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호[시] 거리 조율 외 | 이중현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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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조율



음성통화를 문자메시지보다 가까이 두거나

신용카드를 현금보다 더 멀리하듯이 

사람살이 시시각각은 거리를 조율하는 일

빨래 건조대를 집 밖으로 내보내고

비싼 세탁 건조기를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몸은 보송보송했지만 마음은 눅진했다

집 근처에 와서 눈짓하는 대형마트를 외면하고 

멀어서 얼굴마저 낯선 오일장과 오래 놀았다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까울 수 있었다 

아동노동으로 수확하여 검게 볶은 원두커피

농약을 입어 푸르고 맵시 있는 국산차

거리를 만들 때는 마음이 멍들기도 했고

거리를 좁히려다 슬픔의 부피를 키우기도 했다

반품할 수 없는 이번 생과 

아직 잠 깨지 않는 꿈 

아예 손을 놓아버린 것도 있었다

상품은 사지 않고 광고만 맛보는 일

인간을 비웃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끊고 사는 일






감식



행복을 지갑에 넘치도록 넣어 다니거나

거실 장식장에 겹겹이 진열하여 어루만질 때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은닉한 장물을 만져서다

파킨슨병을 앓는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열 살 소녀 

배고플 때 먹는 것은 라면이 전부

라면 한 그릇도 간간한 맛의 행복일지 가늠하는데

어제 먹은 중국집 코스 요리가 떠오르고

줄지어 나오는 그릇마다 소녀의 허기진 눈이 묻었다

포탄에 아들을 잃은 지 사흘 뒤 남은 아들마저 

포탄으로 잃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한 어머니 

내 품은 이제 텅텅 비었다고 말했다

그 어머니의 폐허에도 행복이 싹틀지 근심하다가

내 두 아들이 가슴에 벅차서 하늘 바라보는데

가자 지구 어머니의 품만 같은 허공이 보였다

지진과 홍수가 번갈아 쓸어가는 아프가니스탄

열두 살 소년은 마을 덮치는 홍수를 피해 살아났지만 

뒤따라오던 네 살 여동생은 홍수가 업어 갔다

오빠는 언제쯤 행복을 업어 올 날 있을지 

세 남매를 키우는 내 여동생 청명한 웃음 뒤로

네 살 여동생 울음이 끈적거리고 있었다

행복의 뒷문을 열면 은닉한 장물이 쌓여 있고

행복을 감식하면 죄의 지문이 선명하다







시작 노트

퇴직 후에 가까이하는 일로 오일장을 찾는 일이다. 가까운 지역의 오일장 날짜를 적어 두기도 한다. 소소한 행복이지만, 가끔 그 행복마저 다른 누구의 행복을 훔쳐 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중현

jjrkk@naver.com    

1987년 ‘소설문학 신인상(시)’, 1988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물끄러미 바라본 세상》, 《좋아요를 수집합니다》, 《이 앱은 열 수 없습니다》, 동시집으로 《공부 못하는 이유》, 《힘도 무선 전송된다》, 《나는 나》, 동화집으로 《나의 비밀친구》, 《여울 각시》, 《마지막 은어 낚시》 등이 있고, 교육 도서로는 《혁신학교 조현초 4년의 기록》, 《혁신학교 어디까지 왔나》, 《혁신학교는 지속 가능한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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