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연재] 우리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 | 발랑(신선웅)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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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시좌에서 - 교육복지 현장의 이야기 마지막 회


우리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

- 구조적 변화와 모두의 연대


발랑(신선웅)  woong_51@hanmail.net

관악교육복지센터 센터장



‘연대’라는 두 글자의 소환


“교육복지 어떻게 계속 해요? 너무 힘들지 않아요?”

나보다 먼저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 다른 영역으로 이직한 분을 만났을 때였다. 누구보다 교육복지를 잘 알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아직도 거기에 있어?’라고 묻는 것 같았다. 순간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회상해 보면 그분의 이직 소식을 접했을 때 센터장으로서 현장에서 부딪히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고 짐작했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위탁 운영하는 지역교육복지센터의 종사자는 대부분 사회복지사지만 보건복지부 또는 여성가족부 산하 기관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와 다르게 교육부에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활동뿐만 아니라 센터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다각도의 어려움과 고민이 잇따른다.[ref]서울시교육청에서 위탁받아 운영되는 서울 지역교육복지센터는 대부분 사회복지사들로 구성되지만 보건복지부 소속의 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근속 기간 역시 교육청과 교육복지센터에서의 내용만 인정될 뿐이다. 또한 임금 체계에 있어서도 서울시 사회복지사와 별개로 자체 기준에 따라 지급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따라 종사자의 잦은 이직이 운영상 가장 큰 어려움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는 청소년 지원에 대한 지속성과 전문성 문제로 연결되어 해결 방안이 필요한 사안이다.[/ref] 그런데 실상 듣게 된 이직의 사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대화의 방향은 ‘교육복지의 한계성’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말했다.

“청소년들 상황이 계속 힘들어지잖아요. 변하는 건 없고. 교사분들도 점점 어렵다고 하고. 그런데 교육복지센터가 다 해결해 준다고 말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어요. 더 이상 할 수 있는 힘도 없어졌고요.”

청소년과 교육복지에 애정을 가졌던 사람이 왜 이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의되지는 않았다. 핵심은 관점의 차이였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교육복지 활동을 해 온 나로서는 단 한 순간도 개인이, 혹은 하나의 조직이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의 어려움을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 우리 센터에 왔을 때, 우리 팀원들이 각각 개인의 업무를 혼자 감당하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같이 일하는 구조를 경험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스스로 책임지면서 감당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부담감이 배가되어 있었다. 사회복지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개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인생과 더불어 가족의 가족을 넘어서는 전사가 잇따른다. 청소년을 만날 때, 10여 년 동안 살아온 인생을 살피게 된다. 또한 그의 부모, 가족, 친구 등 얽혀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의 이야기와 관계들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렇다면 과연 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을 감히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는 함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사료된다. 그래서 이 센터에 처음 와서 했던 나의 역할이 팀 내에서 협력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동료와 같이 일하려면 대화하고, 의논하고, 결을 맞추어야 한다. 그만큼 번거로워야 한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의 생각과 관점이 모아져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고, 개인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지원을 해낼 수 있다. 이 과정을 약 1년 정도 거쳤을 때, 우리 종사자들은 개인의 업무 부담감은 줄고 팀워크란 무엇인지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 팀과 함께 2025년을 맞아 일곱 번째 사업을 함께하고 있다. 교육복지센터에서 팀 구성의 변동이 없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대부분의 센터들에서 인사 변동이 잦다.[ref]2024년 말 기준, 서울 지역교육복지센터 25개 종사자 근속 현황을 확인해 보면 1년 미만이 27%, 1~3년 미만이 38%이다. 약 65%의 종사자가 3년 이상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위기 상황의 아동·청소년 지원에 대한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 지역교육복지센터는 아동·청소년 지원의 지속성을 높이고 종사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대안을 찾고 있다.[/ref] 이는 서두에 언급한 센터 운영에 관한 다각도의 어려움과 고민에 맞닿는 지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팀은 퇴사하는 직원 없이 증원되는 인력과 육아휴직에 의한 대체 근로자 등의 변화만 있고, 활동에 있어서도 해마다 새로운 과제를 팀 스스로 발견하며 성장해 나가고 있다. 운영자의 입장에서 우리 팀을 평가할 때 이 부분을 가장 우수한 부분이자 조직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 주는 부분이라고 본다.


‘같이 일하는 구조’를 외부 체계로 확대 적용하면 ‘연대’가 된다. 유시민 작가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고 말한 삶의 방향성에 동의한다. 최근 사회복지활동을 하는 분들이 모인 어느 공식 행사에서 앞에 나선 분이 요즘 유행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대라고 했다. 너무 유행처럼 많이 쓰여서 식상하다는 뉘앙스였다. 가히 충격적이면서도 실망스러웠다. 연대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이며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연대는 유행처럼 왔다가 사라질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개인이 파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람을 마주하는 사회복지 영역에서 아동·청소년의 자립을 위해 활동하는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주요하게 작용되어야 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사회적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립’을 목표로 아동·청소년을 지지하고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지원함에 있어 한 기관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학교, 돌봄 기관, 사회복지 기관, 상담 기관, 치료 기관, 학교밖 지원 기관 등 전문 영역이 존재하므로 당연히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우리 기관이 할 수 없는 일은 타 기관과 함께해야 가능해진다. 교육복지 현장에서 애쓰다가 결국 이직을 선택하는 분들도 학교 및 지역 기관과의 협력을 수없이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큰 차이는 없다. 같은 기관 내에서 옆에 앉은 동료와 결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다른 기관의 누군가와 결이 맞을 리 없다. 그러나 연대의 끈을 놓는 순간 교육복지는, 사회복지는, 우리 사회는 무너진다. 어떤 학교나 교사는 지역 기관을 신뢰하지 못 하고, 어떤 역할을 나누어 맡을 때 업무를 추가로 떠안는 느낌을 갖는다. 어떤 지역 기관의 종사자는 매일 해내야 하는 업무의 양이 많고 해당 기관의 매뉴얼에 따라서만 청소년을 만난다. 매뉴얼에 따른 원칙이 활동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활동을 제한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부작용을 목격하기도 한다. 모두 자기 위치에서 자기 기준에 따라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연대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함께해야 할 곳의 여러 사람들을 설득했던 날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험으로 설득하는 가치


5년 전이었다. 장마초등학교에서 고위기 학생에 대한 논의가 있어 회의에 참석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마파람의 이슈로 학교장 이하 각 부서의 부장 교사, 현재 및 전년도 담임 교사, 교육청, 상담 기관, 교육복지센터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시만 해도 이 정도의 대규모 사례 회의는 이례적이었다. 당시 ‘양천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ref]2020년에 일어난 ‘양천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일명 ‘정인이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 아동학대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공교육 기관(학교)에서 아동학대 예방 교육, 교사 대상의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 교육, 학교 내 학대 징후 모니터링 체계 강화, 학대 의심 아동 즉각 분리 제도와 연계, 학교-지역 사회 연계 등이 강화되었고,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 교육 내용에 신체적 학대뿐만 아니라 정서적 학대 및 방임까지 포함하면서 교사들이 학생의 가정 상황과 신체, 심리 상태까지 세심하게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ref]이 일어난 직후라 사회적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긴장도가 높았고, 학교 역시 무척 주의를 기울이는 분위기였다.


1학년 아동 마파람은 결석을 하는 날이 잦았고, 학교에서 가정 방문을 가더라도 만남을 거부했다. 드물게 학교에 오는 날에도 집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 나오기까지 1시간 이상 걸렸으며, 가정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 중간에 갑자기 꼼짝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모자 가정으로 어머니가 양육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 느끼기에는 양육자가 적극적으로 등교를 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 같았고,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 있었으며, 양육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경제적 지원만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마파람은 겨울에 입기 시작한 두꺼운 외투를 한여름이 되어서도 벗지 않았고, 양육자는 자신이나 자녀를 해치고 싶은 심정을 학교 면담에서 호소해 극단적인 상황까지 예측할 수 있는 신호들을 보냈다. 마파람 개인과 그 가정이 보여 주는 모습들은 학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유로 열리게 된 대규모 사례 회의에 참여했을 때, 학교가 원하는 방향은 명확했다. 마파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들을 막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회의가 진행될수록 학교의 방어적인 태도가 느껴졌다. 우선 학교는 향후 마파람에게 어떠한 형태이든 아동학대 및 방임에 따른 사고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이후 해당 사건에 대해 수사가 진행될 때, 그간 학교는 최선을 다했기에 책임이 없음을 명확하게 할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반면 경제적 취약 계층의 한부모 가정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해당 가족 구성원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는 꽤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입장과는 다른 결의 태도였다. 결론적으로 학교는 법과 제도 안에서 해야 하는 역할을 명확히 하고, 그 외 교육청과 상담 기관, 교육복지센터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기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실상 사례 회의에 모인 모두가 협력하더라도 빠른 시간 안에 긍정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사안이었다. 학교의 태도에 아쉬운 지점이 많았지만, 외부 지원 기관들은 학교를 비난하기보다는 서로 역할을 나누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회의의 방향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마파람에 대한 사례 회의가 열리면서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졌다.


5년이 지난 지금, 학생과 가정과 학교는 어떤 변화를 이루었을까? 학생 마파람은 대체로 빠짐없이 등교하고 있으며, 계절과 신체 성장에 관계없이 입던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지속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으며 안정적인 정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양육자는 자녀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며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격증 취득 후 취업하여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학교는 마파람이 등교는 해도 교실에는 들어가지 못하자, 교실 밖에서라도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학생의 선택을 존중하여 원하는 위치에 책상과 의자를 놓아 주었다. 또한 마파람이 지속적으로 전문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 예산을 아끼지 않았고, 부족할 때에는 외부 자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며 애쓰고 있다. 더불어 이후에 다른 아동·청소년의 위기 상황이 드러났을 때도 학교 안에서 적극적으로 학생을 돕고자 교사 여럿이 앞장섰다. 여러 상황으로 어려운 가구들이 밀집한 지역이기 때문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학생의 수가 매년 적지 않지만, 아주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학교 안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자 하며, 학교 내부에서 해결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외부 기관과의 사례 회의를 개최하고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파람 개인과 가정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완전히 달라진 학교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이 학교를 변화시켰는가. 무엇이 교사들의 태도와 학교의 분위기를 달라지게 하였는가. 단언컨대 큰 위기를 겪은 청소년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직접 체감하고 그 과정을 경험했던 교사의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당시 교육복지를 담당했던 교사는 교육복지라는 개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에는 교육복지를 담당하지 않으면서도 위기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장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본인이 담임하게 되었다면서 우리 센터에 걱정하지 말라고 전한 일도 있었다. 당시 상담 교사는 자칫하면 교육복지 대상 학생을 본인이 전적으로 담당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고 만나며, 필요한 때에는 양육자를 설득하는 데에도 앞장선다. 또한 위기 상황을 경험했던 교사들도 위기 학생 또는 교육복지 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교장, 교감, 교사의 구성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영향도 없지 않지만, 경험을 통해 설득된 가치는 다시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 학교를 통해 배웠다. 뿐만 아니라 해가 지날수록 이와 유사한 변화를 보여 주는 학교들이 여럿으로 늘어나면서 우리의 배움은 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한 명의 청소년을 돕기 위해 학교의 여러 구성원을 비롯하여 다양한 외부 자원까지 협력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가치에 대한 설득은 ‘한 번의 경험’으로 시작되어 반복해서 증명되면 결국 신뢰와 확신이 된다.”

이 말조차 우리는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구조적 변화를 위한 움직임


지금까지 우리는 청소년의 어려움과 해결 방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만 청소년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청소년의 입장을 알리고 싶었다. 요약하자면 이 시대의 아동·청소년은 다양한 위기 상황을 겪고 있으며, 우리가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들과 연결된 사람들이 아동·청소년에게 세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아동·청소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아동·청소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을 위해 학교 교사가, 가정의 양육자가, 혹은 아동·청소년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관점과 태도로 아동·청소년을 마주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저마다의 개인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더라도 사회 구조적 변화가 잇따르지 않으면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한 사람의 최선이 모여 우리 사회가 변화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理想)일 것이다. 현실이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닿을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청소년 한 사람을 바라보고, 청소년과 연결된 비청소년[ref]비(非)청소년이란, 교사와 양육자, 아동·청소년을 지원하는 활동가 등 청소년이 아닌 사람들을 칭할 수 있는 청소년 중심적이면서도 가치 중립적이며 평등한 표현이다.[/ref]들을 설득해 나가더라도 어느 한쪽에서는 반드시 구조적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그 역동이 커지고 파장을 일으킬 때 비로소 이 사회는 달라지고 청소년의 삶 역시 나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는 어떤 구조적 변화가 있어야 할까? 학교, 가정, 사회 전반의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우선 단언컨대 공교육의 역할과 기능이 달라져야 한다. 학교는 입시를 위해 집중하는 곳이 아니라 청소년의 삶이 전반적으로 균형과 전인격적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한다. 청소년이 행복하게 성장하며 자기다운 삶으로 사회 안에서 충분히 ‘함께 사는 사람’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존중받고 경험하며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가 그러한 공간이 된다면 교사의 역할 역시 달라진다. 교사는 단지 학습을 위해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년보다 앞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삶을 돕는 역할로 자리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 센터는 공교육 안으로 ‘대안교실’을 확장시키기로 했다. 청소년의 위기 상황을 개별적 지원으로도 접근하지만, 작은 단위에서라도 할 수 있는 구조적 접근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끝에 시도하기로 한 내용이다. 대안교실은 전혀 새로운 사업이 아니다. 이미 실시되고 있지만 상시적으로 열리거나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사례는 많지 않다. 몇몇의 학교들이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운영되는 수업에 참여하기 어려워하고 학교 밖으로의 이탈이 불가피한 청소년을 위해 대안교실을 운영한다. 그 운영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학교들은 실제로 학교 밖으로 이탈하는 청소년의 비율이 낮아지고, 부적응 학생들이 안정을 찾고 졸업과 이후 진로까지 계획하여 나아가는 모습들을 보여 준다. 다만 이 구조는 교사 개인의 역량과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학교에서 이런 시도를 논의할 때 대다수의 교사가 업무량의 증가로 연결시켜 생각한다. 이에 따라 필요성을 느껴도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간헐적인 프로그램성 자리로 열린다. 그러나 청소년 개인의 성향과 상황이 학교 안에서 받아들여지려면 대안교실은 상시적이면서 학교 구성원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유연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우리 센터가 학교와 협력하고자 하는 내용 역시 여기에 맞닿아 있다. 센터의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면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하지만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그리고 청소년의 위기를 지원하는 데에 효과성을 입증하는 곳이 학교 안의 대안적 공간에 있다는 것을 경험시키고 설득하며 그것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결코 센터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학교가 자립성을 가지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지만 학교 구조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실천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시도는 아주 작은 활동에 불과하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학생 수 역시 감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사 수를 줄이거나 학교의 통폐합이 불가피하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공교육의 목적과 기능을 재검토하여야 한다. 담임 교사 한 사람이 한 학급의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에 여실히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는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이라는 방안으로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교사 한 사람이 한 학급을 담당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사의 핵심 역할이 지식 전달이라면, 학교 급에 따라 교사 외에 적절하게 보육 전문가, 특수교육 전문가, 교육복지 전문가, 행동중재 전문가, 전문 심리 상담사 등이 함께 배치되어야 한다. 또한 주입식 교육이 아닌 직접 체험하고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학습, 시험이 주를 이루는 획일적 평가가 아닌 다양한 지표를 통해 학생 개인의 성장을 확인하는 방식이 실시되어야 한다. 이에 더해 청소년을 통제하기보다는 개별성과 다양성, 자율성이 존재하는 유연한 교실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교육 내용 역시 입시나 취업을 위한 지식 주입형 교육보다는 인문학, 문화 예술, 정신 건강, 금융 등 다각도의 교육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청소년이라는 존재를 어떠한 사람으로 이 사회 안에 오롯이 자립하게 할 것인지 고민할 때 교육 내용은 달라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적 접근이 불가피하다.



청소년이 살아갈 자리를 위하여


청소년이 살아가는 가정에 대한 구조적 접근 역시 논의되어야 한다. 먼저 양육에 대한 책임이 강화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양육자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에 따라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아주 미비한 수준으로 요구한다. 양육의 기준이 양육자 개인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기 때문에 위기는 양산된다. 우리가 앞서 살펴 왔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양육자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청소년의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동학대 및 방임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고 있더라도, 양육에 대한 책임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아동·청소년의 삶은 양육자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청소년에 대한 양육을 빌미로 양육자가 청소년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경제적 취약 계층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지원금이 양육자에게 지급되는 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폐해를 보더라도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청소년 센바람 형제의 경우 부모가 아닌 혈연 관계의 후견인이 양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다양하고 잦은 위기 상황 때문에 학교를 비롯해 지역 안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다. 사실 가장 크게 우려되는 부분은 후견인이었다. 후견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센바람 형제의 양육을 담당한다는 이유로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고, 불안정한 심리·정서적 상태를 보여 센바람 형제에 대한 학대를 의심해 봐야 하는 상황들이 이어졌다. 센바람 형제보다도 후견인이 학교 교사 또는 외부 기관 관계자에게 전화하여 경제적, 심리·정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양육을 포기하고 싶다는 발언도 빈번하게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경제적 지원이었다. 형제가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후견인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상만 달라질 뿐이었다. 센바람 형제는 가사 노동을 하느라 결석을 하기도 하고, 등교를 하더라도 빨리 집에 가서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가정 내에서 폭언과 폭행이 있었지만 센바람 형제는 부모의 부재로 후견인과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의존하고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후견인의 심리·정서적 안정을 위한 치료적 접근과 센바람 형제의 주거 및 심리적 안정 등이 선행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을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센바람 형제의 양육을 담당하면서 후견인이 얻게 되는 경제적 지원이었다. 센바람 형제의 생활과 성장을 위해 지원되는 금액은 모두 후견인이 관리하며,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센바람 형제에 대해 공적으로 생계비, 교육비, 의료비 등이 지원되고 있었지만 청소년 당사자에게 전달되거나 적합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청소년 남실바람의 가정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남실바람의 양육자는 3명의 자녀 중 한 아이만 직접 키우고, 남실바람 남매를 시설에 맡겼다. 당시 생계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였는데, 얼마 전 네 가족이 모두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양육자의 말에 의하면 남실바람 남매에게 “꼭 찾으러 오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이 가족 안에서 남실바람 남매는 여실히 위기 상황에 노출되었다. 양육자는 자녀가 방 안에서 몇 시간이나 게임을 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밤낮이 바뀌어 등교하지 못할 때에도 ‘너 때문에 못 살겠다’는 식의 말만 할 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계절에 맞는 옷, 성장기에 필요한 충분한 식사(량) 등 환경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쓰레기와 오물로 인한 악취 등으로 주거 환경은 관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양육자는 짧은 거리도 택시를 타거나 본인의 미용에 비용을 들이며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 갔다.

센바람 형제와 남실바람 남매들 모두 학대 또는 방임이 의심되거나 실제로 신고되어 조치가 취해진 경우들이다. 그러나 부모를 잃었던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은 또다시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학대 및 방임에 대한 사실을 부인하고, 변화 없이 그대로의 삶을 이어 가고자 희망한다. 우리 사회가 양육에 대한 권한만 키우고 책임을 살피지 않으면, 결국 청소년은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그런 현실이 버거워 가정을 탈출하더라도 쉼터나 그룹홈 형태의 생활 시설에서 여러 제약을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고, 자립을 시도해 보지만 주거 환경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워 청소년들은 이내 극빈한 생활에 처해진다. 청소년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논리만 있고 양육자의 책임이 자율에 맡겨질 때, 청소년은 더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양육의 권리를 갖게 하자면 그에 따른 책임 역시 무게감 있게 주어져야 한다. 부모든 후견인이든 그 누구든 청소년을 양육할 때 가져야 할 양육의 개념과 기준 등이 강화된다면 점차 늘고 있는 아동학대 및 방임, 양육자의 권력 남용, 아동·청소년의 선택권이 존중되지 않는 상황 등의 어려움도 점차 해소될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을 미완성된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한다면 양육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서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청소년이 비청소년에게 소속된 상태로 생계를 이어 가야만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보자. 현재 청소년은 거소지정권에 의해 친권자가 지정한 장소에 거주하여야 하지만, 그곳이 위기의 현장인 경우가 많다. 청소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가정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주거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탈가정 청소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양육자가 위기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면 공적 기관을 통하여 청소년이 안전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학대·방임 등의 형태로 적절하지 않은 보호를 받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청소년 스스로 신청하여 법정 대리인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제도에서는 법적 대리인 변경 과정이 까다롭고, 청소년 스스로 신청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청소년 후견인 제도가 확대되어 신뢰할 수 있는 제삼자, 공무원, 사회복지사 등이 공적 후견인으로 지정된다면, 가족 관계 안에서 이어지는 위기의 대물림을 비로소 끊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청소년에 대한 복지나 경제적 지원이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경제·법률·노동 등에 대한 교육을 정규 교육 과정에 포함시켜 청소년이 안전하게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처럼 청소년에게 스스로 살아갈 권리, 청소년이 충분히 보호받더라도 개별성을 존중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면 다른 접근들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소득의 불균형이 해결되어야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알고리즘처럼 청소년의 위기에 있어서 원인 또는 결과가 ‘돈’으로 연결되는 양상 역시 구조적 접근을 통해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는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다른 나라에 견주어도 양극화되고 있다. 재산의 정도, 경제적 능력, 심리·정서적 상태, 가족 문화 및 삶에 대한 태도 등이 대물림되는 현상을 막을 방안은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사료된다. 극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개인의 노력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양극화 문제는 취약 계층에게 복지적으로 현금성, 현물성 서비스를 지원하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개인의 재산을 축적하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이 사회가 무너져 가는 현 상황을 외면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청소년의 외침이 되는 과정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감히 청소년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까, 혹여나 청소년의 시각을 잃고 여느 비청소년과 같은 생각으로 지극히 개인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만 나열하고 있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동안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이 떠올랐고, 그들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자칫 개인정보가 드러나거나 추측되지는 않을지 염려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지역을 공개하면서 어느 학교의 사례를 이야기해야 할 때는 더욱 고민되었다. 청소년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시작한 일이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회에서 목소리조차 내지 못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외침이 시작되기를 바랐던 마음이다.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모든 청소년들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청소년과 함께 살아가는 가정과 학교와 지역이 겪는 현실이다. 이 글을 마주한 분들이, 그리고 청소년 지원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청소년의 목소리를 함께 내어 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 당부한다. 청소년을 일컫는 말이 질풍노도, 사춘기, 공부, 어린 존재 등이 아니라 ‘행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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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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