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불가능 시대의 교육은 다시 운동이 되어야 한다
편집위원회
12.3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마침내 탄핵되었고 ‘내란 사태’는 수습 국면인 듯 보이지만 여전히 무수한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의 ‘내란’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렸다. 극우 세력에 정치적 공간을 열어 준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답이 아님은 분명하다. 모든 것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상화’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광장에서의 연대와 투쟁의 경험은 그 자체로 중요한 교육적 계기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히 악에 대한 선의 승리, 반민주에 대한 민주 시민들의 승리로만 해석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말할 수 없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만을 강조하는 민주시민교육의 한계는 뚜렷하다.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직 우리는 그 길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번 ‘교육 불가능’이라는 화두를 마주한다. 이는 10여 년 전부터 이야기되어 온 교육 불가능 현상이 한층 더 심화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더 심각하고 총체적인 불가능성이 벌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무너지는 세계, 교육의 기반도 사라진다
《오늘의 교육》은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4.16 세월호 참사,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기후 위기 등 파국에 이른 자본주의 문명과 체제에 대해 지적해 왔다. 12.3 사태는 정치와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님을 드러냈다. 우리는 산 자가 죽은 자를 돕지 않는데도 민주주의가 죽은 자의 이름만으로도 계속 지켜질 줄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장의 폭력이 사람들을 찢어 놓고 흉포하게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형식뿐인 민주주의만은 허물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가.
경제적·정치적으로 발전했다는 소위 ‘선진국’들에서 금융자본주의의 취약성이 두드러지고, 재난이 끊이지 않으며, 극우 정치가 발호하고 있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도식하에 ‘선진국’은 ‘후진국’에게 우리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도 모두 이런 도식을 전제 삼았다. 하지만 이제 이런 도식과 지식은 세상과 거의 맞지 않게 되었다.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는 지식/진리의 체계도, 교육의 기반이 되는 조건들도 함께 무너진다.
오늘날 학교교육의 위상은 심각하게 하락했고 학생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학교 졸업장은 사회적 인정이나 최소한의 삶의 기반을 보증하지 못한다. 교사의 말, 교과서의 지식은 의심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유튜브나 온라인상의 ‘대안 현실’이 더 귀 기울일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을 특정 교육을 강화하자는 식의 제안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교육의 의미와 방식, 체계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고민과 전환이 요구된다.
광장의 운동, 광장을 만드는 운동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을 바꾸는 운동, 나아가서 교육의 조건과 사회를 전환하고 다시 지어 나가는 운동이다. 파시즘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위기에 대응하는 교육운동의 새로운 틀을 짜고, 그러기 위한 담론을 만들어 가야 한다.
12.3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건 광장을 통해 위기가 닥쳐왔을 때 만나고, 손을 잡고,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대가 연대를 부르며 계속 확장되어 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서로의 둥지가 되어 줄 이웃과 벗과 동지들을 열렬히 찾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광장의 경험과 상상력이야말로 변화의 씨앗이자 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을 낭만화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광장이 닫혔을 때 일상에서 만나고 모이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는 많이 잃어버렸다. 그런 작은 ‘민중의 집’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반성을 해 본다. 일상에서, 학교에서, 교육에서 광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교육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오늘의 교육》이 연결과 연대의 장이 되고, 나아가 하나의 광장이 되겠다는 다짐을 남기며, 독자들에게도 함께하기를 요청한다.
교육 불가능 시대의 교육은 다시 운동이 되어야 한다
편집위원회
12.3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마침내 탄핵되었고 ‘내란 사태’는 수습 국면인 듯 보이지만 여전히 무수한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의 ‘내란’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렸다. 극우 세력에 정치적 공간을 열어 준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답이 아님은 분명하다. 모든 것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상화’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광장에서의 연대와 투쟁의 경험은 그 자체로 중요한 교육적 계기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히 악에 대한 선의 승리, 반민주에 대한 민주 시민들의 승리로만 해석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말할 수 없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만을 강조하는 민주시민교육의 한계는 뚜렷하다.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직 우리는 그 길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번 ‘교육 불가능’이라는 화두를 마주한다. 이는 10여 년 전부터 이야기되어 온 교육 불가능 현상이 한층 더 심화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더 심각하고 총체적인 불가능성이 벌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무너지는 세계, 교육의 기반도 사라진다
《오늘의 교육》은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4.16 세월호 참사,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기후 위기 등 파국에 이른 자본주의 문명과 체제에 대해 지적해 왔다. 12.3 사태는 정치와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님을 드러냈다. 우리는 산 자가 죽은 자를 돕지 않는데도 민주주의가 죽은 자의 이름만으로도 계속 지켜질 줄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장의 폭력이 사람들을 찢어 놓고 흉포하게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형식뿐인 민주주의만은 허물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가.
경제적·정치적으로 발전했다는 소위 ‘선진국’들에서 금융자본주의의 취약성이 두드러지고, 재난이 끊이지 않으며, 극우 정치가 발호하고 있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도식하에 ‘선진국’은 ‘후진국’에게 우리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도 모두 이런 도식을 전제 삼았다. 하지만 이제 이런 도식과 지식은 세상과 거의 맞지 않게 되었다.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는 지식/진리의 체계도, 교육의 기반이 되는 조건들도 함께 무너진다.
오늘날 학교교육의 위상은 심각하게 하락했고 학생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학교 졸업장은 사회적 인정이나 최소한의 삶의 기반을 보증하지 못한다. 교사의 말, 교과서의 지식은 의심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유튜브나 온라인상의 ‘대안 현실’이 더 귀 기울일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을 특정 교육을 강화하자는 식의 제안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교육의 의미와 방식, 체계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고민과 전환이 요구된다.
광장의 운동, 광장을 만드는 운동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을 바꾸는 운동, 나아가서 교육의 조건과 사회를 전환하고 다시 지어 나가는 운동이다. 파시즘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위기에 대응하는 교육운동의 새로운 틀을 짜고, 그러기 위한 담론을 만들어 가야 한다.
12.3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건 광장을 통해 위기가 닥쳐왔을 때 만나고, 손을 잡고,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대가 연대를 부르며 계속 확장되어 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서로의 둥지가 되어 줄 이웃과 벗과 동지들을 열렬히 찾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광장의 경험과 상상력이야말로 변화의 씨앗이자 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을 낭만화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광장이 닫혔을 때 일상에서 만나고 모이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는 많이 잃어버렸다. 그런 작은 ‘민중의 집’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반성을 해 본다. 일상에서, 학교에서, 교육에서 광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교육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오늘의 교육》이 연결과 연대의 장이 되고, 나아가 하나의 광장이 되겠다는 다짐을 남기며, 독자들에게도 함께하기를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