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학생인권 과잉이라는 환상,
정말 그런가
새시비비
ericrow@hanmail.net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서울과 충남 및 광주 등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전북·경기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너무 학생인권만 보장하고 있어 교육인권조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리고 이제 ‘학교구성원조례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통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다음 두 글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보자. 하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터넷 커뮤니티라고 불리는 ‘디시인사이드’에 올라온 글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교육신문〉에 실린 글이다. 모두 ‘학생인권이 과도하게 보장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교사가 피해를 입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전북에서 2017년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들고 있다.
진보 교육감이었던 전북 교육감은 미투 운동 당시 성추행 누명으로 무고당했던 부안 OO중 고 송OO 교사 사망 사건 때 경찰이 내사 종결 처리했는데도 교육청 측에서 징계 절차 밟고 결국 그 교사는 자살함. 저 사건도 교권 강화 목소리가 나오던 시발점 중 하나임. (……) 그때는 자기들 일 아니라고 페미들이랑 손잡고 교사 죽은 거는 미안하지만 미투 운동은 그대로 해야 한다, 스쿨 미투 어쩌고저쩌고 이러더니. 이제 자기들까지 피해 입으니깐 교권 강화 목소리 올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f]“그런데 교사들 쪽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매한가지임”, 디시인사이드 새로운보수당갤러리, 2023년 9월 4일.[/ref]
교사는 국가 공무원인데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를 정해서 조사 및 징계를 한다는 점이다. 교육을 전공하지 않은 지방 공무원(자칭 인권활동가인 인권옹호관·인권조사관 등)이 국가 공무원을 조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부안에서 일어났다. 경찰에서 무혐의가 났으나 전북인권센터의 무리한 조사로 고 송OO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사건은 학생인권조례가 교사를 어떻게 대하는지 명확하게 보여 준 비극적인 사례다.[ref]육진경, “학생인권은 있어도 교사인권은 없다”, 〈한국교육신문〉, 2024년 6월 4일.[/ref]
그리고 다음은 위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다. 선조들이 피땀 흘려 쌓아 온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이 학생인권조례안이다. 반드시 폐지해야 학생이 학생답고 교사가 교사다워진다.”
“진짜 없어져야 할 제도입니다. 학생인권조례는 시대에 맞지 않아요.”
이 글들은 각각 2023년 가을과 2024년 6월에 작성된 것이다. 첫 번째 글은 인터넷 여론의 전형적 주장이어서 다소 걸러서 볼 필요는 있다. (물론 위 주장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전교조 교사 다수가 그렇다. 특히 실제 사건이 일어난 전북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스쿨 미투에 반대하는 것이 정의라 믿고 있는 일부 교사들이 교권 강화의 흐름에서도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두 번째 글과 그 댓글들과 비교하고 약간의 추가 정보를 보태면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고 송○○ 교사가 억울한 누명을 썼고, 전북학생인권센터의 강압적인 조사로 인해 자살을 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교권 강화 목소리로 이어진 계기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학생인권만 강조하던 김승환 전북 교육감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고, 학생인권만 일방적으로 보장해 주니 학생들은 심지어 거짓말까지 해서 무고한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이 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많은 부분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인권이 부족한 증거
고 송○○ 교사의 유가족이 전북교육청을 상대로 낸 민사 소송은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첨부한 표는 판결문에 나온 피해 학생들의 상담 일지 가운데 두 부분이 〈오마이뉴스〉에 공개된 것이다.[ref]“극단적 상황 내몰렸던 피해 학생들… “탄원서 요구 2차 가해””, 〈오마이뉴스〉, 2021년 5월 11일.[/ref] 이 상담 일지로 증명되는 것은 학생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유가족의 회유와 압박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탄원서를 써 준 것이라는 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정말 학생인권이 과잉 보장되었다면, 성폭력 및 체벌 피해 학생과 가해자에 대한 분리 조치가 강력했을 텐데 회유와 압박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피해 학생들의 의사에 반해서 작성된 탄원서를 근거로 언론들이 피해 학생들이 거짓말을 하여 무고한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잘못된 2차 피해를 발생시키는 보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앞서 제시한 기사처럼, 최근의 학생인권조례 폐지 국면에서도 이 사건이 ‘학생인권 과잉’의 증거로 다시 호출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문제적이다. 피해 학생들은 이미 많은 2차 피해에 시달렸음에도 다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2020년에 있었던 피해 학생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에 관한 한 지방 신문의 사설 중 일부다.
회견에 참여한 도내 43개 단체들은 학생들에 대한 2차 가해가 교육감 선거를 의식한 교육단체 등의 외부 여론 외에 교육청에도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육청에 독립적인 성차별·성폭력 대응 매뉴얼 마련, 성차별·성폭력 전담팀 구성, 사건 초기 가·피해자 분리와 상담, 법률 대리를 위한 전문 인력 파견 등을 요구했다.[ref]“스쿨 미투 관련 학생 2차 피해 막아야”, 〈전라일보〉, 2020년 7월 15일.[/ref]
이 기자회견에서는 선거를 의식한 교육단체들과 언론, 그리고 교육청 모두에 책임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피해 학생 보호를 위한 대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특히 학생인권 친화적이라 자랑하던 전북교육청이 민망할 정도로 피해 학생에 대한 보호 조치가 미흡했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전북교육청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전교조 전북지부를 비롯한 진보적인 교육단체들도 이 사건을 학생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았고 교육청에 어떤 대응도 촉구하지 않았다.
전북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서 학생인권이 과잉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이 사건은 학생인권이 잘 지켜지지 않던 현실을 보여 준다. 전북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몇 년이 지난 시점에도 전북의 해당 학교에서는 체벌과 성추행이 일어났다. 교사는 성추행과 체벌을 하고도 크게 처벌받지 않았다. 그가 자살하기 전 상황은 징계 절차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을 뿐이다(일반적으로 경찰 무혐의가 나온 경우 중징계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 그가 자살하고 난 뒤 그는 오히려 성실하고 훌륭한 교사로 존경받고 추모받고 있다. 가령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행위에 대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에서 대체로 금기시되고 비판받지만, 이상하게도 학교에서는 ‘교권’을 이유로 그런 추모가 허용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학교가 인권의 사각지대임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러고도 학생인권 과잉을 말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보수가 인정하는 경우에는 성추행 혐의도 묻고 갈 수 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다시 들여다본다면, 그리고 서거석 현 전북 교육감의 말대로 학생인권이 교권과 대립하지 않는다고 믿고 정말로 학생인권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그는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피해 학생들에게 전 교육감을 대신해 사과해야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찾아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학교도, 교육청도, 유가족도 그리고 이들을 등에 업고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한 이준석, 하태경과 같은 정치인들도, 그 어느 누구도 피해 학생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신문사도, 방송사도 사과한 적이 없다.
시민 사회는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악용하여 학생인권조례 폐지의 동력으로 삼아 온 집단들(언론, 교육청, 교육단체·교원단체 등)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이 잘못 이끌어 온 여론으로 인해 피해 학생들은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뎌 왔을 것인지를, 또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그간 일어난 퇴행을 복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래야만 한다. 소위 진보 교육감이라고 불렸던 김승환 전 교육감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주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어려웠더라도, 적어도 피해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방관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교육감도 알았을 것임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학생들에 대한 2차 가해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재판을 통해서 학생들의 잘못이 밝혀질 때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학생들에 대한 섣부른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인권의 원칙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전북학생인권교육센터도 그리고 학생인권조례를 함께 만들었던 전교조도 책임이 있다. 하지만 학생인권교육센터와 전교조는 숨죽이며 사태를 방관했고, 그런 주장이라도 했던 사람들은 학생인권운동에 같이해 온 교사들 소수뿐이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의 정서는 ‘학생인권 과잉으로 힘드니까 이제 교권 보장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런 목소리는 이후 전교조 전북지부장 선거 국면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전북 교육감 선거에서도 대세가 되었다. 여기 어디에 학생인권이 있었나? 전교조에서 누가 권력을 잡느냐, 누가 교육감이 되느냐 하는 것을 위해 교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교권’이었을 뿐이었다고 본다. ‘학생인권 과잉’은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각양각색으로 지켜지지 않는 학생인권
그들이 ‘교권’을 향해 치닫는 동안 학생인권조례는 잊히고 있었다. 청소년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학생인권운동을 하던 나는 그들과 학교에서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옮겨 가는 학교에서마다 알게 된 분명한 사실은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개정된 생활규정은 말뿐이고, 실제 학생이 지켜야 하는 규정은 교무회의에서 학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학생인권조례도 아니고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등의 위반이란 점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특히 휴대전화 사용에 관한 규정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정했다. 좀 세련된 곳에서는 학생회장단을 설득해서 휴대전화를 걷는 쪽으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투표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 전북 학생인권조례를 근거로 학생들과 연대하여 싸우면서 서명운동, 대자보, 인권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에 대한 명백한 위협과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무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사들이 교육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푸념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교무실 옆자리에 앉은 전교조 선배 교사가 체벌할 때 직접 항의도 하고 학생인권센터에 신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교사라는 신분은 여러 겹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고 그 교사는 아무런 신분상 불이익도 받지 않고 ‘무사히’ 정년 퇴임을 했다. 같은 학교의 비슷한 연배의 다른 교사는 학생의 교복 치마가 규정보다 짧다는 이유로 교무실로 불러서 “강력한 생활 지도”를 했는데, 바로 학생에게 “술집 다니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겹치자 직접 권리를 찾자는 의미로 학생들이 학생생활규정을 바꾸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다양한 교사·양육자들의 반대를 이겨 내고 휴대전화 소지 조항을 통과시키려던 때에, 갑자기 학교 측은 교육 3주체 비율 조항(학생 50%, 양육자 25%, 교사 25%)을 들고나왔다. 교사 1명이 학생 9명만큼의 표를 행사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학생들이 바라던 안건이 결국 부결됐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냐고 되물었다. 여러 번 이의를 제기하고 학교운영위원회를 참관하며 부당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학교운영위원장으로부터 들었던 대답은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다 정도를 알기만 하면 되고 직접 해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인권이 과도했다면 어떻게 학교운영위원장이 그 권리를 제한할 수 있었겠는가?
역시 김승환 전북 교육감 재임 시절에 ‘이성 교제 금지’ 규정이 있었던 여남 공학에 근무한 적도 있었다. 이런 금지 규정은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더라도 박근혜 정부 시절에 교육부 지침으로 없애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례에서 폐지를 권고한 바 있는 일률적 퇴사 조치가 교장의 말 한마디에 절차도 없이 기숙사 징계 규정에 포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해마다 실시하는 기숙사 생활규정 점검 때 학생 대표가 점검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학생 대표로 하여금 허위 보고에 서명을 하도록 교사가 지시하기까지 하여 실태 점검을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또 어떤 교사들은 학생이 외출 후 돌아오면 카드 사용 내역 문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이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사적인 문자를 보고서, 농담이라며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학생의 사생활을 공개해 버린 일도 있었다. 이것은 학생인권 과잉인가, 교사의 권한 남용인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교육인권센터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강제로 수거하는 학교 규정이 없음에도, 여전히 휴대전화를 강제 수거하고 있는 중이다. 학생들은 말한다. 교사들이 귀를 닫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심지어 체육복을 입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체 학생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오르게 한 교사에 대해, (서거석 교육감의 주장에 따르면) 학생의 인권도, 교직원의 인권도 동시에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교육인권조례’ 덕택에 학생인권조사관은 이 문제를 정식으로 조사조차 하지 못했다. 조사관들의 ‘조사’ 아닌 ‘질문’에 학생들은 교사의 행위에 대해 ‘체력 단련이니 교육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식의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이나 할 법한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학생인권 과잉이라고 말한다. 학생인권조례가 교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생각해서일까. 특히 시작 부분에서 제시한 디시인사이드 게시물처럼 ‘페미’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사람들과 생각이 같다면 코드가 잘 맞기는 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던 시절에는 이의 제기조차도 할 수 없었던 성폭력과 학생인권 침해에 대해 학생들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놓고 학생인권 과잉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오리걸음’을 시킨 그 교사는 경미한 아동학대로 인정된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을 아동학대로 신고한 학생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알 바 아니고, 그 학생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교무회의 석상에서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학생인권 과잉에 분노한 교사의 일성인가, 아니면 교육을 포기한 교사의 무도한 발언인가?
일부 교사들에게만 실존하는 ‘학생인권 과잉’
이제 오늘의 학교로 돌아와 보자. 글을 쓰기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약간 각색해 보았다. A 학생이 사물함에 냄새나는 물건을 넣어서 교실이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니까, 그리고 생활 습관 지도의 의무가 있으므로 교사는 A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 이때 학생인권이 과잉이라고 주장하는 교사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른 학생의 권리(깨끗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A 학생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사물함도 열어 볼 수 없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지도할 수도 없고, 교육에는 강제성이 있는데 자발성에 모든 것을 맡기면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그리고 실제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교사들은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은 학생인권을 다 고려하면 교육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꼰대’라고 불러도 좋으나 교육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갖고 행동하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학생의 사물함을 다들 보는 앞에서 열어서 치울 것이다. 물론 교사는 학생에게 수치심이 들게 하거나 인권을 침해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다만 교육에 대한 넘치는 열정을 다해 지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도는 학교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모레 있을 연주회에 대비해 점심시간과 수업 시간까지 빼서 합주 연습을 지도하는 교사의 열정 어린 교육 활동과, 장맛비로 인해 산사태가 날지도 모르는 산에 학생들의 인내심과 체력을 기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이 12번 넘어져 등에 멍이 들어도 ‘안전하게’ 체력을 기르도록 임장 지도하는 열의를 가진 교사들의 교육 활동이 있다 할 것이다. 이들의 진심을 오해하게 하는 것이 학생인권조례고 그래서 학생인권이 과잉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교사들에게 학생인권 과잉은 환상이 아니라 실존이다. 하지만 그 실존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효과를 주고 있어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마치 꿈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효과를 주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처럼.
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학생인권 과잉이라는 환상,
정말 그런가
새시비비
ericrow@hanmail.net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서울과 충남 및 광주 등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전북·경기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너무 학생인권만 보장하고 있어 교육인권조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리고 이제 ‘학교구성원조례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통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다음 두 글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보자. 하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터넷 커뮤니티라고 불리는 ‘디시인사이드’에 올라온 글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교육신문〉에 실린 글이다. 모두 ‘학생인권이 과도하게 보장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교사가 피해를 입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전북에서 2017년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들고 있다.
진보 교육감이었던 전북 교육감은 미투 운동 당시 성추행 누명으로 무고당했던 부안 OO중 고 송OO 교사 사망 사건 때 경찰이 내사 종결 처리했는데도 교육청 측에서 징계 절차 밟고 결국 그 교사는 자살함. 저 사건도 교권 강화 목소리가 나오던 시발점 중 하나임. (……) 그때는 자기들 일 아니라고 페미들이랑 손잡고 교사 죽은 거는 미안하지만 미투 운동은 그대로 해야 한다, 스쿨 미투 어쩌고저쩌고 이러더니. 이제 자기들까지 피해 입으니깐 교권 강화 목소리 올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f]“그런데 교사들 쪽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매한가지임”, 디시인사이드 새로운보수당갤러리, 2023년 9월 4일.[/ref]
교사는 국가 공무원인데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를 정해서 조사 및 징계를 한다는 점이다. 교육을 전공하지 않은 지방 공무원(자칭 인권활동가인 인권옹호관·인권조사관 등)이 국가 공무원을 조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부안에서 일어났다. 경찰에서 무혐의가 났으나 전북인권센터의 무리한 조사로 고 송OO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사건은 학생인권조례가 교사를 어떻게 대하는지 명확하게 보여 준 비극적인 사례다.[ref]육진경, “학생인권은 있어도 교사인권은 없다”, 〈한국교육신문〉, 2024년 6월 4일.[/ref]
그리고 다음은 위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다. 선조들이 피땀 흘려 쌓아 온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이 학생인권조례안이다. 반드시 폐지해야 학생이 학생답고 교사가 교사다워진다.”
“진짜 없어져야 할 제도입니다. 학생인권조례는 시대에 맞지 않아요.”
이 글들은 각각 2023년 가을과 2024년 6월에 작성된 것이다. 첫 번째 글은 인터넷 여론의 전형적 주장이어서 다소 걸러서 볼 필요는 있다. (물론 위 주장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전교조 교사 다수가 그렇다. 특히 실제 사건이 일어난 전북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스쿨 미투에 반대하는 것이 정의라 믿고 있는 일부 교사들이 교권 강화의 흐름에서도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두 번째 글과 그 댓글들과 비교하고 약간의 추가 정보를 보태면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고 송○○ 교사가 억울한 누명을 썼고, 전북학생인권센터의 강압적인 조사로 인해 자살을 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교권 강화 목소리로 이어진 계기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학생인권만 강조하던 김승환 전북 교육감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고, 학생인권만 일방적으로 보장해 주니 학생들은 심지어 거짓말까지 해서 무고한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이 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많은 부분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인권이 부족한 증거
고 송○○ 교사의 유가족이 전북교육청을 상대로 낸 민사 소송은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첨부한 표는 판결문에 나온 피해 학생들의 상담 일지 가운데 두 부분이 〈오마이뉴스〉에 공개된 것이다.[ref]“극단적 상황 내몰렸던 피해 학생들… “탄원서 요구 2차 가해””, 〈오마이뉴스〉, 2021년 5월 11일.[/ref] 이 상담 일지로 증명되는 것은 학생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유가족의 회유와 압박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탄원서를 써 준 것이라는 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정말 학생인권이 과잉 보장되었다면, 성폭력 및 체벌 피해 학생과 가해자에 대한 분리 조치가 강력했을 텐데 회유와 압박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피해 학생들의 의사에 반해서 작성된 탄원서를 근거로 언론들이 피해 학생들이 거짓말을 하여 무고한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잘못된 2차 피해를 발생시키는 보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앞서 제시한 기사처럼, 최근의 학생인권조례 폐지 국면에서도 이 사건이 ‘학생인권 과잉’의 증거로 다시 호출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문제적이다. 피해 학생들은 이미 많은 2차 피해에 시달렸음에도 다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2020년에 있었던 피해 학생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에 관한 한 지방 신문의 사설 중 일부다.
회견에 참여한 도내 43개 단체들은 학생들에 대한 2차 가해가 교육감 선거를 의식한 교육단체 등의 외부 여론 외에 교육청에도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육청에 독립적인 성차별·성폭력 대응 매뉴얼 마련, 성차별·성폭력 전담팀 구성, 사건 초기 가·피해자 분리와 상담, 법률 대리를 위한 전문 인력 파견 등을 요구했다.[ref]“스쿨 미투 관련 학생 2차 피해 막아야”, 〈전라일보〉, 2020년 7월 15일.[/ref]
이 기자회견에서는 선거를 의식한 교육단체들과 언론, 그리고 교육청 모두에 책임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피해 학생 보호를 위한 대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특히 학생인권 친화적이라 자랑하던 전북교육청이 민망할 정도로 피해 학생에 대한 보호 조치가 미흡했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전북교육청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전교조 전북지부를 비롯한 진보적인 교육단체들도 이 사건을 학생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았고 교육청에 어떤 대응도 촉구하지 않았다.
전북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서 학생인권이 과잉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이 사건은 학생인권이 잘 지켜지지 않던 현실을 보여 준다. 전북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몇 년이 지난 시점에도 전북의 해당 학교에서는 체벌과 성추행이 일어났다. 교사는 성추행과 체벌을 하고도 크게 처벌받지 않았다. 그가 자살하기 전 상황은 징계 절차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을 뿐이다(일반적으로 경찰 무혐의가 나온 경우 중징계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 그가 자살하고 난 뒤 그는 오히려 성실하고 훌륭한 교사로 존경받고 추모받고 있다. 가령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행위에 대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에서 대체로 금기시되고 비판받지만, 이상하게도 학교에서는 ‘교권’을 이유로 그런 추모가 허용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학교가 인권의 사각지대임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러고도 학생인권 과잉을 말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보수가 인정하는 경우에는 성추행 혐의도 묻고 갈 수 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다시 들여다본다면, 그리고 서거석 현 전북 교육감의 말대로 학생인권이 교권과 대립하지 않는다고 믿고 정말로 학생인권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그는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피해 학생들에게 전 교육감을 대신해 사과해야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찾아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학교도, 교육청도, 유가족도 그리고 이들을 등에 업고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한 이준석, 하태경과 같은 정치인들도, 그 어느 누구도 피해 학생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신문사도, 방송사도 사과한 적이 없다.
시민 사회는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악용하여 학생인권조례 폐지의 동력으로 삼아 온 집단들(언론, 교육청, 교육단체·교원단체 등)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이 잘못 이끌어 온 여론으로 인해 피해 학생들은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뎌 왔을 것인지를, 또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그간 일어난 퇴행을 복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래야만 한다. 소위 진보 교육감이라고 불렸던 김승환 전 교육감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주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어려웠더라도, 적어도 피해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방관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교육감도 알았을 것임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학생들에 대한 2차 가해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재판을 통해서 학생들의 잘못이 밝혀질 때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학생들에 대한 섣부른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인권의 원칙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전북학생인권교육센터도 그리고 학생인권조례를 함께 만들었던 전교조도 책임이 있다. 하지만 학생인권교육센터와 전교조는 숨죽이며 사태를 방관했고, 그런 주장이라도 했던 사람들은 학생인권운동에 같이해 온 교사들 소수뿐이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의 정서는 ‘학생인권 과잉으로 힘드니까 이제 교권 보장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런 목소리는 이후 전교조 전북지부장 선거 국면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전북 교육감 선거에서도 대세가 되었다. 여기 어디에 학생인권이 있었나? 전교조에서 누가 권력을 잡느냐, 누가 교육감이 되느냐 하는 것을 위해 교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교권’이었을 뿐이었다고 본다. ‘학생인권 과잉’은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각양각색으로 지켜지지 않는 학생인권
그들이 ‘교권’을 향해 치닫는 동안 학생인권조례는 잊히고 있었다. 청소년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학생인권운동을 하던 나는 그들과 학교에서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옮겨 가는 학교에서마다 알게 된 분명한 사실은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개정된 생활규정은 말뿐이고, 실제 학생이 지켜야 하는 규정은 교무회의에서 학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학생인권조례도 아니고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등의 위반이란 점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특히 휴대전화 사용에 관한 규정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정했다. 좀 세련된 곳에서는 학생회장단을 설득해서 휴대전화를 걷는 쪽으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투표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 전북 학생인권조례를 근거로 학생들과 연대하여 싸우면서 서명운동, 대자보, 인권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에 대한 명백한 위협과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무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사들이 교육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푸념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교무실 옆자리에 앉은 전교조 선배 교사가 체벌할 때 직접 항의도 하고 학생인권센터에 신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교사라는 신분은 여러 겹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고 그 교사는 아무런 신분상 불이익도 받지 않고 ‘무사히’ 정년 퇴임을 했다. 같은 학교의 비슷한 연배의 다른 교사는 학생의 교복 치마가 규정보다 짧다는 이유로 교무실로 불러서 “강력한 생활 지도”를 했는데, 바로 학생에게 “술집 다니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겹치자 직접 권리를 찾자는 의미로 학생들이 학생생활규정을 바꾸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다양한 교사·양육자들의 반대를 이겨 내고 휴대전화 소지 조항을 통과시키려던 때에, 갑자기 학교 측은 교육 3주체 비율 조항(학생 50%, 양육자 25%, 교사 25%)을 들고나왔다. 교사 1명이 학생 9명만큼의 표를 행사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학생들이 바라던 안건이 결국 부결됐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냐고 되물었다. 여러 번 이의를 제기하고 학교운영위원회를 참관하며 부당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학교운영위원장으로부터 들었던 대답은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다 정도를 알기만 하면 되고 직접 해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인권이 과도했다면 어떻게 학교운영위원장이 그 권리를 제한할 수 있었겠는가?
역시 김승환 전북 교육감 재임 시절에 ‘이성 교제 금지’ 규정이 있었던 여남 공학에 근무한 적도 있었다. 이런 금지 규정은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더라도 박근혜 정부 시절에 교육부 지침으로 없애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례에서 폐지를 권고한 바 있는 일률적 퇴사 조치가 교장의 말 한마디에 절차도 없이 기숙사 징계 규정에 포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해마다 실시하는 기숙사 생활규정 점검 때 학생 대표가 점검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학생 대표로 하여금 허위 보고에 서명을 하도록 교사가 지시하기까지 하여 실태 점검을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또 어떤 교사들은 학생이 외출 후 돌아오면 카드 사용 내역 문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이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사적인 문자를 보고서, 농담이라며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학생의 사생활을 공개해 버린 일도 있었다. 이것은 학생인권 과잉인가, 교사의 권한 남용인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교육인권센터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강제로 수거하는 학교 규정이 없음에도, 여전히 휴대전화를 강제 수거하고 있는 중이다. 학생들은 말한다. 교사들이 귀를 닫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심지어 체육복을 입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체 학생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오르게 한 교사에 대해, (서거석 교육감의 주장에 따르면) 학생의 인권도, 교직원의 인권도 동시에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교육인권조례’ 덕택에 학생인권조사관은 이 문제를 정식으로 조사조차 하지 못했다. 조사관들의 ‘조사’ 아닌 ‘질문’에 학생들은 교사의 행위에 대해 ‘체력 단련이니 교육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식의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이나 할 법한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학생인권 과잉이라고 말한다. 학생인권조례가 교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생각해서일까. 특히 시작 부분에서 제시한 디시인사이드 게시물처럼 ‘페미’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사람들과 생각이 같다면 코드가 잘 맞기는 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던 시절에는 이의 제기조차도 할 수 없었던 성폭력과 학생인권 침해에 대해 학생들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놓고 학생인권 과잉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오리걸음’을 시킨 그 교사는 경미한 아동학대로 인정된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을 아동학대로 신고한 학생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알 바 아니고, 그 학생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교무회의 석상에서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학생인권 과잉에 분노한 교사의 일성인가, 아니면 교육을 포기한 교사의 무도한 발언인가?
일부 교사들에게만 실존하는 ‘학생인권 과잉’
이제 오늘의 학교로 돌아와 보자. 글을 쓰기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약간 각색해 보았다. A 학생이 사물함에 냄새나는 물건을 넣어서 교실이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니까, 그리고 생활 습관 지도의 의무가 있으므로 교사는 A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 이때 학생인권이 과잉이라고 주장하는 교사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른 학생의 권리(깨끗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A 학생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사물함도 열어 볼 수 없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지도할 수도 없고, 교육에는 강제성이 있는데 자발성에 모든 것을 맡기면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그리고 실제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교사들은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은 학생인권을 다 고려하면 교육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꼰대’라고 불러도 좋으나 교육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갖고 행동하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학생의 사물함을 다들 보는 앞에서 열어서 치울 것이다. 물론 교사는 학생에게 수치심이 들게 하거나 인권을 침해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다만 교육에 대한 넘치는 열정을 다해 지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도는 학교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모레 있을 연주회에 대비해 점심시간과 수업 시간까지 빼서 합주 연습을 지도하는 교사의 열정 어린 교육 활동과, 장맛비로 인해 산사태가 날지도 모르는 산에 학생들의 인내심과 체력을 기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이 12번 넘어져 등에 멍이 들어도 ‘안전하게’ 체력을 기르도록 임장 지도하는 열의를 가진 교사들의 교육 활동이 있다 할 것이다. 이들의 진심을 오해하게 하는 것이 학생인권조례고 그래서 학생인권이 과잉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교사들에게 학생인권 과잉은 환상이 아니라 실존이다. 하지만 그 실존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효과를 주고 있어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마치 꿈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효과를 주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