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특집] 자본주의 교육을 넘어선 경제교육은 가능한가 (채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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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자본주의를 위한 경제교육’을 넘어



자본주의 교육을 넘어선 경제교육은 가능한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저자




어렸을 때, ‘부루마블’이라는 게임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루는 사촌이 그 게임을 사서 우리 집에 들고 왔다. 골목에서 고무줄놀이나 오징어게임하고 놀던 시절이다. 부루마블 게임은 새로운 세계였다. 부루마블 게임이 생기고 나서 한동안은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놀던 어린이들이 방에 모여 앉아 해 지는 줄도 모르고 게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방문을 열었다. “울 애기들 뭐 하고 노냐?”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다가온 아버지는 게임판과 돈다발을 보고는 당황해서 “아니, 이게 대체 다 뭐냐, 무슨 짓이냐” 하며 갑자기 화를 버럭 냈다. 우리도 아버지도 다 같이 놀랐다.


아버지는 나중에 설명하기를, 작은 부엌방에서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이좋게 노는 모습이 귀여워서 들여다보니까, 무슨 게임 판에 주사위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는 가짜 돈이 쌓여 있고, 돈을 주고받고, 무슨 땅을 사고, 건물을 팔고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했다. 내가 “아부지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게임이야” 하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납득하지 않았다. 그런 놀이일랑 다시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돈벌이는 나쁜 거라고. 그 시절 종종 아버지는 돈은 더러운 거라는 이야길 하고는 했다. 아버지는 장사를 시작해서 ‘개도 안 물어간다’는 장사치 돈을 만지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그런 항변을 했던 것 같다. “우리도 알아야 하잖아!”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완고했다. “알 때 알더라도, 어린 너희들이 지금부터 미리 알 필요는 없는 거다.”



사리사욕과 불로 소득이 잘못이던 시대를 지나


땅 투기나 집 투기가 죄악시되던 때가 있었다. 뉴스에는 가끔 ‘일망타진’, ‘일제 소탕’ 같은 문구와 함께 복부인, 도박범, 땅 투기꾼 일당이 무슨 폭력 범죄 조직처럼 줄줄이 묶여 끌려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일반 사람들에게 은행은 저금하는 곳이고, 돈은 친척이나 이웃, 친구한테 빌렸다. 신용은 평가 회사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속에 쌓아야 하는 것이었다. 담보를 잡고 이자를 노리는 사채업, 대부업은 불법이고 범죄였으며, 타락이고 퇴폐였다. 도박이나 사기처럼 손가락질받는 일이었다. 군부 독재는 금융을 통제하고 자본에 대해서도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대부업자는 ‘사회 정화’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군부가 시장을 억압한 건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정치 자금을 통제하고 공포를 통해 복종시킬 목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경제 범죄는 국민들이 억압된 삶에 대한 불만을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 대해서, 구조가 아니라 특정 개인을 향해서 터뜨리도록 만들고, 권력과 유착하고 있지만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다른 권력들, 재벌이나 관료 집단을 통제하는 데도 이용됐다. ‘사회의 좀벌레’를 박멸하려면 더 강력한 통치 권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삼아 외부의 적을 통해 내부를 통제했던 군부는 ‘사회적 악마’가 필요할 때마다 욕하고 손가락질할 내부의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재에 충성하고 알아서 복종하는 큰손들은 뇌물로 무탈했다. 은행 문턱이 높았던 평범한 서민들이 급전을 융통하던 사채업자나 계 조직들이 수사망에 걸려 일망타진되곤 했다. 당시 경제 사범에는 실정법 위반 혐의 외에도 ‘미풍 양속을 해친다’, ‘사리사욕을 탐한다’라는 도덕적 단죄가 따라붙었다.


아버지는 대출은 곧 빚이라고 여기는 분이었고, 불로 소득은 크건 작건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노동 윤리의 소유자였다. 서울에 대학을 가게 됐을 때, 서울 사는 친척이 지금 서울에 아파트를 사두면 나중에 큰돈을 벌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이 기회에 집을 사라 권했다. 아버지가 아이 셋 키우느라 그만큼 저축해 놓은 게 없다고 하자, 친척이 웃으면서 수중에 있는 돈으로 집 사는 사람이 어딨냐고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셔야죠!” 아버지는 수중에 돈이 없는데 남의 돈으로 집을 사라고 권하는 그 친척을 마뜩잖게 여기며, 나한테도 그런 소리 일절 귀담아 듣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채든 은행이든 빚은 빚이다. 빚이 있으면 악착같이 갚으면서 살아야지, 없는 빚을 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그 시대의 일반 서민들에게 빚이란 가난과 무능의 표상이었고 부끄러움이었으며, 동시에 부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나타내는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곧 막을 내렸다. 은행의 주 업무는 여신이 아니라 대출이 되었고, 새 밀레니엄 시대의 은행들은 공격적으로 대출을 권하고 담보를 잡았다. 은행은 주식 투자, 펀드, 자산 관리 등을 하는 복합 금융 기업으로 변모했고, 실물 경제에 자금을 조달하는 보조적 위치에서 독립적인 금융 산업 기업으로 성장했다. 부채가 곧 자산이고 능력인 시대가 도래했다. 투기라 부르던 행위는 합법화되어 어엿한 ‘투자’ 행위가 됐고, 전 국민에게 대출을 권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카드 시장을 둘러싼 금융 자본의 결투가 벌어지던 2000년대 초반, 한 카드 회사가 만들어 낸 “부자되세요”는 전 국민의 덕담이 됐다. 경제 발전의 동력은 ‘산업 역군’에서 ‘금융 투자자’로 바뀌었다. 혁신 경제론은 노동 가치설을 뒤집었다. 신경제의 성장 동력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었다. 벤처 투자 열풍이 불면서 1970~1980년대 개발 경제 시대의 미나리 밭 땅 부자들을 이어 벤처 사장들이 졸부 대열에 합류했다. 미풍양속의 가치도 완전히 전도됐다. 불로 소득은 더 이상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IMF에 의한 폭력적인 구조 조정으로 거대한 사회적 충격 속에서 산업 자본주의에서 본격적인 금융 자본주의로 급속도로 이행한 한국 사회는, 이행에 대한 자기 객관화와 사회적 집단 성찰의 과정을 제대로 밟아 가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경제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의 본격 이행기가 독재 종식과 민주화 시기와 겹치면서, 우리는 ‘민주화’와 ‘시장 자유화’를 종종 혼동했다. 1980년대 말 동유럽에서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은 관료제 해체와 사회주의 민주화의 길로, 더 급진적인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서구 자본 및 그와 결탁한 내부 엘리트들에 의해 시장 자유화로 봉합되었고 ‘자본주의화’로 변질되어 좌절되었는데, 한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펼쳐졌다. 독재의 경험은 관치와 계획 경제를 절대 악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민영화(사유화)와 자유화를 민주화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독재 정권의 자본과 기업에 대한 통제는 민주적 통제로 전환되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적 규제를 약화하고 시장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정치 제도의 민주화와 달리 경제 민주화는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한 채 ‘권력을 시장으로 넘겨’ 주고 말았던 것이다.


냉전 종식 후 1990년대 초반까지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견제 기능을 했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퇴조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반자본주의 경제학의 이론과 사상의 공급처는 점점 줄어들었고, 인문사회과학을 축소하는 대학 정책 속에서 경제 담론의 주도권은 기업 연구소와 NGO 등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넘어갔다. 민간 단체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어느 정도는 수행했지만, 협동조합이나 공정 무역 같은 방식으로 인정 자본주의나 자선 자본주의류의 ‘착한 자본주의’를 ‘야수적 자본주의’의 대립항에 놓는 정도에 그쳤을 뿐,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경제 이론과 실천의 탐구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진보적 교육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민주시민교육이나 대안교육이 반자본주의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완충제가 됐다.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운동과 사회 변혁 운동의 중심에 섰던 칠레의 교육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머물렀던 한국의 진보 교육운동이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이 바로 거기일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치권과 결탁된 여러 대형 금융 사건들이 계속 터져 나왔지만 그때마다 ‘고위층 스캔들’이나 개별 사건으로 다뤄졌을 뿐, 피해는 고스란히 연루된 개인과 사회의 몫으로 남았다. 사건에 대한 총체적 진실이나 역사적 연원을 파악하면서 금융의 지배 구조와 원리를 사회 구조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민주시민교육의 일환으로서 자본주의에 관한 교육과 금융교육이 요청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행하는 경제교육, 그것도 주로 금융교육이나 투자교육에 중심을 둔 교육은 그런 목적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그건 금융 자본의 원리나 무서운 본성을 이해하고, 그게 어떻게 사회적 생태적 파괴력을 가지는지 알려 주는 비판적 교육이 아니라, 그 경제 원리를 잘 알고 돈 버는 이치를 깨우치도록 하는 순응과 내면화 교육이지 않은가.


오래전 부루마블 게임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싸웠던 일화가 다시 생각난 건 최근의 일이다. 교사들의 대화 속에서 ‘보드 게임을 활용한 경제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사는 강원도 인제에서 오랫동안 해 오고 있는 ‘자치와 자급’ 공부 모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선생님의 신박한 경제교육을 봤는데, 인상적이면서도 충격적이더라는 말을 전했다. 벌써 학부모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우리 지역에는 그런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교사가 없다는 불만과 원성도 높다고 했다. 교실을 작은 국가로 만들어 어린이들이 직업 활동과 투자 활동을 통해 돈의 흐름과 투자 원리를 익히도록 한다는 그 사례는 ‘살아 있는 경제교육’ 의 모범 사례로 회자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현실이 이러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과연 ‘자치와 자급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물었고, 다른 누군가는 알아 봐야 나와 상관없는 세상인데 그렇게 안 살기로 한 바에야 아예 모르는 편이 낫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공부 모임은 투자 실무는 아니지만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공부는 한다. 그건 우리의 자치와 자급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진보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 온 많은 교사와 학부모들도 이런 지점들이 혼동될 것이다.


청년들의 ‘영끌 투자’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주변의 교사들로부터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이 필요하다’라는 이야길 많이 들었다. 그때 말하는 경제교육의 필요성은 어떤 맥락이었을까. 금융이나 투자에 대해서 스스로도 무지한 교육자와 그들이 피교육자에 대해 종종 취하는 태도, ‘애들은 몰라도 돼’가 청년들을 아무런 준비 없이 사회로 내보내고, 잘못된 투자로 이끄는 데 기여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우려에 나도 반쯤은 동의가 됐다. 특히 창업으로 경도된 진로교육을 보면서 경제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 조사에서 경제 활동 인구 중에서 20대의 금융 이해력이 가장 낮다고 나타난 적도 있다. 그런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닌가. 스무 살이 되도록 입시 체제에 갇혀 사회로부터 사실상 격리되어 있다 막 사회에 나왔는데, 무슨 금융 이해력이 높을 수가 있겠는가.


얼마 전 유튜브 등에서 배달 전문 떡볶이 창업 사례를 본 적이 있다. “떡볶이 팔아서 저렇게나 번다고?”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가맹점비와 임차료, 재료비, 인건비, 배달 수수료에 세금 등을 제하고 남는 순수익은 매출의 20% 정도에 불과했다. 2000만 원 벌면 400만 원 남는단 이야기다. 그걸로 집세도 내고, 생활비도 쓰고, 대출금도 갚아야 한다. 아침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쉬는 날도 없이 일해야 하지만, 사장이 자신이니 개선을 요구할 대상도 없다. 개업 특수와 코로나19 배달 특수가 사라지면 지금 매출이 얼마나 유지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쓰러질 때까지 일하게 만든다. ‘최저 시급을 받아도 그보다는 많이 벌 텐데’ 싶어 안타깝다. 게다가 탈이 나서 병원에 가고 일을 쉬면 대출금은 어떻게 하나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런데도 젊은 사장님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매출액을 보고 웃는다. 이렇게 ‘큰돈’을 벌어 본 건 난생처음이 니까. 


‘창업 성공 신화’는 유튜브의 인기 콘텐츠가 되었다. 여기서 ‘성공’은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벌어서’ 집도 사고, 빚도 갚는 것이다.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은 없다. 좋은 삶이란, 돈을 벌면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공한 사장은 사업을 확장하러 더 바쁘게 더 쉴 틈없이 일하고 있다. ‘매출 대부분은 누가 가져갔을까? 그건 정당한 걸까?’ 이런 질문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소수의 성공 신화를 방송해 채널 운영자도 유튜브도 돈을 번다. 자기의 노동이 들어가 갈리는 맷돌에서 보이지 않는 투자자들은 수익을 뽑아 가고 있는데, 벌어서 갚고 빚내서 버는 악순환의 굴레에 발을 들여 버렸다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른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제대로 된 ‘경제교육’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공공성 없는 경제교육


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경제교육’의 상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경제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선 누구나 공감하지만 방향, 목표, 방법에 대해선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논의, 합의 과정이 없었다. 그 사이 자본과 정보, 인력, 네트워크를 앞세운 영리/비영리 업체들이 경제교육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경제교육이란 곧 자본주의 교육과 동일시되며, 누리집 등을 살펴보면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아니라 철저히 체제에 순응시키는 교육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교육에서도 교육 시장화와 외주화는 교육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경제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강조되는 것은 거의 금융·투자교육이다. 시장 경제와 화폐 경제를 전제하고, 자본주의 주식 시장을 모델로 한 투자교육이 대부분이다.


투자교육과 합리적 소비교육은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노동교육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도 짚어야 할 부분이다. 어떤 교사가 초등 교실에서 노동권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일상 체험형 교육을 했다면, 그 교사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모의 투자’만큼, 모의 파업도 쉽게 허용될 수 있었을까? 어린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직접 단체 협약을 해 보는 건 가능했을까? 그런 교육 실험을 한 교사는 TV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의 투자교육을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라고 환영했던 학부모들과 사회 여론은 그것이 노동교육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서의 권력관계는 교육에서도 그대로 작용한다.


날로 심각해지는 교육의 외주화는 경제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같은 경제 단체는 학교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금융교육 교재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강사를 교육하고 파견하는 등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금융감독원도 금융교육센터 누리집을 통해 초·중·고 학생 및 대학생과 성인까지 생애 주기별 경제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다양한 금융교육 보드게임 교재와 이러닝 자료를 제공한다. 이런 자료를 활용하여 학교 투자교육에 적극 앞장서는 교사 모임도 늘어나고 있다. 한 초등 교사는 ‘학급 주식 시장을 만들어, 등락이 적고, 꾸준히 상승하는 미국의 우량주인 스타벅스, 디즈니, 애플 등으로 종목을 정해 아이들이 이익을 보게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 학급 어린이들은 가상 소득을 진짜 기업에 모의 투자하는 체험 학습을 하는데, 이 교사는 “국내 주식도 다루면서 뉴스가 풍성해지고, 오르내림도 커져 아이들 한숨 소리가 커지는 중”이라고 전했다.❶ 


투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주식 시장이 국제 유가나 식량 파동, 전쟁이나 팬데믹, 기후 위기 등 여러 가지 국내·국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것이 곧 등락에 반영되기 때문에, 투자교육은 주식 변동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접하고 그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창문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공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투자교육은 손해를 보면서도 사회적 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시민들을 길러 낼 수 있을까? 어린이 투자교육은 더 이상 금기시되거나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금융교육은 중요한 선행 교육이 되었고, 학교 현장에서 이를 적극 선도하는 교사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교사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좋은 일에 쓸 수도 있고 착한 투자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결국 부자가 선인의 조건이요 선행의 지름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부자를 존경하는 사회를 탄생시킨 논리이자, 부자 신분 사회를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논리다.


우리 아버지의 시대는 끝나 버렸다. 이제 청렴과 청빈은 어디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대출 불가는 낙오자이자 무능한 자에 대한 낙인이다. 근면 성실의 이데올로기가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를 훈육했다면, 모험적 투자자가 되라는 앙트레프레너십은 금융 자본주의 시대의 개인을 훈육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투자하는 인간, 호모 인베스투스homo investus’로 한발 더 진화했다. 고대엔 ‘오이코노미아가 아닌 것’, 즉 ‘반 경제’로 여겨졌던 ‘돈으로 돈을 버는 기술’과 금융업이 오늘날에는 경제의 핵심이 되었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 이 땅에선 불과 20여년 사이의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약탈적 금융 자본주의가 아닌, 생산과 소비로 성장하며 분배가 좀 더 공정했던 산업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금융화된 세계는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 위기를, 자본주의를 더 극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여 극복하려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른 경제교육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비판 없이 금융 경제 원리와 투자 기술을 실용적인 교육, 경제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교육해도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이런 경제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경제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봉쇄한다는 것이다. 계획 경제도 사회주의 경제도 실패한 것으로 규정되어 왜 실패했는지를 성찰하며 다시 도전해 볼 기회조차 박탈해 버린다. 시장은 제2의 자연처럼 주어져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개혁도 개선도 그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 자본주의 단계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연대적 민중 경제의 양식들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는 자본으로부터 탈주하는 다양한 대안 경제들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시장 경제 시스템이 영원히 작동할 것을 전제한 금융·투자교육은 기후 위기 시대에 요청되는 생태교육-전환교육과 정면 배치된다. 지구상의 어떤 존재도 무한히 성장하는 것은 없다.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 생산과 소비조차 지구적 생태 한계 안에 있음을 가르쳐 준 것이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 내의 모순을 폭로한 ‘경제 위기’와 ‘금융 위기’였다. 2008년의 위기는 해결되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겨우 봉합되어 언제 터질지 모를 상태로 여전히 현재 진행중인 상태다. 


당면한 기후 위기는 자본주의가 낳은 결과이며, 자본주의 위기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자본은 또다시 금융과 기술로 성장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바로 그 성장주의 경제의 패러다임 자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교육운동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대지에 기반한 자연의 오이코노미아, 생태 경제는 무한히 증식하는 숫자의 경제, 금융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 자연의 생명 존재가 단순히 수탈당하고 파괴당하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자본으로부터 탈주하며 시장 경제와 싸우는 자연의 경제도 우리의 중요한 대안 경제의 교과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교실로 가져오는 대신 자본주의적 공리를 뒤집는 다양한 반자본주의적 실험을 교실에서 해 볼 수는 없을까? 교실에서 국민 경제가 아니라 민중 경제, 금융 경제가 아니라 생태 경제를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앞서 언급한 학교 금융·투자교육 사례에서 학생들은 임금을 노동 강도와 시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분받았다. 힘든 일에 더 많은 보수를 책정하는 건 바람직해 보이지만, 다른 노동에 다른 임금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건 노동의 위계와 임금의 위계가 그에 따른 사회적 위계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 또한 당연히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런 관점은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보는 신화나 인간의 노동을 상품화하고 임금으로 가격을 지불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설혹 참여자들이 스스로 법을 정하고, 노동의 가치와 임금에 대해 결정할 수 있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르는 게임의 룰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화폐를 투자 수단이 아니라 교환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삶에 필요한 교환을 위해 모두가 똑같은 양으로 교환 수단을 나눠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외환 위기로 파산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국가가 인수하고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국유화와 노동자 경영 모델의 사례로 종종 언급되는 아르헨티나의 바우엔 호텔에서 노동자들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도 훌쩍 뛰어넘는 ‘다른 노동, 동일 보수’의 원칙을 만들어 낸다. 최고 경영진부터 회계 담당자, 청소부까지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호텔에 필요한 사람들이고 생계에 필요한 돈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노동과 보수에 대한 다른 기준과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노동은 모두의 필요에 부응하는 활동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제공하는 것이다. 보수는 모두의 생활 필요에 부응하는 만큼의 비용을 동등하게 할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위 경영진부터 말단 청소부까지 똑같은 보수를 받는 바우엔 호텔은 경영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모두가 자기 일터의 경영자이고 동시에 노동자인 자주 관리 회사를 실현한다. 


이런 사례는 상품 교환이라는 시장 경제의 틀에 갇히지 않을 때 대안의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할 수 있는 한 계속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한계를 정해 두고 ‘성장하지 않는 경제’를 자체적으로 추구하고 실현했던 시골 빵집의 실험은 어떤가. 투자를 통해 계속 증식하는 돈 대신, 썩지 않는 돈에 대항하며 자연의 다른 모든 생명과 같이 ‘부패하는 화폐’를 고안했던 실비오 게젤의 ‘가치가 감소하는 화폐’를 교실에서 도입해 보는 건 어떤가.


우리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인간의 경제와 자연의 경제 속에서, 이런 사례를 수없이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자본 시장이 전국의 교실에서도 똑같이 수행되는 단일 경제 모델 대신, 각 지역과 마을에서 찾아 낸 잊힌 경제와 책이 밭에서 배운 동물의 경제를 다시 살려 내고 적용해 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어 시장과 상품 회로에서 벗어난 경제의 그물망을 촘촘히 연결해 본다면, 우리의 반자본주의 교육은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 원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시장 전체주의와 자본의 독재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을 함께 고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지치고 파괴당하지 않도록 서로를 살리고 보살피는 돌봄 경제의 경로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지금 시급히 필요하고, 시도해야 할 미래 교육이고, 경제교육일 것이다.




❶ “학교에서 투자 가르쳐요(1) 배곧해솔초 김건 선생님”, 〈어린이경제신문〉, 2021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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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