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장례식
과학자들이 빙하 장례식을 연다는 소리를 들었어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린 물이 내게 와서 알려줬지
앞으로 만년설이라는 낱말이 사라질 거라는 경고도 있었어
천년설은커녕 백년설 소리나 겨우 듣게 될지도 모른다더군
남극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빙붕(氷棚)들이
멘붕에 빠진 표정을 상상하곤 해
상상만 하는 거지
장례식에도 못 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누군가는 빙하 재고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는데
목록에서 이름이 하나씩 지워지는 동안
나는 내 시의 목록을 늘려가게 될 거야
오늘 밤 꿈속에서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악몽은 피하고 싶어
당신도 그럴 거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모든 소멸은 자연의 섭리라는 말 따위
내 시에서는 쓰지 말아야겠다는
어설픈 다짐으로 마무리 지으며
빙하를 핑계 삼아 내 시를 또 한 줄 늘려 놓는
이 파렴치를 어찌해야 하나
두 마음
큰길에서 교복 입은 남녀 학생 둘이 손을 잡고 걸어오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쪽 맞춘다
저 귀엽고 아름다운 장면은 뭐지, 하는 마음과 내가 근무하는
학교 학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찾아왔다
교사를 그만둔 뒤 그때의 마음을 떠올릴 때가 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났을 때도 슬픈 마음과 내 나라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갈마들었다
시작 노트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들으며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보아도 어지러운 세상 소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안온한 일상을 침범당한 데서 오는 우울감이 깊을수록 하느님은 대체 무얼 하고 계신 건지 묻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무리 속에 나 자신도 끼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세상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책임이 덜어지는 건 아닐 테니, 나 역시 공범자라는 사실을 자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함께 그럴수록 세상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다짐도 하면서요.
세상의 모든 재난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을 바로잡을 책임 또한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욕망은 창조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파괴의 선봉 노릇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파국의 시간이 우리를 옥죄어 올 겁니다. 욕망은 힘이 셉니다. 제어하기 힘든 상대를 만나면 굴복과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는 합리화 기제를 만들기에 바쁘지요. 세상의 불행은 그렇게 방관과 변명, 회피를 숙주 삼아 악순환을 되풀이할 테고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널리 퍼지고 절박한 마음이 서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손길은 결코 세상 밖에서 불쑥 찾아오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아니 내가 먼저 내밀어야 합니다. 작은 목소리가 큰 목소리가 될 때까지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을 경배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기도문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 모시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박일환(pih66@naver.com)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등 뒤의 시간》, 《귀를 접다》, 청소년시집 《우리들의 고민상담소》, 동시집 《토끼라서 고마워》를 비롯해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1, 2》, 《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시를 즐기는 법》 등을 펴냈다.
빙하 장례식
과학자들이 빙하 장례식을 연다는 소리를 들었어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린 물이 내게 와서 알려줬지
앞으로 만년설이라는 낱말이 사라질 거라는 경고도 있었어
천년설은커녕 백년설 소리나 겨우 듣게 될지도 모른다더군
남극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빙붕(氷棚)들이
멘붕에 빠진 표정을 상상하곤 해
상상만 하는 거지
장례식에도 못 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누군가는 빙하 재고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는데
목록에서 이름이 하나씩 지워지는 동안
나는 내 시의 목록을 늘려가게 될 거야
오늘 밤 꿈속에서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악몽은 피하고 싶어
당신도 그럴 거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모든 소멸은 자연의 섭리라는 말 따위
내 시에서는 쓰지 말아야겠다는
어설픈 다짐으로 마무리 지으며
빙하를 핑계 삼아 내 시를 또 한 줄 늘려 놓는
이 파렴치를 어찌해야 하나
두 마음
큰길에서 교복 입은 남녀 학생 둘이 손을 잡고 걸어오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쪽 맞춘다
저 귀엽고 아름다운 장면은 뭐지, 하는 마음과 내가 근무하는
학교 학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찾아왔다
교사를 그만둔 뒤 그때의 마음을 떠올릴 때가 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났을 때도 슬픈 마음과 내 나라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갈마들었다
시작 노트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들으며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보아도 어지러운 세상 소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안온한 일상을 침범당한 데서 오는 우울감이 깊을수록 하느님은 대체 무얼 하고 계신 건지 묻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무리 속에 나 자신도 끼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세상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책임이 덜어지는 건 아닐 테니, 나 역시 공범자라는 사실을 자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함께 그럴수록 세상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다짐도 하면서요.
세상의 모든 재난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을 바로잡을 책임 또한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욕망은 창조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파괴의 선봉 노릇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파국의 시간이 우리를 옥죄어 올 겁니다. 욕망은 힘이 셉니다. 제어하기 힘든 상대를 만나면 굴복과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는 합리화 기제를 만들기에 바쁘지요. 세상의 불행은 그렇게 방관과 변명, 회피를 숙주 삼아 악순환을 되풀이할 테고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널리 퍼지고 절박한 마음이 서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손길은 결코 세상 밖에서 불쑥 찾아오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아니 내가 먼저 내밀어야 합니다. 작은 목소리가 큰 목소리가 될 때까지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을 경배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기도문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 모시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박일환(pih66@naver.com)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등 뒤의 시간》, 《귀를 접다》, 청소년시집 《우리들의 고민상담소》, 동시집 《토끼라서 고마워》를 비롯해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1, 2》, 《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시를 즐기는 법》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