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오늘의 교육을 열며]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 보란

2024-12-04
조회수 357

오늘의 교육을 열며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보란 

본지 편집위원, 

경기 중등 교사



지난 6월 국회에서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었다. 코로나19 이후로 학교 현장에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품행 장애와 반항 장애, 우울 또는 무기력 등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많아졌고, 객관적 진단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주요 내용 중 눈에 띄는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서행동 위기학생에 대한 지원 책무를 강조한 것과 정서행동 지원 전문 교원과 보조 인력 배치, 관련 학교 내 위원회 및 지원센터 운영 등이었다. 특히 그 업무의 일부를 관련 기관, 법인이나 단체에 위탁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 법안이 교사의 업무 부담을 크게 줄여 주고, 정서행동 위기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학생이 현재 고민과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학교에서 학생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안정감 있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교사 또한 학생과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전문가에게 학생을 맡기면, 자신을 위해 선택할 권리를 침해받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교사가 적절하게 조력하고 개입할 수 있을까? 또 학생이 ‘상담이 필요한 골치 아픈 애’처럼 분류되고 대해지는 것을 낙인처럼 느끼지는 않을까? 따라서 이 법안은 아동·청소년 당사자의 입장과 인권의 언어로 검토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한다.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 인권의 관점에서 점검해야

 

심리적·정서적 위기 상태는 각자의 삶에서 겪은 외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적응해 온 행동에 대해 사회적 상식과 윤리의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이는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배제하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인권의 관점에서 지원 방안으로 거론되는 상담과 치료 등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아동·청소년은 자기 회복과 재건의 주체로서 자율성을 존중받은 경험이 많지 않다. 그들에게 억압적인 교실 구조와 조건은 은폐되고, 문제 행동에만 천착하는 상황이 교육 영역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청소년기는 자율성에 대한 의지나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는 시기다. 그런데 학교 및 기관에서 정한 상담·치료를 받도록 강제하면, 학생들은 ‘문제 있는 애’나 ‘나쁜 애’로 낙인이 찍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❶ 


“그때 학교도 그만두고 집도 쫓겨나고 가진 것도 없어서 엄청 힘들었는데 풀 사람이 없었어요. 조금만 건드려도 화가 나는 거예요. 샘한테도 화내고 그랬는데, 다혈질이라고 병원 가라고, 그래서 병원 갔어요. 병원에서 ADHD라고 결과가 나왔다고 그걸 저한테 보여 줬어요.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뭐지? 내가 정신병자가 된 것만 같고 내가 화내는 게 비정상인 것만 같고 그랬죠. (……) (장애가 있다는 말이 어떻게 들려요?) 너는 일반 애들과 좀 달라. 나쁘게 달라 이런 느낌. ‘분노조절장애 같아’ 그러면 일반 애들과 다른, 화를 많이 내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애 같게 느껴지는데, ‘너는 이런 행동을 보면 화를 많이 내는 것 같아’ 그러면 ‘일반 애들과 다를 바 없지만 이 행동은 싫어하는 것 같아’ 이렇게 들려서 더 좋죠. 그렇게 말해 준다면 땡큐죠.”❷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아동·청소년기에 가정폭력과 가족 돌봄을 경험했지만 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전혀 없었다. 집은 내가 머물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고, 학교에서는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교사와 친구들 모두 내 상황을 편견 없이 들어 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실수나 잘못이 그들에게 가정불화 탓으로만 인식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컸다. 결국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학교 심리 상담 센터를 이용하는 선배의 추천으로 상담받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상담을 받으면서도 자기 검열 없이 편안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음을 알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는 4년 전부터 소수자 인권과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상담자를 자발적으로 찾아가 트라우마 상담을 받고 있다. 상담 초기, 상담자로부터 상담한 내용과 개인정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리고 상담 방식과 종료 과정에 대해 내가 질문하고 결정할 수 있는 부분까지 자세히 안내받은 후 상담자와 동등한 동맹(계약) 관계를 맺었다. 또한 상담자는 내담자의 생명이나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 등 비밀 보장의 예외 상황에 대한 규정도 말해 주었다. 이처럼 서로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공유하니 기존의 상담 경험과 달리 내가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상담자와 신뢰 관계를 깊게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내 안의 어려움을 견디는 힘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처럼, 교사와 학생도 동등하고 협력적인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LEAP’ 같은 구체적인 의사소통 전략 배우며 반영적 경청 등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다.❸



‘개인의 위기’가 아니라, 연결된 모두의 위기


심리 치유 과정에서 ‘자율성’이란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지 알고, 그걸 위해서 넓은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을 의미❹한다. 그렇다면, 학생 본인뿐만 아니라 친구, 교사, 보호자 또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잘 파악하고, 원하는 것을 찾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고, 서로 간에 지지를 모으는 것이 치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의 ‘취약성’만을 개선하면 교사의 좌절과 무기력이 해결될 수 있는 일일까? 교육(돌봄)의 시장화, 외주화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청소년의 인권뿐만 아니라 교사의 노동 역시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억압될 것이다. 따라서 교사 또한 학생의 위기에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성찰해야 할 때다. 일상적 관계 맺기를 어떻게 수행해야 서로의 심리적 해방감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해야 사회적 억압과 폭력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낼 수 있을까? 학교에는 이러한 상상과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빈틈과 멈춤’이 필요하다. 


이제 각자의 교육 현장에서 ‘위기’라는 ‘막연하고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과 진단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학생이 가진 취약성을 개인의 심리·정서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지 않고, 그들을 고립시키는 억압적 교실 구조와 사회 구조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고, 아동·청소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협력적 동맹 관계를 만들어 보자고 말이다. 


그동안 나는 현재의 ‘위기’를 손쉽게 정의하려고만 했었다. 반면 그 위기가 실제로 숨기고자 하는 ‘진짜 위기’에 대해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동안 학교는 위기를 치유하고 조력할 수 있는 관계와 실질적인 지원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일상적으로 조언과 조력(슈퍼비전, 슈퍼바이징)을 받을 수 있는 관계 자원과 지원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돌보며 치유할 수 있는 공동체, ‘편히 숨 쉴 수 있는 학습-노동 환경’이 필요하다. 그렇게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고 곁을 내어 줄 동맹의 시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온 사회가 인권의 관점으로 지원하고 조력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개인의 위기’가 아니라, 연결된 모두의 위기이다. 이 사실을 아프게 직면해야 할 때이다. 



[인권교육센터 들(2017), 《마음의 관리? 마음의 권리! 청소년 심리정서지원사업, 무엇을 묻고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 2016 ‘위기청소년’자립지원사업 자몽(自懜) 연구 발표회》, 19~21쪽] 참고. >>> 자료 보기

인권교육센터 들(2017), 앞의 자료집, 22쪽. 청소년(19세, 여)의 상담·치료 경험을 인터뷰한 내용.

하비어 아마도르, 최주언 옮김(2013), 《난 멀쩡해, 도움 따윈 필요 없어!》, 한국심리치료연구소. 이 책은 누구나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복잡한 치료 교육이 아닌 의사소통 방식으로 개발한 ‘LEAP’(Listen(반영적 경청 : 타인의 견해를 이해하고 내가 이해한 대로 그에게 반사하기), Empathize(공감), Agree(동의), Partner(협력 관계 맺기))를 소개한다. 반영적 경청에는 ‘안전한 분위기 조성하기, 나의 두려움 알기, 대화 주제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기, 그대로 놔두기, 들은 바를 존중하기,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찾기, 주요 항목 쓰기’ 일곱 가지 지침이 존재한다.

인권교육센터 들(2017), 앞의 자료집, 43쪽.


1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