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특집 - 키워드로 읽는 한국 교육 10년 / 미래 교육] 그들이 주문한 미래,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 (채효정)

키워드로 읽는 한국 교육 10년 / 미래 교육

 

그들이 주문한 미래,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지난 10년은 ‘미래’가 중요한 교육학적 좌표로 부상한 시기였다. 물론 예전부터 교육은 언제나 미래의 사람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백 년 너머를 내다보는 것이 교육학적 희망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지향하는 것, 그런 의미를 담은 ‘미래’라는 말은 언제나 진보주의와 이상주의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성장한 ‘미래 교육’의 ‘미래’는 그런 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 산업과 미래 시장에 부합하는 미래 인재 육성에 대한 요구였다. 미래 교육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공동체의 미래’라는 의미가 아니라, 설정된 미래를 가정하고 각자의 직업 전망을 그것에 맞춰 가도록 계획하는 ‘개인의 미래’로 미래 개념을 재설정했다. 당연히 이런 미래 교육을 선도한 것은 학교가 아니라 시장이었다.

 


직업·진로교육, 기업의 요구에 맞춤한

 

2010년에 한국에 개장한 ‘키자니아’는 어린이의 미래를 어떻게 시장이 포획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어린이 직업 체험 테마파크 브랜드로 1999년 멕시코에서 처음 개장한 키자니아는 한국에서는 MBC 자회사인 MBC플레이비에서 수입 운영한다. 대기업들이 부스를 운영하며 어린이들에게 각자 직업 체험을 제공하는데,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 켈로그에서 시리얼, 농심에서 라면의 제조와 판매를, 현대자동차에서 전기 자동차를, 네이버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을 체험하는 식이다. 현실을 ‘똑같이’ 재현했다는 이 유토피아에선 사장과 노동자의 구분이 없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리직과 생산직의 차이도 없다. 이곳을 체험하는 어린이들에게 여기에 입점하고 있는 기업들은 ‘일류’로 인식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기업이나 직업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키자니아는 직업교육이 상업 마케팅과 결합하여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창조된 사례였다. 민간에서 상품화한 미래 교육 학습장을 공공 기관도 벤치마킹했다. 2012년 개장한 ‘잡월드’는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 기관으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진로 정보 교육을 제공한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이다. 이 테마파크형 직업 체험관들이 한창 유행할 때 지자체와 지역 교육청은 공공 예산으로 비슷한 류의 직업 체험관을 만들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의 인재 육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망한 ‘영어 마을’처럼, 이런 미래 체험장도 같은 궤도로 망해 갔다. 그 사이 중산층의 대표적인 ‘키즈 문화’ 트렌드였던 이 직업 체험 테마파크 순례도 인기가 한풀 꺾였다.


미래 교육은 어떤 미래로 갈 것인가라는 ‘사회의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 취업난의 시대에 ‘각자의 미래’를 대비하라는 ‘자기 앞가림 교육’으로서의 직업·진로교육으로 시작된 것이다. 2011년 이명박 정부는 미래 수요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스마트 교육 추진 전략’을 발표했다. 미래의 산업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이공계를 집중 육성하고, 대학 정원을 이에 맞게 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학 교과에서도 ‘수요자 중심 교육’이 도입되어 ‘캡스톤 디자인(창의적 공학 설계)’ 같은 과목이 생겨났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수요자’는 ‘시장 수요자’로서 기업의 요구를 말한다. 기업의 수요에 부응하려는 취업 예비자인 학생들을 ‘학생 수요자’로 포함해 마치 교육 소비자로서 학생 수요에 응답하는 것처럼 둔갑시켰지만 어디까지나 정책 추진의 근거가 된 것은 기업의 요구였다. 당시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기업 연구소들은 이공계 인력 기반이 취약하다며 〈과학 기술 고급 두뇌 확보 방안〉 같은 보고서를 통해 교육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핵심은 국가 경제 발전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과학 기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9년 한국과학재단과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합한 한국연구재단이 출범한 이후, 2010년대의 연구 재단 체제는 산업 경쟁력과 기업 수요에 맞춘 이공계 중심의 학문 연구 지원 시스템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인문사회학의 자리를 꿰찬 유사 학문, ‘미래학’

 

직업교육으로서의 미래 교육은 기술교육과 결합한다. 미래의 유망 분야는 과학 기술 분야였다. 이명박 정부에서 ‘미래 교육’은 한편으로는 ‘미래 산업’을 위한 ‘과학기술교육’과 그에 부합하는 미래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미래 직업을 갖기 위한 각자의 진로교육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미래 교육’은 미래 산업과 미래 직업을 매개하고 통합했다. 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한 ‘LINC(사회 맞춤형 산학 협력 선도 대학 육성 사업)’는 산업적 수요와 교육적 공급 사이의 소위 ‘미스 매칭’을 교육 정책을 통해 시정하겠다는 취지의 대표적인 정책이다. 박근혜 정부는 인문계와 예체능계 정원을 축소하고 이공계 정원을 확대하는 대학을 지원하는 ‘PRIME(산업 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 대학)’ 사업을 추진했다. 교육의 목표를 산업적 수요, 즉 자본과 시장의 요구에 복무시키는 이러한 기조는 이명박 정부 이전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IT 산업과 IT 교육 육성 정책에서 시작되어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졌다. 대학 지원의 이공계 편중과 인문계 홀대 현상이 극단화된 현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교육 정책이 자리한다.


미래 교육 성장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쇠퇴기가 될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하다. 이 시기에 인문학 붐이 일어났던 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 당시의 인문학 붐은 주로 교양 대학 설립같이 대학 내에서 인문학이 전반적으로 교양화되는 방식이나, 대학 바깥에서 대중 교양화되거나 시장화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인문학의 상품화 및 기업 인문학의 번성 속에 전공 학문으로서 인문사회학은 기반 자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러한 양상은 인문사회학의 비판 학문적 기능을 파괴하고 지식인들을 통제하려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전략 및 우파 정부의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문송합니다’는 시장의 결과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기술 노동자로 우민화하려는 인민에 대한 교육 통치 전략의 결과다. 1980년대에는 노동자들도 마르크스를 읽었고, 1990년대에는 공대생도 푸코를 읽었지만, 2000년대에는 지식인, 전문가들도 각종 인문 오락 프로그램에서 교양을 얻었다. 이와 함께 ‘미래학’이라는 신종 유사 학문이 오랫동안 사회를 해석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던 인문학을 대체했다. ‘과거로부터’ 배우던 인문학적 교육 전통 대신 이제는 ‘미래로부터’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교육에서 미래가 기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 것이므로 미리 준비하라는 명령은 미래의 목표 기점으로부터 역산해서 현재의 시간을 재배치했다. 과거의 ‘찍어 내기식’ 획일적 교육을 비판했지만 획일적 미래 경로 또한 미래의 형틀에 현재의 인간을 부어 넣는 교육을 강제했다. 과거의 권위가 짓누르던 교실은 미래가 현재를 닦달하고 압박하는 전장이 되었다.


미래로의 ‘경로 설계’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자 학문 분야 전체에서 ‘공학화’ 경향이 심화되었다. 모든 학문 분과에서 실용주의적, 기능주의적 경향과 취업 중심 교육, 계량주의적 연구 방법론이 압도했다. 교육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육학은 교사 양성 외에 어떤 미래 산업 수요에 부응할 수 있었을까? 성장하는 ‘에듀테크 산업’이 그 답이 되었다. 자동차 산업이 ICT 기술과 결합했듯이, 교육도 하이테크 기술과 결합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교육 사상, 교육 철학, 교육 사회학, 교육 정치학은 ‘교육 공학’에 밀려 도태되었다. ‘기술을 통해 교육을 혁신한다’는 사상은 새로운 ‘미래 교육’의 이념을 탄생시켰다.


2010년대 미래 교육은 ‘미래를 위한 직업·진로교육’에서 시작해서 ‘미래 학교’와 ‘미래 교실’ 구축으로 나아갔다. 미래 인재는 과거의 학교에서는 태어날 수 없었으며 미래 학교에서만 태어날 수 있었다. 과거의 교사, 과거의 교실, 과거의 칠판, 책상, 공책은 모두 ‘새롭게’ 혁신되어 재창조되어야 했다. ‘미래·혁신·창조’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의 요체이기도 했다. 창조 경제는 ‘창의 인재’를 요구했다. 미래 교육은 그에 부응하는 미래 인재를 창조하는 창조 교육이 되어야 했다. 2016년 세계 경제 포럼에 제출된 ‘4차 산업 혁명론’은 미래 담론과 미래 교육을 급속도로 추진시킨 계기였다. ‘미래에는 직업의 80%가 사라진다’는 선지자적 예언 속에서 미래는 앞당겨진 재난이 되었다. 이 직업 소멸론은 재난 자본주의의 ‘교육 정책적 쇼크 독트린’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는 문재인 정부의 혁신 경제로 계승되었고, 기술 입국론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아예 대통령 직속 기구로 ‘4차 산업 혁명 위원회’가 신설되었다. 교육의 목표는 4차 산업 혁명에 대비하라는 더욱 협소해진 요구에 갇혔다.


 

학교의 플랫폼화와 혁신의 양면성

 

교육 영역에서의 미래 교육의 수용과 대응은 이런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교육의 새로운 가치와 전망을 수립하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쇄도하는 교육 시장화에 맞설 수 있는 대항 담론을 뒷받침할 교육 사상과 철학의 퇴조 속에서, 학교 현장의 미래 교육은 교실 안의 학습 방법론과 기술적인 혁신 과제로 축소되고 말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뒤섞은 블렌디드 러닝, 학생이 먼저 공부하고 교실에서는 과정을 확인하는 플립 러닝에서 도입된 거꾸로 학습법, ‘교실 없는 학교’, ‘칠판 없는 교실’을 내세우며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학교’나 ‘스마트 교실’이 미래 교육을 상징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라는 그럴듯한 라틴어 뒤에 감춰진 실상은 ‘학교의 플랫폼화’다. 이 플랫폼 학교로의 혁신은 근대적 노동자 양성소로 설계된 학교를 플랫폼 자본주의를 위한 학교로 혁신하는 기획과 다름없다. 이것은 ‘정치적 장소’로서의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소의 박탈과 함께 시간에 대한 공통 감각도 위기에 처했다.


물론 같은 장소에 모아 놓고 같은 시간을 적용하는 이런 시·공간적 보편성은 통치를 위한 필요 때문에 발명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마쳐야 하는 공장에서는 시간의 균질화가 필수적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양화된 시간 개념과 새로운 시간성에 대한 적응 훈련을 위해서는 오랜 훈육이 필요하고, 근대 학교는 노동자가 될 신체에 그와 같은 자본주의적 시간성을 새겨 넣는 훈육장으로 기능했다. 1교시, 2교시로 분할되어 있고 등교 시간, 점심시간, 쉬는 시간, 하교 시간 등이 집단적으로 수행되는 시간표를 수년간 통과한 이후에야 공장에서든 회사에서든 동일하게 강제된 근무 시간표를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수행할 수 있는 신체가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미래 교육의 기획은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온 시간성과 장소성을 해체하여 시간과 장소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획이기도 하다. 플랫폼 학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이다.


미래 교육을 주창하는 교육 혁신론자들이 강조하는 ‘학생 중심·개인 맞춤’이란 말도 표면적으로는 학생의 인권과 개성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여 혼동을 일으킨다. ‘학생 주도형 수업’이나 ‘개인 맞춤형 교육’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도, 소비자 주체성에 입각한 학생 선택권과 교육 공공성의 붕괴와 교육의 사유화가 은폐되고 있지 않은지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개체화를 통한 파편화 전략은 단결과 연대의 조건을 해체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핵심 전략이었다. 그러나 지난 시기 우리는 ‘사회’로서의 학생 사회나 교사 사회,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학생 집단이나 교사 집단의 집단적 정체성과 결속력 및 공동 감각을 해체하는 기술로 다양한 미래 교육 기술이 동원되고 있지 않은지를 제대로 경계하지 못했다. 그동안 ‘기술-신神’은 서버에 ‘접속’한 사적 개인들에게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빅데이터를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최적화된’ 교육 서비스와 교육 상품을 만들어 냈다. 이제 개별화된 신체들을 훈육하고 통제하는 것은 누구일 것인가. 국가의 훈육을 대행하는 관리자가 되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던 사람들이 시장의 파견 관리자인 인공 지능과 빅데이터 기반 학습 도구를 미래 교육으로 환영하고, 나이스NEIS에 맞서 투쟁했던 사람들이 학교를 데이터 생산소로 만드는 기술들을 그냥 받아들인다.

 


미래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미래학은 말기에 이른 병든 사회가 마지막으로 의탁하는 신흥 종교처럼 번져 갔다. 과거의 인간이 ‘신’의 구원을 믿었다면, 오늘의 인간은 ‘기술’의 구원을 믿는다. 기술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 신은 지상의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전파한다.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이 만든 팡FAANG 제국은 자신들이 꿈꾸는 ‘멋진 신세계’를 창조하면서 교사들을 복음의 사도로 임명한다. ‘미래 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도 이러한 미래학과 함께 태어났다. 21세기의 미래 담론은 세기말에 성행하는 점성술처럼 급부상했다. 예전과 다른 점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외피를 썼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는 ‘미래학’이 ‘학學’의 지위를 처음으로 얻게 된 시대다. 유사 과학적 미래학 분야에서, ‘미래학자’라 불리는 비전문가들이, 기업에서 만든 시장 변동 분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미래 보고서〉 같은 책들을 쏟아 냈다. 가설을 도래할 현실로 둔갑시키는 미래 담론은 대중의 불안 심리에 기대어 인기를 얻고 퍼져 나갔다. 역설적이게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래학은 번성한다. 현실이 불안할수록 미래 담론은 힘을 발휘했다. 미래학의 문법은 종말론과 구원론의 문법을 닮았다. 불안한 현재와 구원할 미래. 오늘날 ‘미래’는 현대판 구원의 담론이다. 그러나 구원의 담론은 본질적으로 반정치적이다. 문제의 해결을 미래로 유보함으로써 현재의 저항과 정치적 실천들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폐해를 기술적 진보로 극복할 수 있다는 기술주의적 진보의 믿음은 경제 침체는 경제 성장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맹신과 맞닿아 있다. 이런 신념은 우리가 근대 문명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계속 미래로 도피하게 만든다. 과거의 어떤 일이 잘못되어 여기에 이른 것인가를 돌아보는 반성적 이성은 기능주의적 해결책이라는 합리성으로 대체되고, 과거의 폐해들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정치적 진보의 이념은 단지 헌것을 새것으로 대체하는 경제적 혁신의 이념으로 대체된다. 그런 과정에서 민주, 평등, 공공성의 실현을 목표로 했던 정치적 교육운동은 미래, 창조, 혁신의 이념에 입각한 경제주의적 교육 혁신론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교육 철학과 교육 사상도 교육 공학에 밀려나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근본의 물음을 묻지 않고, ‘어떻게’라는 방법론적 대안으로 바로 건너뛰는 현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에, 그런 시대적 요청에 기능주의적이고도 실용적으로 가장 잘 부응할 수 있는 교육학이 교육 공학이기 때문이다. 교육 공학이 교육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교육과 기술 간의 결합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 기반 교육으로의 전환은 민중적 요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시장을 노린 IT 기업의 로비와 마케팅의 결과였으며, 평등의 확대가 아니라 시장의 확대에 기여했다. 실리콘밸리와 일체화된 스탠퍼드 대학이 교육 공학의 산실이자 미래 교육의 산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 미래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로부터의 주문에 우리를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공 지능이 교사를 대체하고 태블릿 PC와 랜선이 학교를 대체하게 될 미래를 대비하고, 일자리를 로봇에 뺏겨 70~80%의 노동자가 쓸모없게 될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교육을 하라는 주문 말이다. 선의의 교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배우고 알아야 할 미래는 세계 경제 포럼의 경제학자와 CEO 들이 ‘이것이 너희의 미래일 것이다’라고 가르쳐 준 그런 미래가 아니다. 그들이 미래를 해석하는 현대판 교부敎父들이라면 오늘날 필요한 종교 혁명은 그들이 독점한 해석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민주주의적 교육 혁명일 것이다. 우리가 가고 싶은 미래는 어떤 미래인가? 우리는 원하는 다음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노동자가 꿈꾸는 미래와 자본가가 꿈꾸는 미래가 다르고, 여자들이 꿈꾸는 미래와 남자들이 꿈꾸는 미래가 다르며, 부자들이 꿈꾸는 미래와 가난한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가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발전한 사회’가 아니라 ‘좋은 사회’에 대해 말해야 한다. 문제가 제거된 사회가 아니라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해 말해야 한다.


노예선에서도 선상의 반란이 일어나듯이 억압의 장소에서도 규율은 깨트려진다. 학교와 공장은 억압의 장이기도 했지만 저항의 장소로 재창조되기도 했다. 지배와 저항이 충돌하는 정치의 장에서 ‘장소성’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합하는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성격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미래를 둘러싼 투쟁을 시작하는 장소, 우리는 학교를 그런 장소로 탈환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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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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