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호[특집] 교육은 돌봄이다 (정용주)

특집/돌봄과 교육 사이

교육은 돌봄이다


정용주 edcom234@gmail.com

본지 편집자문위원, 초등 교사


돌봄과 배움이 불가능한 학교


배움의 목적은 스스로를 돌보며 자립하는 삶을 사는 동시에, 시민으로서 서로를 돌보며 우정과 연대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데 있다. 따라서 돌봄은 배움의 전제이며 배움 그 자체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는 돌봄과 배움 모두가 불가능한 공간이 된 지 오래이다.


조한혜정은 2008년 《중등 우리교육》에 〈돌봄과 배움이 가능한 작은 학교 만들기〉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돌봄과 배움이 불가능한 학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한혜정의 진단은 보다 근본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교류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체제는 이러한 존재의 토대를 파괴한다. 공동의 목표도 최소한의 보살핌도 사라진 원자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는 이러한 근대 체제의 핵심을 이룬다는 게 조한혜정의 문제의식이다.


사랑과 우정, 신뢰에 바탕을 둔 호혜적 관계가 상실된 학교에서 돌봄은 관리로 변한다. 돌봄이 관리로 변하면서 학교에서 스스로 서는 연습과 서로를 돌보는 우정과 환대는 사라지고 서열과 경쟁만 남았다. 돌봄이 사라지고 관리만 남은 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성취로 전환된다. 이제 개별화된 인간들의 자기 계발과 무한 경쟁만이 학교에 남게 되었다. 돌봄이 배제된 배움에서 성취만 남게 되면서 수업을 보는 관점도 변했다. 학습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디에 배움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있는지를 보고 배움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성찰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취 기준을 근거로 학습 목표에 도달했는가를 보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작은학교와 혁신학교 : 돌봄과 배움이 가능한 학교 만들기 실천


2000년대 중반, 교사의 자발성과 동료성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된 작은학교운동은 고도로 관리·기획되는 근대적 학교 체제에 작지만 커다란 균열을 냈다. 학교의 규모를 작게 유지하고 학교 운영에서 자율성이 핵심이 되면서 학교는 인간적 상호작용이 보장되는 공간이 되었다. 관리와 성취만 남은 학교 공간은 돌봄과 배움이 가능한 공간으로 바뀌었고, 지침, 명령에 의한 운영은 활발한 상호작용에 의한 자율 운영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학습자 주도성과 협력이 동시에 활성화되었으며, 생태와 노작, 놀이가 교육과정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배움과 돌봄을 학교에서 마을로 확장시켜 나갔다.


작은학교운동은 경기도에서 진보 교육감의 당선과 함께 혁신학교 정책으로 이어졌다. 혁신학교운동은 학교의 담 안에 멈추지 않고 마을 그리고 보다 큰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마을교육공동체운동으로 확장되었다. 혁신학교의 실천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돌보는 과정, 자신을 돌보며 주도성을 발휘해 가는 과정, 그리고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배움의 과정이 전면화되었고, 학생의 성장을 우리 모두 오랜 시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혁신학교의 이러한 실천은 조한혜정이 말한 돌봄과 배움이 가능한 학교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시도였다.


돌봄과 배움이 가능한 학교라는 지향은 국내의 작은학교운동과 혁신학교 사례에 국한되지 않고 미래 교육의 비전과도 결을 같이한다. 미래 사회는 유발 하라리의 진단처럼 오직 변화만이 상수이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는 이해와 관점이 증식하는 가운데 학습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바넷은 이러한 현상을 초복잡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진단하면서, 미래에는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학습 자체가 학습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넷은 이러한 불확실성의 조건하에서 교육은 인식론적인 것으로부터 존재론적인 것으로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진단은 전통적인 지식 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대안으로서 최근 국내외적으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역량 기반 교육과정 개혁의 흐름과 상응한다. 바넷이 말한 교육의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은 지식의 전달이나 습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무엇을 아는가?’,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해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작은학교와 혁신학교의 실천과 같은 흐름 속에 있다.


교육이 존재론적 관점으로 이동하고 결과로서 지식 습득을 넘어 알아 가는 과정이 중심이 된다면, 배움의 전 과정에서 돌봄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나라는 존재는 타자와 맺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타자 없이 주체가 되는 것, 내 행위만을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체가 되는 과정은 나의 수동성과 취약성을 승인하고 서로의 조건을 돌보며 상호 책임지는 관계 맺기의 과정이다. 이것은 돌봄이 주체성 형성과 배움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배움 역시 상호성을 토대로 무엇인가를 알아 가는 과정이다. 돌봄과 연결된 배움의 과정은 타자를 대상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소유’와 ‘정복’을 넘어선다. 나를 돌보는 것이 서로를 돌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론에 기반한 학습은 각자가 소유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를 돌보고 대화하는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작은학교와 혁신학교의 실천은 교육의 존재론적 전환, 과정으로서의 학습, 사회적 존재로서 대화를 촉진하며 불확실한 초복잡성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학생들이 기를 수 있도록 하는, 배움과 돌봄이 가능한 학교 만들기이다.



의존의 정상성과 돌봄의 정치적 의미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이를 기르는 많은 부모들이 추구하는 목표이자, 장애인, 노인, 아동 등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책들의 지향점이다. 동시에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스로 태어나 출생과 동시에 직업을 얻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며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관 속으로 사라지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성인기에 이를 때까지 상당한 기간, 아니 평생에 걸쳐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측면에서 타인으로부터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돌봄은 모든 인간의 생애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돌봄의 문제를 정의와 형평성의 문제로 인식하며 롤스의 계약 이론을 재검토한다. 롤스의 계약 이론은 정의를 위한 기획이지만 동시에 부정의를 생산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사회 계약이 자유로운 인간들 간의 합의에 기초하여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에 롤스의 사회 계약에서 계약 당사자들은 완전히 협력이 가능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재화에 대한 욕구를 둘러싸고 경쟁할 수 있는 성인으로 가정된다. 그래서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돌봄에서 의존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롤스의 정의론에서 배제하거나 주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누스바움이 롤스의 사회 계약에 대한 아이디어를 재검토한 이유는 실제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착취되지 않는 사회, 모든 사람들이 타인과의 평등 속에서 좋은 삶의 기회를 제공받고 인간 그 자체로서 존중받는 사회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에게 돌봄은 시민으로서 성장을 위한 근본 토대이며 인권의 문제이다. 누스바움은 돌봄을 핵심으로 하여 인간 기능(human functioning)과 역량(capabilities) 개념에 대해 접근하면서 시민들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역량을 창조할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누스바움에게서 역량은 이제 개인이 성취해야 할 개념을 넘어 공동체가 시민으로서 역량을 창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물질적,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전환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통의 기반 위에서만 시민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고 삶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누스바움에게 돌봄은 인간과 사회, 정치공동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가치이며 배움을 통해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하기 위한 토대이다.


돌봄의 개념을 좀 더 확장시키면 사회는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개인들의 집합이나 이들 간 계약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 간의 다양한 관계의 망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돌봄이 필요한 취약한 사람과 그에게 돌봄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 간의,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돌봄 관계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상호 관심, 사회적 연결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춧돌이 된다. 또한 돌봄은 정치공동체의 인적 구성원을 지속적으로 충원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정치공동체 차원에서도 불가피한 구성적 가치가 된다. 따라서 돌봄은 가정이나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와 정치공동체의 유지와 구성에 필수불가결한 공적 가치이고, 이러한 돌봄의 가치를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사를 포함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유된 책임이 요구된다.


보다 근본적으로 학습은 돌봄과 맞닿아 있다. 넬 나딩스는 학습의 동기는 애정과 존경이 있는 관계 속에서 상대를 즐겁게 하려는 돌봄받는 자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나딩스의 말을 음미해 보면 효율과 능률과 경쟁의 논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학교, 성취가 지배하는 학교에서는 더 이상 배움이 일어날 수 없다.



정책으로서 돌봄과 혁신교육운동의 자기 부정


이렇게 돌봄 관계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상호 관심, 사회적 연결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춧돌이며, 사회와 정치공동체의 유지와 구성에 필수불가결한 공적 가치이다. 하지만 우리는 돌봄을 교육으로부터 분리해 온종일 돌봄, 초등 방과 후 돌봄, 긴급 돌봄과 같은 정책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돌봄의 가치를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맡을 것이냐’ 하는 핑퐁 게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이 ‘학교의 교육적 기능에 비추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의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학교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돌봄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공유하고 책임을 나눌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교육과 돌봄은 다르다’, ‘돌봄을 학교가 아닌 지방 정부가, 더 나아가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시키는 것은 돌봄을 주고받으며 의존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시키거나 주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돌봄을 배움과 분리하게 됨으로써 혁신학교가 구현하려고 하는 학교 민주주의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학교 민주주의를 학교 문화, 학교 제도, 교육과정 등 학교의 모든 영역에서 ‘학교 자치’와 ‘민주시민교육’이 보장되는 과정 일체라고 정의한다면 학교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시민으로서 참여를 보장받는 ‘함께 돌봄’이라는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더 짚어 보아야 할 점은 학교가 돌봄 정책을 떠맡는 것에 대한 현장의 거센 반발이 단순히 돌봄에 대한 거부감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돌봄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인 방과 후 학교를 예로 들면, 방과 후 부장의 업무는 매우 고되다. 업체를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강사 관리, 환불, 나이스 기록 문제까지 방과 후 부장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방과 후 코디네이터가 지원되고 최근에는 방과 후 전체를 위탁해서 운영하도록 하거나 방과 후를 지자체로 이관하여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 방과 후 부장의 업무 강도가 높아서 경력 교사들 대부분이 기피한다. 방과 후 업무를 담당하는 부장은 평균적으로 1년에 약 600시간을 행정 업무에 투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이는 본래 교사의 직무인 수업 준비 및 수업 연구에 할애되어야 할 시간이다. 과도한 시간을 돌봄 정책에 쏟는 것은 교사 본연의 직무를 혼돈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저경력 교사가 방과 후 부장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고, 교사를 초빙하는 목적에서도 방과 후 부장을 맡기기 위해서가 1순위에 해당할 정도다.


외국의 사례는 좋은 참조점이 된다. 주정흔(2019)은 《학교 자율 운영 체제 구축을 위한 한국-핀란드 단위 학교 행정 체제 비교 연구》라는 보고서에서 한국과 핀란드의 방과 후 학교와 돌봄 사례를 비교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에서 지방 정부는 교육 행정에 있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지방 정부가 방과 후 돌봄 및 방과 후 교실을 책임지고 구성·운영한다는 점은 학교의 행정 업무 감소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방 정부는 관내 모든 학교의 교육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며 이에 대한 실무를 직접 담당한다. 학교의 건물, 시설에 대한 관리는 지방 정부의 업무이며, 학교는 학교의 예산에서 관리비를 지불할 뿐 관리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 또한 방과 후 돌봄 및 교실, 급식, 학생 보건 등 사회 공공 복지라 여길 수 있는 영역들 또한 지방 정부가 온전히 책임을 진다. 학교는 지방 정부 또는 회사와 계약을 맺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의 입장에 가까우며, 따라서 이에 관한 책임과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다. 특히 교사가 방과 후나 돌봄 교실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핀란드 사례에서 시사받을 수 있는 점은 학교가 반드시 해야 할 일, 교사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합의하고, 교육청이 해야 할 업무를 학교가 대행하지 않는 자율 운영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방과 후 업무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의 많은 업무는 사실 교육청이 해야 할 업무를 대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대행 또는 위임 행정이 구조화되어 있다. 교육부 사무를 교육청이 대행하고 교육청 사무를 학교가 대행한다. 본래 교육부의 중앙 교육 사무를 위해서는 지방교육자치단체로서 시·도교육청과 별도로 교육부 서울사무소, 교육부 경기사무소 등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관에서 중앙 사무를 해야 하고 교육청은 지방자치 사무만 해야 한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지역 교육청이 해야 할 징수, 시설 관리 등의 많은 업무를 맡고 있는데 이러한 업무 중 많은 부분은 학교의 고유한 교육 활동과 큰 관련이 없다. 이런 점에서 방과 후를 포함한 돌봄 문제를 학교가 떠맡아 교사들에게 업무 분장이라는 형식으로 맡기는 것은 교육 활동 정상화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많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업무 가중을 이유로 학교로 돌봄 사업이 집중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돌봄 자체를 교육과 분리시키는 것은 혁신교육운동의 자기모순이다. 이유는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돌봄 없는 학교 민주주의, 돌봄 없는 역량의 창조, 돌봄 없는 배움, 돌봄 없는 학습자 주도성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돌봄,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


민주주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실천적 책임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시민을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구성원에게 돌봄이라는 것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보장받아야 하는 시민적 권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와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이 부담해야 하는 시민적 책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배움은 2008년 조한혜정의 진단처럼 ‘함께 돌봄’이 활성화될 때 가능해진다.


돌봄이 학교에서 감당하기 어렵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업무가 되었지만 돌봄은 더 포용적이며 더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초등 저학년의 돌봄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교육 활동과 연계된다. 한국과 달리 여러 나라에서 지방정부가 돌봄의 주체가 되며 돌봄 정책의 형태도 학교 안과 밖을 걸쳐 다양하게 설계될 수 있는 이유는 제도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교육청이 유치원을 포함해 초·중·고 학교교육을, 지방자치단체는 성인들의 평생교육을 책임지도록 하는 등 지방자치와 지방교육자치를 분리하여 운영하고 있다. 지방정부가 교육 행정에 책임을 지는 주체가 아니고 방과 후 돌봄 및 방과 후 교실을 책임지고 구성하거나 운영할 책임도 없는 상태에서 학교 안으로 돌봄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학교에 있는 돌봄을 지역으로 넘기는 기계적 접근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돌봄과 배움의 중심은 학생에게 있고 모든 제도적 설계는 학생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들이 보다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학교 자율 운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교육청과 지방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협력하고 분담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한편으로 학교는 배움과 돌봄이 선순환하는 자율 운영 체제를 만들어 학교 민주주의가 학교의 모든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비전을 구체화해야 한다.



자기모순을 넘어, 돌봄과 교육이 가능한 학교 만들기


인간은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돌보는 공동의 사회적 공간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조한혜정의 지적처럼 학교 안에서 공동의 사회적 공간이 사라지고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는 데 사용하는 공통의 언어와 도덕적 코드도 무너진 지 오래이다. 공동의 토대가 사라지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점 더 빈약해졌고, 학교 구성들에게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신뢰하는 능력보다 고발하고 감시하는 상호성이 발달되었다.


돌봄은 모든 인간의 생애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돌봄 관계는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연대의 시발점이다. 돌봄 관계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 출발점이자 사회적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선결 조건이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상호 관심, 사회적 연결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필수적인 주춧돌인 ‘함께 돌봄’이 없는 곳에서 배움 또한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딩스가 말한 것처럼 학교를, 생기 발랄함에 감사하고 잠재력을 끌어내면서 학생 개개인의 존재를 축복하는 돌봄의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돌봄이 단순히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학교가 돌본다거나 시설에서 관리한다는 차원을 넘어 사회와 정치공동체의 유지와 구성에 필수불가결한 공적 가치이기 때문에 가정이나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행동의 전환, 그리고 모두의 공유된 책임이 요구된다.



[참고 문헌]

넬 나딩스, 추병완 외 옮김(2002), 《배려교육론》, 다른우리.

마사 C. 누스바움, 한상연 옮김(2015), 《역량의 창조》, 돌베개.

마사 C. 누스바움, 정영목 옮김(2018), 《인간성 수업》, 문학동네.

조한혜정, 〈돌봄과 배움이 가능한 작은 학교 만들기〉, 《중등 우리교육》, 2008년 1월호, 94~99쪽.

주정흔 외(2019), 《학교 자율 운영 체제 구축을 위한 한국-핀란드 단위 학교 행정 체제 비교 연구》, 서울교육연구정보원.

Barnett, R.(2000), Supercomplexity and the curriculum, Studies in Higher Education, 25(3), pp. 255-265.

Barnett, R.(2007), Will to learn: Being a student in an age of uncertainty, McGraw-Hill Education.

0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