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AI 디지털교과서, 엇나간 혁신
AI 디지털교과서,
혁신의 약속인가
새로운 차별의 시작인가
김헌용
engccer@gmail.com
서울 신명중 교사,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들어가며 : 새로운 기술과 차별의 그림자
2019년, 한 신축 빌라에 이사했다. 새 건물이어서 시설도 깔끔하고 서울의 한복판이어서 어디로 가든 접근성이 좋았다. 사회생활이 왕성한 30대 초·중반의 청년에게 안성맞춤인 집이었고 실제로 그 집에 사는 동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 집에는 한 가지 흠이 있었다. 현관문에 장착된 전자식 잠금 장치 그리고 붙박이인 인덕션 전기레인지와 세탁기가 모두 터치 방식이었다. 남들에겐 흠이 아니었겠지만 시각장애인인 내게는 큰 장벽이었다. 카드 키를 깜빡 잊고 잠시 집을 나온 어느 날엔 현관문 앞에서 버튼이 없는 잠금 장치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씨름해야 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갔다. 학교는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은 채 개학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했다. 종전까지 와이파이조차 제대로 갖춰 있지 않던 학교는 빠르게 디지털 환경으로 변모했고, 다양한 디지털 도구들이 실험대에 올랐다. 그 실험대 위에서 나는 좌절해야 했다. 수업 콘텐츠를 올려야 했던 EBS 사이트에 혼자서는 접근할 수 없었고, 학생들과 소통해야 했던 네이버 플랫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학기가 지나자 대부분의 학교 현장은 구글 클래스룸과 화상 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채택해 사용했다. 그제야 나는 독립적으로 수업을 설계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제품들은 시각장애인인 나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뛰어난 접근성을 자랑했다.
2023년 6월, 학교 현장에는 웹 기반의 새로운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인 4세대 나이스(NEIS)를 개통했다. 나는 또다시 좌절했다. 웹 접근성 준수를 약속했던 나이스는 성적 입력이나 복무 결재 같은 기본적인 업무조차 혼자 처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드(학생 명렬과 같이 테이블 형태로 보이는 영역), 버튼, 편집 창 같은 각종 웹 요소들이 인식이 되지 않거나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업무조차도 화면에서 탐색해야 하는 정보와 수행해야 할 것들이 다양했다. 이로 인해 키보드만 사용할 수 있는 나는 여러 단계 중 한 단계만 막혀도 업무 처리가 불가능했다. 충분한 테스트를 거치지 않고 개통한 나이스에는 웹 접근성의 지뢰가 곳곳에 산적해 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나이스는 현재까지도 접근성 개선이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내 삶의 주요 국면에서 겪었던 대표적인 접근성 이슈들이다. 새로운 시설과 기술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모두를 이롭게 하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완벽한 시설이나 기술이 존재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집요하게 보완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치밀함과 집요함이 없으면 차별과 배제는 금세 발생한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교육 분야에 과도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새로운 교육 콘텐츠가 코앞까지 닥쳐왔다. 이른바 ‘AI 디지털교과서(AIDT)’이다. AIDT를 추진하는 교육부와 이 사업을 총괄하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은 이 새로운 콘텐츠가 대한민국의 교육을 혁신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나는 지난 5년간 순탄치 않았던 학교의 디지털 환경 구축 과정과 내가 몸담고 있는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장교조)이 교육부 및 KERIS와 진행해 온 협의 과정을 토대로 AIDT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는 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AIDT가 현재 어떤 점에서 그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접근해야 AIDT가 성공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그에 앞서 교육부와 KERIS가 제안하는 AIDT의 교육적 역할과 그 성공을 주장하는 근거를 먼저 살펴보겠다.
AI 디지털교과서의 약속 : 맞춤 교육의 실현
교육부는 2023년 6월 8일, AIDT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이주호 장관은 이 자리에서 AIDT가 가져올 변화의 청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이화여대 교육학과 정제영 교수가 AIDT의 개발 마무리와 현장 안착의 사명을 띠고 KERIS 원장으로 부임한다. 정 원장은 지난 8월, 한 언론과의 취임 100일 인터뷰❶에서 AIDT 개발이 어디까지 왔는지 설명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교육부와 KERIS가 그리는 AIDT의 교육적 역할과 현주소를 엿볼 수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AIDT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과 속도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을 실현하고, 이를 통해 교육 격차를 줄이겠다고 약속한다. 특히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개별 맞춤 학습 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둘째, AIDT는 AI 보조 교사 기능을 통해 교사들의 행정 업무를 줄이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수업 설계를 지원할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교사들이 학생 개개인의 인간적 성장을 이끄는 본질적인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셋째, AIDT는 특수교육 대상자와 다문화 학생들을 위한 기능을 지원할 것이라고 한다. 자막, 화면 해설, 다국어 번역 기능 등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평등한 학습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넷째, AIDT를 통해 축적되는 학습 데이터는 학생의 성장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지원하는 데 활용될 것이며, 나아가 대학 입학 전형 요소 변화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교육 시스템 전반의 혁신을 이끌겠다고 약속한다.
이 장관과 정 원장은 모두 AIDT의 도입이 단순히 교과서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교육 전반의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정 원장은 인터뷰에서 AIDT의 AI 기술이 생성형 인공지능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또한, 교육 현장에 적합한 검증된 적정 수준의 기술을 활용할 것과 학생들의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보안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며 지난 1년 사이 퍼진 회의적 우려를 달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췄다.
AIDT 사업에는 기관장의 공언만 있는 것은 아니다. KERIS가 2023년 8월 말에 발간한 〈AI 디지털교과서 개발 가이드라인〉에는 이 장관과 정 원장이 발표한 약속을 뒷받침할 ‘교과용 도서출판사 및 개발사’(개발사)들의 기술적 준수 사항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 실현을 위해 AI 기반 학습 진단 및 맞춤형 콘텐츠 추천 기능을 구현하고, 교사의 데이터 기반 수업 설계를 지원하기 위해 AI 보조 교사 기능을 제공하라는 등의 세부적인 요구 사항과 기준이 나와 있다. 특수교육 대상자와 다문화 학생 지원을 위해 장애 유형별 접근성을 준수하고 다국어 지원을 구현할 것과 학습 데이터 축적을 통한 입학 전형 요소 변화를 대비해 국가 수준의 학습 분석과 학습 이력 관리 체계를 구축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가이드라인은 AIDT의 약속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의 역할을 하고 있고, 개발사들은 이 지침에 따라 AIDT를 개발하고 있다.
주지컨대 AIDT 개발사들이 이와 같은 구체적인 기준을 달성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쉽지 않은 과제다. 따라서 다양한 기관 및 단체, 현장 교사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이었다. 교육부와 KERIS는 AIDT의 보편적 학습 설계(UDL)와 접근성, 특히 장애 학생과 장애인 교원이 실제로 사용하면서 겪을 접근성 이슈를 개발사들이 미리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장교조에 여러 차례 자문과 협조를 구했다. 장교조는 2023년 7월과 8월, 가이드라인의 집필 최종 단계에서 의견을 제출했고, 올해 4월에는 개발사 간담회에 참여하여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지난 7월과 8월에는 장애인 교원들이 개발사에 직접 자문할 수 있도록 컨설팅단을 구성하는 데 적극 협조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들어서 다른 장애인 교원 단체들과 연대체를 구성해 개발 과정 협조 및 모니터링을 함께 했다. 일명 ‘모두를위한교과서공동대응그룹’이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50명 이상의 장애인 교원이 KERIS가 정한 절차와 방법 내에서 개발사에 자문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개발사들은 접근성 구현이 단순히 규정으로만 존재하는 이상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가 있는 구체적 기능과 인터페이스임을 이해하고 개발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 :
AI 디지털교과서의 문제점과 기술결정론의 한계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와 KERIS가 제안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한다. 기술적 한계와 개발 시간의 부족과 같은 일차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 도입에 수반되는 제도적·물적 환경 구축의 부족, 그리고 실제로 AIDT를 사용하게 될 교사 및 학생과의 소통을 통한 점진적 통합의 과정 생략이 그 간극을 더욱 크게 벌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학교 현장과 소통하지 않고 국가 교육과정의 물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교과서의 형태를 일방적으로 변형하고 주입하는 접근은 실망스럽다. 여기에는 정책 입안자들의 기술결정론적 사고가 한몫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교육 혁신을 주도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기술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기술결정론에 사로잡힌 정부의 주입 일변도식 접근이 일차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교사의 자율성이다. 자율성이 결여된 교사의 손에 아무리 좋은 도구가 주어진다 한들 그것이 교육적 효과를 발휘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장애인 교원들이 자문 과정에서 경험한 AIDT는 장애인 접근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AIDT가 이대로 학교 현장에 도입되면 교과서가 교사와 학생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교과서에 맞추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장애 학생과 장애인 교원에게 차별과 배제로 작용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접근성 구현의 미비이다. 현재 개발 중인 AIDT는 다양한 장애 유형과 사용 사례에 따른 접근성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7월과 8월 개발사 컨설팅에서 확인한 접근성 구현 수준은 화면 요소에 대체 텍스트(스크린 리더 사용자를 위한 텍스트로 된 설명)와 자막을 삽입하여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사용자가 교과서 콘텐츠의 기본적인 내용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게 한 정도이지 상호작용 기반의 활동까지 보장된 수준이 아니다. 다른 장애 유형에 대한 테스트는 실질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교사용 메뉴나 복잡한 동작이 필요한 메뉴는 개발 부족으로 테스트가 불가한 경우가 많았다.
둘째,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전반적 준비 부족이다. 당초 교육부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2025학년도부터 특수교육 국어과도 AIDT 도입 대상이었으나 9월 현재 플랫폼 개발사조차 선정되지 않아 도입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학, 영어, 정보 교과에 대해서도 보편적 학습 설계 및 웹 접근성이 구현된 AIDT 프로토타입이 아직 발표되지 않은 상태여서 개발사들 사이에 최소한의 접근성 표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AIDT 사업 전반에서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준비도가 매우 미흡한 상태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AIDT의 도입 취지를 고려할 때 누구를 위한 교과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대체 자료 및 보조 공학 기기 연계 계획의 부재이다. 현재 AIDT에 대한 점자 촉각 자료나 보조 공학 기기와의 연계 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교육부가 발표한 디지털 인프라 확충 예산에도 장애인 보조 공학 기기 지원 등의 예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장애 학생들이 AIDT를 활용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와 환경조차 갖추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넷째, 장애인 교원과 학생을 위한 연수 및 지원 부족이다. 장애인 교원들을 위한 AIDT 사용 연수 프로그램이 전무하며, 일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접근성 관련 교육도 미비하다. 이는 장애인 교원들의 교육권 침해뿐만 아니라 장애 학생들의 학습 기회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섯째, 평가와 개인정보 보호 등에 대한 지침 부족이다. AIDT는 단순히 수업 도구로서가 아니라 과정 중심 평가 및 총괄 평가의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장애 학생들의 평가 방식에 대한 지침이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평가 과정에서의 편의 제공은 교육 평등을 위한 기본적 조치이므로 시작부터 명확한 기준과 지침이 필요한데 관련된 논의가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또한 AIDT 사용 과정에서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가 수집되고 분석되는데 장애 학생의 민감한 개인정보가 개발사 플랫폼을 통해 부적절하게 활용되거나 유출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나 적절한 정보 수집 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여섯째, 장애 학생의 학습 결손과 통합교육 저해 우려이다. 시각장애 학생의 경우, AIDT는 촉각적 요소를 배제하고 모든 정보를 음성 피드백으로만 전달하는데 수학이나 과학 같은 교과에서 도형이나 그래프 등 비언어적 정보마저 텍스트로 제공되면 중요한 개념을 직관적으로 배울 기회를 상실한다. 더불어 AIDT 도입으로 인한 교사와 학생 간 인간적 상호작용의 감소는 모든 장애 학생의 학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장애 학생은 교사 및 또래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성과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고, 이 과정에서 상호 이해와 존중이 길러진다. 그러나 AIDT가 교사와 학생을 개별화된 도구에 가두게 되면, 통합교육에 필수적인 상호작용 기회가 크게 줄어들 위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AIDT가 추구하는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이라는 이상을 공허하게 만든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배제를 낳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책 입안자들이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현재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KERIS의 정제영 원장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우려를 이해한다면서도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안이한 인식을 보여 주었다. 접근성은 업데이트로 해결할 수 있는 부수적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콘텐츠를 가로지르는 확고한 철학이자 방법론이 되어야 한다. 그 기반 위에서 다루어질 때만이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맞춤 교육에 기여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더욱이 AIDT는 수십 개의 민간 출판사 및 개발사들이 참여하는 시장이 아닌가? 에듀테크 시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넓어질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단계에서의 AIDT는 사업 초기에 교육부 장관이 천명했고 개발 가이드라인에도 명시된 3대 원칙을 모두 위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AIDT 개발의 3대 원칙이 무엇이고, 현재 AIDT 정책이 장애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그 원칙을 위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장애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AI 디지털교과서 개발의 3대 원칙
AIDT 개발에는 3대 원칙이 있다. 인간 존엄성을 위한 교육, 평등한 학습 기회 보장, 교사의 전문성 존중이다. 〈AI 디지털교과서 개발 가이드라인〉은 이 원칙을 토대로 ‘맞춤 교육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AIDT 개발의 세부 지침을 정의한 문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AIDT가 그 원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AIDT의 검정 출원 마감일이었던 8월 21일 기준 146종의 교과서가 출원되었고, 오는 11월 말 최종 심사 결과 발표까지 개발사들은 지속적인 보완 요구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점이야말로 이 원칙을 환기해야 할 적기이다. 나는 장애 학생과 장애인 교원의 관점에서 이 원칙들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AIDT의 효용성과 해악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첫 번째 원칙은 ‘인간 존엄성을 위한 교육’이다. 가이드라인은 이 원칙에 대해 “신기술을 안전하고 책임감 있게 사용하도록 교육 당사자가 AI 디지털교과서를 주도적으로 활용·제어하게 해야 함”이라고 부연한다. 그러나 현재의 AIDT 개발은 장애인 사용자의 접근성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지 않고, 장애인 교원 연수나 보조 공학 기기 구매 예산 확보를 통해 장애인 사용자들이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제반 환경도 전혀 구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상술한 바와 같이 현재 상태에서는 AIDT가 장애 학생을 수업에서 소외되게 만들고 장애인 교원의 교육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이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두 번째 원칙은 ‘평등한 학습 기회 보장’이다. 가이드라인은 이 원칙을 “모든 아이가 AI 디지털교과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재의 AIDT 개발 방향은 이 원칙과 괴리가 있다. 장애 학생들, 특히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촉각적 자료나 대체 자료에 대한 계획이 없고, 다양한 장애 유형을 고려한 접근성 기능이 미흡하다. 또한, 보조 공학 기기 지원을 위한 예산 확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AIDT가 제공하는 맞춤형 학습이 오히려 장애 학생들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서비스가 될 위험이 크다. 이는 평등한 학습 기회 보장이라는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세 번째 원칙은 교사의 전문성 존중이다. 가이드라인은 “AI 디지털교과서는 교수자 고유의 전문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교수자를 보조하고 지원해야 함”이라고 명시한다. 그러나 현재 개발 중인 AIDT는 이 원칙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 교원의 관점에서 볼 때 AIDT의 교사용 메뉴는 테스트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고 학생과의 원활한 상호작용에 필요한 고도의 접근성을 구현하기에는 개발 시간이 지나치게 촉박했다. 맞춤형 연수 프로그램도 부재하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열악한 교육 환경은 이미 장애인 교원의 교육 활동에 큰 제약으로 작동한다. 수업의 핵심 콘텐츠인 교과서마저 접근성이 미비한 형태로 도입될 경우 교사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지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한할 위험이 크며 결과적으로 장애인 교원의 교육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
원칙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교육에서 무척 중요하다. 원칙이 무너지면 신뢰가 무너지고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쌓기 어렵다. 교과서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치 종교의 경전이 그러하듯 교과서에 부여된 권위와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아진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AIDT가 갖는 상징성은 무척 크다. 교과서가 신뢰를 잃으면 그것을 중심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도 신뢰를 잃는다. 시중에 출시되는 여느 디지털 서비스나 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경쟁적인 AI 서비스 출시와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이다.
AIDT는 현재 시점에서 적어도 장애인 사용자에게는 효용성보다 해악이 큰 교과서가 될 공산이 크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평가 결과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장애인 교원의 교권을 추락시키고 장애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차별 교과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AIDT의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해악은 세부적인 기능 미비의 표면적 층위가 아닌 교과서 개발의 근간이 되는 원칙의 훼손이라는 심층적 층위에서 다뤄져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미 AIDT에 대한 검정 심사가 진행 중이지만 애당초 의도했던 목표 달성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원칙마저 훼손하는 수준이라면 교육부가 과감하게 도입 연기를 결정하는 것이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중앙 행정 기관의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다.
나오며 :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는 교육으로
나는 이 글의 서두에 개인적 경험을 술회했다. 첨단화되는 가전제품, 코로나19를 계기로 확산한 화상 회의와 온라인 학습 관리 시스템, 웹 환경에 맞게 새롭게 구축된 4세대 나이스까지. 이들은 모두 내게 큰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실제로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꿔 준 측면도 있다. 특히 구글 클래스룸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학습 관리 시스템이 그러한데, 기존에는 종이와 펜으로만 이루어졌던 쓰기 지도가 온라인 협업 도구를 통한 공동 작업으로 디지털화하면서 전맹 시각장애인인 나도 학생들에게 실시간 피드백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구글 클래스룸 출시 10주년을 기념하는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이러한 구글 클래스룸의 혁신이 현장 교사들의 활발한 피드백 덕분에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AI 디지털교과서도 구글 클래스룸과 같은 길을 걷게 될까? 아니면 이주호 장관이 과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재임했던 2010년~2013년 사이에 추진했던 디지털교과서 사업처럼 학교 현장으로부터 외면받는 신세로 전락할까? 나는 인간 중심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 집요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AIDT도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는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오히려 AIDT가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교육은 전통적으로 사람 중심의 서비스이자, 관습이자, 삶의 한 양태였다. 그 복잡다단한 교육을 특정 기술과 기능의 좁은 틀로 환원하여 거기에 교육 혁신의 열쇠가 있다는 말은 편협한 주장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적극적 수용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무비판적 수용과 밀어붙이기식 주입까지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늘 그랬듯이 교육을 혁신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이 기술 중심에서 다시 사람 중심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확고한 원칙과 교육적 가치를 체화한 정책 입안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아직 학교 현장에는 다소 빗나간 교육 정책도 바른길로 돌려놓을 힘이 있다고 믿는다.
❶
“정제영 KERIS 원장 “공교육 도입 앞둔 AI 디지털교과서, 오해와 진실””, 〈디지털조선일보〉, 2024년 8월 17일.
[특집] AI 디지털교과서, 엇나간 혁신
AI 디지털교과서,
혁신의 약속인가
새로운 차별의 시작인가
김헌용
engccer@gmail.com
서울 신명중 교사,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들어가며 : 새로운 기술과 차별의 그림자
2019년, 한 신축 빌라에 이사했다. 새 건물이어서 시설도 깔끔하고 서울의 한복판이어서 어디로 가든 접근성이 좋았다. 사회생활이 왕성한 30대 초·중반의 청년에게 안성맞춤인 집이었고 실제로 그 집에 사는 동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 집에는 한 가지 흠이 있었다. 현관문에 장착된 전자식 잠금 장치 그리고 붙박이인 인덕션 전기레인지와 세탁기가 모두 터치 방식이었다. 남들에겐 흠이 아니었겠지만 시각장애인인 내게는 큰 장벽이었다. 카드 키를 깜빡 잊고 잠시 집을 나온 어느 날엔 현관문 앞에서 버튼이 없는 잠금 장치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씨름해야 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갔다. 학교는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은 채 개학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했다. 종전까지 와이파이조차 제대로 갖춰 있지 않던 학교는 빠르게 디지털 환경으로 변모했고, 다양한 디지털 도구들이 실험대에 올랐다. 그 실험대 위에서 나는 좌절해야 했다. 수업 콘텐츠를 올려야 했던 EBS 사이트에 혼자서는 접근할 수 없었고, 학생들과 소통해야 했던 네이버 플랫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학기가 지나자 대부분의 학교 현장은 구글 클래스룸과 화상 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채택해 사용했다. 그제야 나는 독립적으로 수업을 설계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제품들은 시각장애인인 나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뛰어난 접근성을 자랑했다.
2023년 6월, 학교 현장에는 웹 기반의 새로운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인 4세대 나이스(NEIS)를 개통했다. 나는 또다시 좌절했다. 웹 접근성 준수를 약속했던 나이스는 성적 입력이나 복무 결재 같은 기본적인 업무조차 혼자 처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드(학생 명렬과 같이 테이블 형태로 보이는 영역), 버튼, 편집 창 같은 각종 웹 요소들이 인식이 되지 않거나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업무조차도 화면에서 탐색해야 하는 정보와 수행해야 할 것들이 다양했다. 이로 인해 키보드만 사용할 수 있는 나는 여러 단계 중 한 단계만 막혀도 업무 처리가 불가능했다. 충분한 테스트를 거치지 않고 개통한 나이스에는 웹 접근성의 지뢰가 곳곳에 산적해 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나이스는 현재까지도 접근성 개선이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내 삶의 주요 국면에서 겪었던 대표적인 접근성 이슈들이다. 새로운 시설과 기술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모두를 이롭게 하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완벽한 시설이나 기술이 존재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집요하게 보완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치밀함과 집요함이 없으면 차별과 배제는 금세 발생한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교육 분야에 과도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새로운 교육 콘텐츠가 코앞까지 닥쳐왔다. 이른바 ‘AI 디지털교과서(AIDT)’이다. AIDT를 추진하는 교육부와 이 사업을 총괄하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은 이 새로운 콘텐츠가 대한민국의 교육을 혁신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나는 지난 5년간 순탄치 않았던 학교의 디지털 환경 구축 과정과 내가 몸담고 있는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장교조)이 교육부 및 KERIS와 진행해 온 협의 과정을 토대로 AIDT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는 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AIDT가 현재 어떤 점에서 그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접근해야 AIDT가 성공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그에 앞서 교육부와 KERIS가 제안하는 AIDT의 교육적 역할과 그 성공을 주장하는 근거를 먼저 살펴보겠다.
AI 디지털교과서의 약속 : 맞춤 교육의 실현
교육부는 2023년 6월 8일, AIDT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이주호 장관은 이 자리에서 AIDT가 가져올 변화의 청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이화여대 교육학과 정제영 교수가 AIDT의 개발 마무리와 현장 안착의 사명을 띠고 KERIS 원장으로 부임한다. 정 원장은 지난 8월, 한 언론과의 취임 100일 인터뷰❶에서 AIDT 개발이 어디까지 왔는지 설명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교육부와 KERIS가 그리는 AIDT의 교육적 역할과 현주소를 엿볼 수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AIDT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과 속도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을 실현하고, 이를 통해 교육 격차를 줄이겠다고 약속한다. 특히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개별 맞춤 학습 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둘째, AIDT는 AI 보조 교사 기능을 통해 교사들의 행정 업무를 줄이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수업 설계를 지원할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교사들이 학생 개개인의 인간적 성장을 이끄는 본질적인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셋째, AIDT는 특수교육 대상자와 다문화 학생들을 위한 기능을 지원할 것이라고 한다. 자막, 화면 해설, 다국어 번역 기능 등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평등한 학습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넷째, AIDT를 통해 축적되는 학습 데이터는 학생의 성장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지원하는 데 활용될 것이며, 나아가 대학 입학 전형 요소 변화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교육 시스템 전반의 혁신을 이끌겠다고 약속한다.
이 장관과 정 원장은 모두 AIDT의 도입이 단순히 교과서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교육 전반의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정 원장은 인터뷰에서 AIDT의 AI 기술이 생성형 인공지능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또한, 교육 현장에 적합한 검증된 적정 수준의 기술을 활용할 것과 학생들의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보안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며 지난 1년 사이 퍼진 회의적 우려를 달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췄다.
AIDT 사업에는 기관장의 공언만 있는 것은 아니다. KERIS가 2023년 8월 말에 발간한 〈AI 디지털교과서 개발 가이드라인〉에는 이 장관과 정 원장이 발표한 약속을 뒷받침할 ‘교과용 도서출판사 및 개발사’(개발사)들의 기술적 준수 사항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 실현을 위해 AI 기반 학습 진단 및 맞춤형 콘텐츠 추천 기능을 구현하고, 교사의 데이터 기반 수업 설계를 지원하기 위해 AI 보조 교사 기능을 제공하라는 등의 세부적인 요구 사항과 기준이 나와 있다. 특수교육 대상자와 다문화 학생 지원을 위해 장애 유형별 접근성을 준수하고 다국어 지원을 구현할 것과 학습 데이터 축적을 통한 입학 전형 요소 변화를 대비해 국가 수준의 학습 분석과 학습 이력 관리 체계를 구축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가이드라인은 AIDT의 약속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의 역할을 하고 있고, 개발사들은 이 지침에 따라 AIDT를 개발하고 있다.
주지컨대 AIDT 개발사들이 이와 같은 구체적인 기준을 달성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쉽지 않은 과제다. 따라서 다양한 기관 및 단체, 현장 교사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이었다. 교육부와 KERIS는 AIDT의 보편적 학습 설계(UDL)와 접근성, 특히 장애 학생과 장애인 교원이 실제로 사용하면서 겪을 접근성 이슈를 개발사들이 미리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장교조에 여러 차례 자문과 협조를 구했다. 장교조는 2023년 7월과 8월, 가이드라인의 집필 최종 단계에서 의견을 제출했고, 올해 4월에는 개발사 간담회에 참여하여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지난 7월과 8월에는 장애인 교원들이 개발사에 직접 자문할 수 있도록 컨설팅단을 구성하는 데 적극 협조하기도 했다. 특히 올해 들어서 다른 장애인 교원 단체들과 연대체를 구성해 개발 과정 협조 및 모니터링을 함께 했다. 일명 ‘모두를위한교과서공동대응그룹’이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50명 이상의 장애인 교원이 KERIS가 정한 절차와 방법 내에서 개발사에 자문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개발사들은 접근성 구현이 단순히 규정으로만 존재하는 이상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가 있는 구체적 기능과 인터페이스임을 이해하고 개발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 :
AI 디지털교과서의 문제점과 기술결정론의 한계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와 KERIS가 제안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한다. 기술적 한계와 개발 시간의 부족과 같은 일차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 도입에 수반되는 제도적·물적 환경 구축의 부족, 그리고 실제로 AIDT를 사용하게 될 교사 및 학생과의 소통을 통한 점진적 통합의 과정 생략이 그 간극을 더욱 크게 벌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학교 현장과 소통하지 않고 국가 교육과정의 물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교과서의 형태를 일방적으로 변형하고 주입하는 접근은 실망스럽다. 여기에는 정책 입안자들의 기술결정론적 사고가 한몫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교육 혁신을 주도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기술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기술결정론에 사로잡힌 정부의 주입 일변도식 접근이 일차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교사의 자율성이다. 자율성이 결여된 교사의 손에 아무리 좋은 도구가 주어진다 한들 그것이 교육적 효과를 발휘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장애인 교원들이 자문 과정에서 경험한 AIDT는 장애인 접근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AIDT가 이대로 학교 현장에 도입되면 교과서가 교사와 학생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교과서에 맞추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장애 학생과 장애인 교원에게 차별과 배제로 작용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접근성 구현의 미비이다. 현재 개발 중인 AIDT는 다양한 장애 유형과 사용 사례에 따른 접근성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7월과 8월 개발사 컨설팅에서 확인한 접근성 구현 수준은 화면 요소에 대체 텍스트(스크린 리더 사용자를 위한 텍스트로 된 설명)와 자막을 삽입하여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사용자가 교과서 콘텐츠의 기본적인 내용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게 한 정도이지 상호작용 기반의 활동까지 보장된 수준이 아니다. 다른 장애 유형에 대한 테스트는 실질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교사용 메뉴나 복잡한 동작이 필요한 메뉴는 개발 부족으로 테스트가 불가한 경우가 많았다.
둘째,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전반적 준비 부족이다. 당초 교육부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2025학년도부터 특수교육 국어과도 AIDT 도입 대상이었으나 9월 현재 플랫폼 개발사조차 선정되지 않아 도입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학, 영어, 정보 교과에 대해서도 보편적 학습 설계 및 웹 접근성이 구현된 AIDT 프로토타입이 아직 발표되지 않은 상태여서 개발사들 사이에 최소한의 접근성 표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AIDT 사업 전반에서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준비도가 매우 미흡한 상태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AIDT의 도입 취지를 고려할 때 누구를 위한 교과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대체 자료 및 보조 공학 기기 연계 계획의 부재이다. 현재 AIDT에 대한 점자 촉각 자료나 보조 공학 기기와의 연계 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교육부가 발표한 디지털 인프라 확충 예산에도 장애인 보조 공학 기기 지원 등의 예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장애 학생들이 AIDT를 활용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와 환경조차 갖추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넷째, 장애인 교원과 학생을 위한 연수 및 지원 부족이다. 장애인 교원들을 위한 AIDT 사용 연수 프로그램이 전무하며, 일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접근성 관련 교육도 미비하다. 이는 장애인 교원들의 교육권 침해뿐만 아니라 장애 학생들의 학습 기회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섯째, 평가와 개인정보 보호 등에 대한 지침 부족이다. AIDT는 단순히 수업 도구로서가 아니라 과정 중심 평가 및 총괄 평가의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장애 학생들의 평가 방식에 대한 지침이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평가 과정에서의 편의 제공은 교육 평등을 위한 기본적 조치이므로 시작부터 명확한 기준과 지침이 필요한데 관련된 논의가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또한 AIDT 사용 과정에서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가 수집되고 분석되는데 장애 학생의 민감한 개인정보가 개발사 플랫폼을 통해 부적절하게 활용되거나 유출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나 적절한 정보 수집 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여섯째, 장애 학생의 학습 결손과 통합교육 저해 우려이다. 시각장애 학생의 경우, AIDT는 촉각적 요소를 배제하고 모든 정보를 음성 피드백으로만 전달하는데 수학이나 과학 같은 교과에서 도형이나 그래프 등 비언어적 정보마저 텍스트로 제공되면 중요한 개념을 직관적으로 배울 기회를 상실한다. 더불어 AIDT 도입으로 인한 교사와 학생 간 인간적 상호작용의 감소는 모든 장애 학생의 학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장애 학생은 교사 및 또래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성과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고, 이 과정에서 상호 이해와 존중이 길러진다. 그러나 AIDT가 교사와 학생을 개별화된 도구에 가두게 되면, 통합교육에 필수적인 상호작용 기회가 크게 줄어들 위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AIDT가 추구하는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이라는 이상을 공허하게 만든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배제를 낳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책 입안자들이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현재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KERIS의 정제영 원장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우려를 이해한다면서도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안이한 인식을 보여 주었다. 접근성은 업데이트로 해결할 수 있는 부수적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콘텐츠를 가로지르는 확고한 철학이자 방법론이 되어야 한다. 그 기반 위에서 다루어질 때만이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맞춤 교육에 기여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더욱이 AIDT는 수십 개의 민간 출판사 및 개발사들이 참여하는 시장이 아닌가? 에듀테크 시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넓어질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단계에서의 AIDT는 사업 초기에 교육부 장관이 천명했고 개발 가이드라인에도 명시된 3대 원칙을 모두 위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AIDT 개발의 3대 원칙이 무엇이고, 현재 AIDT 정책이 장애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그 원칙을 위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장애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AI 디지털교과서 개발의 3대 원칙
AIDT 개발에는 3대 원칙이 있다. 인간 존엄성을 위한 교육, 평등한 학습 기회 보장, 교사의 전문성 존중이다. 〈AI 디지털교과서 개발 가이드라인〉은 이 원칙을 토대로 ‘맞춤 교육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AIDT 개발의 세부 지침을 정의한 문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AIDT가 그 원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AIDT의 검정 출원 마감일이었던 8월 21일 기준 146종의 교과서가 출원되었고, 오는 11월 말 최종 심사 결과 발표까지 개발사들은 지속적인 보완 요구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점이야말로 이 원칙을 환기해야 할 적기이다. 나는 장애 학생과 장애인 교원의 관점에서 이 원칙들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AIDT의 효용성과 해악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첫 번째 원칙은 ‘인간 존엄성을 위한 교육’이다. 가이드라인은 이 원칙에 대해 “신기술을 안전하고 책임감 있게 사용하도록 교육 당사자가 AI 디지털교과서를 주도적으로 활용·제어하게 해야 함”이라고 부연한다. 그러나 현재의 AIDT 개발은 장애인 사용자의 접근성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지 않고, 장애인 교원 연수나 보조 공학 기기 구매 예산 확보를 통해 장애인 사용자들이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제반 환경도 전혀 구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상술한 바와 같이 현재 상태에서는 AIDT가 장애 학생을 수업에서 소외되게 만들고 장애인 교원의 교육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이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두 번째 원칙은 ‘평등한 학습 기회 보장’이다. 가이드라인은 이 원칙을 “모든 아이가 AI 디지털교과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재의 AIDT 개발 방향은 이 원칙과 괴리가 있다. 장애 학생들, 특히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촉각적 자료나 대체 자료에 대한 계획이 없고, 다양한 장애 유형을 고려한 접근성 기능이 미흡하다. 또한, 보조 공학 기기 지원을 위한 예산 확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AIDT가 제공하는 맞춤형 학습이 오히려 장애 학생들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서비스가 될 위험이 크다. 이는 평등한 학습 기회 보장이라는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세 번째 원칙은 교사의 전문성 존중이다. 가이드라인은 “AI 디지털교과서는 교수자 고유의 전문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교수자를 보조하고 지원해야 함”이라고 명시한다. 그러나 현재 개발 중인 AIDT는 이 원칙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 교원의 관점에서 볼 때 AIDT의 교사용 메뉴는 테스트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고 학생과의 원활한 상호작용에 필요한 고도의 접근성을 구현하기에는 개발 시간이 지나치게 촉박했다. 맞춤형 연수 프로그램도 부재하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열악한 교육 환경은 이미 장애인 교원의 교육 활동에 큰 제약으로 작동한다. 수업의 핵심 콘텐츠인 교과서마저 접근성이 미비한 형태로 도입될 경우 교사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지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한할 위험이 크며 결과적으로 장애인 교원의 교육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
원칙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교육에서 무척 중요하다. 원칙이 무너지면 신뢰가 무너지고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쌓기 어렵다. 교과서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치 종교의 경전이 그러하듯 교과서에 부여된 권위와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아진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AIDT가 갖는 상징성은 무척 크다. 교과서가 신뢰를 잃으면 그것을 중심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도 신뢰를 잃는다. 시중에 출시되는 여느 디지털 서비스나 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경쟁적인 AI 서비스 출시와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이다.
AIDT는 현재 시점에서 적어도 장애인 사용자에게는 효용성보다 해악이 큰 교과서가 될 공산이 크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평가 결과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장애인 교원의 교권을 추락시키고 장애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차별 교과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AIDT의 장애인 사용자에 대한 해악은 세부적인 기능 미비의 표면적 층위가 아닌 교과서 개발의 근간이 되는 원칙의 훼손이라는 심층적 층위에서 다뤄져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미 AIDT에 대한 검정 심사가 진행 중이지만 애당초 의도했던 목표 달성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원칙마저 훼손하는 수준이라면 교육부가 과감하게 도입 연기를 결정하는 것이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중앙 행정 기관의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다.
나오며 :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는 교육으로
나는 이 글의 서두에 개인적 경험을 술회했다. 첨단화되는 가전제품, 코로나19를 계기로 확산한 화상 회의와 온라인 학습 관리 시스템, 웹 환경에 맞게 새롭게 구축된 4세대 나이스까지. 이들은 모두 내게 큰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실제로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꿔 준 측면도 있다. 특히 구글 클래스룸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학습 관리 시스템이 그러한데, 기존에는 종이와 펜으로만 이루어졌던 쓰기 지도가 온라인 협업 도구를 통한 공동 작업으로 디지털화하면서 전맹 시각장애인인 나도 학생들에게 실시간 피드백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구글 클래스룸 출시 10주년을 기념하는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이러한 구글 클래스룸의 혁신이 현장 교사들의 활발한 피드백 덕분에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AI 디지털교과서도 구글 클래스룸과 같은 길을 걷게 될까? 아니면 이주호 장관이 과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재임했던 2010년~2013년 사이에 추진했던 디지털교과서 사업처럼 학교 현장으로부터 외면받는 신세로 전락할까? 나는 인간 중심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 집요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AIDT도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는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오히려 AIDT가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교육은 전통적으로 사람 중심의 서비스이자, 관습이자, 삶의 한 양태였다. 그 복잡다단한 교육을 특정 기술과 기능의 좁은 틀로 환원하여 거기에 교육 혁신의 열쇠가 있다는 말은 편협한 주장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적극적 수용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무비판적 수용과 밀어붙이기식 주입까지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늘 그랬듯이 교육을 혁신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이 기술 중심에서 다시 사람 중심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확고한 원칙과 교육적 가치를 체화한 정책 입안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아직 학교 현장에는 다소 빗나간 교육 정책도 바른길로 돌려놓을 힘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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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영 KERIS 원장 “공교육 도입 앞둔 AI 디지털교과서, 오해와 진실””, 〈디지털조선일보〉, 2024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