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호[에세이] 나는 왜 참전 군인을 만나는가 | 석미화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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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참전 군인을  만나는가



석미화

peacememo.org

아카이브평화기억 대표·활동가



외대앞역에 도착했다. 역사가 지상에 있어서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개찰구를 지나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오늘은 마을 공간 도꼬마리에서 월남에 다녀온 참전 군인을 만나기로 했다. 도착지까지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을 참이었는데 지하철을 나와 골목에 접어들자 바로 마을 카페 도꼬마리 글자가 크게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생각을 접고 지하로 들어섰다. 참전 군인 어르신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 도꼬마리 활동가 느린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잠시 후 그가 도착했다. 서로 인사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함께한 이들은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주최하는 ‘시민 참여형 구술 활동, 참전 군인을 만나러 갑니다’(구술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로 나를 포함해 넷이 자리했다. 느린은 올해로 2년째 구술 활동에 함께하고 있다. 느린은 자신의 글쓰기 교실에 군복을 입고 등장한 참전 군인 어르신과 우연히 알게 된 후 언젠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구술 활동에 참여하며 2023년에 그와 두 차례 만남을 하고, 2024년에도 만남을 이어 갔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자 여럿이 함께하는 첫 자리였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


시작부터 바로 월남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이야기했다(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라는 단어의 조합에 대해 늘 고민하지만 이 글에서는 잠시 고민을 내려놓고 쓴다). 그것은 나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왜 참전 군인을 만나고자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내가 활동했던 시간을 되돌려야 했다. 도꼬마리에서 만난 참전 군인 어르신과도 그랬다. 이 주제는 참전 군인을 만나는 현장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늘 첨예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참전 군인 어르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인식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우리를 만났으니 잘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어쨌든 묻기 전에 말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떨 때는 다른 말과 함께 그냥 흘려버리는 경우도 접했지만 때론 인정과 책임을 마주하기도 했다. 첨예하지 않다고 표현했던 것은 민간인 학살 문제를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마주했던 경험이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 관련 단체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는 주장은 이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 사회와 사회적으로 갈등하고 충돌하고 있지만, 참전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들어 보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참전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할수록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제에 대한 반감과 선명한 인식이 느껴졌다. 도꼬마리에서 만난 참전 군인 어르신이 그랬다. 그러다 보니 시작부터 이야기가 뜨거웠다.

그는 월남전이 ‘월맹을 도운 베트콩(VC,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의 싸움’이었고 작전 중 한국군이 사상을 당하면 살기 위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전장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신도 들은 이야기라며 해 준 이야기는 이렇다. “한국군이 월남민들을 일부러 죽이고 무참히 쏘아 학살했다고 하니까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과를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월남 갔다 온 사람들이 화내고 욕하는 거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그런 거다. 나도 그 앞(방송국)에 가서 데모도 하고 그랬다.” 그는 말끝에 눈물을 보였다. 여러 주장이 뒤섞여 나온 그의 말에서 명확하지 않은 내용과 그로 인한 오해, 억울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어서 나도 이야기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주장이 참전 한국군에 대해 죄 없는 이들을 ‘일부러’ 죽였다고 말하지 않는다(여기서 방점은 악의적 혐오와 선동을 의미하는 ‘일부러’이다). 무엇보다 전쟁에 군대를 보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국가가 방관하는 사이 참전 군인과 시민 사회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소통하지 못하고 계속 갈등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가 말한 민간인 학살은 그동안 내가 그 진상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해 왔던 활동이기도 했다. 그와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가다 보니, 어느덧 참전 군인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자신이 마음 여린 사람이라 그렇다며 그 이후로 이어진 여러 이야기 속에서도 종종 눈시울을 붉혔다. 첫 만남에서 함께 나눈 이야기가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말들은 아니었을 테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월남 참전 후반기인 1971년에 백마 29연대 의무 중대 소속으로 전쟁을 다녀온 한 참전 군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달 후 그와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다시 만난 자리에서는 그가 진행하는 헌법 소원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고엽제 피해로 보훈급여금을 받고 있는 그는 이중 수급 금지 규정 때문에 현재 참전 수당을 받지 못하는 데 대해 여섯 번째 헌법 소원을 냈다고 한다. 그가 보여 준 소장에는 이러한 취지가 담겨 있었다.


“「참전 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에서 이야기하는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는 월남에 참전하여 국가를 위해 싸우다 고엽제약(다이옥신)에 희생된 군인으로서 받는 환자 지원 수당인데 이 수당을 받는다고 해서 참전 명예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평등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을 상실하게 하는 바 헌법 소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기한 헌법 소원에 등장하는 참전 명예 수당의 ‘명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것은 당연한 듯 말하는 ‘참전’과 ‘명예’의 연결에 대한 질문이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평화 유지군(PKO)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파병(국군의 해외 파병 업무 훈령에 의해 국회의 동의 절차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는 편법적 방식)과 부대 파병을 하는 것에 대해,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참전 관련 단체가 항의 시위를 한 이유에 대해, 그렇다면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 것은 북한의 파병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묻고 답하며 생각을 나누었다. 그는 망설이며 더듬더듬 천천히 생각을 나누어 주었다. 귀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스냅 사진처럼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여러 참전 군인을 만났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 자리의 소중함도 컸지만 더 기대되는 것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만남이었다. 그렇게 나는 참전 군인과의 만남을 매년 이어왔다. 그것은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느린은 그날의 자리에 대해 이런 소회를 들려주었다. 


“그는 ‘나’로 답하기도 하고 ‘월남 참전 군인’을 대변해서 말하기도 하고 3인칭과 1인칭을 오가며 답했다. 아주 많이 어렵고 난해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한참 동안이나 대화가 이어졌다. 그날의 만남을 마치고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그의 이야기를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는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제대로 묻지 않는 사람이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그가 얘기하기만을 기다리며, 그가 꺼낸 말들을 재단하며, 주변만 빙빙 돌면서 그 빈 칸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이제야 들을 준비가 되었다. 나의 국가와 그의 국가는 과연 같을까. 나의 전쟁과 그의 전쟁은 무엇이 다를까. 그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 역시 그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와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❶


구술 활동은 기록 활동에 대한 고민, 참전 군인과의 소통, 듣고 말하는 자리, 자신의 위치(‘연루됨’이나 ‘당사자성’)에 대한 알아차림 등을 모두 중요하게 여긴다. 이야기 자리에 함께했던 정원도 이날의 기억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하고 있는 헌법 소원 역시, 베트남 전쟁에 얽힌 이들을 국가 차원에서 기억해 달라는 개인의 기억 투쟁의 일환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다만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왜’, 그리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이야기해 나가야 한다. 그는 우리들을 일컬어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참전 군인 집단에 속해 있을 때와 우리를 만났을 때, 그가 나눌 수 있었던 이야기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을 더 나누기 위해, 참전 군인들을 더 이상 특정 집단에만 고립시켜 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결코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도, 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기에, 세대와 세대 간의 격차, 경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만남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의 언어가 섞여서 하나의 문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❷


두 사람의 이야기는 참전 군인과의 만남이 가져온 여러 생각들과 그것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 가야겠다는 ‘만날 결심’을 담고 있었다. 


참전 군인과 만난다는 것은


2021년부터 참전 군인과의 만남을 제안해 왔으니 어느덧 이 활동도 5년 차에 접어든다. 나는 참전 군인과 만나는 현장이 갖고 있는 힘을 믿는다. 그 자리는 이상하고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불러오지만 그 차이와 다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만나는 생각들이 있다. 그렇게 몇 년을 달려온 지금 ‘참전 군인을 왜 만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시간을 회억해 본다. 생각이 움텄던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인 응우옌티탄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10년 전으로, 그의 증언을 알리고 관련 전시를 하려고 광주, 부산, 대구, 청주를 돌던 그 시절, 시민평화법정이 열리던 7년 전 마포의 문화비축기지로, ‘미안해요 베트남’ 피켓을 들고 청와대 분수 광장에서 한겨울을 났던 2017년으로 가 본다. 돌이켜 보면 그 자리에는 언제나 군복 입은 할아버지들이 있었고, 어디에서나 참전 단체 회원과의 다툼이 일어났다. 우리는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고, 그들은 참전자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며 항의했다. 우리는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와 배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들은 전장의 상황을 이해시키려 하거나, 사실무근 혹은 조작설을 이야기했다. 관련 전시가 이루어지는 전시장 인근에는 참전 단체 항의 현수막이 나붙었다. 어느 전시에서는 참전 단체 회원들이 전시물을 모조리 땅에 내려놓고 방해하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항의했다. 또 다른 전시에도 참전 단체 회원들이 몰려왔다. 광주 5.18기념재단 전시실에서 열리다 보니 광주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도 함께 자리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들과 돌고 돌아 만나지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한번은 참전 군인과 다투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들의 성난 얼굴은 어느새 충돌하는 기억 사이에 나를 세워 놓았다. 

베트남 전쟁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전쟁의 대명사이다. 이 전쟁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여론과 평가가 들끓었지만 유독 한국만은 예외였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1964년~1973년)은 박정희 정부가 정권의 기반을 닦고 유신 체제로 가는 데 중요한 기회이자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을 전후로 하여 한국 사회는 전쟁과 분단, 독재와 민주화라는 큰 변혁의 시기를 걷는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10년 만에 다시 시작한 전쟁, 8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치른 전쟁, 수많은 청년이 총을 들고 간 전쟁, 우리 사회 폭력의 역사 한가운데 이 전쟁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한국의 베트남 전쟁, ‘월남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도 여전히 이 전쟁은 우리에게 ‘잊힌 전쟁’이고, ‘남의 전쟁’이다. 32만여 명의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관심받지 못한 채 점점 사라져 간다. 국가의 전쟁 서사는 애국과 발전, 명예와 보훈이라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학살의 키워드만이 빈곤한 전쟁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서사를 기대하기에


지난 1월 17일 베트남 퐁니마을 응우옌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 응우옌티탄에게 배상금 3000만 100원과 지연 이자를 지급할 것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2023년 1심 판결을 재확인하고 피고 측 주장을 모두 기각했다. 재판이 더 이어질지 여기서 마무리될지 지켜봐야겠지만 마지막까지 이 판결이 유지된다면 한국의 사법부가 자국의 군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피해를 인정하는 역사적 판결이 될 것이다. 전례가 없는 판결이다 보니 유사한 다른 사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새로운 논의로 확장될 것이다. 때문에 이 판결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그러나 나는 항소심 판결 소식에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무거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이라는 시민사회운동 속에 이 재판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이 만들어 낸 구도가 고착되고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전쟁(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갖고 있는 복잡한 구조에 다가가지 못하고, 학살의 장면을 반복하며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 전쟁에 대한 논의가 국가의 서사를 벗어나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에 맞서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내길 바란다. 그래서 단일한 사안을 중심으로 하는 재판과 별개로 평화운동은 더 넓게 나아가길 바란다. 이 전쟁이 갖는 동시대성을 살피고 폭력의 구조에 다가가며 과거와 현재에 연루된 여러 당사자들의 관점이 교차하는 평화 활동을 기대한다.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보는 것을 평화라고 여긴다. 자세히 보는 것, 흔들리며 보는 것이 평화에 가까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참전 군인을 만나는 것은 그동안 시민 사회가 만들어 온 좁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일이다. 나로서는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결자해지의 방법론이다. 그동안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운동이 선취해 온 정의의 자리를 참전 군인과 함께하는 일이며,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며, 전쟁과 평화에 대한 풍부한 담론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나는 이 활동이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계엄에서 탄핵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군대와 조직, 명령과 항명의 한복판에 선 이들에 대한 시선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나를 비롯해 구술 활동에 함께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에 귀를 연다. 그것은 참전 군인과의 만남이 국가 폭력에 동원된 존재이자, 폭력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중첩된 그들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 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으로 말미암은 것들에만 생각을 가두지 않고, 폭력의 구조에 다가가 보는 것, 그 이야기에 흔들리며 나와의 연결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내가 참전 군인과의 만남을 제안하고 함께하는 이유다. 



❶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 활동 공유회 자료집〉, 19쪽. 아카이브평화기억은 2024년 12월 12일에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그의 전쟁 가방을 열다’라는 제목으로 구술 활동 공유회를 열었다. 구술 활동에 참여한 시민과 참전 군인, 각 분야의 활동가와 연구자 등 50여 명이 함께했다.  

❷ 앞의 자료집,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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