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호[특집] 동그라미 안에서 | 김지연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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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가 민주주의를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

동그라미 안에서



김지연  r1301@naver.com

초등 교사




월요일 1교시와 금요일 5교시는 창체 시간. 내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두 책상을 교실 가장자리로 밀고 의자를 동그랗게 모아 앉는다. 나는 다이소에서 산 분홍색 알파카 인형을 가져온다. 서클 대화 시간이다. 서클 대화란 회복적 생활교육의 일종으로, 말 그대로 둥글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냥 동그라미만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규칙의 핵심은 동그라미 안에서는 모두가 환대받고 존중받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처음 서클을 지도할 때는 동그라미의 가운데에 서클 규칙 카드를 펼쳐 놓고 함께 읽는다.


•  상대의 말을 비난하지 않고 경청하기

•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침묵으로 참여하기(말하지 않는다고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  서클을 마음대로 떠나지 않고 함께하기

•  서클 안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밖에서 말하지 않기

•  ‘토킹 피스’를 가진 사람만 이야기하기


분홍색 알파카 인형이 바로 우리 반 서클의 토킹 피스다. 손때가 타서 꼬질꼬질해진 인형의 이름은 ‘평화’다. 내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평화에게 인사합시다”라고 하면 아이들은 웃으면서 인형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 그런 다음 둘러앉은 서로에게 “환영합니다”라고 인사를 나누면 서클이 시작된다.


서클의 주제는 그때그때 다르다. 보통 간단한 교실 놀이와 가벼운 질문으로 아이들의 긴장을 풀면서 시작하고, 점점 진지한 대화로 넘어간다. 월요일 서클에서는 지난 주말에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고, 금요일 서클에서는 일주일 동안 생활 모습을 스스로 점검하거나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진다. 감정 카드나 질문 카드를 활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평화’는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시키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평화가 자기 손에 오면 꼭 한번씩 쓰다듬은 뒤 친구의 손으로 보낸다. 물론 한두 명씩은 꼭 인형의 목을 비틀거나 던졌다 받는 등의 짓궂은 행동을 하지만, 내가 “평화를 소중히 다뤄 주세요”라고 요청하면 점차 손길이 조심스러워진다. 아이들은 서클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서클 자리를 만듭시다”라고 하면 신이 나서 책상을 착착착 민다.



함께 우리의 이야기를 짓는 서클


그러나 굳은 표정으로 시작하는 서클도 있다. 바로 갈등 해결 서클이다. 교실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이 한두 명의 사소한 다툼이 아니라 학급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일 때 우리는 또 둥글게 모여 앉는다. 오늘의 서클이 그랬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다퉜는지 양쪽 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들어왔다. 정민이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겋고 소영이는 너무 많이 울어서 소매가 다 젖었다. 왜 아이들은 금요일만 되면 싸울까? 서클 시간이 있는 날이라서 마음 놓고 싸우나? 그것이 미스터리다.


갈등 해결 서클은 일단 듣기로 시작한다.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가 있나요?”라고 묻고, 손을 드는 아이에게 평화를 넘겨준다. 이쪽의 말도 듣고 저쪽의 말도 듣는다. 관계자(?)가 많은 사건의 경우 증언들이 서로 겹치는데, 웬만하면 끊지 않고 전부 들어 준다. 반복되는 말이라도 사건을 자신의 말로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서클에서 배운 점은 바로 싸움의 당사자뿐 아니라 목격자들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교실은 모두의 생활 공간이고, 교실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설령 그게 내 일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폭력을 목격하는 주변인의 고통, 서클은 자주 무시되는 그 고통이 이름과 자리를 얻는 공간이다.


평화가 몇 바퀴나 돌아가는 발언 릴레이가 끝나면 내가 평화를 넘겨받는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정리해서 말해 볼게요. 혹시 잘못되었거나 빠진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그러고서 내 의견은 전혀 덧붙이지 않고 그냥 들은 내용을 줄줄 말해 준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싸운 내용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으면서,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훨씬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을 보며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보통 시비를 걸거나 싸운다는 뜻으로 통하는 ‘공론’이 본래 이런 것이겠구나 짐작한다. 파편화된 나의 고통, 슬프고 답답하고 억울했던 나의 마음이 서클 안에서는 우리의 이야기(公論)가 된다. 나의 이야기를 친구들이 받아 말하고, 선생님이 받아 말한다.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사실관계를 다 파악한 다음에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는 한쪽이 이야기한 내용을 다른 쪽이 그대로 재진술하도록 한다. “게임에서 졌을 때 마음이 어땠나요?” “화가 나기도 하고 이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민아, 소영이가 게임에서 졌을 때 마음이 어땠다고 했나요?” “화가 나고 이기고 싶다고 했어요.” 이때 들은 내용을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의 감정을 내 입으로 그대로 내뱉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가 감정을 털어놓고 난 뒤에는 이 갈등을 해결하고 교실에 다시 평화를 가져올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보통 특별한 해결 방법은 없고 그냥 사과하고 다음부터는 조심하자는 것이 전부다. “먼저 사과하고 싶은 친구가 있나요?”라고 물으면 보통 처음에 제일 씩씩거리며 분해하던 아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든다. 오늘의 경우에는 정민이었다. 여전히 눈에 눈물이 맺혀 있지만 이번에는 미안해서 그렇다고 한다. 서클의 신비한 점 중 하나다. 몇 차례 사과가 오가고 있으면 사건과 별로 상관없는 아이가 갑자기 자기도 사과하고 싶은 게 있다고 손을 들기도 한다. 몇 달 전의 일인데 생각해 보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몇 달 전 일을 사과받고 싶다고 손을 드는 아이도 있다. 그럼 지목받는 아이는 사과를 하고. 싸움은 하나인데 사과하는 아이들은 많기도 하다. 이어지는 사과를 따라 평화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오늘의 서클에서는 이 부분이 특히 잘 되었다. 억울하다고 울던 아이들이 10분 뒤에는 편안한 얼굴이 되는 것을 보며 잠시 마법사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법은 내가 아니라 서클이 부린 것이다. 이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의 이야기를 짓는다. 이곳에서는 말해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고, 사과해도 괜찮고 용서해도 괜찮다. 물론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말이 ‘들릴 것이고’ 모두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아이들은 문득 이 동그라미 안에서는 억울해서 씩씩거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다.



동그라미로 세상을 채우는 민주주의


인성교육, 가치교육, 민주시민교육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관련된 책이나 활동이나 수업 사례들은 더욱 많다. 이 차별과 혐오의 시대를 어떻게 건너갈까? 왜 사람들은 자꾸 멍청하고 나쁜 선택을 할까? ‘저 #$%들’(각자 자신이 경멸하는 집단을 넣어 읽으면 된다)을 대체 어떡하면 좋지? 정답은 없지만, 나는 그냥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옆에 하나 더, 하나 더. 모래알 같은 작은 동그라미들로 세상을 빼곡하게 채우는 상상. 각각의 동그라미 안에는 사회 이론도 없고 재판관도 없고, 다만 작은 인형과 약속 카드 한 장이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수 있다면.


지금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사람들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해서 일어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차별과 혐오는 분명 존재하고 어떤 문제는 대화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둥글게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동체, 상석도 모서리도 없이 모두가 모두를 ‘듣는’ 풀뿌리 공동체가 세상에 충분히 많아진다면 우리는 어쩌면 분하고 억울하다며 울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마침내 마음 놓고 엉엉 울 수 있게 될지도. 분홍색 인형을 무릎에 올려놓고, 콧물을 훌쩍이며 사과하는 정민이와 소영이처럼. 교과서에 나오는 숭고한 민주 시민의 모습은 아니지만, 좀 더 다정한 이웃 시민의 모습으로는 아주 잘 어울린다.


사실 이번 주 내내 나는 우리 반의 소위 ‘금쪽이’인 다은이와 씨름하면서 보냈다. 다은이는 그동안 짝꿍과 잘 지냈던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번 달은 특히 더 심했다. 매 시간마다 짝꿍을 째려보고, 시비를 걸고, 팔꿈치로 툭툭 밀다가 반응이 없으면 물건들을 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3일 동안 다은이를 타이르고 훈계하고 감싸 주고 윽박지르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다가, 오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상을 짝꿍과 떨어뜨려 놓았다. 다은이는 늘 그랬듯 억울하다고 울었지만 반성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 서클의 주제가 된 사건은 다은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은이는 친구들이 대화하고 서로 사과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다가, 마지막 순서에 갑자기 손을 들었다.

“현서한테 미안해요. 제가 자꾸 괴롭히고 팔꿈치로 쳐서요.”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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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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