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교육, 그 존재의 밀도 ❶
사유하지 않는 학교
양서영 paneepink@hotmail.com
본지 편집위원, 경기 중등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오늘날 교육을 이야기하는 키워드를 고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퇴보’였다. 왜 퇴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그동안 읽어 왔던 많은 교육 관련 도서들,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공유했던 고민들의 깊이를 요즘 학교 현장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다 함께 멍해진 것은 아닐 텐데 말하지 않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사유하지 않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구글 설문 민주주의
지난해 어쩌다 보니 규정개정위원회의 교원 위원을 맡게 되었다. 규정에 맞지 않는 생활지도(하복 위에는 사복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❶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어느 방향으로도 개선이 되지 않아 규정개정위원회에 의견을 내었다. 규정을 개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규정과 생활지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❷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논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바라던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담당 교사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두어 달 뒤 규정개정위원회가 열렸고 나는 다른 개정 안건(화장, 액세서리 금지 규정 폐지, 두발 규제 폐지, 이성 교제에 대한 처벌 금지 등)❸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하여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위원들(교원 위원 3명, 간사인 교사 1명, 학생 위원 3명, 학부모 위원 1명, 전문가 위원 1명)에게 내 의견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1명 반 정도❹였다. 나머지는 하복 위에 사복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의견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 ‘규정과 생활지도를 통일해야 한다, 규정과 상관없이 교사들이 자의적으로 생활지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에 대한 공감을 얻고 싶었던 나는 “다수가 그런 의견이라면 규정을 개정하는 게 맞다”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곧바로 개정안을 얘기해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제가 개정하자는 의견이 아닌데 제가 개정안을 내나요?”라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이후 위원들이 개정안을 함께 만들었다.
다음은 개정안의 내용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절차였다. 나는 당연히 관련 회의를 한 번쯤은 거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자치회, 교사회, 학부모회❺에서 적어도 한 번은 개정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담당 부서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생략하고 바로 설문 조사를 하겠다고 해서 나는 관련 “회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내 의견에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 12월이었고 2~3주 안에 개정 절차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 기간에 지필고사도 있어서 회의 시간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❻ 결국 개정안에 대해 학교 구성원들에게 설명을 충분히 하고 설문 조사를 하기로 했다.
일주일 뒤쯤 온라인 설문 조사 링크가 도착했다. 링크에는 설명은 없고 현재 규정과 개정안의 내용만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설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다시 의견을 제시했지만 ‘조항이 다 적혀 있으니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학생들에게 제공된 것은 조항들이 빽빽하게 나열된 ‘신구대조표’였다. 이 표를 읽어 보는 학생이 과연 1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다. 또 담임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설문 조사에 응할 수 있게 하라고 했지만, 정작 담임 선생님들조차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해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래도 학생회에서 규정개정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니 학생회 학생들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이 있겠지 생각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당장 공식적으로 하복 위에 사복 겉옷을 입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개정안에 찬성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제 규정에 따라서 하복 위 겉옷을 입으면 규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들도 60% 이상이 찬성해 과연 제대로 읽어 보고 투표한 게 맞는지 싶었다. 규정개정위원회에서 나와 같은 입장이었던 학생 위원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학생 투표 결과가 찬성이 높게 나왔어. 왜 그런지 알아?”
“아, 쌤! 그게 쌤들이 잘못 얘기해 주셨어요. ‘지금도 어차피 규제하고 있는데 그게 더 엄격해지는 것뿐이다. 달라지는 게 없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 게 아니라고 저 혼자만 얘기했는데…….”
말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졌다. 개정안에 반대했을 법한 동료 교사들에게도 살짝 물어봤다.
“쌤, 이거 개정안 어떤 건지 알고 계셨어요? 이거 통과되면 하복 위에 겉옷 못 입는 거예요.”
“(A 교사) 아, 그런 거였어요? 다른 개정안들 보니까 다 규제를 푸는 방향이길래 감지덕지다 생각하면서 애들한테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거라고 말해 줬는데…….”
“(B 교사) 근데 그게 저희 반 반장이 학생 위원인데 규제 찬성하는 애거든요. 애들한테 ‘이제 교복이 바뀌니까 크게 상관없다’ 이렇게 설명해 줘서 애들이 다 찬성 쪽으로 했어요.”
“아이고, 근데 교복 바뀌는 게 신입생부터여서 지금 1, 2학년은 새 교복이 없거든요. 그 학생들은 피해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교복이 바뀐다고 해도 하복 위에는 다른 옷 못 입게 되고요.”
“(B 교사) 아 그렇구나. 전혀 몰랐어요. 저도 반장 얘기 듣고 그런 줄 알았는데…….”
‘학생들은 당연히 반대하겠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의견을 내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음 규정개정위원회 회의에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학생, 교사들에게 개정안의 취지가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았고, 왜곡과 오해가 있었던 상황도 설명했다. 더구나 이 규정은 급한 게 아니니 좀 더 토론하고 개정을 하더라도 내년에 다시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조심히 꺼냈다.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설문 조사가 끝났는데 다시 되돌리는 건 어렵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그래서 결국 규정은 개정되었다. 퇴보하는 방향으로.
하복 위에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어떤 교육적 의의가 있는가. 회의 자리에서 나왔던 의견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하복 위에 체육복을 입을 수 있으니 다른 겉옷은 필요하지 않다.” “추우면 체육복을 입고 겉옷을 입을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 “하복 위에 겉옷을 입는 것은 다른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복을 입고 싶은 것뿐이다. 제재가 필요하다.” “교복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가난한 학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빈부격차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복 규제는 꼭 필요하다.” 놀랍지 않은 대사들이다. 지난 세월 오랫동안 듣고 또 들어 왔던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에 대한 반론도 모두 있지만 바뀌지 않는 생각들. ‘나와 다른 생각은 후진 생각’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 발전이 없다는 부분에서 퇴보라는 것이다. 납작한 논의들이 한참 오간 후 결정은 구글 설문 조사로 하는 풍경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토론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소회를 남겼다.
놀랍게도 이성 교제와 화장 규제 완화 등 다른 안건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고 다수의 찬성으로 내가 제안한 개정안이 모두 통과되었다. 이것은 발전일까? 그러나 이것도 발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도 깊은 고민은 없었다. 우리가 왜 이런 규정을 만들고 없애야 하는지, 이성 교제와 화장은 교육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학생들의 삶에 대한 논의보다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논의만 있었다. 모든 논의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생각은 ‘규정을 어기려는 학생들은 나쁜 학생들이고 그 학생들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액세서리 금지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피어싱과 문신이 언급되었는데, 규제가 풀리면 커다란 문신을 하는 학생들이 생길 것이다’,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등의 논리였다. 염색 금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염색이 풀리면 ‘빨강, 파랑의 탈색 머리도 나올 것’이고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는. 심지어 염색약이 건강에 나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이라는 이원재 선생님의 책❼에서 이런 주장의 황당함에 대해 말하며 전국의 염색약 업체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대목을 읽었다. 진지하게 염색약으로 머리가 상했던 경험을 말하던 교원 위원의 표정이 떠올랐고 나를 포함하여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던 회의 장면이 떠올라 실소가 나왔다.
이런 대화들과 학생들의 삶은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학생들의 고통과 죽음,❽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의 답답함은 그런 것이다. 학생들은 난간 없는 절벽에 서 있는데 편안하고 따뜻한 실내에 모여 앉아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 같은 무력감. 그런데 또 한편으로 교사들은 난간 없는 절벽에 선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놓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괴리감이 생기는 걸까. 왜 우리는 사유하지 않게 되었을까.
답이 정해진 교육
사유하지 않는 학생을 길러 냈던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은희(가명)는 반짝이는 학생이었다. 윤리 수업 시간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고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다양한 질문을 해 왔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생각과 철학자의 주장은 무엇이 다른지. 수업 시간이 끝나고도 이어지는 은희의 질문들이 재미있어서 나도 신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대입을 앞둔 학생들과 철학 토론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수업 시간의 절반은 수능 기출문제를 푸는 데 할애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은희의 질문이 달라졌다.
“선생님 그런데 이 문장이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아, 그게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고 이런 방향으로 보면 이런 부분이 있고…….”
나는 평소에 은희와 토론하듯 긴 이야기를 하였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희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이게 답이에요, 아니에요?”❾
“아……, 이게 답이 된다고 볼 순 없지.”
“네, 감사합니다!”
은희는 문제집을 가슴에 안고 밝은 미소와 함께 교실로 돌아갔다. 은희는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내가 은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고 마음이 아팠다.
정답이 정해진 교육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만든다. 어쩌면 지금의 학교가 사유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교사들에게도 정답이 있다. 그리고 그 정답은 점점 많아진다. 수업 시간에는 에듀테크를 일부 사용해야 하고, 지필평가를 반드시 봐야 하고(어떤 학교의 경우는 지필평가의 횟수마저 정해져 있다), 수행평가의 비율이 정해져 있고, 생활기록부에는 이런 말들만 써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몇 회 이상 언제까지 써야 하고, 어떤 업무를 할 때는 반드시 규정에 맞추어야 한다. 이렇게 온갖 규정들이 촘촘하게 교사의 삶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규정을 벗어났을 때 그 책임은 오롯이 교사 개인이 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 안에서 자율성을? 사유를? 고민을? 모두 사치다.
학교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가짜로 하는 것들은 ― 가짜 전학공❿, 가짜 수업 장학⓫, 가짜 협의회, 가짜 민주주의 등 ―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은희가 하루아침에 반짝임을 잃은 것이 아닌 것처럼 ― 아니 오히려 은희는 영리했다 ― 교사들이 하루아침에 멍해진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주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유할 것이라는 기대가 과한 것이다. 사유할 필요가 없다. 사유해서는 안 된다. 사유하면 아플 뿐이다.
교사는 권한 없는 책임 속에서 존재의 닻을 잃었고, 학생은 수행의 언어에 갇혀 삶으로 번역되는 배움의 경로를 잃었다. (……) 우리의 일과표는 너무 오랫동안 타자의 시간에 종속되어 있었다.
- 정용주, 〈학교 자치와 느린 민주주의〉, 《오늘의 교육》, 88호, 113쪽.
나는 어떤가. 나는 사유하고 있나. 사유의 힘이 희미해지지 않게 하루하루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나 역시 모든 것들에 점점 무뎌지고 있다. 그게 무섭다. 사유하는 이들의 글을 읽고 고민하는 동료들과 대화하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다. 나의 이 고민도 누군가에게 작은 버팀목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유가 사치가 된 학교지만 여전히 사유는 필요하다. 학생들은 실제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은 전혀 납작하지 않다. 구글 설문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삶을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사유해야 한다.
❶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OOO 민주주의〉, 《오늘의 교육》 87호(2025년 7·8월), 14~18쪽’에 실려 있다.
❷ 규정과 상관없이 교사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매해 달라지는 생활지도의 문제. 가령 작년에는 크록스 슬리퍼를 실내화로 신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올해부터 갑자기 신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❸ 이 규정들에 익숙한 분도, 놀라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26년 현재 대부분의 학교에 존재하는 규정들이다.
❹ 한 위원이 내 의견과 반대 의견 모두에 공감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❺ 학부모회 회의를 개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설명회 정도는 있어야 했다.
❻ 개정 절차가 늦어지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규정 개정을 추진하는 부서가 학생부인데 학교폭력 사안을 담당하다 보니 규정 개정 업무가 자꾸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❼ “어린 학생들의 정신적·육체적·정서적 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파마와 염색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전국 이미용 협회 및 헤어 관련 제품 제조 기업에서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만한 글이다. 이원재(2023), 《체육복을 읽는 아침》, 정미소, 251쪽.
❽ 이민아는 〈청소년 자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오늘의 교육》, 88호(2025년 9·10월))에서, ‘2023년 기준, 대한민국 10~19세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7.9명이며 이는 역대 최고치’라며 ‘과도한 통제와 압력이 청소년을 위기로 몰고’ 있고 ‘회복 탄력성을 저하시킨다’고 했다.
❾ 은희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 은희의 사고가 정답으로 수렴되었다는 것이지 무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 덧붙인다.
❿ 전문적 학습 공동체. 교사들이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학교 내에서 함께 연구하고 실천하는 모임이다. 거의 의무적으로 하게 된다. 내실 있게 전학공을 운영하는 교사들도 많지만 ‘했다 치는’ 전학공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⓫ 마찬가지로 다른 교사의 수업을 보고 함께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 역시 ‘했다 치는’ 수업 장학이 많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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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교육, 그 존재의 밀도 ❶
사유하지 않는 학교
양서영 paneepink@hotmail.com
본지 편집위원, 경기 중등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오늘날 교육을 이야기하는 키워드를 고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퇴보’였다. 왜 퇴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그동안 읽어 왔던 많은 교육 관련 도서들,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공유했던 고민들의 깊이를 요즘 학교 현장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다 함께 멍해진 것은 아닐 텐데 말하지 않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사유하지 않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구글 설문 민주주의
지난해 어쩌다 보니 규정개정위원회의 교원 위원을 맡게 되었다. 규정에 맞지 않는 생활지도(하복 위에는 사복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❶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어느 방향으로도 개선이 되지 않아 규정개정위원회에 의견을 내었다. 규정을 개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규정과 생활지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❷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논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바라던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담당 교사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두어 달 뒤 규정개정위원회가 열렸고 나는 다른 개정 안건(화장, 액세서리 금지 규정 폐지, 두발 규제 폐지, 이성 교제에 대한 처벌 금지 등)❸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하여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위원들(교원 위원 3명, 간사인 교사 1명, 학생 위원 3명, 학부모 위원 1명, 전문가 위원 1명)에게 내 의견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1명 반 정도❹였다. 나머지는 하복 위에 사복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의견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 ‘규정과 생활지도를 통일해야 한다, 규정과 상관없이 교사들이 자의적으로 생활지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에 대한 공감을 얻고 싶었던 나는 “다수가 그런 의견이라면 규정을 개정하는 게 맞다”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곧바로 개정안을 얘기해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제가 개정하자는 의견이 아닌데 제가 개정안을 내나요?”라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이후 위원들이 개정안을 함께 만들었다.
다음은 개정안의 내용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절차였다. 나는 당연히 관련 회의를 한 번쯤은 거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자치회, 교사회, 학부모회❺에서 적어도 한 번은 개정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담당 부서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생략하고 바로 설문 조사를 하겠다고 해서 나는 관련 “회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내 의견에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 12월이었고 2~3주 안에 개정 절차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 기간에 지필고사도 있어서 회의 시간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❻ 결국 개정안에 대해 학교 구성원들에게 설명을 충분히 하고 설문 조사를 하기로 했다.
일주일 뒤쯤 온라인 설문 조사 링크가 도착했다. 링크에는 설명은 없고 현재 규정과 개정안의 내용만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설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다시 의견을 제시했지만 ‘조항이 다 적혀 있으니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학생들에게 제공된 것은 조항들이 빽빽하게 나열된 ‘신구대조표’였다. 이 표를 읽어 보는 학생이 과연 1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다. 또 담임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설문 조사에 응할 수 있게 하라고 했지만, 정작 담임 선생님들조차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해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래도 학생회에서 규정개정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니 학생회 학생들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이 있겠지 생각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당장 공식적으로 하복 위에 사복 겉옷을 입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개정안에 찬성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제 규정에 따라서 하복 위 겉옷을 입으면 규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들도 60% 이상이 찬성해 과연 제대로 읽어 보고 투표한 게 맞는지 싶었다. 규정개정위원회에서 나와 같은 입장이었던 학생 위원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학생 투표 결과가 찬성이 높게 나왔어. 왜 그런지 알아?”
“아, 쌤! 그게 쌤들이 잘못 얘기해 주셨어요. ‘지금도 어차피 규제하고 있는데 그게 더 엄격해지는 것뿐이다. 달라지는 게 없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 게 아니라고 저 혼자만 얘기했는데…….”
말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졌다. 개정안에 반대했을 법한 동료 교사들에게도 살짝 물어봤다.
“쌤, 이거 개정안 어떤 건지 알고 계셨어요? 이거 통과되면 하복 위에 겉옷 못 입는 거예요.”
“(A 교사) 아, 그런 거였어요? 다른 개정안들 보니까 다 규제를 푸는 방향이길래 감지덕지다 생각하면서 애들한테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거라고 말해 줬는데…….”
“(B 교사) 근데 그게 저희 반 반장이 학생 위원인데 규제 찬성하는 애거든요. 애들한테 ‘이제 교복이 바뀌니까 크게 상관없다’ 이렇게 설명해 줘서 애들이 다 찬성 쪽으로 했어요.”
“아이고, 근데 교복 바뀌는 게 신입생부터여서 지금 1, 2학년은 새 교복이 없거든요. 그 학생들은 피해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교복이 바뀐다고 해도 하복 위에는 다른 옷 못 입게 되고요.”
“(B 교사) 아 그렇구나. 전혀 몰랐어요. 저도 반장 얘기 듣고 그런 줄 알았는데…….”
‘학생들은 당연히 반대하겠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의견을 내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음 규정개정위원회 회의에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학생, 교사들에게 개정안의 취지가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았고, 왜곡과 오해가 있었던 상황도 설명했다. 더구나 이 규정은 급한 게 아니니 좀 더 토론하고 개정을 하더라도 내년에 다시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조심히 꺼냈다.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설문 조사가 끝났는데 다시 되돌리는 건 어렵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그래서 결국 규정은 개정되었다. 퇴보하는 방향으로.
하복 위에 겉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어떤 교육적 의의가 있는가. 회의 자리에서 나왔던 의견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하복 위에 체육복을 입을 수 있으니 다른 겉옷은 필요하지 않다.” “추우면 체육복을 입고 겉옷을 입을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 “하복 위에 겉옷을 입는 것은 다른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복을 입고 싶은 것뿐이다. 제재가 필요하다.” “교복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가난한 학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빈부격차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복 규제는 꼭 필요하다.” 놀랍지 않은 대사들이다. 지난 세월 오랫동안 듣고 또 들어 왔던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에 대한 반론도 모두 있지만 바뀌지 않는 생각들. ‘나와 다른 생각은 후진 생각’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 발전이 없다는 부분에서 퇴보라는 것이다. 납작한 논의들이 한참 오간 후 결정은 구글 설문 조사로 하는 풍경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토론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소회를 남겼다.
놀랍게도 이성 교제와 화장 규제 완화 등 다른 안건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고 다수의 찬성으로 내가 제안한 개정안이 모두 통과되었다. 이것은 발전일까? 그러나 이것도 발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도 깊은 고민은 없었다. 우리가 왜 이런 규정을 만들고 없애야 하는지, 이성 교제와 화장은 교육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학생들의 삶에 대한 논의보다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논의만 있었다. 모든 논의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생각은 ‘규정을 어기려는 학생들은 나쁜 학생들이고 그 학생들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액세서리 금지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피어싱과 문신이 언급되었는데, 규제가 풀리면 커다란 문신을 하는 학생들이 생길 것이다’,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등의 논리였다. 염색 금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염색이 풀리면 ‘빨강, 파랑의 탈색 머리도 나올 것’이고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는. 심지어 염색약이 건강에 나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이라는 이원재 선생님의 책❼에서 이런 주장의 황당함에 대해 말하며 전국의 염색약 업체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대목을 읽었다. 진지하게 염색약으로 머리가 상했던 경험을 말하던 교원 위원의 표정이 떠올랐고 나를 포함하여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던 회의 장면이 떠올라 실소가 나왔다.
이런 대화들과 학생들의 삶은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학생들의 고통과 죽음,❽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의 답답함은 그런 것이다. 학생들은 난간 없는 절벽에 서 있는데 편안하고 따뜻한 실내에 모여 앉아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 같은 무력감. 그런데 또 한편으로 교사들은 난간 없는 절벽에 선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놓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괴리감이 생기는 걸까. 왜 우리는 사유하지 않게 되었을까.
답이 정해진 교육
사유하지 않는 학생을 길러 냈던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은희(가명)는 반짝이는 학생이었다. 윤리 수업 시간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고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다양한 질문을 해 왔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생각과 철학자의 주장은 무엇이 다른지. 수업 시간이 끝나고도 이어지는 은희의 질문들이 재미있어서 나도 신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대입을 앞둔 학생들과 철학 토론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수업 시간의 절반은 수능 기출문제를 푸는 데 할애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은희의 질문이 달라졌다.
“선생님 그런데 이 문장이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아, 그게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고 이런 방향으로 보면 이런 부분이 있고…….”
나는 평소에 은희와 토론하듯 긴 이야기를 하였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희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이게 답이에요, 아니에요?”❾
“아……, 이게 답이 된다고 볼 순 없지.”
“네, 감사합니다!”
은희는 문제집을 가슴에 안고 밝은 미소와 함께 교실로 돌아갔다. 은희는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내가 은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고 마음이 아팠다.
정답이 정해진 교육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만든다. 어쩌면 지금의 학교가 사유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교사들에게도 정답이 있다. 그리고 그 정답은 점점 많아진다. 수업 시간에는 에듀테크를 일부 사용해야 하고, 지필평가를 반드시 봐야 하고(어떤 학교의 경우는 지필평가의 횟수마저 정해져 있다), 수행평가의 비율이 정해져 있고, 생활기록부에는 이런 말들만 써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몇 회 이상 언제까지 써야 하고, 어떤 업무를 할 때는 반드시 규정에 맞추어야 한다. 이렇게 온갖 규정들이 촘촘하게 교사의 삶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규정을 벗어났을 때 그 책임은 오롯이 교사 개인이 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 안에서 자율성을? 사유를? 고민을? 모두 사치다.
학교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가짜로 하는 것들은 ― 가짜 전학공❿, 가짜 수업 장학⓫, 가짜 협의회, 가짜 민주주의 등 ―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은희가 하루아침에 반짝임을 잃은 것이 아닌 것처럼 ― 아니 오히려 은희는 영리했다 ― 교사들이 하루아침에 멍해진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주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유할 것이라는 기대가 과한 것이다. 사유할 필요가 없다. 사유해서는 안 된다. 사유하면 아플 뿐이다.
교사는 권한 없는 책임 속에서 존재의 닻을 잃었고, 학생은 수행의 언어에 갇혀 삶으로 번역되는 배움의 경로를 잃었다. (……) 우리의 일과표는 너무 오랫동안 타자의 시간에 종속되어 있었다.
- 정용주, 〈학교 자치와 느린 민주주의〉, 《오늘의 교육》, 88호, 113쪽.
나는 어떤가. 나는 사유하고 있나. 사유의 힘이 희미해지지 않게 하루하루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나 역시 모든 것들에 점점 무뎌지고 있다. 그게 무섭다. 사유하는 이들의 글을 읽고 고민하는 동료들과 대화하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다. 나의 이 고민도 누군가에게 작은 버팀목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유가 사치가 된 학교지만 여전히 사유는 필요하다. 학생들은 실제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은 전혀 납작하지 않다. 구글 설문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삶을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사유해야 한다.
❶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OOO 민주주의〉, 《오늘의 교육》 87호(2025년 7·8월), 14~18쪽’에 실려 있다.
❷ 규정과 상관없이 교사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매해 달라지는 생활지도의 문제. 가령 작년에는 크록스 슬리퍼를 실내화로 신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올해부터 갑자기 신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❸ 이 규정들에 익숙한 분도, 놀라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26년 현재 대부분의 학교에 존재하는 규정들이다.
❹ 한 위원이 내 의견과 반대 의견 모두에 공감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❺ 학부모회 회의를 개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설명회 정도는 있어야 했다.
❻ 개정 절차가 늦어지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규정 개정을 추진하는 부서가 학생부인데 학교폭력 사안을 담당하다 보니 규정 개정 업무가 자꾸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❼ “어린 학생들의 정신적·육체적·정서적 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파마와 염색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전국 이미용 협회 및 헤어 관련 제품 제조 기업에서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만한 글이다. 이원재(2023), 《체육복을 읽는 아침》, 정미소, 251쪽.
❽ 이민아는 〈청소년 자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오늘의 교육》, 88호(2025년 9·10월))에서, ‘2023년 기준, 대한민국 10~19세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7.9명이며 이는 역대 최고치’라며 ‘과도한 통제와 압력이 청소년을 위기로 몰고’ 있고 ‘회복 탄력성을 저하시킨다’고 했다.
❾ 은희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 은희의 사고가 정답으로 수렴되었다는 것이지 무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 덧붙인다.
❿ 전문적 학습 공동체. 교사들이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학교 내에서 함께 연구하고 실천하는 모임이다. 거의 의무적으로 하게 된다. 내실 있게 전학공을 운영하는 교사들도 많지만 ‘했다 치는’ 전학공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⓫ 마찬가지로 다른 교사의 수업을 보고 함께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 역시 ‘했다 치는’ 수업 장학이 많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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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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