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기획] 코로나 시대, 왜 학교 텃밭은 빛이 나는가 (강주희)

기획 / 교육농, 그리고 전환의 교육학

코로나 시대, 왜 학교 텃밭은 빛이 나는가


강주희 1998hssh@hanmail.net

서울 우장초 교사


코로나19 재난에서 학교 텃밭은 어떤 의미를 새롭게 더해 주었을까? 외출이 금지되었다. 기후 위기 상황에서 인류는 새로운 질병, 감염병 위험에 처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학생들이 가장 가까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이 학교 텃밭이었고 그래서 텃밭이 빛났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전에는 학교 텃밭이 빛나지 않았는가.


홀짝 등교일에 씨앗을 심었다. 이때 심은 씨앗은 그 다음 주에 새싹으로 만났다. 나와 학생들은 텃밭으로 함께 땀 흘리고 이루어 내는 동지로 연결되고, 그 동질감은 다시 학생들의 부모와 이어진다. 텃밭은 작물만 짓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짓는다. 더 강조하자면, 학교 텃밭에서 작물뿐만 아니라 ‘관계’를 지을 때 비로소 ‘학교’ 텃밭으로의 위상이 선다고 생각한다.



학교 텃밭은 늘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학교 텃밭은 코로나19 이전이나 이후나 늘 빛나고 있다. 학생들은 늘 교실 밖 텃밭에 나가기를 원했고, 거기서 돋아나고 흐드러지는 작물들을 돌보기 좋아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도 텃밭에 들러 한 바퀴 둘러보고, 너도나도 물 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열매라도 수확하는 날이면 가게에서 충분히 보고 구할 수 있는 흔한 채소인데도 탄성을 자아내며 귀하게 품었다. 제 키만큼 자라고 열매를 맺는 작물을 목격한 학생들은 눈꼽만큼 작은 씨앗이 펼치는 계절의 변화와 풍경을 상상할 줄 알았고, 씨앗을 심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학교 급식을 먹다가 나오는 갖가지 과일의 씨앗을 우물거리며 골라내어 집으로 가져갔다. 우유 팩을 잘라 만든 작은 화분에 심은 씨앗에서 이제나저제나 싹이 나올까, 쉬는 시간마다 턱을 괴고 들여다보고 햇볕이 부족한가 싶으면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켜 주었다. 이름을 붙여 주라는 수업이 없어도 학생들은 자신의 씨앗에 이름을 지어 부르고 돌보며 행복해했다. 학교 텃밭은 그렇게 학생들만큼이나 늘 빛이 났다. 오히려 코로나19로 텃밭에 나가는 시간은 (빡빡한 수업 시수의 흐름 탓에) 눈치를 봐야 하게 되고 짧은 시간으로 쪼개진 바람에 학생들이 누렸을 태양과 바람, 그늘, 풀과 벌레들, 갖가지 작물과 흙이 어우러지며 풍기는 향기들을 번번이 놓쳤다. 교사들은 코로나19로 심각해지는 학업 성취(가 무엇인지 20년 차가 넘은 지금도 아직 모르겠지만) 문제에 매몰되어 있다. 바이러스가 죽고 사는 문제를 가름하니 방역에 치중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방역과 나란히 지구의 사이클을, 생태의 흐름을 함께 고민하면 좋으련만. 교실 내에서 가능한 활동만을 찾다 보니 읽고 쓰고 셈하고 그리고 색칠하고 또 읽고 쓰고 셈한다. 조금 움직이려고 하면 ‘그대로 멈춰라!’


방학 전에는 양배추를 수확했다. 우리보다 벌레가 더많이 먹을까 싶던 걱정이 무색하게 큼지막이 무척잘 자랐다. 텃밭이 교사와 학생들에 선사하는 무수한 이야깃거리는 텃밭이 무한한 연결성과 확장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텃밭을 짓는’ 교사에게 코로나19 초기는 다양한 씨앗과 작물을 심고 돌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매년 학생들과 몇 가지 씨앗을 나누어 모종을 키워 내는 작업을 하기는 했어도 올해처럼 텃밭 가득 다양한 작물을 키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난겨울 뿌리고 심어 둔 튤립과 히아신스, 무스카리, 밀과 보리를 시작으로 봄부터 딸기, 토마토, 고추, 가지, 상추류, 옥수수와 같은 학교 텃밭 기본 작물에 스냅 피, 아주까리, 오크라, 단호박, 조선호박, 참외, 양배추, 쑥갓, 들깨, 참깨, 케일, 수세미, 토란까지 양은 많지 않지만 간단히 수확하여 맛보고 내년을 위해 채종할 만큼 심었다. 여기에 고수, 딜, 두 종류의 라벤더, 서너 가지 민트류, 오레가노, 루꼴라, 레몬 타임, 레몬 버베나, 로즈마리, 구문초, 장미허브, 체리세이지처럼 향기 나는 풀들과 목화, 금화규, 백일홍, 봉선화, 수레국화, 꽃양귀비, 달맞이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카렌듈라, 카모마일 등과 같은 꽃도 함께 심고 즐겼다. 본디 교사들의 주차장 부지였던,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학교 건물 뒤에 위치하고 있는 텃밭에 교사들이 자주, 많이 발걸음을 했다. 등교 수업이 없는 날 아침, 혹은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꼭 발걸음을 하는, 텃밭 앞에서 작물에 대한 이런저런 담소를 주고받는 교사들이 등장했다. 학교 뒤에 있는 텃밭이라 작물의 관리(죽지 않을 만큼 당번을 정해 물을 주는 정도) 이외에는 교사들의 관심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텃밭의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여유라는 깨달음을 준 시기이기도 하다.


개학 직후 등교 중지 전까지 몇 가지 활동을 할수 있었다. 지금 멀어지는 것이 서로를 떼어 내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자리를 연결 짓는 지점이 절실하다.



이렇게 다양한 작물들이 학생들과 함께라면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 교사‘농부’로서는 밭을 디자인하고 작물을 심고 돌보는 시간을 준 내면의 집중이 나쁘지 않았지만 ‘교사’농부로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학교에서 텃밭지기를 하는 이유가 학생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인데, 학생들이 없으면 ‘교육농’에 큰 구멍이 생기는 셈이니. 지난해까지는 매일같이 학생들과 텃밭에 나가는 ‘생태 흘려듣기’를 했다면 올해는 온라인 강좌를 통해 ‘지속 가능성’과 ‘기후 위기’에 대한 흘려듣기를 진행했다. 첨단 장치와 시설을 빠른 시간에 갖추어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은 비대면 온라인 강좌를 통해 잊을 만하면 등장시킨 ‘생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생태적 전달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되고 그 기간이 길어지던 지난봄, 전염의 가능성 때문에 실내로의 진입이 우려된다면 요일을 정해서 4~5명씩, 하루 1~2시간씩 야외에서 만나는 걸 허락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돗자리 깔고 넓고 둥글게 앉아서 이야기 나누고 텃밭의 이랑들을 산책하고 헤어지는 것, 참 낭만적인 상상을 잠깐 했더랬다. 이런 작은 희망 사항에는 요사이 끊이지 않는 ‘코로나19 이후의 교육과 학교’ 시스템의 문제,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동의 문제가 동반된다. 시멘트가 덮이지 않은 너른 땅을 가진 학교에서조차 코로나19에 맞설 공간으로 학교 농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보면 좀 더 지구가 뜨거워지고 기후 위기가 코로나19처럼 일상을 위협할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그럼에도 관계가 자란다


“친구들과 말하기는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놀이는 더더욱 안 됩니다. 훌라후프를 허리에 돌리는 만큼은 늘 거리 두기를 하고, 친구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의 말처럼 코로나19는 2020년의 일상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흔한 일상이던 학교생활이 얼어붙었다. 바이러스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두기를 ‘안전’과 ‘배려’의 이름으로 공식화했다. 단비 같은 하루 등교에도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침묵의 시간을 강요당한다. 공동체의 규칙과 질서를 이참에 제대로 훈련하게 되었다며 반기는 목소리도 들린다. 학교는 여전히 그렇게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둡다. 하지만 학교의 생활보다도 더 경직된 일상 덕분에 하루짜리 얼어붙은 학교 일과도 환영받는다. 적어도 혼자가 아니다. ‘관계’가 존재한다. 텃밭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그물처럼 이어지고 얽힌다. 나는 교사이기에 텃밭에 나갈 시간을 얻고자, 교과들과 연결 짓는다. 때로는 텍스트와 이어지고 때로는 주제와 잇는다. 대부분은 창체 시수로 제한되지만 최대한 ‘지속 가능 발전’에 대한 명제를 텃밭과 연결시켜 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학생들은 국어 시간에 시를 지으면서 텃밭과 연결되고 노래를 부르면서 텃밭과 이어진다. 씨앗을 털고 씨앗의 개수를 세고 작물의 무게를 재면서 수학과 연결된다. 집으로 가져간 수확물을 요리해 먹는 일로 학교와 집이 연결되고 요리를 담당하는 가족과 연결된다. 나와 학생들은 텃밭으로 함께 땀 흘리고 이루어 내는 동지로 연결되고 그 동질감은 다시 학생들의 가족과 이어진다. 텃밭은 작물만 짓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짓는다. 더 강조하자면, 학교 텃밭에서 작물뿐만 아니라 ‘관계’를 지을 때 비로소 ‘학교’ 텃밭으로서 위상이 선다고 생각한다.


저마다의 화분에 완두콩을 심었다. 코로나19가 일상을 지배하고 나의 수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도 나는 학생들과 우주를 개척하련다.



씨앗 한 톨을 한 움큼의 흙에 심을 때 학생들은 햇빛과 물의 관계를 알게 된다.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 적당히 주면서 싹이 트는 광경을 목격한다. 본잎이 돋아날 즈음 창가의 햇볕으로 충분히 키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가늘고 애리애리하게 웃자라기만 하는 나의 식물을 마주하면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질문 혹은 SOS 요청이 시작된다. 그러면 나는 ‘자연(텃밭)으로 데려오라’며 대단한 처방 내지는 큰 자비(?)의 손길을 내밀고,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조금 더 내밀해진다. 텃밭으로 옮긴 식물이 텃밭에 자리 잡은 작물이 되는 순간 연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나 쉼 없이 쏟아지는 비가 그들의 놀이를 방해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급식을 먹다가 불현듯 쌀 한 톨 한 톨이 땅-비-바람-해, 그리고 사람의 노력이 이룩해 낸 위대한 업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그렇게 텃밭은 사람살이에 얽히고설키며 서로 기대어 있는 관계들을 이야기할 때 빛을 발한다.


글씨를 깨끗하게 쓰고 수학을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든가, 독후감을 써도 비슷비슷 잘 해내는 그룹들. 저학년에서는 이 그룹이 놀이도 주도한다. 교실 속에서는 별다른 것 없이 잘 이루어지던 것들이 텃밭에서는 재구성된다. 흙들이 잔뜩 있는, 곤충이 튀어나온다거나 모기나 벌이 웽웽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공간에서는 활약하는 주인공들이 달라진다. 텃밭에서는 벌레에 질겁하는 녀석을 위해 앙숙이던 짝꿍이 의연하게 처리해 주고 교실 수업에서 앉은 자세, 집중 시간, 글씨 모양 따위로 구박을 받던 녀석이 지주대를 척척 뽑아내어 한 자리에 차근차근 정리해 놓는 우등생으로 친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개는 교실에서 과업을 야무지게 해내는 학생들이 텃밭에서도 야무지게 해내기도 하지만 교실에서의 무게 중심과 텃밭에서의 관계의 중심은 분명 달라진다. 교실에서 말 한마디 없던 친구가 탄성을 지르고 교사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한 번 더 움직이기를 원한다! 교사와 주고받는 질문의 횟수가 달라지면서 학생과 교사 그 이상의 ‘케미’가 이루어진다. 교과 과업을 성실하게 해내는 학생들은 대개 텃밭 과업도 성실하게 해내지만 안타깝게도 성실함을 넘어서는 감탄이나 감동은 상대적으로 낮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나 생태적 환경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이 가슴보다 머리(지식과 정보)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고, 세련되지 않아도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지닌 학생들, 행동의 언어로 뛰어드는 친구들을 뛰어넘지 못한다. 텃밭에서 학생들은 그렇게 다채롭게 빛난다.


우장초 학교 텃밭 전경. 사진에서 왼쪽 밭은 다른 분들이 하는 곳이다. 검은 비닐을 씌워 풀이 못 자라게 하는 방식을 쓰는데, 교육농과는 방식이 다르다. 오른쪽 틀밭 쪽부터 담장까지가 학생들과 함께 하는 밭. 본디 교사들의 주차장 부지여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학교 건물 뒤에 위치하고 있는 텃밭에 교사들이 자주, 많이 발걸음을 했다.



서로의 자리를 연결 짓는다


3주간의 여름 방학을 마치고 홀짝 등교의 첫날인 오늘 우리 학년은 다 같이 가을 밭에 배추 모종을 심었다. 오늘을 위해 물론 개학 일주일 전부터 아니, 열흘 전부터 출근 아닌 출근을 했고 주무관님들의 협조가 아닌 협력을 받기 위해 적잖이 노력도 했다. 그래서 ‘강 선생님, 쉬엄쉬엄 하세요. 그러다 큰일 나요’라며 챙김을 받는 관계의 진일보가 있었다. 그런데 난 왜 그 노력을 동학년 선생님들과는 하지 않았을까. 지난 학교에서도 더운 오후 작물의 곁순을 따거나 지주 끈을 묶어 줄 때면 말벗을 해 주던 선배 교사나 과학 자료실 담당 교사, 학교 보안관 등이 나의 농사 벗이었다. 이번 학교에서도 여사님들, 숙직 기사님들, 급식실 조리 종사 여사님들까지 말벗 스펙트럼은 넓어졌지만 동료 교사들의 벽은 여전히 높게 느껴진다. 올봄 처음으로 키운 탐스러운 튤립들 덕에 여러 교사들의 텃밭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유도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코로나19 덕에 창의적 체험 활동의 ‘자율과 동아리’ 활동 시수를 생태·환경교육으로, 교원학습공동체 활동을 생태로 전환하게 되어 160여 명의 학생들이 생태 흘려듣기와 집중 듣기를 체계적(?)으로 받게 되었다는 점이 상당히 고무적이다(늘 텃밭 수업은 우리 반 학생들 혹은 내가 맡은 동아리에 한정되었다). 코로나19로 일상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무엇이든 혼자서만 해야 하는 개인 학습으로 강제되다 보니 무언가를 함께 도모할 때 빛나던 공동의 학습들(모둠, 공동체, 협력)이 제거된 지식 전달 그리고 학기 종료와 이수 평가를 위한 수업만 남았다. 개인의 학습과 실행이 협력으로, 협력들이 연대의 에너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방법이 필요하다. 나의 안전, 너의 안전, 우리의 안위를 위해 지금 멀어지는 것이 서로를 떼어 내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자리를 연결 짓는 지점이 절실하다. 그 방법이 ‘학교 텃밭’, ‘생태적 전환’이라고 목놓아 외친다면 비약일까? 아니, 도약이다!


텃밭이 교사와 학생들에 선사하는 무수한 이야깃거리는 텃밭이 무한한 연결성과 확장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어떤 흐름과 과정으로 작물이 키워지고 이동되는지, 작물을 다루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텃밭의 작물을 식탁 위의 요리로 연결시키는 이들의 직업, 지역, 사회적 지위는 어떠한지, 작물을 저장하는 방식이나 상품화하는 과정에서의 노동과 가치, 나아가 푸드마일 그리고 지구 온난화, 기후 위기까지! 텃밭은 그 끝을 알 수 없게 연결되고 확장되다가 폭발하고 새롭게 이어지고 다시 넓어지는 거대한 우주와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일, 교육이라고들 한다. 텃밭이야말로 그런 교육을 만들 수 있는 장이고, 학교에서 교사를 만나고 학생들과 수업(교육과정)을 품을 때 그 빛은 찬란해질 것이다.


학생들이 웃는다.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을 던진다. 무언가(대개는 지네)를 발견하고 우루루 몰려가 머리를 맞대고 그 순간 무아지경의 일체화가 된다. 뜨거운 태양이 빛나고 학생들이 빛난다. 당장 2학기에도 코로나19가 일상을 지배하고 나의 수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도 가을배추를 심으면서 우주를 개척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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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