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호[특집]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 우리의 ‘소년의 시간’, ‘구원’하고 ‘계몽’할 수 있나요? | 이한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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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우리의 ‘소년의 시간’, ‘구원’하고 

‘계몽’할 수 있나요?



이한  bomgks@hanmail.net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성평등 교육 활동가



2016년, 페미니즘이 한참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즈음, 나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해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 화장실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수많은 또래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여 슬퍼하고 분노하며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나는 친구 손에 이끌려 엉겁결에 추모 현장을 따라갔다가 벽을 빼곡 메운 포스트잇을 텅 빈 눈으로 읽으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곤 차마 그곳에 같이 간 친구에게는 묻지 못하고 친한 동성 성별 친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게 왜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이야……?” 


그리고 불과 3년 후, 나는 페미니즘 단체에서 활동하며 성폭력 예방 교육, 성평등교육을 하는 사람이 됐다. 강남역 사건이 단지 어떤 한 사람의 우발적인 범죄로 치부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닌, 수많은 여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사건임을 이해하게 됐고, 개인적으로도 해당 사건을 변화의 계기로 이야기하게 됐다. 이제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 청소년, 양육자, 교육자, 군인 등 다종다양한 사람을 만나 성평등의 필요성,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계몽이나 구원 서사가 있지 않을까 하여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했는지 묻곤 한다. 나는 습관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경험을 변화의 계기로 연결 지으며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 과연 어떤 한 가지 요소가 그렇게 ‘결정적’이었지 아직 모르겠다. 인간은, 인생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무엇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나 역시 또다시 이렇게 글을 쓰며 무엇이, 어떻게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찾고자 한다. 단순하고 손쉬운 결론으로 넘겨짚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변화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존재니까. 



“요즘 애들”과 오늘날 우리의 ‘소년의 시간’


교육이 참 쉽지 않다. 아니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교육을 한다고 하면 “요즘 애들 별나죠?” 하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성평등교육을, 그것도 주로 남자 학교에서 한다고 이야기하면 동정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그럼 괜히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교육에서 겪었던 비극적인 경험을 조미료 톡톡 뿌려서 말해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여자 어린이가 경험한 성차별을 이야기하니까, 옆에 남자 어린이가 “그래도 너는 군대 안 가잖아!”라고 반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중학교에서 “여성가족부가 대체 왜 필요해요?”라는 질문을 백만 번 정도 들었고, 여성 혐오적인 욕과 발언을 버릇처럼 쓰면서도 남성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남자 고등학생과 통계 자료마저 부정하는 중년 직업 군인 남성을 만난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월부터 10월까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으로 검거된 피의자 506명 중 10대가 411명으로 무려 81.2%에 달했다. 어디 그뿐일까.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과 대학마다 행패를 부리던 탄핵 반대 집회 참여자들 중 상당수가 청년 남성이거나 단체명에 “남성”을 내세운 이들이었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2030세대 남성을 ‘이대남’으로 부르며 극우의 첨병 같은 존재로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게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13세 소년 제이미 밀러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배우들의 소름 끼치는 연기와 원 테이크 촬영 기법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폭력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문화가 지금 10대 청소년의 삶에 얼마나 뿌리 깊게 영향 미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차지했고 두 달이 지나 글을 쓰는 현시점까지 넷플릭스 글로벌 영어 시리즈 분야에서 1억 3780만 뷰를 기록하며 3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인즉, 이 이슈가 영국을 넘어 유럽과 미국, 한국, 일본, 중국 등 전 세계의 이슈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경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성을 둘러싼 고민이 높아지고 있다. 덕분에 주변에서 계속 “요새 남자애들 왜 그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어렵고 민망한 마음에 “제가 대신 죄송합니다” 하며 웃으며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누가 대신 죄송해하는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일일 리 없다. 교육자이자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그저 ‘요즘 세대가 문제’라고 치부하며 손 놓을 수도 없다. 어떤 이들의 말마따나 소셜 미디어를 차단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고 누구나 개인 과외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작금의 현실을 만든 우리의 토양부터 되돌아보자. 


  

오늘날 청소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이른바 ‘N번방 사건’을 접하고 그 사건의 규모와 잔혹함, 그리고 너무 많은 청소년이 피해자로 또 가해자로 연루된 현실을 마주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많은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를 두고 성적인 욕구 때문에 저지른 충동적인 사건이라고 변명했고 심지어 일부 어른조차 이 사건을 그저 ‘혈기왕성한 이들의 일탈’ 정도로 치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 안에 누군가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는 ‘성적인 욕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타인을 지배, 착취하고자 하는 폭력적인 마음과 행동만 나타난다. 이것을 어떻게 ‘성적인 욕구’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가해자를 동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성교육 현장에서 그 문제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그래도 어린이·청소년들의 표정에 ‘기대’와 ‘설렘’ 같은 표정이 엿보인다. 당연하다. 초등학교 4~5학년들부터 자신의 ‘모쏠(모태 솔로)’이라고 한탄하는 경우를 보기가 어렵지 않다. 중학교 청소년 4,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연애 경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49.2%에 달했고 첫 연애 평균 연령은 11.6세, ‘스킨십 경험 있다’는 67.1%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제 이들에게 연애, 연애감정, 스킨십 같은 것은 자연스러운 놀이 문화의 일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디 그뿐일까? 성에 대한 접근성 역시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쉽고 빨라졌다. 약 9,000여 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약 절반(48.6%)의 청소년이 음란물을 ‘본 적 있다’고 응답했으며, ‘음란물’을 처음 접하는 평균 시기는 남성 13.1세, 여성 13.2세였다. 최근 1년간 음란물을 얼마나 자주 봤는지에 대해 61%는 빈도가 조금씩 다를 뿐 꾸준히 본다고 답했다. 당장 학교에서 조금만 물어봐도 ‘웹서핑을 하는데 배너에 이상한 광고가 떴어요’라던가 소셜 미디어에서 특정 신체 부위를 강조해서 찍은 영상을 본 적 있다는 응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성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은 어린이·청소년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다. 



기성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래세대의 변화에 눈을 맞춰야


문제는 이런 변화 속도를 기성세대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에 빠르게 눈뜬 이들의 현실을 고려해 성교육에서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도 많은 양육자,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라고 말하며 만류한다. 막상 어린이·청소년 당사자는 그들 말처럼 ‘어리지’ 않다. 오히려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저 마주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성에 대한 정보 획득 경로’에 있어서 ‘부모님’은 고작 2.3%에 불과하다. 심지어 ‘성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에도 혼자 알아보는 경우가 35.2%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이 친구(30.8%)이고 그 다음에야 부모님(21.5%)이었다. 그러니까 어린이, 청소년을 비롯한 우리 미래세대에게 성은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라기보다 여전히 금기, 터부이자 숨겨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인간의 성적인 욕구와 호기심은 거부할 수 없는 변화다. 결국 어른들이 손 놓은 상태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은 제대로 된 안전한 경로보다 포르노 같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경로를 통해 먼저 성을 접하고 왜곡된 성 인식이 자리잡히게 된다. 또한 이 괴리된 현실의 가장 큰 비극은 우리 어린이·청소년이 성과 관련해서 문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질염 같은 질병도 부끄러워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숨기다가 커지는 경우가 허다하고, 몸캠 피싱, 온라인 그루밍 같은 범죄에 노출된 경우에도 혼날까 봐, 실망시킬까 봐 이야기하지 못했다가 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한다.


성교육을 시작할 때, 흥미를 돋우고 관계를 쌓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10년, 20년 후에 2차 방정식, 미적분 같은 수학 문제 풀고 있을까요? to 부정사, 현재 완료 같은 영어 문법 자주 쓸까요? 업계 종사자가 아니고서야 거의 대부분 아닐 겁니다. 그런데 성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연애가 잘 안 풀려서, 성적인 관계가 어려워서, 성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영 쉽지 않아서 골머리 앓는 경험, 10년, 20년 후에도 되게 많이 할 것 같지 않나요?” 이 이야기를 들은 교육 참여자들은 그제야 경계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교육에 빠져들 준비를 한다. 우리에게는 먼저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괴리된 현실에서 방치되는 청소년들


자, 그러면 이제 성교육만 잘 하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여전히 성교육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교육은 「교육기본법」 제17조의2 (양성평등의식의 증진)과 「학교보건법」 제9조의2(보건교육)에 근거하며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발표한 ‘2023 학교 성교육 및 성폭력 예방교육 기본계획’에 따르면, 학교 성교육은 학년별 연간 15시간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법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서울을 주 무대로 여러 기관에 소속되어 성교육을 하고 있지만, 막상 성교육을 15시간씩 실시하는 학교는 많지 않다.


일단 학교 입장에서 학교폭력 예방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 장애 인식 개선 교육, 안전교육, 생명 존중 교육 등 해야 하는 법정 의무 교육이 너무 많다. 그래서 대부분 과목 단원 중에서 성교육과 관련한 내용을 엮어서 이야기하는 정도로 갈음되곤 하는데 그마저도 민원에 대한 염려나 전문성 부족 등을 우려해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해당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한 학교에서는 각종 지역성문화센터나 사설 성교육 기관을 찾곤 하는데, 예산이 없어서 기껏해야 2차시, 그것도 방송 강의나 강당에서 실시하는 집합교육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성교육을 담당하는 전문 기관 입장에서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거의 대부분 지역 청소년성문화센터는 센터장을 포함해 직원 5명이 고작이다. 소속된 전문 강사들은 프리랜서로 이곳저곳에 소속되어 있으며 불안정한 환경에서 어렵게 교육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문성을 쌓아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고 부당한 민원에도 취약하다. 


이게 개인의 의지,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과 미디어, 인터넷에서는 성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너무 쉽게 ‘학교에서 성교육도 제대로 안 하고 뭐했나’라고 묻지만 막상 성교육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곳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고 어떤 자원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기껏 성별 고정관념 관련한 이야기를 아무리 잘 해도 학교에서 “무거운 거 옮기게 남자애들 다 나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든가, 가정에서 “여자애가 칠칠맞지 못하게” 같은 이야기를 자꾸 듣는다면, 성교육자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환경에서 전문성을 쌓지 못하고 계속 소진되어 사라진다면 문제가 개선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하고 성평등한 곳이 되기 위해서 학교와 성교육 기관(성교육자)뿐만 아니라 가정(양육자)의 협업이 필요하다. 



교육은 교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교육’만’ 잘 하면 될까? 전국으로 교육을 하러 다니면서 정말로 다양한 유형의 학생들을 본다. 한번은 지역에서 공부로 내로라하는 청소년들이 모인 고등학교에 교육을 가게 됐다. 다들 학업으로 인해 조금씩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교육에 임하는 자세는 전반적으로 진지하고 적극적이었다. 질문 수준도 남달랐다. 평소 토론형 수업이 익숙한 듯 사회적으로 첨예한 주제에 대해 스스럼없이 질문하고 교육자의 의견을 들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여운이 오래 남는 강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한 지역 다른 일반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학교 분위기, 학생들의 반응 모두 앞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저조했다. 불현듯 지난 학교에서의 모습과 이 청소년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역시 우등생은 다르다’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전자의 존재가 후자의 환경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최근 책 《증명과 변명》에서 이에 관한 언어를 찾았다. 해당 책에는 청년 남성 ‘우진’이 등장한다. 그는 우울과 강박에 시달리다 스스로 시한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를 오랜 친구인 안희제에게 털어놓는다.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안희제는 자신의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친구를 살리기 위해 친구를 인터뷰하고 책을 써냈다. 우진은 왜 죽고자 했을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중산층 가정, 수도권 거주자,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평범하지만 또 부족하지 않고, 어찌 보면 특권적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리는 경험을 한다. 이른바 ‘K-타임라인’이라 이야기되는 ‘학교-수능-연애-군대-취업-결혼-재생산’ 등으로 이어지는 정상성 궤도에 안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지만 계속 실패를 경험한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이를 위로하거나 새로운 길을 제안해 주기는커녕, 궤도 밖 존재들의 목소리를 ‘변명’ 취급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진은 자신의 삶과 생각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속에 당연히 친구 희제도 등장한다. 그는 십년지기 친구로서 따뜻하고 든든한 우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한계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당히 정상 궤도에 오름으로써 우진 자신의 실패를, 비감을 더하는 인물로도 등장한다. 이 역설과 비극은 마냥 우진 탓도 당연히 희제 탓도 아니다. “경쟁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성공을 이룬 이는 다른 이들을 짓밟은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성교육을 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나오는 여성대상 폭력, 성차별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통계 수치마저 믿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남성들을 보곤 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을 제로섬 게임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즉 누군가의 성공이, 심지어 약자와 소수자를 돕는 것이 자신의 자원을 빼앗아가고 지위를 위태롭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보인다. 치열한 경쟁,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뒤처지고 말 거라는 불안이 우진을, 이른바 ‘이대남’을 만들었다. 이 세계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지 않고는 안전하고 성평등한 세상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위태로운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내자 


앞서 이야기한 드라마 〈소년의 시간〉의 4화는 가해자 제이미 가족의 삶을 조명한다. 평범한 가족의 평범하지 않은 사건으로 균열이 난 이들의 일상 한가운데서 제이미 부모는 침대에 걸터앉아 눈물 흘리며 “방 안에 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와 “그래도 우리가 만들었잖아”라는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에서 우리의 현실과 의지, 그 사이를 오가는 우리의 존재가 보인다. 당장 학교 선생님들이, 가정의 양육자가, 기관 성교육 활동가들 모두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미래세대를 바라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래세대에게 또래 문화는 너무나 강력하고 우리가 그랬듯, 이들은 기성세대의 바람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 놓을 수 없다. 이 모든 현실 역시 우리가 만든 거니까. 


그럼 어떤 시도가 가능할까? 좌충우돌의 경험이 모여 형형색색 아름다운 조각보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거친 조각 몇 개를 먼저 내어 본다. 2021년부터 꾸준히 방문하는 한 남자 중학교가 있다. 사람들의 흔한 편견과 다르게 이 학교는 남자 중학교임에도 꽤 많은 청소년이 성평등에 열의가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 중심에 변화를 만들고자 의지를 낸 교사들이 있었다. 교사들은 먼저 청소년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인권 공부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교무실과 교실 등 학교 공간에 인권 관련한 포스터를 붙이고 인권 주제 특강을 개최했다. 그러다 작년에는 단기 교육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국어, 영어, 사회, 과학 교과를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의기투합해 ‘성평등’을 주제로 ‘교과 간 융합 수업’을 진행했다. 국어 시간에는 성평등 주제 책을 읽고 독서 토론 활동을 하고, 영어 시간에는 성평등 그림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는 등 각 교과의 내용과 주제를 융합한 수업이다. 해당 교육을 시작하기에 앞서 청소년들의 반감을 낮추고 이해를 돕기 위해 성교육 활동가 특강을 2차시로 배치했다. 성교육 전문가와 학교가 손잡아 변화를 도모한 사례로 주변 선생님들에게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시도한 사례도 있다. 바로 경남 산청에 위치한 간디학교 이야기다. 이 선생님은 간디고등학교를 다니며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여성 혐오적인 욕설과 표현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면서도 이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동아리를 만들어 토론을 통해 자체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왔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남자 페미니즘 동아리와는 2023년부터 꾸준히 관계 맺으며 먼발치에 활동을 응원하고 지켜보고 있다. 



규정하는 어른들, 흐르는 아이들


〈소년의 시간〉 2화, 사건 담당 형사 루크는 아수라장 같은 학교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그의 절박함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제멋대로 떠들고 떠나고 외면한다. 방황하던 그에게 아들 애덤이 찾아와 인스타그램 댓글 이모지에 담긴 함의, 학교라는 정글에서 펼쳐지는 복잡다단한 관계와 그 이면의 권력 구조를 설명해 보려고 하지만 루크는 따라가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며 되묻는다. “그러니까, 케이티(피해자)가 제이미(가해자)를 괴롭혔다는 거야?” 애덤은 답답해하고 말문을 잃는다. 


“인스타그램이 문제다”, “요즘 애들 무섭다”, 그리고 규제와 통제, 거리 두기는 쉽게 나오는 반응이지만 청소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는 아니다. 레드필, MGTOW(믹타우), 인셀 등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보고자 하는 시도도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밈과 용어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풍화되고 변하는지 안다면 그걸 쫓는 게 가능한가 싶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 나도 잘 모르지만, 그나마 2화의 끝에서 실마리가 보인다. 루크 형사가 아들에게 내뱉은 말,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같은 게 아니라, “아니, 정말 모르겠어서 그런데 같이 맛점하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필요한 게 아닐까.


어른들은 때로 너무 성급해서 매사 손쉽게 규정하려 하고 조언하려 하고 답 내리려 한다. 흐르는 물을 붙잡고 이름 붙이기보다, 같이 떠밀려 가면서 눈 마주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증명과 변명》의 저자 안희제는 인터뷰를 통해 우진의 속도로 발맞출 수 있었다. 망설이고 더듬거리면서도 애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었다. 활동을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활동가들 중 누구도 어떤 책을 읽고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게 되지 않았다. 그보다 존경하는 어른, 괴로워하는 친구, 사랑하는 애인과 가족 등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누적된 변화의 시간이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했다. 어쩌면 이런 변화가 너무 느리고 고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자를 꿈꾸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청소년과 눈 마주치고 그들의 삶을 고민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이런 변화는 그저 일부가 아닌 누군가의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그랬듯, 우리 모두 분명 변한다. 단번의 구원, 계몽이 아니라, 주변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관심과 돌봄 덕분에 변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이 우리가 발 딛은 토양의 변화를 통해 변한다. ‘소년의 시간’이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이미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기성세대이자 교육자이며 한때 소년, 소녀였던 이들이 함께 질문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미래를, 역할을 묻는다. 



❶  “[팩트체크] ‘허위 영상물’ 딥페이크는 10대 청소년이 만든다?”, 〈연합뉴스〉, 2025년 1월 9일.

❷  TODUM BY NETFLIX 홈페이지.

❸  조영주·김동식·남궁윤영·이혜경(2018), 〈청소년 성교육 수요 조사 연구 : 중학생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❹  최윤정·박성정·김은경·김인순·김애라·김효경·박민주(2020), 〈또래문화를 통해 본 청소년의 성평등 의식과 태도 연구(I) : 남녀 청소년의 또래문화와 젠더의식 격차 비교〉, 한국여성정책연구원.

❺  조영주·김동식·남궁윤영·이혜경(2018), 앞의 글.

❻  안희제(2024), 《증명과 변명》, 다다서재. 

❼  안희제(2024), 앞의 책, 122쪽. 

❽  ‘쌤, 페미예요?’ 질문 받고, ‘도전 한남’ ‘여유림’ 동아리 만들었죠, 〈경향신문〉, 2025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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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