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시] 조등, 오동꽃 / 시론(詩論) | 이종암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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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등, 오동꽃


하얗게 빨갛게 노랗게 또 분홍으로

요란스레 피고 지던 봄꽃, 봄꽃들

하나 둘 스러지고 

연두에서 명록, 암록에 이른 산야

그때 너는 온다 

소리 소문도 없이 

보랏빛 깃발 조용히 펄럭이며


마을로 내려가는 길 제 먼저 지워버린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 젊은 소대장의

하늘 높이 내뻗은 맨주먹처럼

이렇게 불쑥, 너는 기필코 오고야 만다


아픔과 상처의 지난 년대

하늘 높이 빈주먹 내지르며 쓰러져갔던

푸른 빨치산들 조상(弔喪)이라도 하듯 


오월 허공에 내걸린 조등, 오동꽃





시론(詩論)


3학년 9반 교실 ‘독서’ 수업 시간, EBS수능특강 언어영역 60쪽 황동규 선생의 시 「퇴원 날 저녁」을 가르치다가 “주인이 나오기 전에/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에 밑줄 그으라고, 시인은 저렇게 배터리 닳아가는 자동차에게도 말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거라고, 아이들에게 받아 적으라고 윽박지른다. 괄호 열고, 우리의 이종암 시인 또한 위대하다, 괄호 닫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에이, 웩웩, 책상 두드리고 고함지르고 교실이 완전 난장판이다. 아니다 야들아, 진짜라니까. 내 말 못 믿는 사람,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와서 봐라. 내 책상 위 물컵 속에 며칠 전 화단에서 꺾어온 매화 활짝 웃고 있단다. 그거 내가 자꾸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말 건네서 활짝 웃으며 꽃 핀 거라니까.




시작노트

연두의 때를 지나 초록이 깊어 가는 5월이 오면 보랏빛 오동꽃이 핍니다. 산야의 초록 잎새들 위로 키 큰 오동나무 가지에 숭어리 숭어리로 핀 오동꽃을 보면 아픔과 슬픔의 우리 현대사에서 산화해 간 젊은 빨치산들이 내뻗은 맨주먹 같습니다. 또 5월이면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장편 《소년이 온다》에서 기술한 ‘1980년 광주의 오월’이 있습니다.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현재의 우리나라는 이런 안타까운 사람들의 목숨들, 그 희생 위에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시론(詩論)〉이라는 시는 2001년쯤 경북 포항에 있는 대동고등학교 3학년 9반 교실에서 있었던 수업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온 것입니다. 아이들과 재미나게 하던 문학 수업 시간, 한두 시간 빌 때 교장 몰래 체육 시간 아이들과 축구를 하던 그때가 벌써 그립기만 합니다. 시는 사물과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이름을 불러 주고 언어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종암(mulgasarang@hanmail.net)      1999년 동인지 《푸른시99》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집으로 《물이 살다 간 자리》, 《저, 쉼표들》, 《몸꽃》, 《꽃과 별과 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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