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특집]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싶다 (이윤승)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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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학교에서 노동을 교육한다는 것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싶다

- 학교 안 노동의 위계를 없애는 것이 노동에 대한 교육의 시작



이윤승

autoki6@naver.com

본지 편집위원.

흔치 않은 장애인 중등 수학 교사라 좋습니다.

수학 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입시 교과라서’라든가 ‘논리력 향상을 위해서’ 같은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를 말해 주는 학생들이 훨씬 많아지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 글에서 사서 교사와 보건 교사에 관한 서술에 오류가 있어 온라인 게재판에서는 표현을 수정했습니다. 사서 교사와 보건 교사는 보통 수업을 하기에 [수업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으로 고쳤습니다.)



작년 어느 날이었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가을 오후,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가는 길에 한 교사가 이야기를 꺼냈다. 담임인 학급의 학생들과 취업에 대해 상담한 이야기였다. 특성화고에서 일하다 보니 취업에 대한 상담이 많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 교사의 입에서 놀랄 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정말로, 진짜 저는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해요.”


잊고 있던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늘 듣던 말이기에 자연스럽게 믿었던 말이었다. 정말로 직업에 귀천이 없는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교사가 된 후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노동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차마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을 이렇게 다시 교사의 입을 통해 들을 줄이야. 그런 말을 이렇게 대뜸 해 버리다니, 그에게서 뭔가 열정이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너무 교사들에 대해서 회의적으로만 대했었나 반성하게될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을 학생이 믿어요? 어떻게 귀천이 없어요. 귀천이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인 것도 알겠고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는 사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믿을 수가 없어요.”


나를 놀라게 한 교사는 자신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점심시간조차 노동 시간으로 인정받으며 한가롭게 밥을 먹으러 가서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식당에 앉아 조리사분들이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고 교내 산책길을 따라 초록을 눈에 담고 송골 맺힌 땀을 식힐 겸 교무실에서 아이스 커피를 마실 교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교사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교사를 했어요? 자신이 교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한다고 상상할 때, 얼마나 다른 직업들을 떠올릴 수 있겠어요?”


한동안 생각을 하던 그 교사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렇게 물으니 확실하게 말을 못 하겠네요. 사회적인 위치와 차별은 있지만 모든 직업이 세상에 필요하긴 한데…….”

“그와 같은 지위의 차이와 편견,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이 바로 직업에 귀천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학교 안 노동의 위계


꽤 오랫동안 청소년 대상 설문 조사에서 직업 선호도 1위는 교사였다. 그래서 난 학생들과 취업에 관련된 상담을 할 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미 선호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존재라서 그렇다.


교사들은 가끔 착각한다. 자신들은 의사나 법률가들에 비해 연봉도 낮고 사회적으로 전문직 대우도 확실히 받지 못하기에 ‘평균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사들은 아주 큰 특혜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는 위치에 있다. 최상위 집단에 비해 연봉이 낮다고는 하지만 교사가 포함된 가구의 평균 소득액은 전체 가구의 평균 소득액보다 많다. 금융 자산의 크기와 비율도 일반 가구에 비해 크고, 중산층 이상의 비율도 교사 가구에서 높게 나타난다. 휴가도 제대로 못 쓴다고 하지만 ‘41조 연수’(연수 기관 및 근무 장소 외에서의 연수)와 금요일 조퇴를 어떤 직업군보다 잘 활용하고 방학도 있다. 초과 근무도 거의 없고 수당도 정확하게 지급받는다. 다양한 사유를 활용해 필요한 상황에서 휴가나 휴직을 사용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직업은 결코 평균적인 위치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교사인 나는 어떤 일을 하든 학생의 적성이 가장 중요하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쉽게 얘기할 수가 없다. 학생의 마음 한구석에 ‘당신은 교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그때 그 교사에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때의 상황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학교 비정규직 파업이 있었고 초등 돌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얼마 후엔 교육 행정직과 교사노조 간의 다툼도 있었다. 몇 년 전, 비정규직 교사의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도 떠올랐다. 능력주의, 시험 만능주의가 전면에 등장하며 학교 안의 자본주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과연 학교 안에서 교사와 교사가 아닌 노동자 사이에 위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교육공동체’라는 말을 썼지만, 교육공동체의 주축 자리에는 늘 교사들만 있었다. 교원 성과급이 처음 시행될 때 반대 논리 중에 ‘교육은 교사 한 명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 속에는 교사가 아닌 학교 안의 노동자는 배제하는 논리가 들어 있었다. 교육은 수업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엔 교사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기에 수업을 하지 않아도 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도 하다. 수업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서 교사, 보건 교사의 경우가 그렇다. 학교에서 도서관을 관리하는 일과 학생의 건강과 학내 보건을 관리하는 것은 교육의 영역이고, 그 영역의 전문가로서 사서 교사와 보건 교사는 수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교사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교육의 영역이고 어떤 사람까지 교사라고 볼 수 있을지, 명확하게 선을 긋기가 매우 까다로워진다. 


최근 교사 집단에서 나타나는 흐름을 보면, ‘업무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교사의 업무에서 수업 이외의 것들을 제외시키려고 한다. 오랫동안 관행처럼 내려온 불필요한 업무를 제외시키는 것이라면 매우 필요한 조치이다. 하지만 교사의 업무를 줄인다면서 그 업무를 없애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부분도 있다. 돌봄과 행정에 대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교육 공무직으로 분류되는 학교 회계 직원, 조리원, 돌봄 전담사, 교무 행정 실무사, 사서 보조, 교무 보조 등의 직원들 에게 교사가 하던 일들이 넘겨지고 있다.


그런데 기존에 교사가 하던 일이 그들에게 넘어갔다면, 반대로 그들의 일이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 없이는 수업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교실 수업이라면, 그 수업을 가능케 해 주는 요소들 또한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무엇이 더 교육에서 중요하냐고 따질 수는 없다.



‘다른 노동, 같은 임금’의 학교를 보고 싶다


‘이판’과 ‘사판’은 승려를 분류하는 용어이다. 이판은 주로 참선과 경전 연구, 강론을 하며 포교를 담당하는 승려이고, 사판은 사찰의 업무를 꾸려 가는 행정을 맡는 승려이다. 불교에선 이판과 사판은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될 상호 관계가 있기에 서로 존중할 때에만 사찰이 유지되고 불법이 널리 퍼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스님들은 평생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판과 사판을 겸하거나 번갈아 하였다. 사찰의 구조는 학교와 닮아 있다. 불법을 가르치듯 교사들은 교과 지식을 전달한다. 그리고 사찰이 유지되기 위한 행정은 학교를 유지하는 행정과 닮아 있다. 학교도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선 수업과 행정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그 둘은 무엇이 더 교육의 역할에 가깝냐고 따질 것이 없고 둘 사이에 위계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학교에선 둘의 상호 관계가 점점 끊어지는 듯하다. 그리고 끊어지는 만큼 위계도 굳어지고 있다. 교사와 교육 공무직이라는 정규직들의 관계도 그렇지만, 학교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관계는 더 심각할 정도로 나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학교에서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하기 어렵지만, 정말 말하고 싶다. 적어도 학교에서라면 말해야 한다. 교사로서 부끄러움 없이, 기만적이라는 느낌 없이 말하고 싶다. 난 교사로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수업을 하고 있고 그 수업을 가능케 하기 위한 교육 행정 일도 같이 하고 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회계 직원은 학생들의 온전한 교육 활동을 위해 학교 전체 회계를 책임지고 일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건강한 교육 활동을 위해 급식 노동 자는 조리원으로서 일하고 있다. 그렇기에 적어도 학교라면, 학생들에게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학교라면 학교 안의 모든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지위와 대우가 평등하길 바란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말을 넘어 ‘다른 노동, 같은 임금’의 체계가 학교에서만이라도 지켜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노동을 교육하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노동을 교육하면서 노동의 위계를 매일 겪는 지금의 학교에선 결국 자본주의적인 취업 교육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돌봄의 행정을 학교가 할 것이냐, 교육청이 할 것이냐를 두고 싸우며 돌봄과 교육을 나누려 하고, 학교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연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업만이 학교의 중심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학생들 또한 학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자기 수업을 방해하는 행위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부를지, ‘교사’라고 볼지에 대해 논하며 ‘진짜 선생님’, ‘진짜 교사’의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전문직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에 관한 차별적 시선일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온 사회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학교만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온 사회가 직업 간의 연봉과 혜택의 차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직업에 귀천을 구분하여 차별적으로 대하는 처참한 상황이더라도, 먼저 학교에서 교육공동체 구성원들의 귀천과 지위를 나누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적어도 희망은 가져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노동에 대한 교육의 시작이고 사회 변화의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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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