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을 열며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뀔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장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요즘 세상을 보면 꼭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뀌는 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대학 4학년이 된 아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한 발짝 뗄 곳이 안 보여요. 열심히 살지 않은 것도 아닌데,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아무리 준비를 해도 금방 쓸모없는 게 되어 버려요.” 그 불안이 고스란히 읽혀 가슴이 철렁했다. 준비한 말도 없고, 뭐라고 위로를 할 수도 없어 “그래도 뭐라도 할 일은 있겠지” 궁색하게 얼버무리는데, 돌아오는 것은 담담한 대답이었다. “엄마, 아직 현실을 잘 몰라서 그래, 지금 컴공도 다 망했잖아요…….” 그건 뭐랄까, 절망도, 불안도, 분노도 아닌 그저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체념과 포기, 그러니까 허무가 가득한 말이었다.
팬데믹 시기에 고3과 대학 신입생 시절을 보낸 그 세대에게는 ‘이공계 진학’이 살 길이었다. 그중에서도 친구들이 가장 많이 갔던 학과는 ‘컴퓨터 공학과’다. 그때는 코딩 바람이 불었다. 선생님들이 다들 권하고, 관련 학과를 가는데 ‘코딩’이 필수라고 해서, 인제에 없는 코딩 학원을 찾아 서울로, 춘천으로 다니기도 했다. 코딩은 사회가 요구하는 미래형 인재의 필수 역량이었다. 그런데 유망 진로라고 권유받고 ‘컴공’ 갔던 친구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수개월에 걸쳐 코딩을 짜고 개발할 것을 AI가 순식간에 해치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AI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일자리도 먹어 치웠다. 한국의 실리콘 밸리라 하던 구로 G밸리, 판교 테크노밸리는 신규 개발자 유입은커녕 기존 개발자들도 우수수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의 진짜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탠포드대의 공학도들이 배관공, 전기공으로 직업 진로를 바꾸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또 다른 대학 친구는, 얼마 안 남은 일자리가 소수 전문 직종에만 있다고 생각하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공과 관련 없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는데, AI 때문에 신입 회계사를 뽑지 않는다는 소식에 절망하고 있다고 한다. 선배는 후배들한테 로스쿨에 갈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차라리 코인을 사고 주식 투자를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아니 세상이 언제 다 망할지 모르는데, 내가 지금 뭘 준비한들 무슨 소용인가. 모두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커져 갈 때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를 탄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발밑이 요동칠 때는 사람들이 안정을 희구하기 마련이다. 이 불안을 벗어나고 싶은 안정성에 대한 갈망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 회고주의를 불러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시대, 요즘 우리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고 되묻는 날이 많아졌다. 말도 안 되는 일들,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세상. 종종 교사들을 만나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곤 한다. “선생님들은 지금 같은 시기에 교육을 어떻게 하세요?” 엊그제까지 맞다고 한 것이 오늘은 틀린 것이 된다. 이것은 비단 제도 교육의 현장이나 교사들만의 곤궁은 아니다. 우리가 알던 세계의 질서와 약속이 무너지고 예측이 불가능해져 버린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일 것이다. 그때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린 것이 되고, ‘그때’와 ‘지금’의 간격이 급속도로 좁혀지는 이런 시기에, 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뀔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 청년은 학점을 위해 공부한 시간도, 경험을 쌓기 위해 노력한 시간도, 직업을 얻기 위해 준비한 시간도, 너무 쉽게 무화되어 버리는 상황에 대해 “시간이 순식간에 증발되는 것 같다”고 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지금까지의 삶이 순식간에 리셋되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위의 농민들도 한 해 한 해 기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한다. 오래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까지 체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도저히 예측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상황이 일어나니 무섭다고 한다. 하늘의 시간도 땅의 시간도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나도 인문 사회 연구자로, 그런 비슷한 곤경을 겪고 있다. 너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고 요동치고 있는 대혼돈의 시기에 그 속도를 따라가며 공부한 것을 정리해 내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비판을 열심히 해 온 연구자에게, 신자유주의자들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있는 현실은 설명하기가 매우 복잡하다. 내란 이후 ‘극우의 신자유주의적 기원’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내가 현재 사태를 ‘신자유주의 파시즘’으로 설명하자, 자리에 참여한 사회학과 대학원생이 나에게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며 지적했다. 학교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기반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개인주의와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념인데, 어떻게 ‘신자유주의 파시즘’ 같은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세계화, 자유, 개방, 모험은 신자유주의의 대표 구호였는데, 과거 세계화를 주창했던 이들이 오늘날 세계화 대신 자국중심주의를 주장하고, 자유가 아닌 통제를 옹호하며, 개방이 아니라 보호를 내세운다. 책에서 배운 것과 현실이 맞지 않는 것이다.
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단순명료했던 지식들이 체제 변동기에는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그걸 설명하는 일은 복잡한데, 복잡한 현상을 설명해 내는 일은 간단 명쾌한 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더 어려운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질문을 구성하기도 전에 답을 내놓아야 하고, 답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질문이 던져진다. 내가 책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입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AI는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전 세계의 수많은 저장된 생각들에서 추출해서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로 내놓는다. 나는 AI의 속도를 이길 수 없다.
사실 나는 신자유주의 연구도 하고, 기후 위기 연구도 하고,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지만, 내가 오랫동안 시간을 쌓아 공부했던 전공 분야는 고대 정치 철학, 특히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사상이다. 지금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묵혀 두고, 대신 활동 분야에서 요구되는 연구를 단기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건 찾는 사람이라도 있고, 강의라도 할 수 있으니까. 교육과 학문의 트렌드화를 비판하지만 나도 지식 생산의 ‘트렌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대 문헌을 가지고 강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나 그리스의 희극·비극에 관심 갖지 않고, 긴 시간 읽어 나가야 하는 독해 과정을 어디서도 개설할 수 없다. 독자들은 선생을 찾아서 굳이 힘들여 읽지 않아도 AI가 친절하게 내용을 요약해 줄 것이다.
인문학은 장인의 기예처럼 날마다의 연습과 숙련이 필요한 일이다. 지식을 머릿속에만 넣어 놓고 있다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라도 매일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아무리 훌륭한 도공, 목수, 대장장이라도 매일 흙을 만지고, 나무를 다듬고, 불을 다루며 쇠를 쳐야 하듯이, 인문학자도 매일 읽고 쓰고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을 몸에 익혀야 한다. 반복은 끝이 없고, 같은 텍스트라도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 반복 속에서 ‘깊이’도 생겨나는 것인데, 오늘날은 그런 반복적 훈련이 모두 ‘시간 낭비’로 여겨진다. 언젠가부터 나도 텍스트를 읽고 정리하는 매일의 반복 루틴이 무너져 버렸다. 실력도 기예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평생교육’의 이념이 평생 새로운 것을 끝없이 배우라는 것으로 변질되었고, 세상은 한 우물 파기를 위험하다 하며 여러 우물을 파라 조언한다. ‘위험은 분산하라’는 투자 원리가 교육에도 침투한 지 오래다. 각자 자기의 달란트(재능)을 갈고 닦아서 세상에 보탬이 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교육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재능을 발현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거대한 이윤 추출 기계의 일부로 종속시키는 체제에서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교육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체제에서 살아남을 길을 각자 찾도록 지원하는 것을 ‘개인 맞춤형 교육’이라 부르고 있지만, 앞서 이야기들에서 보았듯이 그런 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해졌다.
우리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지도마저 빠른 속도로 바꾼다. 글로벌 공급망 변동과 산업 구조 조정의 속도는 지역의 산업과 생산 구조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사과 주산지는 대구에서 인제, 홍천, 양구로 바뀌었는데, 또 언제 바뀔지 모른다.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 주제가 계속 바뀌고 연구자들이 그걸 숨 가쁘게 쫓아가는 것처럼, 농촌의 미래형 소득 작물은 블루베리에서 샤인머스캣으로, 멜론으로, 애플망고로, 끊임없이 바뀐다. 농업 정책은 석유와 전기로 돌아가는 스마트팜을 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지만 지금 전쟁으로 인해 치솟는 유가와 금리 앞에서는 대책이 없고 감당의 몫은 고스란히 농민 개개인에게 떨어진다. 국가의 경계도, 동맹 관계도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계약과 신용도 증발한다.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은행의 지급 불능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의 연금과 세금까지 위험한 투자 상품과 연동되어 있다. 세계사적인 지각 변동은 우리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삶의 기반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든다. 그러니 이러한 시대는 단지 어떤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때, 즉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뀌는 시기’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의 교육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교육
천동설이 근대 이전의 인식론적 체계를 대표한다면, 지동설은 근대적 인식론적 체계를 대표한다. 세계 질서가 총체적으로 뒤흔들리는 시기에는 인식의 체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인식론적 체계의 붕괴와 해체는 지식과 교육 체계의 해체와 직결되는 문제이며 여기에 지금 교육/운동의 위기와 사명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교육/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해야 할까. 천동설이 무너지고 지동설이 수립된 것이 근대의 인식론적 혁명이었다면, 다시 ‘지동설’로 대표되는 근대적 인식론이 무너지는 시간에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낡은 것이 무너지면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간을 열어 가야만 낡은 세상이 끝날 수 있다. 과거의 천동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천동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은 체제 너머의 교육, 다음 세상의 교육에 대한 대안의 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교육 사상과 교육 철학의 수립을 요구한다.
그게 무어냐고 묻느냐면 당장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시간이 자본의 시간과 양립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자본의 시간은 성과, 수익, 효율성을 요구하고, 수익 환수 주기를 기준으로 시간의 압축은 점점 빨라진다. 그런 점에서 먼저 교육/운동은 자본으로부터 교육의 시간을 탈환하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자본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우리의 미래를 제시하고, 그 상을 함께 그리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고, 근대 체제 너머의 교육, 자본과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육에 저항하며 넘어서는 사상적 실천적 교육/운동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먼저 새로운 하늘을 열어 보았던 길잡이도 있고, 발자국도 있다. 가난한 민중과 농민들과 함께 교육을 통한 해방을 꿈꾸었던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도 있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평등 세상을 배우고 살아 냈던 동학운동도 이 땅에서 나타났던 ‘해방의 교육학’이라 생각한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이 ‘해방의 교육 사상’이 아닐까. 발밑에 떨어진 현안과 의제에만 갇히지 않고, 교육의 대안을 모색하고 더 구체적인 상으로 만들어 가는 일을 《오늘의 교육》은 시작해 보려 한다.
그날 나는 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발밑이 어디로도 한 발짝 뗄 수 없는 절벽인데, 내 발밑만 보고 길을 찾으려 하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의 할 일이 보일 것이다. 우리 그걸 함께 찾아보자. 이 말은 나를 향해,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대한 스케일의 붕괴 앞에서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하지만 혼자일 때는 절망이 커지고 함께일 때는 희망이 커진다는 것, 생각 속에서는 비관이 자라지만 몸을 움직여 활동할 때는 낙관이 자란다는 것은 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여기에서 먼저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다. 《오늘의 교육》 독자 가운데도,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가운데도,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자본의 시간에 봉쇄된 교육의 상상력을 해방하고, 자본의 시간을 넘어선 교육의 미래를, 새로운 하늘을 열어 가는 길을 ‘함께’ 찾아 나설 이들을,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오늘의 교육》 독자로 만나기를 바란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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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을 열며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뀔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장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요즘 세상을 보면 꼭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뀌는 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대학 4학년이 된 아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한 발짝 뗄 곳이 안 보여요. 열심히 살지 않은 것도 아닌데,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아무리 준비를 해도 금방 쓸모없는 게 되어 버려요.” 그 불안이 고스란히 읽혀 가슴이 철렁했다. 준비한 말도 없고, 뭐라고 위로를 할 수도 없어 “그래도 뭐라도 할 일은 있겠지” 궁색하게 얼버무리는데, 돌아오는 것은 담담한 대답이었다. “엄마, 아직 현실을 잘 몰라서 그래, 지금 컴공도 다 망했잖아요…….” 그건 뭐랄까, 절망도, 불안도, 분노도 아닌 그저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체념과 포기, 그러니까 허무가 가득한 말이었다.
팬데믹 시기에 고3과 대학 신입생 시절을 보낸 그 세대에게는 ‘이공계 진학’이 살 길이었다. 그중에서도 친구들이 가장 많이 갔던 학과는 ‘컴퓨터 공학과’다. 그때는 코딩 바람이 불었다. 선생님들이 다들 권하고, 관련 학과를 가는데 ‘코딩’이 필수라고 해서, 인제에 없는 코딩 학원을 찾아 서울로, 춘천으로 다니기도 했다. 코딩은 사회가 요구하는 미래형 인재의 필수 역량이었다. 그런데 유망 진로라고 권유받고 ‘컴공’ 갔던 친구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수개월에 걸쳐 코딩을 짜고 개발할 것을 AI가 순식간에 해치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AI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일자리도 먹어 치웠다. 한국의 실리콘 밸리라 하던 구로 G밸리, 판교 테크노밸리는 신규 개발자 유입은커녕 기존 개발자들도 우수수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의 진짜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탠포드대의 공학도들이 배관공, 전기공으로 직업 진로를 바꾸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또 다른 대학 친구는, 얼마 안 남은 일자리가 소수 전문 직종에만 있다고 생각하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공과 관련 없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는데, AI 때문에 신입 회계사를 뽑지 않는다는 소식에 절망하고 있다고 한다. 선배는 후배들한테 로스쿨에 갈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차라리 코인을 사고 주식 투자를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아니 세상이 언제 다 망할지 모르는데, 내가 지금 뭘 준비한들 무슨 소용인가. 모두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커져 갈 때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를 탄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발밑이 요동칠 때는 사람들이 안정을 희구하기 마련이다. 이 불안을 벗어나고 싶은 안정성에 대한 갈망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 회고주의를 불러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시대, 요즘 우리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고 되묻는 날이 많아졌다. 말도 안 되는 일들,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세상. 종종 교사들을 만나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곤 한다. “선생님들은 지금 같은 시기에 교육을 어떻게 하세요?” 엊그제까지 맞다고 한 것이 오늘은 틀린 것이 된다. 이것은 비단 제도 교육의 현장이나 교사들만의 곤궁은 아니다. 우리가 알던 세계의 질서와 약속이 무너지고 예측이 불가능해져 버린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일 것이다. 그때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린 것이 되고, ‘그때’와 ‘지금’의 간격이 급속도로 좁혀지는 이런 시기에, 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뀔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 청년은 학점을 위해 공부한 시간도, 경험을 쌓기 위해 노력한 시간도, 직업을 얻기 위해 준비한 시간도, 너무 쉽게 무화되어 버리는 상황에 대해 “시간이 순식간에 증발되는 것 같다”고 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지금까지의 삶이 순식간에 리셋되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위의 농민들도 한 해 한 해 기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한다. 오래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까지 체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도저히 예측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상황이 일어나니 무섭다고 한다. 하늘의 시간도 땅의 시간도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나도 인문 사회 연구자로, 그런 비슷한 곤경을 겪고 있다. 너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고 요동치고 있는 대혼돈의 시기에 그 속도를 따라가며 공부한 것을 정리해 내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비판을 열심히 해 온 연구자에게, 신자유주의자들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있는 현실은 설명하기가 매우 복잡하다. 내란 이후 ‘극우의 신자유주의적 기원’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내가 현재 사태를 ‘신자유주의 파시즘’으로 설명하자, 자리에 참여한 사회학과 대학원생이 나에게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며 지적했다. 학교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기반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개인주의와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념인데, 어떻게 ‘신자유주의 파시즘’ 같은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세계화, 자유, 개방, 모험은 신자유주의의 대표 구호였는데, 과거 세계화를 주창했던 이들이 오늘날 세계화 대신 자국중심주의를 주장하고, 자유가 아닌 통제를 옹호하며, 개방이 아니라 보호를 내세운다. 책에서 배운 것과 현실이 맞지 않는 것이다.
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단순명료했던 지식들이 체제 변동기에는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그걸 설명하는 일은 복잡한데, 복잡한 현상을 설명해 내는 일은 간단 명쾌한 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더 어려운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질문을 구성하기도 전에 답을 내놓아야 하고, 답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질문이 던져진다. 내가 책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입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AI는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전 세계의 수많은 저장된 생각들에서 추출해서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로 내놓는다. 나는 AI의 속도를 이길 수 없다.
사실 나는 신자유주의 연구도 하고, 기후 위기 연구도 하고,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지만, 내가 오랫동안 시간을 쌓아 공부했던 전공 분야는 고대 정치 철학, 특히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사상이다. 지금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묵혀 두고, 대신 활동 분야에서 요구되는 연구를 단기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건 찾는 사람이라도 있고, 강의라도 할 수 있으니까. 교육과 학문의 트렌드화를 비판하지만 나도 지식 생산의 ‘트렌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대 문헌을 가지고 강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나 그리스의 희극·비극에 관심 갖지 않고, 긴 시간 읽어 나가야 하는 독해 과정을 어디서도 개설할 수 없다. 독자들은 선생을 찾아서 굳이 힘들여 읽지 않아도 AI가 친절하게 내용을 요약해 줄 것이다.
인문학은 장인의 기예처럼 날마다의 연습과 숙련이 필요한 일이다. 지식을 머릿속에만 넣어 놓고 있다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라도 매일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아무리 훌륭한 도공, 목수, 대장장이라도 매일 흙을 만지고, 나무를 다듬고, 불을 다루며 쇠를 쳐야 하듯이, 인문학자도 매일 읽고 쓰고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을 몸에 익혀야 한다. 반복은 끝이 없고, 같은 텍스트라도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 반복 속에서 ‘깊이’도 생겨나는 것인데, 오늘날은 그런 반복적 훈련이 모두 ‘시간 낭비’로 여겨진다. 언젠가부터 나도 텍스트를 읽고 정리하는 매일의 반복 루틴이 무너져 버렸다. 실력도 기예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평생교육’의 이념이 평생 새로운 것을 끝없이 배우라는 것으로 변질되었고, 세상은 한 우물 파기를 위험하다 하며 여러 우물을 파라 조언한다. ‘위험은 분산하라’는 투자 원리가 교육에도 침투한 지 오래다. 각자 자기의 달란트(재능)을 갈고 닦아서 세상에 보탬이 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교육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재능을 발현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거대한 이윤 추출 기계의 일부로 종속시키는 체제에서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교육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체제에서 살아남을 길을 각자 찾도록 지원하는 것을 ‘개인 맞춤형 교육’이라 부르고 있지만, 앞서 이야기들에서 보았듯이 그런 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해졌다.
우리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지도마저 빠른 속도로 바꾼다. 글로벌 공급망 변동과 산업 구조 조정의 속도는 지역의 산업과 생산 구조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사과 주산지는 대구에서 인제, 홍천, 양구로 바뀌었는데, 또 언제 바뀔지 모른다.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 주제가 계속 바뀌고 연구자들이 그걸 숨 가쁘게 쫓아가는 것처럼, 농촌의 미래형 소득 작물은 블루베리에서 샤인머스캣으로, 멜론으로, 애플망고로, 끊임없이 바뀐다. 농업 정책은 석유와 전기로 돌아가는 스마트팜을 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지만 지금 전쟁으로 인해 치솟는 유가와 금리 앞에서는 대책이 없고 감당의 몫은 고스란히 농민 개개인에게 떨어진다. 국가의 경계도, 동맹 관계도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계약과 신용도 증발한다.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은행의 지급 불능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의 연금과 세금까지 위험한 투자 상품과 연동되어 있다. 세계사적인 지각 변동은 우리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삶의 기반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든다. 그러니 이러한 시대는 단지 어떤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때, 즉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뀌는 시기’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의 교육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교육
천동설이 근대 이전의 인식론적 체계를 대표한다면, 지동설은 근대적 인식론적 체계를 대표한다. 세계 질서가 총체적으로 뒤흔들리는 시기에는 인식의 체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인식론적 체계의 붕괴와 해체는 지식과 교육 체계의 해체와 직결되는 문제이며 여기에 지금 교육/운동의 위기와 사명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교육/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해야 할까. 천동설이 무너지고 지동설이 수립된 것이 근대의 인식론적 혁명이었다면, 다시 ‘지동설’로 대표되는 근대적 인식론이 무너지는 시간에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낡은 것이 무너지면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간을 열어 가야만 낡은 세상이 끝날 수 있다. 과거의 천동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천동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은 체제 너머의 교육, 다음 세상의 교육에 대한 대안의 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교육 사상과 교육 철학의 수립을 요구한다.
그게 무어냐고 묻느냐면 당장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시간이 자본의 시간과 양립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자본의 시간은 성과, 수익, 효율성을 요구하고, 수익 환수 주기를 기준으로 시간의 압축은 점점 빨라진다. 그런 점에서 먼저 교육/운동은 자본으로부터 교육의 시간을 탈환하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자본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우리의 미래를 제시하고, 그 상을 함께 그리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고, 근대 체제 너머의 교육, 자본과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육에 저항하며 넘어서는 사상적 실천적 교육/운동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먼저 새로운 하늘을 열어 보았던 길잡이도 있고, 발자국도 있다. 가난한 민중과 농민들과 함께 교육을 통한 해방을 꿈꾸었던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도 있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평등 세상을 배우고 살아 냈던 동학운동도 이 땅에서 나타났던 ‘해방의 교육학’이라 생각한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이 ‘해방의 교육 사상’이 아닐까. 발밑에 떨어진 현안과 의제에만 갇히지 않고, 교육의 대안을 모색하고 더 구체적인 상으로 만들어 가는 일을 《오늘의 교육》은 시작해 보려 한다.
그날 나는 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발밑이 어디로도 한 발짝 뗄 수 없는 절벽인데, 내 발밑만 보고 길을 찾으려 하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의 할 일이 보일 것이다. 우리 그걸 함께 찾아보자. 이 말은 나를 향해,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대한 스케일의 붕괴 앞에서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하지만 혼자일 때는 절망이 커지고 함께일 때는 희망이 커진다는 것, 생각 속에서는 비관이 자라지만 몸을 움직여 활동할 때는 낙관이 자란다는 것은 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여기에서 먼저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다. 《오늘의 교육》 독자 가운데도,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가운데도,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자본의 시간에 봉쇄된 교육의 상상력을 해방하고, 자본의 시간을 넘어선 교육의 미래를, 새로운 하늘을 열어 가는 길을 ‘함께’ 찾아 나설 이들을,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오늘의 교육》 독자로 만나기를 바란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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