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특집/누구의, 어떤 위기인가] 문제는 눈동자다, 더 큰 문제는 돈이다 | 배경내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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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눈동자다, 더 큰 문제는 돈이다

- 학생의 위기가 교사의 위기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기 위하여



배경내  

hregang@hanmail.net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얼마 전 서울 은평구에 소재한 살림의료협동조합이 주최한 ‘치매안심마을 시민교육’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내가 혹시 치매❶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쉰을 넘어선 이후론 나에게도 가끔 그런 근심이 찾아들곤 했다. 

“여러분이 치매에 걸린다면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나요? 만약 걸리지 않는다면(않았다면) 어떤 이웃이 되고 싶나요?” 

이 질문으로 강의를 연 강사는 일반적인 노화와 구분되는 치매 증상과 원인을 소개한 뒤 치매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다정하고 존중 어린 돌봄의 기술들을 안내했다. 돌봄의 기술이라고 했지만, ‘당신은 인간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돌보는 일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공격적인 환자는 없습니다. 오직 방어적인 환자만 있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몸의 쇠약은 걱정의 대상이지만 치매는 불안의 대상이다. 불안의 밑바닥에는 이른바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의 ‘나’는 ‘가족’에게 큰 짐이 될 것이므로,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경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반면 이 강의는 치매를 대하는 일반적 사고 흐름과는 사뭇 다른 문법으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었기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나에게, 내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일이라 생각해 왔는데,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겠느냐도 아니고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고, 어떤 이웃이 되고 싶으냐’라니. 환자로서든 이웃으로서든 누구나 치매와 더불어 살고 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껏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마을’을 질문한 것도 새로웠다. 돌보는 이들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는 불쑥 손을 대거나 하는 행동들이 치매에 걸린 이들에겐 ‘공격적인 스킨십’이 될 수 있음을 떠올려 보자는 제안은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이’와 ‘돌보는 이를 힘들게만 하는 치매 환자’라는 이분법적 공식을 흔들었다. 



불안과 위기는 인생의 상수


치매와 같은 반갑지 않은 질환이 아니더라도 모두의 삶에는 크고 작은 위기가 기필코 찾아온다. 해고, 부도, 느닷없는 사고, 바이러스, 재난처럼 상대가 열쇠를 쥐고 있거나 원망해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를 일들이 들이닥친다. 폭력, 이별, 상실, 낯선 곳으로의 이주, 환대받지 못하는 공간으로의 진입, 억울한 누명과 같은 관계의 위기들도 숨통을 죄곤 한다. 불안과 위기는 인생의 상수다. 이미 예정된 위기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죽는다. 몸은 유한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취약함과 유한성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면서 유일하게 확실한 삶의 속성이다. 죽음과 가장 멀리 있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어린이와 청소년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어제는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었어요.” 

소중하게 여겼던 약속에 왜 나가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수현(가명)은 이렇게 답했다. 수현은 안정적인 지원과 사랑을 기대하기 힘든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변덕스러운 폭력이 잦은 집이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정상성, 단정함, 가지런함을 요구하는 학교생활은 고요하지 않은 마음과 예측 불허인 하루가 일상이었던 그에게는 고약한 공간이었다. 집에서 나와 머물게 된 청소년 쉼터에서도 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그의 의사와 속마음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의 팔에는 그가 겪어 낸 위기의 시간과 고통의 흔적이 수십 개나 그어져 있다. 다행히 자립할 집을 얻었고 그를 반겨 주는 친구들도 생겼다. 이제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죽음과 가까이 산다. 위기는 쉽사리 떠나지 않고 마음의 근육을 기르는 데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탈가정 청소년뿐만 아니라 최근 경제적 양극화와 가족 돌봄 체계의 위기,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는 사회 문화 등으로 인해 경제, 정서, 정체성 등의 측면에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학생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특수교육대상 학생, ADHD를 비롯해 다양한 정서·행동적 어려움을 가진 학생❷, 이주배경 학생도 증가하는 추세다. 또래들에 견줘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자살 위험이나 학교 중단 등의 위기에 놓이는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위기가 들이닥친 삶에도 다행히 햇살이 찾아들 때가 있다. 햇살을 다시 찾은 이들은 젖은 삶을 내다 걸고 불탄 마음을 진화하고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재건한다. 이 모든 과정엔 상처 입은 살에 연고를 발라 주는 사려 깊은 누군가와 그 위기를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 두지 않겠다는 공적 돌봄이 있어야 한다. 치매에 걸린 사람에게 돌보는 이웃과 마을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은 홀로가 아닌 관계 속에서만 삶을 이어 갈 수 있다. 사회적 안전망 위에서만 위기는 견디고 다룰 만한 구멍이 된다. 무엇보다 당사자에게도, 그의 주변에도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금세 해결될 문제라면 사실 위기가 아닐 테니까. 



학생의 위기가 아니라 학생의 존재가 지탄받다


위기가 보편적이라면 삶에 들이닥친 위기를 해석하고 다루는 역량을 익힐 기회도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보통 교육’의 공간이라 불리는 학교는 왜 학생과 교사의 삶에도 닥칠 수 있는 위기에 이토록 무능한 것일까. 지난 6월 초, 전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교감을 때리는 동영상이 공개된 사건은 학교의 위기 해석력과 대응력이 얼마나 약하고 학생에 적대적인지를 보여 준 대표적 사례다. 영상에서 어린이는 무단 조퇴를 막는 교감에게 욕설하고 여러 차례 교감의 뺨을 때리고 가방을 휘둘렀다. 이를 본 사람들 가운데 대개는 위험천만한 아이라 비난했고, 자녀의 치료 권고를 거부한 데다 담임 교사를 때린 전력도 있다는 보호자도 맹비난했다. 보호가 시급해 보이는 그 어린이는 지탄받아 마땅한 ‘납쪽이’(이젠 금쪽이조차 아니다)나 ‘학교 파괴자’의 대명사에 올랐고, 지역 사회에서도 신원이 특정됐다. 


반면 일부는 어린이가 놓인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영상을 찍어 공개한 전북교사노조의 행동이 일종의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봤다. 문제는 드러내야 하지만 고통은 전시되어선 안 된다. 학생의 위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보았기에 영상의 촬영도, 공개도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더 근본적인 아동학대는 해당 어린이가 놓인 상황 자체다. 해당 학교는 겨우 3학년인 그가 무려 6차례의 ‘강제 전학’을 거쳐 도착한 7번째 학교였다. 그것도 한 해에만 무려 4차례 강제 전학이 있었다고 한다. 강심장인 사람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안길 만한 일이었다. 여러 차례의 강제 전학 사실을 파악한 교육청은 등교 첫날부터 교실에 지원 교사를 추가 배정했으나 나흘 만에 이를 중단했다. 애초 위기 상황에 있는 학생을 전문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인력이 아니었다. 시청 역시 4차례 회의를 진행해 일부 긴급복지지원을 제공했지만, 보호자의 동의를 얻지 못해 치료로 이어지진 못했다고 한다. 가족 지원과 보호자 교육이 필수적인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이는 언론과 여론의 관심 밖이었다. ‘아동 최선의 이익’이라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원칙은 제도의 공백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전북교사노조의 주장대로 제도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독박 교실’에 갇히게 된 교사들의 어려움을 항변하고 학생의 치료가 긴급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학생의 위기’가 아니라 ‘위기 학생’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리는 방식이 적절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경향신문〉 이효상 기자는 이렇게 쓴다. 


이 사건은 A군과 보호자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실제로 비추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모습이다. 교권과 학습권을 여러 차례 침해한 학생의 위기 행동에 교원단체는 언론 제보로 대응했다. 언론은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영상을 자극적으로 보도해 공분을 키웠다. 그에 따라 위기학생의 학교 적응과 사회 안착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만들어질 공간에 A군에 대한 비난만이 자리했다.❸


학생의 치료만을 해결책으로 보는 시각도 위험하다. 치료가 급선무라는 말에는 ‘비정상적’ 학생을 ‘정상적’ 학교와 교실에서 분리하고 싶은 욕망이 깔린 듯 보인다. 치료를 중심에 둔 해법은 어쩌면 당연히 던져야 할 질문들을 생략하고 있다. 저 어린이가 학교를 저렇게 싫어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학교는 과연 잘못이 없고 ‘납쪽이’들 때문에 피해만 입는 공간인가. 저 어린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대체 누구에게서 배운 말들일까. 본인이 평소에 듣고 지낸 말은 아닐까. 엄마에게 전화하려던 교사의 휴대전화를 빼앗고 발로 밟는 행동을 보였다면 엄마를 엄청 걱정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엄마와의 관계는 평소 어땠을까. 해외에서 돌아온 뒤 학교에서 폭력 피해를 당했고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는 보호자의 말은 아동학대 혐의자의 말이기에 무시해도 좋은 허위 주장일 뿐이었을까.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문제는 시선, 곧 눈동자다”.


누구에게나 공적 돌봄 체계가 필요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없는 ‘무산 계급’이고, 가족마저 울타리가 되지 못할 때 더 큰 위험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법의 실효성에 대한 평가는 제쳐 두고) 「청소년복지지원법」이 위기 청소년에 대한 특별 지원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법은 위기청소년을 “가정 문제가 있거나 학업 수행 또는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등 조화롭고 건강한 성장과 생활에 필요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청소년”이라고 정의한다. 여건의 미비가 원인이고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은 그 결과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증상의 치료만이 아니라 원인이 되는 생활 전반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가. 정서행동 위기로 삶의 위기를 표출하고 있는 학생에게도 치료뿐만 아니라 학습, 관계, 가정 환경 등 생활 전반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학생을 병원에 계속 감금해 둘 게 아니라면, 치료받는 동안에도 삶은 이어져야 하기에, 학생이 살아갈 가족과 이웃과 학교도 변해야 한다. 



학생의 위기는 교사의 위기다


최근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 전국행동’은 총 4차례에 걸쳐 지금 학생들이 놓인 위기 상황이 어떠하며 어떤 입법적 대안이 필요한지를 모색하기 위한 강좌를 개최했다. 

서울 관악교육복지센터의 신선웅은 올 상반기에만 지난해 지원했던 학생 수만큼이 의뢰되었다며 “코로나19의 여파를 지금 더 실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자해 위험이 크거나 은둔형 고립 상태에 있는 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다. 

초등 교사 전세란(인권교육을위한교사모임 샘)은 현재 초등 교실을 읽는 키워드를 ‘불안, 고립, 양극화’ 세 가지로 꼽으면서, 교육복지 거점학교의 경우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중등 교사 한채민(각색교사모임)은 체류 자격 문제뿐만 아니라 복지에서의 차별과 언어 지원의 부재가 어떻게 이주배경 학생의 위기를 심화시키는지를 짚었다. 통역이 제공되지 않아 답답함을 터뜨린 학생이 자폐나 과잉행동장애로 오인받거나 아동학대 피해 학생이 가해자인 아버지의 통역을 받으면서 절차를 밟았다는 이야기는 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중부대학교에서 특수 교사를 양성하고 있는 김기룡은 학령기 아동 수는 급감하는데 자폐나 발달장애와 같은 특수교육대상 학생은 갈수록 늘고 있다(2024년 12만여 명)면서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다양한 교육적 어려움을 겪거나 요구를 지닌 학생에게 교육이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이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연속 강좌에서 일관되게 발견한 사실은 세 가지다.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 학교와 제도의 공백이 학생의 위기를 더 키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학생의 위기는 고스란히 교사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천 특수 교사의 사망 사건은 학생의 위기가 교사의 위기로, 교사의 위기가 곧 학생의 위기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고인이 된 교직 4년 차 교사는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특수교육법」)이 정한 정원 6명을 훌쩍 넘긴 8명을 맡았고, 완전통합 특수교육대상 학생 4명도 추가로 담당했다고 알려졌다. 주당 29시수 수업에다 각종 행정 업무까지 감당해야 했던 과밀·과중 업무 상태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교시부터 6교시까지, 단 한 번도 못 쉬고 혼자 계속 수업을 했다는 소리”❹라는 정원화 전국특수교사노조 대변인의 이야기는 특수 교사 앞에 놓인 엄혹한 현실을 보여 준다. 이는 고인이 맡고 있던 학생들도 제대로 된 개별화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는 소리다. 



돌봄과 협력의 동심원


지난해 7월, 서이초 사건이 발생한 뒤 뒤늦게 언론에 의해 알려진 한 웹툰 작가의 특수 교사 고소 사건은 ‘대책 없는 교실 분리’가 낳을 미래를 앞당겨 보여 준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초등 2학년 학생이 통합학급에서 바지를 내리는 돌발 상황이 생겼다. 학교는 장애 학생을 특수학급으로 격리 조치했다. 이 특수학급 역시 법정 정원을 넘긴 8명이었다. 이후 자녀가 불안해하고 급기야 등교마저 거부하자, 염려된 보호자는 일주일 뒤 자녀의 가방에 녹음기를 넣었다. 녹음된 파일에는 교사의 일반적 훈육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언행들이 담겨 있었다. 교사와 자녀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수사 기관의 판단이 있어야만 한다는 교육청과 학교의 답변을 들은 보호자는 특수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했다. 검찰은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했고 2024년 2월, 1심 재판부는 아동학대 혐의 중 일부를 인정해 교사에게 벌금 20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다.❺ 검찰과 피고인 모두 1심 결과에 불복하며 항소해 2심 재판이 현재 진행 중이다. 


당시 ‘몰래 녹음과 아동학대 신고로 무고한 교사 피해자를 만들어 냈다’면서 웹툰 작가 가족에 대한 마녀사냥이 난무했고, 교사 개인의 학생 통제 권한을 요구하는 흐름은 더욱 강해져 다른 사회적 대안을 찾는 논의는 갈피를 잃었다. 그리고 올해 또다시 특수 교사의 사망 사건이 우리 사회에 찾아왔다. 뭐가 달랐어야 했을까. 장애 아동이 입학할 때부터 학교에서 학생의 특성과 욕구에 맞는 개별화교육계획을 촘촘하게 마련하고 또래 학생과 교사들에게 장애 이해와 인권에 관한 교육이 제공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장애 학생을 지원할 전문 인력이 통합학급에 함께했더라면 학생이 왜 바지를 불편해하는지 빨리 알아차리고 사전에 조치하지 않았을까. 장애 아동이 부적절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또래와 어울리지 못할 때 작업치료사나 행동중재 전문가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필요한 도움과 교육을 제공했더라면 어땠을까. 학교 안에서 특수 교사의 의견이 존중되고 통합학급 교사를 도울 협력 교사가 배치되었더라면 통합학급에도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장애 학생을 특수학급으로 분리 방치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교육을 제공했더라면 어땠을까. 법에 정한 대로 특수 교사도 증원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누적된 차별 경험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보호자에 대한 심리 지원과 교육 지원이 제공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장애 학생은 외딴섬처럼 배제되고 특수 교사는 홀로 동동거리고 보호자는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은 막았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사람의 독박 노동에만 의존한 채 고립되면 서로를 해치는 관계로 전환될 위험이 크다. 둘 사이를 들락거리는 관계, 개입하고 조정하는 관계, 지원을 요청할 둘레의 세계가 없을 때 두 사람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이 만들어지고 결국 관계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일대일 관계를 넘어서는 돌봄과 협력의 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먼저 둘의 관계가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의존하기에 서로를 해할 수 있는 취약성과 그 취약성을 뒷받침할 둘레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❻ 교사, 학생, 보호자 모두를 지원하는 돌봄의 동심원과 상호의존 시스템이 마련될 때 모두의 존엄도 실현될 수 있다. 



돈을 쓰지 않겠다는 법


22대 국회에서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에 관한 법률안’(강경숙 의원 대표 발의)과 ‘학생맞춤통합지원법안’(정성국, 백승아, 김문수, 서일준 의원 각각 대표 발의) 들이 잇달아 발의되었다. 현 정부도 2022년 학생맞춤통합지원 체계 구축을 국정 과제로 내걸고 지난해부터 시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름도 그럴싸하고 내용도 그럴듯해 보이는데 여전히 실효성을 확신하기 힘들다.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에 관한 법률안의 경우, 지원의 내용이 행동 중재와 상담 연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행동지원 전문 교원 배치를 제외하면 법의 세부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예산과 정책적 에너지를 얼마나 투여하느냐에 따라 실효성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학생맞춤통합지원법안의 경우는 발의한 의원마다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지만, 교육복지나 다문화, 기초학력, 특수교육 지원 등 기존에 낱낱이 흩어져 있던 정책들을 통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런데 통합 시스템의 구축만으로 지금 학생과 교사가 겪는 어려움을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지원 대상이 얼마나 확대되고 실질화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존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는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겠으나, 기존에 마련된 교육복지서비스를 연계하는 것만으로 다양한 학생의 위기를 지원하는 데 충분할지, 외부 서비스를 연계하는 것을 넘어 학교의 교육과정은 학생을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이를테면 성소수자나 이주배경 학생을 위한 ‘포용교육’도 상상할 수 있는지), 교사에게는 어떤 지원이 제공되어야 하는지, 학생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지원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검토는 생략되어 있다. 학생맞춤통합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수립된 계획이 학생의 교실 분리와 학교 밖 외부 기관 위탁으로 귀결되지 않을지도 염려된다.


무엇보다 모든 지원법이 그렇듯이 위 법안들도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라는 조항들로 가득하다는 게 가장 큰 맹점이다. 한마디로 관계 기관의 ‘의지’에 맡겨 둔 셈이다. 앞서 언급한 「청소년복지지원법」상 위기청소년 지원에 관한 조항들도 모두 ‘할 수 있다’로 되어 있는데, 당해 배정된 예산이 적어 지원을 신청해도 받지 못하는 문제가 연거푸 확인되어 왔다. 정책은 예산으로 말하고, 예산 없이는 권리도 실현될 수 없다. 반면 「특수교육법」은 대개의 조항이 ‘해야 한다’로 구성되어 있고 학교의 역할이나 연계 가능한 서비스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정원을 넘어서도 특수학급이 증설되지 않는 위법 행위가 이어지고 있기는 해도 「특수교육법」이 그나마 통합교육 현실을 진전시키고 있는 이유는 ‘해야 한다’는 법문을 근거로 장애 학생 부모를 비롯해 장애인권단체들이 실태를 점검하고 매년 예산 확보 싸움과 시·도교육청과의 단체 협상을 힘들게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로만 점철된 지원법의 실효성을 크게 기대하기 힘든 이유다.


나아가 이 법안들이 제안되고 논의되는 맥락이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 사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고 우리 사회는 응답할 책임이 있다는 메시지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 이 법안이 가져올 미래를 낙관하기 힘든 이유다.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에 관한 법률안은 이른바 ‘금쪽이법’으로 불리고 있고, 학생맞춤통합지원법안을 발의한 백승아 의원은 교원단체들과 함께 학생의 교실 분리 지도를 법제화하는 ‘생활지도법’(「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의 통과를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낙인과 분리의 대상으로만 상정될 때, 그 지원은 사람의 권리로서가 아니라 위기 관리 정책에 불과한 것이 된다. 



‘교권 강화’를 넘어 ‘학생 위기 지원 강화’로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 단원고에는 ‘스쿨닥터’ 제도가 시행된 바 있다. 스쿨닥터가 학교에 상주하면서 생존자들을 지원했고 안산온마음센터와 4·16재단이 유가족 형제자매와 생존자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피해자의 심리, 의료, 고용 및 경제 활동, 가족 돌봄 등에 대한 지원과 피해 지역(안산과 진도군)의 공동체 회복을 위한 지원을 명시한 「세월호피해특별법」도 제정되었다. 참사 피해자 지원이 충분했고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이런 촘촘한 민과 관의 노력이 없었다면 참사 피해자들의 회복은 더 더디고 더 굴곡진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단원고 생존자들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자신들의 여러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스쿨닥터의 존재와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가 위기의 시간들에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학생의 위기를 지원하는 정책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점들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마음을 지원하는 사람은 마음의 텃밭인 생활 환경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외래 환자로 잠시 만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집을 방문해 환자의 생활 환경 전반을 살펴보고 보호자들과 상담해 본 의사들이 다른 처방을 내리는 이유와 같다. 서비스도 필요하지만 기댈 관계가 어쩌면 더 중요하다. 지원이 낙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제를 가진 학생’을 선별하고 분리하고 외부로 내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의 곁’으로 누군가 와야 한다. 문제로 표출된 행동만 교정하는 전문성이 아니라 당사자와 그 주변의 관계를 조정하고 지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주변이 함께 움직일 때 당사자의 행동 변화도 그 결과로 따라온다. 무엇보다 모든 치유에는 ‘자유 의지’, 곧 당사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치유가 시작되려면 삶의 현장에서 당사자와 함께 위기를 살피고 지속해서 의논해 주는 관계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달리 말하면 ‘당사자 중심의 위기 지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이것 없이 ‘학생 맞춤 지원’이란 불가능하기도 하다. 현재 논의되는 위기 지원 정책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게 바로 이 관점이다. 


다시, 학생의 위기가 곧 교사의 위기다.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학생과 교사를 대척점에 놓는 ‘교권 강화’가 아니라 실효성 있고 존중 어린 ‘학생 위기 지원 강화’가 필요하다. 이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결집이 필요하다. 이 정책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들인데, 정작 당사자들에겐 힘을 결집할 자원과 정치적 힘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뼈아픈 현실이다. 학생들 곁에서 함께 어려움을 겪는 교사운동과 청소년인권운동이 힘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2010년대 부활한 미국 교사노조운동은 이른바 ‘공공재를 위한 교섭(BCG, Bargaining for Common Good)’ 싸움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교사노조의 요구에는 일반적인 노동조합 단체 협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 시설 확충, 영유아 시설 확대, 간호·상담·사서·사회복지 노동자 고용 확대, 지역 저소득 유색 노동자 채용 및 훈련 프로그램 창설, 이주자 관련 행정 집행에 대한 학교 당국의 협조 거부, 학령기 아동이 있는 가구의 주택을 압류한 은행과의 거래 중단, 은행의 비밀 투자로 발생한 교사연금 손해에 관한 주 차원의 소송, 주 시민들을 갈취하는 은행에 대한 대대적 조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단체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정부에 맞서 교사들은 ‘불법 파업’에 돌입하였고, 단결된 조직력과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상당수 요구안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❼


플랫폼C의 활동가 장진범은 이 성공의 핵심은 무엇보다 목적의 수정으로 ‘납세자와 노동자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돌파했다는 데 있다고 평가한다. 사실 임금 인상이나 교사 업무 감축과 같은 노동 조건 향상이 아닌 지역 주민과 학생을 위한 요구안을 내걸고 교사들이 불법 파업까지 감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요구안은 교사의 존엄한 노동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부도와 해고로 대표되는 학생과 그 가족의 위기는 교실의 어려움으로, 다시 교사의 위기로 이어졌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사례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교실 환경이 바뀌려면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



치매(癡呆)는 어리석다는 의미의 두 한자를 결합한 단어여서 일본에서는 인지증으로 용어를 바꿨다. 국내에서는 인지저하증으로 바꿔 부르자는 제안이 있으나 대체 용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무르익지 않았다.

2023년 7월, 국회 교육위원회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2023년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 현황’에 따르면, 2023년 검사를 받은 초·중·고생 173만 1,596명 중 4.8%인 8만 2,614명이 ‘관심군’이고 1.3%인 2만 2,838명은 ‘자살위험군’으로 조사되었다. 

“위기학생에 ‘주홍글씨’…그 사회가 온전한 걸까”, 〈경향신문〉, 2024년 6월 16일. >>>기사 보기

〈어느 특수 교사의 결코 특수하지 않은 죽음〉, 《한겨레21》, 1540(2024년 11월 26일). >>>기사 보기

2시간 30분가량의 녹음 파일에서 학생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특수 교사는 “말을 해야지. 뭘 보는 거야 도대체. 아, 진짜 밉상이야.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2시간이 넘어간 시점에서는 “너 성질 부릴 거야? 넌 친구들하고 못 어울려. 친구들한테 가고 싶어? 못 가. 못 간다고”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교재에 적힌 ‘버릇이 고약하다’라는 표현을 읽자 B는 “너야 너. 너보고 말하는 거야.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아휴 싫어. 싫어 죽겠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여러 혐의 가운데 “너, 싫어”라는 명확한 말을 반복해서 사용한 것이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고 “죄책이 결코 가볍지 않다”면서도 피고인이 특수 교사로서 성실히 근무한 점, 동료 교사와 학부모들이 선처를 요구한다는 점 등을 들어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또 표현력이 있는 여러 학생이 함께 수업을 듣는 장소와 달리, 소수의 장애 학생만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몰래 녹음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아니라며 증거 능력이 인정됐다. 선고 유예란 유죄는 인정되나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2년이 지나면 사실상 없던 일로 처리해 주는 판결을 말한다. [“주호민 아들 ‘정서적 학대’ 혐의 특수 교사 1심 유죄…벌금형 선고유예”, 〈한겨레〉, 2024년 2월 1일] 참고. 

교사와 학생의 존엄이 어떻게 상호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배경내, 〈인권과 교육의 문법 다시 쓰기〉, 《오늘의교육》, 79(2024년 3·4월)]를 참고할 것. >>>바로 읽기

장진범(2024), 〈우리가 아직-다시 노동을 말하는 이유〉, 《2024 체제전환운동포럼 – 우리의 대안을 조직하자》,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 327~329쪽. >>> 자료집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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