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리뷰] 그들에게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성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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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들에게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 채용택 글, 한가람 그림, 〈참교육〉, 네이버 웹툰



성상민
gasi44@hanmail.net
문화 평론가.
2006년부터 만화, 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나오는 상투적인 말들 중 가장 인상적인 걸 꼽으라면 나는 단연 “요새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다. 무려 기원전 1,7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성하던 수메르 지역(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부근)에서 발굴된 점토 판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한때는 어린이이자 청소년이자 청년이었을, 나이 먹은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쉽게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특히 한국처럼 여전히 아동·청소년의 인권이 갈 길이 먼 나라일수록 이러한 편견은 더욱 실체화되어 움직인다.


그 편견이 구체화된 예가 바로 ‘교권 침해’ 논란 아닐까. ‘교권 침해’라는 단어에는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와 상황이 매우 진하게 농축되어 담겨 있다. 학교의 실제 상황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교권 침해가 문제라고 하는 이들은, 학생들이 ‘바른 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에 서로 친하게 지내진 못할망정 약한 아이를 ‘왕따’로 취급하며 괴롭힌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예의를 모르고 ‘비뚤어진’ 아이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위계 관계를 형성해 대접받아야 할 교사들도 위협한다는 것이 교권 침해를 걱정하는 이들의 관점이다. 강력하게 형성된 교권 침해 담론은 족히 몇십 년째 다양한 변주를 거치며 반복되고 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학생과 청소년의 권리를 존중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전부 가식적인 일이거나 ‘불량한 학생’들에게 교사를 재차 공격할 무기를 주는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학생인권조례도, 청소년들의 인권운동도, 학생과 청소년의 자발적인 움직임도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구도 내에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함께 묶여 ‘조리돌림’을 당하기 마련이다. 실제 교육운동의 내부 또는 청소년인권운동과의 관계에서 전교조는 다른 조직들과 한 몸이라기보단 일정한 긴장 속에서 협력하고 있는 관계에 좀 더 가깝겠지만, 이들에게 그런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인식관과 구도 내에서 설정된 권위와 위계의 구도를 깨는 이들은 모두 ‘적’이자 ‘빠르게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폭력을 ‘참교육’이라 칭하는 현상

 

아마 진작에 아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몰랐던 독자들도 있겠지만, 전교조가 창립 초기부터 중요한 기치로 내세워 온 ‘참교육’은,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현재까지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용례로 쓰이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참교육’의 기치를 뒤집어엎는 왜곡된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마구 폭력을 행사하여 잘못을 깨닫게 하거나 굴복시키는 행위’에 ‘참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러한 용례가 인터넷에서 정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2001년 펠릭스 호세라는 도미니카 출신 프로 야구 선수가, 투수 배영수가 계속 빈볼(위협구)을 던지자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가 주먹을 날렸고 그 이후 우연히도 배영수의 실력이 좋아진 사건이 계기로 회자되곤 한다.


실제로 30년 넘는 전교조의 역사에서, ‘참교육’의 가치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천되었는지는 면밀하게 짚어 볼 문제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봐도 ‘매를 맞아야 말을 잘 듣는다’는 편향적인 속설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인터넷상 ‘참교육’의 왜곡된 용례와 전교조가 표방했던 ‘참교육’의 가치를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참교육’에 새롭게 붙은 문제적 의미는 족히 20년가량 계속 생존했고, 공식적으로 연구된 자료는 없지만 어떤 순간에는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운동에서 사용하는 ‘참교육’보다도 더 빈번하게 쓰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용례가 등장하고 정착한 곳이 ‘디시인사이드’를 비롯해 익명성이 강한 동시에 남성 유저가 많은 커뮤니티들임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로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남성들 위주로 구축된 한국 사회가 만든 강고한 움직임이라 봐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리고 급기야는 이러한 의미의 ‘참교육’이 유명 웹툰의 제목으로 달리고, 주제 의식 차원에서 사용되는 상황이 되었다. 2020년 11월부터 네이버 웹툰에 연재 중인 〈참교육〉(채용택 글, 한가람 그림)은 연재된 지 약 1년 반이 지난 2022년 3월 현재에도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근래 한국 웹툰 업계에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는 에이전시 ‘와이랩’을 통해 기획, 제작되고 있기도 하다. 〈참교육〉은 와이랩이 지닌 인지도 덕에 연재가 개시되기 전부터 관심을 모았고, 연재가 진행되면서 더더욱 높은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연재가 개시된 이후로도 온갖 논란이 발생하고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음에도 작품은 끊임없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대체 어떤 내용을 선보였기에 〈참교육〉은 논란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독자들은 꾸준히 작품을 열독하고 다시 열광하고 있는가? 웹툰 〈참교육〉은 작중에 설립된 가상의 교육부 산하 부처 ‘교권보호국’을 소재로 삼는다. 1화에 등장하는 ‘교권보호국’의 설립 배경은 이렇다. 작중 현재 시점에서 2년 전, 선생이 학생에게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로 인해 국회에서 ‘교권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교권보호국’이 세워지게 되었다는 설정이다.


‘교권보호국’에 소속된 직원들은 딱히 장학사의 신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원 자격증을 지닌 이들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파견을 나온 학교에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작중에서 교육부는 문제가 너무 심각해 자정적인 개선이 불가능한 학교에 교권보호국 직원들을 투입하고, 이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교육 활동이나 지도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매우 당연하게도, 학생들에게 마구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폭력의 대상은 학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들이 판단하기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교사들은 판단 즉시 교사 지위를 박탈당해 학생 신분이 되며, 다른 학생들과 동등하게 폭력적인 수단으로 ‘참교육’을 받는다.


주인공들이 행사하는 폭력의 대상이 학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사도 겉보기에는 동등하게 얻어맞는 대상이 되곤 하여서, 그리고 폭력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이 소위 ‘일진’이나 ‘불량 학생’ 같은 문제적 존재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 작품의 독자들 중 상당수는 작중에서 폭력의 대상이 되는 10대 청소년들이다. 특히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학교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수준의 집단 괴롭힘을 소재로 삼고 있기에 실제 학교생활에서 그런 문제를 겪거나 지켜보게 되는 청소년 독자들의 호응이 클 수밖에 없다. 〈참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음에도 독자들의 호응이 식지 않는 것은 이러한 요소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이다’ 트렌드가 우파적 포퓰리즘으로 

 

〈참교육〉의 방향성은, 학생/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종의 우파적 포퓰리즘을 작품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고 평해도 무방하지 않을 정도다. 실제로도 이 작품은 여러 에피소드에서 세간에 충격을 줬던 사건들을 노골적으로 참조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소년 사법 제도가 존재하는 맥락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에게 그 어떤 흉악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고 때로는 제도를 악용한다고 여겨지는, ‘만 14세 미만의 형사 미성년자’에 대한 분노와 응징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 스포츠 선수들이 인권 침해를 폭로하는 일이 이어지자, 폭로된 사건을 모티브로 운동부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건을 주제로 삼은 에피소드가 나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 가족 내 영유아 학대 사건, 신안 염전을 비롯한 ‘현대판 노예’ 사건 등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을 작품의 플롯에 차용하는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참교육〉을 201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된 ‘사이다’ 작품으로 수용되게 만들었다. 막힌 속을 보글보글 터져 오르는 사이다로 뚫는 느낌처럼, 문제적인 사건의 가해자를 약간의 수정과 각색을 거쳐 웹툰 〈참교육〉의 세계에 등장시킨 뒤, 무제한의 폭력을 허용받은 교권보호국의 사람들로 하여금 응징하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대리 만족’ 경험을 매 에피소드마다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등장하는 사건 대다수가 어떠한 입장에서 바라보든 심각한 사회 문제이자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 사건들은 인권 존중 수준이 낮은 한국 교육과 사회의 문제점이 불거져 나온 것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참교육〉은 매우 간편한 해답을 택했다. 권선징악이라는 간명해 보이는 구분법과 작품의 제목에 담겨 있는 함의이기도 한 ‘나쁜 일을 저지른 녀석들은 때려서라도 교정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정서를 모두 합쳐 내, 작품 속에서나마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마구 때려 곤죽을 만들고 싹싹 손바닥을 비비며 용서를 구하게 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통쾌함을 얻는다. 실제 현실에서도 가해자들이 이에 준하는 엄격한 응징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품을 감상한 독자들 사이에서 점차 싹터 오른다.


이는 다시 여러 대중적인 인터넷 커뮤니티나 포털 댓글,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에브리타임’이나 ‘블라인드’ 같은 제한적 커뮤니티들을 통해 유포되고 확장되며 ‘여론’이 되었다. 소년 사법 제도의 예를 보자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최근 형사 미성년자 기준 연령을 만 13세로 낮추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했고, 올해 3월 대선을 앞두고도 거대 보수 양당의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의 처벌 기준 연령을 낮추겠다는 공약을 냈다. 웹툰 하나가 이러한 여론과 정책에 기폭제가 되지는 않았겠으나, 네이버 웹툰 인기 상위권을 차지하는 〈참교육〉 같은 작품이 가해자 처벌에만 집중하는 대중의 여론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추정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렇게 폭력으로 응징하는 엄격한 처벌이 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체벌이 아직 통제받지 않던 시절이나 학생에 대한 학교의 폭력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때에도 ‘학교폭력’, 집단 괴롭힘은 끊이지 않고 발생했었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가해자 개인을 징벌한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애시당초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원 폭력 예방 및 교권 수호’를 이유로 체벌을 정당화했던 시기, 각 지역 교육지원청이나 일선 학교에서는 문제가 터지면 자신들에게 올 여러 불이익을 걱정해 문제 해결에 힘쓰기는커녕 문제를 덮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의 징병제 군대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가 그저 훈련 시간과 강도를 늘리고 처벌 수위를 높이는 ‘군기 강화’로 해결될 수 없었으며, 군인권센터 등 시민사회단체가 나서고, 군대 내외부에 여러 부조리를 호소하고 해결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며, 더 나아가서 ‘군대 내 스마트폰 반입 허용’과 같이 의사소통의 수단을 적극 확대하면서 근본적 해결 가능성이 조금씩 생겼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참교육〉은 그러한 구조적 요인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다. 문제를 저지른 이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지만 겨우 갱생할 수 있다는 논리가 반복된다. 물론 폭력으로 응징당하는 것이 학생들만이 아니며, 문제를 방관하거나 가해에 동참한 교사들에게도 동등하게 폭력을 행사하니, 〈참교육〉이 ‘어느 정도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만들기 위해 〈참교육〉은 의도적으로 단순하지 않은 문제의 결을 생략하고, 문제의 구도를 평면적으로 만들면서, 가해자에 대한 관용 없는 처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인상만을 강하게 심어 주고 있다.


거기다 매우 영리하게도, 이따금 등장하는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가해자들이 심각한 문제를 저지른 배경에 ‘무책임한 학부모’와 ‘자질이 없는 교사’를 등장시켜 이들도 함께 처벌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우리는 학교 내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요인을 도외시하지 않는다”라는 변명까지 연출하고 있다. 그 논리대로였으면 범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비인간적인 폭력을 행사했던 ‘삼청교육대’가 존재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 대대적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노태우 정권 시기에 시민들이 평온한 삶을 보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도리어 폭력을 통한 통제를 강조했던 순간에 문제는 더욱 번성했고, 폭력을 절대적인 수단으로 만들수록 폭력을 지닌 이들은 더욱 날뛰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세계관에 복무하는 작품

 

물론 이러한 경향성을 지녔던 작품은 웹툰 〈참교육〉이 처음은 아니다. 일세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학교 액션 만화이자, 〈참교육〉을 비롯한 학교 배경 격투물에 큰 영향을 준 후지사와 토오루의 〈GTO〉(구판 〈반항하지 마〉) 역시도 ‘폭력도 학생의 갱생에 때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치를 알게 모르게 내재한 작품이었다. 〈참교육〉에서는 교권보호국이라는 가상의 부처를 만들어 주인공들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GTO〉에서는 주인공에게 ‘전직 일진’에 ‘교사로서 지녀야 할 재능은 부족하지만 누구보다도 학생을 가장 사랑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는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일찌감치 몸과 몸을 부딪쳐 가며 살았던 이가 스스럼없이 학생과 마주하는 ‘열혈 교사’로서 문제아를 교정한다는 식으로 교사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를 성립시켰다. 이후 제작된 박산하의 〈구타닷컴〉, 모리모토 코즈에코의 〈고쿠센〉 등의 작품들도 〈GTO〉의 성공 공식을 벤치마킹하고 비틀어 가며 인기를 구가했고 〈참교육〉은 이러한 노선 위에 있는 작품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특히 핑계는 제각각 달라도, ‘문제가 있는 아이들에게는 똑같이 폭력으로 되갚아 주는 것이 때로는 정답’이라는 부분에서는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참교육〉이 어떤 계보와 방향성을 극대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참교육〉은 폭력에도 효용과 정당성이 있음을 강변하는 것을 넘어 더욱 문제적인 경향으로 나아가는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적극적으로 ‘문제 교사를 퇴출해야 한다’는 명목에 더하여 한국 학교 현장에서의 변화 사례와 가십적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한 에피소드를 통해 이 작품이 어디를 타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다.


문제의 에피소드는 가상의 학교인 ‘신라별초등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참교육〉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학생이 문제의 대상이거나, 교사가 문제의 대상이 되더라도 학생과 같이 악역 자리에 오르내리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번 편에서는 교사만이 문제를 저지른 가해자가 되고 학생들은 철저한 피해자로 언급된다. 왜 갑자기 이러한 변화를 택한 것일까? 그 의도는 세부적인 흐름에서 드러난다. 작중 신라별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 ‘양상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반의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세뇌 교육’을 했다고 묘사된다. 그것은 바로 ‘왜곡되고 편향적인 페미니즘 교육’이다. 작중에서 양상희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된다. 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원래 내용은 알려 주지 않고, ‘나무꾼에게 화가 난 선녀가 주먹에 옥반지를 끼고 나무꾼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설명하는 등 ‘여성 우월주의’과 ‘남성 혐오’를 학생들에게 일찌감치 심고 있다는 것이다.


〈참교육〉 42화. 이 에피소드는 현실의 어떤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신라별’이라는 학교의 이름에서 알아챈 독자도 있겠지만, 해당 에피소드는 서울 위례별초등학교에서 지난 2017년 한 여성 교사가 페미니즘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페미니즘에 입각한 한국 교육에 대한 고민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는 이유로 전방위적 공격에 시달린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특히 해당 교사가 자신의 트위터에 기재했던 “운동장이 남자아이들만의 전유물로 쓰이는 상황”이라거나 “남자들은 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치마를 당연히 입는 모습은 미디어가 무의식적으로 성 역할을 강요하는 모습”이라는 문구를 거의 그대로 작중에 사용함으로써, 해당 에피소드가 어디/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동시에 〈참교육〉이 폭력의 정당화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도 상당히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인 내용이었다.


이러한 관점 아래 만들어진 〈참교육〉 신라별초등학교 에피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모습이 문제의 연속이었다. 양상희의 캐릭터는 ‘못생긴 주제에’ 자신보다 잘생긴 여성 교사를 시기하고 질투하지만 이를 페미니즘의 명목 아래 정당화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양상희는 교무실에서 교과 지도나 연구는 뒷전으로 남성 혐오를 조장하는 게시물을 쓰는 데만 전념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가르치는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차별적 표현을 사용한 것에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고 가학적인 수준으로 대처하는 모습까지 빼곡하게 담아내었다.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학급이 친페미니즘, 반페미니즘으로 나뉘고 성별 갈등이 심해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그려 내는 것은 덤이다.


이에 맞서는 교권보호국 소속의 여성 주인공 ‘임한림’은 소위 남성 커뮤니티가 용인하는 ‘페미니즘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상’의 전형이다. 얼굴도 잘생겼지만, 그러면서도 특전사 선발 시험에서 남성과 동일한 기준으로 체력 검정을 통과했음을 말하며 작중 양상희의 주장인 ‘남성과 여성의 신체 능력은 다르니, 이를 감안한 신체 시험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박하는 역할까지도 수행한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임한림을 비롯한 교권보호국 소속 주인공들이 양상희와 양상희를 따르는 여자 학생들에게 ‘정의의 응징’을 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러모로 해당 작품이 어떤 식으로 학교 내에서의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다루려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납작한 틀로 쟁점과 흐름을 단순화시키는지가 매우 노골적으로 나타난 에피소드였다. 동시에 이 작품이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여론이 넘실거리고, 더 나아가서 백래시 현상이 보편화된 한국 (남초) 인터넷 커뮤니티의 정서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음을 인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도처에 산적한 작품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반대 행동으로 자신을 감싼 이들의 열렬한 호응은 이 작품이 2022년 3월 현재에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연재를 이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동시에 앞으로 나올 에피소드들 역시 폭력을 예찬하며, 페미니즘을 비롯한 대안적 움직임을 쉽게 당장 근절해야 할 독선적이고 문제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반복할 것이 예측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대안적 창작과 연대를 고민해야

 

그렇다면 이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해당 작품의 즉각적인 연재 중지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참교육〉이 지닌 심각한 문제들과 잘못된 면모를 생각하면 이러한 움직임이 왜 등장했는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작품을 단순히 막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한국에서 아직 사전 검열 제도가 강력하게 존재하던 1990년대 중반 이전의 상황 그리고 2020년대인 지금에도, 상당히 심각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작품들이 ‘정부 검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쉽게 모든 문제적 요소마저도 정당화되는 일이 허다했다. 심각한 수준의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끝내 자신의 범죄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 대신 국외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등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처럼, 이러한 부류의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는 작품에 대한 강한 배제 요구 목소리를 도리어 자신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라고 하는 근거로 삼음으로써, 문제의 구도를 역전시키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럴수록 필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적확한 지적과 더불어, 새로운 대안적인 작품이 더욱 활발하게 창작되고 널리 퍼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2016년의 페미니즘 리부트가 수신지의 〈며느라기〉 등을 비롯하여 당대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 만화 역사 전반으로 따져 봐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명징한 모먼트를 만들었던 것처럼, 〈참교육〉과는 다른 시선으로 한국의 교육 구조를 말하는 작품이 나오고 널리 향유될 수 있도록 창작자와 연대하고 함께 움직이는 전략도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 침해’를 부르짖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문화 예술의 창작물을 통해 또 다른 대안과 내일을 고민하는 진정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작품들을 창작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고, 활발하게 논할 수 있는 상황을 구축하는 것이, 〈참교육〉과 같은 대중문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일면을 타파할 수 있는 실천과 운동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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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