
그 무렵, 나는 통번역대학원에서 한영 번역 전공으로 2년간 공부했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이방인이 되는 훈련이다. 누구든 모국어의 집에서 나오면 철저한 타자가 된다. 당장 낯선 풍경을 맞닥뜨리게 되고 낯선 풍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더 낯선 것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낸 말의 의미를 가지고 도로 모국어의 집에 돌아오면 익숙하리라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다시 한 번 놀란다.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할 수 없었던 세계가 붕괴하는 체험을 한다. 그렇게 모국어의 집을 다시 기우고 덧대면서 나의 언어 세계는 더욱 단단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통번역대학원 졸업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행복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매우 낯설어져 있었다. 발령 동기들은 모두 다른 학교로 전보했고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학생들도 모두 졸업한 후였다. 학생들과 함께한 추억은 모두 과거가 됐고 웬일인지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바뀐 걸까, 내가 바뀐 걸까? 분명 후자일 터인데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뀌긴 한 걸까? 개인적으로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교사로서도 그런지는 확신이 없었다.
번역 공부를 하며 는 것은 말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는 분별력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가 됐다. 교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텍스트를 파고드는 일보다는 청소년인 아이들의 미숙한 언어를 파고드는 일에 더욱 가깝다. 내겐 더 이상 그것이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종종 영어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과는 이야기가 잘 통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아이와는 벽이 생겨 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고상해져 버린 걸까.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성미까지 까다로운 사람이 돼 버렸다면 교사로서 그만큼 난감한 일도 없었다.
장애가 문제가 아니었다. 교직에서 더 이상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 했고 학생들과 걸핏하면 마찰을 빚었다. 수업 분위기는 몹시 좋지 않았다. 한번은 말썽쟁이 아이를 점심시간에 불러서 상담한다고 해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분을 못 이겨 아이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렸다. 애초에 교실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내게 있었다. 그래 놓고 내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다니. 학생에게도 미안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문제는 나의 외부에도 있었다. 나는 첫 학교 마지막 2년 동안 2학년과 3학년을 담당했으므로 그 다음 학교에서도 1, 2학년 또는 2, 3학년을 걸쳐서 담당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교감 선생님의 ‘배려’로 1학년만 전담하게 됐다. 담당 학년은 영어 교과 선생님들과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교감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을 설득해 가며 굳이 내가 1학년 수업을 전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교감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배려’였다.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이해하고 배려해 주겠다고 했으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한 수업을 맡으라는 것. 해당 교감 선생님은 유능한 분이었고, 이후에 나와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그때 그 조치만큼은 배려인 듯, 배려 아닌, 배려 같은 차별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교감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두 번째 해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그때도 교감 선생님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조차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 거부하지 못했다. 첫해에 1학년을 담당하는 동안 수업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으므로 이젠 나의 반감도 거세지 않았다. 교장실에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지만 나는 설득 아닌 설득을 당했다. 같은 일은 세 번째 해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3년 내리 1학년만을 전담하고 4년 차에 교감 선생님이 바뀌었다. 추후에 밝혀진 사실은 해당 교감 선생님이 내가 전보 오기 전에 학부모회장과 모종의 구두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 오는 시각장애인 교사에게 고학년 수업을 맡기지 않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이행한 것은 결코 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배제였다. 시각장애인 선생님에게 영어 수업을 듣는 것이 손해라고 한 학부모도 야속했지만, 배제 조치를 하면서 배려라고 강변한 교감 선생님에게는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그간의 관계도 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어서 별도로 항의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차별은 기억에 아로새겼다. 담당 학년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교권 침해다. 그런데 장애인이 아니었으면 당하지 않았을 교권 침해라는 점에서 그것은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었다.
학생들이 준 선물
차별은 조금씩 내 마음에 스며들어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갉아 먹었다. 첫 학교에서 쭉 담임 교사를 맡지 못한 데 이어 새 학교에서 첫 3년 동안 저학년만 담당하고 보니 교사로서의 역할이 반의반으로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학교는 계속해서 내가 교사가 아니라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교사와 장애인이라는 두 정체성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그런 것처럼 모두가 행동하니 나 자신도 혼란을 느끼고 위축되고 말았다. 열정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교사로서의 경력은 쌓이는데 성장은 멈춘 비대칭적 상황이 괴로웠다.
그때 만약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교직에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내가 교사로서의 항해를 계속하도록 뱃길을 밝혀 주는 등대가 되어 주었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나를 영어 교사로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두 번째 학교에 출근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어느 봄날이었다. 주말을 보내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가 있는 지하철역 출구를 나섰다. 발을 인도에 내딛는 순간 전에는 없던 것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지난 금요일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몇 걸음 걷는데 얼굴에 절로 웃음이 피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란 점자 유도 블록이었다. 좁다란 길을 점자 블록을 밟으며 걸어가는데 어찌나 편하던지. 흰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방향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누가 점자 블록을 깔아 달라고 민원을 넣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점자 블록이 생기는 것은 누군가의 민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이 민원을 넣었을까? 골똘히 궁리하면서 교문을 들어섰다. 바로 그때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약 세 주 전에 담당하는 아이들이 내게 와서 인터뷰해 간 기억이 난 것이다. 아이들의 질문은 그간 내게 찾아왔던 숱한 기자들의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으로서 학교 생활을 하며 불편한 것은 없으신가요?”
나는 딱히 없다고 답했다. 어차피 학생들에게 시나 국가 차원의 정책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다만 출퇴근길에 점자 블록이 없어서 불편하다는 얘기는 지나가듯 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깊게 물어보지 않고 곧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총총히 사라졌다. 너무나 짧은 인터뷰였기에 곧바로 인터뷰한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교무실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그 학생들이 있는 반으로 찾아갔다.
“얘야, 저번에 선생님 인터뷰해 간 건 잘 진행이 됐니?”
“네. 지난주에 보고서 잘 냈어요.”
“그런데 그 인터뷰가 뭐에 대한 거라고 했었지?”
“사회 참여 토론이란 건데요, 보고서 결과가 잘 나오면 학교 대표로 나가서 토론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가 ‘구청장에게 바란다….’라는 앱에 글을 올려서 지금 점자 블록이 깔린 것 같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학교에서 근무한 그 어느 순간보다도 기뻤다. 그동안 그토록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숨기고만 싶었던 나의 일부가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학생들을 통해 받아들여진 셈이었다. 학생들의 행동은 장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환경을 바꿔야 할 대상으로 봤다는 점에서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아이들의 선물은 하루아침에 학교 앞 풍경을 바꿔 놓았다. 덩달아 나의 출퇴근하는 발걸음도 훨씬 더 경쾌해졌다.
그동안 수많은 기자가 나를 인터뷰해 갔다. 교육청과 청와대 게시판에 장애인 교사들의 고충에 대해 건의한 것도 수차례였다. 하지만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 이는 많지 않았다. 동료와 관리자는 친절을 베풀면서도 동시에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행세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구청에 민원을 넣어 점자 유도 블록을 깔자고 생각했다니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말인가? 누가 누구에게 장애 이해 교육을 실시한단 말인가?
전 세계 최초로 장애인 교원 노조가 탄생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내가 교단에 선 첫날부터 늘 한결같았다.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교사라는 정체성과 조화시키는 데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 점에선 오히려 당사자인 나보다도 학생들이 더 편견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학교 앞 점자 유도 블록 설치가 아이들보다 내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각성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내가 두 번째 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나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장애인 교사들은 전국 단위 노조를 만들었다. 내가 아로새겼던 학교 내에서의 장애인 차별은 나만 겪은 차별은 아니었다. 의미 있는 것은 나와 같은 시각장애 교사들만이 아닌 청각장애, 지체장애, 뇌병변장애 등 다양한 장애 유형의 선생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조의 이름에 ‘함께하는’이라는 수식어를 새겨 넣었다. 안 보이는 것은 청각장애인 선생님들이 읽어 주고, 안 들리는 것은 시각장애인 선생님들이 들어 주고, 걸어갈 수 없는 길은 함께 먼 길을 돌아가는 식으로 노조를 꾸려 나갔다. 그렇게 2019년 7월 6일에 오랫동안 준비해 온 세계 최초의 장애인 교원 노조가 탄생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 전국 유·초·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는 4,800명이 넘는 장애인 교원이 근무하고 있다.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은 이들을 대표하여 교육부와 교육청을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장애인 차별에 공동 대응하고 있다. 우리 노조가 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교육 행정가들과 동료 교사들은 장애인 교사를 남들과 다른 특성을 지닌 교사 집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는 이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장애와 비장애가 구분되지 않는, 모두가 어우러지는 교무실 풍경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런데 한 사회가 장애와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을 달성하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그것을 생략한 채 우리의 교육은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익숙한 모국어의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이방인이 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오로지 그 과정을 통해서만이 기존의 체제가 얼마나 부실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한 단계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이 사회가 장애인의 언어를 배우기 전에는 결코 장애인을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말하기로 한 것이다. 요컨대 이방인의 언어이다. 교무실에서 누구나 눈치채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방 안의 코끼리’가 되는 대신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장애인 교사이다”라고. 낯설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잠시 교직을 떠난 사이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이제는 내가 이 교훈을 대한민국 학교에 되돌려 주고 싶다.
기획 / 이런 교사이지만 학교에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살다
- 시각장애와 함께한 교직의 빛과 그늘
글
김헌용
engccer@gmail.com
서울 신명중학교 교사,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안녕하세요! 저 재환이예요. 저번에 사 주신 음료수는 잘 마셨습니다. 저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어려움을 이겨 내는 선생님이 처음엔 신기했어요. 진짜로 너무 잘 걸으셔서 눈이 잘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선생님이 많은 노력을 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이 본받고 싶어졌어요. 그 이유는 선생님의 많은 노력이에요. 노력해서 안 될 게 없는데 노력 하나 안 해서 시험도 못 봤어요. 그래서 전 선생님의 노력을 본받고 싶은 거예요. 그럼 수고요~
-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재환 올림
교육 실습 중 학생으로부터 받은 쪽지다. 이 쪽지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걷는 모습을 보고 본받고 싶어졌다니. 영어를 잘 가르쳐 줘서도, 자상하게 대해 줘서도 아닌, 그저 걷는 모습만으로도 자신의 학업까지 돌아보게 되었다니. 명백히 희망적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지 않던가? 교사로서 이처럼 남는 장사도 없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교직을 준비하며 내 가슴을 짓누르던 부담감이 일순간 걷히는 기분이었다.
이방인이 되다
나는 여섯 살에 실명했다. 부모님은 내 눈을 고치기 위해 나를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다시 저 병원에서 이 병원으로 데리고 다녔지만, 결국 눈앞은 흐릿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부모님의 손을 붙잡고 병원에 다녔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라디오 종교 방송에 사연을 보내 치료비를 마련하셨고, 그 돈으로 나는 독일 쾰른대학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았다. 종국에는 안 보이게 될 눈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인지 10대까지 나는 돋보기 너머로 책이며, 휴대전화 문자 내용이며, 화면 속 축구 선수들의 사진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비록 일반학교 근처는 얼씬도 못 했지만, 내가 다녔던 맹학교에서는 나 정도의 잔존 시력이 있으면 ‘약시(당시 저시력을 가리키던 용어)’로 불렀다.
맹학교에서 보낸 12년 동안 크게 두 가지를 얻었다. 먼저, 대한민국에서 오로지 시각장애인만 발급받을 수 있는 국가 공인 안마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해부 생리, 한방, 실습 같은 과목으로 이루어진 2년에 걸친 의료 교육과정을 이수한 시각장애인에게만 주어지는 빛나는 자격증이었다. 또 얻은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사실 이것이 이 글의 주제와는 더 부합할 텐데, 바로 남들과 철저히 분리됐던 경험이 그것이다.
맹학교는 특수학교로 분류된다. 특수학교는 일정 부분 일반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통합교육 같은 개념을 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특수학교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특수할 수 있는 것이다. 생애 최초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던 때, 특수학교에서 보낸 12년은 나를 뼛속까지 이 사회의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나 임용 시험을 통과하고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첫날 나는 그것을 바로 깨달았다. 2010년 3월이었다. 그 후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오래도록 내 삶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첫 출근
재환이의 쪽지는 가히 신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교단에 선 후 나는 매우 열심히 걸었고,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사와 학부모들도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보면 볼수록 나는 더 우아하게 걸으려고 노력했고, 나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언론사 기자들도 수없이 다녀갔다. 실은 근무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카메라가 따라붙었는데 오죽하면 내가 처음 출근하는 모습을 찍겠다며 유명 방송사 PD가 올 정도였다. 그들이 찍어 간 것은 실상 내가 흰 지팡이를 손에 들고 걷는 모습이 거의 전부였는데도.
처음엔 모든 것이 생경했다. 매일 비슷한 정장을 입는 것도(맹학교에는 교복이 없다), 매일 같은 시간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것도(그 전까지는 늘 학교 근처에 살거나 기숙사에 살았다), 30명이 넘는 학생이 모인 교실에 서는 것도(맹학교는 한 반에 아무리 많아도 15명을 넘지 않았다). 학생들이 책장 넘기는 소리, 연필로 뭔가를 쓰는 소리마저 신기하게 들렸다. 그 이질감에 압도될 정도였다.
새로운 곳에 가면 지형지물도 낯설지만 소리에도 적응해야 한다. 첫 한 달간은 학교 소음에 익숙해져야 했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방과 후가 되어서야 몸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면 텅 빈 교실에 남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할머니 전화를 받고 울컥 눈물이 났던 기억도 생생하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익숙한 음성. 그것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새로운 세계로 시간을 뛰어넘어 걸려 온 전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불편함에도 곧 익숙해졌다.
동기들은 교사가 되어 가고, 나는 장애인이 되어 가다
모든 것이 평범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학생들은 나를 오로지 교사로서만 바라보았던 것 같다. 2년 차부터는 교원능력개발평가의 서술형 답변에서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표현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도 아이들을 학생으로 대했고, 아이들도 나를 선생님으로 대했다. 그뿐이었다. 나는 최고까지는 아니어도 ‘괜찮은’ 선생님이었다. 학생들과 록 밴드를 구성해 축제 무대에 올랐고, 점자반, 영어노래패러디반, 영자신문반 같은 동아리를 잇달아 개설하며 수업만으로는 쌓을 수 없는 사제 간의 정을 쌓아 갔다. 그때의 경험으로 학생들은 학교 생활을 즐기는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우쳤다. 학생들은 놀기 좋아하는 선생님과 놀고 싶어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선생님과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하고, 영어를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하는가? 어떤 자격증이 있는가? 혹은 그 선생님에게 장애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치 않다. 그런 것들은 아이들에겐 배경 정보일 뿐이다.
그런데 동료 교사와 학교 관리자들은 굳이 배경 정보를 더욱 부각해서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함께 첫 발령을 받은 동기들이 모두 담임을 맡는 동안 나는 비담임 교사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풋풋하던 동기들은 조금씩 완연한 교사의 모습이 되어 갔다. 학급 업무를 처리하고 결코 쉽지 않은 학생 생활 지도에 헉헉대면서도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교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배경 정보에는 달리 ‘결격 사유’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적절한 때 적절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같은 시기 나는 완연한 장애인의 모습이 되어 갔다. 잔존 시력을 거의 잃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횡단보도의 얼룩무늬가 보이지 않게 됐고 학생들의 실루엣이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원래도 중증 시각장애가 있었지만, 진정한 어둠이 내린 것은 이 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삶까지 덩달아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교직 사회에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게 한 그 문제의 회식 후 아주 오래간만에 동기들끼리 식사했던 날이 생각난다. 대화 주제는 동기들이 담임을 맡은 아이들 간의 소소한 다툼과 아이들의 세세한 특성으로 모였다. 내가 보탤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수업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일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그즈음 기타를 배우던 일? 퇴근하고 영어 번역 학원에 다니던 일? 한 가지는 기억난다. 동기들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았다는 것. 그 정서적 반응은 어쩌면 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담임 교사들만이 겪는 지난한 교사의 일상은 비담임 교사인 내겐 신 포도처럼 보였다.
진정한 부적응자
그 무렵, 나는 통번역대학원에서 한영 번역 전공으로 2년간 공부했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이방인이 되는 훈련이다. 누구든 모국어의 집에서 나오면 철저한 타자가 된다. 당장 낯선 풍경을 맞닥뜨리게 되고 낯선 풍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더 낯선 것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낸 말의 의미를 가지고 도로 모국어의 집에 돌아오면 익숙하리라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다시 한 번 놀란다.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할 수 없었던 세계가 붕괴하는 체험을 한다. 그렇게 모국어의 집을 다시 기우고 덧대면서 나의 언어 세계는 더욱 단단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통번역대학원 졸업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행복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매우 낯설어져 있었다. 발령 동기들은 모두 다른 학교로 전보했고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학생들도 모두 졸업한 후였다. 학생들과 함께한 추억은 모두 과거가 됐고 웬일인지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바뀐 걸까, 내가 바뀐 걸까? 분명 후자일 터인데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뀌긴 한 걸까? 개인적으로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교사로서도 그런지는 확신이 없었다.
번역 공부를 하며 는 것은 말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는 분별력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가 됐다. 교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텍스트를 파고드는 일보다는 청소년인 아이들의 미숙한 언어를 파고드는 일에 더욱 가깝다. 내겐 더 이상 그것이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종종 영어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과는 이야기가 잘 통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아이와는 벽이 생겨 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고상해져 버린 걸까.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성미까지 까다로운 사람이 돼 버렸다면 교사로서 그만큼 난감한 일도 없었다.
장애가 문제가 아니었다. 교직에서 더 이상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 했고 학생들과 걸핏하면 마찰을 빚었다. 수업 분위기는 몹시 좋지 않았다. 한번은 말썽쟁이 아이를 점심시간에 불러서 상담한다고 해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분을 못 이겨 아이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렸다. 애초에 교실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내게 있었다. 그래 놓고 내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다니. 학생에게도 미안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문제는 나의 외부에도 있었다. 나는 첫 학교 마지막 2년 동안 2학년과 3학년을 담당했으므로 그 다음 학교에서도 1, 2학년 또는 2, 3학년을 걸쳐서 담당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교감 선생님의 ‘배려’로 1학년만 전담하게 됐다. 담당 학년은 영어 교과 선생님들과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교감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을 설득해 가며 굳이 내가 1학년 수업을 전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교감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배려’였다.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이해하고 배려해 주겠다고 했으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한 수업을 맡으라는 것. 해당 교감 선생님은 유능한 분이었고, 이후에 나와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그때 그 조치만큼은 배려인 듯, 배려 아닌, 배려 같은 차별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교감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두 번째 해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그때도 교감 선생님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조차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 거부하지 못했다. 첫해에 1학년을 담당하는 동안 수업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으므로 이젠 나의 반감도 거세지 않았다. 교장실에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지만 나는 설득 아닌 설득을 당했다. 같은 일은 세 번째 해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3년 내리 1학년만을 전담하고 4년 차에 교감 선생님이 바뀌었다. 추후에 밝혀진 사실은 해당 교감 선생님이 내가 전보 오기 전에 학부모회장과 모종의 구두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 오는 시각장애인 교사에게 고학년 수업을 맡기지 않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이행한 것은 결코 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배제였다. 시각장애인 선생님에게 영어 수업을 듣는 것이 손해라고 한 학부모도 야속했지만, 배제 조치를 하면서 배려라고 강변한 교감 선생님에게는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그간의 관계도 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어서 별도로 항의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차별은 기억에 아로새겼다. 담당 학년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교권 침해다. 그런데 장애인이 아니었으면 당하지 않았을 교권 침해라는 점에서 그것은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었다.
학생들이 준 선물
차별은 조금씩 내 마음에 스며들어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갉아 먹었다. 첫 학교에서 쭉 담임 교사를 맡지 못한 데 이어 새 학교에서 첫 3년 동안 저학년만 담당하고 보니 교사로서의 역할이 반의반으로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학교는 계속해서 내가 교사가 아니라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교사와 장애인이라는 두 정체성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그런 것처럼 모두가 행동하니 나 자신도 혼란을 느끼고 위축되고 말았다. 열정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교사로서의 경력은 쌓이는데 성장은 멈춘 비대칭적 상황이 괴로웠다.
그때 만약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교직에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내가 교사로서의 항해를 계속하도록 뱃길을 밝혀 주는 등대가 되어 주었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나를 영어 교사로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두 번째 학교에 출근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어느 봄날이었다. 주말을 보내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가 있는 지하철역 출구를 나섰다. 발을 인도에 내딛는 순간 전에는 없던 것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지난 금요일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몇 걸음 걷는데 얼굴에 절로 웃음이 피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란 점자 유도 블록이었다. 좁다란 길을 점자 블록을 밟으며 걸어가는데 어찌나 편하던지. 흰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방향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누가 점자 블록을 깔아 달라고 민원을 넣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점자 블록이 생기는 것은 누군가의 민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이 민원을 넣었을까? 골똘히 궁리하면서 교문을 들어섰다. 바로 그때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약 세 주 전에 담당하는 아이들이 내게 와서 인터뷰해 간 기억이 난 것이다. 아이들의 질문은 그간 내게 찾아왔던 숱한 기자들의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으로서 학교 생활을 하며 불편한 것은 없으신가요?”
나는 딱히 없다고 답했다. 어차피 학생들에게 시나 국가 차원의 정책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다만 출퇴근길에 점자 블록이 없어서 불편하다는 얘기는 지나가듯 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깊게 물어보지 않고 곧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총총히 사라졌다. 너무나 짧은 인터뷰였기에 곧바로 인터뷰한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교무실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그 학생들이 있는 반으로 찾아갔다.
“얘야, 저번에 선생님 인터뷰해 간 건 잘 진행이 됐니?”
“네. 지난주에 보고서 잘 냈어요.”
“그런데 그 인터뷰가 뭐에 대한 거라고 했었지?”
“사회 참여 토론이란 건데요, 보고서 결과가 잘 나오면 학교 대표로 나가서 토론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가 ‘구청장에게 바란다….’라는 앱에 글을 올려서 지금 점자 블록이 깔린 것 같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학교에서 근무한 그 어느 순간보다도 기뻤다. 그동안 그토록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숨기고만 싶었던 나의 일부가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학생들을 통해 받아들여진 셈이었다. 학생들의 행동은 장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환경을 바꿔야 할 대상으로 봤다는 점에서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아이들의 선물은 하루아침에 학교 앞 풍경을 바꿔 놓았다. 덩달아 나의 출퇴근하는 발걸음도 훨씬 더 경쾌해졌다.
그동안 수많은 기자가 나를 인터뷰해 갔다. 교육청과 청와대 게시판에 장애인 교사들의 고충에 대해 건의한 것도 수차례였다. 하지만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 이는 많지 않았다. 동료와 관리자는 친절을 베풀면서도 동시에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행세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구청에 민원을 넣어 점자 유도 블록을 깔자고 생각했다니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말인가? 누가 누구에게 장애 이해 교육을 실시한단 말인가?
전 세계 최초로 장애인 교원 노조가 탄생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내가 교단에 선 첫날부터 늘 한결같았다.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교사라는 정체성과 조화시키는 데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 점에선 오히려 당사자인 나보다도 학생들이 더 편견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학교 앞 점자 유도 블록 설치가 아이들보다 내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각성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내가 두 번째 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나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장애인 교사들은 전국 단위 노조를 만들었다. 내가 아로새겼던 학교 내에서의 장애인 차별은 나만 겪은 차별은 아니었다. 의미 있는 것은 나와 같은 시각장애 교사들만이 아닌 청각장애, 지체장애, 뇌병변장애 등 다양한 장애 유형의 선생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조의 이름에 ‘함께하는’이라는 수식어를 새겨 넣었다. 안 보이는 것은 청각장애인 선생님들이 읽어 주고, 안 들리는 것은 시각장애인 선생님들이 들어 주고, 걸어갈 수 없는 길은 함께 먼 길을 돌아가는 식으로 노조를 꾸려 나갔다. 그렇게 2019년 7월 6일에 오랫동안 준비해 온 세계 최초의 장애인 교원 노조가 탄생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 전국 유·초·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는 4,800명이 넘는 장애인 교원이 근무하고 있다.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은 이들을 대표하여 교육부와 교육청을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장애인 차별에 공동 대응하고 있다. 우리 노조가 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교육 행정가들과 동료 교사들은 장애인 교사를 남들과 다른 특성을 지닌 교사 집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는 이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장애와 비장애가 구분되지 않는, 모두가 어우러지는 교무실 풍경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런데 한 사회가 장애와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을 달성하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그것을 생략한 채 우리의 교육은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익숙한 모국어의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이방인이 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오로지 그 과정을 통해서만이 기존의 체제가 얼마나 부실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한 단계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이 사회가 장애인의 언어를 배우기 전에는 결코 장애인을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말하기로 한 것이다. 요컨대 이방인의 언어이다. 교무실에서 누구나 눈치채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방 안의 코끼리’가 되는 대신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장애인 교사이다”라고. 낯설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잠시 교직을 떠난 사이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이제는 내가 이 교훈을 대한민국 학교에 되돌려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