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참/교육’이라는 환상
- 드라마 〈참교육〉

치리 kellykykim99@gmail.com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청소년운동을 오래 했다.
의도치 않게 해외를 전전하다가,
어쩌다 보니 교육 언저리에서도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솔직히 말해, 〈참교육〉이라는 작품을 인생에서 피해 왔다. 웹툰부터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아마 성토를 멈출 수 없을 거라고 마음속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드라마를 보게 되다니. 인생의 얄궂음을 실감하는 때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제작진들의 필모그라피를 뒤지는 것이었다. 감독도 감독인데, 어떤 작가들이 각색했는지 지난 작품들 리스트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결과는 제법 놀라웠다. 꽤나 굵직한 사회 고발물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메인 작가인 이남규의 대표 각색작 중 하나는 〈송곳〉이 있다. 〈송곳〉을 대표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대사가 있지만,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대사를 꼽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의 최신작 〈참교육〉을 관통하는 대사는 아마도 이것일 테다. “어른이 애들 무서워하면 세상이 망한다.”
이토록 기묘하게 겹치는 대사들 속에서, 그가 고발하는 사회가 누구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두 대사를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꽤나 선명하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두렵지 않은 인간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게 되며, 그리고 아마도 학생(아이)은, 존중받는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통쾌하고도 단순한, 실현 불가능한 정의
드라마에서 다룬 과장된 실제 사건들의 사실관계를 정정하는 일은 이미 나 말고도 많은 비평가들, 그리고 당사자들이 해 오고 있는 일이므로 그것에 너무 힘을 쏟고 싶지는 않다. 물론 드라마 〈참교육〉은 실제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들을 넣으며 매우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해 놓았다. 그러곤 ‘픽션일 뿐’이라며 숨어 버린다. 이것이 비겁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제작자들이 픽션의 언어로 판단을 해 달라고 하니, 그런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나의 감상은 한 문장으로 마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그 무엇보다도, 그냥 재미가 없다.
드라마 〈참교육〉을 만든 작가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한다. 액션과 코미디다. 그들이 연출하는 액션은 화려하고 어떤 슬랩스틱은 웃기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원 패턴이라는 점이다. 〈참교육〉 드라마의 첫 10분의 플롯은 이후 10화 동안 한 화 단위로 반복된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까분다. 그러면 주인공이 나타나서 화려하게 팬다. 열심히 패고, 맞은 사람은 덜덜 떨며 사죄하고, 이후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이러한 도식은 확실한 장점을 가진다. 이야기가 직선적이라서 이해하기가 쉽고, 기승전결 또한 명확하기 때문에 10분 정도의 영상에서 가장 빠르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슬랩스틱도 마찬가지다. 이제 다들 이게 왜 재미가 없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10분짜리 플롯을 10화로 늘려 놓으면 보통 재미가 없다.
〈참교육〉은 단순하고 간명한 패턴에 큰 변주도 주지 않는다. 물론 배우들의 매력과 연기에는 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거나 액션을 해내는 배우들이 아무리 열심히 연기를 해도 플롯의 지루함을 이겨 내기란 힘든 일이다.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싶지 않지만, 픽션에서 재미란 얼마나 큰 요소인가. 그런데 〈참교육〉이 재미있게 잘 만든 드라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슷한 사적 제재물인 〈열혈사제〉를 보라. 등장하는 영화 오마주는 셀 수도 없고, 시즌 2에서는 갑자기 뮤지컬도 한다. 이는 직선적인 플롯을 극복하기 위한 변주다. 그런데 〈참교육〉에는 이런 것도 부족하다. 2화에서는 영화 〈친구〉가 연상되는 패싸움 액션이나 꽤 그럴듯한 카 체이싱이라도 하지만, 이후에는 그마저도 없다.
이런 한계에도 〈참교육〉은 명백히 흥행에 성공했다. 화제성이든, 조회 수든. 그러나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교육〉의 유행은 다른 사적 제재물, 〈열혈사제〉, 〈모범택시〉, 〈김부장〉 등이 유행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복수와 폭력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이런 장르는 미국식 히어로물의 플롯에 충실히 따른다. 멋진 주인공과 코미디, 대의처럼 보이는, 현실에도 산재한 거대한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이나 ‘생각의 여지’를 최대한 줄여 버리고, 선의의 주인공이 행하는 폭력-액션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이 영상을 보는 동안 관객에게는 그 어떠한 고민을 할 시간도, 여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액션을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참, 한국에서는 이런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필수 설정이 있는데, 바로 (전직) 국정원 요원, 북파공작원, 특수부대원이다. 〈참교육〉도 주인공이 전직 특수부대원이라는 설정이다. 안민석 경기도 교육감이 ‘교권보호국’이라는 것을 논의하는 중이라면서, 특수부대 출신들에게 연락이 왔다고 발언한 것❶도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조금만 더 파고들어 보자. 히어로물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과 유사한 환경을 가정한다. 또한 무력을 통해 정의나 목적을 달성하므로, 이러한 폭력이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인 존재, 설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는 절대적인 선임과 동시에 엄청난 권력이나 무력을 가진 신적인 설정이어야 한다. 예컨대 마블 시리즈의 쉴드(S.H.I.E.L.D.) 같은 기관이나, 아니면 아예 슈퍼맨 같은 엄청난 초능력, 배트맨 같은 엄청난 재력 말이다. ‘그냥 사람을 잘 팬다’라는 정도의 능력으로만 복수물이 가능하게 하려면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외부의 권력을 빌려오는 것이다.
〈열혈사제〉에서 그것은 교황으로부터의 독자적 수사 허락이었다. 〈참교육〉에서 그러한 존재는 아마 이성민이 연기한 교육부 장관과, 교권보호국이라는 공적 제재 기관으로 보인다. 이 세계관에서 경찰이나 검찰 같은 다른 공권력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참교육〉에서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학교에서 군림하는 학생을 응징하기 위해,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켜 국회의원을 실각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여당 중앙부의 권력이나 집단적인 항의도 이 사람의 의지나 영향력을 꺾을 수 없다.
문제는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교육부 장관이 실제로 이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교육감은 더더욱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참교육〉이 가능한 이유는 교육부 장관이 이 픽션 속에서 주인공의 ‘날뛸 곳’을 만들어 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이다. 안민석의 바람과는 달리, 그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실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권리를 비웃는 이들
〈참교육〉 내에서 그려지는 학생 간 폭력, 학생에 의한 교사 대상 폭력, 그 이외의 ‘선의의 교사와 학생’을 괴롭히는 폭력을 가능케 하는 권력 차는 엄밀히 따지자면 학교 바깥에서 온다. 드라마 속 ‘빌런’들의 권력은 상당 부분 사회 경제적 계급에 달려 있다.
각 화별로 문제가 되는 사건들을 보자. 1화에서 날뛰던 학생은 중진 국회의원의 자녀였다. 2화의 학생들은 조직폭력배들과 관련이 있었다. 3화에서는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익명성의 군중을 뒤에 업은 학생이었다. 4, 5화는 아예 학생 간 폭력의 문제도 아니다. 4화에서 문제가 된 건 자기 자녀들의 성적을 조작하기 위한 고위직 교사의 성적 조작 시도였고, 5화의 민원 제기 학부모는 엄밀히 따지자면 학교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학교라는 공간 내에 존재하는 인물도 아니다. 8화는 학생에게 동의 없이 약물을 투약하는 학대 부모의 이야기이며, 6, 7, 9, 10화에서 다루어지는 도박, 마약, 조직적 범죄는 애초에 교육 문제와는 별개의 강력 범죄 사건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실은 아예 카테고리가 다르다. 여기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란, 관련자들이 청소년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조차 아니다. 이러한 ‘악질적이고, 제재 불가능한’ 상태로 보이는 일화들을 한데 묶어 놓은 이유는 그저 작품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학생조차 제재 못 하는 비겁한 선생들’과 ‘반드시 제재받아야만 하는 악인’을 그리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러면 이제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이 드라마는 애초에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지 않나?
드라마 〈참교육〉 속에서 ‘시위하는 사람들’과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악역에 동조하거나, 악역에 면죄부를 주는 사람들인 것처럼만 그려진다. 돌아가는 세상 물정도 모르면서 이상적인 소리나 한다는 양이다. 〈참교육〉의 설정과 플롯의 배경에 깔린 관점과 태도는 사실 이와 같은 비웃음과 냉소다. 그러나 신적인 존재의 허락 아래 폭력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전두환 정권 시절 ‘불량배를 소탕하자’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교련’ 시간과 ‘삼청교육대’가 있었던 시절에는 외부 권력을 이용한 학생 간의 폭력이 없었나? 그를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돕는 교사들이 없었나? 새 학기에 촌지를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가난하여 촌지를 바치지 않으면 교사 주도의 따돌림이 있어도 감내해야 했던 것이 당연하던 시절에 일어났던 것은 폭력이 아니었나? 그때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됐으니까, 그때의 교육이 정당했다고 말할 셈인가?
〈참교육〉 2화에서 다루어진 장면의 모티브가 된 것은 영화 〈친구〉의 배경이 되는 시대일 것이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대사와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교사는 학생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따귀로 그 누구도 교육되지 않았다. 〈친구〉의 인물들은 그저 분노에 차 기억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곤 하지만 학교에서 ‘가혹한 체벌’이 자취를 감춘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시절에도 학교와 교육의 문제는 끊임없이 지적되고 비판받았다. 드라마 〈참교육〉의 결론은 사실과 많이 어긋나 있는 것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하면서 ‘참교육’이라는 표어를 내세웠을 때, 그들은 촌지를 받지 말고, 학생을 인격적으로 훈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❷ 전교조를 비난해 온 이들은 이 구호를 빼앗아 와서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옹호한다. 인권을 적극적으로 비웃는 이들도 그때의 잔혹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주장한다. 그때와 지금이 같냐는 거다. 그렇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소리를 질러 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덕분에 학교는 학생이 촌지를 줄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해야 하거나, 교사가 새벽까지 야간자율학습 감독과 보충수업을 하고 0교시 출근까지 하다가 과로사❸하지는 않는 곳이 되었다.
교사와 학교의 한계를 인정하기
전교조의 ‘참교육’ 정신이 왜곡되어서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참교육’을 해야 한다고, ‘참교육’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다. ‘참교육’은 누군가가 ‘참된 진리’를 알고 있고 이를 가르쳐야 한다고 전제해야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공교육이라는 것은 무작위의 군중이 모이는 장이다. 교육 현장에 있는 청소년 일반은 나이와 지역만이 공통점인 또래 군중이다. 교사 또한 그렇다. 이들은 직업인이라는 점 이외에는 대체로 공통점이 없다. 교사들이 결함 없는 인간일 수는 없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가치관, 교육관, 교수법이 다를 것이다. 만약 무작위의 인원 31명을 모아 두고 그중 1인에게 통솔을 맡긴다고 하자. 과연 나머지 30명이 그 통솔을 같은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따를까? 그런 기대는 하기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머지 30명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다른 1명을 존경하고 따를 것이라고 기대한다.
청소년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히 청소년이 평등하고 현존하는 인간이라는 선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조건과 변화가 청소년들에게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도, 교사도 살고 있는 사회의 유행과 문제, 오가는 담론 등으로부터 벗어나 ‘참’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일반론이라고 여겨지는 상식이나 기준이 바뀌는 과정은, 그런 상식과 기준에 기반한 교육이 진행될 때 동시대적으로 진행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대에는 ‘참교육’을 외치던 전교조도 체벌 금지를 원칙으로 내걸지 않았을 만큼 당시에 체벌 금지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체벌 금지가 비교적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는 사람들과 함께 바뀌고, 이 시간성은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폭력적 응징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 ‘참교육’이나 웹툰·드라마 〈참교육〉은 본래의 ‘참교육’ 정신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교사가 학생에게 ‘참교육’을 해야 한다는 믿음, 교육이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이끄는 일이라는 생각 자체는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참교육〉이 드러내는 것은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인식일 수 있다.
〈참교육〉이 표현하는 분노가 허황된 것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마치 모든 것을 학교나 교사가 ‘애들을 잘 때려잡으면’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도박장이나 마약 유통에 관한 강력 범죄를 교사의 권한으로 해결할 방법이 애초에 존재하는가? 이는 오히려 학교와 교사가 모든 변수를 책임지라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일은 교사의 권한 확대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교사가 책임져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이 드라마는 교육청이나 학교 관리자가 개입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교권보호국을 만들고 전 특수부대원을 배치해 때려잡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를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참교육〉이 인기를 끄는 와중에 이런 방식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허상의 분노를 실제라고 믿어 버린다면
사람들은 소년과 소년의 범죄에 분노한다. ‘촉법소년’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 줄도 모르면서 화내는 사람들이 늘었다. 드라마 〈참교육〉에서도 촉법소년이라 처벌을 안 받는다는 청소년들이 ‘인터넷 밈(meme)’처럼 등장해 분노를 일으키고 주인공에 의해 제재당한다. 그러나 소년재판의 과정이 얼마나 열악한지, 형사부에서 재판받아야 할 강력 범죄가 그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소년재판부로 이관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과밀 수용이 지나쳐 수감이 불가능해 형량을 낮추는 일까지 일어나는 현실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복수를 위한 액션활극에서 그런 고민은 재미를 낮추는 지난하고 짜증 나는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곳은 픽션 속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응징’ 당하고 난 뒤에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나와 버릴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 응징은 편리하고 통쾌하지만, 그 이후에 그들이 사회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할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참교육〉에서 응징당한 자들은 그 누구도 참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다만 굴복할 뿐이다. 교도소라는 끔찍한 곳에 가고 싶지 않아서, 죄를 외면하고 싶어서. 이것은 참회나 반성이 아니라 단지 눈앞의 공포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그들이 철저한 악인이어야지만 이러한 응징이 가능하니 만들어진 설정이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이들이 현실에서 응징당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그저 ‘재수 없이’ 모욕이나 몰락이 닥쳐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회복 또한 폭력적인 응징에서 오는 잠시의 안도감으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에게도 살아가야만 하는 삶이 존재하고, 가해자가 처참하게 당한다고 해서 그간 그들이 입어 왔던 피해가 물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복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복의 논의도, 이후의 대책도 없는 응징은 방관자의 카타르시스 이외에 무엇도 낳지 않는다.
복수는 통쾌하고 액션은 짜릿하며, 패턴이랄 것도 없이 이어지는 10시간 남짓의 드라마 속 세계는 매우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는 이토록 명백하고 부조리한 악도, 간명하고 빠른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하고 느리며 성가시기 짝이 없는 현실의 충돌과 갈등을 조율해 나가는 것의 연속이다. 안민석 경기도 교육감을 비롯해 다수의 교육감, 정치인이 〈참교육〉을 보고 매우 감명받았다면서, 교권보호국 또는 교육활동보호국을 신설하자고 나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절대 권력자도 아닌 선출직 공무원이 진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다면, 그들부터 10시간짜리 “참교육”이라는 말이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봐야만 하지 않을까.
➊ “안민석이 띄운 ‘교권보호국’… “특수부대 출신 교사 연락 왔다””, 〈경인일보〉, 2026년 6월 17일.
➋ 다만 이때도 단체 기합이나 야만적 구타를 하지 말자는 선에서 그쳤지, 체벌 금지라는 문제의식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이러한 시대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교육’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➌ “고교 교사 보충수업 도중 사망 ‘파문’”, 〈오마이뉴스〉, 2004년 3월 7일.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단,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분들이나 청소년들은 월 회비 납부를 조정하거나 유예할 수 있습니다.)
· 출자금은 최소 '1구좌 2만 원'이며, 약정하신 금액만큼 첫 번째 월 조합비와 함께 출금됩니다.
· 가입서 작성시 ‘상호’에 재직 중인 학교나 회사명 또는 소속을 입력해 주세요.
>>> 교육공동체 벗 가입하기
리뷰
‘참/교육’이라는 환상
- 드라마 〈참교육〉
치리 kellykykim99@gmail.com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청소년운동을 오래 했다.
의도치 않게 해외를 전전하다가,
어쩌다 보니 교육 언저리에서도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솔직히 말해, 〈참교육〉이라는 작품을 인생에서 피해 왔다. 웹툰부터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아마 성토를 멈출 수 없을 거라고 마음속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드라마를 보게 되다니. 인생의 얄궂음을 실감하는 때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제작진들의 필모그라피를 뒤지는 것이었다. 감독도 감독인데, 어떤 작가들이 각색했는지 지난 작품들 리스트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결과는 제법 놀라웠다. 꽤나 굵직한 사회 고발물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메인 작가인 이남규의 대표 각색작 중 하나는 〈송곳〉이 있다. 〈송곳〉을 대표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대사가 있지만,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대사를 꼽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의 최신작 〈참교육〉을 관통하는 대사는 아마도 이것일 테다. “어른이 애들 무서워하면 세상이 망한다.”
이토록 기묘하게 겹치는 대사들 속에서, 그가 고발하는 사회가 누구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두 대사를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꽤나 선명하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두렵지 않은 인간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게 되며, 그리고 아마도 학생(아이)은, 존중받는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통쾌하고도 단순한, 실현 불가능한 정의
드라마에서 다룬 과장된 실제 사건들의 사실관계를 정정하는 일은 이미 나 말고도 많은 비평가들, 그리고 당사자들이 해 오고 있는 일이므로 그것에 너무 힘을 쏟고 싶지는 않다. 물론 드라마 〈참교육〉은 실제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들을 넣으며 매우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해 놓았다. 그러곤 ‘픽션일 뿐’이라며 숨어 버린다. 이것이 비겁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제작자들이 픽션의 언어로 판단을 해 달라고 하니, 그런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나의 감상은 한 문장으로 마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그 무엇보다도, 그냥 재미가 없다.
드라마 〈참교육〉을 만든 작가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한다. 액션과 코미디다. 그들이 연출하는 액션은 화려하고 어떤 슬랩스틱은 웃기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원 패턴이라는 점이다. 〈참교육〉 드라마의 첫 10분의 플롯은 이후 10화 동안 한 화 단위로 반복된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까분다. 그러면 주인공이 나타나서 화려하게 팬다. 열심히 패고, 맞은 사람은 덜덜 떨며 사죄하고, 이후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이러한 도식은 확실한 장점을 가진다. 이야기가 직선적이라서 이해하기가 쉽고, 기승전결 또한 명확하기 때문에 10분 정도의 영상에서 가장 빠르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슬랩스틱도 마찬가지다. 이제 다들 이게 왜 재미가 없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10분짜리 플롯을 10화로 늘려 놓으면 보통 재미가 없다.
〈참교육〉은 단순하고 간명한 패턴에 큰 변주도 주지 않는다. 물론 배우들의 매력과 연기에는 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거나 액션을 해내는 배우들이 아무리 열심히 연기를 해도 플롯의 지루함을 이겨 내기란 힘든 일이다.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싶지 않지만, 픽션에서 재미란 얼마나 큰 요소인가. 그런데 〈참교육〉이 재미있게 잘 만든 드라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슷한 사적 제재물인 〈열혈사제〉를 보라. 등장하는 영화 오마주는 셀 수도 없고, 시즌 2에서는 갑자기 뮤지컬도 한다. 이는 직선적인 플롯을 극복하기 위한 변주다. 그런데 〈참교육〉에는 이런 것도 부족하다. 2화에서는 영화 〈친구〉가 연상되는 패싸움 액션이나 꽤 그럴듯한 카 체이싱이라도 하지만, 이후에는 그마저도 없다.
이런 한계에도 〈참교육〉은 명백히 흥행에 성공했다. 화제성이든, 조회 수든. 그러나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교육〉의 유행은 다른 사적 제재물, 〈열혈사제〉, 〈모범택시〉, 〈김부장〉 등이 유행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복수와 폭력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이런 장르는 미국식 히어로물의 플롯에 충실히 따른다. 멋진 주인공과 코미디, 대의처럼 보이는, 현실에도 산재한 거대한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이나 ‘생각의 여지’를 최대한 줄여 버리고, 선의의 주인공이 행하는 폭력-액션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이 영상을 보는 동안 관객에게는 그 어떠한 고민을 할 시간도, 여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액션을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참, 한국에서는 이런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필수 설정이 있는데, 바로 (전직) 국정원 요원, 북파공작원, 특수부대원이다. 〈참교육〉도 주인공이 전직 특수부대원이라는 설정이다. 안민석 경기도 교육감이 ‘교권보호국’이라는 것을 논의하는 중이라면서, 특수부대 출신들에게 연락이 왔다고 발언한 것❶도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조금만 더 파고들어 보자. 히어로물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과 유사한 환경을 가정한다. 또한 무력을 통해 정의나 목적을 달성하므로, 이러한 폭력이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인 존재, 설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는 절대적인 선임과 동시에 엄청난 권력이나 무력을 가진 신적인 설정이어야 한다. 예컨대 마블 시리즈의 쉴드(S.H.I.E.L.D.) 같은 기관이나, 아니면 아예 슈퍼맨 같은 엄청난 초능력, 배트맨 같은 엄청난 재력 말이다. ‘그냥 사람을 잘 팬다’라는 정도의 능력으로만 복수물이 가능하게 하려면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외부의 권력을 빌려오는 것이다.
〈열혈사제〉에서 그것은 교황으로부터의 독자적 수사 허락이었다. 〈참교육〉에서 그러한 존재는 아마 이성민이 연기한 교육부 장관과, 교권보호국이라는 공적 제재 기관으로 보인다. 이 세계관에서 경찰이나 검찰 같은 다른 공권력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참교육〉에서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학교에서 군림하는 학생을 응징하기 위해,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켜 국회의원을 실각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여당 중앙부의 권력이나 집단적인 항의도 이 사람의 의지나 영향력을 꺾을 수 없다.
문제는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교육부 장관이 실제로 이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교육감은 더더욱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참교육〉이 가능한 이유는 교육부 장관이 이 픽션 속에서 주인공의 ‘날뛸 곳’을 만들어 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이다. 안민석의 바람과는 달리, 그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실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권리를 비웃는 이들
〈참교육〉 내에서 그려지는 학생 간 폭력, 학생에 의한 교사 대상 폭력, 그 이외의 ‘선의의 교사와 학생’을 괴롭히는 폭력을 가능케 하는 권력 차는 엄밀히 따지자면 학교 바깥에서 온다. 드라마 속 ‘빌런’들의 권력은 상당 부분 사회 경제적 계급에 달려 있다.
각 화별로 문제가 되는 사건들을 보자. 1화에서 날뛰던 학생은 중진 국회의원의 자녀였다. 2화의 학생들은 조직폭력배들과 관련이 있었다. 3화에서는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익명성의 군중을 뒤에 업은 학생이었다. 4, 5화는 아예 학생 간 폭력의 문제도 아니다. 4화에서 문제가 된 건 자기 자녀들의 성적을 조작하기 위한 고위직 교사의 성적 조작 시도였고, 5화의 민원 제기 학부모는 엄밀히 따지자면 학교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학교라는 공간 내에 존재하는 인물도 아니다. 8화는 학생에게 동의 없이 약물을 투약하는 학대 부모의 이야기이며, 6, 7, 9, 10화에서 다루어지는 도박, 마약, 조직적 범죄는 애초에 교육 문제와는 별개의 강력 범죄 사건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실은 아예 카테고리가 다르다. 여기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란, 관련자들이 청소년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조차 아니다. 이러한 ‘악질적이고, 제재 불가능한’ 상태로 보이는 일화들을 한데 묶어 놓은 이유는 그저 작품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학생조차 제재 못 하는 비겁한 선생들’과 ‘반드시 제재받아야만 하는 악인’을 그리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러면 이제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이 드라마는 애초에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지 않나?
드라마 〈참교육〉 속에서 ‘시위하는 사람들’과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악역에 동조하거나, 악역에 면죄부를 주는 사람들인 것처럼만 그려진다. 돌아가는 세상 물정도 모르면서 이상적인 소리나 한다는 양이다. 〈참교육〉의 설정과 플롯의 배경에 깔린 관점과 태도는 사실 이와 같은 비웃음과 냉소다. 그러나 신적인 존재의 허락 아래 폭력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전두환 정권 시절 ‘불량배를 소탕하자’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교련’ 시간과 ‘삼청교육대’가 있었던 시절에는 외부 권력을 이용한 학생 간의 폭력이 없었나? 그를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돕는 교사들이 없었나? 새 학기에 촌지를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가난하여 촌지를 바치지 않으면 교사 주도의 따돌림이 있어도 감내해야 했던 것이 당연하던 시절에 일어났던 것은 폭력이 아니었나? 그때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됐으니까, 그때의 교육이 정당했다고 말할 셈인가?
〈참교육〉 2화에서 다루어진 장면의 모티브가 된 것은 영화 〈친구〉의 배경이 되는 시대일 것이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대사와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교사는 학생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따귀로 그 누구도 교육되지 않았다. 〈친구〉의 인물들은 그저 분노에 차 기억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곤 하지만 학교에서 ‘가혹한 체벌’이 자취를 감춘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시절에도 학교와 교육의 문제는 끊임없이 지적되고 비판받았다. 드라마 〈참교육〉의 결론은 사실과 많이 어긋나 있는 것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하면서 ‘참교육’이라는 표어를 내세웠을 때, 그들은 촌지를 받지 말고, 학생을 인격적으로 훈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❷ 전교조를 비난해 온 이들은 이 구호를 빼앗아 와서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옹호한다. 인권을 적극적으로 비웃는 이들도 그때의 잔혹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주장한다. 그때와 지금이 같냐는 거다. 그렇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소리를 질러 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덕분에 학교는 학생이 촌지를 줄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해야 하거나, 교사가 새벽까지 야간자율학습 감독과 보충수업을 하고 0교시 출근까지 하다가 과로사❸하지는 않는 곳이 되었다.
교사와 학교의 한계를 인정하기
전교조의 ‘참교육’ 정신이 왜곡되어서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참교육’을 해야 한다고, ‘참교육’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다. ‘참교육’은 누군가가 ‘참된 진리’를 알고 있고 이를 가르쳐야 한다고 전제해야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공교육이라는 것은 무작위의 군중이 모이는 장이다. 교육 현장에 있는 청소년 일반은 나이와 지역만이 공통점인 또래 군중이다. 교사 또한 그렇다. 이들은 직업인이라는 점 이외에는 대체로 공통점이 없다. 교사들이 결함 없는 인간일 수는 없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가치관, 교육관, 교수법이 다를 것이다. 만약 무작위의 인원 31명을 모아 두고 그중 1인에게 통솔을 맡긴다고 하자. 과연 나머지 30명이 그 통솔을 같은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따를까? 그런 기대는 하기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머지 30명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다른 1명을 존경하고 따를 것이라고 기대한다.
청소년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히 청소년이 평등하고 현존하는 인간이라는 선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조건과 변화가 청소년들에게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도, 교사도 살고 있는 사회의 유행과 문제, 오가는 담론 등으로부터 벗어나 ‘참’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일반론이라고 여겨지는 상식이나 기준이 바뀌는 과정은, 그런 상식과 기준에 기반한 교육이 진행될 때 동시대적으로 진행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대에는 ‘참교육’을 외치던 전교조도 체벌 금지를 원칙으로 내걸지 않았을 만큼 당시에 체벌 금지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체벌 금지가 비교적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는 사람들과 함께 바뀌고, 이 시간성은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폭력적 응징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 ‘참교육’이나 웹툰·드라마 〈참교육〉은 본래의 ‘참교육’ 정신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교사가 학생에게 ‘참교육’을 해야 한다는 믿음, 교육이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이끄는 일이라는 생각 자체는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참교육〉이 드러내는 것은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인식일 수 있다.
〈참교육〉이 표현하는 분노가 허황된 것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마치 모든 것을 학교나 교사가 ‘애들을 잘 때려잡으면’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도박장이나 마약 유통에 관한 강력 범죄를 교사의 권한으로 해결할 방법이 애초에 존재하는가? 이는 오히려 학교와 교사가 모든 변수를 책임지라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일은 교사의 권한 확대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교사가 책임져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이 드라마는 교육청이나 학교 관리자가 개입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교권보호국을 만들고 전 특수부대원을 배치해 때려잡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를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참교육〉이 인기를 끄는 와중에 이런 방식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허상의 분노를 실제라고 믿어 버린다면
사람들은 소년과 소년의 범죄에 분노한다. ‘촉법소년’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 줄도 모르면서 화내는 사람들이 늘었다. 드라마 〈참교육〉에서도 촉법소년이라 처벌을 안 받는다는 청소년들이 ‘인터넷 밈(meme)’처럼 등장해 분노를 일으키고 주인공에 의해 제재당한다. 그러나 소년재판의 과정이 얼마나 열악한지, 형사부에서 재판받아야 할 강력 범죄가 그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소년재판부로 이관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과밀 수용이 지나쳐 수감이 불가능해 형량을 낮추는 일까지 일어나는 현실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복수를 위한 액션활극에서 그런 고민은 재미를 낮추는 지난하고 짜증 나는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곳은 픽션 속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응징’ 당하고 난 뒤에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나와 버릴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 응징은 편리하고 통쾌하지만, 그 이후에 그들이 사회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할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참교육〉에서 응징당한 자들은 그 누구도 참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다만 굴복할 뿐이다. 교도소라는 끔찍한 곳에 가고 싶지 않아서, 죄를 외면하고 싶어서. 이것은 참회나 반성이 아니라 단지 눈앞의 공포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그들이 철저한 악인이어야지만 이러한 응징이 가능하니 만들어진 설정이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이들이 현실에서 응징당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그저 ‘재수 없이’ 모욕이나 몰락이 닥쳐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회복 또한 폭력적인 응징에서 오는 잠시의 안도감으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에게도 살아가야만 하는 삶이 존재하고, 가해자가 처참하게 당한다고 해서 그간 그들이 입어 왔던 피해가 물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복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복의 논의도, 이후의 대책도 없는 응징은 방관자의 카타르시스 이외에 무엇도 낳지 않는다.
복수는 통쾌하고 액션은 짜릿하며, 패턴이랄 것도 없이 이어지는 10시간 남짓의 드라마 속 세계는 매우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는 이토록 명백하고 부조리한 악도, 간명하고 빠른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하고 느리며 성가시기 짝이 없는 현실의 충돌과 갈등을 조율해 나가는 것의 연속이다. 안민석 경기도 교육감을 비롯해 다수의 교육감, 정치인이 〈참교육〉을 보고 매우 감명받았다면서, 교권보호국 또는 교육활동보호국을 신설하자고 나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절대 권력자도 아닌 선출직 공무원이 진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다면, 그들부터 10시간짜리 “참교육”이라는 말이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봐야만 하지 않을까.
➊ “안민석이 띄운 ‘교권보호국’… “특수부대 출신 교사 연락 왔다””, 〈경인일보〉, 2026년 6월 17일.
➋ 다만 이때도 단체 기합이나 야만적 구타를 하지 말자는 선에서 그쳤지, 체벌 금지라는 문제의식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이러한 시대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교육’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➌ “고교 교사 보충수업 도중 사망 ‘파문’”, 〈오마이뉴스〉, 2004년 3월 7일.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단,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분들이나 청소년들은 월 회비 납부를 조정하거나 유예할 수 있습니다.)
· 출자금은 최소 '1구좌 2만 원'이며, 약정하신 금액만큼 첫 번째 월 조합비와 함께 출금됩니다.
· 가입서 작성시 ‘상호’에 재직 중인 학교나 회사명 또는 소속을 입력해 주세요.
>>> 교육공동체 벗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