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교육농 - 좋은 교육과 좋은 삶을 위하여 ①
느림의 힘, 관계의 복원
정용주 edcom234@gmail.com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
서울천왕초 교장
연재를 시작하며
‘교육농(農)’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텃밭을 통한 교육을 함께해 온 지 10년을 넘어섰다. 2019년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교육농》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좀 더 넓고 깊은 고민을 담아 나눌 필요가 있어 다시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교육농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3회에 걸쳐 담고자 한다. 교육농의 배경 철학과 원리에 대한 친절한 안내와 말 걸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연재 순서
① 느림의 힘, 관계의 복원 - 텃밭과 함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②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출발, 교육농 1
③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출발, 교육농 2
디지털 전환 시대와 사물의 소멸
오늘 우리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모든 영역을 빠르게 재편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효율과 속도가 절대적 가치로 떠오르면서 교육 역시 성과 지표와 신속한 산출물의 논리에 종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눈앞에 있는 사물의 무게, 감각과 촉각의 접속, 기다림의 의미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물의 소멸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학생들이 삶과 배움의 구체성을 잃게 만듭니다. 알고리즘은 정답을 제공하지만, 정답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냄새, 질감, 기다림의 순간을 지워 버립니다. 이는 지식의 획득을 가능하게 했던 물질적, 감각적 배경을 제거하며, 교육을 정보의 전달로 축소시킵니다.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 퇴행시킨 우리의 오감을 훨씬 빠른 속도로, 훨씬 총체적으로 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텃밭은 단순히 과거 농경 사회의 잔재가 아니라, 교육을 지탱할 새로운 전환의 거점입니다. 흙과 씨앗, 물과 햇빛은 추상화된 코드나 디지털 데이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저항적인 사물입니다. 학생은 씨앗을 쥐고, 흙을 만지며, 냄새를 맡고, 시간을 기다리며 배우게 됩니다. 텃밭은 이렇게 세계를 다시 감각과 몸의 차원으로 불러내며, 디지털 속도가 사라지게 한 느린 접속을 복원합니다. 사물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타자로서 경험됩니다. 학생이 만난 사물들은 세계에 대한 감응을 회복시키고, 학습자가 존재적 관계 속에서 배움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사물과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의 교육을 위한 필수적 조건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데이터와 성과로 환원될수록, 물질과 몸, 감각과 사물은 교육을 다시 인간화하는 근본적 자원이 됩니다. 텃밭은 학생에게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지혜를 제공합니다. 사물의 존재와 그 취약성을 인정하며 돌보는 과정에서 학생은 생명에 대한 감응적 윤리를 체득하게 됩니다. 세계는 다시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이 되며, 교육은 이를 통해 존재적 깊이를 회복합니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 시대일수록, 교육은 오히려 물성 기반 학습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텃밭은 미래에 견딜 수 있는 속도를 발명하는 실험장이 됩니다. 그리고 씨앗마다 고유한 온도계와 성장 속도, 관계 맺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텃밭은 다양성 그 자체입니다. 속도와 효율에 치우친 교육을 넘어, 학생과 교사가 사물과 관계 맺는 과정을 통해 느린 배움의 의미를 복원할 때, 교육은 인간과 지구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느림의 기술과 버티기의 취약성
오늘날의 사회는 빠름이 곧 진보라는 신화를 내세우며, 속도가 곧 경쟁력이고 생존력이라는 등식을 우리 삶에 강요합니다. 그러나 빠름이 곧 성장이라는 등식은 이미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속화는 생산성과 성과를 높이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적 관계를 붕괴시키고,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개인의 삶을 파편화합니다. 우리는 이제 “느림은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해야 합니다. 느림은 낭비가 아니라, 성찰과 회복의 전제이며, 공동체적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최근 《멈추지 못하는 학교- 입시가속체제와 시간주권》이라는 책을 썼는데, 생태적 전환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텃밭은 느림의 기술을 학생에게 가르칩니다. 씨앗을 심는 순간부터 열매를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학기의 시간보다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합니다. 발아와 성장, 개화와 결실, 그리고 다시 퇴비로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은 인간의 성급함을 무력화하고, 기다림을 통해 배움을 구성하도록 만듭니다. 학생들은 이 느린 시간을 경험하며 버틴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 버팀은 강철 같은 견고함이 아닙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줄기의 연약함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버티는 힘은 오히려 취약성에서 비롯됩니다.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강인함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협력과 돌봄의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텃밭의 새싹은 홀로 자라지 않습니다. 햇빛과 물, 흙과 미생물, 그리고 학생의 손길 속에서만 살아남습니다. 학생은 이를 통해 버티는 것이란 혼자의 완강함이 아니라, 서로 기대고 연결되며 살아가는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취약함은 숨겨야 할 결핍이 아니라, 공동체적 돌봄을 촉진하는 토대가 됩니다. 교육은 이러한 취약성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공간이 될 때 진정한 전환을 이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림은 단순한 지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육적 기술이며, 가속의 신화를 넘어서는 전환의 조건입니다. 버티기의 취약성을 교육과정 속에 드러낼 때, 우리는 더 이상 속도와 경쟁만을 숭배하지 않고, 느림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힘을 배우게 됩니다. 생태적 전환은 바로 이 느린 교육학 속에서 시작됩니다.
관계와 네트워크의 성장
생태적 전환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교육은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인간과 타자, 인간과 비인간 생명 사이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텃밭은 관계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흙과 씨앗, 곤충과 미생물, 햇빛과 바람, 학생과 교사, 나아가 학부모와 지역 사회가 얽히며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학생은 자신이 사소하게 한 행동이 생태망 전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몸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위계적이지 않습니다. 미생물이 토양을 살리고, 벌이 꽃가루를 나르며, 아이들이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상호 얽힘 속에서 배움은 살아납니다. 학생은 자신의 작은 행위가 생명망 전체의 지속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경험하며, 이는 생태 윤리와 기후 정의의 가장 구체적인 수업이 됩니다. 여기서 관계는 단순한 협력이나 공존을 넘어, 서로의 생존을 조건 짓는 얽힘으로 경험됩니다. 교육은 이 얽힘을 학습하게 할 때, 학생을 관계적 주체로 성장시킵니다.
관계성은 곧 성장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텃밭에서의 성장 경험은 점수나 등급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계망이 확장되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누군가를 도우며, 함께 책임지는 과정 속에서 학생은 성장을 체험합니다. 이는 교과 간 융합을 촉진하고, 학교와 마을을 연결하며, 배움을 삶과 다시 이어 주는 힘이 됩니다. 학생의 성장은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텃밭과 함께하는, 저와 제가 속한 모임에서는 ‘교육농’이라고 표현하는데,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지식의 전달을 넘어 관계적 주체로서의 학생을 세우는 것입니다. 텃밭에서의 네트워크 학습은 공동체적 시민성과 행성적 책임을 동시에 길러 내는 토대입니다. 이는 오늘날 기후 위기 시대의 필연적 교육 목표이며,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근본적 준비입니다.
생명을 돌보고 먹이는 교육의 목표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기술 훈련이 아닙니다. 교육의 목표는 모든 생명체들을 돌보고 먹이는 삶의 근원으로서 지구가 항구적 균형을 이루며, 생명체가 더불어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는 선언적 문장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실제적 지향이어야 합니다.
텃밭은 그 목표를 일상 속에서 구현합니다. 학생은 직접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작물을 돌보고, 수확을 나누며 생명 순환의 주체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지구와 연결된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고, 돌봄과 책임을 실천하는 법을 배웁니다. 교육은 추상적 구호를 넘어 구체적 경험으로 체화될 때만 효과를 가집니다. 생명을 돌보는 경험은 교과서에서가 아니라, 텃밭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목표는 미래 세대를 위한 도덕적 명령일 뿐 아니라, 현재 세대가 실천해야 할 생존의 과제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생태적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교육은 이 필연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입니다. 교육과정 속에서 돌봄과 책임, 관계와 느림을 체화할 때, 우리는 미래를 지탱할 힘을 학생에게 길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자리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선언해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텃밭에서 시작되는 느림과 관계, 돌봄과 조화의 교육이야말로 미래 세대가 지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길입니다. 교육이 느린 힘을 다시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아갈 미래를 발명할 수 있습니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단,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분들이나 청소년들은 월 회비 납부를 조정하거나 유예할 수 있습니다.)
· 출자금은 최소 '1구좌 2만 원'이며, 약정하신 금액만큼 첫 번째 월 조합비와 함께 출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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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교육농 - 좋은 교육과 좋은 삶을 위하여 ①
느림의 힘, 관계의 복원
정용주 edcom234@gmail.com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
서울천왕초 교장
연재를 시작하며
‘교육농(農)’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텃밭을 통한 교육을 함께해 온 지 10년을 넘어섰다. 2019년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교육농》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좀 더 넓고 깊은 고민을 담아 나눌 필요가 있어 다시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교육농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3회에 걸쳐 담고자 한다. 교육농의 배경 철학과 원리에 대한 친절한 안내와 말 걸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연재 순서
① 느림의 힘, 관계의 복원 - 텃밭과 함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②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출발, 교육농 1
③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출발, 교육농 2
디지털 전환 시대와 사물의 소멸
오늘 우리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모든 영역을 빠르게 재편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효율과 속도가 절대적 가치로 떠오르면서 교육 역시 성과 지표와 신속한 산출물의 논리에 종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눈앞에 있는 사물의 무게, 감각과 촉각의 접속, 기다림의 의미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물의 소멸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학생들이 삶과 배움의 구체성을 잃게 만듭니다. 알고리즘은 정답을 제공하지만, 정답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냄새, 질감, 기다림의 순간을 지워 버립니다. 이는 지식의 획득을 가능하게 했던 물질적, 감각적 배경을 제거하며, 교육을 정보의 전달로 축소시킵니다.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 퇴행시킨 우리의 오감을 훨씬 빠른 속도로, 훨씬 총체적으로 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텃밭은 단순히 과거 농경 사회의 잔재가 아니라, 교육을 지탱할 새로운 전환의 거점입니다. 흙과 씨앗, 물과 햇빛은 추상화된 코드나 디지털 데이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저항적인 사물입니다. 학생은 씨앗을 쥐고, 흙을 만지며, 냄새를 맡고, 시간을 기다리며 배우게 됩니다. 텃밭은 이렇게 세계를 다시 감각과 몸의 차원으로 불러내며, 디지털 속도가 사라지게 한 느린 접속을 복원합니다. 사물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타자로서 경험됩니다. 학생이 만난 사물들은 세계에 대한 감응을 회복시키고, 학습자가 존재적 관계 속에서 배움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사물과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의 교육을 위한 필수적 조건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데이터와 성과로 환원될수록, 물질과 몸, 감각과 사물은 교육을 다시 인간화하는 근본적 자원이 됩니다. 텃밭은 학생에게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지혜를 제공합니다. 사물의 존재와 그 취약성을 인정하며 돌보는 과정에서 학생은 생명에 대한 감응적 윤리를 체득하게 됩니다. 세계는 다시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이 되며, 교육은 이를 통해 존재적 깊이를 회복합니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 시대일수록, 교육은 오히려 물성 기반 학습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텃밭은 미래에 견딜 수 있는 속도를 발명하는 실험장이 됩니다. 그리고 씨앗마다 고유한 온도계와 성장 속도, 관계 맺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텃밭은 다양성 그 자체입니다. 속도와 효율에 치우친 교육을 넘어, 학생과 교사가 사물과 관계 맺는 과정을 통해 느린 배움의 의미를 복원할 때, 교육은 인간과 지구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느림의 기술과 버티기의 취약성
오늘날의 사회는 빠름이 곧 진보라는 신화를 내세우며, 속도가 곧 경쟁력이고 생존력이라는 등식을 우리 삶에 강요합니다. 그러나 빠름이 곧 성장이라는 등식은 이미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속화는 생산성과 성과를 높이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적 관계를 붕괴시키고,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개인의 삶을 파편화합니다. 우리는 이제 “느림은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해야 합니다. 느림은 낭비가 아니라, 성찰과 회복의 전제이며, 공동체적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최근 《멈추지 못하는 학교- 입시가속체제와 시간주권》이라는 책을 썼는데, 생태적 전환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텃밭은 느림의 기술을 학생에게 가르칩니다. 씨앗을 심는 순간부터 열매를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학기의 시간보다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합니다. 발아와 성장, 개화와 결실, 그리고 다시 퇴비로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은 인간의 성급함을 무력화하고, 기다림을 통해 배움을 구성하도록 만듭니다. 학생들은 이 느린 시간을 경험하며 버틴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 버팀은 강철 같은 견고함이 아닙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줄기의 연약함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버티는 힘은 오히려 취약성에서 비롯됩니다.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강인함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협력과 돌봄의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텃밭의 새싹은 홀로 자라지 않습니다. 햇빛과 물, 흙과 미생물, 그리고 학생의 손길 속에서만 살아남습니다. 학생은 이를 통해 버티는 것이란 혼자의 완강함이 아니라, 서로 기대고 연결되며 살아가는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취약함은 숨겨야 할 결핍이 아니라, 공동체적 돌봄을 촉진하는 토대가 됩니다. 교육은 이러한 취약성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공간이 될 때 진정한 전환을 이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림은 단순한 지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육적 기술이며, 가속의 신화를 넘어서는 전환의 조건입니다. 버티기의 취약성을 교육과정 속에 드러낼 때, 우리는 더 이상 속도와 경쟁만을 숭배하지 않고, 느림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힘을 배우게 됩니다. 생태적 전환은 바로 이 느린 교육학 속에서 시작됩니다.
관계와 네트워크의 성장
생태적 전환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교육은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인간과 타자, 인간과 비인간 생명 사이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텃밭은 관계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흙과 씨앗, 곤충과 미생물, 햇빛과 바람, 학생과 교사, 나아가 학부모와 지역 사회가 얽히며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학생은 자신이 사소하게 한 행동이 생태망 전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몸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위계적이지 않습니다. 미생물이 토양을 살리고, 벌이 꽃가루를 나르며, 아이들이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상호 얽힘 속에서 배움은 살아납니다. 학생은 자신의 작은 행위가 생명망 전체의 지속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경험하며, 이는 생태 윤리와 기후 정의의 가장 구체적인 수업이 됩니다. 여기서 관계는 단순한 협력이나 공존을 넘어, 서로의 생존을 조건 짓는 얽힘으로 경험됩니다. 교육은 이 얽힘을 학습하게 할 때, 학생을 관계적 주체로 성장시킵니다.
관계성은 곧 성장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텃밭에서의 성장 경험은 점수나 등급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계망이 확장되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누군가를 도우며, 함께 책임지는 과정 속에서 학생은 성장을 체험합니다. 이는 교과 간 융합을 촉진하고, 학교와 마을을 연결하며, 배움을 삶과 다시 이어 주는 힘이 됩니다. 학생의 성장은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텃밭과 함께하는, 저와 제가 속한 모임에서는 ‘교육농’이라고 표현하는데,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지식의 전달을 넘어 관계적 주체로서의 학생을 세우는 것입니다. 텃밭에서의 네트워크 학습은 공동체적 시민성과 행성적 책임을 동시에 길러 내는 토대입니다. 이는 오늘날 기후 위기 시대의 필연적 교육 목표이며,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근본적 준비입니다.
생명을 돌보고 먹이는 교육의 목표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기술 훈련이 아닙니다. 교육의 목표는 모든 생명체들을 돌보고 먹이는 삶의 근원으로서 지구가 항구적 균형을 이루며, 생명체가 더불어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는 선언적 문장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실제적 지향이어야 합니다.
텃밭은 그 목표를 일상 속에서 구현합니다. 학생은 직접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작물을 돌보고, 수확을 나누며 생명 순환의 주체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지구와 연결된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고, 돌봄과 책임을 실천하는 법을 배웁니다. 교육은 추상적 구호를 넘어 구체적 경험으로 체화될 때만 효과를 가집니다. 생명을 돌보는 경험은 교과서에서가 아니라, 텃밭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목표는 미래 세대를 위한 도덕적 명령일 뿐 아니라, 현재 세대가 실천해야 할 생존의 과제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생태적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교육은 이 필연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입니다. 교육과정 속에서 돌봄과 책임, 관계와 느림을 체화할 때, 우리는 미래를 지탱할 힘을 학생에게 길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자리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선언해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텃밭에서 시작되는 느림과 관계, 돌봄과 조화의 교육이야말로 미래 세대가 지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길입니다. 교육이 느린 힘을 다시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아갈 미래를 발명할 수 있습니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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