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교육농 - 좋은 교육과 좋은 삶을 위하여 마지막 회
나침반이 흔들리는 시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날짜 및 장소
2025년 10월 2일(목) 서울천왕초 교장실
참가
정용주 서울천왕초 교장
진행·정리
조진희 서울 하늘숲초 교사,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
연재를 시작하며
‘교육농(農)’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텃밭을 통한 교육을 함께해 온 지 10년을 넘어섰다. 2019년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교육농》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좀 더 넓고 깊은 고민을 담아 나눌 필요가 있어 다시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교육농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3회에 걸쳐 담고자 한다. 교육농의 배경 철학과 원리에 대한 친절한 안내와 말 걸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연재 순서
① 느림의 힘, 관계의 복원 - 텃밭과 함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②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사유하기
③ [좌담] 나침반이 흔들리는 시대, 교육의 생태적 전환

정용주. 천왕초 교장실에서.
조진희
최근에 책을 출간하셨어요. ‘입시가속체제와 시간주권’이라는 부제를 단 《멈추지 못하는 학교》. 오랜 기간 준비한 듯한, 굉장히 두꺼운 책이던데요.
정용주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2023년 서이초 교사 49재인 9.4 교사 총파업 이후, 논의가 두 갈래로 굳어지는 장면을 보면서였습니다. 하나는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극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 — 과도한 민원, 입시 경쟁의 압력, 업무 과중 같은 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과제였습니다. 저는 두 번째 질문, 곧 “교사가 수업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가 더 근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를 제 방식으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목차를 짠 뒤 2년 동안 날마다 글을 썼습니다. 핵심은 모두가 입시로 내달리게 만드는 문화가 학교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그 속에서 학교가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빨리빨리’만 남는 과정이 모든 교육 혁신을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만들며 교사의 교육 활동을 상시적으로 침해하는 구조를 드러내는 현실을 설명할 언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구조를 넘어서는 출구로서 교육이 생태적 전환의 비전과 만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느린 학교’라는 비전 속에서 책의 큰 축으로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조진희
코로나 시기에 《생태 문명을 향한 교육 원리》라는 책도 여러 저자들과 함께 내셨잖아요. 근대 교육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여섯 가지 정도로 정리하셨죠?
정용주
제가 정리한 내용은 교육농 현장에서 계속 되풀이해 온 문제의식이기도 해서, 완전히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잘 느끼지 못하는 근대 교육의 기본 전제’를 쉽게 드러내려는 의도였습니다. 핵심은 교육관·자연관·인간관이 한 덩어리로 맞물려 있다는 점입니다.
근대 교육학의 기본 구조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해 세우고, 인간을 세계의 예외로 놓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인간 예외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데카르트적 구도에서처럼 인간은 하나의 단독자, 주체로 서고, 자연과 타자는 관찰되고 설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놓입니다. 배움은 그 대상을 더 정확히 알고, 더 많이 분류하고, 더 멀리 예측하는 과정이 되고, 진리는 확장될수록 선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더 안다”는 것이 관계의 깊어짐이라기보다 실제로는 통제 가능성이 확대되는 순간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는 말은 곧 그 대상을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쉽게 번역됩니다. 자연은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자원’이 되고, 타인은 ‘함께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 ‘조정해야 할 변수’가 되기 쉽습니다.
이때 앎은 공존을 위한 이해라기보다 지배와 동원의 기술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근대적 앎의 축적은 종종 자연을 정복하고, 생산을 확장하며, 경쟁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문명적 습관과 손을 잡아 왔습니다. 저는 기후 위기나 생태 위기가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앎의 방식과 인간관이 낳은 결과라는 점을 교육의 언어로 확인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생태 문명’의 교육 원리는 지식을 부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앎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입니다. 인간을 자연 밖의 주인이 아니라 상호 의존의 그물망 안에 있는 존재로 다시 위치시키고, 배움을 ‘대상을 정복하는 과정’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책임을 배우는 과정’으로 재정의하자는 것입니다. 자연과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며, 돌봄과 공존의 윤리를 배움의 중심에 놓는 방향입니다.
책에서 여섯 가지 원리로 정리한 것도 결국 같은 결론을 향합니다. 근대의 주체-객체 구도를 넘어 세계를 선물처럼 대하고,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조건을 길러 내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타자로서의 작물,
관계로 다시 쓰는 교육
조진희
그렇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학교에서 작물을 심고 가꾸잖아요. 어린이들이 그 작물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작물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요?
정용주
학교에서 씨를 심고 기르는 경험이 ‘자연과 관계 맺기’로 이어지려면 먼저 우리가 익숙해진 농의 방식부터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화 시기의 농업은 특정 품종을 정해 대량 생산하고, 비닐과 농약, 화학 비료로 자연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겉으로는 ‘농’이지만, 그 안의 논리는 자연과 공존하기보다 자연을 공장처럼 관리하는 데 가깝습니다.
그래서 교육농이 지향하는 방향은 “아이들이 농사를 배운다”를 넘어 “아이들이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먹거리와 삶을 다시 배운다”에 있다고 봅니다.
그럴 때 작물은 어린이에게 단순히 ‘내가 심고 키워서 많이 수확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을 드러내는 존재가 됩니다. 아이들은 한 포기의 작물이 자라는 데 흙이 있고, 그 흙 안에 미생물이 있고, 물·바람·햇빛이 있고, 곤충과 새와 사람의 손길이 있고, 계절의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즉 작물은 “내가 만드는 결과물”이 아니라 “나는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타자”가 됩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관점이 아니라, 자연을 돌보고 기다리며 함께 살아가는 관점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농에서의 핵심은 ‘수확량’이 아니라 ‘이해의 방식’입니다. 농약을 뿌려 병충해를 없애고, 비닐로 환경을 차단해 성과를 올리는 방식은 학교 텃밭에서도 쉽게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아이들에게 “자연은 관리하면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길 위험이 큽니다.
반대로 병든 잎을 보며 흙과 물을 다시 살피고, 해충을 보며 생태계의 균형을 이야기하고, 수확이 적어 그 이유를 탐구하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자연은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는 감각을 남깁니다. 결국 작물은 어린이에게 ‘먹거리’이기 이전에 삶의 조건을 함께 짊어지는 ‘살아 있는 동료’가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일수록 먹거리 교육도 ‘더 많이 먹는 법’이 아니라 ‘파괴하지 않고 먹는 법, 책임 있게 먹는 법’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진희
네, 나와 얽힌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근대적 앎의 전환이라는 말씀이시네요. 최근에는 생태전환교육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기존의 환경교육, 생태교육과 지금의 생태전환교육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전환’이라는 말은 왜 들어갔을까요?
정용주
선생님 질문에서 이미 답이 나와 있다고 봅니다. ‘전환’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교육이 다루는 대상이 자연 지식이나 환경 보호 태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 전체의 방향을 묻는 층위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태전환교육이라는 표현은 정책 문서나 교육과정 논의 과정에서도 한동안 부침이 있었습니다. 같은 ‘환경’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무엇을 어디까지 바꾸려는지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 왔지요. 저는 그 논쟁이 오히려 생태전환교육이라는 말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환경교육은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렇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종종 “자연에 나가서 보고 느끼는 체험”이나 “분리수거·절약 같은 실천 습관”으로 수렴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다만 기후 위기와 같은 구조적 위기 앞에서는 ‘착한 개인’의 실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위기에 이르렀는지, 어떤 산업과 소비의 방식이 지구 시스템을 압박하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더 큰 피해를 떠안는지 같은 질문이 함께 다뤄져야 합니다. 체험이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읽는 인식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교육의 프레임이 더 넓어져야 합니다.
지속가능발전교육도 장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동의하기 쉬운 언어로 교육의 목표를 묶어 주고, 국제적 흐름과 연결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비판도 받습니다. “성장도 계속하고, 분배도 해결하고, 환경도 지키자”는 구호가 실제로는 서로 충돌하는 목표들을 하나의 문장 안에 포개어 놓는 타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혁신이나 효율화만으로 성장과 환경 문제를 동시에 풀 수 있다는 낙관이 강해지면, 더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 — 예컨대 ‘얼마나 덜 쓰고, 무엇을 줄이며, 어떤 산업을 재편할 것인가’ — 이 뒤로 밀리기 쉽습니다. 저는 ‘전환’이라는 말이 바로 그 불편한 질문을 교육의 중심으로 다시 가져오는 장치라고 봅니다.
그래서 생태전환교육은 두 가지를 동시에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탈성장/포스트 성장의 문제입니다. 무한한 성장의 문법을 그대로 둔 채로는 위기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전환입니다. 전환 과정에서 일자리, 지역 경제, 돌봄 부담 같은 비용이 약자에게 전가되면 전환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즉 “줄이자”는 곧바로 “누가 줄일 것인가, 누가 보호받아야 하는가”로 이어져야 하고, 그 답은 민주적 의사 결정과 공공 정책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 두 축이 함께 갈 때, 생태전환교육은 환경교육의 ‘강화판’을 넘어 학교가 사회의 전환을 학습하고 연습하는 공적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전환이라는 말은 급진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 진단에 가깝습니다. 자연을 사랑하자는 수준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 쓰고, 경제와 삶의 방식의 방향을 다시 정하며, 그 과정의 부담을 공정하게 나누는 길을 배우자는 뜻입니다. 저는 그래서 생태전환교육이 지금도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진희
단순히 환경교육이나 생태교육을 전환한다는 의미를 넘어, 교육 전반의 전환 원리까지 나아가는군요. 생태전환교육이 단순히 생태적인, 에코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교육 체제 전반의 전환에 쓰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태전환교육의 더 나아간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용주
네, 말씀하신 방향이 정확합니다. 생태전환교육을 이야기할 때 흔히 “환경교육을 더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하는데, 저는 그 수준을 넘어 교육 자체의 전환 원리를 포함한다고 봅니다. 서울에서는 조희연 교육감 시기에 ‘생태 문명’ 담론과 함께 ‘생태전환교육’이라는 정책 언어가 정리되면서 교육과정 안에서 생태·환경 주제를 더 선명하게 다루자는 의미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그 자체도 중요합니다. 다만 제가 《멈추지 못하는 학교》와 《생태 문명을 향한 교육 원리》에서 강조한 것은, 생태전환교육이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가’를 함께 바꾸지 않으면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는 점입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에는 몇 가지 층위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 내용의 전환입니다.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에너지·소비·순환 같은 의제를 교과 밖 캠페인이 아니라 교과 안의 탐구와 실천으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둘째, 관계의 전환입니다. 자연과 비인간 존재를 ‘학습의 소재’로만 대상화하지 않고, 학생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도록 수업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셋째, 공간의 전환입니다. 텃밭이 교정 한쪽의 체험장이 아니라 건물, 급식, 에너지, 폐기물, 이동 방식까지 포함한 학교의 물질적 조건이 학습과 일치하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넷째, 거버넌스의 전환입니다. 학교가 마을과 맺는 관계가 ‘행사 협조’ 수준을 넘어, 교육과정이 지역의 생태·돌봄·노동·경제의 맥락과 장기적으로 엮이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생태전환교육은 교육이 작동하는 방식 전체를 다시 묻는 질문이 됩니다. 더 나아가 ‘미래 교육’ 담론도 같은 기준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래 교육이 기술을 더 많이 도입하는 데 머무르면 학교는 여전히 빠르게 성과를 내는 기계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태적 전환의 관점에서 미래 교육을 다시 보면,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관계와 삶의 조건을 더 공정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결국 생태전환교육의 더 나아간 의미는 교육을 ‘지식 전달의 체제’가 아니라 ‘공존의 조건을 배우는 공적 장치’로 다시 설계하자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진희
천왕초에 들어오면 작두콩이 건물 높이까지 타고 올라가 있고, 텃밭이 건물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천왕초는 오랫동안 텃밭 가꾸기 등 다양한 생태 체험 활동을 해 왔는데요. 선생님들도 이런 활동에 많이 참여하고 호응하시나요?
정용주
말씀하신 풍경은 제가 만든 것이라기보다 이전에 계셨던 선생님들과 지역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시간 위에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다만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는 위기 요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성원이 바뀌면 텃밭 활동은 끊기기 쉬운데,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그 흐름을 기억하는 구성원이 일부 남아 있고, 학교 안팎의 협력 구조가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학교의 경우, 마을과 연결된 협동조합의 부모 조합원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졸업한 이후에도 조합원으로 남아 유치원부터 초등 전 학년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흐름으로 생태전환교육을 교육과정과 연결해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년이 바뀌거나 교육과정 구성이 달라져도 “어떤 방식으로든 생태 활동은 이어 간다”는 것이 학교 문화로 자리 잡았고, 특별한 반대는 없습니다.
교사들의 호응은 한마디로 말하면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부담은 현실”입니다. 다만 협동조합이 수업 운영을 함께 맡아 주면서 선생님들이 ‘전부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덜 수 있었고, 협동조합은 협동조합대로 교육 정체성을 살려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사–협동조합의 두 결이 맞물리면서 참여가 ‘개인의 헌신’이 아니라 ‘구조’로 유지되는 길이 조금씩 열렸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이 연결이 새로운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로 오신 선생님들이 학교 예산으로 협동조합 수업을 한 번 경험한 뒤 “이것을 학년 단위에만 두지 말고 사계절 행사처럼 학교 차원으로 넓혀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유치원은 특히 반응이 빠른 편입니다. 부모들의 만족도도 높고, 교사들도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서 꼭 필요한 경험”이라는 감각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제게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년에 협동조합과 연결해서 유치원 생태전환교육 교학공(교원학습공동체)을 해 보자”고요. 유치원도 생태전환교육이 적용되기 때문에 교육력 제고 주제 중 지역 연계 생태전환교육에 맞춰 교학공 같은 실행 구조를 묶어 운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논의는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유치원 교사들이 모두 교체된 상황에서도 이런 제안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경험의 힘’이 학교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유치원 시기부터 생태전환교육이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디지털 기반 사회가 되면서 아이들이 사물과 직접 접촉하는 시간이 극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화면으로 보는 경험은 많아졌지만, 만지고 냄새 맡고 흙의 촉감을 느끼는 경험은 의도적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둘째, 기다림과 버티는 힘을 길러 주는 데 텃밭 기반 수업이 매우 강력합니다. 씨앗을 심고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느린 주기를 몸으로 겪어야 “버티는 힘”이 생기는데, 요즘 아이들은 삶의 리듬이 너무 빨라져 기다림 자체를 배울 기회가 적습니다. 텃밭은 그 결핍을 아주 구체적으로 메워 줍니다.
그래서 지금 천왕초의 생태 활동은 한편으로는 단절의 위험 속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오신 분들이 그 토대 위에서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는 국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프로그램을 했느냐’가 아니라, 학교를 교사가 감당 가능한 구조로 만들고 아이들이 사물·계절·관계의 시간을 다시 회복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꾸준히 설계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교육은 느려져야 한다
조진희
요즘 어린이/청소년 세대의 특성을 말씀하셨는데, 디지털 네이티브, 디지털 네이션으로 태어난 학생들이라서 어려서부터 그런 경험이 없지요.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교육 전환의 방향이 AI잖아요. 이게 상호 모순적인데, 선생님들은 생태전환교육의 방향과 AI 전환의 방향, 두 가지를 다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힘이 교육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AI 시대에 생태전환교육은 또 어떤 의미인가 고민스럽습니다.
정용주
저는 두 방향이 모순이라기보다,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할 질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둘 다 하라”는 요구가 학교로 한꺼번에 내려오면서 충돌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육 논의에서 가장 큰 혼선은 대학과 유·초·중등의 역할이 다르다는 구분이 충분히 전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산업과 국가 전략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이 ‘신성장 동력’으로 이야기될 수는 있지만, 그 언어가 그대로 유치원과 초등학교로 내려오면 교육의 목적이 뒤틀리기 쉽습니다. 인공지능이 전면화되는 영역은 결국 고등교육과 직업 세계 쪽이고, 적어도 중학교까지의 보통교육은 시민으로서의 균형 있는 성장과 발달, 그리고 공통의 삶을 유지하는 역량을 기르는 데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AI 시대의 생태전환교육을 이렇게 이해하는 편입니다. 첫째, 보통교육 단계에서 학교가 해야 할 일은 ‘AI를 빨리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가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확보한 뒤 그 여백 속에서 기후 위기, 다문화, 혐오와 차별 같은 동시대의 핵심 의제를 충분히 호흡하며 다루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둘째, 그다음 과정에서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논의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거꾸로 “AI 교육”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데, 막상 들어가 보면 어린 시기부터 AI를 ‘개발’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에서 AI를 ‘활용’하는 능력을 체계적으로 기르겠다는 것도 아니며,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이 교육에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비판적 사고력, 협력, 공감, 윤리적 판단 같은 시민적 역량을 기르는 과정에서 필요할 때 도구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마저도 ‘AI로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교에 필요한 것은 ‘AI를 반드시 가르치라’는 일괄 처방이 아니라, 교사가 교육과정 안에서 특정 주제와 과제를 가르칠 때 AI를 적절히 쓸 수 있는 조건 — 접근성, 안전, 가이드라인, 책임 소재 — 를 마련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시민교육의 목표를 흔들림 없이 구현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결국 지금 가장 큰 문제는 “AI 기반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속도만 강조되면 학교는 생태전환교육도, AI도 모두 ‘추가 업무’로 받아들이게 되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느린 경험과 만짐의 경험,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은 더 줄어듭니다. 저는 그래서 AI 시대일수록 생태전환교육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고 봅니다. 기술이 삶을 빠르게 만드는 만큼, 교육은 관계와 감각과 시간의 리듬을 다시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진희
요즘에는 상당히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요. 디지털에만 접속해서 인공지능과 상담을 하고, 우울하면 대화도 하는 어린이들이 있다고 하고요. 그래서 교육부가 사회정서학습 역량을 강화하라는 또 다른 업무를 내려보내고 있거든요. 교육 현장 자체가 혼돈의 상황인데, 이런 상황 속에서 교사는 어떻게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내고,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정용주
신냉전 체제가 부상하면서 경제를 다시 안보화하는 방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국가가 산업·기술·노동을 직접 설계·동원하는 국가자본주의의 복귀를 촉진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지요. 공급망, 에너지, 반도체, 인공지능 같은 전략 영역이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이 되면 국가는 보조금·규제·공공투자·표준 선점으로 성장 엔진을 다시 쥐려 합니다. 이때 성장의 언어는 ‘국가 경쟁력’과 ‘기술 주권’으로 재정의되고, 속도와 집중, 선택과 집중의 정책 논리가 자연스럽게 정당화됩니다. 문제는 이 동원 체제가 ‘성장’만이 아니라 정책 전반의 시간표, 평가 방식, 책임의 배치를 바꾼다는 점인데, 교육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때 진보 진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은 성장의 동원 논리를 거부하기보다 “성장도 하고 복지도 한다”는 결합 전략입니다. 산업 정책을 통해 고용을 만들고, 그 과실을 복지·분배로 재배분하며, 동시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강하겠다는 구상은 정치적으로 매우 매력적이지요. 그러나 이 결합은 구조적으로 긴장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성장 동원 체제는 본성상 성과·속도·가시화된 지표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복지 결합형 국가 주도 성장주의”는 말 그대로 가능성이면서 동시에 위험입니다. 따뜻함과 민주성은 성장 기계에 ‘첨가물’로 덧붙여지는 순간 쉽게 후퇴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교육 정책에서 이 현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신냉전 체제의 국가자본주의는 교육을 ‘인적 자본’과 ‘국가 전략 인재’의 생산 체제로 호출하는 유혹을 강화하고, 진보 진영 또한 불평등 완화와 복지 확장을 약속하는 동시에 성장 전략과 결합시키면서 교육을 성장 정책의 하위 수단으로 두기 쉬워집니다. 그 결과 학교에는 “AI 전환, 디지털 전환, 기후·생태 전환, 사회정서 역량” 같은 거대한 과제가 동시에 밀려오되, 정작 교육과정의 여백과 교사의 전문적 자율성, 학생의 삶을 돌보는 시간은 확대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성장 동원의 논리가 교육에 침투하면 전환교육은 ‘추가 과업’이 되고, 교사 보호는 ‘업무 경감’으로만 협소화되며, 학생의 정신 건강도 ‘측정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따라서 핵심 쟁점은 “성장+복지”라는 구호의 선악이 아니라, 그 결합이 교육에서 어떤 제도적 장치를 통해 통제되고 번역되는가에 있습니다. 국가 주도 성장주의를 수용하더라도 교육에서는 최소한 ① 보통교육의 목적(시민으로서의 균형 있는 성장과 발달)을 성장 정책과 분리해 상위 원리로 고정하고, ② 교육과정 과밀을 덜어 여백을 제도화하며, ③ 성과 지표 중심의 속도전을 억제할 평가·책무 구조를 설계하고, ④ 전환의 비용이 약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전환’의 원리를 교육복지·학교 운영·지역 거버넌스에 동시 적용해야 합니다. 요컨대 신냉전 체제의 국가자본주의를 진보가 수용하는 현상은 ‘따뜻함’의 약속으로 정당화되기 쉽지만, 그 따뜻함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성장 기계의 문법을 교육 안으로 그대로 들여오지 않겠다는 제도적 결단이 먼저 필요합니다.
교사의 나침반을 다시 세우다
조진희
이 엄청난 속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교사들은 살아 내야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어린이/청소년들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요. 선생님은 지역 교육청, 국가교육위원회, 교육부 등 여러 단위를 거치며 종합적으로 경험해 보셨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교사는 도대체 무엇을 중심에 두고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마무리 말씀으로 부탁드립니다.
정용주
말씀하신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속도가 빠른 시대에 교사는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이겠지요. 저는 최근 OECD 논의에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확인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AI를 “활용하면 효과가 난다”는 식의 담론이 강한데, 장기 추적 연구를 보면 기기를 보급하고 프로그램을 얹는 것만으로 성과가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기기를 주면 상호작용이 촉진되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대면 상호작용이 줄거나 주의가 분산되는 도전이 함께 생깁니다. 그런데 정책은 기회만 말하고 위험을 충분히 모니터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모든 교과에서 다 활용하면 된다”는 처방도 현실과 다릅니다. 어떤 교과는 굳이 디지털을 전면화하지 않는 편이 더 낫고, 어떤 교과는 적절히 쓰면 학습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는 결국 교사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사의 자율성과 교육과정 설계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OECD ‘교수 나침반(Teaching Compass)’이 제시한 교사 행위 주체성을 형성하는 세 개의 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거기서 말하는 핵심은 교사가 어떤 존재로 서 있는지(being),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떤 관계망 안에 있는지(belonging), 어떤 교사가 되어 가고자 하는지(becoming)입니다. 이 세 가지를 중심에 놓고 교사의 웰빙(well-being)을 보는데, 이를 사회적 웰빙, 정서적 웰빙, 인지적 웰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웰빙이 근무 조건 개선 — 복무, 조퇴, 행정 부담 — 으로만 좁혀지는 경향이 큽니다. 물론 근무 조건 개선은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교사가 “교사로서 살아 있는 감각”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더 핵심이라고 보는 것은 인지적 웰빙입니다. 교사가 수업과 관계를 통해 학습자의 변화와 성장, 발달을 실제로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내 실천이 아이의 삶을 바꾼다”는 감각에서 오는 만족감, 이것이 인지적 웰빙의 핵입니다. 그런데 이 핵을 키워 주는 조건 — 교육과정 전문성의 인정, 수업 설계의 자율성, 동료성과 협력의 시간, 과도한 정책 요구의 절제 — 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고, 주변 정비만 반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교사는 중심을 잃고, 버티는 방식으로 남게 됩니다.
저는 이 상태를 ‘나침반이 계속 떨리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교사가 방향을 잡고 항해해야 하는데, 유사한 정책이 이름만 바뀐 채 남발되고, 교육청은 부서별로 “우리도 중요하다”는 논리로 과제를 쏟아 내며, 학교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런 정책 과잉과 부서 칸막이는 교사의 인지적 웰빙을 직접적으로 흔듭니다.
그래서 교사가 중심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의 마음가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나침반을 흔드는 요인을 줄이는 제도적 정리입니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덜어 내며, 학교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여백을 확보해 주는 일이 먼저입니다.
결론적으로 교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교사가 교육과정 전문가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실제로 만들어 내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쌓일 때 교사는 혼자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협력적 주도성을 발휘하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교육을 모든 것을 ‘교사의 업무’로만 환원해 접근하면, 결국 어떤 전환교육 — 생태전환교육이든 민주시민교육이든 — 그 어느 것도 학교에서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 필요한 변화의 핵심은 교사의 업무를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교사의 인지적 웰빙이 자라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의 여백과 자율성, 협력의 시간을 복원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육공동체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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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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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교육농 - 좋은 교육과 좋은 삶을 위하여 마지막 회
나침반이 흔들리는 시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날짜 및 장소
2025년 10월 2일(목) 서울천왕초 교장실
참가
정용주 서울천왕초 교장
진행·정리
조진희 서울 하늘숲초 교사,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
정용주. 천왕초 교장실에서.
조진희
최근에 책을 출간하셨어요. ‘입시가속체제와 시간주권’이라는 부제를 단 《멈추지 못하는 학교》. 오랜 기간 준비한 듯한, 굉장히 두꺼운 책이던데요.
정용주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2023년 서이초 교사 49재인 9.4 교사 총파업 이후, 논의가 두 갈래로 굳어지는 장면을 보면서였습니다. 하나는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극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 — 과도한 민원, 입시 경쟁의 압력, 업무 과중 같은 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과제였습니다. 저는 두 번째 질문, 곧 “교사가 수업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가 더 근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를 제 방식으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목차를 짠 뒤 2년 동안 날마다 글을 썼습니다. 핵심은 모두가 입시로 내달리게 만드는 문화가 학교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그 속에서 학교가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빨리빨리’만 남는 과정이 모든 교육 혁신을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만들며 교사의 교육 활동을 상시적으로 침해하는 구조를 드러내는 현실을 설명할 언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구조를 넘어서는 출구로서 교육이 생태적 전환의 비전과 만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느린 학교’라는 비전 속에서 책의 큰 축으로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조진희
코로나 시기에 《생태 문명을 향한 교육 원리》라는 책도 여러 저자들과 함께 내셨잖아요. 근대 교육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여섯 가지 정도로 정리하셨죠?
정용주
제가 정리한 내용은 교육농 현장에서 계속 되풀이해 온 문제의식이기도 해서, 완전히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잘 느끼지 못하는 근대 교육의 기본 전제’를 쉽게 드러내려는 의도였습니다. 핵심은 교육관·자연관·인간관이 한 덩어리로 맞물려 있다는 점입니다.
근대 교육학의 기본 구조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해 세우고, 인간을 세계의 예외로 놓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인간 예외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데카르트적 구도에서처럼 인간은 하나의 단독자, 주체로 서고, 자연과 타자는 관찰되고 설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놓입니다. 배움은 그 대상을 더 정확히 알고, 더 많이 분류하고, 더 멀리 예측하는 과정이 되고, 진리는 확장될수록 선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더 안다”는 것이 관계의 깊어짐이라기보다 실제로는 통제 가능성이 확대되는 순간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는 말은 곧 그 대상을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쉽게 번역됩니다. 자연은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자원’이 되고, 타인은 ‘함께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 ‘조정해야 할 변수’가 되기 쉽습니다.
이때 앎은 공존을 위한 이해라기보다 지배와 동원의 기술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근대적 앎의 축적은 종종 자연을 정복하고, 생산을 확장하며, 경쟁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문명적 습관과 손을 잡아 왔습니다. 저는 기후 위기나 생태 위기가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앎의 방식과 인간관이 낳은 결과라는 점을 교육의 언어로 확인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생태 문명’의 교육 원리는 지식을 부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앎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입니다. 인간을 자연 밖의 주인이 아니라 상호 의존의 그물망 안에 있는 존재로 다시 위치시키고, 배움을 ‘대상을 정복하는 과정’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책임을 배우는 과정’으로 재정의하자는 것입니다. 자연과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며, 돌봄과 공존의 윤리를 배움의 중심에 놓는 방향입니다.
책에서 여섯 가지 원리로 정리한 것도 결국 같은 결론을 향합니다. 근대의 주체-객체 구도를 넘어 세계를 선물처럼 대하고,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조건을 길러 내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타자로서의 작물,
관계로 다시 쓰는 교육
조진희
그렇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학교에서 작물을 심고 가꾸잖아요. 어린이들이 그 작물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작물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요?
정용주
학교에서 씨를 심고 기르는 경험이 ‘자연과 관계 맺기’로 이어지려면 먼저 우리가 익숙해진 농의 방식부터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화 시기의 농업은 특정 품종을 정해 대량 생산하고, 비닐과 농약, 화학 비료로 자연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겉으로는 ‘농’이지만, 그 안의 논리는 자연과 공존하기보다 자연을 공장처럼 관리하는 데 가깝습니다.
그래서 교육농이 지향하는 방향은 “아이들이 농사를 배운다”를 넘어 “아이들이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먹거리와 삶을 다시 배운다”에 있다고 봅니다.
그럴 때 작물은 어린이에게 단순히 ‘내가 심고 키워서 많이 수확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을 드러내는 존재가 됩니다. 아이들은 한 포기의 작물이 자라는 데 흙이 있고, 그 흙 안에 미생물이 있고, 물·바람·햇빛이 있고, 곤충과 새와 사람의 손길이 있고, 계절의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즉 작물은 “내가 만드는 결과물”이 아니라 “나는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타자”가 됩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관점이 아니라, 자연을 돌보고 기다리며 함께 살아가는 관점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농에서의 핵심은 ‘수확량’이 아니라 ‘이해의 방식’입니다. 농약을 뿌려 병충해를 없애고, 비닐로 환경을 차단해 성과를 올리는 방식은 학교 텃밭에서도 쉽게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아이들에게 “자연은 관리하면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길 위험이 큽니다.
반대로 병든 잎을 보며 흙과 물을 다시 살피고, 해충을 보며 생태계의 균형을 이야기하고, 수확이 적어 그 이유를 탐구하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자연은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는 감각을 남깁니다. 결국 작물은 어린이에게 ‘먹거리’이기 이전에 삶의 조건을 함께 짊어지는 ‘살아 있는 동료’가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일수록 먹거리 교육도 ‘더 많이 먹는 법’이 아니라 ‘파괴하지 않고 먹는 법, 책임 있게 먹는 법’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진희
네, 나와 얽힌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근대적 앎의 전환이라는 말씀이시네요. 최근에는 생태전환교육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기존의 환경교육, 생태교육과 지금의 생태전환교육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전환’이라는 말은 왜 들어갔을까요?
정용주
선생님 질문에서 이미 답이 나와 있다고 봅니다. ‘전환’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교육이 다루는 대상이 자연 지식이나 환경 보호 태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 전체의 방향을 묻는 층위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태전환교육이라는 표현은 정책 문서나 교육과정 논의 과정에서도 한동안 부침이 있었습니다. 같은 ‘환경’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무엇을 어디까지 바꾸려는지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 왔지요. 저는 그 논쟁이 오히려 생태전환교육이라는 말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환경교육은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렇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종종 “자연에 나가서 보고 느끼는 체험”이나 “분리수거·절약 같은 실천 습관”으로 수렴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다만 기후 위기와 같은 구조적 위기 앞에서는 ‘착한 개인’의 실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위기에 이르렀는지, 어떤 산업과 소비의 방식이 지구 시스템을 압박하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더 큰 피해를 떠안는지 같은 질문이 함께 다뤄져야 합니다. 체험이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읽는 인식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교육의 프레임이 더 넓어져야 합니다.
지속가능발전교육도 장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동의하기 쉬운 언어로 교육의 목표를 묶어 주고, 국제적 흐름과 연결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비판도 받습니다. “성장도 계속하고, 분배도 해결하고, 환경도 지키자”는 구호가 실제로는 서로 충돌하는 목표들을 하나의 문장 안에 포개어 놓는 타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혁신이나 효율화만으로 성장과 환경 문제를 동시에 풀 수 있다는 낙관이 강해지면, 더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 — 예컨대 ‘얼마나 덜 쓰고, 무엇을 줄이며, 어떤 산업을 재편할 것인가’ — 이 뒤로 밀리기 쉽습니다. 저는 ‘전환’이라는 말이 바로 그 불편한 질문을 교육의 중심으로 다시 가져오는 장치라고 봅니다.
그래서 생태전환교육은 두 가지를 동시에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탈성장/포스트 성장의 문제입니다. 무한한 성장의 문법을 그대로 둔 채로는 위기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전환입니다. 전환 과정에서 일자리, 지역 경제, 돌봄 부담 같은 비용이 약자에게 전가되면 전환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즉 “줄이자”는 곧바로 “누가 줄일 것인가, 누가 보호받아야 하는가”로 이어져야 하고, 그 답은 민주적 의사 결정과 공공 정책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 두 축이 함께 갈 때, 생태전환교육은 환경교육의 ‘강화판’을 넘어 학교가 사회의 전환을 학습하고 연습하는 공적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전환이라는 말은 급진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 진단에 가깝습니다. 자연을 사랑하자는 수준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 쓰고, 경제와 삶의 방식의 방향을 다시 정하며, 그 과정의 부담을 공정하게 나누는 길을 배우자는 뜻입니다. 저는 그래서 생태전환교육이 지금도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진희
단순히 환경교육이나 생태교육을 전환한다는 의미를 넘어, 교육 전반의 전환 원리까지 나아가는군요. 생태전환교육이 단순히 생태적인, 에코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교육 체제 전반의 전환에 쓰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태전환교육의 더 나아간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용주
네, 말씀하신 방향이 정확합니다. 생태전환교육을 이야기할 때 흔히 “환경교육을 더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하는데, 저는 그 수준을 넘어 교육 자체의 전환 원리를 포함한다고 봅니다. 서울에서는 조희연 교육감 시기에 ‘생태 문명’ 담론과 함께 ‘생태전환교육’이라는 정책 언어가 정리되면서 교육과정 안에서 생태·환경 주제를 더 선명하게 다루자는 의미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그 자체도 중요합니다. 다만 제가 《멈추지 못하는 학교》와 《생태 문명을 향한 교육 원리》에서 강조한 것은, 생태전환교육이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가’를 함께 바꾸지 않으면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는 점입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에는 몇 가지 층위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 내용의 전환입니다.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에너지·소비·순환 같은 의제를 교과 밖 캠페인이 아니라 교과 안의 탐구와 실천으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둘째, 관계의 전환입니다. 자연과 비인간 존재를 ‘학습의 소재’로만 대상화하지 않고, 학생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도록 수업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셋째, 공간의 전환입니다. 텃밭이 교정 한쪽의 체험장이 아니라 건물, 급식, 에너지, 폐기물, 이동 방식까지 포함한 학교의 물질적 조건이 학습과 일치하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넷째, 거버넌스의 전환입니다. 학교가 마을과 맺는 관계가 ‘행사 협조’ 수준을 넘어, 교육과정이 지역의 생태·돌봄·노동·경제의 맥락과 장기적으로 엮이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생태전환교육은 교육이 작동하는 방식 전체를 다시 묻는 질문이 됩니다. 더 나아가 ‘미래 교육’ 담론도 같은 기준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래 교육이 기술을 더 많이 도입하는 데 머무르면 학교는 여전히 빠르게 성과를 내는 기계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태적 전환의 관점에서 미래 교육을 다시 보면,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관계와 삶의 조건을 더 공정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결국 생태전환교육의 더 나아간 의미는 교육을 ‘지식 전달의 체제’가 아니라 ‘공존의 조건을 배우는 공적 장치’로 다시 설계하자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진희
천왕초에 들어오면 작두콩이 건물 높이까지 타고 올라가 있고, 텃밭이 건물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천왕초는 오랫동안 텃밭 가꾸기 등 다양한 생태 체험 활동을 해 왔는데요. 선생님들도 이런 활동에 많이 참여하고 호응하시나요?
정용주
말씀하신 풍경은 제가 만든 것이라기보다 이전에 계셨던 선생님들과 지역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시간 위에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다만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는 위기 요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성원이 바뀌면 텃밭 활동은 끊기기 쉬운데,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그 흐름을 기억하는 구성원이 일부 남아 있고, 학교 안팎의 협력 구조가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학교의 경우, 마을과 연결된 협동조합의 부모 조합원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졸업한 이후에도 조합원으로 남아 유치원부터 초등 전 학년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흐름으로 생태전환교육을 교육과정과 연결해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년이 바뀌거나 교육과정 구성이 달라져도 “어떤 방식으로든 생태 활동은 이어 간다”는 것이 학교 문화로 자리 잡았고, 특별한 반대는 없습니다.
교사들의 호응은 한마디로 말하면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부담은 현실”입니다. 다만 협동조합이 수업 운영을 함께 맡아 주면서 선생님들이 ‘전부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덜 수 있었고, 협동조합은 협동조합대로 교육 정체성을 살려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사–협동조합의 두 결이 맞물리면서 참여가 ‘개인의 헌신’이 아니라 ‘구조’로 유지되는 길이 조금씩 열렸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이 연결이 새로운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로 오신 선생님들이 학교 예산으로 협동조합 수업을 한 번 경험한 뒤 “이것을 학년 단위에만 두지 말고 사계절 행사처럼 학교 차원으로 넓혀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유치원은 특히 반응이 빠른 편입니다. 부모들의 만족도도 높고, 교사들도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서 꼭 필요한 경험”이라는 감각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제게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년에 협동조합과 연결해서 유치원 생태전환교육 교학공(교원학습공동체)을 해 보자”고요. 유치원도 생태전환교육이 적용되기 때문에 교육력 제고 주제 중 지역 연계 생태전환교육에 맞춰 교학공 같은 실행 구조를 묶어 운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논의는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유치원 교사들이 모두 교체된 상황에서도 이런 제안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경험의 힘’이 학교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유치원 시기부터 생태전환교육이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디지털 기반 사회가 되면서 아이들이 사물과 직접 접촉하는 시간이 극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화면으로 보는 경험은 많아졌지만, 만지고 냄새 맡고 흙의 촉감을 느끼는 경험은 의도적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둘째, 기다림과 버티는 힘을 길러 주는 데 텃밭 기반 수업이 매우 강력합니다. 씨앗을 심고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느린 주기를 몸으로 겪어야 “버티는 힘”이 생기는데, 요즘 아이들은 삶의 리듬이 너무 빨라져 기다림 자체를 배울 기회가 적습니다. 텃밭은 그 결핍을 아주 구체적으로 메워 줍니다.
그래서 지금 천왕초의 생태 활동은 한편으로는 단절의 위험 속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오신 분들이 그 토대 위에서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는 국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프로그램을 했느냐’가 아니라, 학교를 교사가 감당 가능한 구조로 만들고 아이들이 사물·계절·관계의 시간을 다시 회복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꾸준히 설계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교육은 느려져야 한다
조진희
요즘 어린이/청소년 세대의 특성을 말씀하셨는데, 디지털 네이티브, 디지털 네이션으로 태어난 학생들이라서 어려서부터 그런 경험이 없지요.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교육 전환의 방향이 AI잖아요. 이게 상호 모순적인데, 선생님들은 생태전환교육의 방향과 AI 전환의 방향, 두 가지를 다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힘이 교육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AI 시대에 생태전환교육은 또 어떤 의미인가 고민스럽습니다.
정용주
저는 두 방향이 모순이라기보다,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할 질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둘 다 하라”는 요구가 학교로 한꺼번에 내려오면서 충돌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육 논의에서 가장 큰 혼선은 대학과 유·초·중등의 역할이 다르다는 구분이 충분히 전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산업과 국가 전략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이 ‘신성장 동력’으로 이야기될 수는 있지만, 그 언어가 그대로 유치원과 초등학교로 내려오면 교육의 목적이 뒤틀리기 쉽습니다. 인공지능이 전면화되는 영역은 결국 고등교육과 직업 세계 쪽이고, 적어도 중학교까지의 보통교육은 시민으로서의 균형 있는 성장과 발달, 그리고 공통의 삶을 유지하는 역량을 기르는 데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AI 시대의 생태전환교육을 이렇게 이해하는 편입니다. 첫째, 보통교육 단계에서 학교가 해야 할 일은 ‘AI를 빨리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가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확보한 뒤 그 여백 속에서 기후 위기, 다문화, 혐오와 차별 같은 동시대의 핵심 의제를 충분히 호흡하며 다루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둘째, 그다음 과정에서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논의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거꾸로 “AI 교육”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데, 막상 들어가 보면 어린 시기부터 AI를 ‘개발’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에서 AI를 ‘활용’하는 능력을 체계적으로 기르겠다는 것도 아니며,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이 교육에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비판적 사고력, 협력, 공감, 윤리적 판단 같은 시민적 역량을 기르는 과정에서 필요할 때 도구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마저도 ‘AI로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교에 필요한 것은 ‘AI를 반드시 가르치라’는 일괄 처방이 아니라, 교사가 교육과정 안에서 특정 주제와 과제를 가르칠 때 AI를 적절히 쓸 수 있는 조건 — 접근성, 안전, 가이드라인, 책임 소재 — 를 마련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시민교육의 목표를 흔들림 없이 구현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결국 지금 가장 큰 문제는 “AI 기반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속도만 강조되면 학교는 생태전환교육도, AI도 모두 ‘추가 업무’로 받아들이게 되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느린 경험과 만짐의 경험,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은 더 줄어듭니다. 저는 그래서 AI 시대일수록 생태전환교육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고 봅니다. 기술이 삶을 빠르게 만드는 만큼, 교육은 관계와 감각과 시간의 리듬을 다시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진희
요즘에는 상당히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요. 디지털에만 접속해서 인공지능과 상담을 하고, 우울하면 대화도 하는 어린이들이 있다고 하고요. 그래서 교육부가 사회정서학습 역량을 강화하라는 또 다른 업무를 내려보내고 있거든요. 교육 현장 자체가 혼돈의 상황인데, 이런 상황 속에서 교사는 어떻게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내고,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정용주
신냉전 체제가 부상하면서 경제를 다시 안보화하는 방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국가가 산업·기술·노동을 직접 설계·동원하는 국가자본주의의 복귀를 촉진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지요. 공급망, 에너지, 반도체, 인공지능 같은 전략 영역이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이 되면 국가는 보조금·규제·공공투자·표준 선점으로 성장 엔진을 다시 쥐려 합니다. 이때 성장의 언어는 ‘국가 경쟁력’과 ‘기술 주권’으로 재정의되고, 속도와 집중, 선택과 집중의 정책 논리가 자연스럽게 정당화됩니다. 문제는 이 동원 체제가 ‘성장’만이 아니라 정책 전반의 시간표, 평가 방식, 책임의 배치를 바꾼다는 점인데, 교육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때 진보 진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은 성장의 동원 논리를 거부하기보다 “성장도 하고 복지도 한다”는 결합 전략입니다. 산업 정책을 통해 고용을 만들고, 그 과실을 복지·분배로 재배분하며, 동시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강하겠다는 구상은 정치적으로 매우 매력적이지요. 그러나 이 결합은 구조적으로 긴장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성장 동원 체제는 본성상 성과·속도·가시화된 지표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복지 결합형 국가 주도 성장주의”는 말 그대로 가능성이면서 동시에 위험입니다. 따뜻함과 민주성은 성장 기계에 ‘첨가물’로 덧붙여지는 순간 쉽게 후퇴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교육 정책에서 이 현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신냉전 체제의 국가자본주의는 교육을 ‘인적 자본’과 ‘국가 전략 인재’의 생산 체제로 호출하는 유혹을 강화하고, 진보 진영 또한 불평등 완화와 복지 확장을 약속하는 동시에 성장 전략과 결합시키면서 교육을 성장 정책의 하위 수단으로 두기 쉬워집니다. 그 결과 학교에는 “AI 전환, 디지털 전환, 기후·생태 전환, 사회정서 역량” 같은 거대한 과제가 동시에 밀려오되, 정작 교육과정의 여백과 교사의 전문적 자율성, 학생의 삶을 돌보는 시간은 확대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성장 동원의 논리가 교육에 침투하면 전환교육은 ‘추가 과업’이 되고, 교사 보호는 ‘업무 경감’으로만 협소화되며, 학생의 정신 건강도 ‘측정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따라서 핵심 쟁점은 “성장+복지”라는 구호의 선악이 아니라, 그 결합이 교육에서 어떤 제도적 장치를 통해 통제되고 번역되는가에 있습니다. 국가 주도 성장주의를 수용하더라도 교육에서는 최소한 ① 보통교육의 목적(시민으로서의 균형 있는 성장과 발달)을 성장 정책과 분리해 상위 원리로 고정하고, ② 교육과정 과밀을 덜어 여백을 제도화하며, ③ 성과 지표 중심의 속도전을 억제할 평가·책무 구조를 설계하고, ④ 전환의 비용이 약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전환’의 원리를 교육복지·학교 운영·지역 거버넌스에 동시 적용해야 합니다. 요컨대 신냉전 체제의 국가자본주의를 진보가 수용하는 현상은 ‘따뜻함’의 약속으로 정당화되기 쉽지만, 그 따뜻함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성장 기계의 문법을 교육 안으로 그대로 들여오지 않겠다는 제도적 결단이 먼저 필요합니다.
교사의 나침반을 다시 세우다
조진희
이 엄청난 속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교사들은 살아 내야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어린이/청소년들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요. 선생님은 지역 교육청, 국가교육위원회, 교육부 등 여러 단위를 거치며 종합적으로 경험해 보셨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교사는 도대체 무엇을 중심에 두고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마무리 말씀으로 부탁드립니다.
정용주
말씀하신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속도가 빠른 시대에 교사는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이겠지요. 저는 최근 OECD 논의에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확인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AI를 “활용하면 효과가 난다”는 식의 담론이 강한데, 장기 추적 연구를 보면 기기를 보급하고 프로그램을 얹는 것만으로 성과가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기기를 주면 상호작용이 촉진되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대면 상호작용이 줄거나 주의가 분산되는 도전이 함께 생깁니다. 그런데 정책은 기회만 말하고 위험을 충분히 모니터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모든 교과에서 다 활용하면 된다”는 처방도 현실과 다릅니다. 어떤 교과는 굳이 디지털을 전면화하지 않는 편이 더 낫고, 어떤 교과는 적절히 쓰면 학습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는 결국 교사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사의 자율성과 교육과정 설계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OECD ‘교수 나침반(Teaching Compass)’이 제시한 교사 행위 주체성을 형성하는 세 개의 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거기서 말하는 핵심은 교사가 어떤 존재로 서 있는지(being),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떤 관계망 안에 있는지(belonging), 어떤 교사가 되어 가고자 하는지(becoming)입니다. 이 세 가지를 중심에 놓고 교사의 웰빙(well-being)을 보는데, 이를 사회적 웰빙, 정서적 웰빙, 인지적 웰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웰빙이 근무 조건 개선 — 복무, 조퇴, 행정 부담 — 으로만 좁혀지는 경향이 큽니다. 물론 근무 조건 개선은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교사가 “교사로서 살아 있는 감각”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더 핵심이라고 보는 것은 인지적 웰빙입니다. 교사가 수업과 관계를 통해 학습자의 변화와 성장, 발달을 실제로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내 실천이 아이의 삶을 바꾼다”는 감각에서 오는 만족감, 이것이 인지적 웰빙의 핵입니다. 그런데 이 핵을 키워 주는 조건 — 교육과정 전문성의 인정, 수업 설계의 자율성, 동료성과 협력의 시간, 과도한 정책 요구의 절제 — 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고, 주변 정비만 반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교사는 중심을 잃고, 버티는 방식으로 남게 됩니다.
저는 이 상태를 ‘나침반이 계속 떨리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교사가 방향을 잡고 항해해야 하는데, 유사한 정책이 이름만 바뀐 채 남발되고, 교육청은 부서별로 “우리도 중요하다”는 논리로 과제를 쏟아 내며, 학교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런 정책 과잉과 부서 칸막이는 교사의 인지적 웰빙을 직접적으로 흔듭니다.
그래서 교사가 중심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의 마음가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나침반을 흔드는 요인을 줄이는 제도적 정리입니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덜어 내며, 학교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여백을 확보해 주는 일이 먼저입니다.
결론적으로 교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교사가 교육과정 전문가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실제로 만들어 내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쌓일 때 교사는 혼자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협력적 주도성을 발휘하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교육을 모든 것을 ‘교사의 업무’로만 환원해 접근하면, 결국 어떤 전환교육 — 생태전환교육이든 민주시민교육이든 — 그 어느 것도 학교에서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 필요한 변화의 핵심은 교사의 업무를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교사의 인지적 웰빙이 자라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의 여백과 자율성, 협력의 시간을 복원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육공동체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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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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