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지만 함께하는,
다시 만난 우리
- 광장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이야기
김찬
defdict@gmail.com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 활동가
이준원
junwon404har@citizen.seoul.kr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다양한 사람들
김찬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윤석열 퇴진과 처벌, 국민의힘 해체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린 광장과 달라진 집회 문화에 대해 여러 진단과 해석이 있고, 그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일단 지금은 비판보다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하는 희망은 무엇인지 말하고 싶다. 이 글은 부산에서 청소년운동에 함께하는 동료들과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해 왔던 활동을 소개하는 글이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며 느꼈던 것들과 고민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짧게 소개할 것이다.
거리에서 다시 만난 청소년들
사실 부산에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대중’과 함께 운동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실효성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된 후 반대하는 세력과 맞서야 했을 때도, 두발 검사와 일상적인 욕설·체벌에 분노하며 학생들이 저항에 나섰을 때도 학생들의 연대와 참여를 조직해 내지 못했다. 부당한 생활지도로 자살한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왔을 때도 큰 힘이 되어 드릴 수 없었다. 청소년의 권리가 무너지는 수많은 현장에서 청소년들과 손 맞잡고 싸운 경험은 드물었다.
그러다가 12월 3일 이후 집회가 열리자 우리가 그렇게 함께하고 싶었던 청소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매년 홍보 활동을 했던 사직동 학원가에서도 유인물을 나눠 주자 청소년들의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다. 특히 부산 시민대회 자유 발언 중에는 청소년, 10대, 중학생, 고등학생, 초등학생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페미니즘, 학생인권, 입시 경쟁 반대, 노동권, 퀴어 등 우리가 외쳐 온 의제들을 말하는 이들이 꽤나 많았다.
부산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막는 청소년 시국선언〉을 최선을 다해 조직하고, 부산 지역 발표 기자 회견을 별도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는 청소년 49,052명이 참여했고, 그중 부산 지역 청소년은 3,000명이 넘었다. 시국 선언 발표 부산 기자 회견 소식을 지역 참여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공지 문자를 보냈다. 참여하고 싶은 청소년들은 문자로 답장해 달라고 한 것이 실수였다. 내 휴대전화는 그날 밤 계속 울렸다. 200건이 넘는 답장이 왔고, 주로 참여하고 싶다거나 이후 활동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내용, 청소년 집회를 열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기자 회견 당일, 놀랍게도 일면식도 없던 청소년 30명이 공지를 보고 와서 현수막 뒤를 가득 채웠다. 언론사 카메라에 찍히는 것이 불편한 청소년 20여 명도 카메라 뒤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퍼포먼스에 함께했다. 간이 집회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너무 놀라웠다. 집회를 할 때도, 이렇게 사람이 모였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예전에도 박근혜 퇴진 운동, 스쿨 미투와 페미니즘 리부트 등에 동참한 청소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부산과 경남에서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청소년들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예전의 광장과 투쟁을 경험했던 청소년운동 활동가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다. 거대한 이슈로 광장이 열려서 청소년들이 나왔다 하더라도, 평소 누적되어 온 삶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기에, 그때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기자 회견 이후의 활동을 고민하면서 12월 초 광장에서 목격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퀴어와 페미니즘, 소수자의 권리는 물론, 입시 경쟁 폐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습 말이다.
거리에 나온 청소년들을 목격한 이후, 어떻게든 광장에 모인 청소년들의 힘을 드러내고, 모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 회견을 공동 주최했던 부산윤석열퇴진청소년행동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는 청소년들의 광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집회의 방향은 ‘흩어지지 않는 연대로, 끝나지 않은 내란을 끝장낸다’로 정했다. 이른바 ‘남태령 대첩’이 있었고 혐오와 차별로 갈라졌던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등 차별받는 이들이 연대하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2016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누적되어 온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집회라고 보았다. 부산의 청소년들이 앞장서서 차별받는 사람들의 흩어지지 않는 연대를 모아 내고, 윤석열과 국민의힘 등이 끊임없이 이어 가고 있는 내란을 끝장내는 데에 힘을 보태는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국민의힘·윤석열 없는 다시 만난 세계로
12월 27일,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 광장에 약 100명의 시민이 모였다. 금요일임에도 학원과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지는 등 각자의 일상을 제쳐 두고 모인 청소년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남태령의 청소년이 부산의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 비상계엄 이후 달라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연 라디오, 뉴스(정세) 브리핑, 행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주목할 부분은 단언컨대 토크쇼와 선언문 발표였다.
먼저 토크쇼는 ‘남태령을 이어 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열렸는데, 1시간 20분가량의 시민대회 중 약 40분을 차지했다. 참여자들이 지루해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있었지만, 토크쇼는 매우 잘 진행됐다. 모두가 몰입하고, 함께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토크쇼가 열리는 동안 그곳은 만민공동회가 됐고, 모두 연결되어 소통했다. 특히 자유 발언은 무대 위에서 하지 않고, 마이크를 이동시켜 가며 진행했는데, 참석자들은 발언자를 바라보며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발언하고 나면 끝인 집회가 아닌, 서로가 대화하는 집회가 됐다.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으로서 ‘나 같은 사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며 거리로 나왔다는 사람. 차별과 혐오가 만들어 둔 공고한 벽으로 인해 일상 속에서 소수자들을 마주하기 어려웠지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장이 열리면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연대함으로써 희망을 가지게 됐다는 청소년 트랜스젠더.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뭣도 모르고 힘도 없는데 무턱대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이들”이라고 한 야간 자율 학습에서 탈출해서 집회에 온 청소년. 환율이 급등하고 물가가 오르는 게 걱정되지만, 차별받는 약자들과 연대하는 광장이 된 것은 너무 좋다고 말한 청소년. “적당히 일하고 공부하다가 야구장에 가서 여자든 혹은 남자든 혹은 그 둘도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애인이랑, 먹고 싶은 음식을 걱정 없이 먹고, 돈에 얽매이지 않고 여행도 해 보고 싶다”고 한 청소년. “퇴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지 않겠냐”는 물음에 “네”라고 화답한 청소년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선언문 낭독이었다. 사실 선언문이 급하게 작성되어 나는 현장에서 선언문 내용을 처음 듣게 됐는데,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 현장에서 섭외된 청소년 4명이 올라와 선언문을 낭독했는데, 그 내용이 내가 활동하게 됐던 이유, 활동하며 만났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여성과 장애인, 이주민, 노동자, 농민 그리고 청소년을 비롯하여 수많은 약자가 억압받는 사회에서 산다. 우리는 청소년이라는 약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약자를 위해 소리 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12월 3일 이후로 그럴 수 없어졌다. 혐오의 정치를 마주한 우리는 광장으로 나서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력은 사람들이 그를 외면할 때 거대해진다.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차근차근 몸집을 풀려 결국 모든 약자들의 목소리를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든다. 아무도 모르게 약자들은 죽는다. 수많은 약자들이 그렇게 죽었다. 우리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그들이 죽어 가며 말하고자 했던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보다 나은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찾아 낸 우리의 윤리이자 의무다.”
“우리는 청소년이라는 위치에 서서 우리와 같은 약자들과 대화하고 싶다. 우리는 막연한 미래가 아닌 살아 있는 현재에 관해 말하고 싶다. 겁내지 않아도 된다. 함께할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 큰 목소리를 가진다. 당신의 뒤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뒤에 당신이 있을 것이다. 그 무엇도 거스르지 못할 연대의 파도가 되어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에서 나온다. 눈 감지 않고 깨어나 서로의 손을 잡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명확하다. 민주주의가 피어난 대한민국,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대한민국, 이 광장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연대하는 우리는 말한다. 민주주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2024년 12월 27일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
선언문 낭독을 마치고 행진을 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 이후, 현장에서의 요청에 따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리고 도로에 분필로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썼다. 한 활동가는 “우리가 했던 활동 중 이렇게 재미있고 사람이 많았던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문화적으로 즐거운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청소년으로 모였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삶들을 나누고 어우러지면서, 연대의 감각을 부산이라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겪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다시 만난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 할 것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의 의의를 정리해 본다. 첫째, 청소년으로 모였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차이들이 드러나는 공간이 되었다.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의 이야기들을 되짚어 보면 ‘청소년이면서 무엇무엇인 나’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다수였다. 이를테면 트랜스젠더이면서 청소년인 나, ‘정신병러’이면서 청소년인 나 등 각자 다른 현장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공유하고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둘째, 차이가 드러나면서 더 강한 연대를 만들어 내는 경험이 됐다. 선언문에는 “우리의 연대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너와 내가 더 강한 파도가 되기 위해서”라는 문장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 집회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다르더라도,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함께하면 더 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개인들이 각각 깃발을 인쇄해서 나오는 것에 대해 개인화됐다는 등의 비평을 하고, 자신이 소수자임을 밝히고 퀴어와 페미니즘과 같은 의제에 대해 말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혐오 발언인 것을 떠나 연대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연대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함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에서 열린 청소년 시민대회의 의미가 크다. 토크쇼에서는 ‘부산 집회에서는 초반 이후 소수자들의 발언을 잘 듣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차이가 드러나면 연대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수세적인 태도로 소수자들의 말하기와 존재를 지우고자 했던 시도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목격했다.
셋째, 앞으로는 흩어지지 말자는 다짐을 나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2016년부터 2020년 사이, 박근혜 퇴진과 페미니즘 리부트 등 정세를 마주하며 모였던 우리는 흩어져 있었다. 혐오와 차별의 정치, 사람들을 경계로 구분 짓고 분할시키는 사회 속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 많은 것을 상실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로 대표되듯 인권 정책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이른바 ‘폭주하는 남성성’으로 표현되는 극우화된 대중운동에 의해, 우리의 광장과 실천은 늘상 공격받아 왔다. 각 학교에 있던 인권 동아리와 퀴어 동아리, 페미니즘 동아리 들은 사라졌다. 일상의 공간에서는 딥페이크 성폭력과 안티 페미니스트들을 마주해야 했고, 이를 막아 세울 수 있는 우리의 공동체와 공간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모인 우리들은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고 했다.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는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차별, 혐오, 불평등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평등을 가치로 삼은 조직을 꾸리는 것, 차별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현장을 구축하는 것. 더 나아가, 다시 만나게 된 우리들이 만들어 낼 공동체와 현장의 질서가 사회 전체의 질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키워 나가는 것. 이를 우리의 과제로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결코 청소년으로만 살아가지 않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확인하고, 차이를 토대로 연대를 조직하는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의 활동가들은 우리들이 다시 만난 것이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번에 광장에서 마주한 청소년들의 저항과 실천은 매우 큰 배움을 주었다. 지역에서 청소년운동이 고립되어 있다는 비관과 패배감을 떨쳐 내고,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길에.
응원봉이 만들어 낸 은하수
이준원
내가 촛불 집회에 처음 갔던 것은 아마 2024년 8월쯤일 것이다. 길을 걸어가던 중 ‘대전 촛불행동’이라는 단체에서 윤석열 탄핵 촛불 집회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학생인권조례 폐지 등 여러 이슈로 인해 윤석열을 향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던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촛불 집회에 참여하였다. 그때 집회 참여자 수는 50명도 안 되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어 좋았다.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지난 9월쯤에 ‘윤석열정권퇴진대전운동본부’(대전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도 촛불 집회를 연다고 했다. 마침 시험도 끝났겠다 나는 집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중학생이라고 말하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내가 중학생이라서 신기했던 걸까? 계속 질문들을 해 왔다. ‘어디에 사냐?’, ‘정치에 관심이 있냐?’, ‘집회를 어떻게 알고 왔냐’ 등 여러 질문을 받았다. 한 민주노총 조합원분은 ‘기특하다’며 “윤석열 탄핵”이 적힌 배지를 주었다. 나는 소속된 단체가 없어서, 나와 관련도 없는 한 정당 대오 옆에서 참석하게 되었고, 심지어 피켓까지 같이 들고 행진하였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이었다.
몇 주가 지나, 다시 대전 촛불행동에서 촛불 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촛불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진행자가 나를 알아보았다. 그분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식사도 했다. 그 일 이후 대전 촛불행동의 열혈 회원이 되어서 모임에도 참석하고 집회할 때마다 진행을 도왔다. 활동을 하다 보니, 무대에 서서 연설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대전운동본부에서 11월에 개최한 집회에서 연설하였다. 그 집회에서 내가 최연소 참가자이자 연설자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나의 첫 번째 연설을 마치고 난 뒤, 나는 평범하게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하던 중 잠깐 쉴까 하고 스마트폰을 봤는데 뉴스 앱에서 이런 알림이 와 있었다.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습관처럼 삭제하려다가 멈칫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몇 초 동안 내가 잡혀가는 상상부터 시작해서 우리 동네에 군대가 돌아다니는 상상 등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나는 재빨리 거실로 나가서 TV를 켰다. TV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브리핑 영상만 나왔다. 윤석열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하……”라는 짧은 탄식만 나왔다.
일단 SNS 계정에 긴급하게 소식을 공유했다. 그러자 나랑 안 친한 또래 친구들부터 친한 친구들까지 다들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같았다. “계엄 선포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내 인생 처음 겪는 계엄이라서 자세히 답변해 주지는 못했다. 다만 이 말은 공통적으로 해 줬다. “자기가 제2의 전두환이 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뉴스를 틀어 놓고 상황이 바뀔 때마다 SNS에 공유해 가며 상황을 지켜봤다. 결국 비상계엄 해제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새벽 2시 이후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잠꼬대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하면서 잤다고 한다. 아무튼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은 나를 보면서 걱정했다고, 내가 잡혀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도 무서웠지만 상황을 모르는 친구들은 더 무서웠겠다고 생각했다.
집회에 가고 싶었지만, 시험 기간이라서 그 다음 주까지는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 집에서 뉴스를 통해서 상황을 지켜보는데, 직접 가지 못해서 너무나도 답답했다. 나는 시험이 끝날 때만 기다렸다. 시험이 끝난 뒤로 나는 바로 대전운동본부가 연 집회에 갔다. 가서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니 그동안 시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바로 다음 날, 나는 내가 활동하는 녹색당의 사람들과 함께 깃발을 들고 집회에 갔다. 함께 활동하는 분들과 집회에 나가니 혼자 가는 것보다 좋았다. 녹색당분들과 이야기하던 중 집회 전광판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통령 윤석열 탄핵 소추안은 총 투표 수 300표 중 가 204표……” 그 소리가 나오자마자 나도, 옆에 있던 사람들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환호를 질렀다. 우리는 수고했다며 옆에 있는 사람과 포옹하고 격려의 말을 했다.
그 후 이제 대통령 탄핵 소추만이 가결되었으니, 내란 사건이 잘 수사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여러 사건이 이어졌다. 남태령 대첩을 비롯해 여러 사건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집회도 그만 가려고 생각했지만, 1월까지도 매주 토요일마다 집회에 나가서 피켓을 들었다. 나의 마음과 피켓이 서울 용산까지 가닿았는지, 결국 윤석열이 체포됐다. 이제 내란 공범들을 심판할 시간이다. 나는 그들이 심판받는 그날까지 계속 집회에 나갈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대전광역시에서 촛불 집회를 주로 하는 장소는 은하수네거리라는 곳이다. 은하수는 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별들이 모여서 은하수를 만들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도 그런 것 같다. 혼자서 목소리를 냈다면 용산, 여의도, 한남동까지 들렸을까? 우리의 응원봉이 모여 은하수를 만들어 내고, 그 은하수는 저기 먼 곳인 용산, 여의도, 한남동까지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있었던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청소년에게 ‘기특’하다고 말한 민주노총 조합원,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다면서 반말하는 어른, 계엄 당시 내 친구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안전 안내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던 정부와 지자체, 김건희가 싫다며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한 일부 발언자, 윤석열이 싫다면서 “개돼지”에 비유하는 발언을 한 일부 진행자, 상대 진영이라면서 무조건 안 좋게 본 나……. 우리 모두 이번 집회를 계기로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대통령만 바꾼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바뀌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사회가 바뀔 것이다.
다르지만 함께하는,
다시 만난 우리
- 광장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이야기
김찬
defdict@gmail.com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 활동가
이준원
junwon404har@citizen.seoul.kr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다양한 사람들
김찬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윤석열 퇴진과 처벌, 국민의힘 해체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린 광장과 달라진 집회 문화에 대해 여러 진단과 해석이 있고, 그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일단 지금은 비판보다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하는 희망은 무엇인지 말하고 싶다. 이 글은 부산에서 청소년운동에 함께하는 동료들과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해 왔던 활동을 소개하는 글이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며 느꼈던 것들과 고민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짧게 소개할 것이다.
거리에서 다시 만난 청소년들
사실 부산에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대중’과 함께 운동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실효성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된 후 반대하는 세력과 맞서야 했을 때도, 두발 검사와 일상적인 욕설·체벌에 분노하며 학생들이 저항에 나섰을 때도 학생들의 연대와 참여를 조직해 내지 못했다. 부당한 생활지도로 자살한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왔을 때도 큰 힘이 되어 드릴 수 없었다. 청소년의 권리가 무너지는 수많은 현장에서 청소년들과 손 맞잡고 싸운 경험은 드물었다.
그러다가 12월 3일 이후 집회가 열리자 우리가 그렇게 함께하고 싶었던 청소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매년 홍보 활동을 했던 사직동 학원가에서도 유인물을 나눠 주자 청소년들의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다. 특히 부산 시민대회 자유 발언 중에는 청소년, 10대, 중학생, 고등학생, 초등학생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페미니즘, 학생인권, 입시 경쟁 반대, 노동권, 퀴어 등 우리가 외쳐 온 의제들을 말하는 이들이 꽤나 많았다.
부산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막는 청소년 시국선언〉을 최선을 다해 조직하고, 부산 지역 발표 기자 회견을 별도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는 청소년 49,052명이 참여했고, 그중 부산 지역 청소년은 3,000명이 넘었다. 시국 선언 발표 부산 기자 회견 소식을 지역 참여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공지 문자를 보냈다. 참여하고 싶은 청소년들은 문자로 답장해 달라고 한 것이 실수였다. 내 휴대전화는 그날 밤 계속 울렸다. 200건이 넘는 답장이 왔고, 주로 참여하고 싶다거나 이후 활동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내용, 청소년 집회를 열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기자 회견 당일, 놀랍게도 일면식도 없던 청소년 30명이 공지를 보고 와서 현수막 뒤를 가득 채웠다. 언론사 카메라에 찍히는 것이 불편한 청소년 20여 명도 카메라 뒤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퍼포먼스에 함께했다. 간이 집회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너무 놀라웠다. 집회를 할 때도, 이렇게 사람이 모였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예전에도 박근혜 퇴진 운동, 스쿨 미투와 페미니즘 리부트 등에 동참한 청소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부산과 경남에서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청소년들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예전의 광장과 투쟁을 경험했던 청소년운동 활동가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다. 거대한 이슈로 광장이 열려서 청소년들이 나왔다 하더라도, 평소 누적되어 온 삶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기에, 그때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기자 회견 이후의 활동을 고민하면서 12월 초 광장에서 목격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퀴어와 페미니즘, 소수자의 권리는 물론, 입시 경쟁 폐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습 말이다.
거리에 나온 청소년들을 목격한 이후, 어떻게든 광장에 모인 청소년들의 힘을 드러내고, 모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 회견을 공동 주최했던 부산윤석열퇴진청소년행동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는 청소년들의 광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집회의 방향은 ‘흩어지지 않는 연대로, 끝나지 않은 내란을 끝장낸다’로 정했다. 이른바 ‘남태령 대첩’이 있었고 혐오와 차별로 갈라졌던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등 차별받는 이들이 연대하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2016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누적되어 온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집회라고 보았다. 부산의 청소년들이 앞장서서 차별받는 사람들의 흩어지지 않는 연대를 모아 내고, 윤석열과 국민의힘 등이 끊임없이 이어 가고 있는 내란을 끝장내는 데에 힘을 보태는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국민의힘·윤석열 없는 다시 만난 세계로
12월 27일,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 광장에 약 100명의 시민이 모였다. 금요일임에도 학원과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지는 등 각자의 일상을 제쳐 두고 모인 청소년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남태령의 청소년이 부산의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 비상계엄 이후 달라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연 라디오, 뉴스(정세) 브리핑, 행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주목할 부분은 단언컨대 토크쇼와 선언문 발표였다.
먼저 토크쇼는 ‘남태령을 이어 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열렸는데, 1시간 20분가량의 시민대회 중 약 40분을 차지했다. 참여자들이 지루해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있었지만, 토크쇼는 매우 잘 진행됐다. 모두가 몰입하고, 함께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토크쇼가 열리는 동안 그곳은 만민공동회가 됐고, 모두 연결되어 소통했다. 특히 자유 발언은 무대 위에서 하지 않고, 마이크를 이동시켜 가며 진행했는데, 참석자들은 발언자를 바라보며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발언하고 나면 끝인 집회가 아닌, 서로가 대화하는 집회가 됐다.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으로서 ‘나 같은 사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며 거리로 나왔다는 사람. 차별과 혐오가 만들어 둔 공고한 벽으로 인해 일상 속에서 소수자들을 마주하기 어려웠지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장이 열리면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연대함으로써 희망을 가지게 됐다는 청소년 트랜스젠더.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뭣도 모르고 힘도 없는데 무턱대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이들”이라고 한 야간 자율 학습에서 탈출해서 집회에 온 청소년. 환율이 급등하고 물가가 오르는 게 걱정되지만, 차별받는 약자들과 연대하는 광장이 된 것은 너무 좋다고 말한 청소년. “적당히 일하고 공부하다가 야구장에 가서 여자든 혹은 남자든 혹은 그 둘도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애인이랑, 먹고 싶은 음식을 걱정 없이 먹고, 돈에 얽매이지 않고 여행도 해 보고 싶다”고 한 청소년. “퇴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지 않겠냐”는 물음에 “네”라고 화답한 청소년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선언문 낭독이었다. 사실 선언문이 급하게 작성되어 나는 현장에서 선언문 내용을 처음 듣게 됐는데,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 현장에서 섭외된 청소년 4명이 올라와 선언문을 낭독했는데, 그 내용이 내가 활동하게 됐던 이유, 활동하며 만났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27일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
선언문 낭독을 마치고 행진을 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 이후, 현장에서의 요청에 따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리고 도로에 분필로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썼다. 한 활동가는 “우리가 했던 활동 중 이렇게 재미있고 사람이 많았던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문화적으로 즐거운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청소년으로 모였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삶들을 나누고 어우러지면서, 연대의 감각을 부산이라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겪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다시 만난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 할 것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의 의의를 정리해 본다. 첫째, 청소년으로 모였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차이들이 드러나는 공간이 되었다.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의 이야기들을 되짚어 보면 ‘청소년이면서 무엇무엇인 나’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다수였다. 이를테면 트랜스젠더이면서 청소년인 나, ‘정신병러’이면서 청소년인 나 등 각자 다른 현장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공유하고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둘째, 차이가 드러나면서 더 강한 연대를 만들어 내는 경험이 됐다. 선언문에는 “우리의 연대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너와 내가 더 강한 파도가 되기 위해서”라는 문장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 집회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다르더라도,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함께하면 더 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개인들이 각각 깃발을 인쇄해서 나오는 것에 대해 개인화됐다는 등의 비평을 하고, 자신이 소수자임을 밝히고 퀴어와 페미니즘과 같은 의제에 대해 말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혐오 발언인 것을 떠나 연대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연대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함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에서 열린 청소년 시민대회의 의미가 크다. 토크쇼에서는 ‘부산 집회에서는 초반 이후 소수자들의 발언을 잘 듣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차이가 드러나면 연대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수세적인 태도로 소수자들의 말하기와 존재를 지우고자 했던 시도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목격했다.
셋째, 앞으로는 흩어지지 말자는 다짐을 나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2016년부터 2020년 사이, 박근혜 퇴진과 페미니즘 리부트 등 정세를 마주하며 모였던 우리는 흩어져 있었다. 혐오와 차별의 정치, 사람들을 경계로 구분 짓고 분할시키는 사회 속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 많은 것을 상실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로 대표되듯 인권 정책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이른바 ‘폭주하는 남성성’으로 표현되는 극우화된 대중운동에 의해, 우리의 광장과 실천은 늘상 공격받아 왔다. 각 학교에 있던 인권 동아리와 퀴어 동아리, 페미니즘 동아리 들은 사라졌다. 일상의 공간에서는 딥페이크 성폭력과 안티 페미니스트들을 마주해야 했고, 이를 막아 세울 수 있는 우리의 공동체와 공간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모인 우리들은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고 했다. 부산 청소년 시민대회는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차별, 혐오, 불평등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평등을 가치로 삼은 조직을 꾸리는 것, 차별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현장을 구축하는 것. 더 나아가, 다시 만나게 된 우리들이 만들어 낼 공동체와 현장의 질서가 사회 전체의 질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키워 나가는 것. 이를 우리의 과제로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결코 청소년으로만 살아가지 않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확인하고, 차이를 토대로 연대를 조직하는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의 활동가들은 우리들이 다시 만난 것이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번에 광장에서 마주한 청소년들의 저항과 실천은 매우 큰 배움을 주었다. 지역에서 청소년운동이 고립되어 있다는 비관과 패배감을 떨쳐 내고,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길에.
응원봉이 만들어 낸 은하수
이준원
내가 촛불 집회에 처음 갔던 것은 아마 2024년 8월쯤일 것이다. 길을 걸어가던 중 ‘대전 촛불행동’이라는 단체에서 윤석열 탄핵 촛불 집회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학생인권조례 폐지 등 여러 이슈로 인해 윤석열을 향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던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촛불 집회에 참여하였다. 그때 집회 참여자 수는 50명도 안 되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어 좋았다.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지난 9월쯤에 ‘윤석열정권퇴진대전운동본부’(대전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도 촛불 집회를 연다고 했다. 마침 시험도 끝났겠다 나는 집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중학생이라고 말하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내가 중학생이라서 신기했던 걸까? 계속 질문들을 해 왔다. ‘어디에 사냐?’, ‘정치에 관심이 있냐?’, ‘집회를 어떻게 알고 왔냐’ 등 여러 질문을 받았다. 한 민주노총 조합원분은 ‘기특하다’며 “윤석열 탄핵”이 적힌 배지를 주었다. 나는 소속된 단체가 없어서, 나와 관련도 없는 한 정당 대오 옆에서 참석하게 되었고, 심지어 피켓까지 같이 들고 행진하였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이었다.
몇 주가 지나, 다시 대전 촛불행동에서 촛불 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촛불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진행자가 나를 알아보았다. 그분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식사도 했다. 그 일 이후 대전 촛불행동의 열혈 회원이 되어서 모임에도 참석하고 집회할 때마다 진행을 도왔다. 활동을 하다 보니, 무대에 서서 연설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대전운동본부에서 11월에 개최한 집회에서 연설하였다. 그 집회에서 내가 최연소 참가자이자 연설자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나의 첫 번째 연설을 마치고 난 뒤, 나는 평범하게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하던 중 잠깐 쉴까 하고 스마트폰을 봤는데 뉴스 앱에서 이런 알림이 와 있었다.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습관처럼 삭제하려다가 멈칫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몇 초 동안 내가 잡혀가는 상상부터 시작해서 우리 동네에 군대가 돌아다니는 상상 등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나는 재빨리 거실로 나가서 TV를 켰다. TV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브리핑 영상만 나왔다. 윤석열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하……”라는 짧은 탄식만 나왔다.
일단 SNS 계정에 긴급하게 소식을 공유했다. 그러자 나랑 안 친한 또래 친구들부터 친한 친구들까지 다들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같았다. “계엄 선포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내 인생 처음 겪는 계엄이라서 자세히 답변해 주지는 못했다. 다만 이 말은 공통적으로 해 줬다. “자기가 제2의 전두환이 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뉴스를 틀어 놓고 상황이 바뀔 때마다 SNS에 공유해 가며 상황을 지켜봤다. 결국 비상계엄 해제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새벽 2시 이후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잠꼬대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하면서 잤다고 한다. 아무튼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은 나를 보면서 걱정했다고, 내가 잡혀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도 무서웠지만 상황을 모르는 친구들은 더 무서웠겠다고 생각했다.
집회에 가고 싶었지만, 시험 기간이라서 그 다음 주까지는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 집에서 뉴스를 통해서 상황을 지켜보는데, 직접 가지 못해서 너무나도 답답했다. 나는 시험이 끝날 때만 기다렸다. 시험이 끝난 뒤로 나는 바로 대전운동본부가 연 집회에 갔다. 가서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니 그동안 시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바로 다음 날, 나는 내가 활동하는 녹색당의 사람들과 함께 깃발을 들고 집회에 갔다. 함께 활동하는 분들과 집회에 나가니 혼자 가는 것보다 좋았다. 녹색당분들과 이야기하던 중 집회 전광판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통령 윤석열 탄핵 소추안은 총 투표 수 300표 중 가 204표……” 그 소리가 나오자마자 나도, 옆에 있던 사람들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환호를 질렀다. 우리는 수고했다며 옆에 있는 사람과 포옹하고 격려의 말을 했다.
그 후 이제 대통령 탄핵 소추만이 가결되었으니, 내란 사건이 잘 수사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여러 사건이 이어졌다. 남태령 대첩을 비롯해 여러 사건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집회도 그만 가려고 생각했지만, 1월까지도 매주 토요일마다 집회에 나가서 피켓을 들었다. 나의 마음과 피켓이 서울 용산까지 가닿았는지, 결국 윤석열이 체포됐다. 이제 내란 공범들을 심판할 시간이다. 나는 그들이 심판받는 그날까지 계속 집회에 나갈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대전광역시에서 촛불 집회를 주로 하는 장소는 은하수네거리라는 곳이다. 은하수는 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별들이 모여서 은하수를 만들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도 그런 것 같다. 혼자서 목소리를 냈다면 용산, 여의도, 한남동까지 들렸을까? 우리의 응원봉이 모여 은하수를 만들어 내고, 그 은하수는 저기 먼 곳인 용산, 여의도, 한남동까지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있었던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청소년에게 ‘기특’하다고 말한 민주노총 조합원,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다면서 반말하는 어른, 계엄 당시 내 친구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안전 안내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던 정부와 지자체, 김건희가 싫다며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한 일부 발언자, 윤석열이 싫다면서 “개돼지”에 비유하는 발언을 한 일부 진행자, 상대 진영이라면서 무조건 안 좋게 본 나……. 우리 모두 이번 집회를 계기로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대통령만 바꾼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바뀌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사회가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