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호[후속]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 변하지 않은, ‘어른 사람들’의 시선 | 김홍규

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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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변하지 않은,  ‘어른 사람들’의 시선

- 강원 지역 학칙과 사례로 보는 학생인권 현실



김홍규

plateaux2@gmail.com

강원 중등 교사




이 글은 죄책감 가득한 넋두리다. 교사가 ‘학생인권’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유체이탈’ 화법을 벗어나기 어렵다. 목소리는 누가 대신할 수 없다. 고장 난 스피커의 시끄러운 소리일 뿐이다.

소음이라도 줄이려고 두 가지 서툰 시도를 했다. 학생인권 상황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학교생활규정’❶을 짚어 보려고 했다. 2019년, 강원 지역 56개 중·고등학교 규정을 살폈다.❷ 강원 중등 학교 20% 규모였다. 그때 조사했던 내용과 비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몇 개 학교 ‘생활규정’을 읽어 보고 마음을 접었다.

‘의례적 선언과 오염된 언어’, ‘무섭도록 친절하고 세밀한 규정’, ‘모호한 저인망식 규정’, ‘공포에 가까운 염려와 의미 없는 베끼기’. 2019년에 학교생활규정 실태 조사 결과를 정리하며 사용했던 말이다. 5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대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일이 무의미하다.

교육 전문가 김태윤, 이시현, 홍나영 세 사람 의견을 들었다. 10년 넘는 학교생활 경험을 지닌 학생들이다. 질문하고 이야기를 듣는 나는 어설펐지만, 그들은 핵심을 말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학생들의 권리는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대화를 듣고 내린 결론이다.

세 사람 이외에도, 이 글에는 작년과 올해 나와 같은 반이었던 여러 학생과 나눈 대화 내용이 녹아 있다. 못난 선생 덕에 학생들은 가르치는 일까지 떠맡았다. 매 순간 그들에게 공짜로 배우며 월급까지 받는 것이 늘 미안하다.



2개의 상징적 장면들


교육 당국과 교원단체들이 언론과 한편이 돼 ‘학생인권 과잉’이라는 가짜 뉴스를 찍어 냈다. 학생은 교사를 괴롭히는 악마가 됐다.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우던 이들이 ‘교권’이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마녀사냥에 나섰다. 유튜브에 떠도는 ‘지구평평설’을 따라잡을 기세였다. 학생을 희생양으로 한 의식이 끝나고 합창도 흩어졌다.

가짜 뉴스엔 사실 확인이 확실한 대응법이다. 하지만, ‘지구평평설’ 같은 ‘학생인권 과잉’ 유머에 ‘다큐’로 받아칠 만큼 한가롭지는 않다. 작년과 올해 내가 보고 들은 상징적 장면 둘로 대신한다.


장면 1. 교복 입히려고 이렇게까지 하나!

작년 가을 어느 날, ‘교복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징계하겠다’라는 협박 공고문이 복도 벽에 갑자기 붙었다. 몇 년째 사복과 생활복을 함께 입고 다녔던 학교다. 학생회장단은 반대했다. 그런데도 학교는 공고문에 학생자치회 이름까지 넣었다. 논의와 협의는 없었다. 1인 시위를 한 학생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학생들이 여러 모습으로 저항하는 동안, 나는 겨우 움직이는 시늉만 했다. 공고문 옆에 학교장을 향해 쓴 글을 나란히 붙였다. 비민주적 학교 운영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보직 교사를 그만뒀다. 맡았던 일은 그대로 했다. 올 여름 방학에 작년 같은 반이었던 학생들을 만났다. ‘교복을 안 입으면 밥을 제일 늦게 먹는다’라고 했다.


장면 2. 학생증 없으면 밥 못 먹는다

오랜 학교생활 탓인지, 나이 때문인지, 점점 눈치가 없어진다. 한 학기가 다 지나서야, 학생들이 급식 먹으러 가기 전 학생증을 찾는 이유를 알았다. 학생증이 없으면 제일 나중에 먹어야 한다. 안 먹는 학생들도 생긴다. 밥 먹는 순서와 학생증이 무슨 상관인지는 알 길이 없다.

상황을 안 지 몇 달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 피해 당사자만큼 절박한 사람은 없다고 하나 보다. 대신, 반 학생 4명으로 구성된 ‘학교 문제 해결 프로젝트’ 팀만 쳐다본다. ‘세상에서 밥 갖고 장난치는 게 가장 치사하다’고들 한다. 그깟 학생증 때문에 밥을 굶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나는 잘 지낸다.



「헌법」 위의 학교 규칙과 자의적 결정


우리 「헌법」 어디에도 학생의 권리를 특별히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다. 작년 9월 개정된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에서 학생이 ‘학교 규칙(학칙)’을 의무적으로 따르게 한 것은 위헌이다.

기본권 제한을 다룬 「헌법」 제37조 제2항의 규정은 분명하다. 개인의 권리 제한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법률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면 안 된다. 제각각인 ‘학교 규칙’ 또는 ‘학교생활규정’으로 「헌법」과 법률, 국제 규범이 정한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왕 개인이 통치하는 시대도 아닌데, 어떤 학교, 어떤 교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권리가 결정된다. ‘민주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부끄럽다. 국가 최고 규범인 「헌법」 위에 ‘학교 규칙’이 존재한다. 그나마 규정 내용과 적용 모두 자의적이다.


(학생자치회) 선도부 : 학생생활규정 지키기를 위한 캠페인 및 홍보 활동, 학교 생활 전반에 대하여 학생들의 생활 규정 개정 요구, 불편·불만 사항 모니터 및 해결 방안 활동(강원도 A고등학교)


두발은 각자의 개성에 맞춰 자유롭게 하되, 염색은 갈색 계통으로 중간 톤까지만 할 수 있으며 탈색(전체 또는 부분)은 하지 않는다.(강원도 B고등학교)


두발 형태와 기타 장신구 착용에 대해서는 학생자치회의 결의로 금지할 수 있다. (……) 파마와 염색(검정색은 제외)은 금한다.(강원도 C고등학교)


이런 규정들❸을 보면 학교는 학생자치회를 학생들 대표 기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도부’라는 구시대적 이름은 물론, 그 내용은 학생인권 제한을 학생자치회에 떠넘기고 있다. 개성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서 허용 범위를 규정하는 모순이 아무렇지 않다. 이들 학교뿐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없고, ‘보수 교육감’이 있는 강원 지역 일이라고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 필요는 없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경기, 광주, 서울, 울산, 전북 등 대표적인 ‘진보 교육감 지역’도 마찬가지다. 칭송이 자자한 혁신학교들도 다르지 않다.


교사에게 불손한 행위를 한 학생(경기도 D고등학교, 광주시 E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자거나 화장 등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고,(서울시 F고등학교)


교무실 출입 시는 규정된 복장을 갖출 것 (……) 치마 길이는 무릎 앞 중간에서 위쪽으로 7cm 이하로 한다.(울산시 G고등학교)


두발의 길이·모양·색상은 제한하지 않는다(단, 과도한 염색과 탈색의 경우 규제할 수 있다). (……) 학생은 (……) 교복을 착용하여야 하며, 교복 위에 바람막이(외투) 옷을 입을 수 있다.(전라북도 H고등학교)


‘예의’나 ‘용의’가 ‘바르다’라는 모호한 규정을 어기면 징계 대상이다. 이들 학교생활규정 앞부분에는 한결같이 「헌법」과 〈아동권리협약〉이 나열돼 있다. ‘개성’과 ‘인권’도 여러 차례 나온다. 하지만 학교와 이를 감독하는 교육청 모두에게 「헌법」, 국제 규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는 그냥 글자일 뿐이다. 기본권 개념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학교 규칙이 「헌법」 위에 군림한다. 학교는 여전히 ‘치외 법권’ 지역이다. 게다가 모호하고 모순된 규정들은 언제든 좀비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 학생부장이나 학교장, 교사들의 생각에 따라 학생은 언제든 ‘불손’하고, ‘예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교원에 따라 학교 분위기가 달라진다.

공교육 기관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현상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도덕성이나 인성 문제에서 멈추지 않는다. 징계라는 공식 행정 절차와 연결돼 있다. 평가와 기록 연계라는 이상한 유행 덕에 학생들의 삶은 하나하나 감시받고 기록된다. 여기에 더해 학교생활규정은 언제든 교원들이 휘두를 수 있는 ‘마법 지팡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문제는 ‘어른 사람들’이 학생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다. 여러 곳에서 ‘백래시’가 기승을 부린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보인다. ‘학생인권’은 지금까지 학교를 포함한 교육 기관에 자리 잡지 못했다. 긴 시간 집권한 ‘진보 교육감 권력’과 상관없이 학생인권은 유령처럼 떠돌았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고, 여전히 가능할까? 바로, ‘나’같이, 학교 안에서 구경하는 ‘어른 사람’들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는 권력이 개입돼 있다. 나이와 성별 차이보다 커다란 간격이 존재하는 사이다.

여성이나 흑인 대통령이 하나 나왔다고 성 불평등과 인종 차별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교원과 학생 사이의 권력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이는 언제든지 횡포를 부릴 수 있고,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교권과 학생인권의 공존’ 이야기를 곱게 듣지 않는다.

불평등한, 그래서 잘못된 관계를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힘을 발휘한다. 한껏 조심하고 몸을 낮춰야 한다. 예민하고 예리한 인권 감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애써야 한다. 학생들의 ‘주사위’는 항상 낮은 숫자만 나온다.❹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는다.

현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동업자’ 배려다. 학교 밖에서 ‘혁명’을 외치고 정부와 싸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막상 교문을 들어서면, 같이 생활하는 교원들과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처럼’ 부딪히는 데 주저하게 된다. 갈등이 없으면 변화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권’ 앞에 붙은 수식어는 사이비다. 똑같은 사람인데, ‘권리’ 앞에 꾸미는 말이 왜 필요한가? ‘학생인권’에서 ‘학생’이 빠지는 ‘사건’을 만들지 못하면 ‘인권’이라는 단어도 사라지게 된다. 당연히 ‘교권’이라는 말은 흔적조차 없을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학교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하나하나 따져 볼 때가 됐다. 



초·중·고에서 학생들의 생활을 규정하는 학교 규칙(학칙) 가운데 하나다. ‘학생생활규정’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학교 홈페이지나 학교 알리미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태 조사 결과는 한 교원단체 이름으로 발표했다. 지금은 속해 있지 않은 조직이라 정확한 인용 대신 상황만 설명한다.

이곳에 예로 든 모든 학교 규칙은 해당 지역 공립 고등학교 것들이다. 학교 홈페이지와 학교 알리미 사이트에 가장 최근에 올라온 내용이다. 매우 짧은 시간 간단하게 검색한 결과다. 검색 날짜는 2024년 9월 18일이다.

주사위 비유는 [마르크스, 강신준 옮김(2008), 《자본 I-2》, 길, 869쪽]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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