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특집] 교육 정책은 경제 정책이지만 경제 정책이 아니다 (진냥)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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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교육 정책은 경제 정책인가



교육 정책은 경제 정책이지만 경제 정책이 아니다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위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채움활동가. 고양이 세 분을 모시고 초등 교사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교사라고 밝혔을 때 ‘요즘 학생들 말 안 듣는다면서요?’라는 혐오 발언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2022년 6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은 “교육부는 스스로 경제 부처라고 생각해야 한다”며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재 공급”이라고 발언했다. 이 말은 사회 각계에서 경악스럽다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 역시도 화가 났다. ‘용서할 수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논란이 된 대통령의 발언들은 취임 첫해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이미 수없이 많았는데도 나는 왜 저 말에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이 일었을까.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내게 구체적 피해를 끼쳤을 때 가능한 일이다. 즉, 나는 윤석열 대통령의 저 발언을 나의 ‘피해’로 감각했다. 왜였을까. 돌이켜 보니 좀 따져 볼 필요가 있었다.



교육 정책에는 경제 정책인 측면이 있다


나는 대학원에서 교육재정학을 전공했고, 지방 정부의 교육 재정 정책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재정학은 경제학의 한 분야로, 국가와 세금에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최근에는 ‘공공경제학’이라는 말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나는 요즘은 다른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분야라서 종종 논문이나 책을 뒤적이곤 한다.


교육재정학을 공부하던 당시 교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특히 교육계에서 돈에 관심을 가지고 평생 그걸 연구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서 이것만 계속 잡고 있으면 꽤 확률이 높아 보였다. 아무래도 교육계에서 돈을 이야기하는 것은 홀대받는 느낌이 있었다. ‘교육에 필요하면 돈이 대수인가?’ 하는 태도가 교육 현장에서도, 학계에서도 일반적이었다. 경제적인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도 종종 받았다.


그래서일까. 교육 예산은 매우 규모가 큰 국가 정책임에도 그만큼의 돈을 확보할 수 있는지 말고는 크게 따져지지 않는다. 2021년 국가 예산 분야별 지출을 보면 교육 부문의 재정은 약 71조 원으로 가장 많은 보건 복지 부문(약 199조 원) 다음으로, 즉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하지만 교육 부문에서 지출되는 예산에 대해 경제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다. 가령 지역 화폐 정책의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화폐를 발행해 주민들에게 지급한 것이 경제적 효과가 있는지를 연구 기관에 의뢰해 따로 분석 및 평가하기도 하고 그 평가 결과가 언론에서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교육 급여나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급된 교육 재난 소득, 아동 수당 인상 등이 가지는 효과는 잘 분석되지 않는다. 아파트 매물에서 빠지지 않는 홍보 요소는 어떤 초·중·고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이다. 실제로 학교의 존재는 부동산 시장에 영향을 끼치지만 이것이 경제학적으로 진지하게 논의되는 것은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육에서 쓰이는 예산은 여느 복지 예산보다 더 큰 부의 재분배 효과를 가진다. 한국 교육에서 기회의 균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국민들의 요구이기에, 교육 예산은 많은 경우 보편적으로 집행되기 때문이다. 국가 지출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예산이 보편적으로 집행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교육 정책에서는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의 대규모 예산이 운용되고 있고, 따라서 분명 경제 정책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국가의 교육 정책은 분명 공공 경제의 영역에 속하고, 공공 경제의 목표는 후생, 그러니까 사회 전체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 경제는 효율성과 함께 공평성을 중요한 지표로 삼는다.



교육이 경제의 논리를 집어드는 순간


앞서 말했듯 교육에서 경제적 논리는 종종 간과된다. 그러다가 학교 통폐합이나 교원 감축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만 경제성의 논리를 내세운다. 2000년대 초 교원 구조 조정이 있을 때 등장했던 ‘고경력 교사 1명이 명예 퇴직하면 신규 교사 2명이 들어올 수 있다’라는 말도 그랬다. 단순히 급여만 비교한 논리였다. 출생률이 낮아지면서 교사 수가 남기 때문에 교원 정원을 감축한다는데, 실제로 교사 수가 남는지에 관한 데이터조차 정부는 내놓지 않는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법으로 정한 교사 정원 수를 채우지 못하는 학교가 무수한데 대체 어디서 얼마만큼의 교사가 남는다는 건지, 정부는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학교 통폐합에서도 작은 학교 하나를 폐교할 때 나타나는 경제적 효과에 대해 정부는 효율성도 공평성도 측정하지 않는다. 동원되는 ‘경제적 논리’란, 학생 수가 몇 명인데 이에 필요한 교사가 몇 명이고 월급은 얼마고 그러니까 감당해야 하는 적자의 폭이 너무 크다는 정도다. 이것은 경제적 논리가 아니다. 이 정도 계산은 내가 우리 반 학생들과 수업하는 용돈 기입장 쓰기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경제를 거론하려면 그보다는 더 공들여서 분석하고 설명해야 하지 않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교육 정책이 경제 정책인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교육 정책은 경제 정책이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는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그는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공급’이라니. 기본적으로 교육 관련 법에서 밝히고 있는 교육의 목적을 넘어서는 발언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교육이 각 개인의 성공, 정확히는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공공연하게는 교육은 사회적 목적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져 왔다. 「교육기본법」에서도, 국가 교육과정에서도 구체적으로는 민주 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 「교육기본법」 제2조


물론 교육 정책은 국가의 경제 상황 및 경제 정책과 긴밀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경제 정책에 의해 정부 예산이 세워지고, 경제 정책이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이 좌우되며, 경제 성장에 따라 교육 정책을 포함한 다른 정책들도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경제 정책이 보다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교육 정책을 경제 정책에 종속적으로 바라보거나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교육 정책의 기능은 경제 정책의 기능과 판이하게 다르다. 교육 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사회 통합을 가져오며 국가의 거시적인 기반을 만들어 내는 정책이다. 무엇보다 교육 정책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의 삶과 사회의 질적 향상이다. 경제 정책이 ‘파이’를 늘리는 데 초점을 둔다면(이제 성장 일변도의 경제 정책에서도 벗어나야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경제 정책이 성장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교육 정책은 교육 제도의 합리적 운용과 교육 기회의 배분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적합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조력하고, 사회 발전과 관련하여서는 인간 존중, 수평적 인간관계, 공과 사의 구분, 공동체 의식,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경험하도록 하여 그것의 효과가 사회 전반에 파급되도록 하고 있다.


경제를 촉진시키는 것에는 경제 제도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보유한 사람도 중요하며,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건강한 노동력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에 적절한 교육 제도가 필요하다. 교육의 발전이 경제 발전을 지원 및 촉진하고, 경제 발전의 결과는 다시 교육 발전을 위하여 다시 환류되는 상보적 효과를 가진다고 이야기된다. 이를 위해서 교육 정책은 정치, 사회, 경제적 맥락에 적합하면서도 사회의 균형과 같은 질적 향상을 위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여기에 인용한 내용은 진보적 학자의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 사용된 교육학 교과서, 시장주의적 입장에서 교육경제학을 바라보는 학자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 속에서도 「교육기본법」에 나오는, 교육이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단언컨대, 한국 사회에서 이제껏 논의되어 오고 합의되어 온 교육의 목적은 ‘산업 발전’이 아니다.



‘부자 나라’의 꿈


이전에도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정부 부처를 두었던 국가답게 한국 정부는 교육을 마치 고구마 농사나 광산같이 여기곤 했다. 마치 ‘인간’이라는 작물을 열심히 기르면 ‘인적 자원’이 주렁주렁 매달려 부농이 될 수 있을 것처럼, 혹은 우리나라는 자원이 사람밖에 없다며 계속 ‘인재’를 땅에서 채굴해 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인간을 발판 삼아 더욱더 ‘선진국’, 더 솔직하게는 더 ‘부자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꿈은 대한민국을 이제껏 추동해 온 동력이었다.


또 한편으로 그 꿈은 위기의식을 동반한다. 우리는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말은 인간을 자원으로 바라보는 것을 정당화하고, 그렇게 인간을 자원화하지 않았을 때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도태되어 ‘망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현재 이루어 낸 한국의 경제적 지위를 안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가진 것 없이 사람만으로 이루어 낸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김종엽·정민승이 쓴 《입시는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에서는 한국의 특수한 근대화 과정이 몇가지 사회적 멘탈리티 내지는 습속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하며 그중 하나를 ‘상처 입은 민족주의(wounded nationalism)’라고 표현 했다.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 등으로 사회의 기본적 네트워크와 안전망이 모두 깨지고 절대적 빈곤에 처했던 상황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 88 올림픽 등을 통해 국제적 존재감을 획득한 역사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상처 입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공은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상처와 부끄러움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습속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현실 감각을 일그러지게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작은 나라다. 그럼에도 전 세계 10위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식민 지배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에 거의 유일하다고 평가되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공은 그 자체보다 더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평가된다. 이 정도 규모의 영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에 필요한 혹은 가능한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기보다는, 좀 더 부자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무한 성장의 프레임에 경주마처럼 눈을 가리고 뛰어들게 된다. 경제 규모의 확장 외에 다른 문제들은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모든 나라가 반드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부자 나라의 꿈, 부자가 되지 않으면 망하고 말 거라는 위기의식은 교육을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교육기본법」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자주적 생활 능력(자기 돌봄)이나 인간다운 삶은 국가 경제와 관련성이 적다는 이유로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무관심한 대상이 되기 쉽다. 그로 인한 폐해는 우리 모두가 지금 목도하고 있다.



교육과 직업의 결합은 긍정적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교육부에 한 주문, 즉 산업 발전에 맞는 인재를 공급하라는 요구는 직접적으로는 대학 반도체학과 증설로 이어졌다. 특정 직업에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교육하라는 것이다. 교육과 직업의 결합은 우리 사회에서 꽤 오래 논쟁되어 온 주제이다. 교육사회학자 보울스와 진티스가 쓴 책이 《자본주의와 학교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판된 것이 1986년인데, 이를 기점으로 삼더라도 40년 가까이 되었다. 보울스·진티스는 사회의 일자리가 분업화되어 있는 것에 교육이 상응하여 학교교육도 계열을 분리하고 독자적인 교육 내용이 위축되어 가는 것을 비판했다. 또한 이런 교육에서 학생은 자신이 참여할 교육에 대해 어떠한 결정권도 가질 수 없게 됨을 지적했다.


생산 체제와 교육 체제를 너무 단순하게 비교하여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비판과 더불어 오래된 이론이라 덜 조명되는 경향도 있지만, 나는 최근 들어 자주 보울스·진티스의 글을 떠올리게 된다. 고 이예람 중사 등 연달아 세상을 떠난 공군 부사관들이 모두 군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한층 더 교육이 특정 직업에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군 특성화고등학교는 정규 고등학교이지만 교육부가 아닌 국방부 소속이다. 교직원도 군인 또는 군무원 신분이다. 교육과정 역시 국방부가 관리하면서 거의 해마다 바뀌다시피 하고 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생활 대신 ‘군 생활’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자주포 운용’, ‘화포 장비’ 같은 교과목을 배운다.


군 특성화고등학교가 특히 더 그렇겠지만, 다른 특성화고등학교들도 직업과 밀접한 교과목을 배운다. ‘치과 임상 실무’, ‘기관 실무 기초’, ‘병원 코디네이터’ 등 생각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과목들이다. 특성화고등학교만이 아니다. 고교 학점제 시범 운영이 확대되면서 많은 고등학교에서 이런 류의 과목들이 개설되고 있다. 교대 및 사범대에 지원하는 학생의 경우에는 교육학 과목을 선택해 수강하고, 경제나 회계 관련 과목을 듣는 건 주로 상경 계열 진로를 염두에 둔 학생들인 식이다. 교과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세세하게 나누어져 교육과 직업의 연계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시수는 동일하다. 이토록 직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교육 내용이 증가한다면 무언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줄어드는 것일까. 우리는 직업과의 연계를 높이는 대신 무엇을 교육에서 놓쳐 가고 있는가. 예로 들었던 군 특성화고등학교는 그간 교육 당국이나 교육계가 추진해 온 인권 친화적 학교 문화 조성이나 민주시민교육 강화 등에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두발·복장 규제도 더 세세한 경우가 많고, 학생 자치나 사회 참여의 수준도 다르다. 이는 군 특성화고등학교가 학생을 ‘예비 군인’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을 단지 ‘예비 직업인’, ‘취업 준비생’으로만 바라 보는 관점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교육의 내용과 방식에서도 본래의 교육적 목적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교육부가 경제 부처라는 말에 화가 났던 이유


내가 교육부가 경제 부처라는 말에 ‘용서가 안 된다’라고 느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두 가지 이유였던 것 같다. 하나는 그간의 논의들이 무시되는 것에 대한 분노. 교육은 경제성이라는 말로 포장한 시장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굉장히 많은 사람이 정말 오랫동안 애써 온 영역이다. 그 노력은 사회운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정부 관계자들도 그러했고 현장의 교사들도, 보호자들도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 당사자들 역시 교육이 시장 논리로만 운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헌신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라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교육부도 경제 부처’,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 첫 번째 의무’라고 선언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컸다.


두 번째는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분노였다. 앞서 말했듯 사람을 농작물이나 광물 자원처럼 여기는 것도 화가 나지만, 그 말에서 읽히는 관점에 너무나 화가 났다. 자신은 공급되는 인재를 활용하고 써먹는 사람, 사람을 소비하는 사람, 사람이라는 자원을 사용하는 자본가의 위치에 두고 있는 그 시선에 너무 화가 났다. 나는 누구에게도 써먹히고 싶지 않다. 아무도 날 소비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내 삶을 충만히 살아가면서 그 과정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영역을 확장하고 일구어 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받았고 받고 있고 앞으로 받을 교육의 결과이지 않은가. 교육 정책이 경제 정책이고 교육부는 경제 부처라는 말로 이러한 자본가의 관점을 포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❶ 이희진(2011), 〈지방교육재정 배분의 지방간 형평화 효과 분석〉, 한국교원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❷ 윤정일(2004), 《교육재정학원론》, 세영사.

❸ 김명수(1995), 〈교육산업의 형성배경과 발전과정〉, 《교육재정경제연구》, 4(1), 33~58쪽.

❹ 김종엽·정민승(2019), 《입시는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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