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호[리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김지용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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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지용 takitezo68@korea.kr

이우학교 교장



정용주 씀, 《멈추지 못하는 학교》, 교육공동체 벗, 2025





코로나19 범유행 초기, 등교 수업이 중지되고 원격 수업이 장기화하면서 많은 학교들이 원격으로 수업하되 10분, 15분씩 단축한 적이 있었다. 시간을 단축해도 진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은 수업량임에도 더 짧은 시간에 압축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효능감을 느끼는 교사까지 생겨났다.


그러다 문득, 도대체 초등학교 40분, 중학교 45분, 고등학교 50분 수업은 누가 정한 것인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정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 자랄 땐 교사가 칠판에 분필로 판서하면 학생들이 그것을 베끼느라 수업 시간의 절반을 썼다. 그땐 손은 아팠지만 진도는 느렸고 시간은 천천히 갔다. 지금, 판서하는 교사는 없다. 판서 대신 프린트물을 나눠 주고 화면에 프레젠테이션을 띄운다. 기술 발달로 단위 시간당 전달되는 지식의 양은 많아지고 활동의 밀도는 촘촘해졌는데, 우리는 40분, 45분, 50분 수업 시간 단위를 고집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쉼과 여가야말로 학교가 능동적으로 추구할 가치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숨 쉬고 상상할 수 있게 수업 시간을 줄여도 되겠다는 생각을 잠시 갖게 했다. 정히 수업 시간을 줄일 수 없다면, 프린트물과 프레젠테이션으로 아낀 시간을 느긋하게, 인생 경험을 나누고 농담도 하며 아이들과의 대화로 채웠으면 좋겠다는 상상. 코로나19 대유행이 지나고 그런 발칙한 발상은 거기서 멈췄다. 


이것은 무엇일까. 매개 없이 투명하게 그래서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또 언제나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에 걸려들지 않아 맹점을 만들고 무의식을 지배한다.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사각형 교실과 사각형 운동장에선 사각형의 생각과 삶이 주조되고 컨베이어 벨트에선 시간이 초 단위로 흐른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 삶의 기본값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매개로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멈추지 못하는 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부제는 ‘입시가속체제와 시간주권’이다. ‘체제와 주권’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이 있었다. 정용주는 여기에 ‘가속과 시간’을 덧붙였다. 체제를 시간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에 따라 주권의 영역을 시간주권으로 확장한 것은 새로울 뿐 아니라 더 근본적이다. 시간의 관점에서 교육과 학교, 정책 및 행정 등 거의 모든 것에 감춰진/은폐된 전제들을 흔들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근본적인 비판의 지점을 얻게 되었고 동시에 건설의 방향을 갖게 되었다.



다시, 묻다


누군가 이 책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짧게 ‘다시 묻는’ 책이라고 답하겠다. 그럼 상대방은 또 묻겠지, 뭘 다시 묻느냐고?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당신이 우리 교육과 학교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이 책은 온통 ‘다시 묻기’투성이다. 실제 70개에 달하는 각 절(節)도 질문으로 시작한다. 정용주의 질문은 체제와 정책, 교사와 학생, 존재와 시간, 기술과 민주주의, 리더십과 자율 등 실로 방대하고 전방위적이다. 그의 질문은 오래된 질문이지만 어느덧 잊었던 질문이기에 어느 하나 허투루 다가오지 않으며 즉답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다음은 그가 던진 질문 중 한동안 응시하고 오래 머뭇거린 몇몇이다. 


· 왜 교육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 아니라 살아남는 기술이 되었는가?(본문 34쪽)

· 학교는 언제부터 배움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교육 서비스를 중개하는 장소가 되었는가?(본문 44쪽)

· 리더십은 왜 절차의 감시자가 되었는가?(본문 169쪽)

· 우리는 피드백을 준다고 믿지만 사실은 점수만으로 존재를 구조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본문 224쪽)

· 기술은 교육을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학교를 재편하는 권력이 되는가?(본문 301쪽)

· 역량은 자유의 조건인가, 경쟁의 규격인가?(본문 340쪽)

· 민주주의는 어떻게 느린 시간 속에서만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가?(본문 454쪽)


급한 것과 중요한 것은 다르다. 급하다고 무조건 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급한 것이 방법의 문제라면 중요한 것은 목적과 관련이 있다. 늦든 빠르든 속도는 목적에 부차적인 것일 뿐 목적을 대신할 수 없다. 눈앞의 것에만 급급할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행위만을 반복하기 십상이다. 과거에 해 오던 대로, 기존 경로에 의존하여 ‘다시’ 되풀이할 뿐이다. 멈춰 서서 다시 묻지 않는다면 속도는 그 관성으로 우리 삶의 목적을 부식시킨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시, 묻기’이다. ‘다시, 묻기’에서 ‘다시’는 잃어버린 이상향을 찾아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향한 현재의 미래 지향적 기획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실천할 계기를 마련하자는 얘기다. 다시 묻기는 인식의 전환을 촉발하고 인식의 전환은 새로운 구조를 상상하고 그 구조를 떠받칠 문화를 형성할 동력이 된다. 재사유, 인식의 전환 없이 도입한 해결책이나 정책은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거나 문제를 연장할 뿐이며, 설령 반짝 효과가 있더라도 유행처럼 지나갈 뿐이다. 그러한 현상을 숱하게 봐 왔고 인식과 구조와 문화를 놔둔 채 표면의 무늬만 바꾸는 것들은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약발이 다했다. 그의 말마따나 ‘전략의 부족이 아니라 철학의 부재’(본문 389쪽)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의적절하다.



그라운드 제로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는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졌다. 사람들은 파괴된 그 자리를 종종 폭발 원점을 뜻하는 그라운드 제로라 불렀다. 정용주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책의 도입부, ‘한국 교육을 다시 묻는 자리’에 그라운드 제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에게 그라운드 제로는 ‘재난의 흔적이자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하는 장소’(본문 32쪽)다. 시간의 상실로 교육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고 지금까지의 ‘해답이 무너진 자리에서 질문을 다시 찾는 것’(본문 33쪽)이 그의 실천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이 있다. 그릇되고 삿된 견해나 생각을 깨뜨려 없애고 올바른 진리나 바른 도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정용주의 사유의 흐름은 파사현정의 태도에 입각한 듯하다. 온갖 삿된 생각들과 올바른 견해의 대립 쌍들이 쉬지 않고 나온다. 감응 대 반응, 흐름 대 분절, 기록 대 응답, 질문 대 정답, 숙고 대 훈련, 존재 대 수행, 정보 전달 대 의미 생성, 기능 훈련 대 윤리적 성찰, 숙성 대 즉시성 등 그릇된 생각은 부정당하고 바른 도리는 정립된다. 


배움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다. 교육은 제도가 아니며, 학교는 시스템이 아니다. 교육은 사람이고, 학교는 관계이며, 배움은 존재를 울리는 사건이어야 한다. 

- 본문 17쪽


교육이 타자와의 공존을 배제하고 ‘나의 성장’만을 강조할 때, 학생은 자기 자신 안으로 갇히며 점점 더 외롭고 불안한 존재가 되어 간다. 그러나 배움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사건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와 대화하고, 그와 다르다는 사실에서 불편함을 느끼며, 그 불편함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단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이다. 관계가 없는 배움은 이해가 아니라 습득이고, 감응이 없는 만남은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다. 

- 본문 156~157쪽


배움은 본래 실패와 오류를 포함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의 수업 구조는 실수를 빠르게 수정하고, 정답으로 회귀시키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학생이 틀린 답을 말해도 그 틀림을 탐색하기보다 빠르게 ‘정답을 찾아 주는’ 교실 문화는, 배움을 오류가 허용되지 않는 기술적 수행으로 바꿔 버린다. 교사는 실수를 수업 흐름의 방해로 간주하고 학생은 틀림을 숨기려 한다. 이때 배움은 관계적 신뢰 속에서 발생하는 감응의 사건이 아니라 ‘실수 없는 훈련’으로 축소된다. 교육은 실패를 견디는 윤리이기도 한데, 지금의 교실은 실패를 감추는 능력을 길러 주는 훈련장이 되고 있다. 

- 본문 218쪽


그의 명징함에 연신 밑줄 긋기에 바빴다. 인용이 장황한 것은, 이 책을 읽고 싶게 하는 가장 그럴듯한 유혹은 있는 그대로의 인용이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재사유 혹은 계몽


유행에 뒤처지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 속에 일단 긍정부터 해 버린 것들이 많았다. 마음 한구석에는 남겼던 찜찜함, 의심과 불안이 도사렸지만 그 이유가 뭘지 따져 보진 않았다. 이 책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 준다. 


혁신학교 이후의 대안처럼 번져 나가는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학교 도입에 남몰래 의심의 시선을 감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의심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가 말하길, 입시가속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IB 도입은 교육을 다양화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가속체제의 장식이 될 뿐 결과적으로 현 체계를 지속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IB 교육과정을 도입할지, 말지가 아니라 ‘IB가 요구하는 시간의 철학과 윤리를 학교가 감당할 수 있는가’(본문 152쪽)였던 것이다. 


IB의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것은 ‘도입’이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 구조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제도의 용기, 실패를 허용하는 교육의 윤리, 의미가 천천히 생성되는 배움의 문화를 상상할 수 있는 감수성이 마련될 때, 비로소 IB와 같은 대안이 입시가속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단서가 된다. 

- 본문 153쪽


이제는 마치 보편적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자기주도 학습’, ‘책임 있는 학습자’라는 말도 공동체성과 관계성이 복원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각자도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된다. 타자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각자의 학습 경로에 갇힌 채 ‘나의 성장’만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는 존재를 양산한다.(본문 156쪽) 한편으론 조별 활동, 공동 과제, 각종 단체 행사 등을 강조하면서 공감과 상호 이해, 협력을 의도하지만 효과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협력은 ‘역할 분담이라는 표면적 기능으로 재편’되며 관계는 ‘진정성 없이 전략화’되고 행사는 ‘의미 없이 참여하는 시간일 뿐 기억되지 않는다’.(본문 257쪽, 266쪽) 왜 그럴까? 교육의 본질이 관계성에 있음에도 그것을 망각해 왔기 때문이다. 관계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임에도 자꾸 성과를 위한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학교가 다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관계를 나눌 시간 구조와 그 질서’(260쪽)가 필요하다.


학생 참여의 다층적 활동으로 수업의 밀도를 높인 수업은 좋은 수업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활동을 정해진 시간 안에 수행하게 하는 통제된 다중 과제 시스템’(209쪽)에 가깝다. 교수-학습의 중심이 ‘만남’이 아니라 ‘성과’에 있는 한, 수업과 교육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과도하게 설계되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과제 압력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과정 중심 평가라는 이름으로 쉼 없이 관리되고 기록된다. 아이들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로한 이유고 피로에 지쳐 무기력해지는 까닭이다. 차라리 평소에 농땡이 치다가 고사 기간에만 벼락치기 하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다. 


최근 교육의 디지털 전환과 AI 도입이 개별 맞춤형 학습의 가장 설득력 있는 해결책인 양 진행되고 있다. 넋 놓고 있으면 기술이 제공하는 환상에 쉽게 현혹된다. 그러나 정용주는 다시 묻는다. ‘왜 개별화가 필요한가?’ 기술적 개입으로 개별화 교육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저마다 속도가 다른 ‘학습자 개인의 특성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것일 뿐이며 알고리즘의 지시에 따라 효율적인 학습 경로를 처방하는 것일 뿐’(본문 322쪽) 아이들이 의미를 구성하고 공적 관계를 맺으며 성찰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기술주의적 해결은 정용주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표준화된 성과 지표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Al 디지털 교과서와 자동 평가 시스템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교실과 학교를 하나의 학습 기계로 재구조화하고 있다. (……) 그 결과 수업은 인간적 만남이나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수집-처리-개입의 순환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기술 인프라로 전환된다. (……) 이는 교사의 판단이나 인간적 관계를 통한 교육적 개입보다 정량화된 신호와 지표를 통해 학습자를 규율하려는 구조로, 교육을 감응적 만남이 아니라 수정 가능한 상태의 관리로 바꾸어 버린다. 

- 본문 313~314쪽


기술적 개입은 목표 달성의 수단이나 도구는 될지언정 교육의 목적과 방향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마치 목적과 방향인 양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고 착시를 일으킴으로써 권력으로 작동한다. 게다가 AI 기반 수업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아이들은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확한 반응을 반복해서 훈련하는 ‘사용자’로 인식하게 되고 교사도 어느덧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콘텐츠 관리자’로 쪼그라든다니 끔찍한 일이다.


역량 중심 교육은 어떤가. 우리는 과거의 지식 전달 중심 교육을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아이들에게 키워 줄 것은 역량이라는 데 동의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교육을 통해 역량을 키운 아이들이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 역량이 ‘해방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계량 가능한 데이터로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해야 하는 새로운 형벌’(본문 340쪽)이 되고 만 것은 무슨 까닭인가. 최대 효율의 시간 구조를 지향하는 초가속사회에서 역량은 ‘역량주의’로 변질된다. 역량은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단순한 기능 향상을 뜻하게 되고 교육은 ‘더 이상 삶의 재구성이 아니라 업데이트 장’(본문 349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가속사회는 현재를 미래의 성과를 위해 투자되는 시간으로만 바라보고 인간의 리듬을 기술적 타이밍에 맞춰 조율하는 사회다. 그 시간 구조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있지 않으면 어떤 시도도 멀리 가지 못한다. 


자기주도적 학습, 학생 활동 중심 수업, 모둠 활동 및 과제, 개별 맞춤형 교육과정, 역량 중심 교육, 행위 주체성 등 이 모든 좋은 말들이 어째서 시간이 갈수록 생기를 잃고 형해화되는지 늘 궁금했다. 아니, 모든 것을 입시 탓으로 돌리며 그러려니 했다. 정용주의 책을 읽고 나니 인식의 게으름을 체념의 베일로 쉽게 변명하듯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베일을 벗고 ‘나는 계몽되었다’. (어느 무지몽매한 변호사의 말로 오염된 말이지만 계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제격.) 



소환 그리고 복원


정용주는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이름들을 다시 소환한다. 감정, 실패, 질문과 응답,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성, 타자와 민주주의, 판단과 윤리 같은 것들. 이 중 새롭다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분실과 망각에 대한 혐의는 우리에게 있다. 저자가 오래된 이름을 다시 불러내 재사유하고 그 본질을 복원하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용주가 가속학교, 초가속학교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존재 기반 교육, 느린 교육을 내세운 것은 논리적 귀결이겠지만 오히려 가슴을 뛰게 한 것은 그가 제시한 느린 교육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낱 행정 행위에서 벗어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배움을 감정의 사건이자 리듬이라고 정의할 때, 배움은 타자와 갈등하는 관계의 서사라고 표현할 때, 배움에서 의미는 망설임과 주저함과 떨림의 여백을 통해 생성된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성찰의 시간, 기억의 의식, 환대의 장면이 하나하나 연결되어야 학교는 단순한 운영 기관이 아니라 교육적 장소가 된다. 느린학교는 소소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실천을 실험한다. 아침의 시작을 여는 인사, 주간 마무리를 위한 대화 시간, 학기 말 되새김 활동 등은 모두 ‘되풀이되는 삶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기회다. 교육은 이처럼 반복과 서사를 통해서만 삶의 감각을 복원할 수 있는 예술적 실천이다. 

- 본문 446쪽


그에게 소환·복원한 이름은 교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와 민주주의, 윤리까지 포괄한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이것을 망각하고 교육이 집단보다 개인을 단위로 삼을 때, 타자들과의 관계보다 개인의 성취를 우선할 때 공동체성과 공공성은 희미해진다. 이때 지워지는 것이 바로 타자성이고 관계성이다. 나와 다른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공동의 과제가 설정되는데 이 공동의 과제가 바로 공공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갈등과 협력이 곧 삶이고 이 삶의 과정이 다름 아닌 정치고 민주주의다. 타자와의 관계와 그 관계가 놓인 공공의 맥락은 우리에게 윤리를 요구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충돌하고 조율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감각’(본문 354쪽)이 윤리 감각이다. 이러한 윤리 감각이 개인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앞세운 소비주의적 문화에 밀려 이제 민주주의마저도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상호작용과 공론장은 제거되고 각자 자신의 실리와 편의를 추구하며 결정과 책임은 리더에게 미룬다. 삶과 생활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윤리적 계기는 ‘더 빨리, 더 많이’라는 구호 속에 밀려나고 잊힌다. 학교와 교육도 그러하다.


교육은 단지 정보 전달이나 기능 훈련의 장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와의 우연한 만남, 예기치 못한 응답, 가르치고 배운다는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계기를 전제로 한다. 이 계기란, 단순히 규칙을 따르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 인해 나의 판단이 흔들리고 기존의 규범을 재구성해야 하는 긴장을 말한다. (……) 윤리적 판단은 즉시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황과 맥락, 타자의 언어, 시간적 지연 속에서 숙성되어야 한다. 

- 본문 358~359쪽


‘스스로 매뉴얼을 요구하는 자율의 역설’(본문 279쪽) 속에서 해석과 판단을 다른 누군가에게 위임하고 자신을 단지 지침의 수행자로 축소시킬 때, 우리는 주체로서의 존엄을 잃는다. 정용주가 신언서판이라고 말할 때의 그 ‘판단(判)’을 다시 불러내고 고위직 인사 청문회장에서만 겨우 발현되는 ‘윤리’를 다시 얘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듯 용기 있는 일이고 그래서 고맙다.



존재와 시간


칸트의 정언명령, ‘인간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고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를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다. 교육은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지 수단이 되면 기능적 행위로 전락한다. 교육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거나 지위재 획득의 도구가 되는 순간 효율의 논리를 벗어나기 어렵고 효율은 속도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속도에 취하면 풍경이 지워질 뿐 아니라 윤리도 잊고 목적도 잃게 된다. 속도 그 자체가 윤리와 목적을 대신한다. 중독과 비슷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용주의 아포리즘은 빛난다. ‘목적을 되묻는 목소리가 서사이고, 그 물음을 반복해서 부르는 행위가 성찰이다. 그래서 서사와 성찰은 속도를 길들인다.’(본문 485쪽)


교육이 목적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존재’와 ‘시간’에 대한 재사유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우리는 배움에서, 학교와 교육에서, 그리고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정용주가 소환하고 복원하려는 최심층, ‘존재와 시간’에 도달한다. 이 책 전체의 질문을 하나로 수렴한다면, ‘우리는 교육에서 시간을 어떻게 다시 구성할 수 있는가’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는 곧 존재의 문제다’.(본문 416쪽)


존재를 존재의 역할과 기능으로 치환할 경우 존재는 즉시 비교 가능한 대상이 되고 비교는 존재의 위계화를 낳는다. 존재의 유일무이성은 존재 그 자체로부터 온다.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한 무늬를 그릴 때 고유성은 드러난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시간은 존재를 감싸는 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에게 시간을 빼앗으면 존재 자체는 흐려지고, 각자의 리듬 대신 외부 시간을 강제하면 고유성은 사라진다.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존재는 교육의 주체가 될 수 없다.’(본문 186쪽) 결국 자신의 삶인데도 알 수 없는 외부자의 설계대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정용주는 교육의 본질이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존재하게 할 것인가’의 물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도, 시간에 쫓겨 시간을 따라야 하는 존재가 아니어야 한다. 시간이 존재를 따르도록 시간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시간은 투자되고 효율적으로 배분되며 성과로 회수되어야 할, ‘조절하고 통제해야 할 관리 자원이 아니며 우리의 삶 역시 관리 프로젝트가 아니기’(본문 388쪽) 때문이다. 교육이 타자와 함께 흐르는 시간을 회복하지 못하면, 존재도 회복될 수 없다. 저마다의 주체가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실패와 망설임, 발견과 숙고, 우회와 반복과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이질적 시간들을 의미 있는 서사로 구성할 때야말로 배움이 탄생하고 존재의 깊이가 생긴다. 따라서 시간주권의 회복, ‘시간 구조의 전환이야말로 교육 개혁의 시작’(본문 190쪽)이다. 동시에 이것은 ‘존재의 이름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감각적, 윤리적, 정치적 기획’(본문 397쪽)이기도 하다. 


시간주권은 더 이상 이론의 개념이 아니라 학교가 살아남기 위한 존재론적 요청이 되었다. 느린학교는 이를 실천하는 하나의 상상이다. 이 상상은 정책이 아니라 사유에서 출발하며, 그 사유는 학교 안에서의 구체적인 시간 경험으로부터 자란다. (……) 느린학교를 가능하게 하는 다층적 시간 질서를 탐색하는 것은 단지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 근본적인 존재 회복의 길을 여는 작업이다.

- 본문 421쪽(일부 재구성)


존재는 시간 위에 집을 짓는다. 그 집을 체제라고 불러도 좋고 의미라 해도 되겠다. 체제와 의미를 짓는 일은 존재를 자유롭게 해방해야지 존재를 억압하고 구속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집을 허물고 다시 지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부수고 다시 지은 새집에 ‘느린학교’라는 이름을 붙이자.



군더더기


고백하건대 느림을 강조하는 책을 빨리 읽었다. 사유의 지점이 널려 있는 책을 급하게 읽었다. 책에서 말한 것에 대한 존중이 아니며 작가의 오랜 사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한편 억울한 감정이 없지 않다. 이 책에는 저자가 강조하는 여백이 없다. 강약중강약으로 이어지는 강세의 리듬이 없다. 여백과 리듬이 없이 이렇게 꽉 찬 체계로 만들다니 숨 막히다. 외국 학자나 이론의 소개나 인용 없이 저자가 소화한 것을 우리 교육 현실에 대응해 자기 말로 표현한 것은 커다란 장점이어서 이 두꺼운 책을 견디게 해 준다. 핵심어와 그 유래는 각 부 끝에 ‘사유의 혈관들’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묶어 읽는 이의 이해를 도운 것도 좋았다. 사유의 망설임과 주저함과 흔들림을 주문한 저자에게 이 책의 서평을 쓴답시고 서둘러 읽어 버린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재독하며 필사까지 다짐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가 떠올랐다. 시간을 훔치는 회색 신사들과 시간을 되찾으려는 모모의 이야기. 회색 신사들은 시간을 절약하면 미래에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기실 우리 어른들도 그러지 않은가. 부모가 되었건 교사가 되었건, 아이들에게 현재를 붙잡기보단 미래를 붙잡으라고, 미래에 보상받으려면 현재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미래는 늘 유예되는 속성을 기본으로 하기에 준비는 결코 끝날 수 없다. 현재에 충만해야 미래도 행복하다. 현재 행복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말을 온 마음으로 들어 주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바로 모모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다. 과거에 얽매이지도 그렇다고 미래에 굴복하지도 않는, 진정한 순간과 영원한 현재를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우리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주자. “시간은 생명이며 생명은 우리의 심장 속에 있다.” 《모모》가 알려 준 시간의 비밀이다. 정용주도 말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시간’이라고. 




❶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소설로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할 뿐 아니라 모더니즘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집필에만 14년이 걸렸고(1913~1927) 분량도 4,000쪽에 달한다. 

❷  정언명령은 임마누엘 칸트가 제시한 도덕의 최고 원리로, 특정 조건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가 절대적이고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도덕 법칙을 의미한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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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자금은 최소 '1구좌 2만 원'이며, 약정하신 금액만큼 첫 번째 월 조합비와 함께 출금됩니다.

· 가입서 작성시 ‘상호’에 재직 중인 학교나 회사명 또는 소속을 입력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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