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럼에도 학교로 돌아온 별난 사람들

이윤승 외 씀, 《별별 교사들》, 교육공동체 벗, 2023
최현진
hyun10099@naver.com
부산 중등 교사
나는 수박을 좋아한다. 여름이 가기 전에 맛있는 수박을 많이 먹으려 애쓴다. 수박은 큰 것이 좋은데, 커다란 수박을 잘게 잘라 네모난 통에 담는다. 통에 든 수박은 틈나는 대로 꺼내어 먹는다. 나는 선풍기 바람 아래 수박을 베어 먹으며 《별별 교사들》을 읽었다. 《별별 교사들》은 지금의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인데도 내 어린 시절의 학교가 계속 생각났다.
그때는 삐죽빼죽한 사람들을 잘게 잘라 네모난 통에 담는 그런 때였다. 학교에는 긴 막대를 들고 다니지 않는 선생님이 드물었다. 선생님이 머리에 땅콩을 내리는 것은 애정 표현이었고, 선생님이 긴 막대를 휘두르는 것은 교육이던 시절이었다. 수업을 시작하면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선생님에게 인사하였다. 선생님의 수업 자료는 교과서뿐이었고, 선생님의 글씨와 목소리를 따라 우리의 펜도 같이 움직였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대개 ‘야’나 ‘너’였고, 이름을 불리는 아이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 쪽에 속했다. 학교 안팎으로 야생의 시기라고 불리던 때였다.
나는 참 통에 담기지 않는 아이였다. 복장이 불량하고 산만한 아이,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맥을 끊는 아이, 중학교 3년 내리 반장을 하였지만 매번 선생님들께 밉살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지적을 듣는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 차에는 반장이라 더 미움을 받나 싶어 반장이 되기 싫다고 선거 날 투표 직전에 학급의 학생들 앞에서 울며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반장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성적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반장이 될 수 없었던 고등학교에 가서도 선생님 집단과 나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통에 넣으려는 시도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진학 상담 자리에 앉자마자 ‘네가 어느 대학에 갈지, 어떤 인생을 살지 뻔히 보이니 그만 나가라’ 하였다. (교사가 될 줄 아셨던 것이지요?) 3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1년 내내 한 번도 상담을 해 주지 않아 대입 원서를 쓰는 날 처음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보았다. 그 무관심이 차라리 나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나를 잘게 쪼개어 통에 담으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학교처럼 강렬히 계속해서 나를 짓누르는 공간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나를 통에 넣으려는 시도는 거의 없어졌지만 옆자리 사람이 공동체의 성원을 통에 넣으려 하는 것을 목격하는 목격자, 혹은 내가 직접 통에 밀어 넣어야 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위치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학생일 때는 통에 넣지 말라고 함께 저항하는 친구가 한둘은 있었는데, 학교가 직장이 되고 나니 “왜 오늘이 월요일이지?” 하는 사람처럼 나의 저항은 공허하게 보였다. 교사는 참 외로운 자리였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이유
《별별 교사들》이 좋았던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선생님이 그런 때의 학교를 견디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학교는 학생의 모범적인 원형을 그려 놓고 아이들이 그 원형과 얼마나 닮았는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하며 깎아내린다. 깎아내리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아우성치는 아이에게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다, 너만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버리고 학교에 맞추든가 학교를 떠나라고 말한다. 교무실에 있으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같은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른다. 아이들과 교사들 대부분 그 말에 순응해 버리기 마련인데 《별별 교사들》에 소개된 아홉 선생님들은 자신을 버리지도, 학교를 포기하지도 않고 버티어 선 강한 사람들이다. 왜 이들은 이러한 폭력과 홀대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돌아왔을까?
만약 열여덟 살의 이윤승에게 지금의 통제와 규칙들, 폭력을 참으라고만 하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교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스무 살의 이윤승은 학교를 졸업하고 시를 쓰거나 영화를 배우러 대학에 가지 않았을까. 자퇴해서 좋았던 것들을 자퇴하기 전에 느낄 수 있었다면, 학교가 그런 곳이라면, 학교에 나를 위한 교사들이 있었다면.
- 본문 27쪽 (〈너의 삶은 꼭 누군가와 닮지 않아도 된다고〉, 이윤승)
대한민국의 학교를 장애인 차별 없는 평등한 곳으로 만드는 것. 동료들이 장애 감수성을 키우고 학교가 더 장애인 친화적으로 바뀐다면 그곳은 비단 교사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들에게도 모두 평등한 공간이 되지 않겠는가? 한때 이방인이었던 장애인 교사들은 이제 학교의 중심을 향하여 그렇게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 본문 78쪽 (〈교무실의 이방인〉, 김헌용)
나는 복수하려고 한다. 복수는 단일하지 않다. 교사로서 학생으로서 그리고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하는 복수이자 싸움이다. 학교가 슬프고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제도라는 것에 대한 인정과 사과, 그리고 변화를 받아 내고 싶다.
- 본문 245쪽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복수’를 도모하다〉, 진냥)
나는 ‘네 등에 지금 뭔가 붙었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걸 떼어 낼지 말지는 그 애가 선택하겠지만, ‘나도 등 뒤에 뭐가 붙어 있걸랑’ 하면서 웃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 본문 132쪽 ( 〈나는 서른 살의 ADHD〉, 애리)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학교폭력을 당했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은커녕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행했던 그 선생님이 동은으로부터 사적 복수를 당했을 때, 당해도 싸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창 〈더 글로리〉가 인기를 끌 때는 ‘나도 저런 담임이, 저런 선생이 있었는데’ 하는 글들이 온라인에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은 동은이 학교폭력 가해자의 딸네 담임이 되어도 그 딸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라고, 위해를 가하지 않아 안도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고 적음을 떠나 모두가 학교에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이 가지는 가치에 조금은 기대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그래야 해,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해’라는 믿음에 기대어 돌아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른 학교를 만들려는 노력
《별별 교사들》의 저자 중 한 명인 유랑은 혐오를 드러내는 학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아이였다. 정상성의 범주에 들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행복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유랑은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했다. 유랑은 자신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형태의 학교에 학생들을 초청하는 교사가 되었다.
그의 커밍아웃은 비청소년 성소수자 당사자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에게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청소년기의 일시적인 혼란으로 단정 짓지 못하게 만드는 방파제가 되었다. 유랑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라는 공간에 차별과 혐오를 걷어 내고 환대로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성별 이분법으로 구획된 기존의 성교육 대신에 다양성을 고려하는 포괄적 성교육의 방식을 고민했고, 젠더 퀴어의 생존권을 위해 학교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했다. 유랑은 우리 사회에 철저히 타자화되어 다루어지는 성소수자를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끌어왔다. 교육공동체 구성원에게 함께 살기 위해 혐오와 차별 대신에 무엇으로 평등과 환대를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할 기회를 주었다.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께선 수업 시간에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와 내 또래는 군부 독재 시대의 방식으로만 배웠다. 그런데 나는 지금 너희를 민주 시민으로 키워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 미안하게 됐다.” 선생님은 한 번의 사과로는 부족했는지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고, 함께 고민할 거리를 던졌다. 연극 대본을 가져와 나 같은 아웃사이더에게 소리 지를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선생님 자신은 폭력의 방식으로 배웠지만, 우리를 폭력의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학교를 만들고, 평등한 배움에 초청하는 교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나는 유랑의 글을 읽으면서 이 선생님의 교직 생활은 참 어려웠겠다 싶었다. 그가 속했던 학교 내 성소수자 당사자 모임 ‘짱돌’은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이 모임이 많은 것들을 부수기 위해 애썼는지 보여 준다. 유랑만이 아니다. 선형적인 분포를 벗어나는, 이상한 교사로 불린다고 자조했던 이윤승, 교직 사회의 경계인으로 살아간다고 느끼는 진냥처럼 《별별 교사들》 속 선생님들, 혹은 이 글을 읽는 선생님 여러분도 여전히 냉랭한 학교에 홀로 자신만의 답을 써야만 한다.
표백된 학교는 과연 좋은 곳인가
나는 유랑이나 다른 《별별 교사들》 속 선생님들처럼, 혹은 나의 국어 선생님처럼 온전한 형태의 정답을 구현해 내지는 못한다. 여전히 야생의 시대에 내가 경험한 것처럼 아이들을 대하고 있기도 하다. 속으로 ‘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서 방법을 모르겠네요’ 변명하기도 한다. 학교 안에서 혐오와 폭력을 목격할 때 그것을 바로 막아서는 것은 아직도 두렵고, 수업에서 인권과 차별을 다룰 때 얼마나 어렵고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혐오 표현을 쏟아 내는 학생 앞에서 엄하게 막아서는 것이 좋은지, 논리와 근거로 난장을 펼치는 것이 좋은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학교로 돌아온 데에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야생의 시기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다를 줄 알았던 거다. 폭력이 만연하고 각자의 다양성을 잘라 네모난 통에 담던 시대가 지나갔을 줄 알았다. 들에 꽃이 피고 호랑이와 토끼가 같이 낮잠을 자는 평화로운 때가 올 줄 알았다. 든든한 동료 교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을 논의할 줄 알았다. 나는 야생의 시기를 겪지 않은, 마치 현자처럼 그곳을 부유하는 교사일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네모난 통이 더 작아지고, 폭력은 더 첨예해진, 그야말로 광야였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부촌으로 알려진 곳에 있는 중학교이다. 보호자가 의사, 변호사와 같이 전문직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직업은 명함이 되고, 부모의 소득은 자랑이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아이가 백화점의 고급 매장에서 살 수 있는 티셔츠와 신발, 가방으로 교복 사이에 슬쩍 멋을 내고, 직장인도 돈을 모아 겨우 갈 법한 호텔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SNS 프로필로 내건다. 교과 내용 가운데 해외의 사례를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곳에 가 봤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한 아이가 수업을 마친 후 부끄러워하며 ‘저는 아직 해외여행을 3번밖에 하지 못했어요’라고 숨기며 말하기도 하였다.
담임으로 있었던 학급에 한부모 가정이 아예 없던 때도 있었고, 수업 참관을 하는 날이면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함께 방문하는 가정도 많았다. 아이들 대부분 유치원 때부터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고 같은 중학교를 지나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소문과 평판에 민감했다. 생경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부임 후 한동안은 이 학교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씨줄과 날줄로 명징하게 직조된 성채로 보였다. 사람들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꼈을 불쾌감과 놀라움을 나는 이 학교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이 희한한 공간에 참여적 관찰자가 된 지도 3년이 되었다. 놀라움은 점차 익숙함이 되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군, 여기에 온 게 내 운명이니 할 때쯤 옆자리 선생님이 사적인 자리에서 “난 이 학교가 참 좋아요.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의 부유한 가정 환경이 서로 비슷해서 아이들이 독특하지 않고 안정적이라고 했다. 학교가 안전해서 좋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반골 기질을 숨기고 점잖은 체하며 지냈는데, 그 말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표백한 이 학교의 무엇이 좋냐고 되물었다. 사회적 약자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소수성은 숨겨야 하는 이 박제된 공간이 왜 좋냐고 따졌다.
오늘의 학교는 학생이 지닌 고유한 성질을 하나의 색깔로 뒤덮어 아이들을 체로 거르면서,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강요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에게 옆 사람이 넘어지고 다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 넘어지고 다친 사람이 내 곁의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그들의 삶을, 그들이 넘어지고 다치게 된 상황과 환경을 공감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을까.
나는 이 학교를 틈나는 대로 깨부수고 해부해 보려고 애썼다. 아이들과 표백되지 않은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탐구해 보고 싶어 궁리했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옆자리 동료 선생님은 이 표백된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야생의 시기를 견디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데에는 학교는 더 나은 공간이어야 한다는 다짐, 앞으로의 학교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그 냉대와 폭력을 이 아이들은 경험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료 교사들, 동료 시민들과 더 나은 방향을 두고서 토론하게 될 줄은 알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다툴 줄은 몰랐다.
물론 학교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타자를 실격당한 자로 낙인찍어 분류하고, 낯선 것은 박제하여 구분 짓는 과정으로 학교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혐오와 폭력을 단상 아래 감춘다고 안전해지지 않는다. 정말로 학교가 안전한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공동체의 성원으로 서로를 초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모두가 지닌 보편성에 기대어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학생과 학생 사이, 학생과 교사 사이에 폭력은 사라지고, 누군가가 넘어질 수 있는 환경은 누구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연대하여야 한다. 학교는 혐오와 폭력에 맞서 싸울 힘을 키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2014년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 청소년 가운데 80%가 교사로부터 성소수자 혐오 표현을 들었다고 응답했다. 우리가 박제된 학교를 안전하다고 방심한 사이 학교는 아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이, 교사는 가장 차가운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표백된 학교를 좋다고 하는 옆자리 선생님을 나무라 놓고, 나도 수박을 자르듯이 아이들의 모습을 자르고 통에 담아 왔는지도 모른다. 《별별 교사들》의 온화하고 별난 선생님들의 열정을 담은 목소리를 듣자 나는 나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야생의 시기를 견디고 표백된 지금의 학교에 돌아온 내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교사인지 자신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사실 수박은 미리 잘라 놓으면 그 맛을 즐길 수 없다. 단물이 다 빠져 마지막에는 퍼석한 부분만 남게 된다. 수박은 먹어야 하는 그 순간에 쪼개어 각자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커다란 수박을 잘게 잘라 네모난 통에 담으면, 통에 담긴 수박이 될 뿐이다.
리뷰
그럼에도 학교로 돌아온 별난 사람들
이윤승 외 씀, 《별별 교사들》, 교육공동체 벗, 2023
최현진
hyun10099@naver.com
부산 중등 교사
나는 수박을 좋아한다. 여름이 가기 전에 맛있는 수박을 많이 먹으려 애쓴다. 수박은 큰 것이 좋은데, 커다란 수박을 잘게 잘라 네모난 통에 담는다. 통에 든 수박은 틈나는 대로 꺼내어 먹는다. 나는 선풍기 바람 아래 수박을 베어 먹으며 《별별 교사들》을 읽었다. 《별별 교사들》은 지금의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인데도 내 어린 시절의 학교가 계속 생각났다.
그때는 삐죽빼죽한 사람들을 잘게 잘라 네모난 통에 담는 그런 때였다. 학교에는 긴 막대를 들고 다니지 않는 선생님이 드물었다. 선생님이 머리에 땅콩을 내리는 것은 애정 표현이었고, 선생님이 긴 막대를 휘두르는 것은 교육이던 시절이었다. 수업을 시작하면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선생님에게 인사하였다. 선생님의 수업 자료는 교과서뿐이었고, 선생님의 글씨와 목소리를 따라 우리의 펜도 같이 움직였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대개 ‘야’나 ‘너’였고, 이름을 불리는 아이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 쪽에 속했다. 학교 안팎으로 야생의 시기라고 불리던 때였다.
나는 참 통에 담기지 않는 아이였다. 복장이 불량하고 산만한 아이,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맥을 끊는 아이, 중학교 3년 내리 반장을 하였지만 매번 선생님들께 밉살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지적을 듣는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 차에는 반장이라 더 미움을 받나 싶어 반장이 되기 싫다고 선거 날 투표 직전에 학급의 학생들 앞에서 울며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반장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성적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반장이 될 수 없었던 고등학교에 가서도 선생님 집단과 나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통에 넣으려는 시도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진학 상담 자리에 앉자마자 ‘네가 어느 대학에 갈지, 어떤 인생을 살지 뻔히 보이니 그만 나가라’ 하였다. (교사가 될 줄 아셨던 것이지요?) 3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1년 내내 한 번도 상담을 해 주지 않아 대입 원서를 쓰는 날 처음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보았다. 그 무관심이 차라리 나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나를 잘게 쪼개어 통에 담으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학교처럼 강렬히 계속해서 나를 짓누르는 공간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나를 통에 넣으려는 시도는 거의 없어졌지만 옆자리 사람이 공동체의 성원을 통에 넣으려 하는 것을 목격하는 목격자, 혹은 내가 직접 통에 밀어 넣어야 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위치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학생일 때는 통에 넣지 말라고 함께 저항하는 친구가 한둘은 있었는데, 학교가 직장이 되고 나니 “왜 오늘이 월요일이지?” 하는 사람처럼 나의 저항은 공허하게 보였다. 교사는 참 외로운 자리였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이유
《별별 교사들》이 좋았던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선생님이 그런 때의 학교를 견디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학교는 학생의 모범적인 원형을 그려 놓고 아이들이 그 원형과 얼마나 닮았는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하며 깎아내린다. 깎아내리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아우성치는 아이에게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다, 너만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버리고 학교에 맞추든가 학교를 떠나라고 말한다. 교무실에 있으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같은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른다. 아이들과 교사들 대부분 그 말에 순응해 버리기 마련인데 《별별 교사들》에 소개된 아홉 선생님들은 자신을 버리지도, 학교를 포기하지도 않고 버티어 선 강한 사람들이다. 왜 이들은 이러한 폭력과 홀대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돌아왔을까?
만약 열여덟 살의 이윤승에게 지금의 통제와 규칙들, 폭력을 참으라고만 하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교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스무 살의 이윤승은 학교를 졸업하고 시를 쓰거나 영화를 배우러 대학에 가지 않았을까. 자퇴해서 좋았던 것들을 자퇴하기 전에 느낄 수 있었다면, 학교가 그런 곳이라면, 학교에 나를 위한 교사들이 있었다면.
- 본문 27쪽 (〈너의 삶은 꼭 누군가와 닮지 않아도 된다고〉, 이윤승)
대한민국의 학교를 장애인 차별 없는 평등한 곳으로 만드는 것. 동료들이 장애 감수성을 키우고 학교가 더 장애인 친화적으로 바뀐다면 그곳은 비단 교사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들에게도 모두 평등한 공간이 되지 않겠는가? 한때 이방인이었던 장애인 교사들은 이제 학교의 중심을 향하여 그렇게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 본문 78쪽 (〈교무실의 이방인〉, 김헌용)
나는 복수하려고 한다. 복수는 단일하지 않다. 교사로서 학생으로서 그리고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하는 복수이자 싸움이다. 학교가 슬프고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제도라는 것에 대한 인정과 사과, 그리고 변화를 받아 내고 싶다.
- 본문 245쪽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복수’를 도모하다〉, 진냥)
나는 ‘네 등에 지금 뭔가 붙었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걸 떼어 낼지 말지는 그 애가 선택하겠지만, ‘나도 등 뒤에 뭐가 붙어 있걸랑’ 하면서 웃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 본문 132쪽 ( 〈나는 서른 살의 ADHD〉, 애리)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학교폭력을 당했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은커녕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행했던 그 선생님이 동은으로부터 사적 복수를 당했을 때, 당해도 싸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창 〈더 글로리〉가 인기를 끌 때는 ‘나도 저런 담임이, 저런 선생이 있었는데’ 하는 글들이 온라인에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은 동은이 학교폭력 가해자의 딸네 담임이 되어도 그 딸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라고, 위해를 가하지 않아 안도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고 적음을 떠나 모두가 학교에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이 가지는 가치에 조금은 기대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그래야 해,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해’라는 믿음에 기대어 돌아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른 학교를 만들려는 노력
《별별 교사들》의 저자 중 한 명인 유랑은 혐오를 드러내는 학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아이였다. 정상성의 범주에 들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행복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유랑은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했다. 유랑은 자신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형태의 학교에 학생들을 초청하는 교사가 되었다.
그의 커밍아웃은 비청소년 성소수자 당사자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에게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청소년기의 일시적인 혼란으로 단정 짓지 못하게 만드는 방파제가 되었다. 유랑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라는 공간에 차별과 혐오를 걷어 내고 환대로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성별 이분법으로 구획된 기존의 성교육 대신에 다양성을 고려하는 포괄적 성교육의 방식을 고민했고, 젠더 퀴어의 생존권을 위해 학교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했다. 유랑은 우리 사회에 철저히 타자화되어 다루어지는 성소수자를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끌어왔다. 교육공동체 구성원에게 함께 살기 위해 혐오와 차별 대신에 무엇으로 평등과 환대를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할 기회를 주었다.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께선 수업 시간에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와 내 또래는 군부 독재 시대의 방식으로만 배웠다. 그런데 나는 지금 너희를 민주 시민으로 키워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 미안하게 됐다.” 선생님은 한 번의 사과로는 부족했는지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고, 함께 고민할 거리를 던졌다. 연극 대본을 가져와 나 같은 아웃사이더에게 소리 지를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선생님 자신은 폭력의 방식으로 배웠지만, 우리를 폭력의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학교를 만들고, 평등한 배움에 초청하는 교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나는 유랑의 글을 읽으면서 이 선생님의 교직 생활은 참 어려웠겠다 싶었다. 그가 속했던 학교 내 성소수자 당사자 모임 ‘짱돌’은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이 모임이 많은 것들을 부수기 위해 애썼는지 보여 준다. 유랑만이 아니다. 선형적인 분포를 벗어나는, 이상한 교사로 불린다고 자조했던 이윤승, 교직 사회의 경계인으로 살아간다고 느끼는 진냥처럼 《별별 교사들》 속 선생님들, 혹은 이 글을 읽는 선생님 여러분도 여전히 냉랭한 학교에 홀로 자신만의 답을 써야만 한다.
표백된 학교는 과연 좋은 곳인가
나는 유랑이나 다른 《별별 교사들》 속 선생님들처럼, 혹은 나의 국어 선생님처럼 온전한 형태의 정답을 구현해 내지는 못한다. 여전히 야생의 시대에 내가 경험한 것처럼 아이들을 대하고 있기도 하다. 속으로 ‘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서 방법을 모르겠네요’ 변명하기도 한다. 학교 안에서 혐오와 폭력을 목격할 때 그것을 바로 막아서는 것은 아직도 두렵고, 수업에서 인권과 차별을 다룰 때 얼마나 어렵고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혐오 표현을 쏟아 내는 학생 앞에서 엄하게 막아서는 것이 좋은지, 논리와 근거로 난장을 펼치는 것이 좋은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학교로 돌아온 데에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야생의 시기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다를 줄 알았던 거다. 폭력이 만연하고 각자의 다양성을 잘라 네모난 통에 담던 시대가 지나갔을 줄 알았다. 들에 꽃이 피고 호랑이와 토끼가 같이 낮잠을 자는 평화로운 때가 올 줄 알았다. 든든한 동료 교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을 논의할 줄 알았다. 나는 야생의 시기를 겪지 않은, 마치 현자처럼 그곳을 부유하는 교사일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네모난 통이 더 작아지고, 폭력은 더 첨예해진, 그야말로 광야였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부촌으로 알려진 곳에 있는 중학교이다. 보호자가 의사, 변호사와 같이 전문직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직업은 명함이 되고, 부모의 소득은 자랑이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아이가 백화점의 고급 매장에서 살 수 있는 티셔츠와 신발, 가방으로 교복 사이에 슬쩍 멋을 내고, 직장인도 돈을 모아 겨우 갈 법한 호텔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SNS 프로필로 내건다. 교과 내용 가운데 해외의 사례를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곳에 가 봤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한 아이가 수업을 마친 후 부끄러워하며 ‘저는 아직 해외여행을 3번밖에 하지 못했어요’라고 숨기며 말하기도 하였다.
담임으로 있었던 학급에 한부모 가정이 아예 없던 때도 있었고, 수업 참관을 하는 날이면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함께 방문하는 가정도 많았다. 아이들 대부분 유치원 때부터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고 같은 중학교를 지나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소문과 평판에 민감했다. 생경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부임 후 한동안은 이 학교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씨줄과 날줄로 명징하게 직조된 성채로 보였다. 사람들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꼈을 불쾌감과 놀라움을 나는 이 학교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이 희한한 공간에 참여적 관찰자가 된 지도 3년이 되었다. 놀라움은 점차 익숙함이 되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군, 여기에 온 게 내 운명이니 할 때쯤 옆자리 선생님이 사적인 자리에서 “난 이 학교가 참 좋아요.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의 부유한 가정 환경이 서로 비슷해서 아이들이 독특하지 않고 안정적이라고 했다. 학교가 안전해서 좋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반골 기질을 숨기고 점잖은 체하며 지냈는데, 그 말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표백한 이 학교의 무엇이 좋냐고 되물었다. 사회적 약자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소수성은 숨겨야 하는 이 박제된 공간이 왜 좋냐고 따졌다.
오늘의 학교는 학생이 지닌 고유한 성질을 하나의 색깔로 뒤덮어 아이들을 체로 거르면서,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강요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에게 옆 사람이 넘어지고 다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 넘어지고 다친 사람이 내 곁의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그들의 삶을, 그들이 넘어지고 다치게 된 상황과 환경을 공감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을까.
나는 이 학교를 틈나는 대로 깨부수고 해부해 보려고 애썼다. 아이들과 표백되지 않은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탐구해 보고 싶어 궁리했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옆자리 동료 선생님은 이 표백된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야생의 시기를 견디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데에는 학교는 더 나은 공간이어야 한다는 다짐, 앞으로의 학교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그 냉대와 폭력을 이 아이들은 경험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료 교사들, 동료 시민들과 더 나은 방향을 두고서 토론하게 될 줄은 알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다툴 줄은 몰랐다.
물론 학교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타자를 실격당한 자로 낙인찍어 분류하고, 낯선 것은 박제하여 구분 짓는 과정으로 학교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혐오와 폭력을 단상 아래 감춘다고 안전해지지 않는다. 정말로 학교가 안전한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공동체의 성원으로 서로를 초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모두가 지닌 보편성에 기대어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학생과 학생 사이, 학생과 교사 사이에 폭력은 사라지고, 누군가가 넘어질 수 있는 환경은 누구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연대하여야 한다. 학교는 혐오와 폭력에 맞서 싸울 힘을 키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2014년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 청소년 가운데 80%가 교사로부터 성소수자 혐오 표현을 들었다고 응답했다. 우리가 박제된 학교를 안전하다고 방심한 사이 학교는 아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이, 교사는 가장 차가운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표백된 학교를 좋다고 하는 옆자리 선생님을 나무라 놓고, 나도 수박을 자르듯이 아이들의 모습을 자르고 통에 담아 왔는지도 모른다. 《별별 교사들》의 온화하고 별난 선생님들의 열정을 담은 목소리를 듣자 나는 나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야생의 시기를 견디고 표백된 지금의 학교에 돌아온 내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교사인지 자신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사실 수박은 미리 잘라 놓으면 그 맛을 즐길 수 없다. 단물이 다 빠져 마지막에는 퍼석한 부분만 남게 된다. 수박은 먹어야 하는 그 순간에 쪼개어 각자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커다란 수박을 잘게 잘라 네모난 통에 담으면, 통에 담긴 수박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