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특집] 지금의 경제교육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 (진냥)

특집 / ‘자본주의를 위한 경제교육’을 넘어



지금의 경제교육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

- 금융, 투자가 아닌 경제시민교육을 위해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위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채움활동가. 고양이 세 분을 모시고 초등 교사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교사라고 밝혔을 때 ‘요즘 학생들 말 안 듣는다면서요?’라는 혐오 발언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말 그대로 투자 광풍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갔다. 대선으로 사회적 이슈가 집중되면서, 선거 이후에 달라질 시장 동향을 일단 봐야 한다는 심리가 대세를 이루어 조금 진정되었지만, 2021년의 한국 사회는 투자 열기로 뜨거웠다. 이전과 달리 특정한 투자 영역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었다. 주식이면 주식, 부동산이면 부동산, 코인, 금, 난, 소, 음악 저작권 등 마치 전 국민이 뭐가 됐든 간에 투자를 하고 있고, 해야 하는 것만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느껴졌다. 투자를 안 하면 마치 어리석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투자할 돈이 없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영끌’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영혼까지 끌어모아 받은 대출금으로 사람들은 투자를 감행했다.


투자가 일반화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금융 투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금융감독원에서는 2020년에 신규 개설된 비성년 소유 주식 계좌는 2019년 대비 5배가 넘는다고 발표했다. 온 미디어를 통째 흔든 〈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의 우승 상품은 상금과 더불어 10대를 타켓으로 하는 금융 상품의 광고 계약이었다. S-MAT 같은 금융 자격증에 대한 청소년층의 관심도 커졌는데, 이에 대해 한국증권개발원 대표는 청소년 금융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자본 시장을 희망의 미래로 이끌 인재를 양성하겠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왜 굳이 청소년들이 희망의 미래를, 더구나 자본 시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개인을 지우는 언어


자본주의에서는 큰 자본을 굴릴수록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 내기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굴릴 수 있는 돈이 많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높은 소비 수준을 가진 한국에서 집이나 자동차 같은 큼직큼직한 소비재의 가격은 ‘돈’이 아니라 ‘자본’의 수준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돈을 모으거나 빌려서 자본을 만든다. ‘시드 머니’ 운운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윤율 또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자본을 만드는 과정이다. 모두가 자본가가 되어야 하는 시대, 대체 자본가가 누구이고 어느 정도의 자본 소유까지가 소시민인지 혼란스러운 시대다.


이 혼란에는 이 모든 말들이 누구의 입장에서의 언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영끌 투자’ 광풍을 자꾸 투자, 투자 하는데 사실 그렇게만 불러선 안 된다. 투자는 그 돈을 받는 기업의 입장, 자본가의 입장이 더 반영된 말이다. 개인의 입장, 금융 소비자 혹은 경제 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대출이다. 개인이 집을 구입할 때 은행이 대출해 주는 것도 정부의 지침 때문이지 은행이 개인의 사정에 대해 이해하여 투자하고 리스크를 함께 감당하려는 게 아니다. 투자자와 달리 수익률이 낮다고 해서 자금 회수를 늦추거나 적게 하지도 않는다.


대출은 별도의 계약이고 영끌 투자자는 동시에 ‘영끌 부채자’라고 부르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부채를 투자라고 호명하는 것은 경제 활동에 따르는 리스크를 개인이 모두 감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빚짐’을 가르치지 않는 경제교육


내 어머니는 부대찌개를 파는 음식점을 한다. 혼자 하는 가게라 시류에 맞지 않게 배달도 하지 않는다. 공단 지역에 있어 점심 장사 중심이라 그러기도 했다. 그런데 공장들이 직영 식당을 만들자 주변 상권이 죽어 갔고 엄마의 가게도 손님이 급속히 줄었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가게의 시설은 낡아 갔다. 인테리어든 간판이든 새 냉동고든 자금이 필요했고 엄마는 나의 사촌에게 연락했다.


사촌이 가게에 들른 날을 떠올리면 엄마는 아직도 부들부들 떨며 화를 낸다. 그는 매상은 어떻고 가게에 설비들은 무엇이 있는지, 주요 고객층은 누구고 어떤 경영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가게를 한참 둘러보고 갔다고 했다. 그 과정이 엄마에게는 너무 모욕적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지, 무슨 지한테 투자를 하라고 했냐며, 대출 업체도 안 그러겠다고 화를 냈다.


아마 사촌은 자신이 돈을 빌려주니 갚을 만한 능력이 있는지 따져 보고 싶었을 것이다. 반면 엄마는 친척끼리 어려울 때 좀 도와달라는 의미의 요청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려면 받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였던 때가. 이제는 아는 사람끼리는 돈 빌려주는 거 아니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다. TV 광고에서도 아는 사람에게 돈 빌리려고 전화하기보다는 더 편리한 모바일 대출을 받으라고 말한다. 사람에게 빚지는 것보다 더 높은 이자율을 요구하는 기업에 빚지는 것이 더 현명하고 세련되다는 광고다. 돈을 빌려서 투자하는 게 당연하지만 또 한편으로 돈을 빌려야 하는 걸 구질구질하게 드러내지 말라는 세상의 주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고 빌렸던 유래는 본래 상부상조였다. 결혼이나 장례 등 혼자 또는 한 가정이 마련하기 어려운 규모의 자본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 돈을 보태어 왔다. 그건 여러 사람이 조금씩 돈을 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보태는 사람은 다음에 상대방이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돈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빚짐’을 기억하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 결혼이나 장례에서 오가는 부조금은 상호 간의 빚짐을 통해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함께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축하, 미안함, 위로 같은 감정을 돈으로 대신하는 행위가 되었다.


‘빚짐’은 경제에서의 관계성이자 연대다. 그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 온 생애를 살아갈 수 없기에 모든 사람은 빚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빚짐은 비정상적이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보편적인 생애 주기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일이라고 오랫동안 말하고 배워 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고 혼자만의 능력으로 살 수 있어야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위기 감과 불안감을 학습하고 있다. 투자 광풍 속에서 그 위기감은 더 커져, 투자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협박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금융 자본들이다. 이 위기감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모두가 투자의 귀재가 되는 것일까? 모두가 알다시피 투자는 항상 리스크를 안고 있다. 아무리 투자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는가.


사회는, 그리고 교육은 사람이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발전해 온 제도다. 그래서 교육은 위기감에 기대기보다 효능감에 기대야 하고, 협박보다는 지원과 촉진에 기반해야 한다. 그런데 금융, 대출, 돈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교훈을 찾아봐도 보증 서지 말라거나 대출은 하면 안 된다는 정도가 전부다. 이슬람교에서는 돈을 빌려주더라도 이자는 받으면 안 된다는 교리가 있다고 한다. 돈은 필요해질 때가 있으니 서로 빌려주고 빌릴 수 있지만, 이자는 신의 소유인 시간에 따라 주어지는 이윤이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2000년대 미국발 금융 위기에서 이슬람계 금융사들은 타격을 덜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경제 활동은 어떤 방향, 즉 가치에 따른 자원의 배분이고, 그렇다면 대출에서도 가치와 윤리가 있어야 할 텐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것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는 어머니의 수술비를 위해 저축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가 돈을 갚지 못해 감옥에 온 ‘법자’가 등장한다. 돈을 갚지 못해서 인식의 구속을 당하는 것이 정당한 조치인가? 부채의 공소 시효는 언제까지 인정되어야 할까? 지인 간에 무이자로 이루어진 부채가 아닌 이상,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돈을 빌리는 사람 때문에 이윤을 남긴다. 그런데 왜 돈을 빌린 사람이 을이 되고 돈을 빌려준 사람이 갑이 되는 건가? 이런 질문들은 경제교육이 아니라 도덕의 영역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든 필요한 고민이고, 고민할 계기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경제교육 중에 금융교육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금융교육을 ‘투자법 트레이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너무 조야하다. 금융을 삶에서 어떻게 여기고 다루며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더불어, 금융 역시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 글에서 ‘빚짐’이라고 표현한, 돈을 둘러싼 관계성 역시 교육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 시민으로서 대우하는 교육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해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법정 이자율 교육을 했다. 학생들이 서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일이 잦았는데 그 이자가 너무 커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문제를 알게 되었을 때 접한 사례는 1만 원이 좀 넘는 금액을 빌렸는데 갚지 못하다가 점점 금액이 늘어나 30만 원이 넘는 돈을 갚으라고 요구받고 있어서 학교폭력으로 신고된 경우였다. 그래서 학년 교사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로 했다.


첫째 내용은 ‘안정적인 수입이 없기 때문에 책임지기 어려우니 되도록 학생 간에 돈 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돈을 서로 빌리고 빌릴 수밖에 없다. 학원을 다니든 친구들과 놀든 보통 저녁 시간까지 바깥에 있는 학생들은 저녁 식사를 사 먹게 되고 그때 돈이 없다고 해서 굶을 수는 없으니까. 혹은 같이 먹으면 이번엔 내가 사고 다음번에는 네가 사라는 식의 약속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둘째로, 친구 간에 돈을 빌려주더라도 이자는 받지 않도록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때 이유로 들 수 있는 논리가 별로 없었다.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 어린이들은 이자를 받으면 안 되나? 친구 사이라서? 요즘은 친구 사이에도 이자를 받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법이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수입을 얻는 것은 대부업으로 등록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친구들끼리 서로 우정으로 이루어지는 돈 거래에서는 이자를 받지 말자는 설명을 하기로 했다. 


셋째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학생 간 금융 거래가 불법임을 알려야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법정 이자율. 당시 법정 최고 이자율은 20% 중반대(지금은 20%)였다. 2만 원도 안 되는 돈을 30만 원으로 돌려받겠다는 것은 법에서 정한 이자율 이상이고, 이것은 불법 행위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수업했다. 아마 이게 학생들 앞에서 내가 가장 노골적으로 돈 이야기를 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아쉬움이 들었다. “이게 법이야, 법! 어기면 안 돼!”라는 방식 말고 다른 접근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왜 나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얻는 소득, 즉 금융 소득의 한계가 어느 정도여야 정당한지에 대해 학생들과 토론해 보지 않았을까. 개인이 은행에 저금 했을 때 연 1~2%의 이자를 받는 것에 비해 금융 기관은 10배가 넘는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해서 왜 학생들과 이야기 나누어 보지 않았을까. 규칙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고 사회의 경제 활동과 의사 결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러니까 경제 시민으로서 자신의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안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교사로서 너무 큰 아쉬움이 들었다.


정치교육에서 학생들이 학생이자 유권자이며 곧 시민이듯, 경제교육에서도 학생들은 경제 시민이다. 즉, 경제교육에서 학생들은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라는 사회 영역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이며,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어떻게 개입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실제로 권리 행사의 경험을 보장받아야 한다. 때문에 경제교육은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를 포함하여야 한다.


먼저, 경제교육은 경제 시민인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경제학과 관련된 개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시민으로서, 소비자로서 이미 많은 조세를 납부하고 있다. 따라서 세금이 어디에 어느 정도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안내를 받을 권리가 있다. 공공 기관과 사기업,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의 재정 운용이 어떻게 다르며, 그래서 그 각각에게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경제 윤리를 어느 정도로 요구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학생들은 경제교육을 통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윤미향 국회의원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및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둘러싼 회계 의혹이 연일 보도될 때, 우리 사회에 재단과 후원, 모금, 당사자 개인 지원, 사업비 등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음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보도를 보면서 판단하려 했으나 그 판단의 기준을 가지지 못해 가짜 뉴스에 보다 쉽게 설득되거나 혹은 감정에 기댄 판단을 하기도 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성인지 예산이 31조니 40조니 하는 가짜 뉴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득해 냈는지를 떠올려 보자. 정치적 실천은 알고 판단하는 것을 전제하며, 따라서 알 권리는 모든 정치권의 바탕이다. 성인지 예산에 대한 가짜 뉴스 논란은 현재의 경제교육이 국민들의 시민권을 존중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둘째, 경제교육은 일종의 합의 과정이어야 한다. 교육은 새로운 사회 구성원인 후발 세대에게 현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규칙들을 안내하고 허락을 구해 체계의 정당성을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후발 세대가 현재의 체제를 배우지 못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낮아지지만, 또 한편으로 후발 세대가 현재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 때문에 교육은 기본적으로 설득과 합의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경제교육은 어떠한 정당 성을 재생산해 내고 어떠한 합의를 만들어 내야 하는가? 경제를 둘러 싸고 발생하고 있는 갈등들, 이를테면 전반적인 조세 저항, 상속세나 재산세에 관한 논쟁, 이전 소득 등의 복지 제도, 건강 보험과 국민 연금 제도의 필요성, 기본소득 등에 관한 논의에 보다 많은 사람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경제교육이 쟁점들에 대한 공공의 합의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하여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공공의 합의를 형성해 나가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경제교육 역시 다르지 않다.


셋째, 사회가 뭘 해 줄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안내하는 경제교육이어야 한다. 파업은 노동자의 권리이고 1인 시위는 모든 국민의 권리라는 것을 지금의 학교에서는 가르친다. 그러나 경제에서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경쟁할 권리 외에 별다른 권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여러 교·사대생 및 교·사대 지원자들로부터 가족의 부채가 너무 많거나 부모가 파산하거나 했을 때도 교사 임용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당연히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연좌제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가족은 경제 공동체이고 사람들은 가족의 경제 활동으로 인해 자신이 받을 위험에 대해 어느 만큼 사회가 자신을 보호하는지 종종 알지 못한다. 특히 개인 회생과 개인 파산 제도, 기초 생계 급여와 교육 급여, 아동 급여 등은 반드시 경제교육에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들이다. 학생인권조례에 빠지지 않아야 할 ‘임신 또는 출산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경제 교육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아동 급여를 신청하고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모든 학생에게 제공되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청소년들은 가족의 학대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동한 돈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친권자들에게 강탈당한다. 빈손으로 길바닥에 쫓겨나거나 가족으로부터 대출을 강요당하는 청소년들도 제법 많다. 부모가 사망했을 때 상속 포기를 해야만 부채 승계가 되지 않는 것을 몰라서, 혹은 알았지만 할 수 없어서 빚더미에 올라앉는 사람도 많다. 최근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지원하는 단체도 만들어졌으나 청소년 혹은 20대 초반의 사람들은 상당 부분의 경제적 권리를 제한받고 정보 역시 얻기 어렵다. 때문에 개인 회생과 개인 파산, 한정 상속 등에 대한 내용 역시 경제교육에 포함되어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 복지 제도와 사회 안전망에 대한 안내이자, 가정 내 아동학대 예방 교육이며, 동시에 가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청소년을 사회와 교육이 책임지는 방식의 일부이기도 하다.


더불어 경제교육은 노동을 가르쳐야 한다. 노동(인권)교육과 경제교육이 분리되어 따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금융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했다 하더라도 금융 자본이 투자될 실물 경제가 한계치 이상 무너지면 결국 경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부가 가치의 생산은 실물 경제, 곧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멸시하면서 부자가 되길 꿈꾸는 것은 디디고 선 바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교육’도 이제는 지양할 때가 되었다. 수억 원대 연봉을 받는 펀드 매니저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돌보는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다. 노동자도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자신을 존중하며 생산, 돌봄, 재생산, 서비스, 지식,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노동 간의 연계성을 제시하고 경험하게 하는 경제교육이 필요하다.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는 금융 자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맞다 하더라도, 금융 자본의 경제와 다른 영역의 경제들이 분리될 순 없다. 경제 활동은 하나의 사회 안에서 서로 관계 맺고 통합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경제교육은 그 유기적 관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영끌 투자 광풍에 기대하는 것


폴 윌리스는 1977년 《학교와 계급재생산》에서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이 반학교 문화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를, 이들이 하고 있는 ‘간파’로 분석했다. 학교 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행동은 학교교육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초등 교사인 나 역시 학생들이 이 세상을 간파하고 있는 것을 종종 느낀다. 어린이들 역시 세계의 본질을 마주하며 삶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은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고 가끔 만나는 전학생들은 다른 지역에서 경제적 안정을 획득하는 데 실패해서, 상대적으로 제조업 공장과 일자리들이 더 있는 창원으로 이주한 가정의 자녀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첫돌 때부터 주식 투자 계좌를 만들고 초등학교 때 이미 스스로 투자가가 되는 어린이들과 달리, 내가 만나는 학생들은 대출을 끔찍하거나 ‘완전 망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하고, 뭔가에 자신들이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러니까 자신이 금융 자본 투자가가 되는 상상조차 못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끌 투자 광풍에 대해 학생들에게 설명할 말이 빈곤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자신의 삶과 본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말을 어린이들이 이해하는 과정은 어렵고 난처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 중에 남은 하나의 기대도 있다. 나는 이 영끌 투자 광풍이, 학생들에게 부가 능력이나 그 사람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는 배움을 남기길 바란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지는 것도, 혹은 소위 ‘대박’이 나서 얻게 되는 큰 수익도 그저 운에 따른 것임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 또는 자존감과 관련짓지 않을 수 있길 바란다. 더불어 누군가의 크나큰 부가 요행으로 얻기엔 너무 부당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지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스스로도 다른 사람도 영혼을 끌어모으지 않고 살자고 나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❶ “청소년 주식 투자 늘면서… 잇따라 금융 자격증 응시생도 증가”, 〈매일경제〉, 2022년 2월 28일.

❷ 폴 윌리스, 김찬호 옮김(2004),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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