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후속] ‘학생님’이라고 부르기는 왜 어색할까 (이은선)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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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어린이날 100주년, 어린이의 자리를 묻다


‘학생님’이라고 부르기는 왜 어색할까
- 어린이날 100주년,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이은선
dmstjs131@naver.com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상임활동가



올해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여러 기관과 지자체 등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처음 어린이날이 만들어지며 ‘소년 해방’을 이야기할 때 제기한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현재 우리 사회는 얼마나 어린이·청소년 해방과 인권 보장이 이루어졌는지를 평가하고 진지하게 변화를 꾀하려는 움직임은 잘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1922년 어린이날에 발표된 선언문과 1923년 어린이날에 발표된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은 모두 이런 내용으로 시작한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라.” 재래의 윤리적 압박이란 다름 아니라 ‘어른에게 순종해야 한다’, ‘어른을 공경하라’라는 규범, 장유유서(長幼有序)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때 발표된 〈어른에게 드리는 글〉 중에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라는 요구가 있다. 나이 어린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말 것, 존댓말을 사용할 것을 공식 요구 사항으로 내건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글 중엔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란 내용도 있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는 물론, 길거리에서도 나이가 상대보다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반말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비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경어 등을 사용해 예의를 지키고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은 확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가 어린 사람은 반말을 듣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다. 특히 어린이·청소년을 대할 때에는 이러한 모습이 더 자주 나타난다. 2022년 어린이날 100주년을 앞두고 《어린이과학동아》가 초등학생 508명을 대상으로 ‘100년 전 어린이날 선언문의 내용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나’ 물은 설문 조사에서도,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고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가 가장 잘 안 지켜지는 조항으로 꼽혔다.


“‘학생님’이라고 불러야 되겠어?”


많은 청소년이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적인 공간인 학교에서도, 나이가 적단 이유로 반말 등 하대를 당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교사와 학생 또는 상급생과 하급생 사이에서 나이가 적은 쪽은 존댓말을 쓰고 나이가 많은 쪽은 반말을 쓰는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울산시교육청에서 각 학교로 학생에게 반말을 사용하지 말고 경어를 사용하라는 공문을 보내온 적이 있다. 이를 두고 어느 교사는 교실에 와서 화가 난다는 듯이 이젠 교육청에서 별 공문을 다 보낸다며 구시렁거렸다. 그는 “이제는 학생에게 반말하지 말라고 그러네. 아주 ‘학생님’이라고 불러야 되겠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 공문은 당시 관내 한 고등학교에서 체벌 사건이 불거진 후 나오게 된 것이었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대책으로 학생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학생에게 반말을 쓰지 말라는 공문에 반발하던 그 교사는 학생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학생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언어 문화와 학생에게 함부로 대하고 폭력을 가하는 문화는 연결되어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는 공공 기관인 학교에서 만나는, 상호 존중해야 할 공적인 관계이다. 사람에 따라선 개인적으로 친해질 수도 있겠지만, 수업과 같이 여러 사람이 함께하고 있으며 공적인 상황에서는 서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예의’는 한쪽에게만 요구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교사가 수업 중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교사가 학생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에도 관대하다. 학생은 교무실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용의 복장까지 가지런히 하라고 요구받을 정도로 과하게 예의를 요구받는다. 일상적 호칭의 측면에서도 교사는 ‘선생님’이라 불려야만 하지만, ‘학생님’이라는 호칭은 너무나 어색하다.


이는 우리가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나이나 신분에 따른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해야 할 의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한쪽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예의와 나이 차별적 언어 문화는 어린이·청소년들이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문화적 요소이며 차별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어린이날 100년, 〈느낌표〉 이후 20년


비교적 최근에도 어린이·청소년에게 경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2003년, MBC의 〈느낌표〉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수업 시간에 존댓말을 사용하는 교사를 소개하며 선물을 주는 ‘존댓말로 수업하자’ 캠페인을 방영한 적이 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당시 많은 논란과 반발에 부딪혔다. “교사 죽이기”라는 표현을 써 가며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꼭 존댓말을 써야만 학생을 존중하는 것이고, 학생에게 반말을 하면 무조건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냐는 반발이 많았다.


하지만 만일 학교장이나 장학사가 교사에게 반말을 하면서 교사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학생이 교사에게 반말을 하면서 그래도 선생님을 존중한다고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되묻고 싶다. 교사는 학생에게 반말을 쓸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반면, 학생은 교사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애초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학생을 존중하려 노력한다는 교사도 별 생각 없이 학생에게 반말을 쓸 수 있다. 존댓말과 반말 사용 여부가 교사 개인의 자질이나 태도를 평가하는 절대적 잣대가 되긴 어렵다. 하지만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일방적으로 반말 등 하대를 해도 된다는 사회 전반의 인식은, 분명 어린이·청소년을 평등하게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위치시키는 차별적인 것이다. 즉, 교사 개개인이 문제란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반말을 해도 되는 차별적인 문화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차별적 언어 문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꾸기 위한 실천 중 하나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에 평등한 언어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어린이·청소년에게 하대하는 문화를 비판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고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는 반말을 쓰는 것이 한국의 문화이지 않냐는 반문이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이는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나이주의를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요소이다. 예컨대 일방적으로 반말을 듣는 것은 과거 한국 여성들에게도 해당되었던 문제였다. 결혼한 여성이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모습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친인척들의 호칭을 보면 남편 측과 아내 측 가족에게 붙여진 호칭 사이에 위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남존여비의 인식이 옅어지고 성평등을 강조하게 되면서 이러한 문화는 점차 약해지고 바뀌어 가고 있다. 외국 영화를 번역할 때도 여성만 존댓말을 쓰도록 옮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오면서 사라지는 추세이다. 여성을 아랫사람으로 바라보는 언어 문화를 바꾸는 과정을 겪었듯, 어린이·청소년을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언어 문화도 개선해야 한다.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기에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이 낮춰지고 청소년 참여권 보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등 청소년이 우리 사회에 시민으로 참여하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청소년이 정책을 제안하고 공적으로 발언할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 평등한 시민으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변화도 필요하다. 형식적으로는 같이 참석하고 있더라도, 청소년을 은연중에 아랫사람으로 보며 존중하지 않는다면, 청소년들의 참여는 위축되고 의견은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


2020년 12월, 선거권 연령 하향 이후 청소년 참여를 탐구한 연구 보고서에도 “청소년을 가르칠 대상으로, 아랫사람으로 생각하는 수직적 관계에서 시민 대 시민으로 만나는 제대로 된 토론을 기대하기 어렵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평등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관계에서 청소년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의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며, ‘학생을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교육’을 청소년 시민의 주체 형성 방해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전 사회적으로 청소년을 평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일방이 차별받고 하대당하는 관계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은 2020년 11월부터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 일상 언어 속 나이 차별 개선 캠페인’을 펼쳐 왔다. 이 캠페인에서는 ‘어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킵시다’ 포스터를 배포하며 어린이·청소년 및 나이 어린 사람에게 일방적 반말 사용 등 하대를 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나아가 나이 차별적인 언어 문화와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혐오 표현, 편견이 담긴 말 등을 지적하는 글들을 연재했다.


이 캠페인에는 2021년, 전교조 여성위원회가 동참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조선일보〉, 〈국민일보〉 등 주요 언론들에서는 “부자연스럽다”, “지나치다”, “학생이 고객이냐”와 같이 부정적 논조의 기사를 내놓았다. 참고로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캠페인에서는 언론의 나이주의적, 어린이·청소년 차별적 보도 문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언론들의 행태나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곧잘 마주했던 사람들의 반감은, 우리 사회가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을 이야기하면서도 일상 속의 어린이·청소년 차별을 유지하고 싶어 함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캠페인은 지금까지 캠페인에서 차별적 언어 문화를 비판한 내용을 갈무리하여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캠페인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소책자에는 어린이·청소년에 관련된 ‘급식충’, ‘잼민이’와 같은 신조어를 지적하는 내용도 있고, ‘친구’, ‘기특하다’, ‘말대꾸’ 같은 일상적인 언어 사용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다(글 뒤에 몇 개의 예시를 덧붙인다). 사실 그리 어려울 것은 없다. 어린이·청소년이 아니라면, 나이 어린 상대라고 낮춰 보지 않는다면 쓰지 않을 표현은 아닌지 돌아보면 된다.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새기면 된다.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말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청소년이 존중받는 일상의 언어 문화가 필요하다. 어린이·청소년이 사회에서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어린이·청소년을 향한 나이 차별적 언어 문화에도 맞서야 한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그 출발점으로, 어린이·청소년이 가장 많은 시간 생활하는 학교를 비롯하여 공공 기관에서 어린이·청소년에게 하대하는 문화를 없애고 나이에 관계없이 평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언어 문화를 확립하자.


잼민이
어린이·청소년을 부르는 온라인상의 신조어로 새롭게 등장한 ‘잼민이’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터넷 방송의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 중 남자 어린이 목소리의 이름이 ‘재민’인 것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이·청소년, 특히 어린이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퍼졌습니다. 어리거나 귀엽거나 유치한 모습을 가리켜 ‘잼민이 같다’라고 하는 식으로 악의 없이 쓰이기도 하지요. 어린이들에 대해 미성숙하고 하찮은 존재나 민폐를 끼치는 불편한 존재라는 어감을 담아서 쓰는 경우도 눈에 띕니다.
잼민이의 어원은 남자 어린이 캐릭터의 이름이고, 한눈에 딱 폭력적이거나 차별적인 말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말의 의미에서는 어원만이 아니라 그 말이 쓰이는 방식과 맥락도 중요해요. 잼민이는 ‘초딩’, ‘급식’ 같은 과거의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멸칭이 쓰이던 자리를 대신하여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성숙하다거나 유치하다거나 ‘무개념’하다는 등의 뉘앙스를 담아서 사용될 때는 더욱 그렇지요. 실제로 2022년 어린이날을 앞두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어린이·청소년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어린이를 비유한 표현 가운데 비하의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되는 용어 1위로 “잼민이”(70.2%)가 꼽히기도 했습니다.
잼민이라는 말을 살펴보면, 우선 누군가의 이름을 별도의 존칭 없이 부르는 식이란 점이 눈에 띄지요. 어린이·청소년에게는 바로 “○○이”, “○○아”라고 이름을 부르고 하대해도 된다는 한국 사회의 문화가 반영된 거예요. 즉, 어린이·청소년을 잼민이라 부르는 것에는 이미 어린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보는 구도가 깔려 있는 거죠.
또한 한 가상 캐릭터의 이름이 어린이들 전반을 부르는 이름이 되는 것은 전형적인 차별 현상이라 볼 수 있어요. 소수자 집단은 옷, 음식, 외모 특징, 캐릭터 등에서 유래한 별명으로 불리며 비하당하는 일이 흔합니다. 중국인을 한국에서 ‘짱깨’라고 부른다거나 동아시아인을 미국 등지에서 ‘칭챙총’이라고 부른다거나 하는 사례가 있지요. 또, 19세기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멸칭으로 “짐 크로우(Jim Crow)”라는 이름이 사용됐는데요. 이는 짐 크로우라는 희화화된 흑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코미디 쇼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생긴 인종 차별/분리 법률을 ‘짐 크로우 법’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수자들에게 우스운 별명을 만들어 부르는 것은 소수자들을 하나의 이미지 안에 뭉뚱그리고, ‘일반적·정상적 사람’과는 다른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차별을 재생산하는 손쉬운 방법입니다. 특히 가상의 캐릭터 이름을 소수자들에 대한 멸칭, 차별적 언어로 쓰는 것은, 소수자들을 개성과 인격을 가진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가상의 재현된 모습으로 대신하여 인식하도록 하지요.
잼민이란 말을 어린이들을 비하하는 마음을 담아서 쓰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한편에선 잼민이란 말이 그냥 귀여워 보여서, 재밌어 보여서 쓰던 사람들도 많을 텐데요. 하지만 과연 ‘잼민이’라고 불린 어린이·청소년이 존중받는다고 느낄지, 어린 사람이나 어린이 같은 모습을 가리켜 ‘잼민이’라 하는 게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차별적 문화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재미있어 보여서 쓴다는 것은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놀리는 것으로, 진지하지 않게 대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요. 어린이·청소년을 그냥 있는 그대로, 혹은 공식적인 표현으로, 존중하는 표현으로 부르는 것이 말하는 측이나 듣는 측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뜻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대견하다, 기특하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이 유독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참 대견하다”, “기특하네” 같은 말들이에요. 분명 긍정적 평가가 담긴 칭찬의 말인데, 개운하지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때가 있어요. 어떤 청소년들은 그런 말을 듣는 게 불쾌하다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봤는데, 우선 대견하다는 말이 ‘어른이 어린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라는 것부터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10대 청소년이 40~50대의 비청소년에게 “연세도 많으신데 이런 생각을 하시다니 대견하시네요”라거나 “참 기특하네요” 같은 말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어떤가요? 그 이유를 불문하고 무례하다거나 버릇없다는 반응이 돌아오기 쉬울 것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말할 땐 “존경스럽다”, “대단하다”, “훌륭하다”라거나 “놀랍다” 정도의 말을 하는 게 고작일 거고, 그렇게 말하더라도 나이 어린 청소년이 나이 많은 사람을 평가하듯 말했단 것만으로도 불쾌하다고 하는 사람도 아마 없진 않을 거 같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대견하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그 언행이) 보기에 흡족하고 자랑스럽다”로 뜻풀이가 등재되어 있고, “기특하다”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그 생각, 언행 따위가) 뛰어나고 특별하여 귀염성이 있다”라고 등재되어 있습니다. 예문도 대부분 아이, 후배, 학생들 등 나이가 더 어린 사람들에 대해 쓰는 말로 나와 있네요. 즉,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나이 어린 사람 또는 자기보다 아랫사람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고서 쓰는 것입니다.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평가하며 만족스럽다거나 귀엽다거나 놀랍다는 맥락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듣는 청소년 입장에선 별로 대등한 존재로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만하지요.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대견하다”, “기특하다” 같은 말이 쓰이는 상황은 어린이·청소년이 사려 깊은 모습을 보이거나 선행을 할 때가 대부분인데요. 여기에서는 어린이·청소년들은 미성숙하고, 생각이 짧고, 보호받거나 도움받는 위치에 있는 게 보통인데 그걸 벗어나는 것이 특출난 것이라는 문맥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즉, 그런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어린이·청소년은 보통은 그렇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담고 있는 거지요. 특히 정치적 문제나 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활동하는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청소년들의 사회적 참여와 활동을 자연스럽지 않은 것,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도 차별적입니다.
“대견/기특하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을 평가하여 칭찬하거나 질책할 수 있다는 습관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진 않았을까요? 상대방을 아랫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과연 자신이 그런 말을 썼을지 곱씹어 보면 어떨까요?


짐승, 동물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활동가 중 한 명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동 수업 이후에 자신의 책상에 성희롱 문구가 적힌 걸 발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교사에게 알렸더니 “남자아이들은 아직 짐승이라 그렇다”라며, 여자아이들이 이해하라고 했다더라고요. 그 활동가는 그런 말을 듣게 될 때면, 왜 성폭력을 괜한 짐승들에게 떠넘기느냐는 생각을 했답니다.
‘남자는 짐승’ 같은 말이 간혹 나오긴 하지만, 어린이·청소년들 역시 ‘짐승’이나 ‘동물’에 빗대어질 때가 많아요. 여성 어린이·청소년들이라고 ‘짐승’ 혹은 ‘동물’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어린이·청소년은 이성과 사회성을 아직 갖추지 못한,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여겨져요. “아직 인간이 덜 되었다” 같은 식으로 말하곤 하죠. 이런 인식은 어린이·청소년의 미성숙함을 관대하게 보는 듯하지만, 실제론 어린이·청소년을 말이 안 통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나이가 들면 저절로 바뀔 거라는 나이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러니까 애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 “어른과 달리 강제로 통제해야 한다”라며 폭력과 억압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반대로 어린이·청소년을 ‘우리 강아지’와 같이 부르며 귀여워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한편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작은 몸이나 행동을 보며 아이 같다 하고, 가족 중의 ‘아이’ 포지션에 둔 호칭을 사용하는 일이 잦습니다.
어린이·청소년이 사회의 기준에 못 미칠 때 ‘인간이 덜 된 짐승(동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중의 차별과 편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어린이·청소년을 비청소년들과는 동등하지 않은, 미성숙한 존재로 타자화하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비인간 동물은 인간에 비해 열등하고 덜 발달된 존재라는 생각이고요.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 아래에서는, 어린이·청소년도 동물도 작고 무해하고 귀여울 때는 보호와 사랑의 대상이 되고, 위협적이거나 틀을 벗어날 때는 공포와 혐오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요.
어린이·청소년을 ‘인간이 덜 된 존재’라 하고 짐승(비인간 동물)의 위치에 놓는 관점은, 오랜 시간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정당화해 왔어요. 좋은 감정이 담겨 있든 나쁜 감정이 담겨 있든 어린이·청소년을 동물에 빗대는 것이, 동등한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쉽게 벌 주거나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내려다보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기의 특성도, 동물로서의 특성도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 모두에게 존재하는 삶의 토대이자 기초적 요소잖아요. 이를 성인-인간과 구별하고 더 못나고 잘못된 것이라 하는 것이 바로 차별의 논리라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애들’?
교사가 학생을 부르는 말로 적절한 호칭은 무엇일까요? 일대일로 부를 때는 아무래도 “○○야”라고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겠죠. 그런데 여러 명의 학생을 부르거나 혹은 다른 장소에서 대화를 하면서 학생들을 가리킬 때 교사들은 보통 “애들”, “아이들”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학생들을 ‘애(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차별적인 호칭이니까 쓰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애(들)’이라는 말은 단지 그 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아이라는 의미를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나이가 어린 사람들, 학생들이 전반적인 권한을 부여받지 못하는 위치를 당연하게 여기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차별적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 ‘애들’은 ‘어른(들)’과 다른, 아직 어리고 미성숙한 사람을 가리키니까요. “애들로만”이라는 말과 “학생 위원들로만”이라는 말은 꽤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요? ‘애들’이라는 말은 상대를 권리의 주체, 평등한 구성원보다는 보호받거나 신뢰롭지 못한 존재로 더 쉽게 여기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권위나 권한이 없는 낮은 사람들로 보이게 하는 ‘애들’이라는 말은, 학생을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보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자애들은~”, “3반 남자애들은~”, “걔들은” 등의 호칭은 다양한 사람들을 쉽게 뭉뚱그려 똑같아 보이게 합니다. “요즘 애들” 같은 말에서도 이런 경향을 느낄 수 있지요.
교사가 학생들에게 보다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이’나 ‘애들’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은데요. 이런 말들이 친근함을 느끼게 해 주는 건 가족 내에서 쓰이는 호칭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교사와 학생은 사적인 관계가 아니고 가족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가리켜 ‘애(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적인 교육 기관, 공적인 관계와 자리에서 학생들을 동등한 참여자로 존중하는 태도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공적으로 관계 맺고 참여를 보장하는 호칭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우선은 학생들을 뭉뚱그려 생각하기보다는 개개인으로 인식하고, ‘애(들)’보다는 ‘학생’, ‘어린이’와 같은 좀 더 공식적이고 존중하는 표현을 쓰도록 노력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❶ 〈100년 전 만든 어린이날 선언 얼마나 잘 지켜질까〉, 《어린이과학동아》, 2022년 9호.

❷ “MBC !느낌표 하자하자 ‘존댓말로…’ 사이버 논란”, 〈영남일보〉, 2003년 10월 21일.

❸ 인권교육센터 들(2020), 〈18세 선거권 시대, 청소년은 어떻게 시민이 되는가〉.
❹ “전교조 “학생에게 ○○님 존칭을” 교사들 “학생이 고객이냐””, 〈조선일보〉, 2021년 6월 14일; ““OO님 교과서 펴세요”… 교내 존칭 캠페인에 현장도 갑론을박”, 〈머니투데이〉, 2021년 6월 15일; “‘학생에게 ○○님 존칭 쓰기’ 논란에… 전교조 “강요 아냐””, 〈국민일보〉, 2021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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