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특집] 《오늘의 교육》 10년, 무엇을 어떻게 써 왔나

특집/ 좌담

 

《오늘의 교육》 10년, 무엇을 어떻게 써 왔나

 

참석자

박복선 본지 1, 2기(2011∼2014년) 편집위원장, 전환교육연구소 소장

정용주 본지 3, 4기(2015∼2017년) 편집위원장, 초등 교사

채효정 본지 현(6)기 편집위원장(2021년∼),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일시 : 2021년 1월 8일 금요일

장소 : 교육공동체 벗 사무국

진행·정리 : 이진주 기자

사진 : 최승훈 기자

기록 : 공현· 서경 기자

 



전·현직 편집위원장들과 함께 《오늘의 교육》이 그간 다루어 왔던 담론과 지난 10년간의 교육계 흐름을 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의 교육》이 역점을 두어 다룬 주제들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 사이 교육계의 이슈는 무엇이었고 그에 대해 《오늘의 교육》은 적절히 응답해 왔는지, 어떤 영향을 미쳤고 놓친 지점들은 무엇인지를 돌아본다.

 


《오늘의 교육》 창간의 의미

 

이진주

2011년 창간 때 가장 큰 고민은 교육 매체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우리교육》이 주로 학교교육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매체의 주 독자층 역시 초·중등 교사였다면, 《민들레》는 대안교육 진영을 대표하는 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있던 교육 매체들과 차별성이 있는, 우리 매체만의 고유성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많은 논의를 했었다. 먼저 초대 편집위원장이었던 박복선 선생님께 《오늘의 교육》 창간 당시의 고민을 들어 보고 싶다.

 

박복선 

창간호에 쓴 발간사를 다시 읽어 보며 그때 이야기했던 것들이 지금도 대체로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말을 보태면, 우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 운동은 내용 면에서는 교육을 매개로 한 운동이고, 방법 면에서는 매체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특수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교육》을 만들 때도 독자들과의 연대 의식이 높았다. 독자는 단순히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아니라 곧 매체의 필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교육》이라는 매체의 질은 결국 독자들의 실천력에서 나온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 흐름은 《오늘의 교육》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매체를 창간하는 것을 넘어 ‘교육공동체’라는 형식을 만든 것 역시 독자들의 결속과 집단지성, 집단적 실천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매체를 창간하면서 크게 두 매체를 모델로 했는데 하나가 《녹색평론》이고, 다른 하나가 《또 하나의 문화》이다. 《녹색평론》은 독자들의 읽기 모임이 활발하다는 데서, 《또 하나의 문화》는 동인지로서 집단적인 작업을 한다는 데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교육》도 초기에는 읽기 모임이 활성화됐었는데 이어 가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진주 

정용주 선생님은 박복선 선생님에 이어 3, 4기 편집위원장을 맡았고, 창간 때부터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왔다. 현장 교사로서 매체 창간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바가 궁금하다.

 

정용주 

《오늘의 교육》을 창간하기 전에 《우리교육》에도 여러 번 글을 쓴 경험이 있다. 《우리교육》이 전교조 초창기부터 중요한 교육 담론을 많이 만들어 오긴 했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다. 아무래도 주 독자층이 교사들이다 보니까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들과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학생이나 학교 밖 청소년, 교육시민단체, 인권단체 등의 이야기를 지면에서 보기는 어려웠다. 특히 2000년대는 학교가 가르치고 배우는 데 절대적인 공간이고 모든 학생들이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문법이 해체되는 시기였는데 그런 흐름을 담아내는 데는 부족했다. 《오늘의 교육》을 창간하면서 우선해서 고려했던 건 편집위원으로 교사 외에 인권활동가, 청(소)년운동가, 학부모 등 여러 진영을 대표하는 분들이 참여해서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집단지성을 이야기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이진주 

두 분과는 다르게 외부에서 《오늘의 교육》 창간을 지켜봤던 채효정 선생님의 소회도 궁금하다.

 

채효정 

당시 학벌없는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역시 부침을 겪으면서 주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교수나 대학(원)생 같은 대학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정말 ‘학벌이 없는’ 존재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다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한 연구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초창기 《오늘의 교육》에 실으면서 인연이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오늘의 교육》과의 만남이 교육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고민하고 ‘교육이 곧 정치다’ 하는 문제의식을 심화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운동의 장을 중심에서 변방으로, 위에서 아래로 옮겨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는데, 이런 지점이 자연스럽게 《오늘의 교육》의 지향과 만났던 것 같다. 당시 편집위원이었던 엄기호 선생을 초대해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뜻의 공동체는 망했다. 이제는 삶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인상 깊었고 이러한 삶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교육공동체 벗의 실험을 유의미하게 지켜보았다.

 

이진주 

이렇게 시작한 《오늘의 교육》이 그동안 교육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다고 평가하는가.

 

박복선 

그동안 《오늘의 교육》에서 다룬 글들의 목록을 다시 훑어보면서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제들을 많이, 잘 다뤘다’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교육》이 없었다면 우리 교육계의 담론 지형이 얼마나 허술했을까 싶다. 나름 교육 매체로서 자기의 역할을 잘해 왔고 거기 일조했던 사람으로서 뿌듯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한 것들이 현실을 어떻게, 얼마만큼 바꿨는가 생각하면 여전히 물음표가 있다. 특히 독자들이 매체를 읽고 자기 실천으로 어떻게 연결시켰는지가 궁금하다.

 

정용주 

《오늘의 교육》이라는 매체의 역할을 생각할 때 세 가지 정도가 떠오른다.

첫째는 글쓰기의 문턱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독자들과 만나다 보면 《오늘의 교육》에는 웬만해서는 글을 싣기 어렵다는 인상을 가진 분들이 많다. 우리가 창간 초기에 목표로 했던 것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매체였는데, 글쓰기라는 분야가 굉장히 위계적이라는 걸 느꼈고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면 우리 역시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는 편집위원을 포함해서 《오늘의 교육》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권력화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다.

두 번째는, 《오늘의 교육》의 역사가 진보 교육감의 당선과 더불어 교육청 주도의 학교 개혁이 활성화되는 시기와 거의 궤를 같이하고 있지 않나. 그러다 보니 《오늘의 교육》에서 다룬 담론 역시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정책이나 사업 위주로 이야기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제도나 정책을 주로 다루게 되면서 학교 안과 밖의 교육운동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측면이 있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오늘의 교육》의 교육 불가능이나 교육의 생태적 전환 같은 담론을 교육청의 정책에서도 많이 참고했는데, 제대로 이해하고 정책에 반영한 것인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건, 아까 채효정 선생님이 ‘교육이 곧 정치다’라고 이야기했는데, 현장 교사들이 교육의 문제를 정치적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교육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에 대해서이다. 《오늘의 교육》이 교육의 문제를 ‘순수한 교육의 문제’라고 보는 관념을 해체시키고 다른 사회적 문제와 연결시켜 사고해야 했는데 그런 부분에서 부족함이 많았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이 지난 10년간 다룬 목차를 보면서 지금 실어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그때의 문제가 여전하다는 걸 느꼈다. 이건 교육운동이 정체를 넘어서 후퇴하고 있다고 할 만한 상황이다. 그러면서 패배적 관점이 짙어지고 희망을 만들어 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읽은 강준만 선생의 글에서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라는 볼프 비어만의 문장을 인용한 걸 봤다. 나 자신도 절망만 설교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했다. 박복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올해는 《오늘의 교육》을 통해 정직하게 절망에 직면하면서도 작은 실천을 만들어 내는 지면을 기획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뭔가 해 나갈 때만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정용주 선생님의 말씀에 덧붙이자면, 매체의 질을 담보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면서도 놓치고 있는 게 있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독자들은 담론에 대한 갈증이 분명히 있다.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들도 혼란스럽기 때문에 매체가 그런 지점들을 잘 정리해 주고 지형도를 만들어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집단적 담론 생산 과정을 만드는 데 대한 고민은 좀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고, 연구자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배우거나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관계로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공동체라는 형식을 만든 것인데 그러한 지향을 잘 살리질 못했다.

 

이진주 

창간 초기에는 르포 쓰기나 글쓰기 연수도 하고 독자들을 필자로 키우려는 노력을 많이 해 왔는데 쉽지 않았다. 특히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면서 초기에는 그야말로 집단지성의 힘으로 만드는 매체를 지향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진 측면도 있다. 글쓰기가 권력화되는 문제를 경계하면서 한편으로 매체의 질을 유지하는 균형을 잡는 게 매체로서는 어려운 문제이다. 독자들이 매체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수준 높은 담론에서부터 생활 글까지 다양하다는 것도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박복선 

《우리교육》을 만들 때 늘 고민했던 게 바로 에세이 지면이다. 개편 때마다 폐지해야 하나 유지해야 하나 늘 논쟁거리였는데, 결론은 독자들이 제일 많이 읽고 감동받는 게 바로 동료 교사들이 쓴 에세이라는 것이다. 에세이 하면 보통 생활 글처럼 가볍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깊이가 없는 게 아니다. 일상의 사례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읽어 내는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편집의 기술도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지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훨씬 많다. 그걸 잘 담아내는 것이 편집의 역할이다.

 

채효정 

정용주 선생님이 한 말씀 중에, 매체가 관에서 주도하는 정책을 주로 다루면서 그 패러다임에 빨려 들어가는 문제는 계속 고민이다. 교육운동뿐만 아니라 환경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반정립을 할 때는 반대 세력도 같이 정립되고 결국 주어진 패러다임을 강화하면서 재구축하게 된다. 패러다임 자체를 해체하려는 것인데도 논쟁을 하다 보면 정작 그 틀을 깨고 가져오고 싶었던 틀 바깥의 더 중요한 목소리와 경험이 배제되어 버린다.

 

박복선 

참 어려운 문제인데, 진보 진영이라는 것이 있다면, 큰 공론의 장 그리고 큰 연대의 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보 진영이 주도권을 쥘 수 없다. ‘생태적 전환’이라는 의제도 자본에 넘어갈 것이다. ‘그린 뉴딜’ 같은 것을 보면 잘 드러난다. 기껏해야 집에 태양광 발전기 다는 걸로는 대기업이 펼치는 사업에 대응할 수가 없다.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는 수준의 새로운 기획이 필요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판을 짜야 한다.

 

정용주 

김수영 시인은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각자의 영역에서의 상대적 완전을 추구하는 실천들을 묶어 주면서 절대적 완전을 향해 가는 게 매체로서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고민을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활동가들이 제도권으로 많이 들어갔는데, 그러면서 복잡한 지형이 만들어졌다. 옛날에는 교육청이 부당한 명령을 하는 것에 저항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의 교육 정책이 현장의 실천보다 훨씬 진보적이 되면서 현장이 개혁을 거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런 결을 어떻게 매체에 담아야 하는지 고민이다. 그런 문제들을 지적하다 보면 어떤 면에서는 교육청을 옹호하는 매체로 오인되기도 한다.

 

채효정 

매체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도 《오늘의 교육》의 과제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제도권 밖에 있는, 학생과 교사가 아닌, 주체들로 독자층이 넓어져야 한다.

 

정용주 

맞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도 보편적 인권, 보편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소수자의 인권이나 민주주의도 자동으로 신장될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소수자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차단시켜 버리지 않나. 그러지 않기 위해서 《오늘의 교육》에서는 청소년인권, 탈학교 청소년, 장애 등의 의제에 의도적으로 지면을 설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복선 

《오늘의 교육》에서 중간 담론이 없다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채효정 선생님이 지지난 호에 ‘가난한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아직은 모호하고 큰 개념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현장에는 실제 현실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중간을 연결해 주는 담론이 없는 거다.

 

채효정 

아까 박복선 선생님이 이야기한 거랑 연결시켜 보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많다. 인터뷰라든지 현장 탐방 기사 같은 게 그런 중간 담론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직접 필자가 되어 쓰지 않더라도 그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는 지면이 있다면 보완이 될 것 같다.

 


《오늘의 교육》이 다루어 온 것들

 

교육 불가능 테제

 

이진주 

창간호 특집 주제가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이고, 교육 불가능을 전면에 내세웠다. 창간호이기 때문에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고, 교육 문제를 이야기할 때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편집위원회의 자각도 있었다. 당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독자들의 반향도 컸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여러 교육 주체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 변주되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교육 불가능 담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복선 

‘교육 불가능’이란 조어를 했던 건 말 그대로 충격을 노린 효과도 있었고, ‘우리의 출발은 다르다’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도 있었다. ‘래디컬’이라는 단어에는 급진적이라는 의미와 근본적이라는 의미가 둘 다 있지 않나. 그런 지향을 담은 개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교육 불가능에 대한 해석을 세 가지 정도로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일종의 학교 붕괴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다. 학교가 학교 밖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가 후진 곳이 되면서 교사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학교가 고객을 학원에 뺏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두 번째로는 교육의 분배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학교 공부가 의미가 없는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소위 명문대나 ‘인서울’ 대학에 가는 경쟁에서 열외가 된 학생들에게 학교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이 지향하려고 하는 좋은 인간, 좋은 삶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나는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에 쓴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 때 한 청년이 “나는 국정원 직원이 정말 이해가 된다.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라고 했다는데, 도대체 이런 풍토에서 교육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에서 이야기한 교육 불가능성 테제가 저 개인적으로는 전략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 전에는 뭔가를 비판하면 자꾸 대안을 제시하라고 하니까 가능성을 계속 말해 왔다. 학벌없는사회에서도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를 만들자고 제안한다든가 하는. 하지만 가능한 대안에 초점을 두고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잘못된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발휘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희망 고문을 하면서 현 사회 체제를 지속하면서 연장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는 거다. 고쳐 쓰는 자본주의라고 할까. 나는 오히려 교육 불가능 테제를 접하면서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물론 지금은 또 생각이 달라지긴 했다. 너무 캄캄하니까. 전태일 열사가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조금씩 구멍을 넓”힐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은 우리도 작은 돌파구라도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정용주 

개인적으로는 ‘교육 불가능’이 가장 사랑하는 단어다. 편집위원장으로서 이 담론에 대해서 항상 욕을 먹으면서 방어를 했기 때문에. (웃음) 저는 오히려 10년이 지나면서, 특히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교육 불가능이 사실로 증명이 됐다고 본다. 이혁규 교수는 교육 불가능을 교실 붕괴 담론과 비교해서 담론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고, 교육청에서는 ‘교육 가능한’으로 뒤집어서 이용하기도 했지만, 저는 둘 다 잘못 짚었다고 본다. 창간호를 통해 편집위원회에서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한 것은 일종의 선언이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개념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선언에 동의한 것은 이러한 전제가 있었던 것 같다. 농사는 결국 사람이 아니라 흙이 짓는 것처럼 교육의 주체는 자기 자신인데, 교육을 통해 스스로 서고 더불어 사는 삶이 불가능해졌다는 거다. 교육이 아무리 희망을 이야기해도 각자도생하는 사회에서 개인으로서 자립할 수도, 시민으로서 연대할 수도 없다면 도대체 학교 체제에서의 배움이 무엇이냐는 거다. 교육 불가능 담론은 이런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학교가 다시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교실 붕괴 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채효정 

앞으로도 교육 불가능을 계속 밀고 나가야겠다. (웃음)

 

정용주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이 개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안학교를 비롯해서 공교육에서도 곳곳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걸 거부하는 게 아니다. 교육 불가능이 마치 모든 걸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건 아니지 않나.

 

채효정 

반대로 미래 교육이나 4차 산업 혁명 등 기술적인 변화가 마치 현재 교육 문제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긍정론은 앞으로도 계속 강화될 것이다. 이건 예전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거짓 희망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용주 

교육 불가능 담론은 근대 체제로서 학교의 교육 불가능성을 선언적으로 제시한 아주 중요한 출발이었고, 그런 흐름이 곧 후쿠시마 사태를 겪으면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담론으로 연결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

 

이진주 

자연스럽게 교육의 생태적 전환으로 이어 가면, 2011년 《오늘의 교육》이 창간을 한 해 3월 11일에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났고, 《오늘의 교육》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를 떠올려 보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담론이 누군가에는 너무나 적실한 언어였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실감에서 너무 먼 언어이기도 했다. 지금은 누구나 생태 문제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지만, 당시에는 매체가 너무 앞서 나간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박복선 

그 의제를 먼저 제안했던 입장에서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욕도 많이 먹었다. (웃음) 후쿠시마가 계기가 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전에 헬레나 호지의 《오래된 미래》 같은 책을 읽으면서 문명사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이야기한다면 자본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릴 것 같다. 그때는 좀 조심스러워서 에둘러서 표현하기도 했다. 세월호와 코로나19 사태 등을 겪으면서 분명해지지 않았나.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 김종철 선생이 책을 내면서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라는 제목을 뽑았는데, 나는 이것이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기획, 다른 체제를 만들어 가는 기획이 그것을 구체화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정용주 

박복선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교육 불가능과 연결시키면 조한혜정 선생이 《선망국의 시간》에서 말한 그 시간대에 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떤 시대로 가야 하는가에 있어서 생태적 전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고. 김동춘 교수의 책 중에 《전쟁정치》와 《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를 쌍으로 놓게 되는데, 끊임없이 전쟁, 피난 담론이 지배하면서 사회가 없어지고 결국 ‘가족 개인’이 재생산되는 것 아닌가. 교육 불가능과 생태적 전환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교육 불가능에 대한 논쟁이 두터워질수록 결국 생태적 전환의 문제가 되는 거다. 교육 불가능의 해법은 ‘교육 가능’에서가 아니라 교육을 떠받치고 있는 정치·사회 문제를 새롭게 전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박복선 

후쿠시마 전에도 나는 교육에 있어 일종의 전환기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문명까지는 모르겠지만, 사회나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인데 특히 교육 분야에서 그런 상상력이 빈약했다. 진보적 운동 진영이나 진보 교육 담론을 만드는 연구소 등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꼼꼼히 읽는 편인데,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주로 제도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거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경도되어 있다. 교육에서, 특히 미래 세대를 만날 때는, 대안이라고 할까 그런 게 필요하다. 교육농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그런 측면이다. 남들이 보기엔 텃밭 하나 만드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걸 시작하게 된 동기와 그 안에 함축돼 있는 사상은 다르다는 거다.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실천적 매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델들이 계속 나온다면 실제 교육운동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진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담론은 한편에서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나 또 한편에서는 농사짓기 같은 실천으로 협소하게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오늘의 교육》이 좀 더 섬세하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잘 하지 못한 책임도 느낀다. 성장을 위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도구화한 근대 학교 체제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사유하고, 다른 한편으로 농사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함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내는 작업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용주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적 교육운동이나 교육청 등의 기관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0년에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의제를 가장 크게 밀어붙인 게 서울시교육청과 시도교육감협의회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게 환경교육 관련해서 예산을 더 주는 것밖에 없었다.

 

채효정 

환경 담론의 문제 중 하나가 탈정치화와 탈계급화이다. 지금 생태 환경 담론이 이 체제 아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의 언어가 될 수 있나? 그러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생태적 전환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용주 

예를 들어 서울시에 따릉이(공공 자전거 서비스)가 생기고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면서 탄소 발자국이 줄어드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가 큰데, 막상 따릉이를 고치거나 관리하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이라면 이게 좋은 방향인가. 어떤 측면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생태적 담론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의 노동과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방향의 생태적 전환은 허상이라고 본다.

 

박복선 

우리가 내세워야 할 구호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계삼 선생이 쓴 ‘고르게 가난한’이 아닐까 싶다. 이는 우리가 더 이상 부유하게 살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자신의 단기적 이익을 보면 상충될 수도 있지만 전환의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는 큰 그림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교육이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이 바로 그 부분이 아닐까 한다. 당장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공동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 말이다.

 

채효정 

교육에서도 통치의 기법이 그걸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교육과정 자체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총체적 인식과 연결적 사고를 가로막는다. 대학도 취업을 이유로 기술 습득 같은 실용적인 학문 위주로 가르치면서 점점 더 근본적 사유를 하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막고 있다.

 

이진주 

《오늘의 교육》의 출발점이자 현재의 지향이기도 한 교육 불가능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다. 그 외에도 학생/청소년인권, 페미니즘 교육, 세월호 등 역점을 두어 다룬 주제들이 많지만 오늘 모두 짚어 볼 수는 없을 것 같고, 매체의 성격과 관련된 이야기만 더 나누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으면 한다. 얼마 전 채효정 선생님이 교육공동체 벗 10주년을 기념해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 “협동조합이지만 사회적으로 점점 강화되는 소비 권력으로부터 벗도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런 세태 변화는 편집위원회에서 일종의 자기검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라고 고백한 부분이 있다. 실제 매체를 만들어 오면서, 특히 교사 조합원/독자와의 대결이나 긴장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 교육 불가능 담론을 교사 집단에 대한 비판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고 학생/청소년인권 문제를 교권과 대립적으로 보는 인식도 컸다. 혁신학교나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성찰을 교사들의 실천적 운동을 폄하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기획을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자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매체로서의 역할을 잘해 온 것인지 고민이 든다.

 

채효정 

소비자주의는 교육공동체 벗만의 문제는 아니다. 매체를 예로 들면, ‘내 돈 내면서까지 굳이 불편한 글을 보고 싶지는 않다’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내가 편집위원회에 참여한 후에도 기획 방향이나 글의 내용에 대한 조합원들의 항의를 몇 번 전해 들었고, 그러한 사실이 압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박복선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그 사람들의 생각을 열리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매체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 학교 내에서 학생의 인권이 보장됨으로써 학생들이 더 잘 성장하고 교육적으로도 더 의미가 있음을 설득해 내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교사들의 선의를 믿는다. 교사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잘 성장하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고, 학생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오늘의 교육》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어떻게 학생들의 삶을 바꾸어 내고 있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스토리를 잘 발굴해서 보여 줘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 같다. 학생인권 문제를 비롯해 페미니즘 등의 이슈도 언어로만 첨예화되었을 때 갈등도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채효정 

교사들에게 뭔가 교육적 동기와 의욕을 부여해 주고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걸 이제 자본과 시장이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구글 같은 기업에서 프로그램 마케팅을 하면서 우수 교사 사례를 발굴하기도 하고, 열정적인 교사들의 참여를 유도해 스스로 ‘혁신적이고 실천하는 교사’라는 자긍심을 느끼게 만든다. 반대로 우리의 경우는 교사들이 서로 정보를 교류할 장이나, 서로 배움의 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잘 못 만드는 것 같다. 새로운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게 의무로만 부여될 때는 재미도 없고 금방 지치게 된다. 참여해서 서로 즐겁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그런 판을 우리도 만들 수는 없을까? 앞에서 뜻의 공동체와 삶의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매체 역시 삶의 공동체라는 기반을 점점 잃어버리고 깃발만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 깃발은 선명한가? 담론에 대한 인식의 동의가 있어도 그것이 독자들 삶의 저변으로 확장이 되고 서로의 관계망들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불편하거나 날카로운 문제의식들이 제기될 때 사람들은 계속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정용주 

사람들이 점점 생활화되고 보수화되는 건 당연한데, 저항에 대한 해석이 과잉된 측면이 있다. 매체에서 그 사이를 세심하게 담아내야 하는데 어려운 문제 같다. 지난 호 《오늘의 교육》에서 다룬 돌봄 정책 관련해서 이야기하면, 돌봄을 학교에서 담당하는 문제에 대해서 교사들의 저항이 컸는데 실제 학교 안에서 돌봄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저경력 교사이다. 마치 모든 교사가 돌봄 업무 때문에 아무 일도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허위이다. 매체가 이런 지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다룬다는 게 쉽지 않다는 고민이 있다.

 


《오늘의 교육》에서 아쉬웠던 담론들

 

이진주 

10년간 많은 주제를 다루어 왔지만 적시를 놓쳐서 제대로 담지 못한 주제도 있다. 때로는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루고자 하는 이슈가 너무 민감해서 예리하게 벼리지 못한 적도 많았다. 세 분은 어떤 기획이나 주제에서 아쉬움을 느꼈는지 듣고 싶다.

 

채효정 

세월호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교육 담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4.16 교육론을 만들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안전’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데 기여해 버린 측면이 있다. 교육 불가능성이라는 테제를 그렇게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 없다고 보는데, 그 이후를 만들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박복선 

세월호는 사건이 주는 충격이 커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에 비해 너무 빈약하게 느껴질 것 같은 우려가 있었다. 계속 붙들고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어떻게 언어화할지 막막하다. 밀양 송전탑과 연결해 보면 ‘우리가 밀양이다’라고 했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곧 ‘우리가 한전이다’가 된다. 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역시 이 체제에 순응해서 살고 있는 건데, 우리는 너무 쉽게 희생당하고 피해를 입은 쪽에 서 버린다. 세월호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대한 지적에서 출발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용주 

후쿠시마와 세월호도 그렇고, 최근 코로나19 사태도 연장선상에 있는데 ‘포스트’가 붙는 순간 그 사안에서 벗어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포스트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순간 세월호는 기억 속에 갇히게 되는 거다. 세월호를 생각하면 저는 네 가지 정도에 갇혔던 것 같다. 선언하고, 4.16 체제를 만들고, 진실 규명을 촉구하고, 기억하고. 세월호를 통해 교육의 문제를 폭로하고 그런 작업을 끈질기게 이어 갔어야 했는데, 기념만 한 것 같다.

 

채효정 

세월호 이후 저는 ‘기억’과 ‘안전’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게 되었다. 안전은 저항을 봉쇄하는 효과가 있었고, 기억은 잘못된 애도의 정치를 낳았다. 현재적인 사건을 너무 일찍 과거화했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는데, 계획했던 커리큘럼을 중단하고 한 학기 동안 세월호에 대한 수업을 했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각자의 트라우마가 아닌 공동의 고통으로 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고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강의 계획표대로 하지 않느냐는 항의도 있었는데, 국가만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게 아니라 나도 현장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래 수업 계획표에만 맞춰 진도를 나가는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게 해 준 것도 한 학생이었다. 이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월호는 교육적 사건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그때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담론으로 정리해 내지 못했는데, 나 자신의 앞으로의 숙제이다.

 

박복선 

《오늘의 교육》에서 다루는 주제 중에 교육 내용에 관한 게 너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예전에 《우리교육》에서 했던 것처럼 수업 이야기 같은 지면을 기획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교실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이게 학생들의 삶에 어떻게 미세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섬세하게 잡아내는 게 필요한데 못 하고 있다. 전교조가 출범했을 때 교육운동의 중요한 의제 중 하나가 교과서 내용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 제기를 별로 듣지 못하고 있고 사회적 의제도 안 되고 있다. 교사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지, 그 내용들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 의문이다. 학교가 교과 교육에서 탈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가르치는 교과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적절한지에 대해서 《오늘의 교육》에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정용주 

박복선 선생님이 말씀한 교육 내용의 실종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교육》 독자 중에 교사들이 많은데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고민이 있더라도 다른 공간에서 해소해야 했을 것이다. 앞으로 《오늘의 교육》 지면을 기획할 때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채효정 

편집회의에서도 교육과정과 내용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예전에 사회교사모임에서 대안 사회 교과서를 만들고 국어교사모임에서 친일 문학에 대해서 비판했듯이, 지금은 교과서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의식을 가진 교사들이 개인으로서 실천을 하고 있긴 하겠지만 그게 운동으로 모아지지 않고 있고, 이런 현상은 고교 학점제가 되면 더 심화될 것이라고 본다. 진로교육을 예로 들면, 학교 안에서 큰 비중에 없으니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 이른바 출세주의, 능력주의, 각자도생, ‘영끌신화’ 같은 걸 진로교육에서 다 가르치고 있다. 교육 내용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용주 

채효정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떠올랐는데, 우리가 담론 투쟁을 벌이거나 전선을 그을 때 주의해야 할 게 우편향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이승만이냐 김구냐의 전선이 아니라 이승만·김구냐 여운형이냐 이런 전선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채효정 

공감한다. 지금은 근본적으로 바꿔 보자는 사람과 안 바꾸겠다는 사람들의 전선이 아니라, 조금만 바꾸겠다는 사람과 옛날이 좋았다는 사람들 사이의 전선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조금만 바꾸면 살기 좋을 텐데’가 아주 진보가 돼 있고. ‘전환’이라는 용어도 이미 오염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궤도를 거부하고 완전히 벗어나려는 시도가 아니라 궤도 수정의 용어로서 급진성을 탈색시키는 흐름이 있다.

 

정용주

《오늘의 교육》에서 더 다루어 보고 싶은 주제 중 하나는 화면과 활자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대면이냐 비대면이냐만을 놓고 논쟁을 해 왔는데, 나는 활자에서 화면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보다는 공부하는 방식이 글자에서 화면으로 바뀐 상황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학습을 하고 있고, 어떻게 새롭게 공부하는 방식을 만들어 나갈지에 대해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박복선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의외로 그런 방면에서 연구 문헌이 별로 없더라. 유튜브나 영상 매체를 통한 배움이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상대적으로 좋은 점은 무엇인지,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는 없는지에 대한 인류학적인 기술이 거의 없다. 그렇게 이론적 기반이나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논의만 앞질러 간다. 모래 위에 쌓은 성인 거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할 수가 있을까 싶다. 이처럼 《오늘의 교육》에서 중요한데 다루어지지 않는 이슈를 찾아서 기획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채효정 

이반 일리치가 옛날 구전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넘어갈 때의 충격이, 자신과 동료들이 종이에 쓰던 글을 컴퓨터로 작업하게 되면서 화면에 문자를 입력할 때의 문화적 충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유추했던 체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유튜브나 영상을 통해 배우는 것 역시 사고의 방식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 텐데 그 지점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겠다. 저도 코로나 시대에서 비대면 수업에서 야기되는 문제로 ‘공통 감각의 상실’을 주로 이야기해 왔는데, 온라인 학습을 사유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나 교육의 불가능성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진주 

마지막으로, 《오늘의 교육》의 매체로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들으면서 이 자리를 마칠까 한다.


박복선 

기본적으로 교육을 이야기하기 전에 좋은 삶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없이는 공허해진다. 전 사회적으로 볼 때 좋은 삶, 좋은 교육에 대한 질문이 실종되고 어떻게 주어진 틀 안에서 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접근만 남은 상황에서 《오늘의 교육》이 그런 현상에 대한 안티로서 역할을 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복원시키려는 노력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조로 가면서 한편으로 구체적인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맑스주의 문학 이론에서 형상성과 구체성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저는 매체 운동에서도 핵심이 구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약간 생경한 언어를 들어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정말 어렵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가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정용주 

탄생 때부터 지금까지 《오늘의 교육》과 인연을 맺어 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의 교육》에 두 번의 갈채를 보낸다. 첫 번째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오늘의 교육》이 다양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비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의 교육》 다음 호를 만들기 위해 이전 호에서 우리가 구축한 논리와 사변을 포기하곤 했다. 새로운 교육 현상을 붙잡으려다 잇따른 실패를 경험하며 10년을 달려왔다. 그래서 《오늘의 교육》을 만드는 것은 금고 속에 금을 집어넣듯이, 그리고 창고에 상품을 집어넣듯이 새로운 호를 쌓아 올리고 저장해 가는 그런 작업이 아니다. 어쩌면 다음 10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후 10년 동안 《오늘의 교육》이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지, 아니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이 《오늘의 교육》 안에 어떤 이야기를 살아 낼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는 문 앞에 섰다는 것이다. 새로운 10년,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들과 온몸으로 《오늘의 교육》을 밀고 나가 보려 한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지면에만 담을 수 있는 글이 있다. 거기에 《오늘의 교육》이 담당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본다. 박복선 선생님이 창간 당시에 《녹색평론》과 《또 하나의 문화》를 참고했다고 했는데, 그건 교육 비평지이면서 동인지로서, 공동의 경험과 실천을 공유하고, 그것을 연구와 이론적 결과물로 생산하고,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내는 연구와 실천의 통합을 추구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앎과 삶이 따로 있지 않은 연구와 실천의 통합은 《오늘의 교육》뿐만 아니라 교육공동체 벗의 지향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의 교육》 지면은 지금도 그것을 실험하고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과 담론을 잇는 매체 실천 운동으로서의 도전. 여러 교육 매체가 있지만, 《오늘의 교육》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주제, 구성, 방식. 나에게는 그 지면의 의미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계속 고민하며 찾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10년은 그 방향성을 더 선명히 하고, 삶이 글이 되고, 다시 글이 목소리가 되고 운동이 되는 그런 매체로 뿌리내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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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