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호[연속 기획] ‘탈지방’ 부추기는 학교와 사회 (김홍규)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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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지방’ 부추기는 학교와 사회

 


김홍규

plateaux2@gmail.com

강원 중등 교사




‘서울 사랑’의 위대함?

 

2023학년도 대입에서 강원 지역 학생 10명 가운데 9명 이상이 수시 전형으로 4년제 대학에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는 최종 44명이 진학했다. 강원도교육청은 6일 이 같은 내용의 ‘2023학년도 대입 입시 결과’를 발표했다. (……) 우선 서울대 진학자는 총 44명이다. (……) 연세대는 29명, 고려대 55명, 서강대 13명, 성균관대 29명, 한양대 38명, 이화여대 41명, 포항공과대 16명 등이다. 전체 311명이 서울 주요 7개대 및 특수목적대에 진학했다.

 

지역 종합 일간지에 실린 이 기사는 강원도교육청 보도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서울대 44명 등 수도권 주요 대학 1,010명을 포함하여 수도권 소재 대학에는 총 1,657명이 등록해 15.7%의 진학률을 나타냈다.” 〈강원일보〉 기사의 토대가 된 강원도교육청 보도 자료 일부다. “서울 주요 7개대”라는 표현도 교육청 자료에 그대로 들어 있다. 교육 기관이 이런 반교육적 보도 자료를 뿌렸다고 교육청을 탓해야 할지, 그대로 받아쓴 자칭 ‘지역 대표 신문’ 기자의 교육적 무지를 탓해야 할지 난감하다.

학력을 앞세운 ‘보수 교육감’ 당선이 불러온 참사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교육 참사의 원인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교육청이 발표한 통계는 ‘강원진학지원센터’가 만들었다. 이 센터는 민병희 교육감 시절 세워졌다. 교육감이 바뀌었으니 구성원들의 마음도 바뀔 수밖에 없다고 위로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정신 승리’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현실과 거리가 멀다.

 

모든 일반고교에는 대입지원전문교사를 배치하고 고1부터 맞춤형 생활기록부 컨설팅을 진행해 주요 대학 진학률을 2배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2022년 지방 선거에서 자칭 진보 교육감 후보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강삼영의 공약을 지역 일간지가 설명한 부분이다. 그는 민병희 교육감 체제에서 대변인, 도교육청 과장 등 핵심 요직을 거쳤다. 선거 출마를 위해 사표를 내기 직전에는 최고위직 가운데 하나인 기획조정관이었다. 작년 교육감 선거에서 강삼영은 자타공인 민병희 교육감이 지지하는 후보였다.

그는 올해 ‘모두가 특별한 교육연구원’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열고 원장이 되었다. 유튜브에 개원식 영상이 공개됐다. 전 강원도 교육감과 현 전교조 강원지부장이 축사하는 장면도 담겨 있다. 하지만,

3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 대부분에서 원장 한 사람만 특별한 조명을 받고 있다. 영상을 본 후 잠깐 ‘교육감 선거가 올해 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 교육감이나 후보도 ‘인 서울’ 대학에 목을 매고 특정한 사람을 위해 단체를 만드는 행태를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문대통령 개각·참모진 교체에 강원도 출신 인사 약진”

“윤석열 정부가 10일로 출범 1주년을 맞는 가운데 행정부에 포진한 도출신 고위 공직자들이 정부혁신과 국민안전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전북 출신 김관진 전 장관,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 위원 내정”

“청와대·검찰 사정라인 경남출신 포진하나”

 

지역 종합 일간지 머리기사를 몇 개 뽑은 것이다. 서울을 향한 애틋한 짝사랑이 강원 교육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지역과 분야를 가리지 않는 ‘서울 사랑의 위대한 힘’을 새삼 느낀다.

 

‘탈지방’ 부추기는 학교와 교육

 

‘지방’에서 서울대에 합격하면 학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칭찬은 물론이고 장학금까지 받는다. 다니던 학원과 동문회를 빙자한 학교에서 현수막까지 건다. 교사들은 마치 자신이 합격한 듯 기뻐한다. 학교 사이트에 대놓고 대학별 진학자 수를 올려놓기도 하고, 졸업식 안내장에 은근슬쩍 넣어 두기도 한다. ‘진로 캠프’가 끝나면 한동안 ‘서연고서성한……’ 주문을 외우고 다니는 학생들이 생긴다.

해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학 서열화를 부추기는 퇴폐적인 문화는 심각한 차별과 상처를 만든다. 학교에서 점수가 낮은 학생을 대놓고 구박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교사들은 이제 더는 자신이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점수를 많이 받은 학생에게 장학금과 상장을 주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잘한 학생을 격려하는 ‘아름다운 풍속’이자 ‘교육’이라고 여긴다. 바뀐 가면 속에서 차별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현수막에 이름이 없거나 상을 받지 못한 다른 학생들이 받을 상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성적 낮은 학생을 밝히는 것이나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을 알리는 것이나 결국 같은 결과를 불러온다. 서열과 경쟁으로 가득 찬 학교를 공고히 하는 데 두 가지는 별로 차이가 없다. 몇몇 대학을 추앙하는 것과 ‘지방대’라고 혐오 표현을 서슴지 않는 상황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몇 년 전부터 고등학교에 교육청 장학사와 교사들이 진행하는 고교 학점제 관련 교육과정 연수와 컨설팅이 많이 늘어났다. 강사들은 공통으로 대학 입시와 교육과정 연계를 강조한다. 고교 학점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여부를 떠나 새로운 교육과정 정책을 설명하고 지원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다만, 강원도교육청 소속 공교육 기관 종사자들이 학교 교육과정을 ‘인 서울’ 대학 진학에 맞춰 구성해야 한다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거침없이 말하는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계급 재생산을 매개하는 기능 또한 수행한다. 가족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자녀의 교육 성취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사회학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 한국 사회에서 입시 전형과 관계없이 사회적 계층에 따라 엘리트 대학 입학 확률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격차가 있고 이 기저 격차가 입시 전형에 따른 차이를 압도한다.


 ‘지방’을 벗어나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떠날 가능성이 큰 학생들에게 학교와 지역 사회가 한마음으로 경제적·문화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하승우는 ‘떠남’이 ‘능력화’되고 ‘귀환’이 ‘군림’하는 ‘괴이한 현상’이라고 했다. 강준만은 ‘지방 살리기’로 포장된 ‘지방 죽이기’라고 표현했다. ‘자기 비하’와 ‘자기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떠나는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수도권 인구 집중의 최대 요인은 ‘먹고사는 문제’와 더불어 교육이다.” 비수도권 지역, 서울에서 시간 거리가 멀수록 생계를 유지할 직업을 찾기가 어렵다. ‘인 서울’ 대학 진학도 직업 찾기와 이어져 있다. “살 곳을 알아보다 문득 내가 계속 서울과 교통이 원활한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탈서울 지망생’ 기자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다.

심각한 문제는 비수도권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이들이 ‘탈지방’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철이면 ‘지방’에 돌아와 ‘군림’하는 ‘지방 출신 서울 사람들’과 ‘지방’에 살면서도 ‘지방’을 깎아내리고 혐오하는 사람들. 이들이 ‘탈지방’을 부추기고 마치 그것이 최선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열등감을 내면화하는 자기 파괴 행위를 그만 멈출 때가 됐다.

 

‘변방’과 경계, 그리고 ‘경계 나누기’의 불가능함

 

변방은 경계 지역이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며, 다른 공동체를 만나는 지역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변방을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이나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이라고 규정한다. 변방과 경계는 끝과 시작을 동시에 뜻하며, 중심 바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규정은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

 

“경계란 무엇인가” (……) 이에 대해 단순하게 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모든 장소와 시간에, 장소와 시간의 모든 단계들에 대해 타당하며,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모든 경험들 속에 동일한 방식으로 포함될 하나의 본질(essence)을 경계에 귀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프랑스-스위스나 이탈리아-스위스 경계를 “유럽 여권”을 소지하고 건너는 것과 구유고슬라비아 여권을 소지하고 건너는 것이 동일한 방식일 수는 없다.

 

나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발리바르의 주장에 공감한다. 경계는 구분을 전제한다. 사람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나누어진 경계는 지역뿐만 아니라 인종, 민족, 성별, 종교, 국가, 계급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경계 짓기’가 있었다. 경계 나누기는 언뜻 매우 쉬워 보인다. 그러나 발리바르의 말처럼 불가능하다.

“백인과 흑인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끔 하는 질문이다. 흑인과 백인을 나눌 수 있을까? 나눌 수 있다면, 기준은 무엇일까? 흑백은 색깔이다. 색깔을 기준으로 나누는 인종은 민족, 종교, 계급,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구별이 쉬운 편에 속한다. 그런데 피부의 하얀 색이 어느 정도 밝고 짙어야 백인에 속할까? 또 검은색 명도와 채도가 어느 정도일 때 흑인이 될 수 있을까?

인종과 비슷하게 국가가 정한 행정 구역을 전제한 지역 구분은 언뜻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인종의 정확한 구분이 어렵듯이 지역 나누기도 수많은 다양한 스펙트럼 때문에 생각만큼 쉽지 않다. 보호자 집이 서울인 강릉 지역 대학생은 어느 지역 사람일까? ‘지방’에 집과 사무실이 있으나 생활은 서울에서 하는 국회의원은 어느 지역 소속일까? 강남에 살면서 강원도에 있는 수십 개의 원룸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은 어디에 속할까? 서울 한복판 쪽방에서 혼자 생활하는 80대 노인은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지역을 포함해 인종, 종교, 학벌, 성별 등 정체성에 대한 경계 짓기는 기본적으로 구별 짓기를 전제로 한다. 누군가는 포함되지만, 다른 누군가는 배제될 수 있다. 차별을 생산할 가능성을 담고 있다. ‘나는 ○○ 지역 출신이다’, ‘나는 ○○대학에 다닌다’라는 선언은 실제 구분 가능성과 상관없이 ‘같은 구성원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소외시킨다. 어쩌면 경계 짓기의 모호하고 불가능한 특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낙인과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중심과 변방은 상대적 개념이다. 강릉은 수도권의 변방이지만, 영동 지역 중심부다. 서울은 한국에서 중심이지만, 뉴욕과 워싱턴의 ‘지방’이다. ‘지방 사립대 – 지방 국립대 – 서울 사립대 – 서울대 – 미국 대학’으로 이어지는 서열화도 같은 계열이다. 중심과 변방을 포함한 모든 인위적 서열화는 수많은 또 다른 구분과 줄 세우기를 낳는다. 차이를 무시한 보편적 기준의 적용은 차별을 만든다.

 

‘서울’ 중심의 중앙 집권적 ‘보편화’와 민주주의

 

수도의 중심성, 그것은 (……) 왕으로의 권력의 통합의 상징이었다. 수도로의 중심화를 통해 각각의 이질적인 지역들을 동질적인 전국적 단일 영토로 통합하여 동질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 중앙은 지방적인 차이들을 ‘편차’로서 재는 척도가 되고, 지방적 차이들을 통합하는 ‘보편성’의 위치를 갖게 되며, (……) ‘보편성’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권력임을, 자신에 동일화되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음을 과시하며 그와 다른 길을, 외부를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권력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각종 교육과 경제 정책은 수도권과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결정된다. 성적이 높은 학생들 중심으로 설계된 고교 학점제, 수능을 강조하는 입시 제도가 대표적 사례이다. 최근 물가 안정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이자율을 올림으로써 대다수 경제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선택을 한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지역 차이나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불공정’이나 ‘역차별’이라는 단어로 매도당한다.

중앙 집권적 ‘보편성’ 강조는 차이를 무시한다.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며 중심 척도에서 벗어날수록 배제되거나 소외당한다.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낡고 오래된 사유는 ‘서울’과 ‘지방’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불모의 땅, (……) 변방, 소수자들이나 이주민 같은 아웃사이더들, 살아가기에 충분한 몫을 할당받지 못한 자들이 자본에 밀리고 생활비에 밀려 모여드는 땅.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나 ‘슬럼(slum)’을 떠올리게 하는 정의 역시 수도권에 사는 이들의 사고다. 모든 변방이 밀려난 사람들의 삶터는 아니다. ‘외부’, 경계나 경계 밖을 통해 지역을 사고하자는 이진경의 주장은 수도권 중심의 중앙 집권적 사유에 대항하는 데는 하나의 좋은 시사점을 준다. 하지만 밀려남에만 집중하는 이러한 접근은 현실 설명에 한계가 있다. ‘지방’을 “‘힐링’, ‘관광지’, ‘일상으로부터 도피’, ‘머무르다 오는 곳’ (……) 고향이라는 과거형으로 불리는 지역”이라는 상상 속 공간으로 취급하는 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서울에 소재한다는 이유가 최대 경쟁력 요인임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 연·고대 중 한 대학이 강원도 동해로 이전한다고 가정해 봐도 좋겠다. 두 라이벌 대학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아마 곧 ‘연·고대’라는 말이 사라지고 서울에 있는 어느 한 대학의 압도적 우위가 나타날 게 틀림없다.

 

강준만은 우리나라 수도권 집중 현상의 ‘논리 없음’을 위와 같은 사고 실험으로 쉽게 설명했다. 그는 카스텔의 ‘종속적 도시화’ 개념을 가져와 ‘내부 식민지’라는 자극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표현도 사용했다.

‘중앙 집권화’, ‘식민지’, ‘차이 무시’ 등은 민주주의와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들이다. 경쟁과 불평등을 전제하는 동시에 재생산한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전제하지 않고는 그 어떤 ‘수사(rhetoric)’를 끌어오더라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다른 문을 열고 (……) 어제랑 또 다른” 오늘과 내일을 만들 수 있을까? 기존 주류 운동 방식으로는 쉽지 않다. 하승수는 2007년 이미 시민운동이 이슈와 성과 중심에 빠져 있으며 일부 ‘전문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는 경쟁과 효율을 앞세워 대다수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대항하는 시민운동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 여러 조직, 특히 지역 단체들은 그동안 과연 얼마나 변했을까?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줄곧 그 지역에 살아도 자연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울에 가지 않아도 공부하고 취직하는 데 별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다. 청소년기에 대도시로 가지 않으면 왠지 낙오되는 기분 따윈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궤도를 벗어나 (……) 새로운 길의 탐험”㉕을 시작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토론 주제 정도로 ‘지역에 남을 사람들을 위한 존중’, ‘경계인의 연대’, ‘민주적 운동과 차이 존중’ 세 가지를 간단하게 던져 본다. 한국 사회 전체를 바꿔야 하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발은 해 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첫째, ‘지방’에 남아 있는 사람, 특히 앞으로 ‘지방’에 남게 될 사람들을 존중하는 문화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인 서울’을 하는 사람은 현실적으로도 많지 않다. 대다수 ‘지방’ 출신 학생들은 자신이 살았던 곳에 남거나 또 다른 비수도권 지역에 살게 된다.

이 대다수 미래 ‘지방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당하지 않으며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도록 학교교육에서부터 지역 차별적인 공식적·비공식적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 특히 교사를 포함한 공교육 기관 종사자들부터 자신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도록 학생들을 몰아내는 행태를 그만둬야 한다.

둘째, ‘경계인’의 가능성을 조금 더 깊게 살피고 경계인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경계선에 있거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경계선 밖에 있는 존재는 감응 능력과 민감성이 뛰어나다. 경계인이나 주변인은 대체로 인권 감수성이 높다. ‘경계 짓기’의 피해자,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못하는) 경계인은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할 수 있다. 경계인은 가로지르기가 가능하다. 마르크스도 경계에 있는, 또는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다. 영국에 망명한 독일인, 독일에서 쫓겨나 영토상으로 영국 안에 있었지만, 법적 신분과 상관없이 영국과 독일의 경계에서 살았다.

남성 중심 사회 밖에서 사는 여성,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 사는 퀴어, 유령처럼 생활하는 이주 노동자와 자녀들, 서울 중심 세상에서 사는 비서울 사람,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 등. 이들은 상대적으로 세상과 삶을 예민하게 살필 수 있으며, 억압적 제도와 문화의 경계 밖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연대가 지역 차별과 혐오 문제를 해결할 힘이 될 수 있다.

셋째, 민주적 운동과 차이 존중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위계 없는 조직’, ‘중앙 집권화 되지 않은 제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근대 정치의 진부함 (……) 은 누군가는 이끌어야 하고 다른 이들은 따라야만 한다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전술과 전략의 책임이 그 둘 사이에서 나눠진다는 데 있다. (……) 우리를 지배하는 제도가 아니라 (……) 우리의 실천을 조직하고 (……) 함께 의사 결정을 내리도록 조력하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민주주의, 의사 결정 방식의 근본적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방향을 선택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은 다수가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대표들이 그에 맞는 전술과 방법을 만드는 것이 민주적 방식에 가깝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대표를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중앙 집권적 권력 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부터 실천할 필요가 있다.

서울 중심 ‘왕국’은 중앙 집권적 통치의 부스러기다. 민주주의 사회에 왕국의 찌꺼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평등에 대한 전제와 차이 존중이 민주주의를 만드는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출발은 항상 쉬우면서도 어렵다.

 

“모두가 천재입니다. 하지만 나무에 오르는 능력으로 물고기를 판단한다면, 물고기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교육과 연결된 지역 문제를 바라볼 때도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학교와 사회 구성원들이 잘 새길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지역 ‘사이’를 포함한 다양한 차이를 존중하는 일이며,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정이다.

 

 



❶ “강원지역 올해 44명 서울대 진학…의학계열은 75명”, 〈강원일보〉, 2023년 3월 6일.

❷ 〈[보도 자료] 2023학년도 도내 재학생 대입 등록 결과 발표〉, 강원도교육청, 2023년 3월 6일.

❸ “[기획] 슬기로운 공약탐구 - 도교육감 (1) 학력향상”, 〈강원일보〉, 2022년 5월 25일.

❹ https://www.youtube.com/watch?v=EfkW1EjVVeE

❺ “문대통령 개각·참모진 교체에 강원도 출신 인사 약진”, 〈강원일보〉, 2021년 4월 16일.

❻ “[윤석열 정부 출범 1년과 강원도] 2. 윤정부 도출신 주요공직자”, 〈강원도민일보〉, 2023년 5월 9일.

❼ “전북출신 김관진 전 장관,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 위원 내정”, 〈전북일보〉, 2023년 5월 10일.

❽ “청와대·검찰 사정라인 경남출신 포진하나”, 〈경남일보〉, 2019년 7월 25일.

❾ “학교 홈페이지에 대학 합격자 현황 공개, 이래도 되나요?”, 〈오마이뉴스〉, 2022년 12월 7일.

❿ ‘서연고서성한…’은 서울 지역 대학교 이름의 첫 글자들이다. 앞서 옮긴 올해 3월 6일 강원도교육청 보도 자료에서 말한 ‘주요 7개 대학’은 여기에 ‘여자 대학’ 한 곳을 추가한 것이다.

⓫ 김창환·심희연(2020), 〈입시 제도에서 나타나는 적응의 법칙과 엘리트 대학 진학의 공정성〉, 《한국사회학》, 54(3), 36쪽, 72쪽.

⓬ 하승우(2023), 〈지방은 어떻게 무능력한 공간이 되었을까〉, 《오늘의 교육》, 72호(2023년 1·2월호), 교육공동체 벗, 125쪽.

⓭ 강준만(2015),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인물과사상사, 169~170쪽.

⓮ 강준만(2008), 《지방은 식민지다》, 개마고원, 97쪽.

⓯ 김미향(2022), 《탈서울 지망생입니다》, 한겨레출판, 100쪽.

⓰ 에티엔 발리바르(2007), 최원·서관모 옮김, 《대중들의 공포 –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 도서출판b, 445~446쪽.

⓱ 이진경(2010), 〈지방성 사유의 세 가지 모델 – 지방성의 사유에서 외부성의 벡터에 관하여〉, 《로컬리티 인문학》, 4, 51쪽, 53쪽, 55쪽.

⓲ 이진경(2010), 앞의 글, 68쪽.

⓳ 주재원(2020), 〈만들어진 지역성 – 상상된 고향과 내부 오리엔텔리즘〉, 《한국방송학보》, 34(5), 214쪽.

⓴ 강준만(2008), 앞의 책, 97쪽, 115쪽.

㉑ 강준만(2008), 앞의 책, 58쪽.

㉒ IVE(2023), 〈I AM〉, 《I've IVE》.

㉓ 하승수(2007),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19~221쪽, 264~265쪽.

㉔ 김미향(2022), 앞의 책, 309쪽.

㉕ 윤하(2022), 〈오르트구름〉, 《END THEROY》

㉖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2020), 《어셈블리》, 알렙, 62쪽,99쪽.

㉗ 처음처음 누가 이 말을 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가 한 말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Chat GPT 대답을 포함한 몇몇 자료에는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는 관련 자료가 검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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