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다시 만들어야 할 새로운 민주주의
- 12.3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제언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다시 묻는 민주주의 - 그건 정말 민주주의였을까?
나는 요즘 춘천에 있는 한 작은도서관에서 민주주의 강의를 시작했다. 총 12주에 달하는 긴 강의니, 대략 대학의 한 학기 수업 일정과 맞먹는다. 민주주의 강의라니, 그것도 12주 동안 민주주의라는 주제만을 다룰 수 있다니, 꿈만 같다. 내 전공은 정치사상이고,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소개하지만, 민주주의 강의를 한 지는 10년도 넘었다. 근래 내가 하고 있는 강의는 주로 교육, 돌봄, 기후, 생태 등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 활동 분야와 관련된 주제다. 최근 더욱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그 위기가 직접 드러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같은 기간에 민주주의 위기 역시 심화되어 왔다. 진보적 사회운동단체와 조직들에서도 곳곳에서 조직 내 민주주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회운동단체들이나 학습 모임에서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12.3 쿠데타 이후로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나 글 청탁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돌아온 것은 반갑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그만큼 커진 민주주의 위기가 있다.
춘천에서 시민들과 처음 강의를 시작하던 날, 나는 예전에 대학에 있을 때 수업 시간에 했던 토론을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통념을 스스로 확인해 보는 토론이었다. 먼저 조를 나눈 다음에 각 조별로 가상의 파이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문제를 낸다. “이 파이를 가장 민주적으로 나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은 무엇일까? 맞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모두가 ‘공평하게’ 1/n로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너무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방법을 지지하기 때문에, 나는 문제의 조건문에서 그 방법을 제외했다. ‘단, 1/n로 나누는 것은 제외하라’고. 그때부터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진다.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어떤 조는 돌아가면서 파이를 각자 필요한 만큼 잘라 가도록 한다. 어떤 조는 내 파이를 자르는 권한을 다음 사람에게 준다. 옆사람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는 이유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러 방안 중에는 충격적인 방법도 있다. 그중 하나는 팀장에게 모든 권한을 준다는 것이다. 왜냐고 물으니, 그 팀장이 좋은 사람이라서 믿고 맡긴단다. 조별 토론이나 과제에서 항상 헌신적으로 팀을 이끌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봐도 민주적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하필이면 팀장이 ‘복학생 고학년 오빠’이고, 나머지 조원들은 모두 1학년 새내기 여학생들이다. 누군가가 웃으면서 외친다. “여러분, 가스라이팅 당한 거 아니예요?” 다른 조에선 의구심을 갖지만 정작 해당 팀원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민주적이라고 자신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좋은 리더를 뽑았고, 고학년인 그는 경험과 지식에서 저학년인 자신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의 실력과 품성이 검증도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파이를 나누는 것에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반박하기도 어렵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적 대표 선출이란 것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훌륭한 대표자를 잘 뽑는 것이 민주주의일까?
파이를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투자를 한 다음에 자산 증식에 대한 기여도를 바탕으로 차등해서 수익을 나누겠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반면 배고픈 친구에게 더 많이 주겠다는 조도 있었다. 심지어 누가 가장 배고픈지 물어보는 과정이 당사자를 창피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누가 가장 큰 파이를 가져가는지 잘 알 수 없도록 파이를 조각조각 내서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게 한다는 ‘따뜻한 배려’를 보여 주는 학생들도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방법은 ‘파이를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파이 나누기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팀 내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파이를 아무도 먹지 않고 그냥 버리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게 모두가 동의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파이를 기증한다’는 대답도 있었다. 파이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느니 ― “우리는 사실 그렇게 파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파이가 필요한 배고픈 이들에게 기증하는 것으로 결정한 그 학생들은, 문제도 해결하고, 기부라는 선한 행위도 일어났기 때문에 꽤 만족한 듯했다.
매학기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이런 실험적 토론을 통해 검토해 보는데, 그 답들은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 통념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특징적인 것은 대부분이 ‘민주적 방식’이라는 것을 ‘참여와 동의에 따른 합의’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토론하고 소통하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 즉 합리적 의사 결정 과정이다. 이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주로 방법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민주주의를 직접 실행하는 힘’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배워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일
파이 나누기 토론의 하이라이트는 토론이 끝나고 모든 조들이 결론을 내렸을 때다. 학생들은 지금까지 각 조들이 낸 방안 중에서 투표를 통해서 가장 좋다고 생각한 방식을 결정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규칙이 될 것이었다. 대개 이때 결론은 가장 평등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우리에게 뭔가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던 조의 방안이 가장 많은 표를 얻곤 했다. 하지만 그때 교수인 나는 토론 내용을 잘 들었고, 다양하고 재밌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칭찬한 후에, ‘여러분이 결정한 방안은 참고는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1/n’이 가장 나은 것 같다’며 일방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결론을 엎어 버린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왁자지껄 재밌고 소란스웠던 교실의 분위기는 갑자기 차갑게 식어 버리고 냉랭함이 감돈다. 학생들은 허망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하기도 하지만 눈빛에는 불만이 있어도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는다. (극히 드물게 불만과 분노를 직접 표하는 학생이 있다.) 나는 지금 느낀 이 좌절감과 무력감이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감정이라고 말해 준다. 반대로 보자면 민주주의를 빼앗아 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학습시키는 것이다. 이런 좌절이 반복될 때,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쉽게 체념해 버리게 된다. 이 실험 토론의 마지막에 부당한 권력을 시연하는 이유는 절차와 방법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가, 부당한 권력의 행사를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권력의 구성과 실행의 문제는 민주주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문제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일의 곤경은 민주주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민주주의의 부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또는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마다 민주주의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마다 위선자가 되고, 거짓말쟁이가 된다.
우리에겐 훌륭한 ‘시민교육’ 교재가 있었다. 다양한 민주주의의 역사와 실천 사례를 담고 있는 교재는 교과를 설계한 교수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구체적인 민주주의 실천 사례를 만들도록 수업 과정이 짜여 있었다. 모든 교수와 학생들은 공통 교재에 기반해서 교육을 하고, 현장 수업을 진행하며, 우수 사례를 공유한다. 우수 사례 공유집은 우리 교육의 성과보고서이자 훈장이었다. 나는 나의 민주주의 수업도 그런 수업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민주주의 수업을 정말 비민주적인 사립대학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 대학(경희대학교)은 모든 학생들이 ‘시민교육’을 필수 교양으로 이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작 학교에선 지정된 장소에만 대자보를 붙일 수 있었고, 그것도 행정 당국의 도장을 받아야 했다. 학교에선 그걸 아름다운 캠퍼스와 공공시설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규칙을 학생들이 정한 것은 아니다. 대자보판은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교내 시설 관리의 영역이 되었다. 교육과정 개편에는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들이 참여할 수 없었다. 강사들은 수업 후에 학생들이 질문을 하거나 상담을 요청할 때면, 매점이나 학생식당, 강의실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학생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지위 격차’와 지위에 따른 차별의 실상을 몸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면서, 권리가 없는 곳에서 권리를, 평등이 없는 곳에서 평등을, 존엄이 없는 곳에서 인간의 존엄을 가르쳤다.
구상과 실행이 분리된 노동을 수행하다 보면 노동자의 내면에는 분열이 생겨난다. 그때 대학에서 교안을 만든 사람들이 ‘민주시민교육’에 반드시 현장 실천 교육을 하도록 넣은 것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실행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가르치는 우리 자신에게는 그 현장이 우리의 대학이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당하는 차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못(안) 하면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민주 시민’이 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게 대학만이겠는가. 민주주의가 작동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가 아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어려움은 오늘날 민주주의 교육이 처한 가장 근본적 위기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 파괴하기
우리들의 일상 세계에서 이런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의견을 내라,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하자고 하고선, 정작 나온 의견들은 묵살하고, 대표가, 사장이, 교장이, 팀장이, 상급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론 내리는 무수한 회의들이 있다. 공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모두가 같이 내린 의사 결정을 대표가 다시 안건을 바꾸어 재론에 부치고, 비슷한 회의를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두 번, 세 번 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런 후 ‘충분한 숙의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인다. 반면 충분한 논의 없이 결정이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 ‘긴급한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서’라거나,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절차를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 버렸다. 함께 결정한 것을 엎어 버리는 방식은 가장 공적인 정치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2020년에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불평등과 기후 등 다양한 사회 의제를 논의하자며 ‘기후시민의회’를 소집하고 시민 대토론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노란 조끼 시위’로 불렸던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자 저항을 수습하기 위해 제시한 타협안이었다. 이 기후시민의회는 당시 한국 시민사회에서도 귀감이 되고 많이 회자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마크롱 대통령은 시민의회에서 나온 결론은 여과 없이 국회 절차를 거쳐 바로 적용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후시민의회에서 제안한 149개의 정책 중에서 단 10개만이 수정 없이 국회로 넘어갔다. 기후시민의회는 노란 조끼 시위를 조직한 주체와 무관하게, ‘국민 중에서’ 나이, 성별, 지역 등으로 할당된 인구 통계학적 비례 추출을 통해 무작위로 선발된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집단을 개인으로 해체하는 방식으로 대표를 구성한 것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공약이던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 약속을 공론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재론에 부쳤다. 숙의 민주주의라고 불렸지만 실체는 참여자를 인구 비례를 통해 표본으로 추출한 여론 조사였다. 단순 질문형 여론 조사와 달리 중간에 학습과 숙의 토론 과정이 있어 숙의형 또는 공론형 여론 조사라고 불리는 특정한 조사 방법이었지만❶, 당시 정부는 여론 조사라는 용어를 회피하고 ‘공론화위원회’와 ‘시민회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는 뭔가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 결과 2개 신규 핵발전소는 공사를 재개하는 것으로 번복되었다. 대통령은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과의 ‘약속’을 또 다른 국민의 ‘여론’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 ‘시민회의’로 불린 모집 단위는 어떤 대표성도 책임성도 없는 일회용 기구였고, 여론 조사 과정을 마친 후에는 해산되었다. 민주주의적 형식으로 민주주의적 약속를 파기한 것이다.
2019년에는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영리병원 설립을 허가하기 위해 이 공론 조사 방식을 떠들썩하게 도입했다. 물론 그도 ‘숙의 민주주의’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도민의 의견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조사 결과는 영리병원 반대가 더 높게 나왔는데, 도지사는 이 결과를 따르지 않았다. 시민들의 권고는 존중하지만 결정은 달리하겠다고 한 것이다.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공론조사위원회 역시 불이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적 근거도, 권한도, 이행 강제력도 없었다.
정부 기구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시위운동 등 집단행동을 통해 힘을 모아 내고 정부를 압박해서 정부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여러 사회운동의 오래된 전략이다. 그러면 왜 광장의 힘이 거대하게 결집했다가도 매번 흩어지고 마는지, 왜 광장의 목소리를 수렴한다며 민주적 기구가 작동할 때마다 요구가 변질되거나 실패하는지를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시민으로서 참여했고, 토론했고, 의견을 제시했는데, 결론은 뭔가 다른 식으로 나 버리고, 분명 민주적으로 했는데,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은 그런 경험을 여러분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 걸까.
민중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기
민주적 절차가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힘을 통제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데모크라시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한다.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데모스(demos)의 크라티아(kratia)’, 즉 ‘민중의 힘/권력/지배’를 의미한다. ‘데모스의 크라티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인 ‘데모스’와 그들의 세력 우세를 뜻하는 ‘크라토스(kratos)’의 의미다. 여기서 보통 ‘지배’나 ‘권력’으로 옮겨지는 ‘-크라시, -크라티아’가 뜻하는 ‘힘/권력’이란, 특히 집단적인 힘, 세력으로서의 힘을 의미한다. 바람의 세기나 물의 힘, 불의 힘도 크라토스로 표현된다. ‘정치적 힘’을 의미할 때는 개인에게 귀속된 권력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이자 힘을 구성하는 방식이며 집단과 계급의 힘의 관계, 즉 지배 구조와 세력의 형세를 나타낸다. 즉 정치적 힘으로서의 크라토스는 조직화되고 세력화된 힘이다. 이때 우리는 권력의 의미를 어딘가에 있는 것, 누군가의 수중에 있는 것, 권력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 관계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만들어 갈 권력의 형태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 힘은 참여할 수 있는 권리로만 한정될 수 없는,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리와 권한으로서의 힘이다.
민중이라 불리는 데모스는 누구인가? 데모스는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집합적 주체다. 주민, 촌락민, 부락민을 뜻하던 데모스는 귀족 세력(지배 엘리트)과 반대되는 민중파, 평민 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 등장하고, 그런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념을 획득한다. 그것을 통해 출현한 것이 ‘민주정’이라는 하나의 사건이다. 민주정체(demokratia)는 민중이 정체(politeia), 즉 시민(polites)들로 구성된 시민단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로 치면 입법, 사법, 행정부를 수장부터 일반 공직까지 모두 민중이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민중의 구체적 형상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는가?
데모스를 시민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귀족 집단과 반대되는 평민, 탁월함에 반대되는 평범함의 의미가 사라진다. 고대의 민주주의를 ‘재산과 능력을 가진 시민들의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귀족 정치를 부르주아식으로 재해석한 정의다. 근대 세계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탁월함의 징표가 구귀족들의 신분과 혈통에서 재산과 능력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데모스는 그런 종류의 시민이 아니었고, 민주정 이전에는 시민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민주정의 수립은 여기저기 살고 있던 촌락민이던 데모스가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대부분 농민이고, 어부이고, 산꾼인 사람들, 모든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는 ‘일하는 사람들’인 이들은 귀족 사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민주정을 만든 데모스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정치 역량에 대한 신뢰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 개념어들이 번역될 때, 도대체 그런 민중이 지배하는 정치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데모크라시를 ‘하극상’으로 번역했다. 어찌 보면 그가 생각했던 데모크라시가 원래의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민주주의로 번역되었지만, 한자로 ‘민’은 눈이 찔린 노예의 형상을 한 갑골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미천한 자들로 여겨졌던 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상이라니, 메이지 시대의 귀족 사회 엘리트 입장에서 볼 때는 하극상도 이만한 하극상이 없는 것이다. 서양에서 재발견된 근대의 민주주의는 고대로부터 민주주의 개념을 가져왔지만 데모스(인민의 의미를 국민과 시민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국민과 시민에 포함되지 않는 데모스)를 정치에서 배제했다. 또한 훌륭한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민주주의를 수립함으로서 민주주의 사상을 거꾸로 세웠다. 대의 민주주의는 국민과 시민으로 재정의된 노동자들의 실질적 참정권도 제한한다.
앞에서 살펴본 시민의회와 그 구성 방식은 어떠한가? 민중의 크라토스를 만들어 가는 방식인가? 아니면 민중의 크라토스를 해체하는 방식인가? 그것은 파편화된 개인들의 요구를 집단적 요구와 힘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직화되고 세력화된 힘들을 무작위 추첨된 개인을 통해 대표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개별 의견으로 만들어 해체하는 방식이 아닌가? 집단적 힘을 개별적인 힘으로 돌려놓는 이런 방식은 특히 2000년대 이후 거버넌스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위원회와 협의체 같은 구조에서는 ‘참여할 수 있는 개인’들의 자격이 더 제한되고, 결국 의제와 관련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표성을 갖게 된다. 이들의 대표성은 소속된 운동의 장이나 민중의 지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들이 쌓아 온 ‘상징성’,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에 의해 승인된다. 여성, 청년,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정체성이 생물학적·개인적 정체성을 통해 재현/대표(representation)되는 것도 그런 사례다. 그동안 많은 시민회의, 시민의회, 시민공론장과 각종 거버넌스와 협의체들이 민주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런 식으로 민중을 축출하는 기술적 장치로서 민중에 대한 정치적 엔클로저(배제)를 수행해 왔다.
정리하자면, 데모크라티아는 조직되고 단결된 민중의 힘에 기반하여, 데모스가 힘의 우세를 가지며 지배하는 정치 체제다. 데모크라티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우리는 민주정의 반대말을 당연히 독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민주정에 반대되는 개념은 독재보다는 탁월한 자들(aristoi)의 지배, 즉 귀족정(aristocracy)이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독재에 대해서는 강렬한 경계심과 저항 의식을 심어 놓았지만, 과두정(엘리트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독재자를 훌륭한 민주파 지도자들로 대체하는 것이 민주화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졌다. 권력이 독재에서 과두정으로 넘어가는 것은 큰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민중 투쟁의 결실은 쉽게 또 다른 지배 엘리트에게로 넘겨지곤 했다. 독재와 전체주의는 사라진 것이 맞을까? 1990년대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과거 일국적 차원에서 나타났던 독재와 전체주의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한 독재와 전체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의 독재와 시장 전체주의다. 이것이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은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다시 재구성하고, 흩어진 힘들을 모아 정치 세력화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민주주의에서 관리하는 민주주의로
-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의 전환
‘민주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와해’시키는 현상은 ‘민주화’ 이후 민주 정부들에서 더 많이 나타났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정치적 약속들은 점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사회적 합의란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핵발전소 공사 중단 약속이 그랬고,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약속이 그랬다. 민주당은 정치개혁운동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끌어 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위성정당으로 박살 냈고, 위성정당 방지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음 총선에서 보란 듯이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차별금지법은 언제나 시기상조라며 물리친다. 국민 다수가 찬성하는 이 법안은 다른 쟁점 법안과 달리 여론을 묻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약속들이 계속 유보되고 지연되며 무력화되어 왔던 과정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발현된 것이 윤석열의 12.3 쿠데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12.3 쿠데타는 홀로 오지 않았다. 반드시 지켜져야 할 사회적 합의와 공적 약속이 부단히 어겨지고, 정치에서 약속의 파기가 그래도 되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이것이 수없이 반복되며, ‘어기는 것이 힘’이 되는 과정이 그 앞에 있었다. 어기는 것이 강자의 특권이 되고, 승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의 관행이 되었다. 이렇게 ‘강자의 정의’가 사회를 지배한다면, 그런 곳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더더욱 요원하다. 정치인들이 약속을 파기하고 신뢰를 무너뜨릴 때, 그들에 대한 불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왜 정치에 대한 불신이 과두정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민중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표현되는 것일까? ‘자본의 독재, 금융 과두정, 기득권 엘리트 지배 체제를 민주주의로 갈아엎자’는 말이 아니라 어째서 ‘민주주의는 안된다’는 탄식과 환멸이 먼저 나오는 것일까? 민중을 타락시키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의 지지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이 먼저 날아가는 것일까?
앞서 본 토론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의사 결정 과정과 동일시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의사 결정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민중, 권력, 인민의 지배, 민중의 정치’ 같은 개념들이 사라지면서 ‘토론, 토의, 숙의, 협치’와 같은 개념들이 민주주의론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이 시기 민주주의 담론에서는 ‘토론적 전환’이라 부를 만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행동하는 민주주의에서 토론하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갈등 중재나 이해관계 조정, 의사 결정 과정과 같은 의미로 민주주의가 민주적 절차로 재해석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곧 ‘반독재’에 맞선 운동이자 실천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이와 함께 공산주의에 맞선 운동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는 정치 제도이자 독재, 파시즘, 전체주의에 반하며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인류 보편의 이념적 가치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의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구성 방식이 아니라 참여의 방식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민주주의보다 ‘거버넌스, 참여, 소통, 토의, 숙의, 조정, 중재, 합의’와 같은 개념들을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주적으로 합시다!”라는 말은 곧 참여를 보장하고, 소통하며, 토론하고 숙의하여, 조정과 중재를 통해 집단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민주주의란 개념은 사회 갈등의 조절과 중재 수단 같은 것이 되었고, 갈등관리술이나 사회관리론과 같은 의미로 점차 변해 갔다.
왜 1990년대 민주주의론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첫째, 공산권이 붕괴된 이후 서구 국가들에서는 그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민주주의의 이념적/이론적 가치와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둘째, 서구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운동은 1990년대를 거치며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질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셋째,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필리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까지 전 세계적으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이전의 민주주의론에 변화를 가져왔다.
1989년 소비에트 해체를 시작으로 자유세계를 위협하던 현실의 적인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라지자 서방 국가들은 과거와 같이 민주주의를 자유세계의 숭고한 가치로 옹호할 이유가 없어졌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새로운 자본의 축적 양식, 세계화와 금융화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었다. 냉전기에 민주주의 이념의 고취는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혁명을 예방하는 기능을 하였으나 냉전 종식 후에는 그런 용도는 없어진 반면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노동 유연화나 투자자와 기업을 위한 규제 완화 같은 법률 하나 만드는 데도 시민의 동의와 의회의 통과가 필요하니, 절차적 대의민주주의조차 비효율적으로 인식되었다. 국가의 계획 경제와 시장의 민주적 ‘통제’를 승인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기업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억압이라 생각한 것이다.
복지국가, 노동조합, 좌파 세력과 함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 이후에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서구 자본주의는 동유럽의 민주화운동,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맞선 자유세계를 확대하는 운동으로서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한국을 포함하여 198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이 독재와 전체주의, 부패한 관료제에 맞선 투쟁이면서 동시에 엘리트 지배와 불평등, 제국주의에 맞선 반체제적 성격을 가진 투쟁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동유럽과 제3세계의 민주화운동은 인민의 힘으로 정부 또는 체제를 무너뜨렸고, 이는 서방의 국가와 자본에게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반체제’ 민중 시위의 성공은 미국과 유럽 등으로 전파되어 그 지역 민중의 반체제 저항 운동에도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87년의 경험은 민주화에 만족하지 않고 1990년대 내내 거대한 민중 항쟁으로 이어졌다. 시애틀 전투(1999)와 월가 점령시위(2001)는 자유무역체제(WTO)와 세계화, 금융 자본을 정면 겨냥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물결은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만이 아니라 체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민중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지배 계급에겐 자신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는 당시의 신자유주의 운동에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민중의 힘’과 ‘그 힘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동시에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민중을 진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만드는 것, 민주주의를 금지하는 대신 민주주의를 하찮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지금까지 서구 민주주의는 체제 우월성을 나타낸 지표였고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관리해 온 대의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넘쳐흐르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제도 안으로 다시 집어넣어 제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넘쳐흐르는 힘들을 통제하고 다시 집어넣고자 했던 수단이 바로 ‘협치 민주주의’다. 거리에서 민중의 힘이 발현될 때마다 그 힘을 이용은 하되, 그것이 지배 체제 자체를 향하지는 못하도록 ‘협상’으로 출구를 제시하여 끝없는 토론과 합의의 과정으로 집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참여 정부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위원회와 협치 기구들은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던,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무력화하면서도 ‘시민 참여’라는 형식을 통해 오히려 그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대표적 장치들이었다. ‘위원회 정치’는 민관 협치의 대표적인 구성물이었고, 기업은 ‘민’의 한 부분을 구성하며 정부의 파트너로 당당하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정경유착’이라 불리던 것이 ‘공사 파트너십’으로 불리게 되자, 기업과 정부 엘리트들은 기업 고위 간부와 고위 공직을 넘나들었다. 보수 정권하에서는 여전히 ‘반독재 민주주의’가 강조되었고 시민사회의 반정부 투쟁에는 종종 야당인 민주당도 가세했지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보수 정권과 동일한 정책일지라도 반정부 투쟁은 동일한 양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정부 투쟁은 시민사회 안에서 사전 관리되었고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을 만드는 것이 협치 민주주의로 여겨졌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배웠나
이런 과정을 통해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는 ‘더 나은 정치 체제’이자 ‘우리가 지키고 수호해야 할 정치 체제’에서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대중 정치’로 표상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보완되어야 할 정치 체제로서 늘 ‘시민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등,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통용되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래디컬 데모크라시》에서 이런 ‘수식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보다 그 앞에 붙은 수식어를 더 강조하며, 본래의 민주주의는 그 ‘○○’에 의해서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원래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일조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래디컬 데모크라시’는 근본 민주주의, 즉 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리키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러미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언어이자 비판의 언어이며 혁명의 언어”였으나 “민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말을 도용하였다.”❷ 그는 민주주의를 곡해하고 왜곡시킨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민중’ 다시 정의하기 (a): ‘민중의 지배’라는 급진적 의미를 벗어나기 위해 ‘민중’의 정의를 좁히는 것. 노예와 여성, 특정 인종이나 빈민, 또는 다른 집단을 ‘민중’에서 제외하는 것. ‘국민’과 ‘시민’으로 정의.
(2) ‘민중’ 다시 정의하기 (b): ‘민중’을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정의하는 것. 독재 정부는 자신을 지지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이자 자신이 지켜야 할 민중으로 봄.
(3) 민중을 다시 정의하기 (c): ‘민중’을 추상화, 이론화하기. ‘민중’을 자신들에 의해 대변되어야 할 존재로 규정.
(4) 민주주의는 민중의 복지를 돌보는 것이다.
(5)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얻는 것이다.
(6) 민주주의는 발전이다 (a): 민주주의를 (지금이 아닌) 미래의 발전된 통치 형태로 이상화.
(7) 민주주의는 발전이다 (b):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도 발전한다. (정치발전론)
러미스에 따르면 이렇게 다시 정의된 민주주의는 사실상 ‘반(反)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반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언어도단을 다시 바로잡는 것(정명)이다.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민주주의라 부르면서 그 실패를 민주주의의 실패라 여기게 되고, 민중을 혐오하며 민주주의는 안된다는 회의와 냉소에 빠져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웠던 민주주의가 바로 저런 민주주의였다. 대학에서 배웠던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발전론, 정치근대화론 같은 냉전기 미국 사회과학의 산물이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고, 후진적 정치를 선진적 정치로 근대화(서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치근대화론의 요체였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교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야만 지대를 문명화하기 위해서’, ‘근대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침략과 약탈을 정당화하고 식민화를 진보, 발전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20세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를 독재와 공산주의로부터 ‘민주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침략과 수탈을 ‘해방 전쟁’으로 미화하곤 했다. 민주화를 위한 성전에서 각 지역의 토착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는 지금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민주주의로 제시되었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발전’이란 개념을 통해 연결시킨 것도 기막힌 트릭이었다. 정치발전론의 큰 얼개는 경제 발전이 정치 발전의 조건이며 경제 성장은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것이다. 1947년 ‘자유 진영의 발전을 위해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선언이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이라 불린 이 연설을 통해, ‘발전’은 전 인류의 목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는 발전과 저발전 지역으로 나뉘어지고, 발전 국가는 저발전 국가의 목표가 됐다. 이런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들이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전략적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민주주의 이론들은 독재 정권에도 도움이 되었다. 독재 정권은 늘 “경제 성장 먼저, 민주주의는 그다음에”라고 말했다. 그들은 경제 수준과 정치 의식이 낮은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주는 것은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를 하고 싶으면 먼저 경제 성장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먹고 사는 것이 풍요로워지면 문화생활과 민주주의는 으레 따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못할 때는 민주주의는커녕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협박했다. 정치근대화론은 ‘개발 독재’에 정당성을 주는 이론이었다.
독재 정권하에서는 오직 국가가 허용하는 형태로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었다. 그게 ‘자유민주주의’였다. 독재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것은 반공주의의 다른 말이었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질서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자유 진영’의 체제요 이념이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란 걸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진짜 민주주의를 간절히 바랐다. 한편으로는 독재하에서는 자유도 없고 민주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내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시민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다. 반공교육이 민주주의 교육을 대신하고, 민주주의 교육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교육을 통해 잘못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기를 기회가 없었고, 독재를 물리치는 것이 사회운동의 최우선 과제였으므로 민주주의를 ‘비판’할 여유도 없었다. 오히려 엘리트들은 미국의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나 반공주의적 자유주의, 민중의 권력을 가로채는 대의민주주의를 반독재 투쟁의 무기로 적극 수용하고 활용하였다. 냉전기 CIA는 한국을 비롯 세계 각 지역의 민주주의 연구소를 지원하고, 자금을 댔다. 장준하의 《사상계》도 그런 배경에서 미국에서 지원을 받은 잡지였고, 정치발전론과 근대화론에 기반한 논문을 번역해서 싣곤 했다. 냉전 종식 후에는 ‘탈이념화’된 새로운 민주주의론이 필요했다. 아시아식 민주주의가 유교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과 함께 등장하여 주목받기도 하고, 민주주의가 ‘문화’로 재해석되거나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 속에 흡수되기도 했다.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는 오래 극복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행을 둘러싼 논쟁이 잠시 있었으나 곧 침잠했다.
오래된 미래, 새로운 민주주의 –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앞에 소개한 토론에 약간의 함정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애초에 민주적 ‘방법’을 물으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폭력적으로 뒤엎어 버리면서 우리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로소 질문하게 된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는 왜 그 사람에게 그럴 힘이 있는지를 묻고 이는 다시 권력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방법을 찾는 것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교실에서 힘의 관계를 보게 되고, 학교 안에서 평등한 관계를 가로막는 요인들을 찾게 된다. 대학에서 그것은 상대 평가제 같은 경쟁적 시험 제도, 취업 경쟁에서 학점이 주는 압박, 교수가 가진 평가 권력 같은 것이다. 교수도 서비스가 된 교육 현장에서 소비자가 된 학생들의 별점(평가)에 매여 있다. 학생들은 교수에게 불만이 있어도 한마디도 못하고 억눌려 있던 것을 강의 평가와 에브리타임(에타) 같은 대학의 뒷담화 공론장을 통해 표출한다. 그 뒤에는 제도와 정책, 사회 권력과 역사가 있다. 교실 안의 권력 구조는 사회적 권력 구조를 반영하지만 처음부터 거대한 구조에만 착목하면 그건 절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하나씩 짚어 가면, 그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의 지점을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체제를 바꾸는 건 우리의 구체적 삶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고, 교육운동에서 그것은 교육 현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 민주화는 너무 멀지만, 교실 민주화는 좀더 가깝다. 그렇게 발딛고 선 현장에서 교육 실천을 벌여 나갈 때, 우리는 “여성해방 없이 노동해방 없다”, “동물해방 없이 인간해방 없다”라고 외치는 다른 운동들과 같이, 이곳의 해방이 모두의 해방의 조건이 된다고 외칠 수 있을 것이고, 교육운동을 이해당사자의 운동이 아니라 모두의 운동으로 설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교육 혁명 없이는 사회 혁명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토론을 시작할 때 나는 ‘실행하는 민주주의’를 유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가장 직접적으로 그것은 교수의 독단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쉽게 반발하지 못했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평가하는 권력이 교수인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민중들이 수준이 낮아 좋은 통치자를 고르지 못하는 것도, 개인들이 비겁해서 불의를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보고, 권력의 불평등한 구조를 발견해 내지 못하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패 원인을 개인의 문제나 제도의 문제로 돌리게 된다. 민중은 그럴 수준이 아니라서, 민주주의는 제도적 결함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계속 우리와 닮은 우리를 향해 서로 비난하고 불신하며 자기 환멸에 빠지게 되고, 더 나은 지도자를 찾게 된다. 이와 같은 민중의 자기혐오와 자기 불신을 ‘대중혐오(demophobia)’라고 한다. 이 대중혐오가 확산되면 존엄을 박탈당한 개인들은 무능한 자신의 역량을 증폭시켜 줄 집단을 찾게 되고 귀속 집단이 가진 권력과 그것을 행사하는 지도자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대리 만족을 얻는다. 이런 일들의 일상화는 극우 정치와 파시즘, 폭압적 국가의 귀환을 예고한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시민, 국민, 인민’의 범주에서 제거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선 극우 정권에 의해 인민이 동물로 규정되어 무도하게 학살당한다. 트럼프는 ‘시민이 아닌 자’와 ‘국민으로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을 색출하여 추방한다. 윤석열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해야 할 국민에서 제외하고, 자신의 지지자들로 국민의 범주를 좁혔다. 방해자, 불만자, 부적응자, 무능력자, 낙오자, 탈락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 못하고 강제로 추방되거나 권리를 박탈당한다. 안전은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 되고 있다. 지금 학교는 어떤가?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증폭되는 방식을 관찰하고, 교실의 권력 구조를 드러내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실의 권력관계가 학교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사회 권력의 관계를 반영한다면, 우리는 교실과 학교에서 이 권력관계를 바꾸는 노력으로 사회의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을 찾고, 사례를 공유하면서, 교사 모임, 학생 모임, 지역 모임을 조직하고 ‘세력화’하는 길을 찾아 갈 수는 없을까. 12.3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과 운동에 대한 근본적 대안 모색을 위한 공론장도 계속 열어 내야 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화된 교육 체제에서 민주주의 교육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돌아보자. 제도화된 민주주의 교육은 일종의 ‘시민교양교육’처럼 변모했고, 다른 한편으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같은 민중의 민주주의는 과거의 ‘역사교육’으로 변하였다. 과거의 민중은 위대한 민중으로 역사 속에 박제하고, 그런 민중이 현실에 다시 출현하는 것은 가로막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품행을 가르치는 규범적 성격의 민주시민교육 속에서 우리는 ‘민중-되기’와 민중의 힘을 구성하는 법, 직접 실행하는 법 등을 교육과정에서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했다. 이런 규범화된 민주주의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강조되고, 토론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 되며, 토론의 규칙(에티켓)을 벗어나는 민중 문화는 배척되거나 불리해진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민중이 누구인가’와, ‘민중의 정치가 어떤 것인가’라는 두 질문은 민주화 이후 학교 민주주의 교육에서도 지속적으로 누락되었다. 새로운 민주주의 교육에서는 그것을 다시 만들어 내야 한다.
지금이 새로운 민주주의 교육과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또다시 우리를 붙잡는다. 나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지구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우리가 발굴해야 할 가장 오래되고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의 보고이며 수없이 많은 다른 이름으로 출현했고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며 이어 가는 길이 끊어졌을 뿐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독재 정권에서는 민주주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불가했으므로,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은 더 풍부하게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서 펼쳐졌고 그만큼 더 간절하게 민주주의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1987년 6월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고향 통영에서 민주화운동은 늘 텔레비전에서만 나오는 일이었다. 내가 살던 작은 항구 도시는 학생들이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최루탄 터지는 전쟁터 같은 화면과 달리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변함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아무 날과 다를 바 없는 아침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누군가 새벽에 몰래 학교 담벼락에 대자보를 붙였다는 것이다. 대자보는 이미 뜯어지고 없었고, 대자보 붙인 자국이 구석에 조그맣게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대자보’라는 말도 낯설었던 우리들에게, 흔적으로 남은 대자보 자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태풍 같은 사건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누가 썼을까? 한동안 그게 최대 이슈였다. 어쩌면 거기 써 있었을 말들과, 써 있지 않았을 말들까지 우리는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나가서 싸우는 것, 담벼락에라도 민주주의 만세라고 써 보는 것, 대자보를 붙이는 것, 누군가를 숨겨 주는 것, 금지된 행위를 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 민주주의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1987년 2학년 때 일어났던 그 사건 때문이었을까. 2학년 학생들은 고3이 된 1988에 정말로 데모를 하게 된다. 선생님에게 학생이 슬리퍼로 뺨을 맞은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야간 자율학습을 거부하는 시위를 했던 것이다. 농성을 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우리는 운동장에 반별로 앉아서 교가와 애국가와 〈아침이슬〉을 열심히 번갈아 가며 불렀다. 교가와 애국가도 분노를 담아 부르니 저항가가 되었다. 비상사태에 퇴근했던 선생님들까지 모두 학교로 돌아왔다. 교감 선생님이 학생회장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요구 사항을 모아서 적어 오라고 했다. 쏟아져 나온 요구 사항에는 ‘치마 입는 날 없앨 것, 교실 바닥 양초 문지르기 하지 말 것, 체육 시간에 운동장 풀 뽑기 시키지 말 것, 겨울에 털신 실내화를 신을 수 있도록 허용할 것’ 같은 자잘한 것들부터 ‘돈 걷지 말 것, 차별하지 말 것, 때리지 말 것, 성적 공개하지 말 것(모의고사 점수와 이름을 성적순으로 붙여 놓았음), 특별반(성적 상위)과 특수반(성적 부진) 운영하지 말 것’ 같은 차별과 인권 침해에 대한 시정 요구도 들어있었다. 데모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학생들이, 누구의 사주도 없이, 아주 우연하게, 그것도 빈번히 일어났던 체벌을 계기로 일으켰던 학생 시위는 훗날에도 이 학교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 되었다. 어떤 요구는 받아들여졌고(양초 문지르기와 운동장 풀 뽑기와 실내화 규정에 대한 시정 요구), 어떤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나머지 대부분 중요한 요구들). 그리고 다시 학교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마다 올해 고3은 최악의 입시 결과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우리의 행동을 질책하고 저주했다. 큰 성과도 없었지만 큰 실패도 없었다. 학교를 크게 바꿔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시 결과도 딱히 그 일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지만 외형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행위의 감각이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손을 들고 일어나서 생각을 말하던 친구의 모습, 불안하고 무섭기도 한 마음을 친구와 손을 꼭 잡고서 수학여행 때처럼 목청을 높여 부르던 노랫소리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다.
그날의 일이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앞서 ‘대자보 사건’이 있었고, 우리는 상상 속의 대자보에 우리의 요구안을 하나씩 채워 보았다. 수업 시간에 슬쩍슬쩍 서울의 데모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선생님이 있었고, 서울에서 온 교생 선생님은 자신의 학생 시위 경험을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우리에게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알게 모르게 심어 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때리고, 돈 받고, 차별하는 교사들 가운데, 때리지 않고, 돈 받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우리가 꿈꾸는 다른 세상이 오기 전에도 먼저 세상을 다르게 살기 시작한 사람이.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민주주의 운동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 거대한 시위만 ‘실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상에서 부당한 것 하나라도 바꾸어 내는 사소한 저항과 실천들을 계속 찾아내고 실행해 보자. 작은 소동을 일으키고 사건들을 쌓아 가자. 제임스 스콧은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2020)에서 민중들이 표면적으로는 복종하면서도 내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다양한 방식을 해석하며 생활과 생존을 지키면서도 ‘비겁한 저항’을 부단히 전개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평소에는 저항으로 보이지도 않는 저항들을 체념하지 않고 쌓아 갈 때만 격변의 시기에 결정적인 저항의 대오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평소에 ‘일상의 민주주의 연습’을 하는 것이다. 스콧은 그와 같은 일상적 저항 습관을 기르는 일을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라고도 했다. 민주주의 근육 키우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위기, 생태 위기가 시시각각 심화되고 있지만 이것을 해결할 새로운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시간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육을 만들어 가자. 12.3 이전의 낡은 정치, 가짜 민주주의로 돌아가지 말고, 12.3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과 운동을 새롭게 고민하고 만들어 가자.
❶ 공론 조사(deliberative poll)를 개발한 사람은 제임스 피쉬킨이라는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로, 그는 자신이 개발한 공론 조사에 대한 지적 재산권(상표권)을 갖고 있어 각국의 정부와 지자체는 이 조사 기법을 사용할 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❷ 더글러스 러미스, 이승렬·하승우 옮김(2024), 《래디컬 데모크라시》, 한티재,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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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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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다시 만들어야 할 새로운 민주주의
- 12.3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제언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다시 묻는 민주주의 - 그건 정말 민주주의였을까?
나는 요즘 춘천에 있는 한 작은도서관에서 민주주의 강의를 시작했다. 총 12주에 달하는 긴 강의니, 대략 대학의 한 학기 수업 일정과 맞먹는다. 민주주의 강의라니, 그것도 12주 동안 민주주의라는 주제만을 다룰 수 있다니, 꿈만 같다. 내 전공은 정치사상이고,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소개하지만, 민주주의 강의를 한 지는 10년도 넘었다. 근래 내가 하고 있는 강의는 주로 교육, 돌봄, 기후, 생태 등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 활동 분야와 관련된 주제다. 최근 더욱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그 위기가 직접 드러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같은 기간에 민주주의 위기 역시 심화되어 왔다. 진보적 사회운동단체와 조직들에서도 곳곳에서 조직 내 민주주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회운동단체들이나 학습 모임에서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12.3 쿠데타 이후로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나 글 청탁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돌아온 것은 반갑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그만큼 커진 민주주의 위기가 있다.
춘천에서 시민들과 처음 강의를 시작하던 날, 나는 예전에 대학에 있을 때 수업 시간에 했던 토론을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통념을 스스로 확인해 보는 토론이었다. 먼저 조를 나눈 다음에 각 조별로 가상의 파이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문제를 낸다. “이 파이를 가장 민주적으로 나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은 무엇일까? 맞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모두가 ‘공평하게’ 1/n로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너무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방법을 지지하기 때문에, 나는 문제의 조건문에서 그 방법을 제외했다. ‘단, 1/n로 나누는 것은 제외하라’고. 그때부터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진다.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어떤 조는 돌아가면서 파이를 각자 필요한 만큼 잘라 가도록 한다. 어떤 조는 내 파이를 자르는 권한을 다음 사람에게 준다. 옆사람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는 이유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러 방안 중에는 충격적인 방법도 있다. 그중 하나는 팀장에게 모든 권한을 준다는 것이다. 왜냐고 물으니, 그 팀장이 좋은 사람이라서 믿고 맡긴단다. 조별 토론이나 과제에서 항상 헌신적으로 팀을 이끌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봐도 민주적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하필이면 팀장이 ‘복학생 고학년 오빠’이고, 나머지 조원들은 모두 1학년 새내기 여학생들이다. 누군가가 웃으면서 외친다. “여러분, 가스라이팅 당한 거 아니예요?” 다른 조에선 의구심을 갖지만 정작 해당 팀원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민주적이라고 자신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좋은 리더를 뽑았고, 고학년인 그는 경험과 지식에서 저학년인 자신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의 실력과 품성이 검증도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파이를 나누는 것에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반박하기도 어렵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적 대표 선출이란 것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훌륭한 대표자를 잘 뽑는 것이 민주주의일까?
파이를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투자를 한 다음에 자산 증식에 대한 기여도를 바탕으로 차등해서 수익을 나누겠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반면 배고픈 친구에게 더 많이 주겠다는 조도 있었다. 심지어 누가 가장 배고픈지 물어보는 과정이 당사자를 창피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누가 가장 큰 파이를 가져가는지 잘 알 수 없도록 파이를 조각조각 내서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게 한다는 ‘따뜻한 배려’를 보여 주는 학생들도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방법은 ‘파이를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파이 나누기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팀 내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파이를 아무도 먹지 않고 그냥 버리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게 모두가 동의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파이를 기증한다’는 대답도 있었다. 파이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느니 ― “우리는 사실 그렇게 파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파이가 필요한 배고픈 이들에게 기증하는 것으로 결정한 그 학생들은, 문제도 해결하고, 기부라는 선한 행위도 일어났기 때문에 꽤 만족한 듯했다.
매학기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이런 실험적 토론을 통해 검토해 보는데, 그 답들은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 통념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특징적인 것은 대부분이 ‘민주적 방식’이라는 것을 ‘참여와 동의에 따른 합의’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토론하고 소통하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 즉 합리적 의사 결정 과정이다. 이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주로 방법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민주주의를 직접 실행하는 힘’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배워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일
파이 나누기 토론의 하이라이트는 토론이 끝나고 모든 조들이 결론을 내렸을 때다. 학생들은 지금까지 각 조들이 낸 방안 중에서 투표를 통해서 가장 좋다고 생각한 방식을 결정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규칙이 될 것이었다. 대개 이때 결론은 가장 평등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우리에게 뭔가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던 조의 방안이 가장 많은 표를 얻곤 했다. 하지만 그때 교수인 나는 토론 내용을 잘 들었고, 다양하고 재밌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칭찬한 후에, ‘여러분이 결정한 방안은 참고는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1/n’이 가장 나은 것 같다’며 일방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결론을 엎어 버린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왁자지껄 재밌고 소란스웠던 교실의 분위기는 갑자기 차갑게 식어 버리고 냉랭함이 감돈다. 학생들은 허망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하기도 하지만 눈빛에는 불만이 있어도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는다. (극히 드물게 불만과 분노를 직접 표하는 학생이 있다.) 나는 지금 느낀 이 좌절감과 무력감이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감정이라고 말해 준다. 반대로 보자면 민주주의를 빼앗아 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학습시키는 것이다. 이런 좌절이 반복될 때,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쉽게 체념해 버리게 된다. 이 실험 토론의 마지막에 부당한 권력을 시연하는 이유는 절차와 방법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가, 부당한 권력의 행사를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권력의 구성과 실행의 문제는 민주주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문제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일의 곤경은 민주주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민주주의의 부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또는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마다 민주주의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마다 위선자가 되고, 거짓말쟁이가 된다.
우리에겐 훌륭한 ‘시민교육’ 교재가 있었다. 다양한 민주주의의 역사와 실천 사례를 담고 있는 교재는 교과를 설계한 교수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구체적인 민주주의 실천 사례를 만들도록 수업 과정이 짜여 있었다. 모든 교수와 학생들은 공통 교재에 기반해서 교육을 하고, 현장 수업을 진행하며, 우수 사례를 공유한다. 우수 사례 공유집은 우리 교육의 성과보고서이자 훈장이었다. 나는 나의 민주주의 수업도 그런 수업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민주주의 수업을 정말 비민주적인 사립대학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 대학(경희대학교)은 모든 학생들이 ‘시민교육’을 필수 교양으로 이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작 학교에선 지정된 장소에만 대자보를 붙일 수 있었고, 그것도 행정 당국의 도장을 받아야 했다. 학교에선 그걸 아름다운 캠퍼스와 공공시설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규칙을 학생들이 정한 것은 아니다. 대자보판은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교내 시설 관리의 영역이 되었다. 교육과정 개편에는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들이 참여할 수 없었다. 강사들은 수업 후에 학생들이 질문을 하거나 상담을 요청할 때면, 매점이나 학생식당, 강의실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학생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지위 격차’와 지위에 따른 차별의 실상을 몸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면서, 권리가 없는 곳에서 권리를, 평등이 없는 곳에서 평등을, 존엄이 없는 곳에서 인간의 존엄을 가르쳤다.
구상과 실행이 분리된 노동을 수행하다 보면 노동자의 내면에는 분열이 생겨난다. 그때 대학에서 교안을 만든 사람들이 ‘민주시민교육’에 반드시 현장 실천 교육을 하도록 넣은 것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실행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가르치는 우리 자신에게는 그 현장이 우리의 대학이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당하는 차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못(안) 하면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민주 시민’이 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게 대학만이겠는가. 민주주의가 작동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가 아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어려움은 오늘날 민주주의 교육이 처한 가장 근본적 위기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 파괴하기
우리들의 일상 세계에서 이런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의견을 내라,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하자고 하고선, 정작 나온 의견들은 묵살하고, 대표가, 사장이, 교장이, 팀장이, 상급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론 내리는 무수한 회의들이 있다. 공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모두가 같이 내린 의사 결정을 대표가 다시 안건을 바꾸어 재론에 부치고, 비슷한 회의를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두 번, 세 번 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런 후 ‘충분한 숙의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인다. 반면 충분한 논의 없이 결정이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 ‘긴급한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서’라거나,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절차를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 버렸다. 함께 결정한 것을 엎어 버리는 방식은 가장 공적인 정치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2020년에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불평등과 기후 등 다양한 사회 의제를 논의하자며 ‘기후시민의회’를 소집하고 시민 대토론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노란 조끼 시위’로 불렸던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자 저항을 수습하기 위해 제시한 타협안이었다. 이 기후시민의회는 당시 한국 시민사회에서도 귀감이 되고 많이 회자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마크롱 대통령은 시민의회에서 나온 결론은 여과 없이 국회 절차를 거쳐 바로 적용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후시민의회에서 제안한 149개의 정책 중에서 단 10개만이 수정 없이 국회로 넘어갔다. 기후시민의회는 노란 조끼 시위를 조직한 주체와 무관하게, ‘국민 중에서’ 나이, 성별, 지역 등으로 할당된 인구 통계학적 비례 추출을 통해 무작위로 선발된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집단을 개인으로 해체하는 방식으로 대표를 구성한 것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공약이던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 약속을 공론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재론에 부쳤다. 숙의 민주주의라고 불렸지만 실체는 참여자를 인구 비례를 통해 표본으로 추출한 여론 조사였다. 단순 질문형 여론 조사와 달리 중간에 학습과 숙의 토론 과정이 있어 숙의형 또는 공론형 여론 조사라고 불리는 특정한 조사 방법이었지만❶, 당시 정부는 여론 조사라는 용어를 회피하고 ‘공론화위원회’와 ‘시민회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는 뭔가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 결과 2개 신규 핵발전소는 공사를 재개하는 것으로 번복되었다. 대통령은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과의 ‘약속’을 또 다른 국민의 ‘여론’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 ‘시민회의’로 불린 모집 단위는 어떤 대표성도 책임성도 없는 일회용 기구였고, 여론 조사 과정을 마친 후에는 해산되었다. 민주주의적 형식으로 민주주의적 약속를 파기한 것이다.
2019년에는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영리병원 설립을 허가하기 위해 이 공론 조사 방식을 떠들썩하게 도입했다. 물론 그도 ‘숙의 민주주의’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도민의 의견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조사 결과는 영리병원 반대가 더 높게 나왔는데, 도지사는 이 결과를 따르지 않았다. 시민들의 권고는 존중하지만 결정은 달리하겠다고 한 것이다.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공론조사위원회 역시 불이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적 근거도, 권한도, 이행 강제력도 없었다.
정부 기구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시위운동 등 집단행동을 통해 힘을 모아 내고 정부를 압박해서 정부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여러 사회운동의 오래된 전략이다. 그러면 왜 광장의 힘이 거대하게 결집했다가도 매번 흩어지고 마는지, 왜 광장의 목소리를 수렴한다며 민주적 기구가 작동할 때마다 요구가 변질되거나 실패하는지를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시민으로서 참여했고, 토론했고, 의견을 제시했는데, 결론은 뭔가 다른 식으로 나 버리고, 분명 민주적으로 했는데,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은 그런 경험을 여러분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 걸까.
민중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기
민주적 절차가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힘을 통제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데모크라시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한다.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데모스(demos)의 크라티아(kratia)’, 즉 ‘민중의 힘/권력/지배’를 의미한다. ‘데모스의 크라티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인 ‘데모스’와 그들의 세력 우세를 뜻하는 ‘크라토스(kratos)’의 의미다. 여기서 보통 ‘지배’나 ‘권력’으로 옮겨지는 ‘-크라시, -크라티아’가 뜻하는 ‘힘/권력’이란, 특히 집단적인 힘, 세력으로서의 힘을 의미한다. 바람의 세기나 물의 힘, 불의 힘도 크라토스로 표현된다. ‘정치적 힘’을 의미할 때는 개인에게 귀속된 권력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이자 힘을 구성하는 방식이며 집단과 계급의 힘의 관계, 즉 지배 구조와 세력의 형세를 나타낸다. 즉 정치적 힘으로서의 크라토스는 조직화되고 세력화된 힘이다. 이때 우리는 권력의 의미를 어딘가에 있는 것, 누군가의 수중에 있는 것, 권력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 관계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만들어 갈 권력의 형태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 힘은 참여할 수 있는 권리로만 한정될 수 없는,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리와 권한으로서의 힘이다.
민중이라 불리는 데모스는 누구인가? 데모스는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집합적 주체다. 주민, 촌락민, 부락민을 뜻하던 데모스는 귀족 세력(지배 엘리트)과 반대되는 민중파, 평민 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 등장하고, 그런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념을 획득한다. 그것을 통해 출현한 것이 ‘민주정’이라는 하나의 사건이다. 민주정체(demokratia)는 민중이 정체(politeia), 즉 시민(polites)들로 구성된 시민단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로 치면 입법, 사법, 행정부를 수장부터 일반 공직까지 모두 민중이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민중의 구체적 형상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는가?
데모스를 시민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귀족 집단과 반대되는 평민, 탁월함에 반대되는 평범함의 의미가 사라진다. 고대의 민주주의를 ‘재산과 능력을 가진 시민들의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귀족 정치를 부르주아식으로 재해석한 정의다. 근대 세계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탁월함의 징표가 구귀족들의 신분과 혈통에서 재산과 능력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데모스는 그런 종류의 시민이 아니었고, 민주정 이전에는 시민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민주정의 수립은 여기저기 살고 있던 촌락민이던 데모스가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대부분 농민이고, 어부이고, 산꾼인 사람들, 모든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는 ‘일하는 사람들’인 이들은 귀족 사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민주정을 만든 데모스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정치 역량에 대한 신뢰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 개념어들이 번역될 때, 도대체 그런 민중이 지배하는 정치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데모크라시를 ‘하극상’으로 번역했다. 어찌 보면 그가 생각했던 데모크라시가 원래의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민주주의로 번역되었지만, 한자로 ‘민’은 눈이 찔린 노예의 형상을 한 갑골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미천한 자들로 여겨졌던 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상이라니, 메이지 시대의 귀족 사회 엘리트 입장에서 볼 때는 하극상도 이만한 하극상이 없는 것이다. 서양에서 재발견된 근대의 민주주의는 고대로부터 민주주의 개념을 가져왔지만 데모스(인민의 의미를 국민과 시민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국민과 시민에 포함되지 않는 데모스)를 정치에서 배제했다. 또한 훌륭한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민주주의를 수립함으로서 민주주의 사상을 거꾸로 세웠다. 대의 민주주의는 국민과 시민으로 재정의된 노동자들의 실질적 참정권도 제한한다.
앞에서 살펴본 시민의회와 그 구성 방식은 어떠한가? 민중의 크라토스를 만들어 가는 방식인가? 아니면 민중의 크라토스를 해체하는 방식인가? 그것은 파편화된 개인들의 요구를 집단적 요구와 힘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직화되고 세력화된 힘들을 무작위 추첨된 개인을 통해 대표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개별 의견으로 만들어 해체하는 방식이 아닌가? 집단적 힘을 개별적인 힘으로 돌려놓는 이런 방식은 특히 2000년대 이후 거버넌스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위원회와 협의체 같은 구조에서는 ‘참여할 수 있는 개인’들의 자격이 더 제한되고, 결국 의제와 관련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표성을 갖게 된다. 이들의 대표성은 소속된 운동의 장이나 민중의 지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들이 쌓아 온 ‘상징성’,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에 의해 승인된다. 여성, 청년,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정체성이 생물학적·개인적 정체성을 통해 재현/대표(representation)되는 것도 그런 사례다. 그동안 많은 시민회의, 시민의회, 시민공론장과 각종 거버넌스와 협의체들이 민주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런 식으로 민중을 축출하는 기술적 장치로서 민중에 대한 정치적 엔클로저(배제)를 수행해 왔다.
정리하자면, 데모크라티아는 조직되고 단결된 민중의 힘에 기반하여, 데모스가 힘의 우세를 가지며 지배하는 정치 체제다. 데모크라티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우리는 민주정의 반대말을 당연히 독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민주정에 반대되는 개념은 독재보다는 탁월한 자들(aristoi)의 지배, 즉 귀족정(aristocracy)이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독재에 대해서는 강렬한 경계심과 저항 의식을 심어 놓았지만, 과두정(엘리트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독재자를 훌륭한 민주파 지도자들로 대체하는 것이 민주화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졌다. 권력이 독재에서 과두정으로 넘어가는 것은 큰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민중 투쟁의 결실은 쉽게 또 다른 지배 엘리트에게로 넘겨지곤 했다. 독재와 전체주의는 사라진 것이 맞을까? 1990년대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과거 일국적 차원에서 나타났던 독재와 전체주의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한 독재와 전체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의 독재와 시장 전체주의다. 이것이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은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다시 재구성하고, 흩어진 힘들을 모아 정치 세력화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민주주의에서 관리하는 민주주의로
-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의 전환
‘민주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와해’시키는 현상은 ‘민주화’ 이후 민주 정부들에서 더 많이 나타났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정치적 약속들은 점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사회적 합의란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핵발전소 공사 중단 약속이 그랬고,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약속이 그랬다. 민주당은 정치개혁운동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끌어 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위성정당으로 박살 냈고, 위성정당 방지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음 총선에서 보란 듯이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차별금지법은 언제나 시기상조라며 물리친다. 국민 다수가 찬성하는 이 법안은 다른 쟁점 법안과 달리 여론을 묻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약속들이 계속 유보되고 지연되며 무력화되어 왔던 과정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발현된 것이 윤석열의 12.3 쿠데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12.3 쿠데타는 홀로 오지 않았다. 반드시 지켜져야 할 사회적 합의와 공적 약속이 부단히 어겨지고, 정치에서 약속의 파기가 그래도 되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이것이 수없이 반복되며, ‘어기는 것이 힘’이 되는 과정이 그 앞에 있었다. 어기는 것이 강자의 특권이 되고, 승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의 관행이 되었다. 이렇게 ‘강자의 정의’가 사회를 지배한다면, 그런 곳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더더욱 요원하다. 정치인들이 약속을 파기하고 신뢰를 무너뜨릴 때, 그들에 대한 불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왜 정치에 대한 불신이 과두정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민중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표현되는 것일까? ‘자본의 독재, 금융 과두정, 기득권 엘리트 지배 체제를 민주주의로 갈아엎자’는 말이 아니라 어째서 ‘민주주의는 안된다’는 탄식과 환멸이 먼저 나오는 것일까? 민중을 타락시키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의 지지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이 먼저 날아가는 것일까?
앞서 본 토론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의사 결정 과정과 동일시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의사 결정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민중, 권력, 인민의 지배, 민중의 정치’ 같은 개념들이 사라지면서 ‘토론, 토의, 숙의, 협치’와 같은 개념들이 민주주의론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이 시기 민주주의 담론에서는 ‘토론적 전환’이라 부를 만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행동하는 민주주의에서 토론하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갈등 중재나 이해관계 조정, 의사 결정 과정과 같은 의미로 민주주의가 민주적 절차로 재해석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곧 ‘반독재’에 맞선 운동이자 실천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이와 함께 공산주의에 맞선 운동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는 정치 제도이자 독재, 파시즘, 전체주의에 반하며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인류 보편의 이념적 가치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의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구성 방식이 아니라 참여의 방식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민주주의보다 ‘거버넌스, 참여, 소통, 토의, 숙의, 조정, 중재, 합의’와 같은 개념들을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주적으로 합시다!”라는 말은 곧 참여를 보장하고, 소통하며, 토론하고 숙의하여, 조정과 중재를 통해 집단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민주주의란 개념은 사회 갈등의 조절과 중재 수단 같은 것이 되었고, 갈등관리술이나 사회관리론과 같은 의미로 점차 변해 갔다.
왜 1990년대 민주주의론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첫째, 공산권이 붕괴된 이후 서구 국가들에서는 그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민주주의의 이념적/이론적 가치와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둘째, 서구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운동은 1990년대를 거치며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질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셋째,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필리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까지 전 세계적으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이전의 민주주의론에 변화를 가져왔다.
1989년 소비에트 해체를 시작으로 자유세계를 위협하던 현실의 적인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라지자 서방 국가들은 과거와 같이 민주주의를 자유세계의 숭고한 가치로 옹호할 이유가 없어졌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새로운 자본의 축적 양식, 세계화와 금융화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었다. 냉전기에 민주주의 이념의 고취는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혁명을 예방하는 기능을 하였으나 냉전 종식 후에는 그런 용도는 없어진 반면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노동 유연화나 투자자와 기업을 위한 규제 완화 같은 법률 하나 만드는 데도 시민의 동의와 의회의 통과가 필요하니, 절차적 대의민주주의조차 비효율적으로 인식되었다. 국가의 계획 경제와 시장의 민주적 ‘통제’를 승인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기업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억압이라 생각한 것이다.
복지국가, 노동조합, 좌파 세력과 함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 이후에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서구 자본주의는 동유럽의 민주화운동,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맞선 자유세계를 확대하는 운동으로서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한국을 포함하여 198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이 독재와 전체주의, 부패한 관료제에 맞선 투쟁이면서 동시에 엘리트 지배와 불평등, 제국주의에 맞선 반체제적 성격을 가진 투쟁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동유럽과 제3세계의 민주화운동은 인민의 힘으로 정부 또는 체제를 무너뜨렸고, 이는 서방의 국가와 자본에게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반체제’ 민중 시위의 성공은 미국과 유럽 등으로 전파되어 그 지역 민중의 반체제 저항 운동에도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87년의 경험은 민주화에 만족하지 않고 1990년대 내내 거대한 민중 항쟁으로 이어졌다. 시애틀 전투(1999)와 월가 점령시위(2001)는 자유무역체제(WTO)와 세계화, 금융 자본을 정면 겨냥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물결은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만이 아니라 체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민중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지배 계급에겐 자신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는 당시의 신자유주의 운동에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민중의 힘’과 ‘그 힘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동시에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민중을 진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만드는 것, 민주주의를 금지하는 대신 민주주의를 하찮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지금까지 서구 민주주의는 체제 우월성을 나타낸 지표였고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관리해 온 대의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넘쳐흐르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제도 안으로 다시 집어넣어 제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넘쳐흐르는 힘들을 통제하고 다시 집어넣고자 했던 수단이 바로 ‘협치 민주주의’다. 거리에서 민중의 힘이 발현될 때마다 그 힘을 이용은 하되, 그것이 지배 체제 자체를 향하지는 못하도록 ‘협상’으로 출구를 제시하여 끝없는 토론과 합의의 과정으로 집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참여 정부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위원회와 협치 기구들은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던,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무력화하면서도 ‘시민 참여’라는 형식을 통해 오히려 그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대표적 장치들이었다. ‘위원회 정치’는 민관 협치의 대표적인 구성물이었고, 기업은 ‘민’의 한 부분을 구성하며 정부의 파트너로 당당하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정경유착’이라 불리던 것이 ‘공사 파트너십’으로 불리게 되자, 기업과 정부 엘리트들은 기업 고위 간부와 고위 공직을 넘나들었다. 보수 정권하에서는 여전히 ‘반독재 민주주의’가 강조되었고 시민사회의 반정부 투쟁에는 종종 야당인 민주당도 가세했지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보수 정권과 동일한 정책일지라도 반정부 투쟁은 동일한 양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정부 투쟁은 시민사회 안에서 사전 관리되었고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을 만드는 것이 협치 민주주의로 여겨졌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배웠나
이런 과정을 통해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는 ‘더 나은 정치 체제’이자 ‘우리가 지키고 수호해야 할 정치 체제’에서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대중 정치’로 표상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보완되어야 할 정치 체제로서 늘 ‘시민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등,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통용되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래디컬 데모크라시》에서 이런 ‘수식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보다 그 앞에 붙은 수식어를 더 강조하며, 본래의 민주주의는 그 ‘○○’에 의해서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원래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일조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래디컬 데모크라시’는 근본 민주주의, 즉 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리키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러미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언어이자 비판의 언어이며 혁명의 언어”였으나 “민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말을 도용하였다.”❷ 그는 민주주의를 곡해하고 왜곡시킨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민중’ 다시 정의하기 (a): ‘민중의 지배’라는 급진적 의미를 벗어나기 위해 ‘민중’의 정의를 좁히는 것. 노예와 여성, 특정 인종이나 빈민, 또는 다른 집단을 ‘민중’에서 제외하는 것. ‘국민’과 ‘시민’으로 정의.
(2) ‘민중’ 다시 정의하기 (b): ‘민중’을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정의하는 것. 독재 정부는 자신을 지지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이자 자신이 지켜야 할 민중으로 봄.
(3) 민중을 다시 정의하기 (c): ‘민중’을 추상화, 이론화하기. ‘민중’을 자신들에 의해 대변되어야 할 존재로 규정.
(4) 민주주의는 민중의 복지를 돌보는 것이다.
(5)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얻는 것이다.
(6) 민주주의는 발전이다 (a): 민주주의를 (지금이 아닌) 미래의 발전된 통치 형태로 이상화.
(7) 민주주의는 발전이다 (b):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도 발전한다. (정치발전론)
러미스에 따르면 이렇게 다시 정의된 민주주의는 사실상 ‘반(反)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반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언어도단을 다시 바로잡는 것(정명)이다.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민주주의라 부르면서 그 실패를 민주주의의 실패라 여기게 되고, 민중을 혐오하며 민주주의는 안된다는 회의와 냉소에 빠져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웠던 민주주의가 바로 저런 민주주의였다. 대학에서 배웠던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발전론, 정치근대화론 같은 냉전기 미국 사회과학의 산물이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고, 후진적 정치를 선진적 정치로 근대화(서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치근대화론의 요체였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교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야만 지대를 문명화하기 위해서’, ‘근대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침략과 약탈을 정당화하고 식민화를 진보, 발전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20세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를 독재와 공산주의로부터 ‘민주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침략과 수탈을 ‘해방 전쟁’으로 미화하곤 했다. 민주화를 위한 성전에서 각 지역의 토착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는 지금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민주주의로 제시되었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발전’이란 개념을 통해 연결시킨 것도 기막힌 트릭이었다. 정치발전론의 큰 얼개는 경제 발전이 정치 발전의 조건이며 경제 성장은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것이다. 1947년 ‘자유 진영의 발전을 위해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선언이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이라 불린 이 연설을 통해, ‘발전’은 전 인류의 목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는 발전과 저발전 지역으로 나뉘어지고, 발전 국가는 저발전 국가의 목표가 됐다. 이런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들이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전략적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민주주의 이론들은 독재 정권에도 도움이 되었다. 독재 정권은 늘 “경제 성장 먼저, 민주주의는 그다음에”라고 말했다. 그들은 경제 수준과 정치 의식이 낮은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주는 것은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를 하고 싶으면 먼저 경제 성장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먹고 사는 것이 풍요로워지면 문화생활과 민주주의는 으레 따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못할 때는 민주주의는커녕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협박했다. 정치근대화론은 ‘개발 독재’에 정당성을 주는 이론이었다.
독재 정권하에서는 오직 국가가 허용하는 형태로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었다. 그게 ‘자유민주주의’였다. 독재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것은 반공주의의 다른 말이었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질서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자유 진영’의 체제요 이념이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란 걸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진짜 민주주의를 간절히 바랐다. 한편으로는 독재하에서는 자유도 없고 민주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내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시민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다. 반공교육이 민주주의 교육을 대신하고, 민주주의 교육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교육을 통해 잘못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기를 기회가 없었고, 독재를 물리치는 것이 사회운동의 최우선 과제였으므로 민주주의를 ‘비판’할 여유도 없었다. 오히려 엘리트들은 미국의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나 반공주의적 자유주의, 민중의 권력을 가로채는 대의민주주의를 반독재 투쟁의 무기로 적극 수용하고 활용하였다. 냉전기 CIA는 한국을 비롯 세계 각 지역의 민주주의 연구소를 지원하고, 자금을 댔다. 장준하의 《사상계》도 그런 배경에서 미국에서 지원을 받은 잡지였고, 정치발전론과 근대화론에 기반한 논문을 번역해서 싣곤 했다. 냉전 종식 후에는 ‘탈이념화’된 새로운 민주주의론이 필요했다. 아시아식 민주주의가 유교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과 함께 등장하여 주목받기도 하고, 민주주의가 ‘문화’로 재해석되거나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 속에 흡수되기도 했다.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는 오래 극복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행을 둘러싼 논쟁이 잠시 있었으나 곧 침잠했다.
오래된 미래, 새로운 민주주의 –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앞에 소개한 토론에 약간의 함정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애초에 민주적 ‘방법’을 물으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폭력적으로 뒤엎어 버리면서 우리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로소 질문하게 된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는 왜 그 사람에게 그럴 힘이 있는지를 묻고 이는 다시 권력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방법을 찾는 것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교실에서 힘의 관계를 보게 되고, 학교 안에서 평등한 관계를 가로막는 요인들을 찾게 된다. 대학에서 그것은 상대 평가제 같은 경쟁적 시험 제도, 취업 경쟁에서 학점이 주는 압박, 교수가 가진 평가 권력 같은 것이다. 교수도 서비스가 된 교육 현장에서 소비자가 된 학생들의 별점(평가)에 매여 있다. 학생들은 교수에게 불만이 있어도 한마디도 못하고 억눌려 있던 것을 강의 평가와 에브리타임(에타) 같은 대학의 뒷담화 공론장을 통해 표출한다. 그 뒤에는 제도와 정책, 사회 권력과 역사가 있다. 교실 안의 권력 구조는 사회적 권력 구조를 반영하지만 처음부터 거대한 구조에만 착목하면 그건 절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하나씩 짚어 가면, 그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의 지점을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체제를 바꾸는 건 우리의 구체적 삶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고, 교육운동에서 그것은 교육 현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 민주화는 너무 멀지만, 교실 민주화는 좀더 가깝다. 그렇게 발딛고 선 현장에서 교육 실천을 벌여 나갈 때, 우리는 “여성해방 없이 노동해방 없다”, “동물해방 없이 인간해방 없다”라고 외치는 다른 운동들과 같이, 이곳의 해방이 모두의 해방의 조건이 된다고 외칠 수 있을 것이고, 교육운동을 이해당사자의 운동이 아니라 모두의 운동으로 설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교육 혁명 없이는 사회 혁명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토론을 시작할 때 나는 ‘실행하는 민주주의’를 유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가장 직접적으로 그것은 교수의 독단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쉽게 반발하지 못했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평가하는 권력이 교수인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민중들이 수준이 낮아 좋은 통치자를 고르지 못하는 것도, 개인들이 비겁해서 불의를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보고, 권력의 불평등한 구조를 발견해 내지 못하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패 원인을 개인의 문제나 제도의 문제로 돌리게 된다. 민중은 그럴 수준이 아니라서, 민주주의는 제도적 결함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계속 우리와 닮은 우리를 향해 서로 비난하고 불신하며 자기 환멸에 빠지게 되고, 더 나은 지도자를 찾게 된다. 이와 같은 민중의 자기혐오와 자기 불신을 ‘대중혐오(demophobia)’라고 한다. 이 대중혐오가 확산되면 존엄을 박탈당한 개인들은 무능한 자신의 역량을 증폭시켜 줄 집단을 찾게 되고 귀속 집단이 가진 권력과 그것을 행사하는 지도자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대리 만족을 얻는다. 이런 일들의 일상화는 극우 정치와 파시즘, 폭압적 국가의 귀환을 예고한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시민, 국민, 인민’의 범주에서 제거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선 극우 정권에 의해 인민이 동물로 규정되어 무도하게 학살당한다. 트럼프는 ‘시민이 아닌 자’와 ‘국민으로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을 색출하여 추방한다. 윤석열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해야 할 국민에서 제외하고, 자신의 지지자들로 국민의 범주를 좁혔다. 방해자, 불만자, 부적응자, 무능력자, 낙오자, 탈락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 못하고 강제로 추방되거나 권리를 박탈당한다. 안전은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 되고 있다. 지금 학교는 어떤가?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증폭되는 방식을 관찰하고, 교실의 권력 구조를 드러내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실의 권력관계가 학교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사회 권력의 관계를 반영한다면, 우리는 교실과 학교에서 이 권력관계를 바꾸는 노력으로 사회의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을 찾고, 사례를 공유하면서, 교사 모임, 학생 모임, 지역 모임을 조직하고 ‘세력화’하는 길을 찾아 갈 수는 없을까. 12.3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과 운동에 대한 근본적 대안 모색을 위한 공론장도 계속 열어 내야 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화된 교육 체제에서 민주주의 교육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돌아보자. 제도화된 민주주의 교육은 일종의 ‘시민교양교육’처럼 변모했고, 다른 한편으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같은 민중의 민주주의는 과거의 ‘역사교육’으로 변하였다. 과거의 민중은 위대한 민중으로 역사 속에 박제하고, 그런 민중이 현실에 다시 출현하는 것은 가로막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품행을 가르치는 규범적 성격의 민주시민교육 속에서 우리는 ‘민중-되기’와 민중의 힘을 구성하는 법, 직접 실행하는 법 등을 교육과정에서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했다. 이런 규범화된 민주주의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강조되고, 토론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 되며, 토론의 규칙(에티켓)을 벗어나는 민중 문화는 배척되거나 불리해진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민중이 누구인가’와, ‘민중의 정치가 어떤 것인가’라는 두 질문은 민주화 이후 학교 민주주의 교육에서도 지속적으로 누락되었다. 새로운 민주주의 교육에서는 그것을 다시 만들어 내야 한다.
지금이 새로운 민주주의 교육과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또다시 우리를 붙잡는다. 나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지구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우리가 발굴해야 할 가장 오래되고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의 보고이며 수없이 많은 다른 이름으로 출현했고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며 이어 가는 길이 끊어졌을 뿐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독재 정권에서는 민주주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불가했으므로,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은 더 풍부하게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서 펼쳐졌고 그만큼 더 간절하게 민주주의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1987년 6월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고향 통영에서 민주화운동은 늘 텔레비전에서만 나오는 일이었다. 내가 살던 작은 항구 도시는 학생들이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최루탄 터지는 전쟁터 같은 화면과 달리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변함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아무 날과 다를 바 없는 아침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누군가 새벽에 몰래 학교 담벼락에 대자보를 붙였다는 것이다. 대자보는 이미 뜯어지고 없었고, 대자보 붙인 자국이 구석에 조그맣게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대자보’라는 말도 낯설었던 우리들에게, 흔적으로 남은 대자보 자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태풍 같은 사건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누가 썼을까? 한동안 그게 최대 이슈였다. 어쩌면 거기 써 있었을 말들과, 써 있지 않았을 말들까지 우리는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나가서 싸우는 것, 담벼락에라도 민주주의 만세라고 써 보는 것, 대자보를 붙이는 것, 누군가를 숨겨 주는 것, 금지된 행위를 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 민주주의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1987년 2학년 때 일어났던 그 사건 때문이었을까. 2학년 학생들은 고3이 된 1988에 정말로 데모를 하게 된다. 선생님에게 학생이 슬리퍼로 뺨을 맞은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야간 자율학습을 거부하는 시위를 했던 것이다. 농성을 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우리는 운동장에 반별로 앉아서 교가와 애국가와 〈아침이슬〉을 열심히 번갈아 가며 불렀다. 교가와 애국가도 분노를 담아 부르니 저항가가 되었다. 비상사태에 퇴근했던 선생님들까지 모두 학교로 돌아왔다. 교감 선생님이 학생회장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요구 사항을 모아서 적어 오라고 했다. 쏟아져 나온 요구 사항에는 ‘치마 입는 날 없앨 것, 교실 바닥 양초 문지르기 하지 말 것, 체육 시간에 운동장 풀 뽑기 시키지 말 것, 겨울에 털신 실내화를 신을 수 있도록 허용할 것’ 같은 자잘한 것들부터 ‘돈 걷지 말 것, 차별하지 말 것, 때리지 말 것, 성적 공개하지 말 것(모의고사 점수와 이름을 성적순으로 붙여 놓았음), 특별반(성적 상위)과 특수반(성적 부진) 운영하지 말 것’ 같은 차별과 인권 침해에 대한 시정 요구도 들어있었다. 데모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학생들이, 누구의 사주도 없이, 아주 우연하게, 그것도 빈번히 일어났던 체벌을 계기로 일으켰던 학생 시위는 훗날에도 이 학교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 되었다. 어떤 요구는 받아들여졌고(양초 문지르기와 운동장 풀 뽑기와 실내화 규정에 대한 시정 요구), 어떤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나머지 대부분 중요한 요구들). 그리고 다시 학교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마다 올해 고3은 최악의 입시 결과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우리의 행동을 질책하고 저주했다. 큰 성과도 없었지만 큰 실패도 없었다. 학교를 크게 바꿔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시 결과도 딱히 그 일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지만 외형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행위의 감각이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손을 들고 일어나서 생각을 말하던 친구의 모습, 불안하고 무섭기도 한 마음을 친구와 손을 꼭 잡고서 수학여행 때처럼 목청을 높여 부르던 노랫소리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다.
그날의 일이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앞서 ‘대자보 사건’이 있었고, 우리는 상상 속의 대자보에 우리의 요구안을 하나씩 채워 보았다. 수업 시간에 슬쩍슬쩍 서울의 데모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선생님이 있었고, 서울에서 온 교생 선생님은 자신의 학생 시위 경험을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우리에게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알게 모르게 심어 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때리고, 돈 받고, 차별하는 교사들 가운데, 때리지 않고, 돈 받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우리가 꿈꾸는 다른 세상이 오기 전에도 먼저 세상을 다르게 살기 시작한 사람이.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민주주의 운동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 거대한 시위만 ‘실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상에서 부당한 것 하나라도 바꾸어 내는 사소한 저항과 실천들을 계속 찾아내고 실행해 보자. 작은 소동을 일으키고 사건들을 쌓아 가자. 제임스 스콧은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2020)에서 민중들이 표면적으로는 복종하면서도 내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다양한 방식을 해석하며 생활과 생존을 지키면서도 ‘비겁한 저항’을 부단히 전개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평소에는 저항으로 보이지도 않는 저항들을 체념하지 않고 쌓아 갈 때만 격변의 시기에 결정적인 저항의 대오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평소에 ‘일상의 민주주의 연습’을 하는 것이다. 스콧은 그와 같은 일상적 저항 습관을 기르는 일을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라고도 했다. 민주주의 근육 키우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위기, 생태 위기가 시시각각 심화되고 있지만 이것을 해결할 새로운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시간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육을 만들어 가자. 12.3 이전의 낡은 정치, 가짜 민주주의로 돌아가지 말고, 12.3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과 운동을 새롭게 고민하고 만들어 가자.
❶ 공론 조사(deliberative poll)를 개발한 사람은 제임스 피쉬킨이라는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로, 그는 자신이 개발한 공론 조사에 대한 지적 재산권(상표권)을 갖고 있어 각국의 정부와 지자체는 이 조사 기법을 사용할 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❷ 더글러스 러미스, 이승렬·하승우 옮김(2024), 《래디컬 데모크라시》, 한티재,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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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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