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특집] 자율성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김형신)

20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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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경쟁과 불평등에 맞서는 교육


자율성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김형신 

paran.khs@odyssey.hs.kr 서울 오디세이학교 교사



 

서울시교육청 오디세이학교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교 전환 학년제를 실시하는 학교다. 자기 삶의 방향을 탐색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국·영·수와 같은 과목의 시수를 줄이는 대신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여 운영한다. 삶의 방향을 탐색한다는 건 ‘이 세계에서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의 누구도 ‘이 세계’가 어떤 곳이고 ‘나답게 살아간다’라는 게 어떤 일인지 알려 줄 수 없다. 누군가 알려 줄 수 없다면 결국 스스로 알아야 하므로 오디세이학교는 함께 모여 지내면서 스스로 알아 갈 기회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이 지면을 빌어 나답게 살아가는 일과 ‘자율성’을 기르는 일이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또 자본주의 체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나누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자율성


자율이란 무엇일까? 가정과 학교에서 ‘자율’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보통 다음과 같은 사전적 의미를 가리킨다.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일, 또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일.” 곧 좋은 행동은 스스로 실행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스스로 통제 또는 절제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자율성(autonomy)을 영영 사전에서 찾아보면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통제’, ‘절제’와 같은 의미는 없고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유’, ‘다른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고 결정하고 행동할 능력’처럼 ‘자유(freedom)’, ‘능력(ability)’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영 사전의 뜻풀이처럼 원래 자율성은 종교와 관습의 지배를 받던 개인들이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는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자율성의 뜻을 ‘종교나 관습이 아니라 이성에 기반하여 개인의 지식과 가치관에 따라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할 자유 또는 능력’으로 정리해 보면 그 의미가 한층 더 확실해진다. 자기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스스로 결정할 자유나 능력이 없다면 또는 특정한 가치를 일방적이고 타율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진학이나 결혼 문제에서 부모의 기준을 따르거나 이란에서 저항을 불러온 히잡 강요처럼 타율적으로 가치와 기준을 강요당하는 일들이 현대 사회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럼 별 탈 없이 자유를 누리는 많은 현대인은 자율적인 인간일까? 중세 유럽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거주지도 자유롭게 옮길 수 있고 여행도 다닐 수 있어 이미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그만큼 자율적인 사람인가 조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한 자유 시장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삶의 많은 부분은 자본과 시장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판단하고 결정한다. 우리 주변의 상품과 서비스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는 이는 이미 선택의 폭이 제한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는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은 상품과 서비스들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선택의 폭이 제한된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가치관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의미한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며 플라스틱 제품 사용을 줄여 보고 싶지만 바쁜 일상에서 다른 선택을 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변의 플라스틱 제품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오히려 기후 위기와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희미해진다. 이것은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좋은 것인가를 탐색하고 실천해 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오히려 상품과 서비스에 따라 우리의 삶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품을 보여 주기 전까진 자신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른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 우리의 자율성을 발현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이야기를 학생들이 듣는다면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교사는 늘 예상 질문에 답변을 준비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충분히 자유를 누리면서 잘 먹고 살면 되지, 개인이 자율성을 발현해 나가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이쯤에서 ‘폭넓은 자율성’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나에게 적용되는 기존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유를 추구하는 속성을 ‘합리적인 자율성’이라고 한다면, ‘폭넓은 자율성’은 개인이 지닌 정체성을 탐구하며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폭넓은 자율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될 텐데 그때 나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까지 탐구해 왔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설정해 온 내 삶의 방향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결국 폭넓은 자율성을 기르는 과정은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폭넓은 자율성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을 포함한 삶의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 시민을 길러 내려는 우리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갈등을 일으킨다. 누구나 자기가 지닌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야겠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이를 방해한다. 나의 선호와 취향은 길들여지고, 플라스틱 소비의 사례처럼 나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흐려지기 쉽다. 곧 자본주의 체제에서 내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긴장과 갈등의 과정이 될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민주 시민의 속성 또는 민주시민교육의 목적으로서 자율성을 기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나의 역할은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살펴보는 일은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둘 사이에는 태생적인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정치적 ‘평등’을 근본 가치로 삼는 정치와 ‘불평등’을 불러오는 경제 체제가 현실에서는 공존하고 있다. 나는 민주시민교육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것이 학생들이 살아가면서 이 어려움에 대처할 수있게 돕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는 자치 회의의 경험


학교의 비전을 이야기하다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우리 학생들이 1년간 학급 자치 회의를 경험하면서 적은 소감 몇 편을 통해 자율성을 발휘하는 장면을 나누려고 한다. 물론 자율성을 말할때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공공성의 문제가 나타나지만, 나의 경험으로 보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해결이 된다. 오히려 이제까지 학교교육은 공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에, 그것도 통제를 위한 명분으로서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데에 치우쳐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디세이학교 학생들은 학급 자치 회의에서 자기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안건들을 논의해 나간다. 원칙적으로 학생들의 삶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어떤 내용이라도 자치 회의 안건으로 다룰 수 있는데 대신 모두가 합의해서 통과시키는 ‘전원 합의’를 원칙으로 한다.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즉시 실행함으로써 회의에 참여하는 일이 곧 내 삶에 영향을 준다는 걸 체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여 놓았다. 이런 회의를 시작하기 위해 학생들은 한 달 정도 대화하는 연습을 한다. 아직 낯설고 서먹한 3월 초, 모두가 둘러앉아 솔직하게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원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학교에서 이런 소통을 한다는 게 낯설고 어색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는 사람들과의 경험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 이런 대화를 연습하는 이유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의 회의 속에서도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서로의 특성을 편하게 드러내며 공감하는 대화 속에서 ‘나답게’의 감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폭넓은 자율성’과 관련되기를 기대하였다. 반갑게도 철학자 누스바움은 합리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사실은 인간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논증해 주었다. 민주적인 자치 회의에서 공감에 기반한 대화 방식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한 소통 방식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학생들은 자치 회의를 통해서 좌충우돌하면서 자율성을 기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첫 자치 회의에서는 1년 동안 학생들이 지킬 규칙을 정했다. 종일 의논해서 규칙을 정하고 나니 내가 학교 규칙을 만들었다는 효능감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당황스러운 안건이 올라왔다. ‘교실에 어항을 들여놓기’, ‘휴식을 위한 침대를 설치하기’와 같은 안건은 학생들이 자신감이 붙은 나머지 갑자기 개인적인 흥미와 관심사를 드러낸 예이다. 물론 이런 안건들도 회의에서 진지하게 다루었다. 나는 좀 당황했지만 제안자에게 모두에게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설득하도록 요청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이런 안건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원 합의 제도는 실질적으로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도입했다. 안건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 생각을 근거를 들어 말한다. 당장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발언 차례를 맨 뒤로 미룰 수는 있지만 마지막에는 자기 의견을 말해야 한다. 특히 전원 합의 제도가 학생들의 자율성을 발휘시켰는데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일단 전에는 항상 다수결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했으니까 그냥 의견을 낼 생각조차도 없었고요. 그냥 저는 참여하는 것보다 항상 듣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번에 오디세이에 와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얘기를 듣는 그런 방식을 많이 사용했잖아요. 그런 방식을 사용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생각을 해 보고 ‘내가 정말 그런가?’, ‘이 의견에, 저 안건에 동의를 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내가 고민할 때 상대방의 결정에 따랐다면 요즘은 좀 상대방한테 어떤 거 같냐 물어보고 ‘그런 해결 방식이 내가 원하는 것과 좀 맞나’ 그 생각을 일단 한 번 더 해 보는 것 같고 저도 약간 저만의 주체성이 좀 생기긴 한 것 같아요. 저만의 의견이 좀 생긴 것 같아요. - 학생 J


이전에는 약간 ‘아싸’인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도 적었고 뭔가 영향력이 있는 학생들의 의견을 그냥 ‘어, 얘가 하니까 나도 할래’ 이게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근데 오디세이에 와서는 약간 대통령 투표랄까, 투표권이 하나씩 생긴 거죠. 그냥 ‘나’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투표권이 하나 쥐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유롭게 생각을 얘기할 수 있고 의견을 낼 수 있는 게 그게 되게 큰 변화거든요. 또 전원 합의라고 얘기했잖아요. 그 전원 합의라는 제도가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왜냐하면 다수결이면 일단 뭐 자기 자신의 의견이 있든 없든 결정이 빨리 되잖아요. 전원 합의는 늘 전원의 생각이 똑같을 수가 없는데 소수의 의견도 들어 준대요. 그래서 어쨌든 내가 내 편이기만 하면 이게 막 내 의견이 사라져 버릴 일은 없는 거예요. - 학생 P


저로서는 변화라고 생각을 하는 게 이게 자치 회의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니까 뭔가 책임에 관련된 얘기들도 계속하게 되잖아요. ‘내가 이거는 꼭 할게’ 이런 식으로, 아니면 ‘나 안 할게’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책임감이 생기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지키려고 하고 잘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과거 학교에서는 엄청 친한 학생들 말고는 그냥 이야기할 기회도 별로 없으니까 책임감이 생기는 것도 거의 없고, 저 스스로 한다기보다 누가 시켰을 때나 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스스로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오히려 더 효과가 좋았던 것 같아요. 무슨 규칙을 따른다거나 할 때도 더 열심히 하고 이게 단순히 그냥 혼자서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나 스스로와) 타협하게 된다거나 아니면 ‘어차피 이게 뭐 안 지키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하고 그냥 포기? 자율성을 포기한다고 해야 되나. 그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한다고 말했을 때 거기서 오는 책임감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고. ‘그래도 한번 얘기했으니까 지켜야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대화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학생 S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경험이 중요하다


돌이켜 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안건은 ‘휴대전화 반자율화’이다. 수업 내용과 관련하여 필요한 경우 수업 시간 중이라도 자율적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건이었다. 나는 이 안건을 처음 들었을 때 걱정이 앞섰다. 수업 중 휴대전화 사용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제한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치 회의에서 우리끼리 논의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학교의 다른 구성원들까지 참여해야 하는 ‘집단 차원’의 논의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논의를 시작하며 제안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학 시간에 화학식이 생각이 안 나서 검색했더니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거다. 물론 제안자 자신도 수업 시간의 휴대 전화 사용이 수업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것인지를 가릴 수 없어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런 점을 보완하자고 논의했고 1주간 실험을 해 보면 어떻겠냐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제안하고 논의하는 학생들이 고마웠다. 이 기회를 통해 내가 집단 차원의 논의를 진행해 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 기존의 안정적인 가치가 흔들릴지 모르는 상황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이미 주어진 기존의 가치와 방식에 대해 의문이 든다면, 그것이 현재에는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 것일지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논의하려는 태도와 함께 자율성은 발휘되고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안건을 제안하고 타당한 근거나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일, 그 안건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삶의 방향을 잘 실천할 수 있는 선택을 했기를 기대해 본다. 다른 학교에서 올해 오디세이학교로 새로 발령 받아 온 교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해 주었다.


일단 자유로워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경험이 너무나 민주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조차도 (안건으로 다루면서) 전원 합의라는 걸 거쳐 보면서 기존엔 절대 내가 귀 한번 기울이지 않았을 내용에 똑같은 무게를 실어서 발언하고 들어 본다, 어떤 인내심을 발휘한다, 내가 평소에 뭐 쟤를 무시하건, 쟤가 나보다 공부를 못하건 상관없이 그 순간은 동등하다는 감각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은 그런 친구들이 발언도 많았던 거고. - 전입 교사


나는 학생들이 ‘이 세계에서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도록 자율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비록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이 자율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 어려움을 인식하면서 노력하는 과정까지도 고민하려고 한다.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나답게 살아가면서 삶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그런 우리가 모여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대처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❶ 자율성의 두 가지 성격, 즉 합리적인 자율성과 ‘폭 넓은 자율성’은 심승환의 논의를 가져왔음을 밝힌다. [심승환(2014), 〈자율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한 교육적 이상으로서의 의미 고찰〉, 《교육사상연구》, 28(1), 247~273쪽] 및 [심승환(2017), 《인간의 삶과 배움》, 박영스토리].

❷ 마사 누스바움, 조계원 옮김(2015),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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