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무엇을 가르칠까’보다 ‘어떻게 살고 있나’가 문제
공현 gonghyun@gmail.com
본지 기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투명가방끈 활동가
초·중·고 학생 시절을 떠올리니 필터가 씌워진 듯 뿌연 기억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오래전이라, 기억이 흐릿해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학교에서의 시간 대부분을 실감도 의미도 없이 보냈다.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까 다니고 공부해야 한다니까 공부할 뿐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은 재미있었지만 단발적이었고 큰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충실했던 시간이 있다면 애니메이션과 만화, 각종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순간들과 게임에 몰입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발 디딘 곳 없이 붕 떠 있는 듯한 감각으로 살았으니 나는 대개 좀 ‘멍한’ 상태였다. 의무와 규율은 넘쳐났지만 내가 책임을 느끼는 일, 지켜 낼 것이나 해낼 일은 없었다. 진정으로 열중하는 일이나 재미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에 던져진(Geworfenheit, 彼投) 채로, 주어진 상황과 정해진 삶의 방식 속에 그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좀 사는 것처럼 살게 된 것은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난 덕이었다. 운동을 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됐고, 스스로 기획하고 시도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됐다. 세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호흡하는 감각을 알게 됐다. 나는 반농담조로 인권운동을 하면 사회화가 잘되고 사회성이 자란다고 하곤 한다. 바로 내가 인권운동을 하면서부터 비로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같이 생활하고 소통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애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인권운동과 활동가로서의 내 삶을 사랑하고,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고 여긴다.
부품 장착식 교육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 까닭은 최근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극우 이데올로기, 음모론, 안티 페미니즘 등에 경도된 10~20대들(특히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늘었다. ‘요즘 애들이 걱정’이라며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 ‘뭐를 안 가르쳐서 문제다’ 말한다. 그런데 과연, 사는 것 같지 않던 학창 시절의 내가 민주주의니 성평등이니 하는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뭐가 와닿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베’ 용어를 남발하는 청소년들, 혐중 음모론 따위를 믿는 청소년들에게는 혹시 그것들이 그나마 재미있게 세상과 만나는 통로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들은 너무나 무성한 데 비해, 청소년들의 사회적 위치와 삶이 어떤지에 대한 고민과 논의에는 무성의하다.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으니 학교에서 무슨 교육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 발전을 위해 열심히 공부시켜서 똑똑한/창의적인 인재를 길러 내자’는 이야기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결국 개개인에게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소리니까 말이다. 가짜 뉴스가 문제니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해서 청소년들에게 문해력과 판단력을 갖춰 주자, 성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페미니즘·성평등교육을 해서 성평등 의식과 감수성을 길러 주자. 민주주의가 위기이므로 민주시민교육을 해서 민주 시민으로서의 능력을 갖게 하자. 비리와 범죄가 늘어나니까 인성·도덕교육을 강화해서 도덕성을 키우자…….
개인의 능력을 통한 대처, 일종의 각자도생을 주문하는 이러한 접근법을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밑바탕에는 학습자의 미성숙하고 무능력한 상태를 문제로 설정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믿는 교육관이 존재한다. 이런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보면 문제의 원인을 뒤바꾸기 십상이다. 어느새 가짜 뉴스가 배양되는 미디어 환경과 사회가 아니라, 가짜 뉴스에 속는 사람들, 리터러시가 부족한 청소년들이 문제시된다. 사실 가짜 뉴스, 성차별 등의 문제는 비청소년들에게도 충분히 심각하다. 반공주의나 국가주의·전체주의, 학력·학벌주의는 고령층에서 훨씬 심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소위 ‘미래 세대’로 호명되는 어린이·청소년들에 대한 교육만이 주로 해결책으로 거론된다. 어쩌면 현재의 사회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할 책임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려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런 교육들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들을 일방적으로 교육‘받는’ 대상으로 간주하며 무슨 교육을 하면 무슨 능력이 길러질 것이라는 전제부터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경시하는 것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한 바 있는데, 그런 느낌으로 명명해 보자면 이런 사고방식은 ‘부품 장착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기계에 부품을 추가하고 갈아 끼우듯이 이 기능 저 기능을 갖다 붙이려 드는 교육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사는 존재도, 배우는 존재도 아니다. 사람들은 문해력이 낮아서 가짜 뉴스를 믿고 음모론에 경도되는 것도 아니고, 토론을 할 줄 몰라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듣고 싶은 이야기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이야기라서, 친하고 믿는 사람들이 이야기해서, 의미 있고 정의로운 일을 하며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또한 지금 교육의 위기는 ‘무엇을 안 가르쳐서’라기보다는 (교육 불가능 담론이 진작 시사했듯) ‘무엇을 가르치려 해도 교육의 과정과 교육적 관계 자체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벌어진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교육 불가능성의 원인 중 하나는 아마도 청소년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일방적으로 주형(鑄型)하려 드는 관성일 것이다.
유예된 삶, 위기에 처한 사회, 변화된 조건
민주주의의 위기도, 안티 페미니즘 및 여성 혐오도 청소년들의 능력이 모자라서, 교육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또 무엇을 더 가르칠지에 골몰하느니, 청소년들의 삶이 어떤지, 그 여건과 환경은, 이 사회는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어떨까. 사회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도 그쪽이 더 적합할 테고, 교육적 시도를 포함해 유효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실행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위치와 특징은, 글머리에 나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묘사했듯이, 지금 여기에서 소속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채, 미래의 삶을 위해 유예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이주의적인 사회 체제와 능력주의적인 교육 제도는 청소년들에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것을, 경쟁을 위한 학업에만 주력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런 식으로 유예될 수 없고, 청소년의 삶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실존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가 현대 사회의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사춘기’니 하는 심리적 불안의 원인이다.
학업, 공부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의 공부는 대부분이 그 자체로 의미와 재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지적 즐거움이나 탐구, 성장, 사용 가치적 필요성을 위한 공부가 아닌 시험과 경쟁을 위한 공부니까 당연한 노릇이다. 과거 학교가 권위를 가지고 학력이 미래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보증해 주던 시기에는 그래도 학업 성적의 가치가 높고 이에 따르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학교교육의 권위도, 학력·학벌이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는 믿음도 약화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청소년이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정작 학교는 그만큼 의미 있는 공동체가 못 된다. 적지 않은 학생이 학급이나 동아리에서의 관계보다도 온라인으로 연결된 취미공동체나 게임 등으로 만난 관계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이것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학교 교사나 수업에서 나오는 내용은 경시하는 현상의 직접적 배경이기도 하다).
청소년의 특수성도 고려되어야겠지만, 사실 청소년들이 놓인 상황은 전 사회적인 상황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역공동체와 안정적 직장이 해체되며 고립되는 생활, 점점 심해지는 불평등·불안정, 자본주의의 붕괴와 기후 위기 등은 모두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의 삶의 조건 역시 악화되고 있다.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는 정신 건강 실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2025년 국제 연구소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15~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10.3명으로 비교 대상 42개국 중 5위였으며, 생활 만족도 조사에서도 36개국 중 30위에 그쳤다.❶ 이런 조건과 정치적 무력감 등이 결합하면서 청소년이든 아니든 전 사회적으로 극우주의, 소수자 혐오, 음모론, 폭력성 등이 자라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약간 다른 차원에서,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매체 환경의 변화도 짚을 필요가 있다. 미디어학자 닐 포스트먼은 아동기는 인쇄 매체와 문자 중심의 환경에서 탄생한 개념이며,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소멸하고 있다고 전망한다. 책과 문자 중심으로 정보가 전달되던 환경과 달리 텔레비전은 “사회적이건 성적이건 육체적이건 어른들이 가진 모든 비밀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진단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유튜브의 시대에 한층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이 접하고 이야기하던 각종 언어와 정보, 문화를 인터넷을 통해, 영상·이미지·게시물을 넘나들며 거의 격차 없이 접하고 있다. 포스트먼에 따르면 학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른을 만드는 기관”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는 학교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고를 요청한다.❷ 아동기·청소년기의 구분이 단순히 매체에 따른 것은 아니기에 이런 분석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린이·청소년을 학교에서 옛날처럼 통제하고 가르치려는 욕망이 점점 실현 불가능해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교육이 아닌 삶을 바꾸자
포스트먼은 이런 변화를 “최고의 사회적 재앙”이라고 평가했지만, 나는 이를 어린이·청소년을 구분하고 억압하는 체제가 개혁되어야 할 이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청소년의 삶은 유예될 수 없으며, 어린이·청소년은 오늘을 사는 시민이다. 어린이·청소년은 공동체에 소속되고 사회에 참여하면서 세상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청소년도 비청소년도 모두 함께 이야기하고, 성찰하고, 바꾸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을 여전히 학교에서 관리하고, 통제하고, 가르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식으로는 문제가 더 악화될 뿐이다. 학교에서 무슨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은 학생들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떤 경험인지는 학생들의 지금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학교교육과 수업은 학생을 ‘미래의 더 능력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공동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관계를 형성하며, 새로운 만남을 가지고, 세상에 참여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삶을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삶의 일부인 교육’, ‘삶으로서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위태로운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지속불가능성, 불평등과 불안정 등 각종 거시적인 사회의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교육을 바꿈으로써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환상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다만 청소년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데 함께하는 것은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마치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었듯이,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투쟁에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열렬하게 나서듯이 말이다. 그런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청소년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나’를 찬찬히 돌아보자. 교육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는 길뿐이다.
❶ “한국 아동·청소년, 학업 성취는 선진국 1위… 정신 건강 최하위”, 〈중앙일보〉, 2025년 5월 14일.
❷ 닐 포스트먼, 손화철 옮김(2016), 《불평할 의무》, 씨아이알.
특집 |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무엇을 가르칠까’보다 ‘어떻게 살고 있나’가 문제
공현 gonghyun@gmail.com
본지 기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투명가방끈 활동가
초·중·고 학생 시절을 떠올리니 필터가 씌워진 듯 뿌연 기억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오래전이라, 기억이 흐릿해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학교에서의 시간 대부분을 실감도 의미도 없이 보냈다.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까 다니고 공부해야 한다니까 공부할 뿐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은 재미있었지만 단발적이었고 큰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충실했던 시간이 있다면 애니메이션과 만화, 각종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순간들과 게임에 몰입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발 디딘 곳 없이 붕 떠 있는 듯한 감각으로 살았으니 나는 대개 좀 ‘멍한’ 상태였다. 의무와 규율은 넘쳐났지만 내가 책임을 느끼는 일, 지켜 낼 것이나 해낼 일은 없었다. 진정으로 열중하는 일이나 재미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에 던져진(Geworfenheit, 彼投) 채로, 주어진 상황과 정해진 삶의 방식 속에 그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좀 사는 것처럼 살게 된 것은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난 덕이었다. 운동을 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됐고, 스스로 기획하고 시도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됐다. 세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호흡하는 감각을 알게 됐다. 나는 반농담조로 인권운동을 하면 사회화가 잘되고 사회성이 자란다고 하곤 한다. 바로 내가 인권운동을 하면서부터 비로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같이 생활하고 소통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애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인권운동과 활동가로서의 내 삶을 사랑하고,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고 여긴다.
부품 장착식 교육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 까닭은 최근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극우 이데올로기, 음모론, 안티 페미니즘 등에 경도된 10~20대들(특히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늘었다. ‘요즘 애들이 걱정’이라며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 ‘뭐를 안 가르쳐서 문제다’ 말한다. 그런데 과연, 사는 것 같지 않던 학창 시절의 내가 민주주의니 성평등이니 하는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뭐가 와닿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베’ 용어를 남발하는 청소년들, 혐중 음모론 따위를 믿는 청소년들에게는 혹시 그것들이 그나마 재미있게 세상과 만나는 통로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들은 너무나 무성한 데 비해, 청소년들의 사회적 위치와 삶이 어떤지에 대한 고민과 논의에는 무성의하다.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으니 학교에서 무슨 교육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 발전을 위해 열심히 공부시켜서 똑똑한/창의적인 인재를 길러 내자’는 이야기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결국 개개인에게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소리니까 말이다. 가짜 뉴스가 문제니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해서 청소년들에게 문해력과 판단력을 갖춰 주자, 성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페미니즘·성평등교육을 해서 성평등 의식과 감수성을 길러 주자. 민주주의가 위기이므로 민주시민교육을 해서 민주 시민으로서의 능력을 갖게 하자. 비리와 범죄가 늘어나니까 인성·도덕교육을 강화해서 도덕성을 키우자…….
개인의 능력을 통한 대처, 일종의 각자도생을 주문하는 이러한 접근법을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밑바탕에는 학습자의 미성숙하고 무능력한 상태를 문제로 설정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믿는 교육관이 존재한다. 이런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보면 문제의 원인을 뒤바꾸기 십상이다. 어느새 가짜 뉴스가 배양되는 미디어 환경과 사회가 아니라, 가짜 뉴스에 속는 사람들, 리터러시가 부족한 청소년들이 문제시된다. 사실 가짜 뉴스, 성차별 등의 문제는 비청소년들에게도 충분히 심각하다. 반공주의나 국가주의·전체주의, 학력·학벌주의는 고령층에서 훨씬 심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소위 ‘미래 세대’로 호명되는 어린이·청소년들에 대한 교육만이 주로 해결책으로 거론된다. 어쩌면 현재의 사회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할 책임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려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런 교육들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들을 일방적으로 교육‘받는’ 대상으로 간주하며 무슨 교육을 하면 무슨 능력이 길러질 것이라는 전제부터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경시하는 것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한 바 있는데, 그런 느낌으로 명명해 보자면 이런 사고방식은 ‘부품 장착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기계에 부품을 추가하고 갈아 끼우듯이 이 기능 저 기능을 갖다 붙이려 드는 교육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사는 존재도, 배우는 존재도 아니다. 사람들은 문해력이 낮아서 가짜 뉴스를 믿고 음모론에 경도되는 것도 아니고, 토론을 할 줄 몰라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듣고 싶은 이야기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이야기라서, 친하고 믿는 사람들이 이야기해서, 의미 있고 정의로운 일을 하며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또한 지금 교육의 위기는 ‘무엇을 안 가르쳐서’라기보다는 (교육 불가능 담론이 진작 시사했듯) ‘무엇을 가르치려 해도 교육의 과정과 교육적 관계 자체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벌어진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교육 불가능성의 원인 중 하나는 아마도 청소년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일방적으로 주형(鑄型)하려 드는 관성일 것이다.
유예된 삶, 위기에 처한 사회, 변화된 조건
민주주의의 위기도, 안티 페미니즘 및 여성 혐오도 청소년들의 능력이 모자라서, 교육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또 무엇을 더 가르칠지에 골몰하느니, 청소년들의 삶이 어떤지, 그 여건과 환경은, 이 사회는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어떨까. 사회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도 그쪽이 더 적합할 테고, 교육적 시도를 포함해 유효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실행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위치와 특징은, 글머리에 나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묘사했듯이, 지금 여기에서 소속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채, 미래의 삶을 위해 유예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이주의적인 사회 체제와 능력주의적인 교육 제도는 청소년들에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것을, 경쟁을 위한 학업에만 주력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런 식으로 유예될 수 없고, 청소년의 삶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실존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가 현대 사회의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사춘기’니 하는 심리적 불안의 원인이다.
학업, 공부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의 공부는 대부분이 그 자체로 의미와 재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지적 즐거움이나 탐구, 성장, 사용 가치적 필요성을 위한 공부가 아닌 시험과 경쟁을 위한 공부니까 당연한 노릇이다. 과거 학교가 권위를 가지고 학력이 미래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보증해 주던 시기에는 그래도 학업 성적의 가치가 높고 이에 따르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학교교육의 권위도, 학력·학벌이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는 믿음도 약화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청소년이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정작 학교는 그만큼 의미 있는 공동체가 못 된다. 적지 않은 학생이 학급이나 동아리에서의 관계보다도 온라인으로 연결된 취미공동체나 게임 등으로 만난 관계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이것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학교 교사나 수업에서 나오는 내용은 경시하는 현상의 직접적 배경이기도 하다).
청소년의 특수성도 고려되어야겠지만, 사실 청소년들이 놓인 상황은 전 사회적인 상황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역공동체와 안정적 직장이 해체되며 고립되는 생활, 점점 심해지는 불평등·불안정, 자본주의의 붕괴와 기후 위기 등은 모두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의 삶의 조건 역시 악화되고 있다.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는 정신 건강 실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2025년 국제 연구소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15~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10.3명으로 비교 대상 42개국 중 5위였으며, 생활 만족도 조사에서도 36개국 중 30위에 그쳤다.❶ 이런 조건과 정치적 무력감 등이 결합하면서 청소년이든 아니든 전 사회적으로 극우주의, 소수자 혐오, 음모론, 폭력성 등이 자라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약간 다른 차원에서,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매체 환경의 변화도 짚을 필요가 있다. 미디어학자 닐 포스트먼은 아동기는 인쇄 매체와 문자 중심의 환경에서 탄생한 개념이며,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소멸하고 있다고 전망한다. 책과 문자 중심으로 정보가 전달되던 환경과 달리 텔레비전은 “사회적이건 성적이건 육체적이건 어른들이 가진 모든 비밀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진단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유튜브의 시대에 한층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이 접하고 이야기하던 각종 언어와 정보, 문화를 인터넷을 통해, 영상·이미지·게시물을 넘나들며 거의 격차 없이 접하고 있다. 포스트먼에 따르면 학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른을 만드는 기관”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는 학교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고를 요청한다.❷ 아동기·청소년기의 구분이 단순히 매체에 따른 것은 아니기에 이런 분석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린이·청소년을 학교에서 옛날처럼 통제하고 가르치려는 욕망이 점점 실현 불가능해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교육이 아닌 삶을 바꾸자
포스트먼은 이런 변화를 “최고의 사회적 재앙”이라고 평가했지만, 나는 이를 어린이·청소년을 구분하고 억압하는 체제가 개혁되어야 할 이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청소년의 삶은 유예될 수 없으며, 어린이·청소년은 오늘을 사는 시민이다. 어린이·청소년은 공동체에 소속되고 사회에 참여하면서 세상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청소년도 비청소년도 모두 함께 이야기하고, 성찰하고, 바꾸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을 여전히 학교에서 관리하고, 통제하고, 가르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식으로는 문제가 더 악화될 뿐이다. 학교에서 무슨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은 학생들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떤 경험인지는 학생들의 지금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학교교육과 수업은 학생을 ‘미래의 더 능력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공동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관계를 형성하며, 새로운 만남을 가지고, 세상에 참여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삶을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삶의 일부인 교육’, ‘삶으로서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위태로운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지속불가능성, 불평등과 불안정 등 각종 거시적인 사회의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교육을 바꿈으로써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환상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다만 청소년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데 함께하는 것은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마치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었듯이,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투쟁에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열렬하게 나서듯이 말이다. 그런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청소년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나’를 찬찬히 돌아보자. 교육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는 길뿐이다.
❶ “한국 아동·청소년, 학업 성취는 선진국 1위… 정신 건강 최하위”, 〈중앙일보〉, 2025년 5월 14일.
❷ 닐 포스트먼, 손화철 옮김(2016), 《불평할 의무》, 씨아이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