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호[특집]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실패하는 이유 | 박권일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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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실패하는 이유

- 능력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모순과 성찰의 결핍



박권일  xenga@naver.com

미디어사회학자, 《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세계를 휩쓰는 극우·극단주의에서 한국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의 등장 직후, 청년 세대의 극우화 역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오래 전부터 완연했던 그 흐름은 윤석열 정권 들어 더욱 거세졌고, 급기야 법원을 습격하는 폭동으로 번졌다. 이런 시대이기에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 왔다”는 어느 진보 성향 교육학자의 글이 크게 화제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인공은 서울교대 권정민 교수다.


미국에서 비판 이론을 전공했다는 그는, 아들의 성장 과정 내내 “깨어 있는, 진보적인, 인권 감수성이 높은 남자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매일 토론을 하고, 전 세계를 데리고 여행 다니며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보여 주고, 시사 문제를 아이와 이야기했다. 예술과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해 클래식 음악 공연, 발레 공연, 뮤지컬 공연, 국악 공연, 미술관과 박물관을 섭렵했다.”❶ 그런데 이렇게 열정을 다해 키운 아들이 어느 날 극우 유튜버에 빠지게 됐다. 그때부터 권정민은 수개월 동안 토론을 반복하며 아들의 머리에서 극우적 신념을 빼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시작한다. 그 결과 아들을 다시 극우의 수렁에서 건져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본 ‘극우 이대남’을 떠올리면서, 권정민의 ‘성공 사례’에 상찬을 퍼부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시니컬한 반박도 터져 나왔다. 문제 제기의 상당수는 극우에 맞서 싸워 온 좌파들에게서 나왔는데, 대체로 엄마의 ‘교육 철학’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이 글 역시 권정민 사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다. 교육학자의 ‘극우 아들 구출기’는 왜 한국의 범상한 ‘민주시민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각별히 교훈적이다. 지금부터 ‘극우 아들 구출기’에 담긴 모순과 자가당착, 나아가서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에 내재한 문제점을 짚고 대안의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이중 구속


‘이중 구속(double bind)’은 인류학자이자 정보과학자였던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제시한 개념이다. 본래 조현병과 관련된 연구로 알려졌지만, 오늘날에는 둘 이상의 모순된 메시지로 인해 발생하는 의사소통 딜레마를 가리키는 개념으로도 포괄적으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들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지만 얼굴은 냉담하거나 다른 일에 바쁘게 몰두하고 있을 때, 아들은 ‘엄마는 왜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보지 않지’ 하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이것이 이중 구속 상황이다. 이중 구속은 가족의 애착만이 아니라 교육, 페다고지에 적용할 수도 있다. 예컨대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수업에서 차별이 왜 나쁜지에 대해 가르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감동적인 예시와 명쾌한 이론으로 차별의 해악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학교의 일상에서 그 교사는 성적 좋은 학생, 가정 형편이 부유한 학생만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걸 본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선생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극단적으로 고민하다가 조현병에 걸리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선생님의 교육 내용을 불신하거나 냉소하는 학생들이 생길 거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권정민의 경우는 이중 구속을 야기하는 전형적 사례다. 여기서 이중 구속은 표층과 심층에서 2번 발생한다. 먼저 ‘표층 이중 구속’을 보자. 그것은 권정민의 말과 이후 행동이 서로 충돌하며 빚어진다. 그는 화제가 된 글에서 “극우 유튜버의 비민주적 개소리들을 저격할 수 있는, 청소년에게 매력적인 유튜브 방송이 더 많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방송에 출연해서는 “(아이들이) 음모론에 빠지지 않고 단편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충격적인 건 권정민이 이런 이야기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나가서도 반복했다는 점이다.


김어준이 누구인가? “음모론을 사람 꼴로 빚으면 김어준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난 20여 년간 음모론을 통해 한국의 공론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005년 황우석 논문 조작 사태 당시 김어준은 논문 조작을 검증한 브릭을 신뢰할 수 없는 곳이라고 비방하며 황우석을 피해자라고 옹호했다. 김어준이 2017년 제작에 나선 다큐멘터리 〈더 플랜〉은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개표가 조작됐다는 선거 조작 음모론을 제기했다. 2018년에는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를 제작해 세월호 고의 침몰 음모론을 유포했다. 물론 전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굵직한 것으로만 꼽아도 이 정도이고, 그 외에도 김어준이 퍼뜨린 잡다한 음모론과 거짓말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법률상 언론이라면 최고 수준의 제재를 받았을 것이고, 학자였다면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됐을 만한 행적이다. 그러나 김어준은 제대로 된 사과는커녕 해명조차 변변히 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 특히 더불어민주당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나아가 김어준은 극우 음모론의 강력한 ‘롤 모델’로 기능한다. 그 생생한 예시가 2025년 2월 4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계엄 국정 조사 특별위원회 2차 회의의 한 장면이다.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부정 선거 의혹이 허위라고 답변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럼 2012년에 부정 선거가 일어났다는 영화 〈더 플랜〉을 만든 김어준 씨도 극우 세력입니까?” 이 영상에 달린 500회 이상 추천을 받은 댓글은 “이재명, 김어준이 부정선거론 펼치면 우국충정이고 일반 국민이 선관위 부정 선거 의혹 제기하면 형사 처벌이냐”였다. 이제 김어준은 극우 음모론자들에게 없어선 안 되는 최고의 ‘땔감’이자 ‘핑계’다.


권정민은 그 김어준의 방송에 출연했다. 김어준 방송에 나가 음모론을 비판하는 일은 마치 조폭과 어깨동무하고 ‘폭력 반대’를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우리 편 음모론’은 괜찮지만 ‘상대방 음모론’은 틀렸다는, 이른바 ‘내로남불’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음모론과 단편적인 생각”에 대한 문제의식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가지려면 김어준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권정민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김어준 방송에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 김어준 방송은 그리 쿨하지 않다”라고 하면서도 수십 년간 쏟아 낸 수많은 음모론과 “개소리(bullshit)”, 그 사회적 유해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문제의식도 비치지 않았다. 핵심은 “쿨함”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권정민이 투명하게 노출해 버린 비논리와 모순이다. 만약 이런 오류를 보고도 아들이 극우에서 다시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다면, 그건 엄마의 지성과 비판적 토론 때문이 아니라 엄마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이중 규범


권정민 사례에는 ‘심층 이중 구속’도 존재한다. 그것을 간명하게 표현해 본다면, ‘민주주의와 능력주의의 충돌’이다. 이는 앞선 ‘표층적 이중 구속’보다 거시적인 문제로서, 권정민이라는 개인을 넘어 한국 사회의 지배 이념과 규범 교육 사이의 구조적 긴장을 함축한다.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은 논의의 방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질과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체제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의 인식만이 아니라 동료 시민과의 협력과 연대, 비판적 사고를 통한 문제 해결 능력 등을 포함한다. ‘민주시민교육’의 근본 가치는 당연히 민주주의인데, ‘인민(demos) 스스로의 지배(cratia)’를 뜻하는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은 존재의 평등, 법 앞에서의 평등이다. 함께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한 존재여야 한다. 그 평등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구성원에 대한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달리 말하면 차별과 혐오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뜻한다.


‘민주시민교육’의 과정에는 이러한 가치 규범들이 비교적 충실히 녹아들어 있다. 문제는 규범과 현실의 괴리다. 물론 규범은 언제나 현실과 떨어져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다가가야 할’ 지향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현실이 규범과 괴리된 것이 문제라기보다, 교육 규범과 지배 규범이 일종의 ‘이중 규범’ 상태로 병존하는 것이 문제다. 더욱이 이 둘은 단순히 괴리된 것을 넘어 격렬하게 상충한다. 여기서 교육 규범은 민주주의(democracy)이고, 지배 규범은 능력주의(meritocracy)다. 


능력주의는 ‘능력·자질·장점(merit)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이를 풀어내면 결국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념이 된다. 만인의 평등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와 달리 능력주의는 만인의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게 능력주의를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불평등을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에게 능력주의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민주주의는 선거 때나 잠깐 경험하는, 화석화되고 추상적인 이념으로 인식되곤 한다. 앞서 교육 규범으로서 민주주의가 현실 규범으로서 능력주의와 병존한다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시민교육’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능력주의의 비대칭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능력주의는 너무나 강력하게 현실을 규율하기에 따로 교육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시험과 경쟁을 통해 구현되어 왔다. 학력 획득을 통한 지위 상승을 경험한 사람들은 시험을 통해 극소수가 돈과 명예를 독점하는 시스템을 ‘공정’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면 많은 사람들은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세습주의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옹호한다. 그러나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불공정’의 문제로 대체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경쟁의 규칙에만 집착하면서 ‘격차’ 자체에는 둔감해진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세습주의보다 오히려 위험한 이념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능력주의》의 문장을 하나 인용한다. “능력주의-형식적 공정성은 실재하는 불평등을 교정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경우 그것은 구조적 불공정성의 기제로 작동하며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할 뿐 아니라, 노골적·불법적 불공정을 알리바이 삼아 현존하는 불평등을 ‘정상’으로 승인한다.”


20세기 내내 한국의 학교는 교육의 장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입시 경쟁의 치열한 각축장이었고, 21세기 들어서는 입시 경쟁의 주도권마저 사교육 시장에 완전히 내어주었다. 학교에서 교육되는 민주주의, 공동체 윤리는 이제 사회가 실제로 돌아가는 질서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평등’을 말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약자·소수자 혐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을 때, 민주주의 가치를 말하지만 일상 속에서는 엘리트주의에 찌들어 있을 때, ‘민주시민교육’, 즉 민주주의가 품은 진보적 가치들은 약육강식·각자도생의 현실에 눈감은 ‘공자님 말씀’이거나, 능력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의 교양을 부각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특히 한국의 고학력 중산층 진보 인사들에게서 이런 멘탈리티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때로는 냉소를 넘어 강렬한 반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얼마 전 크게 화제가 된 연세대 탄핵 반대 시국선언 대표 박준영 씨가 대표적이다. 20대 청년인 그의 부모는 모두 이름이 잘 알려진 진보 성향 인사다. 아버지는 전 MBC 사장 박성제 씨이고 어머니는 문재인 정부 디지털 소통센터장 정혜승 씨다. 그런데 아들인 박준영 씨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관저에서 쫓겨난 윤석열과 ‘눈물의 포옹’을 연출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극우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은 어째서 그가 부모와 갈등하게 됐는지, 나아가 ‘민주시민교육’이 내장한 모순이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보여 준다.


“부모님은 정의를 추구하시긴 하나 위선적인 면모가 있었어요. 저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를 보고 평등을 외치는 사람이 자식을 부정한 방법으로 ‘엘리트화’ 시켰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조 전 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를 감싸는 뉴스를 내보내셨고, 여기서 처음 부모님과 정치적 견해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조국과 부모님은 닮은 면모가 있습니다. 평등을 말씀하지만 본인의 자녀들은 어떻게든 ‘엘리트화’하려 하셨습니다.”


저 발언의 하이라이트는 “평등을 말하지만 본인 자녀들은 어떻게든 ‘엘리트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딩에만 주목해선 안 된다. 화룡점정은 저 인터뷰로부터 한 달 뒤 박준영 씨가 관저에서 쫓겨난 윤석열과 포옹하는 장면이다. 그때 박 씨는 이른바 ‘명문대 학생’의 상징인 연세대 ‘과잠’을 입고 있었다. 박준영의 이야기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도덕적 정당성이 어디서 파탄하게 됐는지를 보여 줌과 동시에, 부모의 위선을 비판하는 자 역시 능력주의에 똑같이 예속된 주체임을 외설적으로 폭로한다.



민주주의 교육은 왜 실패하는가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은 엘리트가 되어서도, 자식이 엘리트가 되길 욕망해서도 안 되는가? 안 될 것 없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게 모순적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평등한 사회를 욕망하면서 불평등한 개인을 욕망한다는 것, 그것은 윤리적으로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수행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가치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을 탓하면서 “보수에게 한없이 관대한 도덕적 잣대가 왜 진보에게만 가혹하냐”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물론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보수에게 동일한 잣대를 요구하는 것이 맞지 진보가 같이 타락하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출세한 다음에, 엘리트가 되어서 단숨에 사회 진보를 이루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느냐고. 즉, 일종의 효용주의(utilitarianism)다. 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미국 실리콘밸리 일부 엘리트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가 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스스로 자선을 실천하는 건 한계가 명확하지만, 일단 엄청난 부를 쌓은 다음 그 돈으로 선행을 하면 직접 할 때보다 몇 백, 몇 천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돈을 어떻게 벌어들이는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결과적으로 ‘최대한의 선’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사기를 치거나 무기를 팔아서 엄청난 부를 쌓아도 문제가 없다. 이런 사고방식은 ‘미래의 수십억 명을 구하기 위해서 지금 수십만 명의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이어질 수 있기에 위험천만하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자신들의 ‘냉정한 계산’만이 판단 기준일 뿐, 감정 같은 것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복잡하고 우연적인 현실 세계를 고려할 때, 인간 행위의 이득과 손실을 더한 총 효용을 완벽히 계산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할 뿐만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야심이다. 선(善)의 실천은 효용 게임으로 환원될 수 없고 가치는 그 가치의 실현 과정과 완벽히 분리될 수 없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느냐도 중요한 고려 요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효율적 이타주의자로는 가상 화폐 거래소 FTX의 창립자 샘 뱅크먼-프리드가 있다. 그는 한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가상 화폐 거래소를 운영했지만, 고객의 돈을 빼돌려 계열사 부채를 갚거나 해외 부동산을 구입하는 데 썼고, 파산 직후 바하마로 도주했다 붙잡혀 2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효율적 이타주의의 문제를 극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어떤 가치와 그 가치를 ‘어떻게 실현하고 왜 실현하는가’는 불가분의 관계다. 세상은 효용주의자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며, 가치와 가치 실현 과정의 비일관성은 대체로 신뢰 위기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진보가 건물주가 되는 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주장은 도덕 강박으로부터 진보를 해방시키기는커녕 진보의 입지를 단번에 좁히는 자해 행위다. 능력주의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금 여기’의 일상을 향하지 않고 머릿속 이상으로 남아 있는 한, 민주시민의 육성도, 극우·혐오 세력과의 싸움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진정으로 교육하고 싶다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는 곧, 한국 사회의 지배 규범인 능력주의를 근본적으로 문제화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왜 계속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도출된 것 같다. 한국 사회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진보적 가치나 비판 이론 따위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바로 ‘성찰’의 결핍 때문이다. 



❶  권정민,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 왔다”, 〈교육언론 창〉, 2025년 1월 21일.

❷  Bateson, G. Jackson, D. D. Haley, J. & Weakland, J.(1956),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 Behavioral science, Vol. 1, pp. 251–264. 

❸  “극우 유튜브서 아들을 구출했다”, 〈MBC〉, 2025년 2월 27일. 

❹  박권일(2021), 《한국의 능력주의》, 이데아, 20쪽.

❺  “박준영 연세대 시국선언 대표 “부모님과 뜻 다르지만… 난 나라 위해 바른 길 가겠다””, 〈스카이데일리〉, 2025년 3월 19일.

❻  피터 싱어의 철학적 개념으로도 잘 알려졌지만, 여기서 효율적 이타주의는 철학자 윌리엄 맥어스킬의 주장에 더 가깝다; MacAskill, W.(2015), Doing Good Better: How Effective Altruism Can Help You Make a Difference, Penguin Random House, 전미영 옮김(2017), 《냉정한 이타주의자》,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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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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