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호[에세이] 씨앗을 살리는 여행 | 윤상혁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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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씨앗을 살리는 여행

- 〈느티나무 아래〉 공동체 상영회를 마치고



윤상혁  ysh2084@hanmail.net

영림중학교 교장





“영림중학교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비가 무척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여름철이니까 당연히 비가 내리는 거겠지 싶기도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의 영향이 이제는 정말 피부로 느껴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기후 변화가 자연이 인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기후의 변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기후를 읽어 내야 합니다.”


방학식 인사말을 기후 위기로 시작했다. 우리 시대의 기후를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후의 ‘변화’를 ‘위기’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해석이 들어가 있는 것이긴 하다. 우리가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감각 말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후를 읽는 행위가 반드시 기후 변화와 연관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기후 변화는 하나의 징후일 뿐 그 외에도 시대의 변화를 위기로 인식하게 하는 다양한 징후들이 있다. 교육자는 마땅히 그런 감각들을 살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감각들이 무뎌지지 않도록 계속 돌보고 북돋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일지도 모른다.


방학식을 마치고 선생님들의 메신저를 비롯하여 몇 가지 결재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교무부장님께 전화가 왔다. 가사실로 와서 함께 식사하자는 초대 전화다. 생활교육부장님과 진로교육부장님과 영림중사회적협동조합 사무국장님이 함께 우리 학교 말썽꾸러기 학생들을 위한 점심 이벤트를 준비하셨다. 메뉴는 맛있는 샌드위치와 떡볶이 그리고 원로 선생님들의 따뜻한 마음. 서둘러 가사실로 가 보니 학생들은 이미 집으로 갔고 선생님과 학부모님들만 남아 계신다. 1학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다. 옹기종기 모여 나누는 식사가 은근히 힐링이 된다. 

“한 학기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잠시 멈춰 충분한 휴식과 자기 돌봄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침에 방송으로 전했던 방학식 인사말을 첨부하면서 전체 교직원들께 짧은 인사를 전했다. 이제야 정말로 방학이라는 게 실감 난다. 1학년부는 함께 강원도로 1박 2일 워크숍을 떠났고 학교에 남아 계신 선생님들은 삼삼오오 모여 밥과 차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한다. 모두가 한마음이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기


오전에 내리던 비가 오후 들어 그쳤다. 교직원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하는 것을 보니 나의 마음도 가볍다. 학교 교정을 돌아보고 영림관 1층에 위치한 멀티미디어실로 향했다. 오늘 저녁 이곳에서 공동체 상영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미리 받은 영상 링크는 잘 열리는지, 무대 중앙의 대형 화면과 음향은 이상 없는지, 멀티미디어실의 냉방과 조명 상태는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설 주무관님께서 미리 살펴봐 주셔서 그런가, 퀴퀴한 냄새도 없고 쾌적하다. 멀티미디어실 바로 옆에 있는 학교협동조합 매점 여물점에 들러 과자와 음료를 구입했다. 이날 방문하는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들에게 영림중사회적협동조합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영림중학교에서 교육농협동조합 주관으로 오정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느티나무 아래> 공동체 상영회를 진행했다. 

〈느티나무 아래〉는 충북 괴산 ‘한살림우리씨앗농장’의 1년 살이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목처럼 영화의 처음과 끝에 느티나무가 등장한다. 영화 중간 무당이 등장하는데 이 느티나무가 마을의 당산나무라는 것을 암시한다. 당산나무는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지는 신격화된 나무를 말한다. 나무가 곧 신이다. 김중미 작가가 쓴 《느티나무 수호대》가 떠오른다. 마을 사람들의 개발 욕심 때문에 위기에 처한 느티나무를 구하기 위해 아이들이 힘을 합쳐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이다.


〈느티나무 아래〉도 비슷하다. 갓끈동부, 밭벼, 자주감자, 구억배추 등 200여 개의 토종 씨앗이 자연적 상태에서 자라고 순환된다. 한살림우리씨앗농장에는 70대 늙은 농부와 30~40대 청년 농부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사계절 쉼 없이 밭을 갈고, 논을 넘나든다. 기후 위기로 생태계가 무너져 가고, 대량 생산/소비의 쳇바퀴 속에서 농부와 토종 씨앗은 어떻게 생존하며,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 나갈 수 있을까? 상품 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일반적인 농장 경영 방식이 아닌, 토종·재래종 작물을 제철에 맞게 경작, 채종하는 우리씨앗농장의 농부들은 종자 주권을 지켜 내기 위해 애쓰는, ‘우리 씨앗 수호대’라 할 만하다. 영화는 단순히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담아내는 것을 넘어 농부들의 진로에 대한 현실적 고민, 수지 타산 문제 등과 같이 농장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고전적인 나래이션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 우리씨앗농장의 이야기를 “옛날 옛적에~”라고 표현함으로써 시간의 지평을 확장한다. 현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느티나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졌을지, 한편으로는 미래 세대들에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회자될지 상상하게 만든다. 생각해 보니 느티나무는 인간의 목격자이자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존재다. 그러니 영화에서 ‘씨앗’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새삼 농부가 ‘씨앗’을 지키고 돌보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농부들을 지키고 돌보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러니 늙은 농부가 옳다. 죽은 다음을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다.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다음은 늙은 농부의 꿈과 우리씨앗농장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느티나무가 증인이 될 것이다. 항상 그래 왔듯이.



벚나무 아래에서


영림중학교에 들어서면 벚나무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리 학생들의 기념사진 명소다. 방과 후에는 지역 주민들도 종종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곤 한다. 벚나무 아래는 모든 탐방 활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교직원들이 마을 탐방을 떠날 때도, 학생들이 답사 여행을 떠날 때도 벚나무 아래에 모여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곳은 또한 에코스쿨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장미 동산이 있고 물고기와 개구리가 살고 있는 작은 생태연못이 있다. 1학년 ‘꼬마 농부반’ 학생들이 심고 가꾼 작은 생태텃밭도 있다. 당구반 꾸러기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심은 벼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영림중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벚나무(2025년 4월 6일) ©영림중학교


 

‘교육농협동조합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교육농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해 본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교육농협동조합의 여정 역시 ‘우리 씨앗을 살리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씨앗의 의미는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씨앗을 지켜 내려는 의지다. 함께 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된 마음이다. 비가 그친 뒤의 교정은 아름다웠다. 방학식을 마치고 집으로 갔던 아이들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다시 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을 뛰고 공을 던지고 자전거를 타다가 주의를 듣고 벤치에 앉아 컵라면을 먹었다. 나는 벚나무 아래에서부터 출발하여 공동체 상영회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예상 동선을 생각하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이 학교에 들어섰을 때 보게 될 경관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느긋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기분이 설렜다.       


이재명 정부가 조세 지출과 교육 재정 구조 개편에 나설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교육계 일각에서는 교육 재정 구조 개편이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감축으로 귀결될까 봐 걱정하는 눈치다. 농부와 교사는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고 있다. 없어서는 안 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누구도 고마워하거나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릴 줄만 알지 돌볼 줄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의 원리는 농사의 원리와 비슷하다. 뿌린 만큼 거둔다. (느린 학습자, 경계선 지능, 사회·정서적 위기 학생 지원 등과 같이)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일에 인내심을 갖고 더 많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 그게 교육이다. 효율성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교육이 위치한다. 교육에 대한 그 어떤 장기적 비전 제시도 없이 교육 예산을 줄이는 것은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씨 뿌리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 점을 이재명 정부의 교육 관료들과 경제 관료들은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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