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학교에서 노동을 교육한다는 것
이런 경제 교과서로는 시민이 탄생할 리 없다
- 자본의 관점을 넘어, 비판 교육으로서의 노동교육으로
글
서재민
sw-jms@hanmail.net
서울 오류중 교사
남들과의 다른 면모가 있다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나는 대개는 평범하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균 범위 안의 사람이고 싶다. 특별할 것도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해서 쉰다. 주말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운동을 하고 와서 낮잠을 실컷 잔다. 자족하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비범한 인간이 된다.
“난 재테크 아무것도 안 해.”
이상하게 본다. 내 몸과 마음을 적정히 다스리는 것, 내 주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만도 벅차지만,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일상이 부정되는 느낌이다. 내가 현실 감각이 없는 거야? 내가 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지? 노동 소득으로는 안정적인 의식주 생활을 해 가기 어려운 ‘야수-약탈-아류 자본주의’ 한국에 산다는 건,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처절한 생존 경쟁의 자유 시장주의 경제에 산다는 건, 이런 보통의 삶도 비범히 보이게 한다.
경제 교과서는 왜 문제인가
물질적 토대가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게 마르크스의 ‘토대-상부 구조론’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토대)이 국가의 성격, 사람들의 의식 등을 규정한다. 학교는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상부 구조의 한 축이고, 따라서 교과서 경제 단원은 자본주의교의 성서(Bible)이다. 초·중·고 교과서의 경제 단원은 합리적 선택, 생산-소비-분배, 수요와 공급의 법칙, 국내 총생산(GDP), 물가 상승 (인플레이션), 비교 우위와 국제 무역, 최근엔 금융과 자산 관리(재테크)까지, 교과서의 내용은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의 용어 풀이집이다.
교육과정 권력 카르텔이 이를 공고히 한다. 애초에 미군정기의 국가 교육과정 체제부터 이런 모습은 시작됐다. 자유시장주의 경제학 우등생인 행정 관료는 기획재정부와 교육부에서 교육의 재정과 정책을 지휘한다. KDI, 전경련, 금융협회 등 국가 산하 또는 민간의 경제 관련 단체는 교육과정 개정 시에 조직적으로 개입한다.
경제학이 원래 이런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을 테니까. 그런데 이 자연스러움은 ‘시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민(citizen)’의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의 자유를 누리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정의하자. 그런데 교과서 속 경제가 갖는 특징들은 시민에 반한다.
첫째, ‘호모 이코노미쿠스(합리적 경제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하나의 인간상을 전제한다. ‘가성비’, 즉 비용과 효용으로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문제를 정량화해서 판단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공동체 없는 고립된 자아이다. 다중 정체성이 제거된 자아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람들 간에 유대를 맺어 가는, 때로는 이기적이면서도 때로는 이타적인, 공동체 속의 개인이 성장해 가는 시민으로서의 그런 자아는 없다.
둘째, 자본가 빙의. 교과서 서술의 주어(주체)는 자본가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재벌 2세, 건물주, 국가 고위 관료의 눈이다. 큰 덩어리의 자본을 가진 극소수만이 할 수 있는 고민, 즉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누구를 위하여’가 ‘3대 경제 문제’로 제시된다.❶ ‘노동’ 또는 ‘노동자’라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법 영역에서 사회법적 권리로 언급되는 게 전부다). 경제 안정을 위해 얌전히 일하라는 내용으로 ‘근로자는 과도한 요구를 자제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고민하는 경제 문제는 이런 게 아닐까? “난 뭐 먹고 살지?”, “최저 시급은 왜 안 오르지?” 등의 생계 걱정, “돈 아껴서 무얼 살지” 등의 한정된 소득 안에서의 지출 걱정.
셋째, 공감과 연대가 없다. ‘실업’ 단원은 인구, 경제 활동 인구, 비경제 활동 인구, 취업자, 실업자 등을 분모, 분자 헷갈리게 놓고 비율을 계산하는 문제 풀이 시간이다. ‘불평등’은 지니 계수 등 복잡한 통계 자료를 빠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간이다. 실업이 사회의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실업자는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지, 불평등은 왜 심화되고 어떤 사회 갈등을 가져오는지, 당사자와 공동체가 어떤 대안을 마련해 갈지 등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없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가린 채 계층 공고화에만 오용되는 요즘의 ‘능력주의’가 강화된다. 주변의 고통을 외면하는 각자도생의 인간이다.
넷째, 역사를 몰아낸다. 20세기 사회주의 몰락 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역사의 종착지의 위상까지 갖게 되었다. 역사의 완성이 자본주의라는 자만으로, 경제를 정치와 분리해서 성역화해 버린다. 그러나 주기적 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전 지구적 노동 착취, 군사력이 곧 경제 패권인 현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정치가 제거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 ‘자본주의 내의 다양한 경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경제’ 등에 대한 상상과 논의를 어렵게 한다.
교육에 대한 자본의 침략은 이제 시작이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다들 열심히 사는데 왜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을까? 서로 기대고 돕는 연대 행위를 하면 합리적 경제인이 아닌가? 실업자가 한 명도 없는 자본주의도 있나? 기후 위기, 팬데믹 등 지구와 인류를 파괴하는 일들이 왜 제어되지 않는가? 기술이 얼마나 더 발전해야 사람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줄까? 풍요의 시대에 왜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이리 많을까? 이런 의문들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더 큰 바람이 불고 있다.
금융 투자가 유행이고, 경제 현실을 각색해 교실(수업) 모형으로 재현해 내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이런 현상에 한쪽에서는 열광하고, 반대 편에서는 큰 우려를 보인다. 나는 후자인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전망이다. 숨 막히는 국가 관료제의 폐쇄성이 의도치 않게 방어막을 만들었던 걸까? 이재(理財)를 밝히는 사람에 대한 도덕적(봉건적) 손가락질에 눈치를 보는 문화가 이어져서 그런 것일까? 교육에 대한 자본주의 경제의 관여가 전에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이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교육 분야 침투는 더 노골화되고 있다. IMF 외환 위기 이후에 미국식 자본주의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특권 학교(자사고, 국제 학교)가 유치되었고, 교육과정에는 ‘금융과 투자’ 단원이 들어왔으며, 교육의 다양화·전문화·유연화 논리로 비정규 교사들은 늘어났다. 더 근본적으로 교육 관계의 시장화가 진행됐다. 최근엔, 글로벌 회사의 스마트 기기 보급과 업무용· 교육용 소프트웨어 공급, 기업 전담 팀이 관리하는 교사 네트워크, 그린 스마트 미래 학교 등으로 공교육 시장이 활짝 열렸다.
교육에서 모색하는 대안
이런 현실 앞에서 교육에서는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먼저 다른 관점, 다른 이론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약 150년 전에 나왔다. 지금의 독점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 소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초기 자본주의 현상을 분석했다.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든, 혁명으로 건설한 20세기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몰락했다. 그래서 이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 시대에 뒤떨어진 경제학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몸체에 이것저것 덧붙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겹겹이 쌓인 자본주의 모순의 원형을 파고들 수 있게 해 준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세상을 뒤집어 보는 ‘빨간 약’이다. 앞서 언급한 의문들을 《자본론》을 쥐고 파헤치다 보면, 절대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이 겪는 소외에 다가가게 된다. 실업은 일시적 경제 위기가 아니라 상대적 과잉 (노동) 인구를 전제해야 하는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이다. 높은 경제 성장률은 가혹한 노동 착취의 다른 말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세상을 뒤집어서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빨간 약’이다. 제이슨 바커(2010), 〈마르크스 재장전〉 다큐멘터리 포스터.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1960년대 독일의 교육 개혁,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의 중심은 ‘비판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❷ 비판 교육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자본론》은 최소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비판 교육의 한 관점을 제공한다.
이런 비판적인 관점에 따라 학교 현장에서 대안을 실천하려는 첫걸음이 바로 노동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2021년 발표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시안)〉에서 ‘일과 노동의 가치’가 3대 목표 중 하나로 제시됐다. 총론과 각론에서 이를 구체화해 가고 있고 올해 하반기에 발표될 예정이다. ‘노동’ 이 중심이 되어 교육과정을 개편하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 교육과정 권력의 작용이든, 정권의 교체 때문이든, 여러 정황상 아쉽게도 극적으로 바뀔 리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노동 인권교육을 시·도 교육과정, 마을 교육과정 등 특색 교육과정에서라도 운영하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내가 운영해 본 노동교육의 사례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
작년에 《청소년 노동인권》이라는 서울시교육청 인정 교과서가 개발됐고, 나도 처음으로 공립 중학교 내 정규 교육과정으로 한 학기 노동인권 수업을 했다. 그동안 노동인권교육은 이벤트(학기 말, 범교과, 전문 강사 초청, 사회 교과 수업에서 단발성) 성격으로, 그리고 주로 법률 관계 측면에서 3차시 이내로 이뤄져 왔다. 이와 달리 한 학기 노동인권 수업은 20차시 정도로, 노동에 대한 역사, 관점, 가치, 감수성, 권리 등 시민교육의 하나로 노동을 다룰 수 있다. 노동에 대한 인식과 정의, 노동의 가치와 노동에 대한 태도, 최저임금위원회와 최저 임금 결정, 취업난과 학습 노동 등에 대한 자료를 보고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
그중 ‘노동 3권’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아주 민감한 주제였다. 일단은 막연히 학기 말에 다룰 주제로 미루어 놨다. 그러다 마침 기회가 왔다. 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보건의료노조 등 노동자들에게서 도저히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노총은 ‘불평등 타파’, ‘평등 사회로의 대전환’을 외치며 총파업을 결의했다.

▲ 최저임금위원회와 최저 임금 결정, 취업난과 학습 노동에 관한 수업 자료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인 비정규직 종사자, 그중에서도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우리 학교 급식 조리 선생님들도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일 학사 일정이 단축 수업과 급식 미실시로 변경됐다. 학교에서는 학사 일정 변경과 함께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담아 가정 통신을 발송해 주었다.

▲ 학사 일정 변경 가정 통신문 뒷면에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담았다.
파업일이 하필 특별 메뉴가 나오는 수요일이다. ‘바삭바삭 새우튀김’을 못 먹게 됐다는 학생들의 불평이 들린다. 그래도 학생들의 불평은 귀여운(?) 수준이다. 파업에 대한 뉴스의 댓글은 혐오 일색이다. ‘때려 치워라, 할 사람 많다’, ‘아이들 볼모로 잇속 챙기지 마라’ 등 경악할 말들의 잔치다. 파업에 대한 뉴스의 댓글은 왜 혐오 일색일까? 수업 시간에 이걸 대놓고 얘기하는 방식으로 계기 수업 흐름을 짠다.

▲ 2021년 10월 20일 민주노총 총파업 계기 수업 흐름
파업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사람들의 절규다. 무조건 욕하기 전에, ‘왜 이들이 징계와 해고를 각오하고 거리에 서야 했는지’, ‘어떤 요구를 하는지’ 들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은 수업의 막바지에 새우튀김 못 먹는 마음을 달래고, 급식 조리 선생님들께 응원의 문구를 (원하는 사람만) 적어 본다.

▲학생들의 응원 메시지 모음
전교조 분회 조합원들과 함께 간식과 응원 메시지를 들고 급식실을 찾았다. 학생들의 식사를 거르게 해 무거워졌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시는 듯해 보였다. ‘아 맞다, 나도 민주노총 조합원이지?!’ 학교 비정규직 선생님과의 연대만 생각하다가, 정작 나도 민주 노총 조합원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정규직이라 코로나19의 위기도 생계의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옹졸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교사가 노동 3권을 당당히 행사하여 행동하는 건 머나먼 일인가 하는 무력감도 들었다. 계기 수업과 학교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홍보하는 교내 메시지를 보내면서, 교사도 힘을 모아 노동 3권을 행사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희망도 넌지시 내보였다.

▲교내에 보낸 연대의 메시지
자본과 노동을 대립해서 보지 않고 싶어도
노동과 노동(인권)교육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에서 자주 듣는 반론이 있다. 자본과 노동을 왜 대립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보느냐는 거다. 교사가 재테크도 하고 금융교육도 하면서, 노동과 노동교육의 중요성은 중요성대로 마음에 새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분법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거 아닌가? 특히나 합의점을 찾지 못해 오랜 기간 적대 관계를 만들어 왔던 노동과 자본이니 더더욱 대립적 관점을 부추기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 구도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계속 떠올라서다.
금융 자본은 실물 자본 위에서의 심리 게임이다. 실물 자본은 원료 채취, 가공, 유통, 판매, 광고 등 촘촘한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의 누군가의 노동이다. 자본의 논리는 심지어 사람 목숨이 오가는 전쟁을 앞두고도 그 참혹함보다 관련 주가 곤두박질칠까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람과 노동을 대상화하는 게 자본이다.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몸이 계속 아프다고, 동료가 죽어간다고, 같은 일을 하는데 왜 임금이 이렇게 적냐고 물어도, 자본은 노동자를 온전히 노동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자본은 그들을 비정규직이라고, 개인 사업자라고, 현장 실습생이라고, 미등록 외국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다고, 간접 고용이라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노동과 노동자를 홀대해 온 게 자본이다.
그래서 금융 자본을, 자본을 노동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강자가 약자한테 폭력을 휘둘러 놓고 ‘나를 적대적으로 보지 말아 줘’라고 말하는 듯해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금융교육을 강조하기 이전에 노동교육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탄생 이전에 노동인권 감수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의 노동도 온전히 인정받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에야, 금융교육에 대한 경계심도 누그러질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내 생각이 비범함이 아니라 보통이 되는 세상이어야만 비로소 말이다.
❶ ‘누구를 위하여’는 생산에 기여한 몫을 분배하는 경제 문제다. 이 말은 마치 자본가가 생산에 참여한 주체들에게 수혜를 베푸는 듯 읽히고, 그중 한 분배 대상인 노동자에게 기여에 따른 정당한 몫을 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자는 항상 최소한의 최후의 몫을 받았다. 분배는 힘의 우위에 있는 자본가가 몫을 나누는 행위였다. 따라서 3대 경제 문제 중 하나로서 분배는 ‘누구를 위하여’라기보다는, ‘누구에게는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가/돌아가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❷ 김누리(2020),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 66쪽.
특집/학교에서 노동을 교육한다는 것
이런 경제 교과서로는 시민이 탄생할 리 없다
- 자본의 관점을 넘어, 비판 교육으로서의 노동교육으로
글
서재민
sw-jms@hanmail.net
서울 오류중 교사
남들과의 다른 면모가 있다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나는 대개는 평범하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균 범위 안의 사람이고 싶다. 특별할 것도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해서 쉰다. 주말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운동을 하고 와서 낮잠을 실컷 잔다. 자족하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비범한 인간이 된다.
“난 재테크 아무것도 안 해.”
이상하게 본다. 내 몸과 마음을 적정히 다스리는 것, 내 주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만도 벅차지만,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일상이 부정되는 느낌이다. 내가 현실 감각이 없는 거야? 내가 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지? 노동 소득으로는 안정적인 의식주 생활을 해 가기 어려운 ‘야수-약탈-아류 자본주의’ 한국에 산다는 건,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처절한 생존 경쟁의 자유 시장주의 경제에 산다는 건, 이런 보통의 삶도 비범히 보이게 한다.
경제 교과서는 왜 문제인가
물질적 토대가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게 마르크스의 ‘토대-상부 구조론’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토대)이 국가의 성격, 사람들의 의식 등을 규정한다. 학교는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상부 구조의 한 축이고, 따라서 교과서 경제 단원은 자본주의교의 성서(Bible)이다. 초·중·고 교과서의 경제 단원은 합리적 선택, 생산-소비-분배, 수요와 공급의 법칙, 국내 총생산(GDP), 물가 상승 (인플레이션), 비교 우위와 국제 무역, 최근엔 금융과 자산 관리(재테크)까지, 교과서의 내용은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의 용어 풀이집이다.
교육과정 권력 카르텔이 이를 공고히 한다. 애초에 미군정기의 국가 교육과정 체제부터 이런 모습은 시작됐다. 자유시장주의 경제학 우등생인 행정 관료는 기획재정부와 교육부에서 교육의 재정과 정책을 지휘한다. KDI, 전경련, 금융협회 등 국가 산하 또는 민간의 경제 관련 단체는 교육과정 개정 시에 조직적으로 개입한다.
경제학이 원래 이런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을 테니까. 그런데 이 자연스러움은 ‘시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민(citizen)’의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의 자유를 누리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정의하자. 그런데 교과서 속 경제가 갖는 특징들은 시민에 반한다.
첫째, ‘호모 이코노미쿠스(합리적 경제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하나의 인간상을 전제한다. ‘가성비’, 즉 비용과 효용으로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문제를 정량화해서 판단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공동체 없는 고립된 자아이다. 다중 정체성이 제거된 자아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람들 간에 유대를 맺어 가는, 때로는 이기적이면서도 때로는 이타적인, 공동체 속의 개인이 성장해 가는 시민으로서의 그런 자아는 없다.
둘째, 자본가 빙의. 교과서 서술의 주어(주체)는 자본가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재벌 2세, 건물주, 국가 고위 관료의 눈이다. 큰 덩어리의 자본을 가진 극소수만이 할 수 있는 고민, 즉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누구를 위하여’가 ‘3대 경제 문제’로 제시된다.❶ ‘노동’ 또는 ‘노동자’라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법 영역에서 사회법적 권리로 언급되는 게 전부다). 경제 안정을 위해 얌전히 일하라는 내용으로 ‘근로자는 과도한 요구를 자제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고민하는 경제 문제는 이런 게 아닐까? “난 뭐 먹고 살지?”, “최저 시급은 왜 안 오르지?” 등의 생계 걱정, “돈 아껴서 무얼 살지” 등의 한정된 소득 안에서의 지출 걱정.
셋째, 공감과 연대가 없다. ‘실업’ 단원은 인구, 경제 활동 인구, 비경제 활동 인구, 취업자, 실업자 등을 분모, 분자 헷갈리게 놓고 비율을 계산하는 문제 풀이 시간이다. ‘불평등’은 지니 계수 등 복잡한 통계 자료를 빠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간이다. 실업이 사회의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실업자는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지, 불평등은 왜 심화되고 어떤 사회 갈등을 가져오는지, 당사자와 공동체가 어떤 대안을 마련해 갈지 등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없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가린 채 계층 공고화에만 오용되는 요즘의 ‘능력주의’가 강화된다. 주변의 고통을 외면하는 각자도생의 인간이다.
넷째, 역사를 몰아낸다. 20세기 사회주의 몰락 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역사의 종착지의 위상까지 갖게 되었다. 역사의 완성이 자본주의라는 자만으로, 경제를 정치와 분리해서 성역화해 버린다. 그러나 주기적 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전 지구적 노동 착취, 군사력이 곧 경제 패권인 현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정치가 제거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 ‘자본주의 내의 다양한 경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경제’ 등에 대한 상상과 논의를 어렵게 한다.
교육에 대한 자본의 침략은 이제 시작이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다들 열심히 사는데 왜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을까? 서로 기대고 돕는 연대 행위를 하면 합리적 경제인이 아닌가? 실업자가 한 명도 없는 자본주의도 있나? 기후 위기, 팬데믹 등 지구와 인류를 파괴하는 일들이 왜 제어되지 않는가? 기술이 얼마나 더 발전해야 사람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줄까? 풍요의 시대에 왜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이리 많을까? 이런 의문들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더 큰 바람이 불고 있다.
금융 투자가 유행이고, 경제 현실을 각색해 교실(수업) 모형으로 재현해 내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이런 현상에 한쪽에서는 열광하고, 반대 편에서는 큰 우려를 보인다. 나는 후자인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전망이다. 숨 막히는 국가 관료제의 폐쇄성이 의도치 않게 방어막을 만들었던 걸까? 이재(理財)를 밝히는 사람에 대한 도덕적(봉건적) 손가락질에 눈치를 보는 문화가 이어져서 그런 것일까? 교육에 대한 자본주의 경제의 관여가 전에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이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교육 분야 침투는 더 노골화되고 있다. IMF 외환 위기 이후에 미국식 자본주의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특권 학교(자사고, 국제 학교)가 유치되었고, 교육과정에는 ‘금융과 투자’ 단원이 들어왔으며, 교육의 다양화·전문화·유연화 논리로 비정규 교사들은 늘어났다. 더 근본적으로 교육 관계의 시장화가 진행됐다. 최근엔, 글로벌 회사의 스마트 기기 보급과 업무용· 교육용 소프트웨어 공급, 기업 전담 팀이 관리하는 교사 네트워크, 그린 스마트 미래 학교 등으로 공교육 시장이 활짝 열렸다.
교육에서 모색하는 대안
이런 현실 앞에서 교육에서는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먼저 다른 관점, 다른 이론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약 150년 전에 나왔다. 지금의 독점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 소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초기 자본주의 현상을 분석했다.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든, 혁명으로 건설한 20세기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몰락했다. 그래서 이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 시대에 뒤떨어진 경제학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몸체에 이것저것 덧붙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겹겹이 쌓인 자본주의 모순의 원형을 파고들 수 있게 해 준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세상을 뒤집어 보는 ‘빨간 약’이다. 앞서 언급한 의문들을 《자본론》을 쥐고 파헤치다 보면, 절대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이 겪는 소외에 다가가게 된다. 실업은 일시적 경제 위기가 아니라 상대적 과잉 (노동) 인구를 전제해야 하는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이다. 높은 경제 성장률은 가혹한 노동 착취의 다른 말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세상을 뒤집어서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빨간 약’이다. 제이슨 바커(2010), 〈마르크스 재장전〉 다큐멘터리 포스터.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1960년대 독일의 교육 개혁,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의 중심은 ‘비판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❷ 비판 교육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자본론》은 최소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비판 교육의 한 관점을 제공한다.
이런 비판적인 관점에 따라 학교 현장에서 대안을 실천하려는 첫걸음이 바로 노동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2021년 발표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시안)〉에서 ‘일과 노동의 가치’가 3대 목표 중 하나로 제시됐다. 총론과 각론에서 이를 구체화해 가고 있고 올해 하반기에 발표될 예정이다. ‘노동’ 이 중심이 되어 교육과정을 개편하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 교육과정 권력의 작용이든, 정권의 교체 때문이든, 여러 정황상 아쉽게도 극적으로 바뀔 리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노동 인권교육을 시·도 교육과정, 마을 교육과정 등 특색 교육과정에서라도 운영하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내가 운영해 본 노동교육의 사례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
작년에 《청소년 노동인권》이라는 서울시교육청 인정 교과서가 개발됐고, 나도 처음으로 공립 중학교 내 정규 교육과정으로 한 학기 노동인권 수업을 했다. 그동안 노동인권교육은 이벤트(학기 말, 범교과, 전문 강사 초청, 사회 교과 수업에서 단발성) 성격으로, 그리고 주로 법률 관계 측면에서 3차시 이내로 이뤄져 왔다. 이와 달리 한 학기 노동인권 수업은 20차시 정도로, 노동에 대한 역사, 관점, 가치, 감수성, 권리 등 시민교육의 하나로 노동을 다룰 수 있다. 노동에 대한 인식과 정의, 노동의 가치와 노동에 대한 태도, 최저임금위원회와 최저 임금 결정, 취업난과 학습 노동 등에 대한 자료를 보고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
그중 ‘노동 3권’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아주 민감한 주제였다. 일단은 막연히 학기 말에 다룰 주제로 미루어 놨다. 그러다 마침 기회가 왔다. 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보건의료노조 등 노동자들에게서 도저히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노총은 ‘불평등 타파’, ‘평등 사회로의 대전환’을 외치며 총파업을 결의했다.
▲ 최저임금위원회와 최저 임금 결정, 취업난과 학습 노동에 관한 수업 자료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인 비정규직 종사자, 그중에서도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우리 학교 급식 조리 선생님들도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일 학사 일정이 단축 수업과 급식 미실시로 변경됐다. 학교에서는 학사 일정 변경과 함께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담아 가정 통신을 발송해 주었다.
▲ 학사 일정 변경 가정 통신문 뒷면에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담았다.
파업일이 하필 특별 메뉴가 나오는 수요일이다. ‘바삭바삭 새우튀김’을 못 먹게 됐다는 학생들의 불평이 들린다. 그래도 학생들의 불평은 귀여운(?) 수준이다. 파업에 대한 뉴스의 댓글은 혐오 일색이다. ‘때려 치워라, 할 사람 많다’, ‘아이들 볼모로 잇속 챙기지 마라’ 등 경악할 말들의 잔치다. 파업에 대한 뉴스의 댓글은 왜 혐오 일색일까? 수업 시간에 이걸 대놓고 얘기하는 방식으로 계기 수업 흐름을 짠다.
▲ 2021년 10월 20일 민주노총 총파업 계기 수업 흐름
파업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사람들의 절규다. 무조건 욕하기 전에, ‘왜 이들이 징계와 해고를 각오하고 거리에 서야 했는지’, ‘어떤 요구를 하는지’ 들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은 수업의 막바지에 새우튀김 못 먹는 마음을 달래고, 급식 조리 선생님들께 응원의 문구를 (원하는 사람만) 적어 본다.
▲학생들의 응원 메시지 모음
전교조 분회 조합원들과 함께 간식과 응원 메시지를 들고 급식실을 찾았다. 학생들의 식사를 거르게 해 무거워졌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시는 듯해 보였다. ‘아 맞다, 나도 민주노총 조합원이지?!’ 학교 비정규직 선생님과의 연대만 생각하다가, 정작 나도 민주 노총 조합원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정규직이라 코로나19의 위기도 생계의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옹졸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교사가 노동 3권을 당당히 행사하여 행동하는 건 머나먼 일인가 하는 무력감도 들었다. 계기 수업과 학교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홍보하는 교내 메시지를 보내면서, 교사도 힘을 모아 노동 3권을 행사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희망도 넌지시 내보였다.
▲교내에 보낸 연대의 메시지
자본과 노동을 대립해서 보지 않고 싶어도
노동과 노동(인권)교육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에서 자주 듣는 반론이 있다. 자본과 노동을 왜 대립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보느냐는 거다. 교사가 재테크도 하고 금융교육도 하면서, 노동과 노동교육의 중요성은 중요성대로 마음에 새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분법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거 아닌가? 특히나 합의점을 찾지 못해 오랜 기간 적대 관계를 만들어 왔던 노동과 자본이니 더더욱 대립적 관점을 부추기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 구도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계속 떠올라서다.
금융 자본은 실물 자본 위에서의 심리 게임이다. 실물 자본은 원료 채취, 가공, 유통, 판매, 광고 등 촘촘한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의 누군가의 노동이다. 자본의 논리는 심지어 사람 목숨이 오가는 전쟁을 앞두고도 그 참혹함보다 관련 주가 곤두박질칠까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람과 노동을 대상화하는 게 자본이다.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몸이 계속 아프다고, 동료가 죽어간다고, 같은 일을 하는데 왜 임금이 이렇게 적냐고 물어도, 자본은 노동자를 온전히 노동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자본은 그들을 비정규직이라고, 개인 사업자라고, 현장 실습생이라고, 미등록 외국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다고, 간접 고용이라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노동과 노동자를 홀대해 온 게 자본이다.
그래서 금융 자본을, 자본을 노동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강자가 약자한테 폭력을 휘둘러 놓고 ‘나를 적대적으로 보지 말아 줘’라고 말하는 듯해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금융교육을 강조하기 이전에 노동교육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탄생 이전에 노동인권 감수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의 노동도 온전히 인정받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에야, 금융교육에 대한 경계심도 누그러질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내 생각이 비범함이 아니라 보통이 되는 세상이어야만 비로소 말이다.
❶ ‘누구를 위하여’는 생산에 기여한 몫을 분배하는 경제 문제다. 이 말은 마치 자본가가 생산에 참여한 주체들에게 수혜를 베푸는 듯 읽히고, 그중 한 분배 대상인 노동자에게 기여에 따른 정당한 몫을 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자는 항상 최소한의 최후의 몫을 받았다. 분배는 힘의 우위에 있는 자본가가 몫을 나누는 행위였다. 따라서 3대 경제 문제 중 하나로서 분배는 ‘누구를 위하여’라기보다는, ‘누구에게는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가/돌아가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❷ 김누리(2020),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