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특집] 누가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는가 (최성용)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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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누가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는가


최성용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2018년 10월, 경기도 김포시 한 어린이집의 30대 여성 보육 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보육 교사의 아동학대를 제보하는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와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고 이윽고 보육 교사의 신상 정보까지 노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밝혀진 바 소문은 오해였으며 해당 아동과 교사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동의 모친과 교사는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었으나, 정작 유언비어는 불식되지 않아 악성 댓글과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그 아동의 이모가 계속 항의하며 어린이집을 찾아가 교사에게 물을 뿌리고 무릎을 꿇게 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끝에 보육 교사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검찰은 아동의 이모를 폭행 혐의로,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 2명을 명예 훼손 혐의로, 어린이집 원장을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020년 인천지법은 이모의 폭행죄를 인정하였으나 그 외에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나는 서이초 교사의 비보를 접했을 때 이 사건을 떠올렸다. 5년의 시차를 두고 두 죽음은 이어져 있었다. 비록 보육 교사가 초등 교사보다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 여성 청년 노동자 모두 조직이 지켜 주지 않는 가운데 ‘진상 학부모’에 시달리며 고립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2018년의 보육 교사들은 억울함과 분노를 말하지 못했다. 지금도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게 어려울 만큼 보육 교사들은 취약한 조건하에 있고, 사회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2023년,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되새기며 제 목소리를 잘 내지 않던 교사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렇기에 교사들의 울분과 사회적 관심이 만들어 낸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현재의 국면은 근본적인 질문을 요구한다. 교사들이 교실 현장에서 겪는 문제가 더 깊고 넓은 사회적 위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단순히 ‘갑질’하는 ‘진상’ 학부모와 말 안 듣는 학생이 많아진 것이 문제의 원인인가? 그들을 억누르기 위해 ‘교권’을 확립하는 것으로 문제가 불식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교권 담론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교실 안에 가두고 개별 교사-학생의 문제로만 국한함으로써 교실을 둘러싼 더 넓은 맥락을 비가시화한다.❻ 과연 김포 어린이집의 보육 교사에게 필요했던 게 ‘교권’이었을까? 더 근본적인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노동권’ 개념을 제안해 본다.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사회적으로 적절히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고인을 ‘여성 청년 노동자’로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구조적 문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성찰은 취약한 위치에서 사회적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 온 다른 여성 청년 노동자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통해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붕괴 상황에서 여성 청년 노동자의 자리


먼저 ‘청년 노동자’라는 위치성부터 짚어 보자. ‘청년’은 매우 다양한 위치와 정체성이 뒤섞인 개념이지만, 생애 과정에서 이행기에 위치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즉 교육에서 노동 시장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 놓인 청년들 다수가 공유하는 취약성이 있다. 그렇기에 청년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신입’이자 ‘막내’라는 위치로 인해 저임금,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한 업무 지시, 과로 등을 감내하도록 요구받는다.❼ 지난 몇 년간 청년 노동자는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재 사망의 희생자로 조명되어 왔다. 구조적으로 위험 업무는 원하청 관계에서 아래로 흐르고, 그 업무를 전가받은 n차 하청의 영세 사업장은 그 내부에서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 및 파견직 노동자에게 위험 업무를 맡긴다. 또 그중에서도 업무의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지식이 부족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역량이 부족한 ‘신입’, 즉 청년 노동자에게 위험 업무가 전가된다.❽


올해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일어난 전북 전주 콜센터 현장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교육생’, ‘실습생’, ‘인턴’이라는 이름의 청년 노동자는 ‘임시적’이라거나 ‘과도기’라는 이유로 노동자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❾ 기업은 청년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노동자의 탓으로 돌린다. 현장 실습생의 경우 학교 역시 취업률 관리를 위해 노동자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이렇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고립’되어 자살로 이르게 되는 것은 콜센터 상담사, 보육 교사, 서이초 교사와 같은 여성 청년 노동자들의 비극에 공통된 맥락이다.


조직이 보호와 책임을 방기하고 노동자를 오히려 등 떠밀 때 역설적이게도 보호와 책임을 다하는 건 바로 노동자가 된다. 책임을 위한 권한도 역량도 제공되지 않은 채, ‘진상’, ‘악성 민원’, ‘갑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이다. 김관욱은 콜센터 노동자의 이 같은 역할을 ‘방패막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교사들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에도 적절한 표현이다. “상담사들이 전화 상담을 통해 지키고 있는 진짜 대상이 존재한다. (……) 콜센터 산업의 특징은 상담사와 고객과의 비대면을 넘어 바로 고객과 고용주와의 비대면이라는 점에 있다.”❿


기업이나 공공 기관을 향한 ‘진상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진상 학부모’의 이면에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불신과 억울함이 있다.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건 여성 청년 노동자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채 자력 구제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인 데다, 세월호 참사에서 코로나19 유행, 이태원 참사나 오송 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시민들은 국가를 믿지 못한 채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재난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국가를 향한 이 불신은 당장 눈앞에 있는, 가장 말단이자 현장에서 교과를 가르치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돌보는 교사들을 향한다. 그렇게 교사들은 사회 붕괴의 상황에서 국가와 학교의 ‘방패막이’가 되어 사회적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다.


교권 담론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렇듯 교사들이 겪는 ‘갑질’이 단순히 ‘진상 학부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붕괴된 사회와 국가·학교라는 두 방향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여러 겹의 취약성을 지닌 여성 청년 노동자들은 양쪽으로부터의 ‘갑질’ 사이에 끼어 소리 없이 죽어 왔다. 이는 콜센터, 어린이집, 초등학교와 같이 여성 청년 노동자들이 많은 직업의 특성과 맞물려 있다.


근대적 성별 노동 분업하에서 ‘감정 노동’, ‘돌봄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일들은 성별 규범에 맞추어 여성에게 적합한 일처럼 여겨지며, 실제 주로 여성들에게 할당됐다. 그렇기에 직장의 관리자와 ‘진상 소비자’로부터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취급되며 그들을 달래고 어르고 돌보며 온갖 감정들의 쓰레기통이 되는 것까지도 업무의 일부로 경험하게 된다. 특히 현재 사회 붕괴의 상황에서 그 스트레스가 집중적으로 전가된다. 여기에 더해 어리고 경력이 짧을수록, 그러니까 청년일수록 더 강한 강도로 이를 경험하게 된다. 서이초 교사가 겪은 부당함과 고립은 이렇게 여성-청년-노동이 교차하는 자리에 놓여 있다.



노동권,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질 권리


연구자로서 나는 다양한 직종, 직업의 노동자들과 만나 그들을 인터뷰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직업을 폄훼하고 비하하는 노동자를 만나 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경시되거나 비하되기 쉬운 직업의 경우에도,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노동자들 모두 자신의 일의 의미에 자긍심을 표현했다. 자기 일을 향한 보람과 긍지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둘러싼 부당한 환경과 조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권’이란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에 자긍심을 가질 권리를 의미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는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가 있다. 교사의 경우에는 학교 및 조직으로부터, 학부모와 학생으로부터 안전이라는 두 차원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특히 관리자와 조직이 교사 노동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교권을 외친들 학교 현장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다. 갈등은 민주적 관행과 문화, 이를 보장하는 제도를 통해 더 나은 학교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전환’의 계기로 다뤄져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행정 업무만 늘어나는 단기적 처방과 가시적 성과 추구에 그치는 행정 편의적 대처 대신에, 담임 교사, 교장, 교감, 학부모, 학생, 지역 사회 및 전문가들이 참여해, 속도가 느리고 성과가 비가시적이지만 갈등을 상호 신뢰의 구축 과정으로 전환해 가는 제도적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⑪ 이는 교사의 자율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교사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교사를 보호함으로써 교사가 더 좋은 수업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교사의 자율권을 보장해 줄 것이다.


결국은 시스템이 변해야 한다. 불신을 신뢰로 전환하는 과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건 지난한 일이지만 이는 교실을 넘어 붕괴된 사회 전체를 향한 교육적 과정일 것이다. 또한 무책임한 이들 대신, 적극적으로 교사를 보호하고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어 갈 의지와 역량이 있는 사람을 관리자로 진급시키는 인사 평가 시스템도 갖추어야 한다. 더 크게는 교육이 입시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거창한 논의들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하는 좋은 교실을 만들어 자신의 일에 보람과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교사의 소박한 바람에 근거한 것이다. 교권이 아니라 노동권이 그 바람의 더 정확한 명명일 것이며, 그 이름을 통해 오늘날 사회 붕괴의 상황에서 부당함을 겪는 다른 여성, 청년, 노동자들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❻ 하영(2023),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 《오늘의 교육》, 75호(2023년 7·8월), 39~40쪽.

❼ 천주희(2019),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 바틀비, 54쪽.

❽ 전혜원(2021),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서해문집, 217쪽.

❾ 천주희(2019), 앞의 책, 30쪽.

❿ 김관욱(2022), 《사람입니다, 고객님》, 창비, 354쪽.

⑪ 전세란(2023), 〈‘교육 사법화’와 ‘교권 강화’를 넘어,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로〉, 《오늘의 교육》, 72호(2023년 1·2월), 2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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