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바라봐야 한다
-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 22개의 키워드로 보는 교육계 지형》

난다
n23podo@gmail.com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투명가방끈 활동가
나에게 ‘교육’, 교육 의제란 가까운 듯 먼 듯한 이슈다. 청소년운동, 그리고 입시 경쟁에 반대하고 대학 입시를 거부하는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하는 활동은 자주 교육운동의 일부로 분류된다. 나 개인도 교육 문제에 대해 발언할 것을 자주 요청받는다. 그런데도 교육 문제라는 게 의외로 그리 친숙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교육이 어때야 한다’ 이야기할 때면 곧잘 모든 걸 교육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는 결국 청소년들을 어떻게 가르쳐서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교육은 백년지대계’, ‘교육은 미래를 위해 너무 중요하다’ 같은 말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면도 있다. 왜냐면 그런 말들은 교육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거 같고, 그 중요한 교육 안에서 정작 청소년들의 인권과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교육은 인권을 유예하는 말들- “학생은 공부나 해”-이랑 세트로 붙어 다닐 때가 많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교육 이슈는 청소년들의 삶에 중요할 수밖에 없다. 교육 제도나 환경이 어떠한지는 청소년들의 인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교육 자체가 중요한 인권이기도 하다. 우리가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도, 입시 경쟁 폐지를 이야기할 때도 결국 교육운동과 함께할 수밖에 없고, 여러 교육 정책이나 이슈들을 맞닥뜨릴 때도 많았다. 그래서 현재 교육에서 이슈가 되는 것과 역사를 좀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 22개의 키워드로 보는 교육계 지형》을 읽기 시작했다.
의외로 새로운 점이 많았던 키워드들
1부의 제목은 ‘맴돌고 있는가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1부에서 다루는 키워드들은 대학 입시, 고교 서열화, 특수교육, 특성화고, 교원노조 등이다. 적어도 20년 이상 묵은 문제이면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지만 잘 바뀌지 않고 있는 문제들이란 점을 반영한 제목 같았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제는 대학 입시이다. 그만큼 대학 입시가 한국의 교육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이며, 오래도록 묵은 숙제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대입 제도 변천사 및 주요 사건’이라는 표(본문 16쪽)로 30여 년 간의 입시 제도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대학 입시를 떠올리면 많은 게 바뀐 것 같으면서도 얼마나 무엇이 바뀌었는지 체감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며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무렵인 2000년대 중후반에는 입학사정관제가 실시되었고, 내신 등급제가 시행 중이었으며, 수능· 학생부·논술·추천서·면접 등이 모두 반영되는 입시였다. 그 후로도 학생부 종합 전형 등 수시 전형의 확대, 다시 수능 정시 선발 비율의 확대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입시 제도는 굉장히 복잡하게 바뀐 것 같은데 실제로 대학 입시를 겪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이거나 저거나’ 싶기도 하다. 그 이유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인 〈고교 서열화가 만든 계급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자사고·특목고 등에 의한 고교 서열화 문제를 다룬 이 글은 “‘서열화’는 한국 교육의 특징 중 하나이다”(본문 27쪽)라는 말로 시작된다. 변화하는 입시 제도 속에서 그 변화를 실감하기 어려웠던 것은, 결국 무슨 시험을 어떻게 치르든지 줄 세우기는 기본이고 시험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따라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이 계급적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교육 정책이 이리저리 바뀌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못한 채로 변화와 개혁에 대한 피로감만 쌓여 왔다. 입시 제도를 개혁한다고 하며 전형들이 추가되고 새로운 이름이 붙었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해방 이후 입시 제도는 교육적 목적보다 선별과 선발의 기능으로 주목받아 왔다.”(본문 24쪽) 2부에 등장하는 자유학기제 이야기도 대학 입시 및 서열화의 문제와 연결해서 읽게 된다. 처음 박근혜 정부에서 ‘자유학기제’라는 걸 한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또 그냥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혁이 멈춰 선 자리,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글을 통해, 자유학기제에 좋은 취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도입으로 인한 변화도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졌다. 이 글에서 던지는 자유학기제가 왜 확대되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과 그 답은 크게는 대학 입시와 서열화라는 한국 교육에 깔린 그림자를 느끼게 한다.
중학교 현장에서 자유학기제는 교사들에게는 생소하고 과다한 업무를 유발해서 피하고 싶은 일,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당장 평가가 없고 체험이 많아 좋지만 이대로 괜찮을지 불안한 학기로 인식되고 있다.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환영받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정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 본문 131쪽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유학기제가 확대되지 못한 것은 이 정책이 통합적인 변화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아이템으로만 도입된 탓이 크다. 책에서는 “기존 교과 지식 교육에 기반한 입시 위주의 교육 틀을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자유학기제’라는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만 집중을 했다”(본문 138쪽)라고 지적했다.
교육 개혁을 위한 정책들을 보면 비슷한 사례가 많은 것 같다. 예컨대 학생인권 보장 정책 같은 경우에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의미는 교육에서의 관계와 방식의 더 전면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온데간데없이, 정책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시행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변화로 연결되지 못하며, 필요한 인력이나 자원도 배치되지 않아 반쪽짜리가 되고 만다. 하나하나의 정책들의 효과나 의의를 따져 볼 게 아니라, 더 통합적인 정책 수립을 위한 철학과 가치관이 사회적·정치적으로 더 크게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정말 새롭게 다가온 것은 ‘역량’ 키워드를 다룬 글, 〈새로울 것 없는, 하지만 새로워야 할〉이었다. ‘역량’이 비교적 친숙한 단어이면서도, 역량이라는 개념이 교육에서 별도로 정의되고 정책과 교육 과정에 반영되고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역량이라는 말 자체가 예전에는 잘 쓰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더 자주 들리게 된 듯하다. 나는 청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역량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 봤다. 우리 운동에서는 예를 들면 활동에 필요한 역량, 활동가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이러저러한 프로그램과 교육, 토론거리를 고민하자고 하면서 쓰곤 한다. 왜 생소한 ‘역량’이라는 말을 쓸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흔히 쓰는 ‘능력’이라는 개념과 다른 대안적인 맥락을 담으려고 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었다. ‘능력’이 좀 더 개개인이 가진 힘, 때론 ‘스펙’으로 이야기된다면, 역량은 함께 만들어 가는 조건이자 발휘할 수 있는 힘, 환경 속에서 “유기적 관계 맺기를 통해 개인의 수행으로 발현된다”(본문 185쪽)는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육 정책에서 역량이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국가 수준 교육과정은 교과 분절적이고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측면이 있”(본문 184쪽)기 때문에 삶의 역량을 기른다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역량 개념이 인적 자원 개발의 다른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량은 결국 한국 교육 제도에서는 학력이나 학생 개인에게 속한 능력의 다른 이름이고, 도입된 역사 자체도 산업 현장과 노동 시장에서의 필요를 이유로 도입되었다고 하니, 대안적인 지향은 담지 못한 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못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역량 개념에 대해, 그리고 교육에서의 그 의미에 대해 더 논의되고 그 뜻을 살려서 교육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는 데에 참고가 되면 좋겠다.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3부의 제목은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이다. 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인지 궁금했다. 대충 짐작해 보자면, 일단 어디를 보아야 할지부터 논의가 되어야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일까. 교육운동에서 그만큼 어디를 바라볼지부터 이야기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에서 ‘달 보기 운동’을 홍보하던 것이 떠올랐다.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자’고 하는 제안을 담은 캠페인이었다. 우리도 하나하나의 키워드나 정책, 현상을 볼 게 아니라,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우리는 무엇을 함께 바라봐야 할지부터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3부의 첫 글인 정용주의 ‘공정’ 주제의 글은 최근 수년 간 한국 사회를 관통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이며 ‘대단히 복잡한 현상’인 조국 사태 이야기부터 다루고 있다. 조국 사태는 그야말로 우리가 현상과 사건에서 무엇을,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부터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진단을 잘못하면 대응도 잘못될 수밖에 없는데, 조국 사태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과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국 사회와 교육에도 오래도록 잘못된 프레임이 작동했고 비극적인 담론이 확대 재생산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국회 시정 연설에서 “국민들은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 내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학생부 종합 전형(학종) 전면 실태 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고교 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조국 사태에 대한 대응은 정시 확대와 특목고 등의 폐지라는 두 정책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공정한 입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화하면서 ‘수능과 학종 중에 무엇이 더 공정한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조국 사태에 대한 교육계의 대응 역시 수능과 학종 둘 중 어느 것이 다른 하나보다 더 공정하며 불평등을 덜 유발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축소되었다. - 본문 200쪽
‘안전’과 ‘청소년 시민’ 키워드 등에서도, 자칫하면 우리가 교육이라는 주제 속에서 덜 주목하거나 놓치기 쉬운 이슈를 다시 한 번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제안과 함께 교육의 방향을 재구성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안전 담론이 소수자를 덜 주목하면서 인권적이지 않다는 비판”(본문 215쪽)과 “청소년의 고통은 왜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되지 못할까”(본문 224쪽)라는 반문이 대표적이다. 입시 경쟁이 교통사고보다 더 많은 청소년을 죽인다는 말을 어디선가 봤는데, 그런데도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걸 계속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며 미루고 덮어 왔고, 결국에는 교육이 노동 시장에서 ‘쓸 만한 인재’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굳게 박혀 있어서 일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의 장점은 그 ‘누구’에 그동안 교육 주체로 잘 불리지 않아 왔던 이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 시민, 페미니스트, 이주 아동, 장애 학생 등을 교육계의 주요 키워드로 삼은 것은 꼭 필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배경내의 ‘청소년 시민’ 글은 물론, 다른 글들도 교육 현장 속의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읽어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오랫동안 청소년은 교육의 주체이기보다 대상으로 여겨졌고 교육의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차별과 폭력, 권리의 유예가 정당화되었다. 이런 문제를 간과하지 않아야 교육 개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 속의 이름과 단어 몇 개, 교과목 몇 개를 야금야금 손보는 게 아니라, 교육의 목표과 지향을 새롭게 정의하고 길을 내려면 교육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참여하는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대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런 책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제 우리 이쪽으로 같이 갑시다!’ 하고 더 적극적인 제안이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다.
리뷰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바라봐야 한다
-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 22개의 키워드로 보는 교육계 지형》
난다
n23podo@gmail.com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투명가방끈 활동가
나에게 ‘교육’, 교육 의제란 가까운 듯 먼 듯한 이슈다. 청소년운동, 그리고 입시 경쟁에 반대하고 대학 입시를 거부하는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하는 활동은 자주 교육운동의 일부로 분류된다. 나 개인도 교육 문제에 대해 발언할 것을 자주 요청받는다. 그런데도 교육 문제라는 게 의외로 그리 친숙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교육이 어때야 한다’ 이야기할 때면 곧잘 모든 걸 교육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는 결국 청소년들을 어떻게 가르쳐서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교육은 백년지대계’, ‘교육은 미래를 위해 너무 중요하다’ 같은 말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면도 있다. 왜냐면 그런 말들은 교육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거 같고, 그 중요한 교육 안에서 정작 청소년들의 인권과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교육은 인권을 유예하는 말들- “학생은 공부나 해”-이랑 세트로 붙어 다닐 때가 많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교육 이슈는 청소년들의 삶에 중요할 수밖에 없다. 교육 제도나 환경이 어떠한지는 청소년들의 인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교육 자체가 중요한 인권이기도 하다. 우리가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도, 입시 경쟁 폐지를 이야기할 때도 결국 교육운동과 함께할 수밖에 없고, 여러 교육 정책이나 이슈들을 맞닥뜨릴 때도 많았다. 그래서 현재 교육에서 이슈가 되는 것과 역사를 좀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 22개의 키워드로 보는 교육계 지형》을 읽기 시작했다.
의외로 새로운 점이 많았던 키워드들
1부의 제목은 ‘맴돌고 있는가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1부에서 다루는 키워드들은 대학 입시, 고교 서열화, 특수교육, 특성화고, 교원노조 등이다. 적어도 20년 이상 묵은 문제이면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지만 잘 바뀌지 않고 있는 문제들이란 점을 반영한 제목 같았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제는 대학 입시이다. 그만큼 대학 입시가 한국의 교육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이며, 오래도록 묵은 숙제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대입 제도 변천사 및 주요 사건’이라는 표(본문 16쪽)로 30여 년 간의 입시 제도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대학 입시를 떠올리면 많은 게 바뀐 것 같으면서도 얼마나 무엇이 바뀌었는지 체감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며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무렵인 2000년대 중후반에는 입학사정관제가 실시되었고, 내신 등급제가 시행 중이었으며, 수능· 학생부·논술·추천서·면접 등이 모두 반영되는 입시였다. 그 후로도 학생부 종합 전형 등 수시 전형의 확대, 다시 수능 정시 선발 비율의 확대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입시 제도는 굉장히 복잡하게 바뀐 것 같은데 실제로 대학 입시를 겪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이거나 저거나’ 싶기도 하다. 그 이유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인 〈고교 서열화가 만든 계급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자사고·특목고 등에 의한 고교 서열화 문제를 다룬 이 글은 “‘서열화’는 한국 교육의 특징 중 하나이다”(본문 27쪽)라는 말로 시작된다. 변화하는 입시 제도 속에서 그 변화를 실감하기 어려웠던 것은, 결국 무슨 시험을 어떻게 치르든지 줄 세우기는 기본이고 시험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따라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이 계급적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교육 정책이 이리저리 바뀌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못한 채로 변화와 개혁에 대한 피로감만 쌓여 왔다. 입시 제도를 개혁한다고 하며 전형들이 추가되고 새로운 이름이 붙었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해방 이후 입시 제도는 교육적 목적보다 선별과 선발의 기능으로 주목받아 왔다.”(본문 24쪽) 2부에 등장하는 자유학기제 이야기도 대학 입시 및 서열화의 문제와 연결해서 읽게 된다. 처음 박근혜 정부에서 ‘자유학기제’라는 걸 한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또 그냥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혁이 멈춰 선 자리,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글을 통해, 자유학기제에 좋은 취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도입으로 인한 변화도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졌다. 이 글에서 던지는 자유학기제가 왜 확대되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과 그 답은 크게는 대학 입시와 서열화라는 한국 교육에 깔린 그림자를 느끼게 한다.
중학교 현장에서 자유학기제는 교사들에게는 생소하고 과다한 업무를 유발해서 피하고 싶은 일,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당장 평가가 없고 체험이 많아 좋지만 이대로 괜찮을지 불안한 학기로 인식되고 있다.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환영받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정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 본문 131쪽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유학기제가 확대되지 못한 것은 이 정책이 통합적인 변화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아이템으로만 도입된 탓이 크다. 책에서는 “기존 교과 지식 교육에 기반한 입시 위주의 교육 틀을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자유학기제’라는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만 집중을 했다”(본문 138쪽)라고 지적했다.
교육 개혁을 위한 정책들을 보면 비슷한 사례가 많은 것 같다. 예컨대 학생인권 보장 정책 같은 경우에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의미는 교육에서의 관계와 방식의 더 전면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온데간데없이, 정책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시행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변화로 연결되지 못하며, 필요한 인력이나 자원도 배치되지 않아 반쪽짜리가 되고 만다. 하나하나의 정책들의 효과나 의의를 따져 볼 게 아니라, 더 통합적인 정책 수립을 위한 철학과 가치관이 사회적·정치적으로 더 크게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정말 새롭게 다가온 것은 ‘역량’ 키워드를 다룬 글, 〈새로울 것 없는, 하지만 새로워야 할〉이었다. ‘역량’이 비교적 친숙한 단어이면서도, 역량이라는 개념이 교육에서 별도로 정의되고 정책과 교육 과정에 반영되고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역량이라는 말 자체가 예전에는 잘 쓰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더 자주 들리게 된 듯하다. 나는 청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역량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 봤다. 우리 운동에서는 예를 들면 활동에 필요한 역량, 활동가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이러저러한 프로그램과 교육, 토론거리를 고민하자고 하면서 쓰곤 한다. 왜 생소한 ‘역량’이라는 말을 쓸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흔히 쓰는 ‘능력’이라는 개념과 다른 대안적인 맥락을 담으려고 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었다. ‘능력’이 좀 더 개개인이 가진 힘, 때론 ‘스펙’으로 이야기된다면, 역량은 함께 만들어 가는 조건이자 발휘할 수 있는 힘, 환경 속에서 “유기적 관계 맺기를 통해 개인의 수행으로 발현된다”(본문 185쪽)는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육 정책에서 역량이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국가 수준 교육과정은 교과 분절적이고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측면이 있”(본문 184쪽)기 때문에 삶의 역량을 기른다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역량 개념이 인적 자원 개발의 다른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량은 결국 한국 교육 제도에서는 학력이나 학생 개인에게 속한 능력의 다른 이름이고, 도입된 역사 자체도 산업 현장과 노동 시장에서의 필요를 이유로 도입되었다고 하니, 대안적인 지향은 담지 못한 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못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역량 개념에 대해, 그리고 교육에서의 그 의미에 대해 더 논의되고 그 뜻을 살려서 교육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는 데에 참고가 되면 좋겠다.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3부의 제목은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이다. 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인지 궁금했다. 대충 짐작해 보자면, 일단 어디를 보아야 할지부터 논의가 되어야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일까. 교육운동에서 그만큼 어디를 바라볼지부터 이야기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에서 ‘달 보기 운동’을 홍보하던 것이 떠올랐다.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자’고 하는 제안을 담은 캠페인이었다. 우리도 하나하나의 키워드나 정책, 현상을 볼 게 아니라,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우리는 무엇을 함께 바라봐야 할지부터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3부의 첫 글인 정용주의 ‘공정’ 주제의 글은 최근 수년 간 한국 사회를 관통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이며 ‘대단히 복잡한 현상’인 조국 사태 이야기부터 다루고 있다. 조국 사태는 그야말로 우리가 현상과 사건에서 무엇을,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부터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진단을 잘못하면 대응도 잘못될 수밖에 없는데, 조국 사태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과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국 사회와 교육에도 오래도록 잘못된 프레임이 작동했고 비극적인 담론이 확대 재생산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국회 시정 연설에서 “국민들은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 내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학생부 종합 전형(학종) 전면 실태 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고교 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조국 사태에 대한 대응은 정시 확대와 특목고 등의 폐지라는 두 정책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공정한 입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화하면서 ‘수능과 학종 중에 무엇이 더 공정한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조국 사태에 대한 교육계의 대응 역시 수능과 학종 둘 중 어느 것이 다른 하나보다 더 공정하며 불평등을 덜 유발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축소되었다. - 본문 200쪽
‘안전’과 ‘청소년 시민’ 키워드 등에서도, 자칫하면 우리가 교육이라는 주제 속에서 덜 주목하거나 놓치기 쉬운 이슈를 다시 한 번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제안과 함께 교육의 방향을 재구성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안전 담론이 소수자를 덜 주목하면서 인권적이지 않다는 비판”(본문 215쪽)과 “청소년의 고통은 왜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되지 못할까”(본문 224쪽)라는 반문이 대표적이다. 입시 경쟁이 교통사고보다 더 많은 청소년을 죽인다는 말을 어디선가 봤는데, 그런데도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걸 계속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며 미루고 덮어 왔고, 결국에는 교육이 노동 시장에서 ‘쓸 만한 인재’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굳게 박혀 있어서 일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의 장점은 그 ‘누구’에 그동안 교육 주체로 잘 불리지 않아 왔던 이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 시민, 페미니스트, 이주 아동, 장애 학생 등을 교육계의 주요 키워드로 삼은 것은 꼭 필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배경내의 ‘청소년 시민’ 글은 물론, 다른 글들도 교육 현장 속의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읽어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오랫동안 청소년은 교육의 주체이기보다 대상으로 여겨졌고 교육의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차별과 폭력, 권리의 유예가 정당화되었다. 이런 문제를 간과하지 않아야 교육 개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 속의 이름과 단어 몇 개, 교과목 몇 개를 야금야금 손보는 게 아니라, 교육의 목표과 지향을 새롭게 정의하고 길을 내려면 교육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참여하는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대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런 책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제 우리 이쪽으로 같이 갑시다!’ 하고 더 적극적인 제안이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다.