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반대하기를 넘어 주인이 될 결심
김민하 씀,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이데아, 2022
공현
gonghyun@gmail.com
본지 기자
문재인 정권은 왜 실패했나?
“진보는 맨날 불만만 많고 비판만 한다.” “대안도 없이 반대를 일삼는다.”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곧잘 듣게 되는 말이다.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라는 책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그 말들이 떠올랐다. 좌파 운동이나 ‘민주 세력’에 관한 쓴소리인가? 아니면 정치적 적대 세력을 악마화하지 말자는 충고일까? 저자가 진보 정당 활동가 출신 정치 평론가이니, 일종의 자성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펼친 책 속에는 예상과는 꽤나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거나 다른 의견을 가진 세력과 공존과 타협을 꾀하라는 진부한 소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이 책은 조국 사태에서 조국을 옹호하던 측과 조국을 비판하던 측이 사실상 같은 태도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이어서 팬덤 정치 등을 다루다가, 정치의 본질을 알려면 역사를 보아야 한다며 한국 현대사를 훑고, 미국의 대의 민주주의 역사와 일본의 정치사를 살펴본다.
산만하게도 느껴지고 ‘알쓸신잡’ 같기도 한 내용을 9장까지 읽고 나니(이 책은 총 10장이다) 비로소 저자가 이 책을 왜 쓴 것인지,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내 생각에 이 책은 ‘문재인 정권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에 보편적이고도 좌파적인 입장에서 답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지를 반성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방향을 제안한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탄핵이라는 일대 사건을 거쳐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촛불 정부’라 불렸고 ‘적폐 청산’을 내걸었으며 그 어느 정부보다도 개혁에 대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동안 일부 제도적 개선과 성과는 있었으나 당초 기대만큼의 개혁은 이루지 못했고 끝내 정권을 국민의힘에 내주었다. 문재인 정권이 실패한, 적어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이 무능해서? ‘내로남불’ 논란이 보여 주듯이 개혁에 진정성과 의지가 없어서?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런 해석은 우리를 같은 자리에 맴돌게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민주주의와 정치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고 오늘날 한층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는 특정 정권이나 정치 세력의 일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를 바라고 사회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 주체 모두가 고민해야 할 사안일 것이다.
반대와 반대의 진자 운동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현상이나 정치 행위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반대’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가령 조국을 옹호하는 측은 ‘검찰에 대한 반대’ 담론을, 조국을 비판하는 측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대’ 담론을 중심에 두고 조직되었다.
‘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는 결국 무엇을 반대할 것인가를 묻고 이를 기준으로 자기 정당성을 설명해 가는 방식으로 정치적 담론을 형성한다. 가치 지향이라기보다는 분파의 형성이라고 해야 할 이런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많은 사람이 여론에 개입하면서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 즉, ‘조국 사태’가 보여 주는 것은 진보나 보수 같은 가치의 변화 혹은 이를 둘러싼 갈등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의 분파적 조직화가 엘리트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적 차원까지 뻗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진보는 ‘보수를 반대하는 것’이고 보수는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 본문 37~38쪽
어떤 상대방에 대한 반대를 통해 지지를 조직하는 것이 ‘반대의 정치’이다. 특히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은 주로 기득권에 대한 반대의 맥락에서 쓰이기에, ‘반대의 정치’는 많은 경우 상대방을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기득권에 반대하는 자신이 민주주의이고 개혁이자 혁신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 반대의 정치는 상대방의 진정성과 대의명분은 의심하고 자신의 진정성은 강조하는 서사를 만든다. 팬덤 정치, 정치적 냉소주의, 음모론, 극단주의 등은 이러한 정치가 반복되며 초래된 결과이다.
반대의 정치가 효과적인 것은 유권자를 쉽게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어 다수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세력들끼리도 같은 대상을 반대함으로써 하나로 묶일 수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투표는 최악을 막기 위해 하는 것이다”와 같은 말도 민주주의가 가지는 반대의 정치의 속성을 반영한 것 아닐까 싶다.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킨 2017년 촛불도 반대의 정치에 의해 가능했다. “촛불 시위가 한국 사회에 요구한 것은 ‘진보’라기보다는 ‘반(反) 보수’였다.”(본문 50쪽) 이는 문재인 정권의 한계 또한 설정했다. ‘반 보수’, ‘정상화’로 한데 묶여 있던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입장’과 ‘이명박-박근혜 정권 기간 부당하게 손해를 봤던 것을 해결하려는 입장’ 사이의 균열이 불거지게 된 것이다. ‘공정성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균열은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장주의가 ‘공정’과 ‘정상’의 타이틀을 가져가며 개혁을 가로막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책의 후반부는 이처럼 반대의 정치가 거듭되며 ‘반기득권’과 ‘반-반기득권’ 사이를 오가는 것을 나카노 고이치의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를 인용해 “진자 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면 같은 자리를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진자 운동의 와중에도, 멀리서 보면 그 축은 계속 이동해 왔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일본의 경우엔 더 친자본적이고 우파적인 방향으로. 개별 정권이 무엇에 대한 반대를 표방하든, 큰 틀에서는 기존 체제와 구조의 대세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에서 이는 시장 만능주의, 자본주의이며, 실제로는 국제적인 경제 구조의 압력과 계급적 힘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된다. 기득권 타파를 외치는 반대의 정치는 실제로는 이런 구조를 바꾸지 못하며 오직 서로의 조직·동원 수단으로만 작동한다.
‘반대의 정치’는 아무래도 양당제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 같다. 오직 서로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보여 주는 한국의 거대 양당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저자가 주요 분석 사례로 든 나라들도 한국, 미국, 일본이다. 하지만 저자는 “양당제적 구도 자체가 ‘반대의 정치’의 결과물”(본문 148쪽)이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또한 상당수 진보 정당들이 취해 왔던 입장, 거대 양당이라는 기득권에 반대하며 ‘제3의 선택’을 말하는 것도 또 다른 반대의 정치일 뿐이다. 이 책의 주장이 흔한 ‘거대 양당 비판’에 머물지 않는 부분이다.
‘진보 교육감’, ‘진보 정치’를 넘어
나는 소위 ‘민주 진보 교육감’의 상황에도 저자의 문제의식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 진보 교육감은 기존의 학교교육 현실, 관료적인 교육 당국의 체계 등에 대한 반대로서 등장했던 기획이지만 결국 한국 교육 현실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2022년 지방 선거에서 민주 진보 교육감 후보들이 다수 당선에 실패한 것이나, 재선, 삼선한 민주 진보 교육감들도 학력 신장 등을 강조하게 된 모습을 보면 교육감을 두고도 진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민주 진보 교육감’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 기획이 반 보수의 기치로 상이한 세력(민주당 계열과 진보 정치 계열)을 결합시키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던 것 아닐까.
이 책은 크게는 ‘반대의 정치’와 ‘진자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왜 정권이 계속 교체되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지를 해명하고, 팬덤 정치나 음모론,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등의 현상이 점점 더 확산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가깝고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을 비평하고 분석하는 부분도 독자들에게 많은 통찰을 준다. 그중에서 왜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의 인사가 문제였는지 짚는 부분은 민 주 진보 교육감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관료 서사’는 다른 가능성은 배제하고 ‘관료의 불순한 의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권력이 관료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해법보다 정파적 일체감을 갖고 있는 시민 사회 출신 인사에게 권한을 주는 해법이 각광받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의 한가운데 등장한 시민 사회 출신 인사들은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는커녕 개인 비리 등의 스캔들에 휘말려 오히려 정권의 정치적 부담을 키우는 역할을 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요직을 맡고도 ‘관료’와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경우도 많았다. (......) 결국 ‘출신’이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다.
- 본문 212~213쪽
우리는 흔히 민주 진보 교육감(혹은 교육부 장관 등)이 충분히 기대만큼 ‘진보적이지 못할’ 때, 이를 교육청의 관료들 탓이라고 말하거나 그 교육감이 충분히 진보적인 의식과 의지를 가지지 못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종종 그런 식으로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식의 비판과 이해가 너무 얄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된다.
기득권 출신이 아닌 좋은 정치인(정당)이 권력을 잡게 만들면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결국 ‘반대의 정치’이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더 진보적인 교육감을 뽑으면 될 거라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다. 교육감 직선제는 더 많은 자치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 에서 분명 이전보다 나아진 제도이다. 그럼에도 교육감 직선제와 민주 진보 교육감 기획이 결과적으로 ‘반대의 정치’의 메커니즘에 따라 사회운동·교육운동 세력을 제도권 정치의 진자 운동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육감 선거를 치르게 되면서 더 좋은 진보 교육감 후보를 세우고, 더 많이 당선되게 하고, 운동 출신의 인사들이 교육청 간부가 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아봐야 하며, 우리가 정치 소비자를 넘어 주권자가 되고 공동의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패를 반복하고 경험과 평가를 축적하며 더 나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공론장’, ‘시민 사회’가 필요하며, 사람들이 참여하고 정보와 책임을 공유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대의 정치’가 반복되는 건 다수의 사람을 통치로부터 소외시키고 투표나 정치적 지지 등의 행위를 단지 구매/불매와 같은 걸로 축소시키는 정치 현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이야기하는 ‘만능 스위치가 존재하는 방’의 비유가 이런 문제의식을 잘 드러낸다.
이런 관점은 마치 정치를 만능 스위치가 존재하는 방에 들어가기 위해 각 세력이 경쟁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누르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고 해 보자. 이 스위치는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방 안에 있는데, 통치자란 이 방 안에서 스위치를 누를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대를 안고 방을 바라본 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치 작동의 기미는 없고, 이내 방 밖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한다. 저 통치자에게 스위치를 누를 의지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애초부터 목표였던 것은 아닌가? (......)
진실은 놀랍게도 만능 스위치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본문 7~8쪽
이 비유를 보며 냉소적인 사람은 ‘만능 스위치 같은 걸 믿는 어리석음이 잘못’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주로 좋은 대통령을 뽑아도 세상이 한번에 바뀌지는 않는다고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듯싶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만능 스위치’가 아니라, 바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통치자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의 존재부터가 문제 아닐까? 우리가 선호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교육감을 방 안에 들여보내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착각해 왔다. 소위 민주 진보 교육감도, 진보 정당도 그런 식으로 진보 정치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해 왔다.
우리는 “만능 스위치 따위는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방을 부숴야”(본문 9쪽) 하고,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될 결심을 해야 한다. 이때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문학적인 수사나 표어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결정권과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그런 제도 또는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예시로 브라질의 참여 예산제를 비롯하여 직접 민주주의와 계획 경제라고 할 만한 몇 가지 사례와 모델을 소개한다. 모두(民)가 주인(主)이 되는 체제가 곧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선거에서 ‘더 나쁜 쪽’을 몰아내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방을 개방하고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공론장과 참여 제도를 지어 나가고, 함께 ‘더 나은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리뷰
반대하기를 넘어 주인이 될 결심
김민하 씀,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이데아, 2022
공현
gonghyun@gmail.com
본지 기자
문재인 정권은 왜 실패했나?
“진보는 맨날 불만만 많고 비판만 한다.” “대안도 없이 반대를 일삼는다.”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곧잘 듣게 되는 말이다.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라는 책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그 말들이 떠올랐다. 좌파 운동이나 ‘민주 세력’에 관한 쓴소리인가? 아니면 정치적 적대 세력을 악마화하지 말자는 충고일까? 저자가 진보 정당 활동가 출신 정치 평론가이니, 일종의 자성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펼친 책 속에는 예상과는 꽤나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거나 다른 의견을 가진 세력과 공존과 타협을 꾀하라는 진부한 소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이 책은 조국 사태에서 조국을 옹호하던 측과 조국을 비판하던 측이 사실상 같은 태도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이어서 팬덤 정치 등을 다루다가, 정치의 본질을 알려면 역사를 보아야 한다며 한국 현대사를 훑고, 미국의 대의 민주주의 역사와 일본의 정치사를 살펴본다.
산만하게도 느껴지고 ‘알쓸신잡’ 같기도 한 내용을 9장까지 읽고 나니(이 책은 총 10장이다) 비로소 저자가 이 책을 왜 쓴 것인지,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내 생각에 이 책은 ‘문재인 정권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에 보편적이고도 좌파적인 입장에서 답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지를 반성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방향을 제안한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탄핵이라는 일대 사건을 거쳐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촛불 정부’라 불렸고 ‘적폐 청산’을 내걸었으며 그 어느 정부보다도 개혁에 대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동안 일부 제도적 개선과 성과는 있었으나 당초 기대만큼의 개혁은 이루지 못했고 끝내 정권을 국민의힘에 내주었다. 문재인 정권이 실패한, 적어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이 무능해서? ‘내로남불’ 논란이 보여 주듯이 개혁에 진정성과 의지가 없어서?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런 해석은 우리를 같은 자리에 맴돌게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민주주의와 정치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고 오늘날 한층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는 특정 정권이나 정치 세력의 일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를 바라고 사회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 주체 모두가 고민해야 할 사안일 것이다.
반대와 반대의 진자 운동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현상이나 정치 행위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반대’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가령 조국을 옹호하는 측은 ‘검찰에 대한 반대’ 담론을, 조국을 비판하는 측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대’ 담론을 중심에 두고 조직되었다.
‘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는 결국 무엇을 반대할 것인가를 묻고 이를 기준으로 자기 정당성을 설명해 가는 방식으로 정치적 담론을 형성한다. 가치 지향이라기보다는 분파의 형성이라고 해야 할 이런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많은 사람이 여론에 개입하면서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 즉, ‘조국 사태’가 보여 주는 것은 진보나 보수 같은 가치의 변화 혹은 이를 둘러싼 갈등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의 분파적 조직화가 엘리트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적 차원까지 뻗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진보는 ‘보수를 반대하는 것’이고 보수는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 본문 37~38쪽
어떤 상대방에 대한 반대를 통해 지지를 조직하는 것이 ‘반대의 정치’이다. 특히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은 주로 기득권에 대한 반대의 맥락에서 쓰이기에, ‘반대의 정치’는 많은 경우 상대방을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기득권에 반대하는 자신이 민주주의이고 개혁이자 혁신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 반대의 정치는 상대방의 진정성과 대의명분은 의심하고 자신의 진정성은 강조하는 서사를 만든다. 팬덤 정치, 정치적 냉소주의, 음모론, 극단주의 등은 이러한 정치가 반복되며 초래된 결과이다.
반대의 정치가 효과적인 것은 유권자를 쉽게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어 다수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세력들끼리도 같은 대상을 반대함으로써 하나로 묶일 수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투표는 최악을 막기 위해 하는 것이다”와 같은 말도 민주주의가 가지는 반대의 정치의 속성을 반영한 것 아닐까 싶다.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킨 2017년 촛불도 반대의 정치에 의해 가능했다. “촛불 시위가 한국 사회에 요구한 것은 ‘진보’라기보다는 ‘반(反) 보수’였다.”(본문 50쪽) 이는 문재인 정권의 한계 또한 설정했다. ‘반 보수’, ‘정상화’로 한데 묶여 있던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입장’과 ‘이명박-박근혜 정권 기간 부당하게 손해를 봤던 것을 해결하려는 입장’ 사이의 균열이 불거지게 된 것이다. ‘공정성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균열은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장주의가 ‘공정’과 ‘정상’의 타이틀을 가져가며 개혁을 가로막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책의 후반부는 이처럼 반대의 정치가 거듭되며 ‘반기득권’과 ‘반-반기득권’ 사이를 오가는 것을 나카노 고이치의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를 인용해 “진자 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면 같은 자리를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진자 운동의 와중에도, 멀리서 보면 그 축은 계속 이동해 왔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일본의 경우엔 더 친자본적이고 우파적인 방향으로. 개별 정권이 무엇에 대한 반대를 표방하든, 큰 틀에서는 기존 체제와 구조의 대세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에서 이는 시장 만능주의, 자본주의이며, 실제로는 국제적인 경제 구조의 압력과 계급적 힘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된다. 기득권 타파를 외치는 반대의 정치는 실제로는 이런 구조를 바꾸지 못하며 오직 서로의 조직·동원 수단으로만 작동한다.
‘반대의 정치’는 아무래도 양당제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 같다. 오직 서로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보여 주는 한국의 거대 양당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저자가 주요 분석 사례로 든 나라들도 한국, 미국, 일본이다. 하지만 저자는 “양당제적 구도 자체가 ‘반대의 정치’의 결과물”(본문 148쪽)이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또한 상당수 진보 정당들이 취해 왔던 입장, 거대 양당이라는 기득권에 반대하며 ‘제3의 선택’을 말하는 것도 또 다른 반대의 정치일 뿐이다. 이 책의 주장이 흔한 ‘거대 양당 비판’에 머물지 않는 부분이다.
‘진보 교육감’, ‘진보 정치’를 넘어
나는 소위 ‘민주 진보 교육감’의 상황에도 저자의 문제의식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 진보 교육감은 기존의 학교교육 현실, 관료적인 교육 당국의 체계 등에 대한 반대로서 등장했던 기획이지만 결국 한국 교육 현실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2022년 지방 선거에서 민주 진보 교육감 후보들이 다수 당선에 실패한 것이나, 재선, 삼선한 민주 진보 교육감들도 학력 신장 등을 강조하게 된 모습을 보면 교육감을 두고도 진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민주 진보 교육감’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 기획이 반 보수의 기치로 상이한 세력(민주당 계열과 진보 정치 계열)을 결합시키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던 것 아닐까.
이 책은 크게는 ‘반대의 정치’와 ‘진자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왜 정권이 계속 교체되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지를 해명하고, 팬덤 정치나 음모론,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등의 현상이 점점 더 확산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가깝고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을 비평하고 분석하는 부분도 독자들에게 많은 통찰을 준다. 그중에서 왜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의 인사가 문제였는지 짚는 부분은 민 주 진보 교육감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관료 서사’는 다른 가능성은 배제하고 ‘관료의 불순한 의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권력이 관료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해법보다 정파적 일체감을 갖고 있는 시민 사회 출신 인사에게 권한을 주는 해법이 각광받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의 한가운데 등장한 시민 사회 출신 인사들은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는커녕 개인 비리 등의 스캔들에 휘말려 오히려 정권의 정치적 부담을 키우는 역할을 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요직을 맡고도 ‘관료’와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경우도 많았다. (......) 결국 ‘출신’이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다.
- 본문 212~213쪽
우리는 흔히 민주 진보 교육감(혹은 교육부 장관 등)이 충분히 기대만큼 ‘진보적이지 못할’ 때, 이를 교육청의 관료들 탓이라고 말하거나 그 교육감이 충분히 진보적인 의식과 의지를 가지지 못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종종 그런 식으로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식의 비판과 이해가 너무 얄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된다.
기득권 출신이 아닌 좋은 정치인(정당)이 권력을 잡게 만들면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결국 ‘반대의 정치’이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더 진보적인 교육감을 뽑으면 될 거라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다. 교육감 직선제는 더 많은 자치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 에서 분명 이전보다 나아진 제도이다. 그럼에도 교육감 직선제와 민주 진보 교육감 기획이 결과적으로 ‘반대의 정치’의 메커니즘에 따라 사회운동·교육운동 세력을 제도권 정치의 진자 운동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육감 선거를 치르게 되면서 더 좋은 진보 교육감 후보를 세우고, 더 많이 당선되게 하고, 운동 출신의 인사들이 교육청 간부가 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아봐야 하며, 우리가 정치 소비자를 넘어 주권자가 되고 공동의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패를 반복하고 경험과 평가를 축적하며 더 나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공론장’, ‘시민 사회’가 필요하며, 사람들이 참여하고 정보와 책임을 공유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대의 정치’가 반복되는 건 다수의 사람을 통치로부터 소외시키고 투표나 정치적 지지 등의 행위를 단지 구매/불매와 같은 걸로 축소시키는 정치 현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이야기하는 ‘만능 스위치가 존재하는 방’의 비유가 이런 문제의식을 잘 드러낸다.
이런 관점은 마치 정치를 만능 스위치가 존재하는 방에 들어가기 위해 각 세력이 경쟁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누르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고 해 보자. 이 스위치는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방 안에 있는데, 통치자란 이 방 안에서 스위치를 누를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대를 안고 방을 바라본 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치 작동의 기미는 없고, 이내 방 밖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한다. 저 통치자에게 스위치를 누를 의지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애초부터 목표였던 것은 아닌가? (......)
진실은 놀랍게도 만능 스위치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본문 7~8쪽
이 비유를 보며 냉소적인 사람은 ‘만능 스위치 같은 걸 믿는 어리석음이 잘못’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주로 좋은 대통령을 뽑아도 세상이 한번에 바뀌지는 않는다고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듯싶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만능 스위치’가 아니라, 바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통치자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의 존재부터가 문제 아닐까? 우리가 선호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교육감을 방 안에 들여보내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착각해 왔다. 소위 민주 진보 교육감도, 진보 정당도 그런 식으로 진보 정치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해 왔다.
우리는 “만능 스위치 따위는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방을 부숴야”(본문 9쪽) 하고,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될 결심을 해야 한다. 이때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문학적인 수사나 표어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결정권과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그런 제도 또는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예시로 브라질의 참여 예산제를 비롯하여 직접 민주주의와 계획 경제라고 할 만한 몇 가지 사례와 모델을 소개한다. 모두(民)가 주인(主)이 되는 체제가 곧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선거에서 ‘더 나쁜 쪽’을 몰아내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방을 개방하고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공론장과 참여 제도를 지어 나가고, 함께 ‘더 나은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