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좌담
말로만 하는 투쟁, 대응에 급급한 운동을넘기 위해
- 한국 사회와 운동, 교육의 현주소와 과제를 논하다
참석자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장
천보선 진보교육연구소 소장
정록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일시 2023년 3월 27일 월요일
장소 서울 용산 회의실
기록 공현·서경 기자
정리 공현 기자
채효정 이 좌담은 한국 사회와 세계의 정세를 전망하며 우리 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모색하기 위해 마련했다. 기후 위기를 비롯해 여러 위기가 중첩되어 닥쳐오고 있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 우리 운동이 전체적인 방향을 잡지 못하고 좌표 없이 운동하면서, 그때그때 개별 사안과 정책에 대응하기 급급하다 보니 길을 잃은 느낌이 든다. 담론과 운동이 ‘이슈’와 ‘트렌드’를 반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정세를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육》의 올해 목표 중 하나는 반자본주의 교육 실천을 담는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 노동, 인권, 생태, 젠더, 정치 등의 문제를 교육 문제와 함께 토론하며, 현재를 진단하고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개별 운동이 자기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고, 교육운동도 총체적 인식 속에서 실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지, 각자의 위치에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금 필요한 과제를 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먼저, 각 운동의 입장에서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해 보자.
나영 좌담을 제안한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작년부터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을 만들어 여러 단체, 활동가들이 모였는데, 이 조직 역시 그런 문제의식으로 시작했다. 활동가들이 오랫동안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는 식으로 활동해 왔고, 또 워낙에 계속 일이 생기니까 장기적 전망이나 정세를 나눌 새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운동에서도, 활동가 재생산 면에서도 문제가 누적되었다.
예를 들면, 성평등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협소해지지 않도록 방향을 설정하고 담아내는 과정들이 있어야 했는데, 빠르게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그런 방향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고, 몇 차례 백래시에 부딪히면서 점차 더 협소해졌다. 그래서 결국엔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단순히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을 의미하는 걸로 좁혀서 진행되어 왔다. 사회·경제 구조 전반의 변화에 대한 고민 없이 수치화되고 기계적·기능적인 접근만 이루어져 온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역할도 가족, 청소년에 더 중점을 두면서 주로 특정 대상에 대한 지원 정책으로 추진되어 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제 그런 수준의 양성평등 정책마저 삭제하고 축소하려고 하니 현재의 대응이 우선 그걸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관해서도 그런 한계에 부딪힌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막아야 한다는 입장은 모였지만 그 이상의 논의를 해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후퇴하거나 없어지는 정책과 부서를 지키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만들어 갈 것인지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그런 논의는 여성운동만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최근 ‘외국인 가사 도우미 수입’, ‘30세 이전에 아이 셋 낳으면 군 면제’ 이런 정책이 거론되지 않나. 지금 소위 ‘저출생’이나 ‘돌봄 공백’이라고 부르는 문제들은 결국 생산 중심의 시스템에만 매달려 사회 구성원과 공동체의 재생산을 어렵게 만들어 생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 영역을 바꾸지 않겠다’, ‘예산을 더 못 쓰겠다’ 하면서 기존의 방식대로 생산력을 뽑아 내고 유지하려는 움직임인 것 같다.
여성운동에서도 그런 차원의 분석이 더 필요하고, 노동운동과 만나야 한다. 그런 대응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게 고민이다. 첫 번째 난점은 여성운동 안에서도 그런 논의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 난점은 다른 운동과 만나서 논의하려고 해도 너무 자신들의 현안에 대응하기 바쁘고 관심이 없어서 접점을 못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채효정 ‘그것밖에 안 하는 민주당, 그조차 안 하는 국민의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것조차 안 하고’ 후퇴를 거듭하니까, ‘그거라도 지키자’라고 하는 최소주의적 경향들이 여성·젠더뿐만 아니라 노동, 인권, 기후,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자본주의와 맞서 싸운다는 것의 의미
천보선 지난 30여 년 동안 좌파적 교육운동의 주요 방향은 신자유주의와 이에 입각한 교육 시장화에 반대하며 싸워 온 것이었다. 열심히 싸웠지만, 막아 내지 못하고 조금씩 밀려 온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 외부의 상황은 지난 30여 년보다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좋아졌다는 말에 의아할 수도 있겠다. 싸움의 과정에서 제일 힘든 게, 너무나 체제가 강고해서 사람들에게 패배주의가 각인되고 ‘말은 옳지만 그게 되겠어?’ 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많이 약화되고 있다. 교육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들어올 때 첫째로 경쟁과 선택을 강조하는 시장화의 논리가 있고 둘째로 그 밑바닥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논리가 있는데, 개인주의에 입각한 부분은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시장화 논리는 상당 부분 깨졌다. 거시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교육에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많이 약화된 것 아닌가 싶다. 대표적으로 유네스코나 OECD 같은 국제 기구들이 과거에는 교육 문제에 대해 상당히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말했는데, 최근에는 입장을 많이 선회했다. 다만, 이 정세 속에서 싸워 나갈 운동 주체들은 과거보다 취약해졌다.
의제 측면에서는 교육운동이 자본주의 지배 도구로서의 교육 시스템을 좀 전환시키자는 차원에서 대학 평준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 체제 제안을 내놓은 것이 나름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계적 교육 추세를 보니 생태 의제 측면에서는 그동안 안일했다는 반성을 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한 일이라는 정도만 생각했지, 운동의 역량을 집중하거나 대안적 실천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 점에 대한 자각이 좀 더 일찍 됐으면 좌파 운동 진영의 영향력 축소를 조금은 완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현시점에서는 대학 평준화를 중심으로 한 교육 혁명, 그 다음으로 기후 위기 투쟁 이렇게 두 가지 핵심 의제를 가지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권영숙 한국이 1987년 이후 민주화로 이행했고, 자유주의 정치 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경제적인 토대나 개발 방식은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 모델을 그대로 답습했고, 나아가 1997년을 경유하면서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까 ‘87년’과 ‘97년’을 나눠서 볼 게 아니라, 1987년에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토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변화가 신자유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민주화 웨이브’가 일어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모습으로 이어지게 됐다. 한국이 그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조의 세력도 강하고 사민주의의 저항도 있어서 쉽지 않았지만, 한국은 민주화 이행 이후 나중에야 사민주의 정치 세력이 등장했고 노조도 약했다. 우리가 ‘민주노조’라는 말을 쓰잖나. 계급 노조도, 독립 노조도 아니고 민주노조라는 게 흥미로운 표현이다. 말 그대로 민주화 이행 과정의 일부로서 자신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지금 노조운동의 과제는 민주주의로부터 독립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화 세력 속 자유주의 정치로부터 독립해서 계급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종의 ‘교환의 정치’를 추구했다.
1987년에 6월 항쟁이라고 하는 민주화 투쟁이 있었고 정치적 자유화가 있었다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경제적 민주화의 계기도 있었다. 계급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더 급진화하거나, 사민주의적인 교환의 정치를 만들거나, 아니면 더 급진적인 좌파와 결합하는 계급 정치를 가동하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이란 이름하에 자유주의적 정치와 함께하면서 노동권 확장, 노동법 개정 투쟁을 해 나갔다. 교환의 정치도 서로 힘 대 힘으로 충돌하고, 그러면서 연합도 하고 양보도 하면서 가능한 거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자유주의 정치에 한 번도 힘으로 제대로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 민주당도 민주노조운동에 연합이나 협상을 공식 제안한 적이 없다. 유일한 예가 1997년, 노사정 대화에서 ‘파업도 아무것도 하지 마라’, ‘노동 유연화에 동의해라’ 요구했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이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정리 해고가 도입되자마자 첫 번째로 현대자동차라는 가장 큰 조직 노동에 대한 정리 해고를 단행했고, 다큐멘터리 〈밥, 꽃, 양〉에서 드러나듯이 그 결말은 정리 해고를 철회하면서 ‘누군가는 잘라야 된다’라며 식당의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잘린 것이었다. 이 구도가 정권이 양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도 그 안에서 생존을 도모해 나갔고, 노동운동이 조직 노동으로 바뀌면서 이해 집단 정치를 스스로 구사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지금 노조운동에 ‘산별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하지만, 실제론 산별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고 노동 조건 협의도, 노동자 보호도 기업별로만 이루어진다. 그럼 노동자들의 경제적 통일성 확보가 안 된다. 그 결과가 노동 차별, 노동 내부의 차별인 거다. 기업 규모의 차이에 따른 격차도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더 큰 문제로 「근로기준법」의 대상도 되지 않는 800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있다. 현재 조직 노동 정치는 배제적인 멤버십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런 와중에 노동 내부의 차별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노동 내부의 차별이란 결국 노동 외부의 차별과 정치·사회적 조건이 노동 내부의 차별로 전가된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 짚고 싶은 건 주체가 약해진 게 아니라 주체 자체가 변했다는 거다. 민주화 세력도, 좌파도 변했다. 우리의 운동은 단일하지 않은 집단이고,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체제가 우리가 제기한 것들을 수용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사실 우리가 체제에 많이 젖어 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싸우는 방법을 잊었구나 생각되는 지점도 있다.
정록 인권운동사랑방은 올해 30주년이고 10년 전인 2013년이 20주년이었다. 그때 쌍용차 분향소가 투쟁의 현장이었고 그래서 대한문 분향소 앞에서 집회처럼 20주년 행사를 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내부에서 고민과 토론을 하면서 키워드로 냈던 게 “변혁”이란 표현이었다. 그때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였는데, 장기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많이 자살했고, 희망버스도 있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막연하게 보수 정권에 반대하는 것이나 해당 사업장의 고통만 말하는 것을 넘어,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지향을 이야기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지 않은가 해서 체제 변혁에 함께 나서자는 이야길 던진 거다. 그 당시에는 ‘체제 변혁’이란 이야기에 왜 갑자기 저렇게 거대하고 과격해 보이는 단어를 쓰려고 하나 하는 반응도 많았다.
최근 몇 년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기후 위기나 재난 같은 것들에 지배 세력도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이 체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느끼는 상황이다.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근본적, 총체적인 변화나 변혁이 필요하다는 공감은 더 많이 확산됐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2019년 이후부터는 기후 위기 문제, 기후정의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운동이 한국 사회에 불어넣었던 분위기나 에너지도 있는 것 같다. 시작부터 구조와 시스템 등 큰 이야기를 하잖나. 모든 게 서로 연결돼서 수탈당하고 착취당하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고민과 이야기가 많아졌다.
지금은 4.14 기후 정의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 요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난방비 폭탄 문제로 기후정의운동이 어떤 이야길 던질 수 있나 하는 논의가 있었다. 에너지가 신자유주의적 가격 논리로 정해질 게 아니라 공공재여야 하고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 문제라고 보고,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에너지에 대한 요금 인상을 철회하고 대기업 등에 요금을 부과하고 전체적 수요를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환경운동단체들이 ‘전기 요금 합리화/현실화’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이야기해 온 것과는 배치되는 논리다. 결국 이견이 있어서 환경운동연합 등의 단체들은 공식적으로 조직위원회에서 빠지게 됐다. 기후정의운동도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 누구와 손잡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생태 위기를 돌파하는 반자본주의운동 혹은 계급운동이 많이 부족했구나, 더 이야기돼야겠구나 생각했다.
계속 약화되어 온 운동의 현실과 과제
채효정 말씀들을 정리해 보면, 객관적으로는 지난 30여년 간 신자유주의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온 과정이 분명 있다. 민영화나 노동 유연화 논리가 처음 도입될 당시와 달리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부작용과 폐해를 알게 됐다. 그걸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아니든, 지금의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있고, 지배 세력의 의지도 능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런 정세는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이 대중적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주체의 측면에서도 그동안 사회운동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사회운동 역시 각 운동들을 연결하여 계급적 대항 전선을 만들고 사회 변혁을 목표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스스로 체제 전환의 대안 세력으로 세력화하는 데 실패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지금의 세력 구도는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의 헤게모니도 약화되었지만 여기에 저항하는 대항 헤게모니 역시 약화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적도 지리멸렬하고 우리도 지리멸렬한 그런 상황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지배력 약화는 운동이 체제에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 낸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실패하고 붕괴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 온 투쟁의 현장들과, 새롭게 나타난 주체들을 너무 쉽게 누락시킨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 저작인 《좌파의 길》, 원제는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에서 이런 상황을 ‘C가 돌아왔다’ 그리고 ‘S도 돌아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C의 귀환은 자본주의(Capiltalism)의 귀환을 말한다. 이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확실히 현장의 피켓 등에서도 과거와 달리 ‘자본주의가 문제다, 자본주의를 멈춰라, 자본주의가 재난이다’ 같은 구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역사 속에 파묻어 버린 S, 곧 사회주의(Socialism)도 다시 대안으로서 검토되기 시작하며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사회주의는 패배했다’는 ‘역사의 종언’도 다시 기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배와 저항의 헤게모니가 모두 약화된 지금은, 자본주의도 새로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도 새로운 사회주의를 적극 모색하고 시작해야만 하는,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 고민은 이런 세계적 정세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유독 한국에서는 C의 귀환도, S의 귀환도 막혀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주의에 맞설 저항 주체의 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경로를 통해 정치적 세력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운동의 가능성과 과제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천보선 돌아보면 그동안은 주체의 힘이 많이 약화되는 과정이 있었다. 한 20~30년 전에는 막연하게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같은 지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고 패배가 쌓이면서 많이 떨어져 나갔고, 우리의 사회 변혁에 대한 믿음도 약화되어 왔다. 이는 하나하나의 투쟁에 대한 전술의 약화로도 드러난다. 예전에는 전교조 안에서 연가 투쟁을 하느냐 마느냐 등을 가지고 논쟁이 많았는데, 요새는 그런 논쟁도 안 한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다시, 전 세계적인 불평등과 생태 위기 속에서 더 이상 이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가 맞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길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고 느낀다.
권영숙 우선 S가 돌아왔다는 말이, 한국 상황에선 특히 동의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고 해서 정말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힘을 가지고 돌아왔나? 그렇게 이야기되는 사회주의가 뭔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자본주의’는 많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현실이니까. 하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실체가 없고, 체제에 위협적이지도 않다. 나는 ‘좌파가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게 지금 위기의 실체라고 본다.
정세와 구조를 보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구체적 문제들을 핸들링해야 의미가 있다. 전교조의 예를 들자면, 전교조는 노조이지만 노조가 아닌 교육운동단체로 전교조를 바라보는 구성원이 많은 듯하다. 노조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방치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기간제 교사, 학교 공무직 등 학교 안 수많은 노동 형태들을 마주하고 교육 산별이라든지 노조운동으로 접근해야 했을 문제들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조직 체계를 갖게 돼 버렸다. 그런 문제를 놓아 둔 채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나. 말로만 하는 투쟁이진 않은가. 새로운 이야기와 이슈를 꺼내거나 아니면 거대 담론만 이야기하는 건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게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진단과 반성이 선행돼야 하고, 백화점식 나열을 해 봤자 안 된다는 점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채효정 사람들이 나가떨어져 온 과정과 돌아온 주체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그런 돌아온 주체이기도 하다. 20대에는 학생운동을 했고, 30대에는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했다. 그러다 40대 전후로 ‘적당한 진보’ 포지션에 안주하고 체제에 젖어 갔던 시간, 단절기가 있었다. 4.16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이 한 번 번쩍 들었고, 대학에서 해고되고 나서 강사 투쟁을 하면서, 어영부영 적당히 운동하는 척하고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근에는 기후정의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생태적 위기 속에서 교육운동을 다시 고민하면서,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 하는 명령이랄까, 요청이랄까 하는 게 저를 계속 닦아세우고 있다. 더 왼쪽으로, 더 아래로 가라고. 외부의 변화는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이렇게 귀환하는 주체들, 나 같은 사람들이 또 다른 자리에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주체의 확장과 연결을 고민할 때, 새로운 주체의 발견, 형성과 함께 귀환하는 주체들도 같이 고려했으면 좋겠다.
기후정의동맹이 처음 결성될 때도 그런 변화의 욕구를 느꼈던 것 같다. 동맹의 전신은 ‘탄소중립위원회해체와 기후정의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였다. 앞서 언급된 그런 교환의 정치, 합의의 정치, 대표들이 협상 테이블에 들어가서 합의하는 그런 운동에 대해 ‘이건 아니다’ 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흐름들을 중요하게 포착해야 한다. 운동 주체의 변질도 그런 방식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의견을 전달하라고 보냈는데, 정부의 기구에 들어가서 그걸 자신의 출세의 발판으로 삼는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사람들이 또 후배들 데리고 가고. 그렇게 계속 운동 주체가 차출되어 가는 식으로 빠져 나가면서 운동의 역량을 잃어 갔고, 현장은 황폐화됐다. 그런 현상에 대해 누적되어 온 불만과 분노가 당시 탄소중립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통해 함께 터져 나왔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도 노동운동도 ‘주체가 사라졌다, 부재하다, 변질됐다, 재생산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를 봐야 사람을 뺏기지도 않고, 활동가를 재생산할 수도 있지 않겠나.
누구와 함께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정세를 주도할 것인가
나영 어디에서 무엇을 누구를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30여 년간 신자유주의가 이야기한 게 환상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환상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 같다. 우리가 이 체제에서 어떤 권리가 가로막혀 있는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어떤 위치에서 무엇과 연결시켜서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볼 수 있다.
가령 셰어에서는 재생산 관련 정보 접근권을 주제로 이주 여성 등 여러 집단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임신 중단의 권리나 의료적 접근권의 문제를 그저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보장하라는 요구로만 생각하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청소년, 장애인, 이주민, 난민 중에는, 주변의 우려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데 오히려 임신의 유지와 출산을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주변 제3자에 의해서 본인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거나, 병원에서도 당사자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의료 행위로서만 다루고,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하고자 하니 본인과 태어날 아이에게 보장되는 여건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임신 중단의 권리나 의료 접근권, 정보 접근권 같은 권리들도 단순히 ‘할’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서 당사자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무엇이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고, 의료 기관에서의 의사소통 방식, 당사자에 대한 존중, 정보의 내용과 방향, 관련 지원 시스템 같은 것들이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지를 같이 고려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또, 최근에 20대 여성 청년을 만났는데, 독립을 고민하는데 주변 친구들이 될 수 있으면 독립하지 말고 부모에게 오랫동안 붙어 있으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 등으로 사회에 나갈 때부터 빚을 지면서 시작하고, 자기의 삶이나 미래, 이런 것들을 계획하거나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 많은 청년이 대안적 삶을 고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정 노동이나 자기 삶과 시간을 스스로 기획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리고 있고, 자기 생활의 재생산도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에 대한 재생산 같은 건 꿈도 꿀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이 어떻게 만나야 할까, ‘이건 체제의 문제니까 사회주의 합시다’ 이렇게 다가갈 수가 없다.
전기 요금 문제도 그렇다. 지금 당장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인상이 고민인 사람들에게는 이 요금이 어떻게 결정되어 왔고 왜 구조적 문제인가 하는 논의가 전혀 가닿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들과 구조적 문제를 같이 고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가 비어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재생산 정의 운동도,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권리를 찾아 요구하고 대중적으로 닿는 문제에서 권리를 조금 확장하는 건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의 체제가 재생산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고, 이 위기는 단순히 임신·출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서의 위기이고 노동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위기이고……’ 같은 말이다. 체제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정말 아주 일상에서의 권리와 생존이 달려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에서 이걸 어떻게 감지하고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된다.
권영숙 담론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노동 시간의 예를 들면, 우리가 주로 최장 노동 시간을 가정하고 이야길 하잖나. 자극적으로 ‘69시간’을 내세웠다가 논란이 되니 정부가 철회하는데, 포괄 임금제를 한다거나 하는 노동 시간을 둘러싼 기존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또 하나, 장시간 노동도 있지만 초단시간 노동도 있다. 플랫폼 노동 등 노동 시간을 아예 확보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거의 절반에 이른다. 초장시간 노동 이전에 노동 시간의 유연화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임금이 보장되는가 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가 문제적 구도를 계속 재생산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민주노총도 거기에서 한 발도 안 나아가고 있다.
채효정 ‘신자유주의에 대해 환상이 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희망이나 환상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란 말이 와닿는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분이 있는 중산층 이상이었을 것이다. 자본이 당근과 채찍 중에서 당근, 즉 부동산 상승, 펀드, 주식을 통한 금융 소득의 기회, 창업 전략, 지배 거버넌스 참여 보장 등으로 포섭하려 한 계급인데, 지금 이 계급 내부에서 중산층 양극화와 하층부 몰락 속에서 처절하게 그 환상이 깨어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서도 박탈감과 배신감이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 초기 단계부터 가지고 있던 것도 다 빼앗으면서 철저히 채찍으로 통제하려 한 사람들이 있다. 노동 계급 내부에서도 그 간극이 나타나고, ‘노동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노동 시간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도 운동의 중심 의제로부터 누락되거나 배제되는 주체들을 보여 준다. 노동 시간과 임금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지만, ‘노동 시간 줄이고, 임금 올리고’를 넘어야 한다. 전체 노동 계급의 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정책 담론에 끌려가지 않고 담론의 방향을 주도해 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급 상층부에서 만들어지는 ‘진보 대 보수’나 ‘민주 대 반민주’ 같은 왜곡된 구도를 사회운동이 자기 의제 속에서 계속 재생산해 내면서 결과적으로 지배 체제를 재구축·재강화하는 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누구를 봐야 하는지, 이 문제는 주체의 재구성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 같다. 세상을 바꿔야 할 이유를 자기 삶으로부터 가진 이들, 자본과 끝까지 싸우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낼 주체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주체들은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될 수 있을까.
정록 한국에서 기후정의운동은 2019년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면이 있다. 그레타 툰베리의 ‘미래를 위한 금요일’ 투쟁이 촉발시켰는데, 해외에서 수입됐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이제는 운동이나 담론이 세계적으로 동기화되어서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대두한 기후 담론을 둘러싸고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건 식생활로서의 비건 실천, ‘에코 에코한’ 라이프 스타일이며, 그런 실천을 하는 모임들을 소개한다. 물론 기후정의운동에서 그런 소규모 그룹들이 중요한 주체일 수 있지만, 기후 이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고민을 남긴다.
우리가 활동하면서 만나는 지역에서 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이라든지, 옥외 노동자들이라든지 사실 기후 위기 담론이 전혀 없었을 때부터 이미 투쟁하고 있던 사람들이잖나. 기후 위기 문제를 자신들의 상황이나 투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맥락과 경험에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관해서도 자기 이야기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위기 이야기가 대중화돼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다들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자기 언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작년에 화물연대 파업 때 기후정의동맹에서 토론회를 했고, 화물연대에서도 토론자가 나왔다. 그런데 화물 노동자들도 기후 위기에 대해 소화하는 방식은 죄책감이란 거였다. 자기들은 하루에 경유를 수십L를 써 가며 서울-부산을 왕복하고, 그것 때문에 지구가 망한다고 하니까. 그런데 당장 나는 고유가 때문에 죽겠고. 그래서 화물연대 파업이, 물류를 멈추고 속도를 줄이는 게 기후정의운동이라는 것을 말하며 화물 노동자들과 만나고 조직화하는 게 기후정의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전기 요금에 관해서도 전기를 너무 많이 쓴다는 죄책감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다. 개인들의 죄책감과 개인화된 실천을 넘어, 실제로 에너지와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을 자본이 쥐고 있고, 통제권을 빼앗아 와야만 대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들을 확장하고 조직하는 게 중요하다.
나영 당장 무슨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조금 멀어 보일지라도 문제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장, 이야기를 공유하는 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자리에서 몇 차례 이야기했던, 인상 깊게 본 사례가 아르헨티나의 실업자운동(MID)이다. 이 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건 단순히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등 여러 운동이 연대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런 연대가 어떤 시너지를 내고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다. 1990년대에 있었던 실업자운동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성, 가치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넘어서지 않으면 자신들의 위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만들어 냈고, 거기 동참했던 여성 활동가들이 10년 후에 페미니스트 대회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낙태죄 폐지 운동이나 페미사이드 반대 운동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변화로 이어졌다. 단순히 임신 중단의 권리를 합법화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노동력을, 재생산 노동을 어떻게 위계화하고 부차화하고 착취하는지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이 되었고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셰어에서도 의식적으로 우리 운동이 임신 중지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고, 누구와 만나서 어떤 문제의식들을 나누고 연결하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있다.
교육은 어떻게 변해야 하나
채효정 마지막으로 교육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교육 부문과 교육운동이 제일 문제적 영역 같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교육이라는 장은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주입하는 중요한 장이다. 학교 역시 지배 헤게모니 구축에서 핵심적인 통치 기구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군사주의·권위주의가 형식적으로 약화되고, 교육이 시장화·상품화되고 학생·양육자들의 소비자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마치 학교가 약화된 것 같은 착각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사회운동의 시야에서도 교육이 저항의 중심 장소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교육 기구와 과정에서 군사적 권위주의나 가시적 폭력은 줄어들었는지 모르나, 시장의 권위는 더 절대적인 것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구조화된 폭력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친자본, 반노동, 반사회적 인간’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가. 교육을 통해서다. 물론 그 교육 또한 사회적 압력의 반영물이다. 그런데 학교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대학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럼에도 정치적 위기보다 대학 재정 문제나 지방대 소멸론 같은 경제주의 관점의 의제들이 중심에 있다.
칠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중심 동력 중 하나는 교육운동이었다. 기후 문제처럼 교육 문제도, 모든 사회 의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이렇게 중요한 변혁운동의 거점이자 핵심 장소인데도 교육운동의 주체들도, 다른 부문 운동들에서도, 그 정도 비중을 두지 않는다. 교육운동 내부에서 전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진보 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이란 틀에서 자유주의와 뒤섞여 버렸다. ‘혁신 교육’ 또한 사회 변혁적 교육운동의 전망은 상실한 채 교실이나 교육과정에서의 방법론적 혁신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기업가 정신’이나 ‘창업·투자’ 같은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도 적극 저지하기보다는 학생의 미래와 진로를 생각한다는 명분으로 애매하게 타협하고 수용하기도 했다. 대학 평준화와 대학 무상화, 서열 체제 및 입시 교육 철폐 투쟁은 교육 개혁을 위한 최우선 순위의 목표임에도 그만큼 치열하고 급진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간의 교육운동이야말로 해야 할 과제를 하지 않은 채로, 새로 던져진 의제를 그때그때 따라가며 대응에 급급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 시민, 혁신, 자유 같은 그동안 진보적 교육운동을 구성했던 기본 개념들을 좀 깨고 전망과 방향을 새롭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교육운동의 과제에 대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권영숙 교육이라는 영역은 노동 시장으로 진입하기 전의 관문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도 하며, 또 부모가 자식을 돌보고 양육하는 문제이기도 한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하나의 소용돌이 안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 문제가 생기면 개인의 문제로 개별화하거나 섣불리 일반화하거나 둘 중 하나다. 교육을 단독의 문제로 바라보면 문제를 진단하기 어렵고, 근본적 문제를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총체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학교 제도가 전근대 사회와 달라진 점은, 경쟁을 통해 출세하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쟁은 시험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게 ‘공정’과 ‘능력주의’로 이야기되는 부분이다. 그런 상황을 두고 ‘교육을 통한 평등’이란 말도 나왔지만, 실제론 한 번도 평등한 적이 없었다. 경제적 불평등을 안고서 학교 제도에 들어온 사람에게 그런 불평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데 한국의 교육 제도, 입시 제도는 단지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사회 불평등 체제의 일부, 계급 재생산의 도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참교육’을 하면 뭔가 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교육 안에 깃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교육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좀 더 계급적으로, 좌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천보선 교육운동에서는 지난 시기에 “교육을 바꿔서 사회를 바꾸자”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구체적 사업이나 활동에서 교육과 사회 변화를 연결하진 못해 왔다. 하나하나의 내용을 넘어서 사회 시스템 전체의 변혁 자체가 의제가 되어야 하는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더욱 그런 연결을 고민하고 의식적으로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겠다. 워낙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가 거대하고 막강해서 바꿀 수 없다는 그런 패배주의가 수십 년 동안 뿌리내렸다. 그 부분부터 우리 안에서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교육에서도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기후 위기 문제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요즘에는 고등학생들이 과제를 하면서 기후 위기 같은 근사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발표하는 걸로 끝이고, 대학 가고 나서는 더욱더 체제에 순응한다. ‘내가 예전에 이런 문제도 다뤄 봤다’ 하는 경험, 나름대로 교양 있다는 자신감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기후 위기든, 불평등이든 그 의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 이미 아는 거다라고 반응해서 더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세상은 그와 별개로 치열한 경쟁 시스템이란 걸 몸으로 체감하고 알고 있는 거다. 교육에서 경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인간을 재생산하는 시스템부터 폐기시켜야 한다.
나영 공감한다.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일종의 프로젝트로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것에만 익숙해진 것 같다. 그것과 자기 현실은 별개라고 여긴다. 그래서 교육이 개인의 권리로서 민주 시민의 자세, 그런 이야길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 통합적인 교육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운동에서도 교사들이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나 개별 이슈를 넘어 통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그런 자리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정록 학생들이 ‘이런 게 좋은 가치인 건 알겠고, 어떤 사회 문제가 있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이렇다’라고 생각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사회운동이 주장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너희가 하는 말이 옳은 말,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실 교육에서 뭔가 함양하고 역량을 기른다고 할 때의 핵심은, 교육의 내용이 옳은지 여부보단,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 사람이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투쟁하면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지가 아닐까. 교육의 과정에서 그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이고, 교육 현장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장이 되는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회운동에서도 결국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화하고 세력화하면서 선순환의 과정을 구축해야 하는데, 비슷한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 같다. 사회운동이 현실 비판에서 관전자나 논평자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의미 있게 개입해 들어가는 세력화·조직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좌담은 지금까지 《오늘의 교육》 지면에 담았던 것들과는 다소 다른 주제와 형식으로 진행됐다. 아마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과 독자들에겐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은, 지금 정세가 매우 긴박한 국면이라 봤고, ‘교육 의제’ 안에 갇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급변하는 세계적 정세를 함께 조망하며 교육운동의 현재와 앞으로의 실천 과제를 내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세계 속에서 지역과 자기 운동을 보고,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진단하는 이런 ‘정세 토론’ 역시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것 중 하나인 것 같다. 예전에는 이런 정세 토론이 대학의 학회라든가, 노동조합 회의, 지역 단체 모임 등에서 상시적으로 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공론장들도 거의 축소·와해되거나 ‘변질’되었다. 정세 토론이라면 거창해 보이고 준비된 무대에서 전문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올바른 현실 인식, 올바른 정세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담에서 원래 여러분을 모시고 듣고자 했던 ‘현 정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운동의 현재에 대한 진단과 평가에 대한 부분, 방향과 주체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새겨야 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고민들이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전해지길 바란다. 어떤 운동이든 삶과 분리되고 현실과 유리되는 순간 힘을 잃게 되지만, 교육운동에서 앎과 삶의 분리는 특히 치명적인 것 같다. 담론을 다루면서도 교육 현장과 실천 투쟁에도 더욱 적극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
특별 좌담
말로만 하는 투쟁, 대응에 급급한 운동을넘기 위해
- 한국 사회와 운동, 교육의 현주소와 과제를 논하다
참석자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장
천보선 진보교육연구소 소장
정록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일시 2023년 3월 27일 월요일
장소 서울 용산 회의실
기록 공현·서경 기자
정리 공현 기자
채효정 이 좌담은 한국 사회와 세계의 정세를 전망하며 우리 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모색하기 위해 마련했다. 기후 위기를 비롯해 여러 위기가 중첩되어 닥쳐오고 있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 우리 운동이 전체적인 방향을 잡지 못하고 좌표 없이 운동하면서, 그때그때 개별 사안과 정책에 대응하기 급급하다 보니 길을 잃은 느낌이 든다. 담론과 운동이 ‘이슈’와 ‘트렌드’를 반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정세를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육》의 올해 목표 중 하나는 반자본주의 교육 실천을 담는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 노동, 인권, 생태, 젠더, 정치 등의 문제를 교육 문제와 함께 토론하며, 현재를 진단하고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개별 운동이 자기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고, 교육운동도 총체적 인식 속에서 실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지, 각자의 위치에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금 필요한 과제를 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먼저, 각 운동의 입장에서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해 보자.
나영 좌담을 제안한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작년부터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을 만들어 여러 단체, 활동가들이 모였는데, 이 조직 역시 그런 문제의식으로 시작했다. 활동가들이 오랫동안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는 식으로 활동해 왔고, 또 워낙에 계속 일이 생기니까 장기적 전망이나 정세를 나눌 새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운동에서도, 활동가 재생산 면에서도 문제가 누적되었다.
예를 들면, 성평등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협소해지지 않도록 방향을 설정하고 담아내는 과정들이 있어야 했는데, 빠르게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그런 방향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고, 몇 차례 백래시에 부딪히면서 점차 더 협소해졌다. 그래서 결국엔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단순히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을 의미하는 걸로 좁혀서 진행되어 왔다. 사회·경제 구조 전반의 변화에 대한 고민 없이 수치화되고 기계적·기능적인 접근만 이루어져 온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역할도 가족, 청소년에 더 중점을 두면서 주로 특정 대상에 대한 지원 정책으로 추진되어 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제 그런 수준의 양성평등 정책마저 삭제하고 축소하려고 하니 현재의 대응이 우선 그걸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관해서도 그런 한계에 부딪힌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막아야 한다는 입장은 모였지만 그 이상의 논의를 해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후퇴하거나 없어지는 정책과 부서를 지키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만들어 갈 것인지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그런 논의는 여성운동만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최근 ‘외국인 가사 도우미 수입’, ‘30세 이전에 아이 셋 낳으면 군 면제’ 이런 정책이 거론되지 않나. 지금 소위 ‘저출생’이나 ‘돌봄 공백’이라고 부르는 문제들은 결국 생산 중심의 시스템에만 매달려 사회 구성원과 공동체의 재생산을 어렵게 만들어 생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 영역을 바꾸지 않겠다’, ‘예산을 더 못 쓰겠다’ 하면서 기존의 방식대로 생산력을 뽑아 내고 유지하려는 움직임인 것 같다.
여성운동에서도 그런 차원의 분석이 더 필요하고, 노동운동과 만나야 한다. 그런 대응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게 고민이다. 첫 번째 난점은 여성운동 안에서도 그런 논의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 난점은 다른 운동과 만나서 논의하려고 해도 너무 자신들의 현안에 대응하기 바쁘고 관심이 없어서 접점을 못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채효정 ‘그것밖에 안 하는 민주당, 그조차 안 하는 국민의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것조차 안 하고’ 후퇴를 거듭하니까, ‘그거라도 지키자’라고 하는 최소주의적 경향들이 여성·젠더뿐만 아니라 노동, 인권, 기후,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자본주의와 맞서 싸운다는 것의 의미
천보선 지난 30여 년 동안 좌파적 교육운동의 주요 방향은 신자유주의와 이에 입각한 교육 시장화에 반대하며 싸워 온 것이었다. 열심히 싸웠지만, 막아 내지 못하고 조금씩 밀려 온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 외부의 상황은 지난 30여 년보다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좋아졌다는 말에 의아할 수도 있겠다. 싸움의 과정에서 제일 힘든 게, 너무나 체제가 강고해서 사람들에게 패배주의가 각인되고 ‘말은 옳지만 그게 되겠어?’ 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많이 약화되고 있다. 교육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들어올 때 첫째로 경쟁과 선택을 강조하는 시장화의 논리가 있고 둘째로 그 밑바닥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논리가 있는데, 개인주의에 입각한 부분은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시장화 논리는 상당 부분 깨졌다. 거시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교육에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많이 약화된 것 아닌가 싶다. 대표적으로 유네스코나 OECD 같은 국제 기구들이 과거에는 교육 문제에 대해 상당히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말했는데, 최근에는 입장을 많이 선회했다. 다만, 이 정세 속에서 싸워 나갈 운동 주체들은 과거보다 취약해졌다.
의제 측면에서는 교육운동이 자본주의 지배 도구로서의 교육 시스템을 좀 전환시키자는 차원에서 대학 평준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 체제 제안을 내놓은 것이 나름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계적 교육 추세를 보니 생태 의제 측면에서는 그동안 안일했다는 반성을 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한 일이라는 정도만 생각했지, 운동의 역량을 집중하거나 대안적 실천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 점에 대한 자각이 좀 더 일찍 됐으면 좌파 운동 진영의 영향력 축소를 조금은 완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현시점에서는 대학 평준화를 중심으로 한 교육 혁명, 그 다음으로 기후 위기 투쟁 이렇게 두 가지 핵심 의제를 가지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권영숙 한국이 1987년 이후 민주화로 이행했고, 자유주의 정치 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경제적인 토대나 개발 방식은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 모델을 그대로 답습했고, 나아가 1997년을 경유하면서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까 ‘87년’과 ‘97년’을 나눠서 볼 게 아니라, 1987년에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토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변화가 신자유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민주화 웨이브’가 일어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모습으로 이어지게 됐다. 한국이 그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조의 세력도 강하고 사민주의의 저항도 있어서 쉽지 않았지만, 한국은 민주화 이행 이후 나중에야 사민주의 정치 세력이 등장했고 노조도 약했다. 우리가 ‘민주노조’라는 말을 쓰잖나. 계급 노조도, 독립 노조도 아니고 민주노조라는 게 흥미로운 표현이다. 말 그대로 민주화 이행 과정의 일부로서 자신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지금 노조운동의 과제는 민주주의로부터 독립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화 세력 속 자유주의 정치로부터 독립해서 계급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종의 ‘교환의 정치’를 추구했다.
1987년에 6월 항쟁이라고 하는 민주화 투쟁이 있었고 정치적 자유화가 있었다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경제적 민주화의 계기도 있었다. 계급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더 급진화하거나, 사민주의적인 교환의 정치를 만들거나, 아니면 더 급진적인 좌파와 결합하는 계급 정치를 가동하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이란 이름하에 자유주의적 정치와 함께하면서 노동권 확장, 노동법 개정 투쟁을 해 나갔다. 교환의 정치도 서로 힘 대 힘으로 충돌하고, 그러면서 연합도 하고 양보도 하면서 가능한 거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자유주의 정치에 한 번도 힘으로 제대로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 민주당도 민주노조운동에 연합이나 협상을 공식 제안한 적이 없다. 유일한 예가 1997년, 노사정 대화에서 ‘파업도 아무것도 하지 마라’, ‘노동 유연화에 동의해라’ 요구했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이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정리 해고가 도입되자마자 첫 번째로 현대자동차라는 가장 큰 조직 노동에 대한 정리 해고를 단행했고, 다큐멘터리 〈밥, 꽃, 양〉에서 드러나듯이 그 결말은 정리 해고를 철회하면서 ‘누군가는 잘라야 된다’라며 식당의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잘린 것이었다. 이 구도가 정권이 양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도 그 안에서 생존을 도모해 나갔고, 노동운동이 조직 노동으로 바뀌면서 이해 집단 정치를 스스로 구사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지금 노조운동에 ‘산별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하지만, 실제론 산별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고 노동 조건 협의도, 노동자 보호도 기업별로만 이루어진다. 그럼 노동자들의 경제적 통일성 확보가 안 된다. 그 결과가 노동 차별, 노동 내부의 차별인 거다. 기업 규모의 차이에 따른 격차도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더 큰 문제로 「근로기준법」의 대상도 되지 않는 800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있다. 현재 조직 노동 정치는 배제적인 멤버십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런 와중에 노동 내부의 차별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노동 내부의 차별이란 결국 노동 외부의 차별과 정치·사회적 조건이 노동 내부의 차별로 전가된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 짚고 싶은 건 주체가 약해진 게 아니라 주체 자체가 변했다는 거다. 민주화 세력도, 좌파도 변했다. 우리의 운동은 단일하지 않은 집단이고,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체제가 우리가 제기한 것들을 수용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사실 우리가 체제에 많이 젖어 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싸우는 방법을 잊었구나 생각되는 지점도 있다.
정록 인권운동사랑방은 올해 30주년이고 10년 전인 2013년이 20주년이었다. 그때 쌍용차 분향소가 투쟁의 현장이었고 그래서 대한문 분향소 앞에서 집회처럼 20주년 행사를 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내부에서 고민과 토론을 하면서 키워드로 냈던 게 “변혁”이란 표현이었다. 그때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였는데, 장기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많이 자살했고, 희망버스도 있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막연하게 보수 정권에 반대하는 것이나 해당 사업장의 고통만 말하는 것을 넘어,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지향을 이야기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지 않은가 해서 체제 변혁에 함께 나서자는 이야길 던진 거다. 그 당시에는 ‘체제 변혁’이란 이야기에 왜 갑자기 저렇게 거대하고 과격해 보이는 단어를 쓰려고 하나 하는 반응도 많았다.
최근 몇 년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기후 위기나 재난 같은 것들에 지배 세력도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이 체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느끼는 상황이다.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근본적, 총체적인 변화나 변혁이 필요하다는 공감은 더 많이 확산됐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2019년 이후부터는 기후 위기 문제, 기후정의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운동이 한국 사회에 불어넣었던 분위기나 에너지도 있는 것 같다. 시작부터 구조와 시스템 등 큰 이야기를 하잖나. 모든 게 서로 연결돼서 수탈당하고 착취당하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고민과 이야기가 많아졌다.
지금은 4.14 기후 정의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 요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난방비 폭탄 문제로 기후정의운동이 어떤 이야길 던질 수 있나 하는 논의가 있었다. 에너지가 신자유주의적 가격 논리로 정해질 게 아니라 공공재여야 하고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 문제라고 보고,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에너지에 대한 요금 인상을 철회하고 대기업 등에 요금을 부과하고 전체적 수요를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환경운동단체들이 ‘전기 요금 합리화/현실화’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이야기해 온 것과는 배치되는 논리다. 결국 이견이 있어서 환경운동연합 등의 단체들은 공식적으로 조직위원회에서 빠지게 됐다. 기후정의운동도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 누구와 손잡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생태 위기를 돌파하는 반자본주의운동 혹은 계급운동이 많이 부족했구나, 더 이야기돼야겠구나 생각했다.
계속 약화되어 온 운동의 현실과 과제
채효정 말씀들을 정리해 보면, 객관적으로는 지난 30여년 간 신자유주의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온 과정이 분명 있다. 민영화나 노동 유연화 논리가 처음 도입될 당시와 달리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부작용과 폐해를 알게 됐다. 그걸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아니든, 지금의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있고, 지배 세력의 의지도 능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런 정세는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이 대중적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주체의 측면에서도 그동안 사회운동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사회운동 역시 각 운동들을 연결하여 계급적 대항 전선을 만들고 사회 변혁을 목표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스스로 체제 전환의 대안 세력으로 세력화하는 데 실패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지금의 세력 구도는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의 헤게모니도 약화되었지만 여기에 저항하는 대항 헤게모니 역시 약화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적도 지리멸렬하고 우리도 지리멸렬한 그런 상황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지배력 약화는 운동이 체제에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 낸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실패하고 붕괴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 온 투쟁의 현장들과, 새롭게 나타난 주체들을 너무 쉽게 누락시킨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 저작인 《좌파의 길》, 원제는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에서 이런 상황을 ‘C가 돌아왔다’ 그리고 ‘S도 돌아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C의 귀환은 자본주의(Capiltalism)의 귀환을 말한다. 이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확실히 현장의 피켓 등에서도 과거와 달리 ‘자본주의가 문제다, 자본주의를 멈춰라, 자본주의가 재난이다’ 같은 구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역사 속에 파묻어 버린 S, 곧 사회주의(Socialism)도 다시 대안으로서 검토되기 시작하며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사회주의는 패배했다’는 ‘역사의 종언’도 다시 기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배와 저항의 헤게모니가 모두 약화된 지금은, 자본주의도 새로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도 새로운 사회주의를 적극 모색하고 시작해야만 하는,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 고민은 이런 세계적 정세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유독 한국에서는 C의 귀환도, S의 귀환도 막혀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주의에 맞설 저항 주체의 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경로를 통해 정치적 세력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운동의 가능성과 과제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천보선 돌아보면 그동안은 주체의 힘이 많이 약화되는 과정이 있었다. 한 20~30년 전에는 막연하게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같은 지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고 패배가 쌓이면서 많이 떨어져 나갔고, 우리의 사회 변혁에 대한 믿음도 약화되어 왔다. 이는 하나하나의 투쟁에 대한 전술의 약화로도 드러난다. 예전에는 전교조 안에서 연가 투쟁을 하느냐 마느냐 등을 가지고 논쟁이 많았는데, 요새는 그런 논쟁도 안 한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다시, 전 세계적인 불평등과 생태 위기 속에서 더 이상 이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가 맞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길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고 느낀다.
권영숙 우선 S가 돌아왔다는 말이, 한국 상황에선 특히 동의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고 해서 정말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힘을 가지고 돌아왔나? 그렇게 이야기되는 사회주의가 뭔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자본주의’는 많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현실이니까. 하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실체가 없고, 체제에 위협적이지도 않다. 나는 ‘좌파가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게 지금 위기의 실체라고 본다.
정세와 구조를 보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구체적 문제들을 핸들링해야 의미가 있다. 전교조의 예를 들자면, 전교조는 노조이지만 노조가 아닌 교육운동단체로 전교조를 바라보는 구성원이 많은 듯하다. 노조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방치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기간제 교사, 학교 공무직 등 학교 안 수많은 노동 형태들을 마주하고 교육 산별이라든지 노조운동으로 접근해야 했을 문제들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조직 체계를 갖게 돼 버렸다. 그런 문제를 놓아 둔 채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나. 말로만 하는 투쟁이진 않은가. 새로운 이야기와 이슈를 꺼내거나 아니면 거대 담론만 이야기하는 건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게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진단과 반성이 선행돼야 하고, 백화점식 나열을 해 봤자 안 된다는 점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채효정 사람들이 나가떨어져 온 과정과 돌아온 주체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그런 돌아온 주체이기도 하다. 20대에는 학생운동을 했고, 30대에는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했다. 그러다 40대 전후로 ‘적당한 진보’ 포지션에 안주하고 체제에 젖어 갔던 시간, 단절기가 있었다. 4.16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이 한 번 번쩍 들었고, 대학에서 해고되고 나서 강사 투쟁을 하면서, 어영부영 적당히 운동하는 척하고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근에는 기후정의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생태적 위기 속에서 교육운동을 다시 고민하면서,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 하는 명령이랄까, 요청이랄까 하는 게 저를 계속 닦아세우고 있다. 더 왼쪽으로, 더 아래로 가라고. 외부의 변화는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이렇게 귀환하는 주체들, 나 같은 사람들이 또 다른 자리에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주체의 확장과 연결을 고민할 때, 새로운 주체의 발견, 형성과 함께 귀환하는 주체들도 같이 고려했으면 좋겠다.
기후정의동맹이 처음 결성될 때도 그런 변화의 욕구를 느꼈던 것 같다. 동맹의 전신은 ‘탄소중립위원회해체와 기후정의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였다. 앞서 언급된 그런 교환의 정치, 합의의 정치, 대표들이 협상 테이블에 들어가서 합의하는 그런 운동에 대해 ‘이건 아니다’ 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흐름들을 중요하게 포착해야 한다. 운동 주체의 변질도 그런 방식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의견을 전달하라고 보냈는데, 정부의 기구에 들어가서 그걸 자신의 출세의 발판으로 삼는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사람들이 또 후배들 데리고 가고. 그렇게 계속 운동 주체가 차출되어 가는 식으로 빠져 나가면서 운동의 역량을 잃어 갔고, 현장은 황폐화됐다. 그런 현상에 대해 누적되어 온 불만과 분노가 당시 탄소중립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통해 함께 터져 나왔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도 노동운동도 ‘주체가 사라졌다, 부재하다, 변질됐다, 재생산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를 봐야 사람을 뺏기지도 않고, 활동가를 재생산할 수도 있지 않겠나.
누구와 함께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정세를 주도할 것인가
나영 어디에서 무엇을 누구를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30여 년간 신자유주의가 이야기한 게 환상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환상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 같다. 우리가 이 체제에서 어떤 권리가 가로막혀 있는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어떤 위치에서 무엇과 연결시켜서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볼 수 있다.
가령 셰어에서는 재생산 관련 정보 접근권을 주제로 이주 여성 등 여러 집단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임신 중단의 권리나 의료적 접근권의 문제를 그저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보장하라는 요구로만 생각하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청소년, 장애인, 이주민, 난민 중에는, 주변의 우려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데 오히려 임신의 유지와 출산을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주변 제3자에 의해서 본인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거나, 병원에서도 당사자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의료 행위로서만 다루고,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하고자 하니 본인과 태어날 아이에게 보장되는 여건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임신 중단의 권리나 의료 접근권, 정보 접근권 같은 권리들도 단순히 ‘할’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서 당사자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무엇이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고, 의료 기관에서의 의사소통 방식, 당사자에 대한 존중, 정보의 내용과 방향, 관련 지원 시스템 같은 것들이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지를 같이 고려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또, 최근에 20대 여성 청년을 만났는데, 독립을 고민하는데 주변 친구들이 될 수 있으면 독립하지 말고 부모에게 오랫동안 붙어 있으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 등으로 사회에 나갈 때부터 빚을 지면서 시작하고, 자기의 삶이나 미래, 이런 것들을 계획하거나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 많은 청년이 대안적 삶을 고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정 노동이나 자기 삶과 시간을 스스로 기획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리고 있고, 자기 생활의 재생산도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에 대한 재생산 같은 건 꿈도 꿀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이 어떻게 만나야 할까, ‘이건 체제의 문제니까 사회주의 합시다’ 이렇게 다가갈 수가 없다.
전기 요금 문제도 그렇다. 지금 당장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인상이 고민인 사람들에게는 이 요금이 어떻게 결정되어 왔고 왜 구조적 문제인가 하는 논의가 전혀 가닿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들과 구조적 문제를 같이 고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가 비어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재생산 정의 운동도,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권리를 찾아 요구하고 대중적으로 닿는 문제에서 권리를 조금 확장하는 건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의 체제가 재생산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고, 이 위기는 단순히 임신·출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서의 위기이고 노동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위기이고……’ 같은 말이다. 체제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정말 아주 일상에서의 권리와 생존이 달려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에서 이걸 어떻게 감지하고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된다.
권영숙 담론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노동 시간의 예를 들면, 우리가 주로 최장 노동 시간을 가정하고 이야길 하잖나. 자극적으로 ‘69시간’을 내세웠다가 논란이 되니 정부가 철회하는데, 포괄 임금제를 한다거나 하는 노동 시간을 둘러싼 기존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또 하나, 장시간 노동도 있지만 초단시간 노동도 있다. 플랫폼 노동 등 노동 시간을 아예 확보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거의 절반에 이른다. 초장시간 노동 이전에 노동 시간의 유연화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임금이 보장되는가 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가 문제적 구도를 계속 재생산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민주노총도 거기에서 한 발도 안 나아가고 있다.
채효정 ‘신자유주의에 대해 환상이 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희망이나 환상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란 말이 와닿는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분이 있는 중산층 이상이었을 것이다. 자본이 당근과 채찍 중에서 당근, 즉 부동산 상승, 펀드, 주식을 통한 금융 소득의 기회, 창업 전략, 지배 거버넌스 참여 보장 등으로 포섭하려 한 계급인데, 지금 이 계급 내부에서 중산층 양극화와 하층부 몰락 속에서 처절하게 그 환상이 깨어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서도 박탈감과 배신감이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 초기 단계부터 가지고 있던 것도 다 빼앗으면서 철저히 채찍으로 통제하려 한 사람들이 있다. 노동 계급 내부에서도 그 간극이 나타나고, ‘노동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노동 시간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도 운동의 중심 의제로부터 누락되거나 배제되는 주체들을 보여 준다. 노동 시간과 임금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지만, ‘노동 시간 줄이고, 임금 올리고’를 넘어야 한다. 전체 노동 계급의 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정책 담론에 끌려가지 않고 담론의 방향을 주도해 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급 상층부에서 만들어지는 ‘진보 대 보수’나 ‘민주 대 반민주’ 같은 왜곡된 구도를 사회운동이 자기 의제 속에서 계속 재생산해 내면서 결과적으로 지배 체제를 재구축·재강화하는 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누구를 봐야 하는지, 이 문제는 주체의 재구성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 같다. 세상을 바꿔야 할 이유를 자기 삶으로부터 가진 이들, 자본과 끝까지 싸우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낼 주체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주체들은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될 수 있을까.
정록 한국에서 기후정의운동은 2019년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면이 있다. 그레타 툰베리의 ‘미래를 위한 금요일’ 투쟁이 촉발시켰는데, 해외에서 수입됐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이제는 운동이나 담론이 세계적으로 동기화되어서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대두한 기후 담론을 둘러싸고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건 식생활로서의 비건 실천, ‘에코 에코한’ 라이프 스타일이며, 그런 실천을 하는 모임들을 소개한다. 물론 기후정의운동에서 그런 소규모 그룹들이 중요한 주체일 수 있지만, 기후 이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고민을 남긴다.
우리가 활동하면서 만나는 지역에서 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이라든지, 옥외 노동자들이라든지 사실 기후 위기 담론이 전혀 없었을 때부터 이미 투쟁하고 있던 사람들이잖나. 기후 위기 문제를 자신들의 상황이나 투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맥락과 경험에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관해서도 자기 이야기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위기 이야기가 대중화돼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다들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자기 언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작년에 화물연대 파업 때 기후정의동맹에서 토론회를 했고, 화물연대에서도 토론자가 나왔다. 그런데 화물 노동자들도 기후 위기에 대해 소화하는 방식은 죄책감이란 거였다. 자기들은 하루에 경유를 수십L를 써 가며 서울-부산을 왕복하고, 그것 때문에 지구가 망한다고 하니까. 그런데 당장 나는 고유가 때문에 죽겠고. 그래서 화물연대 파업이, 물류를 멈추고 속도를 줄이는 게 기후정의운동이라는 것을 말하며 화물 노동자들과 만나고 조직화하는 게 기후정의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전기 요금에 관해서도 전기를 너무 많이 쓴다는 죄책감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다. 개인들의 죄책감과 개인화된 실천을 넘어, 실제로 에너지와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을 자본이 쥐고 있고, 통제권을 빼앗아 와야만 대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들을 확장하고 조직하는 게 중요하다.
나영 당장 무슨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조금 멀어 보일지라도 문제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장, 이야기를 공유하는 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자리에서 몇 차례 이야기했던, 인상 깊게 본 사례가 아르헨티나의 실업자운동(MID)이다. 이 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건 단순히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등 여러 운동이 연대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런 연대가 어떤 시너지를 내고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다. 1990년대에 있었던 실업자운동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성, 가치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넘어서지 않으면 자신들의 위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만들어 냈고, 거기 동참했던 여성 활동가들이 10년 후에 페미니스트 대회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낙태죄 폐지 운동이나 페미사이드 반대 운동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변화로 이어졌다. 단순히 임신 중단의 권리를 합법화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노동력을, 재생산 노동을 어떻게 위계화하고 부차화하고 착취하는지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이 되었고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셰어에서도 의식적으로 우리 운동이 임신 중지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고, 누구와 만나서 어떤 문제의식들을 나누고 연결하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있다.
교육은 어떻게 변해야 하나
채효정 마지막으로 교육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교육 부문과 교육운동이 제일 문제적 영역 같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교육이라는 장은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주입하는 중요한 장이다. 학교 역시 지배 헤게모니 구축에서 핵심적인 통치 기구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군사주의·권위주의가 형식적으로 약화되고, 교육이 시장화·상품화되고 학생·양육자들의 소비자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마치 학교가 약화된 것 같은 착각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사회운동의 시야에서도 교육이 저항의 중심 장소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교육 기구와 과정에서 군사적 권위주의나 가시적 폭력은 줄어들었는지 모르나, 시장의 권위는 더 절대적인 것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구조화된 폭력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친자본, 반노동, 반사회적 인간’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가. 교육을 통해서다. 물론 그 교육 또한 사회적 압력의 반영물이다. 그런데 학교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대학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럼에도 정치적 위기보다 대학 재정 문제나 지방대 소멸론 같은 경제주의 관점의 의제들이 중심에 있다.
칠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중심 동력 중 하나는 교육운동이었다. 기후 문제처럼 교육 문제도, 모든 사회 의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이렇게 중요한 변혁운동의 거점이자 핵심 장소인데도 교육운동의 주체들도, 다른 부문 운동들에서도, 그 정도 비중을 두지 않는다. 교육운동 내부에서 전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진보 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이란 틀에서 자유주의와 뒤섞여 버렸다. ‘혁신 교육’ 또한 사회 변혁적 교육운동의 전망은 상실한 채 교실이나 교육과정에서의 방법론적 혁신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기업가 정신’이나 ‘창업·투자’ 같은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도 적극 저지하기보다는 학생의 미래와 진로를 생각한다는 명분으로 애매하게 타협하고 수용하기도 했다. 대학 평준화와 대학 무상화, 서열 체제 및 입시 교육 철폐 투쟁은 교육 개혁을 위한 최우선 순위의 목표임에도 그만큼 치열하고 급진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간의 교육운동이야말로 해야 할 과제를 하지 않은 채로, 새로 던져진 의제를 그때그때 따라가며 대응에 급급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 시민, 혁신, 자유 같은 그동안 진보적 교육운동을 구성했던 기본 개념들을 좀 깨고 전망과 방향을 새롭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교육운동의 과제에 대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권영숙 교육이라는 영역은 노동 시장으로 진입하기 전의 관문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도 하며, 또 부모가 자식을 돌보고 양육하는 문제이기도 한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하나의 소용돌이 안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 문제가 생기면 개인의 문제로 개별화하거나 섣불리 일반화하거나 둘 중 하나다. 교육을 단독의 문제로 바라보면 문제를 진단하기 어렵고, 근본적 문제를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총체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학교 제도가 전근대 사회와 달라진 점은, 경쟁을 통해 출세하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쟁은 시험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게 ‘공정’과 ‘능력주의’로 이야기되는 부분이다. 그런 상황을 두고 ‘교육을 통한 평등’이란 말도 나왔지만, 실제론 한 번도 평등한 적이 없었다. 경제적 불평등을 안고서 학교 제도에 들어온 사람에게 그런 불평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데 한국의 교육 제도, 입시 제도는 단지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사회 불평등 체제의 일부, 계급 재생산의 도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참교육’을 하면 뭔가 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교육 안에 깃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교육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좀 더 계급적으로, 좌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천보선 교육운동에서는 지난 시기에 “교육을 바꿔서 사회를 바꾸자”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구체적 사업이나 활동에서 교육과 사회 변화를 연결하진 못해 왔다. 하나하나의 내용을 넘어서 사회 시스템 전체의 변혁 자체가 의제가 되어야 하는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더욱 그런 연결을 고민하고 의식적으로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겠다. 워낙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가 거대하고 막강해서 바꿀 수 없다는 그런 패배주의가 수십 년 동안 뿌리내렸다. 그 부분부터 우리 안에서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교육에서도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기후 위기 문제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요즘에는 고등학생들이 과제를 하면서 기후 위기 같은 근사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발표하는 걸로 끝이고, 대학 가고 나서는 더욱더 체제에 순응한다. ‘내가 예전에 이런 문제도 다뤄 봤다’ 하는 경험, 나름대로 교양 있다는 자신감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기후 위기든, 불평등이든 그 의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 이미 아는 거다라고 반응해서 더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세상은 그와 별개로 치열한 경쟁 시스템이란 걸 몸으로 체감하고 알고 있는 거다. 교육에서 경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인간을 재생산하는 시스템부터 폐기시켜야 한다.
나영 공감한다.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일종의 프로젝트로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것에만 익숙해진 것 같다. 그것과 자기 현실은 별개라고 여긴다. 그래서 교육이 개인의 권리로서 민주 시민의 자세, 그런 이야길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 통합적인 교육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운동에서도 교사들이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나 개별 이슈를 넘어 통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그런 자리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정록 학생들이 ‘이런 게 좋은 가치인 건 알겠고, 어떤 사회 문제가 있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이렇다’라고 생각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사회운동이 주장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너희가 하는 말이 옳은 말,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실 교육에서 뭔가 함양하고 역량을 기른다고 할 때의 핵심은, 교육의 내용이 옳은지 여부보단,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 사람이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투쟁하면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지가 아닐까. 교육의 과정에서 그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이고, 교육 현장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장이 되는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회운동에서도 결국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화하고 세력화하면서 선순환의 과정을 구축해야 하는데, 비슷한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 같다. 사회운동이 현실 비판에서 관전자나 논평자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의미 있게 개입해 들어가는 세력화·조직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좌담은 지금까지 《오늘의 교육》 지면에 담았던 것들과는 다소 다른 주제와 형식으로 진행됐다. 아마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과 독자들에겐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은, 지금 정세가 매우 긴박한 국면이라 봤고, ‘교육 의제’ 안에 갇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급변하는 세계적 정세를 함께 조망하며 교육운동의 현재와 앞으로의 실천 과제를 내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세계 속에서 지역과 자기 운동을 보고,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진단하는 이런 ‘정세 토론’ 역시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것 중 하나인 것 같다. 예전에는 이런 정세 토론이 대학의 학회라든가, 노동조합 회의, 지역 단체 모임 등에서 상시적으로 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공론장들도 거의 축소·와해되거나 ‘변질’되었다. 정세 토론이라면 거창해 보이고 준비된 무대에서 전문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올바른 현실 인식, 올바른 정세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담에서 원래 여러분을 모시고 듣고자 했던 ‘현 정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운동의 현재에 대한 진단과 평가에 대한 부분, 방향과 주체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새겨야 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고민들이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전해지길 바란다. 어떤 운동이든 삶과 분리되고 현실과 유리되는 순간 힘을 잃게 되지만, 교육운동에서 앎과 삶의 분리는 특히 치명적인 것 같다. 담론을 다루면서도 교육 현장과 실천 투쟁에도 더욱 적극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