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완성된 체크리스트 - 성공한 진보교육의 자화상
어떤 교육감의,
완벽한 학교생활기록부
문호진 mh29@naver.com
의사, 《수능 해킹》 공동 저자
연재를 시작하며
체크리스트는 교육을 대체해 버렸다.
이 연재는 이 한 문장을 풀어 읽기 위한 시도다.
관료제가 공통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 프로토콜은,
교육이라는 분야에서 다른 어디와도 다르게 작동한다.
세무서나 병원에서는 기록이 아무리 완벽해도,
세금이 실제로 걷혔는지, 환자가 나았는지가 따로 검증된다.
그와는 달리 교육의 결과란
한 사람의 성장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드러나는 것이어서,
오늘의 교실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지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교육에서는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일 자체만으로 곧 업무가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하기 쉽다.
그런데 사정은 실제로는 이보다 더 까다롭다.
시간이 지나 결과가 드러나도, 교육의 가장 깊은 층은 애초에 목록화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발달이란 무엇인가,
배움은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가,
교실에서 한 아이를 학교에 붙잡아 두는 관계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가장 중요한 변화들은 평가지로 옮기는 순간 의미가 증발하고,
수치로 환산하려 하면 이미 다른 무엇이 되어 있다.
기록하는 순간 왜곡되는 것,
측정할수록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들이 교육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루고 있다.
결국 체크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체크리스트가 교육의 전부가 되어 버린 상황이 문제다.
그리고 그 전환은 진보 교육감의 시대에 가장 조용히, 가장 완전하게 완성되었다.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라는 성과는 그 진영의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 아래에서 교실을 떠받치는 구조는 그대로, 혹은 더 촘촘해졌다.
이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그 성공이 자기 안에서 완결되어 버렸기 때문에,
바깥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이 닫혀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 연재에서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고, 악의가 아니라 선의다.
어떤 이름을 지목하는 순간 초점은 그 개인의 도덕성 논쟁으로 옮겨 가고,
같은 사람을 계속 만들어 내는 구조 자체는 시야에서 빠진다.
진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성공이
어떻게 그 이름 안의 사람들을 닫힌 회로 안에 가두었는지,
그 회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떻게 ‘미숙함’과 ‘무례함’으로 번역되어 사라지는지가 이 연재의 질문이다.
증거는 교실에 있다.
이 연재가 그곳에서 매일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한 장의 지도이기를 바란다.
연재 순서
① 어떤 교육감의, 완벽한 학교생활기록부
② 번역되지 않는 선생님, 칸 밖으로 밀려난 교육
③ 젠틀한 진보교육, 언젠틀한 연대의 목소리
④ 쉼표를 찍을 때
《수능 해킹》 취재를 시작하며 처음 만난 선생님이 있다. 그 선생님은 전교조 경기지부 조합원이었다.
“진보 교육감이 반대편과 이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각종 행사에 나가 봐도 그렇고, 정책을 직접 겪어 보는 입장에서 봐도 그렇다. 마치 대연정이라도 있는 것 같다. 무언가는 질문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질문하더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뿐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이 말부터 꺼냈다. 진보 교육감과 정책이 맞지 않더라도 철학의 방향만은 같은 편이어야 할 전교조 조합원이, 교실에서 올려다 보면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배신감에서 나온 말이라 하기에는 너무 정돈된 형태의, 오랜 관찰 끝에 내린 판정에 가까운 말이었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말이 남았다. 무시가 아니다. 질문은 접수된다. 그런데 접수된 뒤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장면이, 구체적인 양상만 조금씩 달라질 뿐 매번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시스템이 질문을 처리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는 뜻이었다. 분명 전국의 진보 교육감과 보수 교육감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밀약을 맺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실에서 봤을 때 무엇이 그들을 같아 보이게 만드는가.
체크리스트가 교육을 대체할 때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 몇 년간 ‘사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토론회, 컨퍼런스 등 비슷한 자리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능 해킹》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이것은 해킹당한 오늘의 교육에 대한 책이다. 수능 이야기가 아니다. 정시 사교육과 수시 대비 사교육이 구분된 것이 아니다. 같거나 비슷한 주체가 운영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람과 노하우가 옮겨 다닌다. 묶어서 문제 삼고, 묶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모두가 일단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레퍼토리가 다시 반복된다. 교사가 매일 어떤 서류를 쓰는지, 학생이 3년간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지, 학교가 어떤 항목으로 점수를 받는지를 들여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우리의 교육 현장은 체크리스트로 굴러간다. 그리고 서두에서 언급했던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을 밀약 없이도 이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체크리스트다.
‘진보’ 교육감이 재직 중인 서울시교육청의 〈2026 서울교육 주요 업무〉를 열어 보면, 참여와 소통, 자치와 협력, 미래 역량, 창의와 상생, 맞춤형 교육, 공감, 포용, 인성, AI·디지털, 심리·정서 회복이라는 키워드가 정책 방향과 평가 지표 전체를 관통한다. ‘보수’ 교육감이 들어선 경기도교육청의 학교 평가 지표도 다르지 않다.
“새롭게 열어 가는 미래 교육”, “역량 중심 학생 맞춤형 교육”, “자율과 균형으로 함께 성장하는 교육공동체”.
학교는 이 항목들을 얼마나 채웠는지로 평가 받는다. 교사는 교원 능력 개발 평가에서 수업 혁신, 인성 지도, 소통, 창의적 수업 설계 같은 항목에 맞춰 자기 자신을 서술해야 한다.
서울교육포털의 연구 교사제 사례 제목들만 훑어 봐도 패턴은 뚜렷하다. “공동체형 인성 주인공 되기”, “협력적 주도성 기르기”, “세계 시민 감수성 키우기”. 학교, 교사, 교육감, 교육청, 시민 사회, 그리고 이 체계에 연구와 자문과 연수를 공급하는 이들까지, 사실상 같은 체크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여기서 체크리스트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교마다, 학생마다, 교사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 차이를 가로질러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일은 대규모 행정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고, 체크리스트는 그 공통 프로토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어떤 관료제든 구성원을 평가하고 자원을 배분하려면 표준화된 항목이 필요하다. 그것 자체는 관료제가 돌아가는 본질에 가깝다.
그런데 교육에서는 다른 분야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체크리스트가 업무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한다. 세무서에서 체크리스트를 아무리 잘 채워도, 세금이 실제로 걷혔는지는 별도로 확인된다. 병원에서 진료 기록지를 완벽하게 작성해도, 환자가 나았는지는 검사 결과로 드러난다. 체크리스트는 업무의 기록이지 업무 자체가 아니다. 기록을 아무리 잘해도 실물이 따로 검증된다.
교육에서는 이 별도의 검증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교육이라는 분야에는, 애초에 항목이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발달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란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가, 어떤 관계가 한 아이를 붙잡아 두는가. 교육을 깊이 파고들수록 무언가를 단정하는 일에 더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들은 평가지에 옮겨 적는 순간 의미가 증발하고, 수치로 환산하려 하면 이미 다른 무엇이 되어 있다. 목록화할 수 없는 것, 기록하는 순간 왜곡되는 것, 측정할수록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들이 교육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는 체크리스트를 채우면 교육이 이뤄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 항목이 정교해질수록 이 대체는 더 완전해지고, 대체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문제는 체크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체크리스트가 교육의 전부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그 전환이 조용히 일어났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공통 프로토콜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유일한 언어가 되고, 항목 밖에 있는 것을 설명할 말이 사라지고, 항목 안에 들어가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처리된다. 항목이 정교해질수록, 그 항목을 설계하고 갱신하는 데 필요한 전문성의 가치도 함께 올라간다. 체크리스트에서 벗어나는 순간 발생하는 불안, 목록에 없는 상황 앞에서 느끼는 제도적 공포가 교육 행정의 기저음이 되었다.
이 체크리스트에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항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핀란드 교육, IB, 독일의 직업 교육. 한국 교육이 ‘입시 지옥’이라는 외신의 시선에 익숙해진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이런 해외 모델은 나아가야 할 방향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이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 모델의 언어를 읽고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곧 그 모델의 도입과 현지화를 설계하는 자리에도 서게 된다. 연구 용역, 교원 연수, 교재 개발, 컨설팅이라는 실물 사업이 번역자의 자리에 붙으면서, 방향을 읽는 역할은 방향을 만드는 역할로 바뀐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가 학교생활기록부 종합 전형(학종)이다. 학종은 학생에게 성찰, 성장, 주도성, 협력, 창의 같은 키워드로 자기 서사를 구성하도록 요구하고, 서사의 완성도로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학종만 떼어 내 비판하면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학종은 학생에게 적용되는 체크리스트일 뿐이고, 같은 논리가 교사에게는 교원 평가로, 학교에는 학교 평가로, 교육감에게는 주요 업무 달성도로, 출판기념회에서는 도덕 자질 포트폴리오로 반복 적용된다.
체크리스트가 선택하는 인간형
이 체크리스트를 가장 모범적으로 통과한 사례가, 서울 교육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2026년 2월, 서울교육대학교 대강당에서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그의 환영사를 보자. “지난 1년 동안 할머니가 모시 천을 짜듯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서울 교육을 엮어 왔다.” “매일 밤마다 명상하며 오늘 나의 걸음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닿았는지 되돌아 본다.” 행사를 다룬 기사들에서 반복되는 어휘를 나열해 보자. 성찰, 명상, 학생의 꿈, 교사의 헌신, 학부모 신뢰, 소통, 공공성, 미래 비전, 인성과 지혜, 협력, 노무현 시민 학교, 5.18, 과거사, 인권. 이 어휘는 교육부가 학교에 내리고, 학교가 교사에게 내리고, 교사가 학생에게 내리는 바로 그 체크리스트의 최상위 버전이다.
이 체크리스트를 통과해 온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행동 방식이 보인다. 실제로 문제가 해결됐는지, 그 과정에서 위험을 무릅쓰거나 대가를 치렀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 일을 통해 성찰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깊이 느꼈습니다”, “한 뼘 더 성장했습니다”라고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합격이다. 이 방식의 통과에는 공통된 논리가 하나 깔려 있다. “나는 아직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지금은 결과에 대해 책임질 때가 아니다.”
문제는 이 논리에 만기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 때는 과정 중, 청년 때는 성장 중, 중년이 되면 복잡한 맥락, 권력을 잡으면 구조의 한계. “할머니가 모시 천을 짜듯 한 올 한 올”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이 구조다. 아직 짜는 중이므로 완성 전에 평가하지 말라. 진심은 늘 있고, 의도는 늘 좋고, 성찰은 늘 깊다. 다만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시대가 역사교육을 요구하면, 역사 바로잡기를 가장 잘 말하는 사람이 교육감이 된다. 시대가 성찰과 협력을 요구하면, 공동체와 반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이 교육감이 된다. 실제로 2024년 보궐선거 당시 정근식 후보는 선거 운동 첫날 독립문 앞에서 출정식을 열고, 같은 날 오후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역사교육 공약을 발표했다. “뉴라이트 친일 교육 심판”이 핵심 선거 운동 전략이었고, 역사위원회 설치와 역사 자료 센터 건립이 1호 공약에 올랐다. 그런데 2026년 신년 기자 회견에서 교육감의 입에서 나온 키워드는 역량 기반 교육, 교육 패러다임 대전환, AI·디지털 혁신, 학생 성장이었다. 후보 시절 그렇게나 강조했던 역사교육은 긴 나열 속 한 줄로 밀려났다. 선거를 통과하는 데 쓰인 언어가, 통과한 뒤에는 쓸모를 다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감은 후안무치한 권력자인가.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학생운동을 거쳐 학자가 되었고, 4.3 재단 이사,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 국가 폭력의 진상을 규명했고, 광주 인권 헌장을 제정했다. 실제 위험을 감수하며 실천을 이어 간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악의나 위선으로 풀려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력 전체를 하나의 완벽한 생활기록부로 읽으면, 설명은 생각보다 간단해진다.
교육감의 이력을 이 관점으로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운동 서사, 시민 사회 경력, 인권과 과거사 분야에서의 학문적 기여, 성찰 어휘의 숙련. 한국의 경험을 세계에 통하는 말로 번역하고, 세계의 인정을 국내의 정당성으로 환산하는 능력까지. 이 능력은 교육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같은 시스템이 요구한 체크리스트를 가장 성실하게 채워 낸 이력서다. 거기 더해 번역과 환산을 수행하는 연구자, 자문위원, 컨설턴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고, 그 네트워크 전체가 이 이력서의 공동 저자다. 다만 “상황이 복잡하다”는 말로 갈등의 날을 무디게 하고, 결과를 물으면 “모시 천을 짜는 중”이라며 평가를 미루는 화법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서울시교육청 관내 학교에서 가장 모범적이라 할 학생의 모습과 닮았다. 대학의 명시적, 묵시적 요구에 맞춰 생활기록부의 체크리스트를 빠짐없이 채운다. 합격을 얻어 내면, 애써 채워 낸 기록을 바로 까맣게 잊은 채 다음 체크리스트로 넘어간다. 그리고 밖에서 교실을 설명하는 연구자가, 교실에서 늘 학생과 마주하는 선생님을 대신해 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올라선다. 그야말로 시스템이 요구하고 길러 내고자 하는, 이상적 인재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정말로 지금의 교육을 이끌 자격이 있다.
서울의 진보 교육감 계보가 이를 뒷받침한다. 곽노현, 조희연, 정근식. 서울에서 번갈아 선출된 3명의 진보 교육감 모두 서울대 학부 출신으로, 학생운동을 거쳐 교수가 되었고, 민교협이나 참여연대 같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오래 활동한 뒤 교육감에 출마했다. 곽노현은 서울대 법학과 72학번으로 국가인권위 사무총장과 민교협 공동의장을, 조희연은 서울대 사회학과 75학번으로 참여연대 초대 사무처장과 민교협 상임의장을, 정근식은 같은 학과 76학번으로 진실화해위 위원장과 광주 인권 헌장 제정위원장을 역임했다. 시스템이 같은 유형을 반복 선택한다는 증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저 오해다. 정근식 교육감의 등장은 견제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이어 간 시스템이, 끝내 도달하기 마련인 귀결이다. 우리가 이 시스템을 의식적으로 손질하고 견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름이 붙든 그 실체는 비슷한 모양새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교육을 대체해 버린 체크리스트는 그저 통과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원래 그런 리스트이기에, 통과한 뒤에 아무도 이를 지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권력은 늘 이런 인물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요구하는 대로 수행하고, 의심 없이 잊어 버리고, 다음 요구가 내려오면 다시 수행하는 인간상을 가장 편안하게 여긴다. 그야말로 권력판 열역학 제2법칙이라 할 수 있겠다. 시스템은 자신의 일을 훌륭히 마쳤다.
그런데 정작 이 사람들 자신은 누군가에게 체크리스트로 평가받은 적이 거의 없다. 학생일 때는 자기 서사를 직접 쓰고 스스로 점수를 매겼고, 자리를 올라갈수록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아래로 내리는 쪽에 서게 됐다.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평가의 주체로 살아온 것이다. 이따금 반성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일 때조차, 평가하는 쪽과 평가받는 쪽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칸이 없을 때 벌어지는 일
다시 문제의 환영사로 돌아오자. 이는 언뜻 겸손해 보이지만, 공직자가 입에 담기에는 위험한 말들이다. 교육감이 매일 아침 출근 전 넥타이를 매며 명상을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은 검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그 성찰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현장의 학생과 교사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그 명상을 했다는 사실을 공개석상에서 밝혀 봤자, 교실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고위 공직자란 “비가 와도 내 탓, 안 와도 내 탓”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다. 명상은 내가 나를 용서하는 방식이지, 타인에게 입힌 피해를 되돌리는 방식이 아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해 왔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밀려난 일을 어쩔 수 없는 부작용쯤으로 만들어 버린다. 본인이 의식적으로 책임을 피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본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효과는 같다. 성찰했다, 소통했다, 노력했다는 말이 모든 자리를 채우고 나면, 정작 누가 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만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권력의 성찰이 깊어질수록 그 정당성은 두터워지고, 현장의 학생과 교사는 ‘부족한 쪽’으로 밀려난다. 교육감이 “매일 명상하며 되돌아본다”고 말할 때, 되돌아보는 주체는 교육감이고 닿았는지 점검받는 대상은 학생이다. 교육감의 성찰이 정교해질수록,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장의 목소리는 “미숙하다”, “과격하다”, “맥락을 모른다”는 이유로 묻히기 쉬워진다.
그런데 환영사의 어휘 목록으로 돌아가면,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나열된 단어들이 아니라, 이 목록에서 빠진 단어들이다. 지혜복, 공익제보, 학내 성폭력, 부당 전보, 해임, 농성, 연행, 형사 고발, 밀린 임금, 행정적 직권 취소 가능성. 이 부재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스템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살피면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성찰이나 소통 같은 덕목을 말하면 좋은 인상만 남기고 끝이다. 누군가 일부러 사건을 숨기겠다고 작정하지 않아도, 덕목의 언어가 풍성해질수록 사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는 줄어든다.
이 체크리스트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건이 있다. 지혜복 선생님은 학내 성폭력을 제보한 뒤 전보됐고, 전보에 불복하자 해임됐다. 심지어 진실화해위 위원장을 지낸 교육감이 이끄는 교육청 앞에서, 공익제보 교사와 연대자들이 연행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광주는 흘러간 추억이나 누군가의 이력을 증명하는 자산일 수 없다. 이는 국가의 폭력 앞에서 희생되었던, 희생되고 있는, 희생될 이들의 곁에 서서 연대하겠다는 약속이어야만 한다. 광주의 기억을 지키는 데 기여한 이들일수록, 이를 더더욱 권리가 아닌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걸어온 길만 보면 당연히 국가 폭력 피해자의 곁에 서야 했을 그 교육감의 응답은, 대화가 아닌 차단과 법적 조치였다.
교육청의 대응은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원 감축에 따른 전보’, ‘무단결근에 따른 해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 이것은 체크리스트 안에 있는 항목들이다. 교육청은 이 사건을 이미 존재하는 행정 절차의 칸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학내 성폭력을 제보한 지혜복 선생님이 보복 전보를 당했다는 사태는, 그들의 체크리스트 어디에도 해당하는 칸이 없었다. 칸이 없으니 처리할 언어가 없었고, 언어가 없으니 사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교육청은 보이지 않는 사태를 자신들이 볼 수 있는 항목으로 번역한 셈이다. 체크리스트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을, 정원 감축이라는 체크리스트 안의 행정 조치로 치환한 것이다.
740일에 걸친 투쟁 끝에 법원은 지혜복 선생님의 행동이 공익신고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법원이 2년 만에 인정한 것을, 교육청은 2년간 부인해 왔다. 학내 성폭력을 고발한 교사가 법률상 공익제보자라는 사실 하나를.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에는 복직이나 재조사 등의 유의미한 응답을 하지 않았던 교육감은, 판결이 난 뒤에는 “2년여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광주, 인권, 과거사는 교육감의 체크리스트에 있었다. 그런데 ‘공익제보자 보호’는 체크리스트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원 판결은 지혜복 선생님이 교육자로서 마땅한 일을 했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교육감의 체크리스트에는 있었다. 그래서 유감 표명이 이루어졌다. 항목이 될 수 없는 것은 보지 않고, 항목이 채워진 뒤에는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이 글에서 이 사건의 경과를 더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이 누군가의 악의에서만 비롯된 일이었다면 문제는 오히려 단순했을 것이다. 체크리스트가 현실을 대체하는 구조는 누군가의 선악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그 뒤에는 힘과 돈의 논리가 붙어 있다.
체크리스트의 경제학
체크리스트의 각 항목은 평가 기준인 동시에 사업의 씨앗이다. ‘역량 기반 교육’이 항목에 올라가면, 그 항목을 정의하는 연구 용역이 발주된다. 정의가 내려지면 교원 연수가 설계된다. 연수가 끝나면 학교가 그 항목을 얼마나 채웠는지 평가하는 컨설팅이 붙는다. 평가 결과는 보고서가 되고, 보고서는 다음 항목을 설계하는 근거가 된다. 이 순환의 각 단계마다 돈이 오간다. 연구비, 강사료, 자문료, 용역비. 그리고 그 고리마다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가며 앉아 있다.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벌어지든, 행정 당국의 답은 늘 같다. 전문가 단체와 대학 연구소가 참여하는 토론회가 열리고, 그 담론을 바탕으로 MOU가 체결되고 예산이 배정되며 사업이 시작된다. 마땅히 공공 영역이 책임져야 할 과제들이 위탁, 민간 용역, 컨설팅, 민관 산학 연계 등의 경로를 거쳐 수행된다. 이 경로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시민단체 소속을 달고 언론에 출연해 사교육의 폐해를 해부하는 이가 속한 업체가 교육부 산하 기관의 학교 컨설팅 용역을 수행하고, 정치권 싱크탱크의 교육 분과에도 이름을 올린다. AI 시대의 교육 비전을 말하며 교육감 초청 특강에 서는 이가 에듀테크 출판 기업을 운영하면서 정당 정책 연구소에 참여하고, 공공 사업의 민간 자문위원장을 맡는다. 시민단체와 싱크탱크, 정당과 종교단체, 출판사와 컨설팅 업체가, 의제에서든 그 의제에 관여하는 사람의 경력에서든,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게 엮여 있다.
교육감이 토론회에서 방향을 제시하면 그것이 교육계의 담론이 되고, 담론은 기관 간 업무 협약으로 구체화되고, 업무 협약은 예산이 붙은 사업이 되고, 사업은 보고서에 실리는 성과가 되고, 그 성과는 다시 ‘우리는 이만큼 해냈다’는 담론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이 순환의 각 고리, 기획, 자문, 수행, 평가에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가며 앉아 있다. 그 순환 고리 어디에도, 교실에서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묻는 자리는 없다.
이 간극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 서울시교육청의 간판 정책,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이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한국에 맞춰 적용하겠다는 취지의 이 정책은, 조희연 전 교육감이 2023년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을 초청해 실천 교사 선언문을 발표하며 시작되었다. 서울교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참여하는 교원 연수 같은 부속 사업은, 외부 기관과의 협약에 기반한 공적 사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 실무에는 대학 교수 출신이 설립한 민간 컨설팅 업체가 참여하고, 그 업체 대표가 국제 학술 대회에서 교육청 트랙의 지정 토론자로 등단하며, 연수 프로그램에도 관여하는 구조가 드러난다. 공적 자금으로 집행되는 사업의 기획, 자문, 실행, 평가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것이다. 정근식 교육감이 이를 이어받아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교육청의 대표 사업으로 키웠고, 2025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던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과 국회 합동 학생 토론회를 열었고, 2026년에는 초등용 교재를 내놓았다.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사업의 외연은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당연히 이런 행태는 역지사지 토론 수업만이 아니다.
에듀테크나 IB 등의 ‘교육 혁신’ 관련 연수와 컨설팅을 한다며 학교를 찾는 외부 전문가들은, 당연히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서술한 네트워크 안에서 사업을 기획한 사람이 동시에 강사로 서고, 그 연수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같은 네트워크의 다른 구성원이 쓰는 구조다. 현장이 호소하는 어려움은 교육 당국에게 ‘부족한 역량을 배양하는’ 새 사업의 근거일 뿐이기에, 다시 현장의 부담만 가중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입을 모아 “연수가 이자처럼 불어나는 상황”이라 말한다. 이자가 붙으려면 원금이 돌아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외부 전문가가 호출되고, 전문가의 처방이 새로운 사업이 되고, 사업의 성과가 다시 전문가의 실적이 되고, 그 실적이 다음 호출의 근거가 된다. 원금은 현장의 고통이고, 이자는 전문가의 경력이다. 문제가 해결되면 사업이 끝나지만,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면 사업은 계속된다. 현장은 이 시스템의 입력값일 뿐, 출력의 수혜자가 되지 못한다.
서두에서 말한 사교육 비판의 협소함 역시 같은 구조 위에 있다. 비판의 과녁을 넓히면, 대입 전형을 설계하고 컨설팅하는 네트워크가 사정권에 들어온다. 학교생활기록부 컨설팅, 면접 코칭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수시 사교육 시장의 상당 부분은, 그 전형을 만들거나 그 전형의 평가 기준에 정통한 사람들이 운영한다. 과녁이 좁은 것은, 넓히면 자기 발등을 찍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교육 비판의 담론 자체가, 지속 가능한 사업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행사 운영, 담론 형성, 실태 조사, 후속 사업 입안, 연수와 컨설팅에도 같은 네트워크의 전문가들이 관여할 수 있다. 수능과 학원만 겨냥하는 한 비판은 끝없이 반복될 수 있고, 자신들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에 머무를 수 있으며, 사업은 끝없이 갱신될 수 있다.
이것은 불법이 아닐 수도 있다. 누가 뇌물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체크리스트가 정교해질수록 그것을 다룰 전문성의 가치가 올라가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같은 사람들이 순환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이다.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 구조에서는 교실의 고통이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로 자체가 차단된다. 교사와 학생의 목소리가 닿아야 할 자리를 전문가 네트워크가 점유하고, 문제의 진단과 해법의 설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환할 때, 체크리스트는 더 정교해지지만 교실과의 거리는 더 벌어진다.
그래서 체크리스트는 교육을 대체할 뿐 아니라, 교육의 자리에 하나의 산업을 만들어 놓는다. 이 산업은 진보 교육감 아래에서든 보수 교육감 아래에서든 작동한다. 항목의 이름만 바뀔 뿐, 연구 용역, 연수, 컨설팅, 평가가 돌고 도는 구조와, 그 구조 위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다. 선생님이 느낀 “대연정”의 실체가 이것이다.
듣지 않는 자들의 생태학
학술적 성취와 사회적 명망이 공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육 현장에 대한 이해나 현장 당사자의 신뢰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 온 선생님들이나 일선 행정가들보다, 교실에 서 본 적 없는 이들이 당연히 위에 서는 구조부터 살펴봐야 한다.
진보 교육이라는 이름의 생태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이 보인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 환경이 오래 계속되면, 듣는 능력은 저절로 약해진다. 듣는 일에는 비용이 든다.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위협을 인식하고, 자기를 수정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생태계에서는 비판이 외부 소음으로 처리되고, 내부 합의만으로 정당성이 갱신된다. 실패가 드러나면 “맥락이 복잡했다”, “과정을 봐 달라”는 말이 나오고, 그것으로 책임은 흐려진다. 이런 방식이 관행으로 굳어진 환경에서, 듣는 능력은 불필요한 유지 비용이 된다. 그 에너지를 네트워킹, 상징 관리, 그럴듯한 스토리 생산, 연대의 겉치레에 쓰는 쪽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토론회의 좌장 자리, 연구 용역의 자문 위촉, 교원 연수의 강사 선정, 이 모든 것이 그 에너지의 보상으로 주어진다.
듣는 사람은 소진된다. 비판에 민감한 사람은 불편해하고, 책임을 느끼고, 멈추고, 사과하고, 물러난다. 현장의 고통이 들리는 사람은 그 고통을 자기 안에 들여놓는다. 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네트워크 안에서 불안정해지고, 결국 스스로 나가거나 밀려난다. 반면 듣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확신을 유지하고, 네트워크 안에서 안전하며, 상징은 계속 쌓인다. 결국 꼭대기에는 듣지 않는 사람들만이 남는 것은, 듣는 사람들이 중간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 검증 없는 환경에서 자연 선택이 빚어낸 결과다.
비수도권 일반고의 한 선생님은 이 현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지금의 학교 현실에서는 교육을 하고 싶은 사람일수록 더 빠르게 지치고,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다.” 이 생태계에서 비용을 치르는 것은 꼭대기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다. 교실이, 선생님이, 학생이, 그리고 교육 그 자체가 치른다.
이런 환경이 오래 지속되면 한 단계 더 나간 형태가 나타난다. 듣지 않되, 듣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경청합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고, “만나겠다”는 제안이 나오고, “소통”과 “공감”이 정책 문서의 핵심어를 차지한다. 외형은 듣는 장치 그 자체다. 그러나 바깥의 고통과 내부의 작동 방식은 완전히 분리돼 있다. 바깥에서 들어온 말은 무해한 소음으로 바뀌어, 내부의 의사 결정 회로에는 닿지 않는다. 방음벽과 같다. 바깥의 소리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건물의 구조를 흔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소리는 새로운 사업의 근거가 된다. 현장의 호소가 들어오면 그것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연수하고, 평가하는 순환이 돌기 시작하고, 그 고리의 단계마다 전문가가 배치된다.
교육청 밖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민원인’이 되고, 동료의 부당함에 맞서 교문 앞에 서면 ‘업무 방해자’가 되고, 해임된 교사의 밀린 임금과 연대하다가 부상당한 노동자의 치료비를 요구하면 ‘돈 달라는 사람’이 된다.
글의 첫머리에서 대연정 이야기를 했던 선생님의 증언을 다시 보자. 질문은 접수된다. 접수된 뒤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질문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안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선출되지 않는 사람들
비수도권에서 오랫동안 교육운동을 해 온 또 다른 선생님이 있다. 앞서 등장한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전교조 조합원이다. 이 선생님은 교육청에 들어간 옛 동료들이 현장 교사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되는 것을 매번 겪는다고 말했다. 같은 문제를 놓고도 쓰는 단어부터 달라지고, 교실에서 실제로 무엇이 벌어지는지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이 증언이 가리키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변절이 아니다. 들어가면 바뀐다. 누구든 바뀐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 들어가면 바뀌게 만드는 구조 자체다.
정근식 교육감의 행적 역시 개인적 실패의 차원에서만 읽을 수는 없다. 학자의 궤적과 교육감의 책무는 다르고, 교육청이라는 시스템은 그 안에 들어서는 사람을 바꾼다. 교육청으로 합류하는 정무직과 별정직, 현장 교사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궤도에 들어서면 교육의 공공성이나 교사와 학생의 고통보다 홍보, 실적 관리, 행정적 안정,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이 일상의 과제가 된다.
대학 교수가 초·중등교육의 수장이 되는 것이 이 구조의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바로 아래층에는 또 다른 회전문이 있다. 교육감 주변의 정무직과 별정직에는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 시민단체 출신의 외부 인사들이 교육감의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다수 포진해 왔다. 여기에는 교육이 내부자의 논리로만 굴러가지 않도록 한다는, 충분히 근거 있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내부 비판도 교체도 없이 자리가 고착되면서 시스템이 그들을 관료로 만들었고, 시스템의 언어가 어느새 그들의 언어가 되었다. 조희연 체제 10년과 정근식 체제를 거치며, 이 회전문 인사들은 교육청 안에서 자기 완결적인 상설 조직처럼 자리를 잡았다. 성공한 시스템이 형성한 인의 장막은 그 자체의 인력을 갖고 있어서, 그 안에 오래 머물수록 바깥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연대의 언어와 기억마저 장막의 일부가 된다.
진보 교육감이 무상 급식을 도입하고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보수 교육감이 기초학력을 강조하고 학교 자율성을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차이는 체크리스트 위에 어떤 단어를 올리느냐의 문제다. 체크리스트 아래에 있는 것, 즉 항목을 설계하고 연수하고 평가하고 그 순환에서 경력과 수입을 얻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교육감이 바뀌면 항목의 이름이 바뀌고, 이름이 달라지면 새로운 연구 용역이 발주되고, 새 연수 프로그램이 설계된다. 네트워크는 간판을 갈아 달고 새 항목에 적응한다. 교실에서 올려다보는 학생과 선생님들에게는, 어디서든, 언제든 같은 풍경이 보인다. 항목이 “민주시민교육”이든 “기초학력 보장”이든, 교사에게 내려오는 것은 새 연수, 새 보고 양식, 새 평가 항목, 새 외부 전문가다. 교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교육과 이 항목들 사이의 간극은, 어느 쪽이 집권하든 같은 방식으로, 같은 크기로 벌어진다.
선출 교육감 제도 자체를 문제 삼는 목소리는 늘 있어 왔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그런 결론으로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 교육감은 선출된다. 그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 문제는 교육감이 아니라, 교육감 아래에서 체크리스트를 설계하고 연수를 기획하고 학교를 평가하는 네트워크다. 이 사람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교육감이 바뀌어도 자리를 유지하거나, 이름표를 바꿔 달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교실의 교사와 학생이 매일 겪는 교육의 구체적 조건, 무슨 연수를 받아야 하고, 무슨 항목으로 평가받고, 어떤 외부 전문가의 컨설팅을 들어야 하는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교육감이 아니라 이 네트워크다. 교육감은 방향을 선언하지만, 그 방향이 교실에 도달하는 경로의 모든 단계를 이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다.
이 사람들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교실에서 오지 않는다. 교사들이 뽑지 않았고, 학생이 선택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연구를 인용하고, 서로의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앉아 주는 것으로 정당성이 만들어진다. 이 정당성은 자기 완결적이다. 교육감 선거에서 유권자는 후보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 후보가 당선된 뒤 교실에 실제로 무엇이 내려오는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권자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묻지 않은 질문
그런데 기득권 네트워크라고 하면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우리와는 무관한, 어딘가 높은 곳의 막연한 문제처럼 읽힌다. 정말 그러한가. 이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아는 어떤 얼굴, 어떤 단체일 수 있다.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는 교수, 연수에 강사로 오는 연구자, 교육 관련 기사에 자주 인용되는 시민단체 관계자, 정책 보고서 뒤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문위원.
이 글에서 되도록 특정한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다. 근거는 충분히 쌓였다. 다만 어떤 이름을 지목하면 초점이 그 개인이나 단체의 도덕성으로 옮겨 가고, 그런 이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구조는 시야에서 빠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그 구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훌륭한 과거가 있다. 학생운동을 했을 수 있다. 시민 사회에서 사교육의 폐해를 고발했을 수 있다. 불평등과 인권에 대한 학문적 기여를 했을 수 있다. 진보 언론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한 가지는 물어야 한다. 지금 이 사람들이 매일 실제로 하는 일이, 과거에 그들의 이름에 무게를 실어 준 헌신과 같은 종류의 일인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이 질문을 하지 않는 한, 더 진실한 이들이, 더 좋은 의제를 외치며 다시 교육감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내일의 교실이 오늘보다 나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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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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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완성된 체크리스트 - 성공한 진보교육의 자화상
어떤 교육감의,
완벽한 학교생활기록부
문호진 mh29@naver.com
의사, 《수능 해킹》 공동 저자
《수능 해킹》 취재를 시작하며 처음 만난 선생님이 있다. 그 선생님은 전교조 경기지부 조합원이었다.
“진보 교육감이 반대편과 이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각종 행사에 나가 봐도 그렇고, 정책을 직접 겪어 보는 입장에서 봐도 그렇다. 마치 대연정이라도 있는 것 같다. 무언가는 질문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질문하더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뿐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이 말부터 꺼냈다. 진보 교육감과 정책이 맞지 않더라도 철학의 방향만은 같은 편이어야 할 전교조 조합원이, 교실에서 올려다 보면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배신감에서 나온 말이라 하기에는 너무 정돈된 형태의, 오랜 관찰 끝에 내린 판정에 가까운 말이었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말이 남았다. 무시가 아니다. 질문은 접수된다. 그런데 접수된 뒤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장면이, 구체적인 양상만 조금씩 달라질 뿐 매번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시스템이 질문을 처리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는 뜻이었다. 분명 전국의 진보 교육감과 보수 교육감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밀약을 맺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실에서 봤을 때 무엇이 그들을 같아 보이게 만드는가.
체크리스트가 교육을 대체할 때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 몇 년간 ‘사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토론회, 컨퍼런스 등 비슷한 자리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능 해킹》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이것은 해킹당한 오늘의 교육에 대한 책이다. 수능 이야기가 아니다. 정시 사교육과 수시 대비 사교육이 구분된 것이 아니다. 같거나 비슷한 주체가 운영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람과 노하우가 옮겨 다닌다. 묶어서 문제 삼고, 묶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모두가 일단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레퍼토리가 다시 반복된다. 교사가 매일 어떤 서류를 쓰는지, 학생이 3년간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지, 학교가 어떤 항목으로 점수를 받는지를 들여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우리의 교육 현장은 체크리스트로 굴러간다. 그리고 서두에서 언급했던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을 밀약 없이도 이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체크리스트다.
‘진보’ 교육감이 재직 중인 서울시교육청의 〈2026 서울교육 주요 업무〉를 열어 보면, 참여와 소통, 자치와 협력, 미래 역량, 창의와 상생, 맞춤형 교육, 공감, 포용, 인성, AI·디지털, 심리·정서 회복이라는 키워드가 정책 방향과 평가 지표 전체를 관통한다. ‘보수’ 교육감이 들어선 경기도교육청의 학교 평가 지표도 다르지 않다.
“새롭게 열어 가는 미래 교육”, “역량 중심 학생 맞춤형 교육”, “자율과 균형으로 함께 성장하는 교육공동체”.
학교는 이 항목들을 얼마나 채웠는지로 평가 받는다. 교사는 교원 능력 개발 평가에서 수업 혁신, 인성 지도, 소통, 창의적 수업 설계 같은 항목에 맞춰 자기 자신을 서술해야 한다.
서울교육포털의 연구 교사제 사례 제목들만 훑어 봐도 패턴은 뚜렷하다. “공동체형 인성 주인공 되기”, “협력적 주도성 기르기”, “세계 시민 감수성 키우기”. 학교, 교사, 교육감, 교육청, 시민 사회, 그리고 이 체계에 연구와 자문과 연수를 공급하는 이들까지, 사실상 같은 체크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여기서 체크리스트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교마다, 학생마다, 교사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 차이를 가로질러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일은 대규모 행정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고, 체크리스트는 그 공통 프로토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어떤 관료제든 구성원을 평가하고 자원을 배분하려면 표준화된 항목이 필요하다. 그것 자체는 관료제가 돌아가는 본질에 가깝다.
그런데 교육에서는 다른 분야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체크리스트가 업무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한다. 세무서에서 체크리스트를 아무리 잘 채워도, 세금이 실제로 걷혔는지는 별도로 확인된다. 병원에서 진료 기록지를 완벽하게 작성해도, 환자가 나았는지는 검사 결과로 드러난다. 체크리스트는 업무의 기록이지 업무 자체가 아니다. 기록을 아무리 잘해도 실물이 따로 검증된다.
교육에서는 이 별도의 검증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교육이라는 분야에는, 애초에 항목이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발달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란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가, 어떤 관계가 한 아이를 붙잡아 두는가. 교육을 깊이 파고들수록 무언가를 단정하는 일에 더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들은 평가지에 옮겨 적는 순간 의미가 증발하고, 수치로 환산하려 하면 이미 다른 무엇이 되어 있다. 목록화할 수 없는 것, 기록하는 순간 왜곡되는 것, 측정할수록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들이 교육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는 체크리스트를 채우면 교육이 이뤄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 항목이 정교해질수록 이 대체는 더 완전해지고, 대체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문제는 체크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체크리스트가 교육의 전부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그 전환이 조용히 일어났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공통 프로토콜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유일한 언어가 되고, 항목 밖에 있는 것을 설명할 말이 사라지고, 항목 안에 들어가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처리된다. 항목이 정교해질수록, 그 항목을 설계하고 갱신하는 데 필요한 전문성의 가치도 함께 올라간다. 체크리스트에서 벗어나는 순간 발생하는 불안, 목록에 없는 상황 앞에서 느끼는 제도적 공포가 교육 행정의 기저음이 되었다.
이 체크리스트에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항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핀란드 교육, IB, 독일의 직업 교육. 한국 교육이 ‘입시 지옥’이라는 외신의 시선에 익숙해진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이런 해외 모델은 나아가야 할 방향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이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 모델의 언어를 읽고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곧 그 모델의 도입과 현지화를 설계하는 자리에도 서게 된다. 연구 용역, 교원 연수, 교재 개발, 컨설팅이라는 실물 사업이 번역자의 자리에 붙으면서, 방향을 읽는 역할은 방향을 만드는 역할로 바뀐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가 학교생활기록부 종합 전형(학종)이다. 학종은 학생에게 성찰, 성장, 주도성, 협력, 창의 같은 키워드로 자기 서사를 구성하도록 요구하고, 서사의 완성도로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학종만 떼어 내 비판하면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학종은 학생에게 적용되는 체크리스트일 뿐이고, 같은 논리가 교사에게는 교원 평가로, 학교에는 학교 평가로, 교육감에게는 주요 업무 달성도로, 출판기념회에서는 도덕 자질 포트폴리오로 반복 적용된다.
체크리스트가 선택하는 인간형
이 체크리스트를 가장 모범적으로 통과한 사례가, 서울 교육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2026년 2월, 서울교육대학교 대강당에서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그의 환영사를 보자. “지난 1년 동안 할머니가 모시 천을 짜듯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서울 교육을 엮어 왔다.” “매일 밤마다 명상하며 오늘 나의 걸음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닿았는지 되돌아 본다.” 행사를 다룬 기사들에서 반복되는 어휘를 나열해 보자. 성찰, 명상, 학생의 꿈, 교사의 헌신, 학부모 신뢰, 소통, 공공성, 미래 비전, 인성과 지혜, 협력, 노무현 시민 학교, 5.18, 과거사, 인권. 이 어휘는 교육부가 학교에 내리고, 학교가 교사에게 내리고, 교사가 학생에게 내리는 바로 그 체크리스트의 최상위 버전이다.
이 체크리스트를 통과해 온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행동 방식이 보인다. 실제로 문제가 해결됐는지, 그 과정에서 위험을 무릅쓰거나 대가를 치렀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 일을 통해 성찰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깊이 느꼈습니다”, “한 뼘 더 성장했습니다”라고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합격이다. 이 방식의 통과에는 공통된 논리가 하나 깔려 있다. “나는 아직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지금은 결과에 대해 책임질 때가 아니다.”
문제는 이 논리에 만기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 때는 과정 중, 청년 때는 성장 중, 중년이 되면 복잡한 맥락, 권력을 잡으면 구조의 한계. “할머니가 모시 천을 짜듯 한 올 한 올”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이 구조다. 아직 짜는 중이므로 완성 전에 평가하지 말라. 진심은 늘 있고, 의도는 늘 좋고, 성찰은 늘 깊다. 다만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시대가 역사교육을 요구하면, 역사 바로잡기를 가장 잘 말하는 사람이 교육감이 된다. 시대가 성찰과 협력을 요구하면, 공동체와 반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이 교육감이 된다. 실제로 2024년 보궐선거 당시 정근식 후보는 선거 운동 첫날 독립문 앞에서 출정식을 열고, 같은 날 오후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역사교육 공약을 발표했다. “뉴라이트 친일 교육 심판”이 핵심 선거 운동 전략이었고, 역사위원회 설치와 역사 자료 센터 건립이 1호 공약에 올랐다. 그런데 2026년 신년 기자 회견에서 교육감의 입에서 나온 키워드는 역량 기반 교육, 교육 패러다임 대전환, AI·디지털 혁신, 학생 성장이었다. 후보 시절 그렇게나 강조했던 역사교육은 긴 나열 속 한 줄로 밀려났다. 선거를 통과하는 데 쓰인 언어가, 통과한 뒤에는 쓸모를 다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감은 후안무치한 권력자인가.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학생운동을 거쳐 학자가 되었고, 4.3 재단 이사,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 국가 폭력의 진상을 규명했고, 광주 인권 헌장을 제정했다. 실제 위험을 감수하며 실천을 이어 간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악의나 위선으로 풀려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력 전체를 하나의 완벽한 생활기록부로 읽으면, 설명은 생각보다 간단해진다.
교육감의 이력을 이 관점으로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운동 서사, 시민 사회 경력, 인권과 과거사 분야에서의 학문적 기여, 성찰 어휘의 숙련. 한국의 경험을 세계에 통하는 말로 번역하고, 세계의 인정을 국내의 정당성으로 환산하는 능력까지. 이 능력은 교육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같은 시스템이 요구한 체크리스트를 가장 성실하게 채워 낸 이력서다. 거기 더해 번역과 환산을 수행하는 연구자, 자문위원, 컨설턴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고, 그 네트워크 전체가 이 이력서의 공동 저자다. 다만 “상황이 복잡하다”는 말로 갈등의 날을 무디게 하고, 결과를 물으면 “모시 천을 짜는 중”이라며 평가를 미루는 화법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서울시교육청 관내 학교에서 가장 모범적이라 할 학생의 모습과 닮았다. 대학의 명시적, 묵시적 요구에 맞춰 생활기록부의 체크리스트를 빠짐없이 채운다. 합격을 얻어 내면, 애써 채워 낸 기록을 바로 까맣게 잊은 채 다음 체크리스트로 넘어간다. 그리고 밖에서 교실을 설명하는 연구자가, 교실에서 늘 학생과 마주하는 선생님을 대신해 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올라선다. 그야말로 시스템이 요구하고 길러 내고자 하는, 이상적 인재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정말로 지금의 교육을 이끌 자격이 있다.
서울의 진보 교육감 계보가 이를 뒷받침한다. 곽노현, 조희연, 정근식. 서울에서 번갈아 선출된 3명의 진보 교육감 모두 서울대 학부 출신으로, 학생운동을 거쳐 교수가 되었고, 민교협이나 참여연대 같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오래 활동한 뒤 교육감에 출마했다. 곽노현은 서울대 법학과 72학번으로 국가인권위 사무총장과 민교협 공동의장을, 조희연은 서울대 사회학과 75학번으로 참여연대 초대 사무처장과 민교협 상임의장을, 정근식은 같은 학과 76학번으로 진실화해위 위원장과 광주 인권 헌장 제정위원장을 역임했다. 시스템이 같은 유형을 반복 선택한다는 증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저 오해다. 정근식 교육감의 등장은 견제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이어 간 시스템이, 끝내 도달하기 마련인 귀결이다. 우리가 이 시스템을 의식적으로 손질하고 견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름이 붙든 그 실체는 비슷한 모양새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교육을 대체해 버린 체크리스트는 그저 통과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원래 그런 리스트이기에, 통과한 뒤에 아무도 이를 지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권력은 늘 이런 인물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요구하는 대로 수행하고, 의심 없이 잊어 버리고, 다음 요구가 내려오면 다시 수행하는 인간상을 가장 편안하게 여긴다. 그야말로 권력판 열역학 제2법칙이라 할 수 있겠다. 시스템은 자신의 일을 훌륭히 마쳤다.
그런데 정작 이 사람들 자신은 누군가에게 체크리스트로 평가받은 적이 거의 없다. 학생일 때는 자기 서사를 직접 쓰고 스스로 점수를 매겼고, 자리를 올라갈수록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아래로 내리는 쪽에 서게 됐다.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평가의 주체로 살아온 것이다. 이따금 반성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일 때조차, 평가하는 쪽과 평가받는 쪽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칸이 없을 때 벌어지는 일
다시 문제의 환영사로 돌아오자. 이는 언뜻 겸손해 보이지만, 공직자가 입에 담기에는 위험한 말들이다. 교육감이 매일 아침 출근 전 넥타이를 매며 명상을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은 검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그 성찰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현장의 학생과 교사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그 명상을 했다는 사실을 공개석상에서 밝혀 봤자, 교실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고위 공직자란 “비가 와도 내 탓, 안 와도 내 탓”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다. 명상은 내가 나를 용서하는 방식이지, 타인에게 입힌 피해를 되돌리는 방식이 아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해 왔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밀려난 일을 어쩔 수 없는 부작용쯤으로 만들어 버린다. 본인이 의식적으로 책임을 피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본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효과는 같다. 성찰했다, 소통했다, 노력했다는 말이 모든 자리를 채우고 나면, 정작 누가 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만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권력의 성찰이 깊어질수록 그 정당성은 두터워지고, 현장의 학생과 교사는 ‘부족한 쪽’으로 밀려난다. 교육감이 “매일 명상하며 되돌아본다”고 말할 때, 되돌아보는 주체는 교육감이고 닿았는지 점검받는 대상은 학생이다. 교육감의 성찰이 정교해질수록,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장의 목소리는 “미숙하다”, “과격하다”, “맥락을 모른다”는 이유로 묻히기 쉬워진다.
그런데 환영사의 어휘 목록으로 돌아가면,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나열된 단어들이 아니라, 이 목록에서 빠진 단어들이다. 지혜복, 공익제보, 학내 성폭력, 부당 전보, 해임, 농성, 연행, 형사 고발, 밀린 임금, 행정적 직권 취소 가능성. 이 부재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스템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살피면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성찰이나 소통 같은 덕목을 말하면 좋은 인상만 남기고 끝이다. 누군가 일부러 사건을 숨기겠다고 작정하지 않아도, 덕목의 언어가 풍성해질수록 사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는 줄어든다.
이 체크리스트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건이 있다. 지혜복 선생님은 학내 성폭력을 제보한 뒤 전보됐고, 전보에 불복하자 해임됐다. 심지어 진실화해위 위원장을 지낸 교육감이 이끄는 교육청 앞에서, 공익제보 교사와 연대자들이 연행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광주는 흘러간 추억이나 누군가의 이력을 증명하는 자산일 수 없다. 이는 국가의 폭력 앞에서 희생되었던, 희생되고 있는, 희생될 이들의 곁에 서서 연대하겠다는 약속이어야만 한다. 광주의 기억을 지키는 데 기여한 이들일수록, 이를 더더욱 권리가 아닌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걸어온 길만 보면 당연히 국가 폭력 피해자의 곁에 서야 했을 그 교육감의 응답은, 대화가 아닌 차단과 법적 조치였다.
교육청의 대응은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원 감축에 따른 전보’, ‘무단결근에 따른 해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 이것은 체크리스트 안에 있는 항목들이다. 교육청은 이 사건을 이미 존재하는 행정 절차의 칸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학내 성폭력을 제보한 지혜복 선생님이 보복 전보를 당했다는 사태는, 그들의 체크리스트 어디에도 해당하는 칸이 없었다. 칸이 없으니 처리할 언어가 없었고, 언어가 없으니 사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교육청은 보이지 않는 사태를 자신들이 볼 수 있는 항목으로 번역한 셈이다. 체크리스트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을, 정원 감축이라는 체크리스트 안의 행정 조치로 치환한 것이다.
740일에 걸친 투쟁 끝에 법원은 지혜복 선생님의 행동이 공익신고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법원이 2년 만에 인정한 것을, 교육청은 2년간 부인해 왔다. 학내 성폭력을 고발한 교사가 법률상 공익제보자라는 사실 하나를.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에는 복직이나 재조사 등의 유의미한 응답을 하지 않았던 교육감은, 판결이 난 뒤에는 “2년여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광주, 인권, 과거사는 교육감의 체크리스트에 있었다. 그런데 ‘공익제보자 보호’는 체크리스트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원 판결은 지혜복 선생님이 교육자로서 마땅한 일을 했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교육감의 체크리스트에는 있었다. 그래서 유감 표명이 이루어졌다. 항목이 될 수 없는 것은 보지 않고, 항목이 채워진 뒤에는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이 글에서 이 사건의 경과를 더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이 누군가의 악의에서만 비롯된 일이었다면 문제는 오히려 단순했을 것이다. 체크리스트가 현실을 대체하는 구조는 누군가의 선악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그 뒤에는 힘과 돈의 논리가 붙어 있다.
체크리스트의 경제학
체크리스트의 각 항목은 평가 기준인 동시에 사업의 씨앗이다. ‘역량 기반 교육’이 항목에 올라가면, 그 항목을 정의하는 연구 용역이 발주된다. 정의가 내려지면 교원 연수가 설계된다. 연수가 끝나면 학교가 그 항목을 얼마나 채웠는지 평가하는 컨설팅이 붙는다. 평가 결과는 보고서가 되고, 보고서는 다음 항목을 설계하는 근거가 된다. 이 순환의 각 단계마다 돈이 오간다. 연구비, 강사료, 자문료, 용역비. 그리고 그 고리마다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가며 앉아 있다.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벌어지든, 행정 당국의 답은 늘 같다. 전문가 단체와 대학 연구소가 참여하는 토론회가 열리고, 그 담론을 바탕으로 MOU가 체결되고 예산이 배정되며 사업이 시작된다. 마땅히 공공 영역이 책임져야 할 과제들이 위탁, 민간 용역, 컨설팅, 민관 산학 연계 등의 경로를 거쳐 수행된다. 이 경로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시민단체 소속을 달고 언론에 출연해 사교육의 폐해를 해부하는 이가 속한 업체가 교육부 산하 기관의 학교 컨설팅 용역을 수행하고, 정치권 싱크탱크의 교육 분과에도 이름을 올린다. AI 시대의 교육 비전을 말하며 교육감 초청 특강에 서는 이가 에듀테크 출판 기업을 운영하면서 정당 정책 연구소에 참여하고, 공공 사업의 민간 자문위원장을 맡는다. 시민단체와 싱크탱크, 정당과 종교단체, 출판사와 컨설팅 업체가, 의제에서든 그 의제에 관여하는 사람의 경력에서든,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게 엮여 있다.
교육감이 토론회에서 방향을 제시하면 그것이 교육계의 담론이 되고, 담론은 기관 간 업무 협약으로 구체화되고, 업무 협약은 예산이 붙은 사업이 되고, 사업은 보고서에 실리는 성과가 되고, 그 성과는 다시 ‘우리는 이만큼 해냈다’는 담론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이 순환의 각 고리, 기획, 자문, 수행, 평가에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가며 앉아 있다. 그 순환 고리 어디에도, 교실에서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묻는 자리는 없다.
이 간극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 서울시교육청의 간판 정책,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이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한국에 맞춰 적용하겠다는 취지의 이 정책은, 조희연 전 교육감이 2023년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을 초청해 실천 교사 선언문을 발표하며 시작되었다. 서울교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참여하는 교원 연수 같은 부속 사업은, 외부 기관과의 협약에 기반한 공적 사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 실무에는 대학 교수 출신이 설립한 민간 컨설팅 업체가 참여하고, 그 업체 대표가 국제 학술 대회에서 교육청 트랙의 지정 토론자로 등단하며, 연수 프로그램에도 관여하는 구조가 드러난다. 공적 자금으로 집행되는 사업의 기획, 자문, 실행, 평가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것이다. 정근식 교육감이 이를 이어받아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교육청의 대표 사업으로 키웠고, 2025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던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과 국회 합동 학생 토론회를 열었고, 2026년에는 초등용 교재를 내놓았다.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사업의 외연은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당연히 이런 행태는 역지사지 토론 수업만이 아니다.
에듀테크나 IB 등의 ‘교육 혁신’ 관련 연수와 컨설팅을 한다며 학교를 찾는 외부 전문가들은, 당연히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서술한 네트워크 안에서 사업을 기획한 사람이 동시에 강사로 서고, 그 연수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같은 네트워크의 다른 구성원이 쓰는 구조다. 현장이 호소하는 어려움은 교육 당국에게 ‘부족한 역량을 배양하는’ 새 사업의 근거일 뿐이기에, 다시 현장의 부담만 가중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입을 모아 “연수가 이자처럼 불어나는 상황”이라 말한다. 이자가 붙으려면 원금이 돌아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외부 전문가가 호출되고, 전문가의 처방이 새로운 사업이 되고, 사업의 성과가 다시 전문가의 실적이 되고, 그 실적이 다음 호출의 근거가 된다. 원금은 현장의 고통이고, 이자는 전문가의 경력이다. 문제가 해결되면 사업이 끝나지만,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면 사업은 계속된다. 현장은 이 시스템의 입력값일 뿐, 출력의 수혜자가 되지 못한다.
서두에서 말한 사교육 비판의 협소함 역시 같은 구조 위에 있다. 비판의 과녁을 넓히면, 대입 전형을 설계하고 컨설팅하는 네트워크가 사정권에 들어온다. 학교생활기록부 컨설팅, 면접 코칭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수시 사교육 시장의 상당 부분은, 그 전형을 만들거나 그 전형의 평가 기준에 정통한 사람들이 운영한다. 과녁이 좁은 것은, 넓히면 자기 발등을 찍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교육 비판의 담론 자체가, 지속 가능한 사업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행사 운영, 담론 형성, 실태 조사, 후속 사업 입안, 연수와 컨설팅에도 같은 네트워크의 전문가들이 관여할 수 있다. 수능과 학원만 겨냥하는 한 비판은 끝없이 반복될 수 있고, 자신들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에 머무를 수 있으며, 사업은 끝없이 갱신될 수 있다.
이것은 불법이 아닐 수도 있다. 누가 뇌물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체크리스트가 정교해질수록 그것을 다룰 전문성의 가치가 올라가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같은 사람들이 순환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이다.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 구조에서는 교실의 고통이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로 자체가 차단된다. 교사와 학생의 목소리가 닿아야 할 자리를 전문가 네트워크가 점유하고, 문제의 진단과 해법의 설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환할 때, 체크리스트는 더 정교해지지만 교실과의 거리는 더 벌어진다.
그래서 체크리스트는 교육을 대체할 뿐 아니라, 교육의 자리에 하나의 산업을 만들어 놓는다. 이 산업은 진보 교육감 아래에서든 보수 교육감 아래에서든 작동한다. 항목의 이름만 바뀔 뿐, 연구 용역, 연수, 컨설팅, 평가가 돌고 도는 구조와, 그 구조 위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다. 선생님이 느낀 “대연정”의 실체가 이것이다.
듣지 않는 자들의 생태학
학술적 성취와 사회적 명망이 공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육 현장에 대한 이해나 현장 당사자의 신뢰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 온 선생님들이나 일선 행정가들보다, 교실에 서 본 적 없는 이들이 당연히 위에 서는 구조부터 살펴봐야 한다.
진보 교육이라는 이름의 생태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이 보인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 환경이 오래 계속되면, 듣는 능력은 저절로 약해진다. 듣는 일에는 비용이 든다.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위협을 인식하고, 자기를 수정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생태계에서는 비판이 외부 소음으로 처리되고, 내부 합의만으로 정당성이 갱신된다. 실패가 드러나면 “맥락이 복잡했다”, “과정을 봐 달라”는 말이 나오고, 그것으로 책임은 흐려진다. 이런 방식이 관행으로 굳어진 환경에서, 듣는 능력은 불필요한 유지 비용이 된다. 그 에너지를 네트워킹, 상징 관리, 그럴듯한 스토리 생산, 연대의 겉치레에 쓰는 쪽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토론회의 좌장 자리, 연구 용역의 자문 위촉, 교원 연수의 강사 선정, 이 모든 것이 그 에너지의 보상으로 주어진다.
듣는 사람은 소진된다. 비판에 민감한 사람은 불편해하고, 책임을 느끼고, 멈추고, 사과하고, 물러난다. 현장의 고통이 들리는 사람은 그 고통을 자기 안에 들여놓는다. 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네트워크 안에서 불안정해지고, 결국 스스로 나가거나 밀려난다. 반면 듣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확신을 유지하고, 네트워크 안에서 안전하며, 상징은 계속 쌓인다. 결국 꼭대기에는 듣지 않는 사람들만이 남는 것은, 듣는 사람들이 중간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 검증 없는 환경에서 자연 선택이 빚어낸 결과다.
비수도권 일반고의 한 선생님은 이 현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지금의 학교 현실에서는 교육을 하고 싶은 사람일수록 더 빠르게 지치고,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다.” 이 생태계에서 비용을 치르는 것은 꼭대기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다. 교실이, 선생님이, 학생이, 그리고 교육 그 자체가 치른다.
이런 환경이 오래 지속되면 한 단계 더 나간 형태가 나타난다. 듣지 않되, 듣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경청합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고, “만나겠다”는 제안이 나오고, “소통”과 “공감”이 정책 문서의 핵심어를 차지한다. 외형은 듣는 장치 그 자체다. 그러나 바깥의 고통과 내부의 작동 방식은 완전히 분리돼 있다. 바깥에서 들어온 말은 무해한 소음으로 바뀌어, 내부의 의사 결정 회로에는 닿지 않는다. 방음벽과 같다. 바깥의 소리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건물의 구조를 흔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소리는 새로운 사업의 근거가 된다. 현장의 호소가 들어오면 그것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연수하고, 평가하는 순환이 돌기 시작하고, 그 고리의 단계마다 전문가가 배치된다.
교육청 밖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민원인’이 되고, 동료의 부당함에 맞서 교문 앞에 서면 ‘업무 방해자’가 되고, 해임된 교사의 밀린 임금과 연대하다가 부상당한 노동자의 치료비를 요구하면 ‘돈 달라는 사람’이 된다.
글의 첫머리에서 대연정 이야기를 했던 선생님의 증언을 다시 보자. 질문은 접수된다. 접수된 뒤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질문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안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선출되지 않는 사람들
비수도권에서 오랫동안 교육운동을 해 온 또 다른 선생님이 있다. 앞서 등장한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전교조 조합원이다. 이 선생님은 교육청에 들어간 옛 동료들이 현장 교사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되는 것을 매번 겪는다고 말했다. 같은 문제를 놓고도 쓰는 단어부터 달라지고, 교실에서 실제로 무엇이 벌어지는지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이 증언이 가리키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변절이 아니다. 들어가면 바뀐다. 누구든 바뀐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 들어가면 바뀌게 만드는 구조 자체다.
정근식 교육감의 행적 역시 개인적 실패의 차원에서만 읽을 수는 없다. 학자의 궤적과 교육감의 책무는 다르고, 교육청이라는 시스템은 그 안에 들어서는 사람을 바꾼다. 교육청으로 합류하는 정무직과 별정직, 현장 교사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궤도에 들어서면 교육의 공공성이나 교사와 학생의 고통보다 홍보, 실적 관리, 행정적 안정,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이 일상의 과제가 된다.
대학 교수가 초·중등교육의 수장이 되는 것이 이 구조의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바로 아래층에는 또 다른 회전문이 있다. 교육감 주변의 정무직과 별정직에는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 시민단체 출신의 외부 인사들이 교육감의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다수 포진해 왔다. 여기에는 교육이 내부자의 논리로만 굴러가지 않도록 한다는, 충분히 근거 있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내부 비판도 교체도 없이 자리가 고착되면서 시스템이 그들을 관료로 만들었고, 시스템의 언어가 어느새 그들의 언어가 되었다. 조희연 체제 10년과 정근식 체제를 거치며, 이 회전문 인사들은 교육청 안에서 자기 완결적인 상설 조직처럼 자리를 잡았다. 성공한 시스템이 형성한 인의 장막은 그 자체의 인력을 갖고 있어서, 그 안에 오래 머물수록 바깥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연대의 언어와 기억마저 장막의 일부가 된다.
진보 교육감이 무상 급식을 도입하고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보수 교육감이 기초학력을 강조하고 학교 자율성을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차이는 체크리스트 위에 어떤 단어를 올리느냐의 문제다. 체크리스트 아래에 있는 것, 즉 항목을 설계하고 연수하고 평가하고 그 순환에서 경력과 수입을 얻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교육감이 바뀌면 항목의 이름이 바뀌고, 이름이 달라지면 새로운 연구 용역이 발주되고, 새 연수 프로그램이 설계된다. 네트워크는 간판을 갈아 달고 새 항목에 적응한다. 교실에서 올려다보는 학생과 선생님들에게는, 어디서든, 언제든 같은 풍경이 보인다. 항목이 “민주시민교육”이든 “기초학력 보장”이든, 교사에게 내려오는 것은 새 연수, 새 보고 양식, 새 평가 항목, 새 외부 전문가다. 교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교육과 이 항목들 사이의 간극은, 어느 쪽이 집권하든 같은 방식으로, 같은 크기로 벌어진다.
선출 교육감 제도 자체를 문제 삼는 목소리는 늘 있어 왔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그런 결론으로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 교육감은 선출된다. 그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 문제는 교육감이 아니라, 교육감 아래에서 체크리스트를 설계하고 연수를 기획하고 학교를 평가하는 네트워크다. 이 사람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교육감이 바뀌어도 자리를 유지하거나, 이름표를 바꿔 달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교실의 교사와 학생이 매일 겪는 교육의 구체적 조건, 무슨 연수를 받아야 하고, 무슨 항목으로 평가받고, 어떤 외부 전문가의 컨설팅을 들어야 하는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교육감이 아니라 이 네트워크다. 교육감은 방향을 선언하지만, 그 방향이 교실에 도달하는 경로의 모든 단계를 이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다.
이 사람들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교실에서 오지 않는다. 교사들이 뽑지 않았고, 학생이 선택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연구를 인용하고, 서로의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앉아 주는 것으로 정당성이 만들어진다. 이 정당성은 자기 완결적이다. 교육감 선거에서 유권자는 후보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 후보가 당선된 뒤 교실에 실제로 무엇이 내려오는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권자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묻지 않은 질문
그런데 기득권 네트워크라고 하면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우리와는 무관한, 어딘가 높은 곳의 막연한 문제처럼 읽힌다. 정말 그러한가. 이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아는 어떤 얼굴, 어떤 단체일 수 있다.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는 교수, 연수에 강사로 오는 연구자, 교육 관련 기사에 자주 인용되는 시민단체 관계자, 정책 보고서 뒤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문위원.
이 글에서 되도록 특정한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다. 근거는 충분히 쌓였다. 다만 어떤 이름을 지목하면 초점이 그 개인이나 단체의 도덕성으로 옮겨 가고, 그런 이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구조는 시야에서 빠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그 구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훌륭한 과거가 있다. 학생운동을 했을 수 있다. 시민 사회에서 사교육의 폐해를 고발했을 수 있다. 불평등과 인권에 대한 학문적 기여를 했을 수 있다. 진보 언론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한 가지는 물어야 한다. 지금 이 사람들이 매일 실제로 하는 일이, 과거에 그들의 이름에 무게를 실어 준 헌신과 같은 종류의 일인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이 질문을 하지 않는 한, 더 진실한 이들이, 더 좋은 의제를 외치며 다시 교육감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내일의 교실이 오늘보다 나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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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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