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특집/누구의, 어떤 위기인가] 위기의 재해석 | 세모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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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재해석

- ‘위기학생’과 ‘조력자 교사’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세모  

swkimt7942@gmail.com

경기 초등 교사



나의 자해


“왜?” 

인정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질문이 돌아왔다. 

“자해가 왜 나쁜 거야?”

“아니, 자해는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일이잖아.”

“나는 자해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겠어. 더 큰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자해를 하면 풀리니까 덜 아파져. 남을 해치는 일도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재수 학원에 친한 언니가 있었다. 어쩌다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의 손목에 난 긴 상처를 보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언니가 없어지면 찾으러 다니고, 그러지 말라며 말리곤 했다. 언니와 나는 웃기게도 나란히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건 교사가 된 우리의 대화였다. 감히 자해를 옹호하다니. 하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면서, ‘자해는 나쁜 것’이라는 그렇게 단순하고 명확하던 명제가 갑자기 복잡해졌다. 언니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손목을 긋던 느낌이 종종 생각난다고 했다.

처음 자살을 생각하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시험 점수가 높으면 칭찬을 받고, 낮으면 한숨을 들었던 경험은 반복적이고 강렬하게 학습됐다. 오직 공부-시험-성적으로 인해 칭찬을 받았던 나는 그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필연적으로 문제를 틀릴 때마다 감정 동요가 큰 학생이었다. 만족 이하의 점수가 나오면 자괴감을 느끼며 나를 버릴 수 없어 대신 시험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던 사람이었다. 나는 한 친구와 함께 학원에 다녔다. 그는 나보다 수학 실력이 좋았다. 수학 학원에서 나란히 채점을 받은 문제집처럼 언제나 나와 그 친구는 실제로도, 내 마음속으로도 서로 비교 대상이 되었다. 난 그 비교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쓸모없다고 느껴지자 급격히 자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에서는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서 위기 검사를 했고, 나는 당당하고 솔직하게 자살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고 썼다. 나는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입학생 중 내가 유일했고, 정서 위기 학생으로 분류되어 한동안 상담을 받아야 했다. 상담 교사는 매번 지난 상담 이후 자살 시도가 있었는지를 물었을 뿐, 스스로나 나의 보호자가 성적에 대한 강박을 덜도록 도와주진 않았다.

자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했는데, 결국 초등학교 때와 똑같은 이유였다. 학원에서 푼 문제가 내 수준보다 어려웠는지 문제지에 비가 내렸다. 그때 채점을 한 학원 원장이 오답이 많음을 놀리는 투의 말을 하면서 내 감정이 널을 뛰었고, 나는 그 수치감을 참지 못하고 원장 앞에서 스스로 양쪽 뺨을 여러 번 세게 때렸다. 원장은 그런 학생들이 익숙했는지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그 학원에 다시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반전. 막상 때린다는 행위가 꽤 시원했는지, 맞은 곳에 느껴지는 얼얼함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후로 ‘궁지에 몰려 어쩔 줄 모르겠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방법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난 궁지에 몰리면 스스로 머리와 뺨을 때리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 그러고 싶은 느낌이 드는지 고민해 본 것은 교사가 된 후다. 교실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리적·심적으로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많거나 소리, 빛 등 외부 자극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감당하기 어렵고 어찌할 줄 모르겠는 상태가 된다.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많고 감당하기 어렵다는 건 많은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을 하는 중에 충동이 올라오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눈을 감아 우선 자극을 덜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참기 어려우면 화장실 칸이나 연구실에 들어가 비밀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복귀한다. 

끼리끼리 당기는 중력이 있는 걸까? 대학 생활 이후에 만난 친구들 중엔 오히려 자해를 안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벅찰 때 충동적으로 누구는 배를 때리고, 누구는 울고, 누구는 과하게 일을 하며 혹사하고, 누구는 잠에 갑자기 빠져들면서 자괴감을 느끼고……. 서로의 자해 방법을 고백하며 웃고 의지하기도 한다. 자해를 직접 해 왔고, 하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말려 보기도 하고, 동료로서 지켜보기도 하며 자해에 대해 단순 ‘나쁘다’고 납작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위험하게 인정해 버렸다.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각자의 이유가 있고, 또 그것이 놀이가 되거나 안전한 동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져 버렸다.



그 어린이를 도울 수 있을까


매해 교실에서 스스로의 머리를 때리는 학생을 만나고 있다. 자해가 꼭 ‘나쁜 것’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린이가 자신을 때리는 방식으로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이 익숙해졌다는 것이 안타깝다. 

성주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는 걸 좋아했다. 영어와 그림 그리기를 잘하던 그는 수업에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가 등장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수업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했다. 하지만 종이접기 등 순서에 맞춰 꼼꼼하고 세밀하게 해야 하는 활동에서는 자신의 기대보다 부족한 결과에 심히 실망스러워했다. 스스로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러한 활동을 준비한 나를 ‘악마’, ‘사이코’라고 부르며 원망의 말들을 비명처럼 내질렀다. 하루에 몇 번씩 교실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한 언행을 지적하는 지도에 성주가 ‘응~’ 하고 넘기는 대답을 하면 교실 분위기는 더 얼음장이 됐다. 보호자는 성주가 매주 미술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내가 살면서 만나 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건 그닥 많지 않았다.

이런 성주가 자학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과업이 본인에게 어려웠을 때, 또는 동물 실험이나 환경 오염 같은 문제를 다루는 수업에서 죄책감을 느낄 때. 그럴 때 성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 나는 정말 쓰레기야”와 같이 자학적인 말들을 하거나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머리를 때리곤 했다. 성주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같은 방식의 자해를 하는 교사는 성주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는 그때 사실, 누가 나를 좀 멈춰 주었으면 했다. 팔을 부여잡고 그깟 수학 문제쯤 뭣도 아니라고, 때리지 말라고. 네가 더 중요하다고 헷갈리지 않도록 단호하고도 단호하게 말해 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보기로 했다.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헷갈리려나, 생각한다. 오히려 좋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머리를 때리는 성주의 팔을 붙잡고 “때리지 마. 너가 더 중요해. 아껴 주자”라고 말하니 성주는 금세 때리는 행동을 멈췄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성주가 졸업한 이후에도 매년 여러 방식으로 자학 행위를 하는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약으로 평화를 이룩하다?


다원, 올 4월 전학을 온 그는 2학년이다. 그는 발표할 때 목소리가 자신 있고 큰 편이었다. 언제나 책상은 포화 상태였고 배열이 어지러웠다. 계속 물건이 떨어졌지만 인지하지 못해 바닥에 책상의 연장선으로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었다. 몸의 경계를 잘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이 지나가면서 다른 것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으나, 다른 이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일부러 때렸다며 울어 버려 상대가 그로부터 거리를 두기로 선택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시간표에 맞춰 교과서를 펼치거나 수업 진행에 따라 글씨를 적는 것을 자주 놓쳤다. 말을 걸면 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수업 중 짝과 갈등이 생기면 울거나 바닥에 드러누우며 수업을 거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보호자와 상담을 통해 알고 보니, 다원은 ADHD 약을 복용하면서 지내다가 한 달 전 약 복용을 멈춘 모양이었다. 장애인 시설 기존 보호자의 관리 속에서 다원은 그동안 ADHD 약을 최대치로 처방받아 먹어 왔다. 그런데 2학년에 올라가며 장애 판정이 나오지 않자 장애인 시설에 살 수 없게 되었다. 대신 거주지를 옮겨 위탁 가정에서 살게 되었는데, 위탁 가정의 새 보호자가 ADHD의 정확한 진단을 위해 일시적으로 약 복용을 멈췄던 것이다. 다원은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을 보낸 후,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ADHD가 있기는 하지만 심한 편은 아니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에 익숙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원은 ADHD 약을 소량 처방받았다. 다원과 다른 학생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그전까지의 시간이 나에게 혼자 감당하기 버거웠기에 약을 다시 투약했을 때 교정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바로 다음 날, 학교에서 다원은 180도 달라졌다. 아침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날 다원의 책상은 더러워지지도 않았고 바닥도 깨끗했다. 크게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학급의 다른 구성원과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 다만 다원의 생기나 에너지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여러 번 부르거나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고 겨우 고개만 살짝 움직였고, 어떤 외부 자극에도 반응이 없었다. 다른 교실로 이동하기 위해 줄을 설 때는 고개를 숙이고 휘청거렸으며, 점심시간에는 식판을 앞에 두고 힘없이 허공만 쳐다봤다. 밥은 적어도 두 술은 뜨자며 약속하니 나무늘보의 움직임처럼 천천히 두 숟가락을 먹고서는 일어났다. 다원이 전학을 온 이후로 가장 평화로운 날이었다. 다원을 약으로 ‘교정’하여 ‘평화’를 이룩한 날이었다.



접근법에 따른 정서행동 위기의 해석


성주나 다원은 학생의 정신 건강에 관한 교육 정책에서 ‘정서행동 위기학생’으로 분류된다. 학교가 지칭하는 정서적/행동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장애, 불구의 범위를 확장하고 적용하여 여러 시각으로 파악해 보고 싶다. 장애를 보는 접근법을 소개하고 그에 따라 다원의 상황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기록해 보려고 한다. 두 접근법은 치료적 접근법과 사회적 접근법이다. 

치료적 접근법은 사회에 가장 만연한 접근법이다. 장애는 개인적인 ‘손상’에 의한 문제이며 의학적 치료를 통해 해결하거나 완화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을 따른다면 학교에서 ‘금쪽이’로 불리는 학생의 문제는 개인적인 손상이 있기 때문이며, 그 학생이 병원에 가서 진단과 치료를 받도록 하는 방식으로 학생을 ‘교정’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사실상 일반 학급에서 당연시되는 접근법이다. 학생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 학생이 병원에서 어떤 진단을 받았는지 질문이 돌아온다. ‘문제 행동’을 자주 일으키는 학생을 만난 해에는 보호자 상담 시에 ‘검사’를 조심스럽게 권유해 보라는 조언을 받는다. 그리고 교사의 말에 따라 검사를 진행하는 보호자는 ‘협조적’이며 그렇지 않은 보호자는 ‘비협조적’이라거나 ‘무관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사의 권유나 보호자의 관찰의 결과로 검사를 진행하여 학생이 치료를 받게 되면 교사는 숨을 돌린다. 

다원이 약을 복용한 첫날을 보며 나는 치료적 접근법에 심한 이물감을 느꼈다. 교사인 나조차도 버겁고 답답하기도 한 학교라는 틀에, 약을 먹여서라도 학생을 끼워 넣는 과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막상 다원 본인을 이루었던 특징들이 지워졌지만 교실은 안정을 찾는, 사회적 물의를 빚는 특징을 가진 개인을 억압하여 사회를 안정화하는 레퍼토리. 그날 바로 나는 보호자에게 축 늘어진 다원의 상태가 걱정스럽다고 공유했다.

반면 사회적 접근법에서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건강한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된 사회와 환경에 의해 자원, 지위, 권력 등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따라서 장애를 구속하는 사회 제도와 문화의 변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적 접근법에 의하면 어떨까? 사회적 접근에 의하면 그 학생이 문제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비장애 중심적으로 설계된 환경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의 학교에서의 스케줄은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20분까지 40분짜리 수업 3개에 참여하고,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수업 2개에 참여한 다음 청소를 하고 하교하는 식이다. 학년(나이)에 따라 일괄적인 스케줄을 따르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수업의 개수가 늘어난다. 학교 공간은 주로 각이 져 있는데, 교실에는 모서리가 뾰족한 물건이 많아서, 복도는 지나다니는 통로라서 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일종의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에너지를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풀 수 있는 공간은 그나마 운동장인데, 대개 점심시간에만 운동장에 나가 노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현재의 학교는 연이은 수업을 집중력 있게 참여할 수 있으며, 몇 시간 동안 딱 한 번 나가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괜찮은 사람들을 기준으로 짜인 시공간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수업 시간 중 산만하거나, 감정이 요동쳐 수업을 거부한다. 수업 시간에 떠오른 말들을 꺼내고, 책상 밑에서 풀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핀잔에 기가 죽거나 반항하게 되기도 한다. 

사회적 접근에 의하면 이 시공간이 바뀌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된다. 다양한 상상력을 요한다. 나이에 따라 같은 일정을 따르지 않게 할 수도 있고, 쉬는 시간에도 쉽게 놀이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교실들이 놀이터를 중심으로 도넛 모양으로 배치되어 쉽게 놀이터를 들락날락할 수 있게 설계된 학교를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중학생 때 2년 정도 30분 수업 시간과 중간 놀이 시간을 가진 학교를 경험해 본 적이 있었는데, 40~50분의 집중이 어려웠던 나에게는 더 짧은 수업 시간이 학교생활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장치임이 분명했다. 학교의 시공간적 다양화는 분명 많은 ‘문제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정치적 접근법은 장애는 사회적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의미 및 이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사회적 접근법과 다르게 치료적 접근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장애는 사회적 제도와 장벽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맥락에 따라서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를 받아들이거나 욕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애의 여러 맥락 속에서 다양한 욕구를 포함하고 인정한다. 

현재 다원은 여전히 ADHD 약을 먹고 있다. 하지만 처방받을 수 있는 양 중 최소한의 양이라고 했다. 다원은 이제 더 이상 축 처져 있지 않다. 어느 정도는 계속 산만하고 책상은 계속 화려하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를 보는 대신 종이접기를 즐긴다. 하지만 최소한의 복용량의 영향인지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듣고 소화해서 알맞은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상대에게 불편감을 주는 일이 줄었고 교우 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 속에서 다원은 훨씬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일방적인 치료에 의한 교정을 경계하는 동시에, 적절한 정도의 치료를 받으면서 다원이 긍정적인 영향을 누리고 있다는 것 또한 난 부정할 수 없다. 



학교가 이런 곳이라면


학교에서 가르치려는 것이 교과적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방법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오히려 정서행동 문제 학생을 분리하여 개인적인 지원을 통해 교정하여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학급공동체 또는 학교공동체가 모두가 안전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토론하고, 필요하다면 그러한 절차에 대한 멘토링, 퍼실리테이팅, 학급 구성원 교육 등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 과정과 동시에 필요하다면 학생/보호자와 논의 후 욕구에 따라 약물과 상담 등 치료적 지원도 가능하겠다. 학교가 작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면, 그렇게 정치적이고 관계적인 접근이 도전되어야 한다. 

나는 학급 내에서 교사라는 권력을 가지고도, 지금껏 살아온 관성 때문에 학급 내에서 다름에 의한 혐오나 폭력이 발생했을 때 진행되던 수업을 일시 정지하고 ‘이것이 중요하니 이것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 보자’라고 제안하는 것이 무섭다. 중요하다고 배워 온 것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은 것의 우선순위를 바꿔 가는 전환이 어렵다. 하지만 그런 학급에서 ‘멈춤’의 과정을 가끔이라도 함께한 학생들이 수업이나 놀이 속에서, 먼저 ‘멈춤’을 제안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용기를 낸다.

정치적이고 관계적인 접근을 통해 배우는 것은 학생만이 아니다. 실제 내가 그렇듯 교사는 교실 속에서 온전하고 완벽한 한 인간으로 존재해야 할 것 같다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고수하자면 권위를 지키는 것에 매달리게 되고, 오히려 교실 속에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불완전성도 인정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학교가 오히려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더로 보이는 교사 또한 정서행동 문제로 판단될 수 있는 정신적/신체적 상태일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로부터 잃는 것이 많을까, 얻는 것이 많을까? 나는 학생들에게 화를 지혜롭게 표현하고 푸는 방법을 가르치는 날에는 막막하기 짝이 없다. 평소에 화를 꾹 인내하고, 그러다 그 눌러 놨던 분노가 자해로 표출되는 나는 아직 학생들에게 고백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화가 났을 때 이렇게 하면 마음이 나아져요, 하고 추천해 줄 방법이 있나요?”

“내가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이불을 덮어쓰고 소리 질러요.”

“쿠션이나 샌드백을 치는 방법도 있어요.”

지혜롭다. 화를 잘 푸는 방법을 알려 줄 어른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늦은 대로 다른 학급 구성원들의 말을 듣고 깨우쳐 본다. 이제 자해를 하는 학생을 만났을 때 사실 나도 그렇다며, 솔직하게 말해 보고도 싶다. 그리고 궁지에 몰렸다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물어보고, 그때의 대안 행동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선택해 연습해 보는 거다. 나는 존재로서 그 학생이 하나의 ‘문제’가 아님을 증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학급 내에서 이런 과정을 교사의 개인적인 신념과 용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교사에게 큰 부담을 지우게 될 수 있다.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법’에서 학교가 필요한 것은 정서행동 위기 학생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그 학생을 포함한 공동체의 문화적 전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다. 그러면 법안의 이름은 ‘위기 ‘학급’ 지원법’쯤이 될까.

새로운 학년을 지원할 때 통합학급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선택하는 칸이 있다. 통합학급 담임을 맡으면 상여금을 받을 때 좀 더 높은 점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나는 3년 차 교사로, 아직 그런 경험이 두 번뿐이었지만, 두 번 모두 통합학급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성과급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단순하게,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이라는 이 작은 사회에서 더 적극적으로 ‘잘 섞이는 방법’을 함께 실험해 가며 찾고 싶다. 느리고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날카로울 그 과정을 전폭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다.



이 글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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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