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법화사회와 교육
학교폭력과 사법 폭력의 연쇄고리
엄벌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변혁이 필요하다
글
김정희원
Heewon.Kim@asu.edu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법의 지배인가, 법의 폭력인가
요즘의 한국 사회는 마치 응보 정의가 시대정신이라도 된 듯하다. 법, 공정, 엄벌과 같은 단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언론에 등장하고 사람들의 글과 말 속에 오르내린다. 특히 현 정부 이후로 한국 사회의 담론장을 지배하고 있는 ‘법치(rule of law)’라는 용어는 ‘공정’과 더불어 그 뜻이 가장 오염된 개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서구에서 법치, 즉 ‘법의 지배’ 개념이 대중화된 이래로 그 정의는 계속 확장되어 왔지만, 큰 틀에서 법치의 정의는 다음 세 원칙의 변주를 따른다.[ref]Scales, A.(2006), Legal feminism: Activism, lawyering, and legal theory, New York University Press.[/ref] 임의의 권력보다 법이 우위에 있을 것,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법에 종속될 것, 법리적 논쟁은 사법적 판단으로 해결할 것.[ref]Dicey, A. V.(1885/1924),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Macmillan.[/ref] 즉, 대통령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임의의 권력으로 법을 사유화할 수 없으며, 기득권이라고 해서 법적 판단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고, 사법적 절차 없이 멋대로 (예컨대, 시행령 개정을 통해) 법적 ‘한계’를 해소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법치의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현재 남용되고 있는 법치 개념은 그저 법을 이용한 통제(rule by law)에 불과할 뿐 아니라 “노사법치주의”와 같은 정체불명의 신조어를 활용해 사회적 약소자를 탄압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법의 지배라기보다는 법의 폭력이다.[ref]물론 많은 학자들은 법 그 자체가 이미 폭력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ref]
법치의 이름으로 각종 통제 및 억압 기제를 정당화하는 현 정부의 접근은 우리에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도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통치의 한 양태로 소송을 동원했던 금권정치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이때 법치라는 이름의 통치성이 보여 준 핵심은 정치적 자유와 지불 능력의 유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ref]김현미(2009),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국가와 생활정치〉, 《창작과 비평》, 145, 94~113쪽.[/ref] 정부가 시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함으로써 지불 능력이 없는 이들은 정치적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날 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로 전락한다. 프리드먼이 말한 그대로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선결 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이다.[ref]Friedman, M.(1966), Capitalism and freedom, University of Chicago Press.[/ref] 이 같은 경향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단지 법정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바깥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정치적 사안뿐 아니라 개인 및 집단 간 갈등의 영역에서도 많은 문제가 사법적 해결의 영역으로 넘겨지면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조정 능력은 상실되어 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참여와 합의로 의사 결정에 이르기보다는 사법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자산, 인적 자본, 그리고 법적 지식을 다양한 경로로 동원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때때로 가해와 피해의 반복을 낳는데, 교육 현장 역시 이 연쇄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사법 폭력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한 학교에서의 소송전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침투한 폭력 : 시장과 사법의 결탁
학교 현장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법적 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어느 변호사가 공직에 임명된 탓에 그가 아들을 위해 활용했던 ‘학교폭력 가해자 전략’이 상세히 폭로되면서 전 국민이 분노했던 것이다. 학교폭력 가해자 측의 목표는 가능한 한 모든 법적·행정적 수단을 동원해 가해의 기록을 유예하거나 남기지 않는 것이다. 대학 입시가 걸려 있을 경우에는 이 싸움이 더욱 잔인해진다. 우선 가해자 측은 학교폭력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거나, 징계에 반대하며 교육청에 재심을 청구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쟁은 사법 절차를 치르면서 벌어진다. 징계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 심판을 걸면 1심, 2심, 3심까지 끌고 갈 수 있으며,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징계의 효력을 정지하는 집행정지 신청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피해 학생도 잘못이 있었다며 ‘맞학폭’ 소송을 걸거나 담당 교사를 무고죄로 고발한다. 입시를 망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새로운 종류의 가해를 더하는 것이다. 인맥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하고 재력을 활용해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이들은 “법대로 하자”고 말했을 때 (가해자이더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가족들은 법정 싸움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 법정에 가기도 전에 사건 자체가 유야무야되기도 한다. 변호 시장과 사법 제도를 거리낌 없이 활용할 수 있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약소자들을 ‘합법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것이다.[ref]김정희원, “변호라는 이름의 가해”, 〈한겨레〉, 2023년 8월 3일.[/ref]
경쟁이 격화된 법조 시장은 꾸준히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왔으며 이미 학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입원이었다. 잠재적 소송감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전망 좋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법무법인은 학교폭력 전담 센터를 두고 교육청 출신 혹은 교사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한다고 광고하며, 학교폭력 가해 학생의 “전학 조치 취소”, “출석 정지 조치 집행 정지”를 얻어 냈다는 ‘성공 사례’를 줄줄이 열거한다. 이들이 광고하는 “징계 취소 성공 사례”에는 여학생을 상대로 한 강제추행 및 성희롱 사건들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이제 변호사들은 본격적인 소송에 앞서 각 교육청에서 열리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대응까지도 함께하며, 이 과정에서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상당한 수임료를 받는다. 그만큼 일찌감치 변호사들이 모든 절차에 동행하는 것이다. 이때 이미 위원회의 교육 혹은 선도 효과보다는 사법화의 영향력이 작동한다. ‘자녀의 미래’가 달린 일이라 상대측 부모가 변호사를 선임했을 때 거기에 대응하지 않기는 어렵기도 하다. 결국 변호사가 제안하는 전략에 따라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하게 된다.
당연히 법적으로 개입하는 이들의 목표는 학생들의 치유, 화해, 또는 회복이 아니라 갖은 수단을 동원해 가해의 흔적을 지우거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다. 아이의 회복과 치유보다는 성공 보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공 보수를 제시하지 않는 대신 애초부터 높은 수임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학교폭력이 없던 일이 되면 가해 학생들은 이로부터 무엇을 배우며, 피해 학생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 갈 수 있을까?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모두를 가르침과 성장의 장으로 이끌고자 힘겹게 애썼던 교사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의 사법화 경향은 너무도 거센 흐름이어서 학교의 일상을 크게 바꾸어 왔다. 각 시·도교육청에서도 학교폭력전담변호사를 공무원으로 채용한 지 오래다. 물론 이들은 많은 경우 이곳에서 약간의 경력을 채운 후, 처우가 훨씬 좋은 사설 법무법인으로 옮긴다. 시중에는 “법알못 교사 탈출하기!”를 내세운 교사 전용 소송 대처 매뉴얼이 판매되고 있기도 하다.[ref]구슬·김동현(2020), 《교사가 묻고 변호사가 답하다》, 테크빌교육.[/ref] 교사들은 다양한 안내서를 읽으며 법정 싸움에 대비한다. 학부모가 자신을 아동학대로 기소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침해 학생 학부모가 행정 소송을 걸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학부모가 손해 배상을 청구했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우리가 공동체적 조정과 해결을 거부하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법적 분쟁은 증가하는데 학교의 보호는 충분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교사들은 보험 상품에 의존하기도 한다. 흔히 ‘교권 보험’으로 알려진 교권 침해 특약 보험 가입자 수는 최근 5년간 89% 급증했다.[ref]“잇따른 폭언, 성희롱에… 교권 보험으로 몰리는 교사들”, 〈경향신문〉, 2023년 7월 29일.[/ref] 이 보험은 교권 침해 사실이 인정되었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고, 법률상 손해 배상 책임, 민사·행정 소송 비용, 교원 소청 변호사 비용 등을 보장해 준다. 이 같은 보험 시장의 성장은 그만큼 학교 현장에서 다양한 수준의 가해와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신뢰와 소통이 상실되었다는 점의 방증일 것이다. 물론 사보험 의존도는 공적 안전망이 사라진 사회에서 교사들이 각자도생에 내몰리는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2023년 여름에 실시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97%가 “본인 또는 동료 교사가 민원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았거나 휴직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ref]“교사 92.3%, 본인·동료 과도한 민원·우울증 경험”, 〈YTN〉, 2023년 7월 28일.[/ref] 지난 6년간 약 100명의 교사들이 자살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으며[ref]“목숨 끊은 교사 6년 새 100명… 초등 선생님이 절반 넘어” 〈한겨레〉, 2023년 7월 31일.[/ref] 여전히 교사들의 자살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매일 쉽지 않은 일을 해내면서도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해 이직을 고민한다는 교사들의 비율도 높다. 교사노동조합연맹의 조사[ref]“교사 87%는 1년간 이직·사직 고민… 4명 중 1명 정신과 상담”, 〈연합뉴스〉, 2023년 5월 10일.[/ref]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이직 또는 사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한 교사가 87%였으며, “교직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답변은 68%였다. 또한 최근 5년 동안 교권 침해로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 교사의 비율이 27%로 집계됐다. 교권 침해는 특히 사법화 경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반영하듯 해당 설문 조사에서 교사들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 1순위로 “법률에 의한 교육 활동 침해 방지 대책 수립”을 꼽았다. 이렇게 응답한 비율은 무려 40%에 달했다.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동안 법조 시장, 보험 상품, 그리고 의료 시장에 기대어 왔던 교사들의 울분은 수십만 명이 모이는 ‘검은 옷 시위’로 표출되기도 했다. 교사들은 법조인(혹은 법조계 출신) 학부모의 민원이 특히 많았다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젊은 교사의 49재를 맞아 ‘공교육 멈춤의 날’을 선포한 바 있다. 이렇게 교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한국 사회는 교사들의 아픔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교육 현장을 비롯해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 침투한 사법 폭력은 한국 사회의 중층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되는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격화된 법조 시장에서 변호사들이 윤리적 책무를 되새기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물론 법조인이라면 인권, 공익, 그리고 공정과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건을 명백히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다루는 변호사들에게 이 같은 질문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소속 변호사들의 사건 수임 건수는 월평균 1.1건에 불과하다.[ref]“수임 가뭄 시달리는 서초동…변호사 월 평균 사건 수임 1.1건”, 〈법조신문〉, 2023년 5월 2일.[/ref] 충격적인 수치이지만 이마저도 평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형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들과 유명 변호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인 변호사들은 월 평균 단 1건도 수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ref]정확한 집계 방식이 알려져 있지 않아 이 통계가 어느 정도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다.[/ref] 물론 이 같은 물적 조건을 이유로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변호 관행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변호사들이 ‘성공 사례’ 만들기에 집중하며 자신의 몸값을 높이고, 이윤 추구를 극대화하기 위해 비도덕적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주의형 삶의 방식[ref]김정희원(2022), 《공정 이후의 세계》, 창비.[/ref]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이 당연한, 혹은 합리적인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 학생이 어떤 처분도 받지 않는 것이 피해 회복에 어떤 도움이 될까? 이것이 과연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논리로 옹호될 수 있을까. 이 같은 변호 전략이 계속 확산되면서 더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겨나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사법 폭력은 이처럼 시장화된 법조계가 적극적인 범죄화 전략을 도입하면서 더욱 악화되고 있다. 즉, 특정 행위를 고소 및 고발을 통해 범죄로 만드는 것이다. 학교폭력 피해자를 상대로 마치 쌍방과실을 주장하듯 ‘맞학폭’ 고소를 하고,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사를 ‘아동학대죄’로 고소하고, 학교장을 무고죄로 고소하는 등의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주도적으로 범죄화 전략을 쓰면 가해 학생 한 명의 변호를 맡은 후 새로운 소송 건수를 늘리면서 착수금도 늘려갈 수 있다. 법무법인 또는 변호사가 주도하는 ‘기획 고소’는 성폭력의 경우에도 흔한 모델이다. 예컨대, 성폭력 가해자의 변호를 맡으면서 피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하는 것까지 포함한 ‘패키지 수임’을 변호사가 먼저 제안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를 무고죄로 역고소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가해자들도 있었다고 한다.[ref]김보화(2023), 《시장으로 간 성폭력》, 휴머니스트.[/ref] 변호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맡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법무법인 주도의 ‘기획 고소’는 과연 정당한 법조 행위일까? 성폭력 피해자가 추후 무고죄 고소를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받게 되면 이것을 보복 위협으로 받아들여 커다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피해자는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법정 싸움을 이어 가면서 계속 위축되거나 싸움 자체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이 같은 범죄화 전략을 동원하는 ‘노련한’ 법무법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축적된 ‘노하우’를 활용해 감형 또는 무죄 판결을 받아 낸 뒤, 시장 경쟁 때문에 인하된 착수금을 성공 보수를 통해 보충한다.[ref]형사 사건에서 성공 보수는 법적으로 무효이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성공 보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ref]
이 같은 시장화 전략과 범죄화 전략의 결합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앞으로도 사법 폭력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히 법조계 내부에 머무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다. 사법 시스템을 활용한 폭력과 공격이 변호 업계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부추겨지고,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이 현행법상 ‘위법이 아니므로’ 마치 정당한 행위인 것처럼 포장된다. 또한 자신의 자산과 능력으로 ‘유명 로펌’을 선임하는 것은 능력주의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므로 나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나의 ‘자유’다. 기득권으로서 이미 갖고 있던 특권 의식과 더불어, 자신의 행위가 법조계에 의해 합법적 행위로 또는 남들도 다 하는 관행으로 인정되면서 나에게는 처벌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실제로는 ‘기획 고소’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당한 폭력, 혹은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폭력이라고 자신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법정에서는 가진 자들의 폭력이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이들은 사법 제도와 변호 전략을 활용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길들이거나, 혹은 지속적으로 괴롭혀서 법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당연하게도 계급 격차와 능력주의적 불평등[ref]Markovits, D.(2019), The meritocracy trap, Penguin Books.[/ref]에 따라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 나아가 정치 참여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학교를 포함한 일터에서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에 격차가 생겨나게 된다. 법적 지식과 물적 자본이 없으면 물론 법정 싸움에서 승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른바 지불 능력의 자유가 없는 이들은 그만큼 법적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 자체가 높아진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손쉽게 학교폭력의 타깃이 되고, 이어서 사법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처럼 새로운 양태의 폭력을 법적으로 용인함으로써, 그리고 민주적 소통과 협상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사법 절차에 의존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갈등은 증폭되고 공동체적 조정 및 회복 능력은 훼손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최근 공감대를 얻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법정을 매개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에 대해서는 더 많은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변호사들마저 자신들이 “사업성과 영리 추구”에 몰두하며 “수임에만 급급해 실제 사건에는 불성실하게 임한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겠는가.[ref]김정희원(2022), 앞의 책.[/ref] 사법 폭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더 많이 분열시키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공론화되어야 하며, 단지 법조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과 자정 노력이 제대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또는 내 아이의 입시와 성공을 위해 다른 아이를, 가족을, 공동체의 구성원을 처벌해도 괜찮다고 믿는 개별주의적 태도와 능력주의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을 것이다.
치유, 성장, 변화 : 공권력이 아닌 공동체로부터
우리 사회는 이 같은 폭력과 피해의 악순환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주요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처벌 중심의 정책은 매우 우려스럽다. 학교폭력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기조를 내세우면서 응징과 축출(cancel)을 핵심으로 하는 엄벌주의를 해법으로 내세웠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실 관계자는 “한 번 잘못하면 인생이 끝난다는 취지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학생과 미성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처벌도 절대 “누군가의 인생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처벌과 공포로 권위를 세우고, 위계와 억압으로 가해자를 때려잡으면, 과연 학교에서 폭력이 사라지고 학생들은 안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공포, 엄벌, 경쟁으로 억압된 초·중·고를 지난 학생들이 성인이 된 시점의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두려운 일이다.
엄벌주의로는 학교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 처벌을 강화하고 그 기록을 장기 보존하겠다는 현 정부의 접근은 오히려 ‘강 대 강’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다. 부모의 교육열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대학 진학이 성공하는 그날까지, 가해자와 그 부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욱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사법 전략은 고도화되고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 가해자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반성과 책임이지 “원스트라이크 아웃”이 아니다. ‘문제 학생’을 추방하면 손쉽게 사태가 해결될 것처럼 믿을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관계와 공동체를 회복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마치 형사 처벌을 추진하듯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아야 한다.
엄벌주의로 폭력을 예방하거나 가해자를 교화하거나, 또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실증적 근거는 미약하다.[ref]Cook, A. N. & Roesch, R.(2012), “Tough on crime” reforms: What psychology has to say about the recent and proposed justice policy in Canada, Canadian Psychology, 53(3), pp. 217-225.[/ref] 특히 학교라는 시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학교폭력 처리 과정에서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회복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즉 처벌이 아닌 행동 변화를 중심에 둔 개입의 방식을 모색하고 구체화해야 한다. 단계별로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가해자의 인식 및 행동 변화를 위해 단계별로 어떻게 개입하고 어느 수준까지 자원을 이용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당연히 이 과정은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이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회복되어야 함을 뜻한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왜 같은 반 친구를 도구화하는 것으로 자신의 분을 풀려고 할까. 학교폭력 해결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진정한 책임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타인을 혐오하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 고귀하게 대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대화할 수 있을까.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엄벌주의 앞에서, 혹은 퇴학과 대입 실패의 두려움 앞에서 그 시도조차 무력화될 것이다. 영구 추방의 미래를 앞에 두고는 그 누구도 반성과 성장을 모색하지 않는다.[ref]김정희원(2022), 〈젠더 폭력의 공동체적 해결〉, 《황해문화》, 116, 254~268쪽.[/ref] 축출과 처벌만이 자신에게 남겨진 미래라면 가해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저 사태를 모면할 방법만 찾을 뿐이다. 그래서 학교폭력 해결은 비록 처벌이 수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축출과 추방이 아니라 치유와 포용을 향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진정으로 성장하고 다시는 유사한 폭력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학교폭력 해결 과정의 목표는 법적 처분을 면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고 거짓으로 일관하며 반성문을 전략적으로 쓰는 법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잘못,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이가 입은 피해를 또렷하게 이해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같은 행동 변화, 그리고 여기에 따라오는 피해자의 용서야말로 처벌을 거두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즉,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가해자라는 영원한 ‘주홍글씨’가 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은 윤리와 진리를 학교공동체가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전에 이런 공동체적 변화의 노력을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곳이 학교다. 우리가 학교에서도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서 해낼 수 있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관계성의 회복과 공동체적 치유를 위한 근본적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평등과 존엄을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 공격성과 증오, 그리고 불안과 긴장감이 사라질 수는 없다. 학교폭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학생들을 포함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도 불안에 떨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다. 수면 위로 드러난 폭력을 엄벌주의로 억누르기보다는 그 기저에 깔린 요인을 분석하고 구조적 변화를 위한 방안을 찾아 나가려는 정책적 노력이 시급하다. 아픈 사회를 어떻게 처벌로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끊은 한 교사의 49재를 앞두고, 추모마저도 처벌로 억누르려는 우리 사회의 움직임 앞에 종교인들이 “슬픔을 칼로 베지 마십시오”[ref]“슬픔을 칼로 베지 말라… 4대 종교단체, 교육부에 호소”, 〈오마이뉴스〉, 2023년 9월 1일.[/ref]라고 청했던 것을 부디 우리 모두 귀담아들었으면 한다.
기획 | 법화사회와 교육
학교폭력과 사법 폭력의 연쇄고리
엄벌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변혁이 필요하다
글
김정희원
Heewon.Kim@asu.edu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법의 지배인가, 법의 폭력인가
요즘의 한국 사회는 마치 응보 정의가 시대정신이라도 된 듯하다. 법, 공정, 엄벌과 같은 단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언론에 등장하고 사람들의 글과 말 속에 오르내린다. 특히 현 정부 이후로 한국 사회의 담론장을 지배하고 있는 ‘법치(rule of law)’라는 용어는 ‘공정’과 더불어 그 뜻이 가장 오염된 개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서구에서 법치, 즉 ‘법의 지배’ 개념이 대중화된 이래로 그 정의는 계속 확장되어 왔지만, 큰 틀에서 법치의 정의는 다음 세 원칙의 변주를 따른다.[ref]Scales, A.(2006), Legal feminism: Activism, lawyering, and legal theory, New York University Press.[/ref] 임의의 권력보다 법이 우위에 있을 것,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법에 종속될 것, 법리적 논쟁은 사법적 판단으로 해결할 것.[ref]Dicey, A. V.(1885/1924),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Macmillan.[/ref] 즉, 대통령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임의의 권력으로 법을 사유화할 수 없으며, 기득권이라고 해서 법적 판단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고, 사법적 절차 없이 멋대로 (예컨대, 시행령 개정을 통해) 법적 ‘한계’를 해소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법치의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현재 남용되고 있는 법치 개념은 그저 법을 이용한 통제(rule by law)에 불과할 뿐 아니라 “노사법치주의”와 같은 정체불명의 신조어를 활용해 사회적 약소자를 탄압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법의 지배라기보다는 법의 폭력이다.[ref]물론 많은 학자들은 법 그 자체가 이미 폭력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ref]
법치의 이름으로 각종 통제 및 억압 기제를 정당화하는 현 정부의 접근은 우리에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도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통치의 한 양태로 소송을 동원했던 금권정치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이때 법치라는 이름의 통치성이 보여 준 핵심은 정치적 자유와 지불 능력의 유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ref]김현미(2009),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국가와 생활정치〉, 《창작과 비평》, 145, 94~113쪽.[/ref] 정부가 시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함으로써 지불 능력이 없는 이들은 정치적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날 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로 전락한다. 프리드먼이 말한 그대로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선결 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이다.[ref]Friedman, M.(1966), Capitalism and freedom, University of Chicago Press.[/ref] 이 같은 경향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단지 법정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바깥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정치적 사안뿐 아니라 개인 및 집단 간 갈등의 영역에서도 많은 문제가 사법적 해결의 영역으로 넘겨지면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조정 능력은 상실되어 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참여와 합의로 의사 결정에 이르기보다는 사법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자산, 인적 자본, 그리고 법적 지식을 다양한 경로로 동원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때때로 가해와 피해의 반복을 낳는데, 교육 현장 역시 이 연쇄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사법 폭력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한 학교에서의 소송전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침투한 폭력 : 시장과 사법의 결탁
학교 현장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법적 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어느 변호사가 공직에 임명된 탓에 그가 아들을 위해 활용했던 ‘학교폭력 가해자 전략’이 상세히 폭로되면서 전 국민이 분노했던 것이다. 학교폭력 가해자 측의 목표는 가능한 한 모든 법적·행정적 수단을 동원해 가해의 기록을 유예하거나 남기지 않는 것이다. 대학 입시가 걸려 있을 경우에는 이 싸움이 더욱 잔인해진다. 우선 가해자 측은 학교폭력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거나, 징계에 반대하며 교육청에 재심을 청구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쟁은 사법 절차를 치르면서 벌어진다. 징계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 심판을 걸면 1심, 2심, 3심까지 끌고 갈 수 있으며,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징계의 효력을 정지하는 집행정지 신청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피해 학생도 잘못이 있었다며 ‘맞학폭’ 소송을 걸거나 담당 교사를 무고죄로 고발한다. 입시를 망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새로운 종류의 가해를 더하는 것이다. 인맥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하고 재력을 활용해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이들은 “법대로 하자”고 말했을 때 (가해자이더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가족들은 법정 싸움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 법정에 가기도 전에 사건 자체가 유야무야되기도 한다. 변호 시장과 사법 제도를 거리낌 없이 활용할 수 있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약소자들을 ‘합법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것이다.[ref]김정희원, “변호라는 이름의 가해”, 〈한겨레〉, 2023년 8월 3일.[/ref]
경쟁이 격화된 법조 시장은 꾸준히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왔으며 이미 학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입원이었다. 잠재적 소송감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전망 좋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법무법인은 학교폭력 전담 센터를 두고 교육청 출신 혹은 교사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한다고 광고하며, 학교폭력 가해 학생의 “전학 조치 취소”, “출석 정지 조치 집행 정지”를 얻어 냈다는 ‘성공 사례’를 줄줄이 열거한다. 이들이 광고하는 “징계 취소 성공 사례”에는 여학생을 상대로 한 강제추행 및 성희롱 사건들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이제 변호사들은 본격적인 소송에 앞서 각 교육청에서 열리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대응까지도 함께하며, 이 과정에서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상당한 수임료를 받는다. 그만큼 일찌감치 변호사들이 모든 절차에 동행하는 것이다. 이때 이미 위원회의 교육 혹은 선도 효과보다는 사법화의 영향력이 작동한다. ‘자녀의 미래’가 달린 일이라 상대측 부모가 변호사를 선임했을 때 거기에 대응하지 않기는 어렵기도 하다. 결국 변호사가 제안하는 전략에 따라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하게 된다.
당연히 법적으로 개입하는 이들의 목표는 학생들의 치유, 화해, 또는 회복이 아니라 갖은 수단을 동원해 가해의 흔적을 지우거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다. 아이의 회복과 치유보다는 성공 보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공 보수를 제시하지 않는 대신 애초부터 높은 수임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학교폭력이 없던 일이 되면 가해 학생들은 이로부터 무엇을 배우며, 피해 학생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 갈 수 있을까?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모두를 가르침과 성장의 장으로 이끌고자 힘겹게 애썼던 교사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의 사법화 경향은 너무도 거센 흐름이어서 학교의 일상을 크게 바꾸어 왔다. 각 시·도교육청에서도 학교폭력전담변호사를 공무원으로 채용한 지 오래다. 물론 이들은 많은 경우 이곳에서 약간의 경력을 채운 후, 처우가 훨씬 좋은 사설 법무법인으로 옮긴다. 시중에는 “법알못 교사 탈출하기!”를 내세운 교사 전용 소송 대처 매뉴얼이 판매되고 있기도 하다.[ref]구슬·김동현(2020), 《교사가 묻고 변호사가 답하다》, 테크빌교육.[/ref] 교사들은 다양한 안내서를 읽으며 법정 싸움에 대비한다. 학부모가 자신을 아동학대로 기소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침해 학생 학부모가 행정 소송을 걸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학부모가 손해 배상을 청구했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우리가 공동체적 조정과 해결을 거부하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법적 분쟁은 증가하는데 학교의 보호는 충분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교사들은 보험 상품에 의존하기도 한다. 흔히 ‘교권 보험’으로 알려진 교권 침해 특약 보험 가입자 수는 최근 5년간 89% 급증했다.[ref]“잇따른 폭언, 성희롱에… 교권 보험으로 몰리는 교사들”, 〈경향신문〉, 2023년 7월 29일.[/ref] 이 보험은 교권 침해 사실이 인정되었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고, 법률상 손해 배상 책임, 민사·행정 소송 비용, 교원 소청 변호사 비용 등을 보장해 준다. 이 같은 보험 시장의 성장은 그만큼 학교 현장에서 다양한 수준의 가해와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신뢰와 소통이 상실되었다는 점의 방증일 것이다. 물론 사보험 의존도는 공적 안전망이 사라진 사회에서 교사들이 각자도생에 내몰리는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2023년 여름에 실시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97%가 “본인 또는 동료 교사가 민원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았거나 휴직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ref]“교사 92.3%, 본인·동료 과도한 민원·우울증 경험”, 〈YTN〉, 2023년 7월 28일.[/ref] 지난 6년간 약 100명의 교사들이 자살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으며[ref]“목숨 끊은 교사 6년 새 100명… 초등 선생님이 절반 넘어” 〈한겨레〉, 2023년 7월 31일.[/ref] 여전히 교사들의 자살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매일 쉽지 않은 일을 해내면서도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해 이직을 고민한다는 교사들의 비율도 높다. 교사노동조합연맹의 조사[ref]“교사 87%는 1년간 이직·사직 고민… 4명 중 1명 정신과 상담”, 〈연합뉴스〉, 2023년 5월 10일.[/ref]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이직 또는 사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한 교사가 87%였으며, “교직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답변은 68%였다. 또한 최근 5년 동안 교권 침해로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 교사의 비율이 27%로 집계됐다. 교권 침해는 특히 사법화 경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반영하듯 해당 설문 조사에서 교사들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 1순위로 “법률에 의한 교육 활동 침해 방지 대책 수립”을 꼽았다. 이렇게 응답한 비율은 무려 40%에 달했다.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동안 법조 시장, 보험 상품, 그리고 의료 시장에 기대어 왔던 교사들의 울분은 수십만 명이 모이는 ‘검은 옷 시위’로 표출되기도 했다. 교사들은 법조인(혹은 법조계 출신) 학부모의 민원이 특히 많았다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젊은 교사의 49재를 맞아 ‘공교육 멈춤의 날’을 선포한 바 있다. 이렇게 교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한국 사회는 교사들의 아픔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교육 현장을 비롯해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 침투한 사법 폭력은 한국 사회의 중층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되는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격화된 법조 시장에서 변호사들이 윤리적 책무를 되새기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물론 법조인이라면 인권, 공익, 그리고 공정과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건을 명백히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다루는 변호사들에게 이 같은 질문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소속 변호사들의 사건 수임 건수는 월평균 1.1건에 불과하다.[ref]“수임 가뭄 시달리는 서초동…변호사 월 평균 사건 수임 1.1건”, 〈법조신문〉, 2023년 5월 2일.[/ref] 충격적인 수치이지만 이마저도 평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형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들과 유명 변호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인 변호사들은 월 평균 단 1건도 수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ref]정확한 집계 방식이 알려져 있지 않아 이 통계가 어느 정도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다.[/ref] 물론 이 같은 물적 조건을 이유로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변호 관행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변호사들이 ‘성공 사례’ 만들기에 집중하며 자신의 몸값을 높이고, 이윤 추구를 극대화하기 위해 비도덕적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주의형 삶의 방식[ref]김정희원(2022), 《공정 이후의 세계》, 창비.[/ref]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이 당연한, 혹은 합리적인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 학생이 어떤 처분도 받지 않는 것이 피해 회복에 어떤 도움이 될까? 이것이 과연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논리로 옹호될 수 있을까. 이 같은 변호 전략이 계속 확산되면서 더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겨나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사법 폭력은 이처럼 시장화된 법조계가 적극적인 범죄화 전략을 도입하면서 더욱 악화되고 있다. 즉, 특정 행위를 고소 및 고발을 통해 범죄로 만드는 것이다. 학교폭력 피해자를 상대로 마치 쌍방과실을 주장하듯 ‘맞학폭’ 고소를 하고,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사를 ‘아동학대죄’로 고소하고, 학교장을 무고죄로 고소하는 등의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주도적으로 범죄화 전략을 쓰면 가해 학생 한 명의 변호를 맡은 후 새로운 소송 건수를 늘리면서 착수금도 늘려갈 수 있다. 법무법인 또는 변호사가 주도하는 ‘기획 고소’는 성폭력의 경우에도 흔한 모델이다. 예컨대, 성폭력 가해자의 변호를 맡으면서 피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하는 것까지 포함한 ‘패키지 수임’을 변호사가 먼저 제안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를 무고죄로 역고소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가해자들도 있었다고 한다.[ref]김보화(2023), 《시장으로 간 성폭력》, 휴머니스트.[/ref] 변호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맡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법무법인 주도의 ‘기획 고소’는 과연 정당한 법조 행위일까? 성폭력 피해자가 추후 무고죄 고소를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받게 되면 이것을 보복 위협으로 받아들여 커다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피해자는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법정 싸움을 이어 가면서 계속 위축되거나 싸움 자체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이 같은 범죄화 전략을 동원하는 ‘노련한’ 법무법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축적된 ‘노하우’를 활용해 감형 또는 무죄 판결을 받아 낸 뒤, 시장 경쟁 때문에 인하된 착수금을 성공 보수를 통해 보충한다.[ref]형사 사건에서 성공 보수는 법적으로 무효이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성공 보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ref]
이 같은 시장화 전략과 범죄화 전략의 결합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앞으로도 사법 폭력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히 법조계 내부에 머무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다. 사법 시스템을 활용한 폭력과 공격이 변호 업계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부추겨지고,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이 현행법상 ‘위법이 아니므로’ 마치 정당한 행위인 것처럼 포장된다. 또한 자신의 자산과 능력으로 ‘유명 로펌’을 선임하는 것은 능력주의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므로 나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나의 ‘자유’다. 기득권으로서 이미 갖고 있던 특권 의식과 더불어, 자신의 행위가 법조계에 의해 합법적 행위로 또는 남들도 다 하는 관행으로 인정되면서 나에게는 처벌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실제로는 ‘기획 고소’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당한 폭력, 혹은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폭력이라고 자신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법정에서는 가진 자들의 폭력이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이들은 사법 제도와 변호 전략을 활용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길들이거나, 혹은 지속적으로 괴롭혀서 법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당연하게도 계급 격차와 능력주의적 불평등[ref]Markovits, D.(2019), The meritocracy trap, Penguin Books.[/ref]에 따라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 나아가 정치 참여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학교를 포함한 일터에서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에 격차가 생겨나게 된다. 법적 지식과 물적 자본이 없으면 물론 법정 싸움에서 승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른바 지불 능력의 자유가 없는 이들은 그만큼 법적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 자체가 높아진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손쉽게 학교폭력의 타깃이 되고, 이어서 사법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처럼 새로운 양태의 폭력을 법적으로 용인함으로써, 그리고 민주적 소통과 협상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사법 절차에 의존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갈등은 증폭되고 공동체적 조정 및 회복 능력은 훼손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최근 공감대를 얻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법정을 매개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에 대해서는 더 많은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변호사들마저 자신들이 “사업성과 영리 추구”에 몰두하며 “수임에만 급급해 실제 사건에는 불성실하게 임한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겠는가.[ref]김정희원(2022), 앞의 책.[/ref] 사법 폭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더 많이 분열시키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공론화되어야 하며, 단지 법조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과 자정 노력이 제대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또는 내 아이의 입시와 성공을 위해 다른 아이를, 가족을, 공동체의 구성원을 처벌해도 괜찮다고 믿는 개별주의적 태도와 능력주의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을 것이다.
치유, 성장, 변화 : 공권력이 아닌 공동체로부터
우리 사회는 이 같은 폭력과 피해의 악순환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주요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처벌 중심의 정책은 매우 우려스럽다. 학교폭력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기조를 내세우면서 응징과 축출(cancel)을 핵심으로 하는 엄벌주의를 해법으로 내세웠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실 관계자는 “한 번 잘못하면 인생이 끝난다는 취지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학생과 미성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처벌도 절대 “누군가의 인생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처벌과 공포로 권위를 세우고, 위계와 억압으로 가해자를 때려잡으면, 과연 학교에서 폭력이 사라지고 학생들은 안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공포, 엄벌, 경쟁으로 억압된 초·중·고를 지난 학생들이 성인이 된 시점의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두려운 일이다.
엄벌주의로는 학교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 처벌을 강화하고 그 기록을 장기 보존하겠다는 현 정부의 접근은 오히려 ‘강 대 강’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다. 부모의 교육열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대학 진학이 성공하는 그날까지, 가해자와 그 부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욱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사법 전략은 고도화되고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 가해자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반성과 책임이지 “원스트라이크 아웃”이 아니다. ‘문제 학생’을 추방하면 손쉽게 사태가 해결될 것처럼 믿을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관계와 공동체를 회복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마치 형사 처벌을 추진하듯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아야 한다.
엄벌주의로 폭력을 예방하거나 가해자를 교화하거나, 또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실증적 근거는 미약하다.[ref]Cook, A. N. & Roesch, R.(2012), “Tough on crime” reforms: What psychology has to say about the recent and proposed justice policy in Canada, Canadian Psychology, 53(3), pp. 217-225.[/ref] 특히 학교라는 시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학교폭력 처리 과정에서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회복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즉 처벌이 아닌 행동 변화를 중심에 둔 개입의 방식을 모색하고 구체화해야 한다. 단계별로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가해자의 인식 및 행동 변화를 위해 단계별로 어떻게 개입하고 어느 수준까지 자원을 이용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당연히 이 과정은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이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회복되어야 함을 뜻한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왜 같은 반 친구를 도구화하는 것으로 자신의 분을 풀려고 할까. 학교폭력 해결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진정한 책임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타인을 혐오하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 고귀하게 대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대화할 수 있을까.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엄벌주의 앞에서, 혹은 퇴학과 대입 실패의 두려움 앞에서 그 시도조차 무력화될 것이다. 영구 추방의 미래를 앞에 두고는 그 누구도 반성과 성장을 모색하지 않는다.[ref]김정희원(2022), 〈젠더 폭력의 공동체적 해결〉, 《황해문화》, 116, 254~268쪽.[/ref] 축출과 처벌만이 자신에게 남겨진 미래라면 가해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저 사태를 모면할 방법만 찾을 뿐이다. 그래서 학교폭력 해결은 비록 처벌이 수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축출과 추방이 아니라 치유와 포용을 향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진정으로 성장하고 다시는 유사한 폭력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학교폭력 해결 과정의 목표는 법적 처분을 면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고 거짓으로 일관하며 반성문을 전략적으로 쓰는 법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잘못,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이가 입은 피해를 또렷하게 이해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같은 행동 변화, 그리고 여기에 따라오는 피해자의 용서야말로 처벌을 거두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즉,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가해자라는 영원한 ‘주홍글씨’가 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은 윤리와 진리를 학교공동체가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전에 이런 공동체적 변화의 노력을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곳이 학교다. 우리가 학교에서도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서 해낼 수 있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관계성의 회복과 공동체적 치유를 위한 근본적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평등과 존엄을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 공격성과 증오, 그리고 불안과 긴장감이 사라질 수는 없다. 학교폭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학생들을 포함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도 불안에 떨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다. 수면 위로 드러난 폭력을 엄벌주의로 억누르기보다는 그 기저에 깔린 요인을 분석하고 구조적 변화를 위한 방안을 찾아 나가려는 정책적 노력이 시급하다. 아픈 사회를 어떻게 처벌로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끊은 한 교사의 49재를 앞두고, 추모마저도 처벌로 억누르려는 우리 사회의 움직임 앞에 종교인들이 “슬픔을 칼로 베지 마십시오”[ref]“슬픔을 칼로 베지 말라… 4대 종교단체, 교육부에 호소”, 〈오마이뉴스〉, 2023년 9월 1일.[/ref]라고 청했던 것을 부디 우리 모두 귀담아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