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호[기획] 장애 학생 아동학대 판결이 말하지 않는 것 |우리는 학생을 중심에 놓고 있는가 | 이수현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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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장애 학생 아동학대 판결이 말하지 않는 것


우리는 학생을 중심에 놓고 있는가

-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와 사라지는 장애 학생의 권리



이수현  callmehotdog@naver.com

경기 김포 푸른솔중





녹음기에 가려진 현실


지난 5월, 유명 웹툰 작가의 아들을 학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특수 교사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를 두고 장애인부모연대 등 학부모단체는 문제를 제기했고 교사단체(노조)는 환영 논평을 내어 온도차를 보였다. 양측의 입장은 처음부터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교사이자 장애인의 부모라는 정체성을 가진 나는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못한 채 감정의 피로도만 쌓이고 있다. 양측의 입장 모두 가장 중요한 논의는 빠져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빨리 결론을 내어 문제점을 짚고 현장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을 때 나는 ‘녹음기’라는 충격적 도구에 불에 데인 듯 놀랐다. 아마도 이 사건이 ‘학대’보다는 힘 있는 학부모의 ‘갑질 수단’으로서 ‘녹음기’를 강조하며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서이초 사건으로 교사의 죽음과 학부모 갑질 논란이 가열되고 있었고, 나 역시 내가 겪었던 진상 학부모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을 조금 더 들여다보니, 단순히 녹음기와 갑질 프레임으로 이해하기에는 분명 어딘가 석연찮았다. 이 사건은 특수교육대상학생이 중심에 있었고, 통합교육의 현실이라는 구조적 맥락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통합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학생 ‘분리’와 특수 교사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 처리하려는 관행의 문제가 스며 있었다. 하지만 언론과 대중은 문제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장애 혐오, 통합교육 무용론, 혹은 웹툰 작가 때려잡기로 흐르며 사안이 소비되어 갔다. 특수 교사 단체는 교사의 발언이 학대가 아닌 교육적 지도라는 점과 녹음기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특수교육대상자의 부모들 역시 교사의 발언이 아동학대에 해당한다는 점, 학대를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녹음기뿐이었다는 점을 들어 부모를 옹호하며 맞섰다. 모두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만 목소리를 냈다.



‘지원’인가, ‘격리’인가


“정우가 교실에서 바지를 내렸어요. 소변 실수를 한 뒤 화장실로 가려 했는데, 참기 어려웠는지 교실 뒤편에서 바지를 내린 거예요. 다행히 옆에 있던 사회복무요원이 재빨리 수습해서 친구들은 보지 못했어요.”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자폐성 장애가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내 아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단지 다른 점은 정우 곁에는 사회복무요원이 있어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만약 아무도 곁에 없었다면, 젖은 속옷의 축축함을 견디지 못한 정우는 바지를 벗어 던졌을지도 모른다. 


잘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어떻게 교실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죠?” 감각 처리와 사회적 맥락 해석의 어려움은 자폐성 장애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교실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장애인은 수치심이나 규칙, 예절을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겠지만, 정우는 구체적이고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다. 가정에서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하더라도 배우기 어렵고, 단체 생활을 통해서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통합학급 담임 교사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날은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혹시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였다. 며칠 간 정우가 안정될 때까지 특수반에서 수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정우가 특별히 불안정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학교가 대응 방안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 동의했다. 하루이틀 뒤 별다른 문제없이 다시 통합반으로 복귀했지만,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지울 수 없었다.


- 학교는 정우를 특수반으로 분리해서 무엇을 가르쳤을까? (성교육 또는 공공생활 에티켓 교육이 수준에 맞게 이루어졌을까?) 

- 친구들과 떨어져 지낸 이유를 학교는 정우에게, 또는 학급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했을까?

- 통합반으로의 분리는 처벌을 통한 행동 수정이 목표였을까?

- 정우의 행동 수정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분리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만약 그날 누군가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민원을 제기했다면, 학교는 어떤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을까? 정우는 다시 통합반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정우는 자폐성 장애로 인해 특수교육대상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 ‘장애로 인한 교육적 필요’ 때문에 지원을 받는 학생이다. 그런데 정작 그 장애의 대표적 특성 때문에 ‘교실에서 배울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그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장애가 이유가 되어 분리된다면, 이는 통합교육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포장된 분리, 교육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학생


통합교육이란,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학생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차이를 배제나 분리의 이유로 삼지 않고, 각자의 특성에 맞는 동등한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교육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분리’라는 빠르고 익숙한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가장 손쉬운 대응일 뿐만 아니라, 다수의 학생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기도 한다. 특수교육대상학생은 더욱 쉽게 교실에서 분리된다. 복잡한 회의나 정식 절차 없이도 특수학급으로 이동시킬 수 있고, 이를 ‘특수교육적 목적’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는 분리는 때때로 본래 목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된 것이 과연 통합교육 안에서 적절한 지원을 받기 위함인지, 아니면 일반 교육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게 하는 장치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웹툰 작가의 아들 또한 자폐성 장애가 있어 특수교육대상학생으로 선정되었다. 자폐성 장애는 사회적 의사소통이 어렵고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 또는 돌발 행동을 하는 특성이 있다. 공공장소에서 허용이 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이 장애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이를 반복적 훈련과 학습을 통해 배워야 한다. 즉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는 얘기다. 초등학교 2학년은 비장애 학생조차 사회적 기술을 온전히 습득하지 못한 어린 나이다. 그렇다면 자폐성 장애를 가진 그 학생은 학교에서 어떤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았을까?


만약 피해 학생의 호소로 인해 부득이하게 분리 조치가 이뤄졌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교육적 대응이 있었을까? 한 교실에서 함께 배우던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비장애 학생들에게 어떤 설명이 이루어졌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그 학생이 다시 교실로 돌아왔을 때,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논의가 이루어졌을까? 통합교육이라는 이상 아래, 학교는 여전히 장애 학생을 특별한 존재로 분리하고 보호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것이 배려인 줄 알지만 실상은 ‘통합’이 아니라 ‘포장된 분리’일 때가 많다.


많은 학교에서는 특수 교사를 한 명 배치한 것으로 모든 지원을 마쳤다고 간주한다. 일반 교사는 장애 학생의 개별 요구를 파악할 시간도, 방법도 없다.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장애 학생은 배움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와 보호의 대상이 된다. 이 구조 안에서 특수 교사는 통합학급 내 문제까지 혼자 떠안게 된다. 그 결과, 통합교육의 책임이 특정 교사 한 명에게 과중하게 집중된다. 특수 교사는 과중한 책임과 피로에 짓눌리고,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는 불안과 절망에 갇힌다. 이 긴장 구조 안에서 학생은 점점 교육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누구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의 미래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그 웹툰 작가의 아들 또한 이 전형적 구조 안에서 피해를 입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갈등을 소비하는 사회, 사라지는 학생


“청주 한 고교서 특수교육대상 학생 흉기 난동… 가방에 흉기 4종 소지”

“또 교사 폭행… 중학교 특수학급 학생, 쓰레기통 던졌다”

“특수학급 학생이 할퀴고 넘어뜨려...인천 초등 교사 ‘전치 6주’”

“특수학급 학생에게 맞은 교사 발가락 골절”


위 기사 제목들처럼 특수교육대상학생과 관련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방식은 늘 비슷하다. ‘특수교육대상학생’임이 강조되고 마치 특수교육대상학생이 폭력을 저지르는 위험한 집단인 것처럼 매도된다. 사실 특수교육대상학생 관련 사건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언론은 최대한 자극적으로 세상에 알린다. ‘짐승’, ‘성적 행동 집착’, ‘성추행’ 등의 수식어가 초등학교 2학년인 어린이에게도 서슴없이 붙는다. 누군가가 피해를 호소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해자로 지목된다. 익숙한 갈등 구도에 사건을 얹기도 한다. ‘유명인의 갑질’, ‘교사의 학대’, ‘장애 학생의 폭력성’, ‘비장애 학생의 피해’, ‘불안에 떠는 학부모’, ‘소진된 교사’ 같은 자극적인 키워드들이 빠르게 붙는다.


문제는 이런 프레임화된 이야기 구조 속에서 학생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학생이 어려움이나 문제를 가지게 되었는지 배경과 원인은 모두 삭제된 채 자극적인 결과만 남는다. 교육과 보호를 받아야 할 학생이 오히려 엄청난 언론의 폭력에 노출된다. 대중은 언론이 사건을 소비하는 방식을 따라간다. 사건 이후 미성년인 학생이 지금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학생은 그저 갈등을 증명하는 배경이자, 어느 쪽을 옹호하기 위한 장치처럼 다뤄진다.


웹툰 작가 사건 역시 그랬다. 대중은 어느새 둘 중 하나의 편을 골라 분노하거나 옹호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교사는 아무 말도 못 하겠다”라며 분노했고, 또 다른 이들은 “장애 학생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라고 외쳤다. 모두가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는 일에는 열중했지만, ‘그 학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침묵했다. 


사건은 빠르게 소비되고 잊혔다. 그리고 현장은 그대로 남았다.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통합교육의 이상은 더욱 멀어졌다. 교사들은 더욱 위축되었고, 학부모는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피폐한 교육 현실 속에 학생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있다.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고, 같은 절차로 학생이 교육 현장에서 사라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갈등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사건으로만 소비하고, 구조로서 성찰하지 않는 사회는 같은 문제를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 현실 속에서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존재는 언제나 학생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의 자리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가


학교는 교육의 공간이다. 배움의 주체는 학생이다. 우리가 사건을 통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어려움과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학생의 어려움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앞으로의 교육을 위해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이 질문은 단순히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갈등을 넘어, 교육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를 묻는다. 교사와 학부모 중 누가 더 옳았는지를 따지는 이분법은 교육을 병들게 한다. 누구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학생을 중심에 두고 사고했는가, 아니면 각자의 입장 방어에 몰두했는가이다. 


언론은 학생의 인권과 교육적 요구는 고려하지 않은 채, 부모의 분노와 교사의 억울함만을 자극적으로 보도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어떠한 구조적 문제가 있는지, 누구나 존중받는 교육을 위해 무엇을 지원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학생을 교육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사의 고립을 풀고, 학부모의 불신을 낮추며, 학교가 모든 학생을 ‘관리’가 아닌 ‘존중’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되고, 협력할 수 있다. 서로를 적대하는 구조 속에서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다.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결국은 함께 무너진다. 학생을 교육의 중심에 두는 사고와 실천, 이 단순한 진실을 회복할 때 비로소 신뢰가 무너진 학교가 회복될 것이다. 이제 다시 묻자. 우리는 정말 학생을 중심에 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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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