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에세이] 텃밭에서 서로의 삶을 응원하다 (이상대)

202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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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텃밭에서 서로의 삶을 응원하다

- 대장동농커뮤니티 10년을 돌아보며



허당(이상대)

applebighead@hanmail.net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해직됐을 때 월간 《우리교육》 기자로서 교육 현장을 취재했다. 복직 후 시 읽기와 글쓰기로 학생들을 만나며 《빛깔이 있는 학급운영》, 《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 《로그인하詩겠습니까》, 《곤충전설》, 《폭파 전문 꼴뚜기》, 《나야, 제비야》 등의 책을 기획하고 펴냈다. 삼정중학교 공모 교장 임기를 마치고는 평교사로 복귀, 1년 동안 독서를 중심으로 한 국어 수업을 마치고는 2022년 2월 정년 퇴임했다.





어찌 됐든 다시 봄이 왔다!


감각의 힘은 대단해서 엄동설한에도 ‘입춘立春’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일제히 세포를 열어 바람, 햇빛, 땅의 냄새를 하나씩 호흡하며 대기의 기색을 살핀다. 몸의 본능이다. 이제 우수, 경칩을 지나 춘분에 이르렀음에랴. 농사철이 열렸음을 몸이 먼저 직감한다. 대장동농커뮤니티(텃밭이 경기 고양 대장동에 있기에 붙인 이름이다. 이하 대장커뮤니티)는 지난 1월에 10년을 기념하는 이야기 자리를, 2월엔 풀 멀칭에 대해 학습하는 자체 연수를 열었다. 얼추 출동 준비를 마친 셈이다. 풀멀칭 발제를 맡았던 늘보가 그랬다. 하농은 작물을 살리고, 중농은 흙을 살리고, 상농은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니 올해는 좀 더 약진해 보자고. 어찌 상농까지야 꿈꾸겠냐마는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뜨끔해서 모두가 잠깐 침묵했다. 올해는 의도적인 변화를 시도해도 좋겠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아니었을까. 하긴 의도성이 결합해야 ‘전환’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그간 좀 헐렁했다.



여주, 대장커뮤니티의 시작


대장커뮤니티가 텃밭에서 만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계기는 후쿠시마 핵 발전소 참사 이후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건 ‘교육의 생태적 전환’ 제언이었다. 그간의 삶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그런 속에서 마주한 것이 ‘농’이었다. 왜 농인가. 농은 삶의 기반이자 토대이다. 먹지 않고 사는 이 누가 있으며, 자연에 기대지 않고 사는 이가 어디 있겠나. 이제라도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밀쳐 버린 농을 다시 불러내어 만나야 한다. ‘농을 놓치고서야 어찌 생태적 전환을 논할 수 있겠는가’라는 절박감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농에 대한 관심은 ‘교육농’으로 구체화되었고(교육농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교육공동체 벗에서 펴낸 책 《교육농》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충남 홍동면에서 ‘농사학림’(2012)으로 문을 열었다. 농사학림 1년 공부를 마친 이들 중에 일부가 학습을 더 이어 가고 싶어 했고, 여기에 여남은 명이 추가로 결합했다. 이게 대장커뮤니티의 출발이 되었다. 뭔가를 실천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컸고, 현직 교사들은 학교 텃밭을 일궈야 하는 당장의 과제를 안고 있기도 했다.


첫 아지트는 경기 여주. 선뜻 당신의 거처를 내준 봄비갠후 덕분에 첫걸음이 가능했다. 그의 집엔 50평 남짓의 텃밭과 네 마지기의 논이 딸려 있고, 학기 중엔 집이 비어서 숙식을 같이하며 뭔가를 궁리하기에 맞춤했다. 그렇게 2013년 봄부터 매달 1박 2일 ‘농사 학습’을 시작했다. 밭작물을 심고, 모를 내고, 김매고, 수확하고…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것으로 농사를 세밀하게 체화하기는 어려웠으나, 아쉬운 대로 흙과 작물 그 생명의 순환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여주 2년은 학습과 우정의 결속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낮엔 땅과 작물을 만나고, 밤엔 주로 환경이나 농사 관련 영상을 학습하면서 생각을 만들었다. 기억 속에 있는 농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복기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다 같이 차려 먹는 아침저녁 밥상과 늦은 술자리는 구성원을 ‘식구’로 묶어 주었다. 이야기는 늘 차고 넘쳤다. 봄부터 겨울까지 흙의 한살이를 경험한 것은 좋은 밑 공부가 되었고, 일부는 따로 시간을 내어 화덕과 난로를 만드는 적정기술 1년 과정을 실습하기도 했다. 그즈음 충남 홍동에서 교육농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함께하며(2014년), 그 의지를 모아 2015년 제1회 교육농축제를 열었다. 그때 행사 안내 글이 아래와 같았다. 당시 우리의 열쇳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원문 일부를 소개한다.


“교육농敎育農은 농이 가지고 있는 전인적, 생태적 가치에 주목하고 다음 세대와 나누고자 하는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교사농부이자 농부교사로, 교육 현장과 논밭, 농촌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대화와 공부, 경험, 그리고 우정으로 교육농의 질문에 함께 답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2014년 교육농협동조합을 시작하였습니다. 한 해 동안의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 단단한 땅을, 오늘의 교육을, 더불어 사는 건강한 삶을 함께 농사지을 새 벗을 만나기 위해 교육농 이야기 자리를 열었습니다.”



남태령, 대장동을 거치며 농사의 꼴을 갖추다


농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어야 구체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여주는 서울이 주거지인 구성원들에게 접근성, 일상성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여주를 떠나 서울 사당역 근처 남태령에 땅을 얻었다. 매주 모여서 밭을 만들고, 작물을 정하고, 모종을 구하여 심고 가꾸는 본격 주말 농사가 시작되었다. 남태령 2년은 작물의 처음과 중간, 끝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주 멤버에 3, 4 명이 더 결합하면서 인적 구성이 풍부해졌고, 학교 텃밭과 교류도 풍성해졌다. 이후 임차료 문제로 남태령을 떠나 경기 고양 인근의 대장동(성남 대장동이 아니다!)으로 터전을 옮겼고, 그곳에서 2년 농사를 짓다가 다시 인근으로 옮겨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남태령 시기는 여전히 학습 수준이었다. 여주 농사를 이끌던 봄비갠후가 없으니, 파종 시기도 놓치기 일쑤였고, 일조량이나 키 높이에 따른 작물의 배치도 서툴렀다. 농부는 봄밭에서 여름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름 공부를 했다지만 막상 밭에 서니 작물과 소출만 보였다. 하농 중의 하농. 주변의 눈총도 따가웠다. 여주 이후 우리가 지킨 나름의 원칙은 3무 농사였다. 비닐과 농약, 제초제를 쓰지 않는 것. 농약과 제초제야 수확량의 손실을 감내하면 되는 것이었으나, 비닐을 쓰지 않으니 무엇보다 풀 억제가 어려웠다. 아무리 신문지 등으로 멀칭을 해 봐야 장마철이 지나면 우거진 풀이 키를 넘었다. 그러잖아도 초보티가 역력한데, 풀 반 작물 반이라니. 눈총은 대장동에서도 여전해 주변 농사 팀에게 “뜻은 가상하나 농사꾼으로는 부적격”이라는 뒷말을 듣기도 했고, 기어코는 강제 퇴거를 당했다(땅 주인은 우거진 잡초밭을 못 견뎌 했다).


그래도 대장동 무렵부터는 조금씩 농사로서 꼴을 갖추게 되었다. 4, 5년 경험이 쌓이니 절기에 따른 파종과 재배, 수확 경험이 자연스러웠고, 학교 텃밭 경영쯤은 수월해졌다. 작물을 심는 일에 급급하다가 점차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여 경작하는 안목까지 생겼다. 늘보의 제안에 따라 풀로 풀을 억제하며 밭의 생태계를 돌보는 풀 멀칭의 개념을 적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교육농협동조합을 통해 두루 배우고 견학하며 농사머리가 커진 덕분이기도 했다.


수확 작물을 음식으로 나누는 밥 나눔도 자리를 잡았다. 그 전에는 식수가 없어 수확 작물을 나누는 것에 그쳤으나, 대장동에서부터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 거칠더라도 수확한 작물로 함께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식사가 어디 밥만 나누는 자리인가. 이야기도 풍성해지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밀도도 깊어졌다. 미국의 에더블 스쿨야드Edible Schoolyard 프로젝트가 텃밭과 부엌을 교육과정의 양 축으로 삼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년 농사는 어떤 식이 되었든 가꾼 배추와 무로 (때론 1박 2일로) 김장을 담그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농을 통해 나의 삶은 바뀌었는가


현재 3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은 여러 면에서 여건이 월등하다. 우선 조리 기구가 잘 갖춰져 다양하게 ‘만찬’을 나눌 수 있고, 쾌적한 담화도 가능하다. 음식물 찌꺼기를 버릴 수 있는 퇴비장이 있고, 재래식 화장실도 있다. 토양도 기름져서 두더지만 피하면 심은 만큼 거둘 수 있다. 농사도 한껏 익숙해져서 매주 할 일을 예측할 수 있었고, 덕분에 일과가 간결해졌다. 여주 원년 멤버가 건재하고(남태령 때 활동했던 몇 명이 빠지긴 했지만) 새로이 수정 벗과 소희 벗 부부가 합세하고, 학교 텃밭 경험이 풍부하고 공부가 깊은 후후네 부부가 복귀하면서 농사 대오도 탄탄해졌다. 작년부터는 계절별로 팀(봄팀, 여름팀, 가을팀)을 나누어, 담당 팀이 이끔이가 되어 농사와 식사를 주관하니 일상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럼 앞으로도 이런 기조를 쭉 지속할 것인가?

여기엔 의견이 좀 분분하다. 작물을 가꾸고 밥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는 구성원도 있고, 뭔가 더 해 봐야 할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구성원도 있다. 교육농 초기에 세웠던 ‘농적인 삶’에 대한 지향을 견지하고 있는 구성원도 있다. 풀씨 같은 경우는 교육농장을 세우고 싶다는 바람을 놓지 않고 있다. 그 층위가 좀 더 분명해진 건 코로나19의 영향도 컸다. 코로나는 우리가 선 자리를 다시 살피게 했고, 매 순간이 삶의 분기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기후 위기와 관련해 구성원들의 삶의 예민도가 높아진 것이다. 하긴 요즘같이 거친 시절엔 무탈한 것이 내심 불안할 때도 있다. 그래서 지난 1월에 10년을 돌아보는 이야기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논의가 풍성해야 ‘좌표에서 서사로 나가는 길’을 탐색할 수 있다.


구성원들의 결이 다르고, 놓인 상황이 다르고, 삶에서 차지하는 대장커뮤니티의 비중이 각자 다르지 않은가. 다만 ‘이대로도 의미가 있다’라는 구성원들에 비해, ‘농’을 중심으로 삶의 자리를 고민하는 구성원들에겐 대장커뮤니티의 현재가 뭔가 아쉽고 목마른 것만은 분명했다.


“우리가 처음엔 교육의 전환, 삶의 전환을 화두로 태동했던 모임이고, 그래서 여주에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3, 4년 지나면서 뭔가 느슨하고 힘이 빠지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이게 다인가? 저는 여전히 내 삶의 자리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농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그런 지점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나 모색이 아쉬운 거죠. 풀씨만 해도 교육농장이랄까 뭔가 다른 수위에서 농적, 생태적 삶을 구현하는 전망을 잉태시켜 보고 싶은데 현재 우리가 그 정도의 결속은 아닌 거죠.” - 늘보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대장커뮤니티는 기본적인 한계치를 안고 있었다. 마음대로 부릴 ‘내 땅’이 없었던 것이다. 그간 땅을 빌려서 하는 농사여서 초기에 꿈꾸고 상상하던 ‘순환’을 시도할 수 없었다. 순환이야말로 생태의 핵심 아닌가. 만일 작은 경작지라도 우리 땅이 있었으면 어떤 거사가 가능했을까. 부엌과 텃밭을 양 축에 세워 식생활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퇴비를 만들고 그것을 밭으로 되돌리는 생태 순환을 기본적으로 구현했을 것이고, 닭도 키우고 토끼도 키우고, 벌통도 들여놓으면서 (실제 늘보는 학교 옥상에서 양봉을 하고 있다) 더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토록 꿈꾸던 생태 화장실도 냉큼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도 버리는 것 없는 완전 순환체! 우리 커뮤니티가 이런 기반 위에 있었다면 구성원들의 상상력도 전혀 다른 크기로 열렸을 것이고, 학교로 실어 나를 교육의 결도 달라졌을 것이다. 선자리가 다르면 생각도 달라진다. 이런 기대치가 늘 현재에 대한 아쉬움, 갈증으로 남은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풀씨가 상상하는 ‘내 땅’ 위의 교육농장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갈 수도 있다. 물론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삶의 중심축을 움직이는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살아야 전환이 가능하다지만,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나 혼자의 결단과 용기만으로 넘어설 수 있는 문제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고 보면 늘 최종 전선은 ‘우리 안의 자본주의’이다.



커뮤니티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

그럼에도 농사로 커뮤니티를 10년씩이나 이어 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어떻게 10년이 가능했을까. 구성원들은 ‘사람들이 좋아서’라거나 ‘부담 없고 편해서’라고 입을 모으지만, 좋은 사람들이 따로 있겠는가. 작은 집단인 데다, 초기에 여주에서 매달 숙식을 같이하며 쌓았던 우정의 두께가 큰 역할을 했다. 허술해도 서로 틈새를 메웠고, 흠결을 흠결이 아니라 특징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치 가족 같은. 


아닌 게 아니라 연령대, 성비, 가진 자리(역할) 별 조화가 절묘해서 대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기는 하다. 덕분에 서로의 삶의 경험치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고, 그것이 커뮤니티의 속도나 완급 조절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느슨한 결속’도 기여를 했으리라. 실제로 시간여행자는 느슨함 그 자체가 공동체의 중요한 지속 요건이라고 분석한다. 뚜렷한 목표와 성과를 전면에 내걸면 진척의 정도는 빠르겠지만, 조직 생리상 서로가 뭔가에 ‘푸쉬’당하는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면 지속과 협력에 문제가 생긴다. 구동존이求同尊異 - 각각 다른 개인들이 제 빛깔로 다정하게 공존하며 교집합의 힘을 키우려면 느슨함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느슨함은 자발성을 촉진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도 한몫 거든 요인이겠다. 수다는 우울감을 줄이고 자존감을 향상시킨다지만 대장커뮤니티의 수다는 그걸 넘어선다. 때론 교실을 둘러싼 정보 교류의 장이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의 고난을 돕기 위한 집단 협력의 장이기도 하고, 때론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힘에 대한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구성원들의 사업장이 다르니 각자 가져오는 이야기도 다채로운 것이다. 하긴 당신의 주력 직장에 8할의 힘을 쏟고, 나머지 힘을 쪼개 농사를 짓는데, 이 정도의 이야기 소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뭐니 해도 하나의 조직이 지속되려면 굳건한 중심이 필요하다. 전체 맥락을 꿰고 있고, 구성원의 처지도 잘 알고, 슬쩍 빈틈을 채워 주기도 하고, 속도를 조율하는. 그래야 외부의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회복 탄력성을 가질 수 있다. 독서 모임이 되었든, 동호회가 되었든, 농 모임이 되었든 마찬가지이다. 회복 탄력성이야말로 지속성의 핵심이다. 대장커뮤니티에는 풀씨가 있다.


“우린 풀씨가 지키고 있어서 가능하다고 봐요. 느슨해 보이지만 그걸 잇는 연결고리가 풀씨잖아요. 마치 왕거미처럼 여기 줄이 끊어지면 다시 잇고, 다른 쪽이 허술하면 달려가서 잇고, 그러고 있어요. 작년 올해 팀으로 움직이면서 역할 분담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빈틈 사이에도 늘 풀씨가 있었어요.” - 후후네


그럴지라도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안 보이는 법!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10년이라니!



대장커뮤니티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2022년은 향후의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우선 1월 이야기 자리에서 결의한 대로 올 농사는 무경운, 풀멀칭(흙살림), 작물 섞어짓기 이 세 가지가 기본 축이 될 것이다. 밭갈이를 하지 않기(무경운)는 처음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농사법에 대해서는 한두 차례 심화 학습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관련 영역에서 공부가 한 발 더 나아가 있는 후후네와 늘보가 농사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별 공부가 전체 공부로 확대되는 과정이 필수적이겠다. 


아무래도 큰 변화는 풀씨의 행보에서 올 조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풀씨는 오래전부터 교육농장, 교육농장학교를 꿈꿔 왔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텃밭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방(혹은 학습장)을 갖춰 삶과 교육의 합일을 실천하는 공간으로서 교육농장(학교)을 조용하게 탐색하고 있다. 지역 네트워크도 고려하고 있다니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부지, 경비, 운영 방식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어쨌든 풀씨는 올해 교육농장 건에 주력하겠다고 하니, 우선은 다른 구성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일의 진척 상황에 따라 두 가지 트랙으로 갈 수도 있겠다. 설령 그럴지라도 현재의 텃밭을 중심에 둔 대장커뮤니티의 일상은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 농’보다는 ‘집단 농’이 주는 힘과 치유를 익히 알고 있으니까.


기대되는 지점도 있다. 섞어짓기 농사가 어떻게 우거질지 여름이 기대되고, 올해 퇴임한 평화와 허당이 어떻게 텃밭에 놓일지도 궁금하다. 농사에 의료를 결합해 보자고 제안했던 늘보가 어떤 방안을 들고 나올지도 궁금하고, 구성원의 게으름을 일거에 소탕했던 수정 벗이 다른 지역으로 갔으니 그 향후 또한 궁금하다. 올해는 또 어떤 새로운 벗이 등장하여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어떻게 되어도 그간 그랬듯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독려하는 바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박형일 선생의 말처럼 교육농은 학생들을 향한 것 이전에 나 자신을 농사지어 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대장커뮤니티는 작은 사유의 텃밭이다. 화려하고 거창하지 않다. 내세울 성과도 없다. 다만 좋은 삶을 희망하면서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일궈 갈 뿐이다. 《오늘의 교육》이 제출하는 큰 담론을 만나면 수줍고 부끄러워지지만, ‘생태적 저항’도 이런 작은 공간이 곳곳에 살아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감히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한편으로는 생태적이지 않은 것을 생태적이라고 하는 상징 조작에 맞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 당신들이 말하는 생태적 교육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먹거리, 텃밭, 채식, 동식물 키우기와 같은 활동은 물론 중요한 시작점이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일상의 작은 실천을 정치적 권력 및 사회적 구조와 연결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 채효정,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기후 정의〉, 《오늘의 교육》, 66호(2022년 1·2월), 29쪽


아! 마지막으로 태평이를 기억해야 한다. 5년 전 여주 시절부터 깐부였던 태평이를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방학이면 늘 배낭여행을 떠나고, 그 체험을 글과 만화로 나누던 태평이가 여행 중에 유명을 달리했다. 주말마다 만났던 텃밭 동무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한동안은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디자인했던 하트 모양의 꽃밭을 본떠서 지금도 태평이 꽃밭을 먼저 만든 뒤에야 1년 농사를 시작한다. 태평이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할 뿐이다.




❶ 박형일(2019), 〈농부로 살아가는 교육에 대하여〉, 《교육농》, 교육공동체 벗.

❷ 교육농은 교육의 눈으로 농을 다시 보자는 취지였으니 우선 학교 안에서 ‘농’을 구현하는 것이 첫 단계였다.

❸ 그해 봄비갠후의 어머니를 모시고 고추장 담그기를 실습한 것도 매우 유익했다.

❹ 남태령 구성원 중 1명은 남태령 2년이 끝나면서 학교와 가까운 쪽에 농장을 얻어 새로운 둥지를 틀었고 그 후 학교 텃밭을 마을교육으로 확장하는 놀라운 성취를 보여 주었다. 그의 실천 사례는 《교육농》에 〈마을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❺ 봄비갠후는 농사 경험이 풍부하고 농식물의 생태에 박식해서 초기 구성원들의 교사로 한몫했다.

❻ 미국의 에더블 스쿨야드와 비슷한 개념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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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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